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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9

삼대 기서의 다음은 이거다! 추리 소설의 틀을 넘는 실험적 미스터리

오랫만의 미스터리 추천 소개입니다.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에서 발견한 추천이지요.
이른바 '일본 삼대 기서'는 유명하기는 한데, 솔직히 큰 재미를 느끼기는 힘든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오래 전 동서 버젼의 "흑사관 살인 사건"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고 중간에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그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에 '삼대 기서'라고 불리웠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못하는게 문제일 뿐이지요.
아래 소개 작품 중 두 편은 읽어보았는데, 새롭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했습니다. 평도 그럭저럭이고요. 언제나처럼 이런 리스트는 참고만 하는게 좋겠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미스터리 소설. 그중에는 "도구라 마구라", "흑사관 살인 사건", "허무에의 공물"처럼 '일본 삼대 기서'로 불리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추리 소설이나 탐정 소설의 형식을 뒤엎고, 메타픽션적 요소를 포함한 실험적인 기법으로 쓰인 안티-미스터리 같은 소설이다. 이번에는 그러한 독특한 미스터리 소설을 소개한다.

1. "불타버린 지도" - 아베 코보
- 반년 전 실종한 남편의 수색을 의뢰받은 탐정이, 수색을 하면 할수록 실종자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며, 결국 자신도 도심 속을 헤매게 된다는 기묘한 추리 소설. 도시는 타인만 존재하는 사막으로 묘사되며, 소외된 인간의 압도적인 고독감이 그려진다. 아베 코보 특유의 부조리와 탐정 소설 형식이 절묘하게 융합된 걸작.

2."신기하게도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살인 사건" - 하시모토 오사무 (국내 미출간)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를 읽고 탐정을 찾는 노파. 손녀를 통해 그녀를 찾아온건 탐정과는 거리가 먼 도쿄대 졸업의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주인공은 기토우 가문 옛 당주의 13번째 제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메타 요소가 빛나는 포스트모던 미스터리.

3.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 쓰쓰이 야스타카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추리 소설을 쓴다면? 이 작품이 그 답변. 교외의 서양식 저택 '로트레크'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참극을 맞이한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교묘한 트릭이 숨어 있어, 독자들이 사건을 추리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4. "누구나 할 수 있는 살인/관 속의 쾌락" - 야마다 후타로 베스트 컬렉션 (국내 미출간)
"인간장"이라는 목조 아파트에 이사 온 남자는 방 안쪽에 숨겨진 검은색 노트북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과거의 입주자들이 경험한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인간장"의 기묘한 인간 군상을 알게 된다. 단편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교묘한 장치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야마다 후타로의 필력이 돋보인다.

5. "우부메의 여름" - 쿄고쿠 나쓰히코 
'쿄고쿠도' 시리즈의 출발점이자 쿄고쿠 나쓰히코의 데뷔작.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는 구온지 산부인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친구 추젠지 아키히코(쿄고쿠도)에게 전한 세키구치 타미츠. 그들은 구온지 가문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예기치 못한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요괴, 유령, 철학 등 방대한 지식과 독특한 등장인물이 펼치는 탁월한 괴기 미스터리.

2022/10/20

매혹 -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 김상훈 : 별점 2점

매혹 - 4점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반전 및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폭탄 테러로 일부 기억을 잃은 그레이에게 수잔이라는 여성이 나타나 과거 그의 연인이라고 말했다. 수잔을 통해 프랑스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 그리고 수잔의 남자 나이얼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던 기억을 재구성하지만, 그는 프랑스에 간 적이 없었다.
그런 그레이에게 수잔은 이별의 진짜 이유는 그녀가 '불가시인'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녀는 특별한 '구름'을 만들어내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안 보이게 될 수 있었고, 나이얼은 그런 불가시인 중 가장 뛰어난 능력자로 그레이와 수잔이 있는 곳에 항상 함께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그레이에게 수잔은 불가시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마지막에 나이얼이 썼다는 글을 건네 주었다. 몇개월 전 쓰여졌다는 그 글에 쓰여있던건 테러 이후 그레이에게 일어났던 일 들이었다.


영국 작가의 SF, 판타지 메타 픽션. 400페이지를 조금 넘는 분량이기도 하고, 작가의 유명세를 전해 들은바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 중반부는 상당히 지루했습니다. 수잔과 그레이가 사랑에 빠졌지만, 전 남자친구 나이얼에게 휘둘리는 수잔의 행동과 그러한 수잔의 행동에 사사건건 반응하는 그레이의 행동 묘사가 대부분인데 그레이의 쪼잔함, 사랑한다면서도 나이얼을 놓지 못하는 수잔 모두 짜증만 불러 일으겼던 탓입니다.
분량도 많지는 않지만, 좁은 행간으로 페이지를 온전히 글자로만 빼곡히 채우고 있어서 글 자체의 분량은 다른 장편들 못지 않아서 읽기가 좀 버거웠어요.

그러나 수잔이 나이얼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였던 '불가시인'이라는 정체가 드러나면서부터는 대단한 몰입감을 선사해줍니다. '불가시인'에 대한 설정이 디테일하며 흥미로운 덕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 띄이지 않던 왕따가 일종의 투명 인간이 되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손에 넣는다는 만화를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데, 여기서 '불가시인' 능력은 타고 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도 눈에 뜨이지 않았고,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리는 거지요.
정체가 드러난 이후는 수잔 시점의 경험담 위주인데, 불가시인들은 서로를 볼 수 있어서 자기들끼리 무리를 짓게 되며, 당연히 직장을 다닐 수 없으니 능력을 이용하여 모든걸 훔치면서 살아가고, 병원에 갈 수 없어서 치아는 물론 전체적인 건강이 좋지 않다는 등 상세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설정들이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이 능력을 수잔이 "glamour"라고 부르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수잔을 지배하는 나이얼은 불가시인 중에서도 최고의 능력자로 심지어 불가시인도 볼 수 없었다는건 가장 빼어난 아이디어였습니다. 수잔이 나이얼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둘이 여행을 하는 자동차에 몰래 타고 있었다던가, 심지어 사랑을 나눌 때에도 끼어들었다는 이야기에서는 충분한 설득력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레이는 나이얼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먹혀버렸다는, 즉 그레이의 모든 기억은 나이얼이 만들어낸 픽션이라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결말은 황당했습니다...... 나이얼이 모든걸 창조했다고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어서 '메타 픽션'이라고 불리우는 듯 한데, 저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기억이라는건 그렇게 신뢰할 수 없고 알고보면 픽션과 다를게 없다는 개념 자체는 좋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나이얼의 말처럼, 아니면 수잔의 부모님처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두 기억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아픈 기억도 기억이고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의 기억을 조작, 왜곡하는건 비현실적인 '불가시' 능력처럼 드물지만 있을 수는 있겠지요. 문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지금처럼 나이얼 (혹은 작가)의 말 한마디로 떼우는건 "아 x발, 꿈!" 한마디와 다를바 없습니다. '불가시' 능력처럼 기억 조작 방법이 뭔가 말이 되는 것처럼 설명되었더라면 SF 소설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텐데, 지금은 '메타 픽션'이라는 말로 떼울 뿐이라서 많이 아쉽네요.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점. 불가시인 이야기만 썼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텐데, 기묘한 사랑 이야기에 기억 조작, 거기에 메타 픽션 설정까지 우겨넣은건 영 별로였습니다..딱히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5/01/13

녹스머신 - 노리즈키 린타로 / 박재현 : 별점 2.5점

녹스머신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반니

추리소설, 그 중에서도 본격 추리소설은 체계적인, 나름의 규칙이 존재하는 장르죠. 이 작품은 이러한 본격 추리소설의 규칙을 실제하는 물리학, 양자역학에 끼워넣은 독특한 SF인 "녹스 머신"과 "논리 증발", 그리고 추리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메타 픽션 "들러리 클럽의 음모", 그리고 독특한 암호트릭 중심의 본격 SF "바벨의 감옥"으로 이루어진 중단편집입니다.

발표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온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3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4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부문 모두 1위) 작품으로 국내 번역이 언제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 미스터리"에서의 이벤트 당첨 덕에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관계자 분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완독한 첫 느낌은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작가의 역량이 정말 대단하구나! 라는 것입니다. 추리 소설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추리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 외에도 광범위한 물리학, 양자역학 지식까지 어떻게든 충족시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라 작가의 노력, 탄탄한 지식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네요. 이런 점은 확실히 배워야겠죠. 추리 소설의 규칙을 과학 이론으로 만든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기대했던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고, 작품의 난해한 정도가 지나친 탓입니다. 독자를 의식하고 쓰여진게 아니라 작가의 자기 만족, 취미 활동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에요. 독자를 의식했더라도 굉장히 특이한 독자를 대상으로 했을 겁니다. "파운데이션"의 '심리역사학'처럼 이론에 대해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온전히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소설로서는 더 맞는 방향이었어요.

게다가 "녹스 머신"에서 문헌수리해석, 물리학과 타임머신 관련 이론, 양자역학, 평행 세계 등에 대한 학술적 이론을 빼면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한 중국인이 과거로 돌아가 녹스를 만나고, 그 탓에 녹스가 자신의 십계명을 수정한다'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기대했던 반전도 없고,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고민도 별 볼일 없이 해결되며, 예상했던 결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시시해요. 솔직히 도라에몽의 타임머신 단편들이 더 그럴듯하고 흥미진진하게 타임 패러독스를 다뤘다 생각됩니다.

"바벨의 감옥" 역시 마찬가지. 일종의 격자화된 틀, 그리고 그곳에 배치된 글자들을 이용한 암호 트릭이 전부입니다. 외계 종족과 일종의 텔레파시 싸움을 벌인다는 설정 및 다른 내용은 이 트릭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어서 읽으면서 졸 정도였어요. 트릭도 일본어 세로쓰기 구조를 이용한 것이라서, 일본 외에서는 애시당초 먹히기 힘들고요. 어떻게든 한글화를 시도한 번역자의 노고는 알겠지만 성공한 결과물도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들러리 클럽의 음모"와 "논리 증발" 두 편은 그래도 조금 더 쉽게 읽히며 재미 면에서 더 낫기는 합니다. 일단 메타 픽션인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다른 세 작품과는 다르게 SF는 아닙니다. 본격 추리소설에 대해, 그리고 여러 추리소설 작가들과 그 주인공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독특한 창작물이죠. 추리소설의 화자 역할인 탐정의 파트너들이 소속된 '들러리 클럽'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10번째 인디언 인형"이 추리 소설에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을 놓고 회의를 진행한다는 내용으로,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그것도 본격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정말로 실존한 인물들처럼 묘사된 들러리 캐릭터들 — 특히 악역인 밴 다인 (반 다인), 꼰대가 되어버린 왓슨 — 묘사도 아주 좋으며, 실존했던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 실종 사건을 들러리 클럽과 엮는 시도도 괜찮았습니다. 빅4 등의 다양한 패러디도 볼거리였어요. 마지막 밴 다인의 독살이 뜬금없이 이루어지는 등 정작 추리적인 요소가 기대 이하라는 점은 좀 아쉬웠지만요.

"논리 증발"도 "녹스 머신"보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내용이 풍성해서 완성도는 더 높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이론을 걷어내더라도 전자화된 데이터에 발화를 일으키는 촉매재로 엘러리 퀸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독자에의 도전'이 삽입되어 있지 않은 "샴 쌍둥이의 비밀"이 이용된다는 추리소설 매니아만이 할 수 있는 발상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전개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각기동대"를 연상시키는 전뇌 생명체가 된 유안이 메시지를 남긴다는 결말도 깔끔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평균 별점은 2.5점. 추리소설 매니아가 자신의 역량을 극한으로 발휘한, 지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하고 덕분에 평론가들과 매니아들에게 사랑받을 작품이기는 합니다만 추리, SF 양쪽 장르 모두에서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작가의 이름에 어울리는 작품들은 아니었어요. 저는 "매니아"로서 충분히 즐길 수 있었지만 다른 분들께 쉽게 권해드리기 어렵네요.

2014/12/22

탐정영화 - 아비코 다케마루 / 권일영 : 별점 3점

탐정영화 - 6점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포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사 FMW의 대표이자 귀재인 영화감독 오야나기가 촬영 중이던 최고의 추리 영화 결말 촬영을 앞두고 실종되었다. 영화사 직원과 스태프, 그리고 투자까지 한 여섯 명의 배우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감독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감독이 찍어놓은 96분 분량의 필름을 전제로 범인을 추리해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여섯 명의 배우와 세 명의 조감독, 그 밖의 스태프들은 십 분 남짓한 영화의 결말을 찍기 위해 시나리오 콘테스트를 열고, 누가 범인이어야 가장 그럴듯한 영화가 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출된 시나리오들의 결함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시나리오를 선정하고 영화 촬영을 마치는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장편소설. 데뷔 이듬해에 썼다는 초기작입니다.

위의 줄거리 소개에서처럼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궁지에 몰린 스탭들이 스스로 결말을 짜내는 과정에서 출연자와 제작진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추리가 펼쳐지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동호인들끼리의 추리 게임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결말 직전까지만 감상하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는 점에서요. 이런 점은 "독 초콜릿 사건"의 판박이기도 합니다. 미완성 영화의 결말을 추리해야 한다는 설정은 빙과 시리즈인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와 같고요. 하지만 읽다 보니 전개와 과정은 "허무에의 제물" 같은 안티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런 결말은 어떤가요?"라는 결말이 이어지는 "5인의 탐정가"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미스터리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니 광의의 의미로 볼때에는 작가 후기에 쓰여진 대로 메타 미스터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떠오르지만 다행히 작품의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는데, "영화"라는 소재에 굉장히 충실한 덕분입니다. 초반에 화자인 다치하라(나)가 출연진들과 이야기하면서 영화에 사용된 서술트릭에 대해 설을 푸는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영화에 관련된 정보들이 곳곳에 삽입되는게 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썼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추리적으로도 여러 관점에서의 재미있는 트릭들이 등장해서 풍성함을 전해준다는 설정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더해 진짜 트릭인 극적인 서술트릭 - 첫 장면은 시점적으로는 영화 속 내용이 모두 흘러간 다음의 일이다 - 은 단연코 기발했기 때문에 만족스럽습니다. 소설로도 가능하겠지만, '첫 장면과 똑같은 화면에서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장르에 아주 특화되어 있는 트릭이라 다른 데에서는 흉내내기도 힘들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그 외에도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문제로 지적했던, 결말을 창작해내야 하는 상황의 설득력이 높았던 것도 좋았습니다. 출연자들이 결말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높았어요. 자기가 "범인"이어야 영화에서의 비중이 높아지니 어떻게는 자기를 범인으로 만드는 각본을 들고 온다는 것인데 와 닿을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작품 속 추리는 진상이라고 부를 것이 없는, 픽션의 영역이라는 문제는 큽니다. 출연진이나 제작진 누구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찍더라도 작중에 표현된 대로 "가장 그럴듯"하면 되는 것일 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야부이 센조가 밖에서 사기누마 준코의 방문을 잠그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고요.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 완성된 결과물은 앞서 언급한대로 트릭 자체는 기발하나 그닥 공정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외부에서 모든 제작 과정을 지켜본 "독자"라면 수긍할만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 입장이라면 반쯤은 반칙이라 여길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관객이라면 사기누마 준코가 죽는 시점에서 다쓰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 같거든요. 이렇게 무리한 서술 트릭보다는 주인공 다치하라(나)의 아이디어나 배우 야부우치 젠조의 아이디어가 더 낫지 않나 싶었습니다.

아울러 감독의 실종이라는 상황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픽션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감독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최소한 조감독 한 명 정도는 사기니의 의도를 알려줘서 의도대로 움직이게끔 하는 공작이 추가로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다양한 추리가 펼쳐지게 만드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며 작가의 초기작답게 젊은 청춘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그야말로 좋았던 시절의 행복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추리소설 입문자분들께 추천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나중에 "살육에 이르는 병"을 쓰게 된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