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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31

옥토버리스트 - 제프리 디버 / 최필원 : 별점 2점

옥토버리스트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라는 딸 세라를 유괴당했다. 유괴범 조셉은 가브리엘라의 사장인 찰스 프레스콧이 가지고 있던 '옥토버리스트'와 돈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가브리엘라는 우연히 만나 친해진 펀드회사 대표 대니얼의 도움으로 리스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조셉과 협상에 나서는데...

제프리 디버는 링컨 라임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이 작품은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닙니다. 어딘가의 리스트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했던 기억이 나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무슨 리스트인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36장에서 시작해 1장으로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처음 접했던 방식인데, 소설로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이 역순 전개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구조적 장치로 작용하며, 덕분에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씩 깨지는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실제로는 게임 속 상황이었고, 교회 집사라 선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던 노란 셔츠의 딕슨이 사실은 킬러였으며, 엘레나가 차에 치인 줄 알았던 장면도 알고 보니 연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일종의 반전 요소들은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가 더욱 커져 긴장감을 높입니다. 대니얼이 킬러였다는 첫 번째 반전을 시작으로, 가브리엘라는 대니얼을 잡기 위해 함정 수사를 벌이던 형사였다는 두 번째 반전, 그리고 가브리엘라 역시 다른 조직과 연계된 킬러로 애초에 대니얼 일당을 제거하는게 본래 목적이었다는 마지막 반전으로 이어지거든요.

결말에서는 대니얼 일당은 가브리엘라의 계획대로 조셉에게 살해당하고, 경찰이 가브리엘라의 행방을 놓쳤던건 그녀가 소지품을 쓰레기차에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등 모든 떡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에는 '옥토버리스트'는 대니얼을 유인하기 위해 대충 만들어낸 맥거핀으로 명칭조차 "옥토버 페스트"에서 따왔다던가, 대니얼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했던 ‘프리스턴 솔루션’은 알고 보니 요트 커버 색깔에 불과했다는 등도 있고요.
책 맨 마지막에 수록된 목차의 진짜 제목들이 이런 정리를 도와주는데, 예를 들어 챕터 35의 제목은 ‘대니얼의 무덤’입니다. 대니얼은 이 챕터에서 죽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역순 전개가 반전을 위한 장치로만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설득력을 희생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와 수나리 형사는 이미 가브리엘라가 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작품 중반까지 이에 대한 단서나 암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 돌이켜보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요 반전들이 충분한 복선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가브리엘라가 형사이자 킬러였다는 설정, 대니얼의 정체 등이 대표적인데요. 모두 과거 사건이나 대화 장면을 갑자기 삽입해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반전은 많지만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라가 킬러였다는 반전은 반드시 필요했는지 의문이에요.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져 버린 셈입니다.

또한 프랭크처럼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큰 역할 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보이기는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형식과 실험 정신은 분명히 흥미롭지만, 반전 위주의 전개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전체적인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굳이 찾아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5/30

판사 이한영 - 이해날, 문성호 / 전돌돌 : 별점 2점


드라마도 제작될 정도로 인기있는 웹 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기본 설정은 뻔한 회귀물+복수극이지만, 주인공 직업이 '판사'라는 특이한 차별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정 배경 작품 중에서 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가 주인공인건 처음 접해 보네요. 그 덕분에 법정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한영이 회귀 후, 과거 판결 결과와 사건 진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면서 승승장구한다는 전개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선희는 전 연인 박혁준에게 스토킹당하다가 사망했는데 마침 박혁준이 보험금 수령자이기도 해서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하지요. 하지만 이한영은 박혁준과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의 사촌 김가영이 진범이라는걸 여러가지 주변 증거를 통해 밝혀냅니다. 살인 미수 누명을 쓴 서민훈 사건은, 서민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유성그룹의 음모라는걸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 등으로 증명하고요. 이처럼 추리물에 가까운 구성과 연출이 돋보이는 사건들이 제법 많아서 단순한 법정극 이상의 재미를 줍니다. 이한영의 판결은 대기업 회장이나 강신진 판사같은 빌런에게 무려 '사형선고'를 내릴 정도로  '사이다' 판결이라서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고요.

아울러 판사가 재판을 통해 얼마나 판결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부분은,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는 ‘접대 판사’ 문제와 맞물려 있어서 더 흥미로왔습니다.

이한영의 복수 서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강신진과 장태진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박철우 검사, 로펌 에스로펌 소속의 유세희, 기자 송나연 등 각각의 역할이 분명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잘 그려진 덕분입니다.

하지만 복수가 구체화되어 갈 수록 긴장감과 개연성은 퇴색되어 버립니다. 대부분 사건들이 녹화나 녹취 파일 한두 개나 주요 인물의 배신으로 쉽게, 뻔하게 증명되는 탓이 큽니다.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이런 증거와 증언 한, 두개에 무너진다는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또한 강신진과 장태진 같은 인물들이 직접 범죄에 가담하고, 치명적인 증거를 남긴다는 전개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검사, 경찰도 아닌 판사가 드러난 증거 외의 것에 간섭한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이한영이 에스로펌의 후계 구도에 간섭하고, 장유린 판사와 손을 잡는 등의 불필요한 서사도 거슬렸습니다. 에스로펌을 몰락시키겠다는 의도와 후계 구도에 간섭해서 유세희를 밀어주는 행동은 아무리 봐도 앞 뒤가 안 맞더라고요.
만화적인 과장도 지나칩니다. 법정 장면은 과장되고 고증이 부족하며, 석정호나 박철우 검사의 전투력 묘사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두서없습니다. 강력한 빌런이자 라이벌로 보였던 김윤혁은 일관되게 찌질함만 보여주다가 별다른 활약없이 퇴장해 버리고, 에스로펌의 유선철은 조력자로 나설 듯 하다가 갑자기 흑화하는데 결말도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러브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한영과 유세희, 송나영, 윤슬혜 간 관계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김진아 검사는 뜬금없이 박철우와 엮이는 식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티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구성력과 법정 내외의 갈등 구조,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성과 논리 전개가 약화되면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앞부분에 여러 가지 사건을 배치해서 흥미를 자아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흥미를 잃게 만드는 흔한  법정 드라마와 비슷했어요.

2025/05/25

케임브리지 살인사건 - 케이트 앳킨슨 / 임정희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현대문학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케이트 앳킨슨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잘 몰랐던 작품이지만,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에 선정되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세 개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초반, 한 가족의 뒷마당에서 여덟 살 막내딸 올리비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노환으로 사망한 아버지 빅터의 책상 서랍에서 올리비아의 인형 '블루 마우스'가 발견되자, 이에 의문을 품은 올리비아의 언니들인 줄리아와 아멜리아가 탐정 잭슨 브로디에게 진상 조사를 의뢰하지요. 두 번째는 10년 전, 테오의 딸 로라가 출근했던 사무실에서 노란 골프복을 입은 남자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던 사건입니다. 테오는 잭슨 브로디에게 진범을 찾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세 번째는 산후우울증과 남편과의 불화 끝에, 남편을 도끼로 살해한 여성 미셸의 이야기입니다. 출소한 미셸, 그리고 사라져버린 갓난아이 탄야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지요. 

이 세 가지 사건들 모두 상당한 흥미를 자아냅니다. 중요한 장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솜씨 덕이 큽니다. 빅터의 책상 서랍에서 올리비아의 애착인형이 발견되었다는걸 알리는 장면, 산후 우울증이 극에 달한 미셸이 도끼를 집어드는 장면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후의 사건 전개들 역시 독립적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 주고요. 그래서 한 번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들이 잭슨 브로디를 중심으로 교차되고 얽히며 하나의 큰 이야기로 수렴되는 전개도 좋습니다. 브로디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사건의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나가고, 인물들 간의 숨겨진 관계와 과거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밝혀내는 과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거든요. 브로디 자신의 상처와 삶의 궤적 역시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복잡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탐정 잭슨 브로디와 랜드 자매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한 현재 심정을 드러내는 섬세한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특히 혼란스러운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심리 묘사는 이 소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는걸 잘 보여줍니다.
인물 묘사도 매우 입체적이에요. 등장인물 모두가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고, 그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등장인물들 모두가 마지막에 치유되고 구원받는 서사 역시 납득할 만한 과정으로 묘사되고요. 또한 잭슨과 딸 말리, 잭슨과 노부인 빈키, 잭슨과 랜드 자매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관계도 매력적이며, 말리는 특히나 귀엽고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묘사 덕분에 영국 '인디펜던트'는 “장르를 초월한 복잡한 이야기 구성과 인물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라 평했고, '가디언'은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실은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교한 심리 소설”이라 언급했겠지요.

다만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읽는 독자라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는 단점은 분명합니다. 빅터가 올리비아의 인형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당연히 그가 올리비아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상은 큰 딸 실비아가 그날 밤에 올리비아를 깨워 놀려고 하다가 입을 막아서 올리비아가 질식사했고, 빅터는 올리바이의 사체를 이웃 빈터의 집 정원에 파묻었던 겁니다. 이는 빅터의 성폭행으로 정신분열을 일으켜고 지금은 수녀인 실비아의 증언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빅터가 소아 성애자가 아니라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정신분열 초기 증상을 보이던 실비아가 범인이었을게 뻔해서 의외성도 없고요.
테오의 딸 로라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더 한심스럽습니다. 로라를 쫓아다니던 옛 선생 이웃집 사람이 범인이었다는건데, 10년 뒤에 탐정이 간단한 조사로 알아낸 진상을 왜 당시 경찰 수사에서는 드러나지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셸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셸이 남편 키스를 도끼로 살해한게 아니라, 미셸의 여동생 셜리가 언니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미셸이 갓난아기와 아끼는 동생을 위해 죄를 뒤집어 썼다는 진상은 나름 반전이지만,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냥 캐롤라인(과거에 미셸이었던)의 회상으로만 그려낸 방식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잭슨 브로디를 중심으로 이 사건들이 모두 얽히는 전개는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잭슨에게 줄리아와 아멜리아 랜드 자매가 사건을 의뢰했는데, 이 자매의 옛집이 하필 빅터의 과거 의뢰인이자 지인이었던 늙은 노부인 빈키의 바로 옆집이라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빈키는 자매의 과거 회상 속에서도 ‘마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 잭슨에게 미셸의 여동생 셜리가 탄야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는데, 탄야는 로라 사건의 진범을 찾아달라고 잭슨에게 의뢰한 테오를 구해준 노숙자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임브리지에 탐정이 잭슨 브로디 한 명뿐인 것도 아닐 텐데, 이처럼 모든 인물이 하나로 연결되는 관계도는 너무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미셸이 출소한 뒤 신분을 바꿔 시골 대지주 귀족의 아내가 되었다는 설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사건을 저질렀을 당시의 심리 상태나 이후의 인생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인생 전환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은 탓입니다. 또한 셜리가 20년 이상이 지나서야 탄야를 찾아나선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개연성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세 가지 사건 중 미셸 사건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빈키의 유산 상속 문제로 인해 잭슨 브로디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야기 역시 이야기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는 느낌이라서 빠지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고요.

작품 전반에서 성적인 언급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등장하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등장인물 중 아멜리아의 욕구 불만과 정서 불안은 나름 설명해주지만 그 외에는 상징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적절하게 활용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일 뿐인 로라가 처녀가 아니었다는건 전혀 중요한 정보도 아니니까요.  빅터가 친 딸을 성폭행한 성범죄자라는 설정도 식상했고,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반복되면서 싼티만 물씬 납니다. 마음에 들면 곧바로 섹스부터 한다는 식의 묘사도 지나쳐보였어요. 이게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인 걸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심리 중심의 문학 추리소설로, 인물 묘사와 감정선이 탁월하며 사건 간 연결 구조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추리소설'로는 별다른게 없고,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운 인물 관계나 개연성이 부족한 전개와 과도한 성적 묘사 등은 몰입을 방해합니다.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25/05/24

말단 병사에서 군주까지 - 스토리: doip, 소울풍 / 작화: 2631 : 별점 1.5점

30대 후반 외팔이 용병 크리스는 아티팩트를 노리던 강도단 습격으로 죽기 직전, 아티팩트를 삼킨 덕에 15살, 크리스가 팔을 잃었던 세르카도와 팔문의 전장으로 회귀했다. 회귀 덕분에 팔을 잃지 않은 크리스는, 전생에서 익힌 다양한 기술과 과거의 기억으로 소년병들 신분임에도 대활약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한 단계씩 출세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애니메이션(실제로는 애니메이티드 카툰이라고 해야 겠지만)까지 나왔다는 인기 회귀물입니다. 지난 연휴 때 감상했습니다. 리뷰가 늦었네요.

뻔한 회귀물이지만, 그래도 초반 팔문과의 전쟁은 비교적 인상적입니다. 회귀 이전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던 주인공 크리스가 그 기억을 회귀 후 말단 병사 위치에서 승리의 동력으로 삼는 설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 덕분입니다. 또 팔문의 보급대를 노리는 작전 등 다양한 전략전술을 몰락 기사 케너럭이나 신분을 숨기고 종군 중인 휠켄 등 여러 등장인물들과 함께 선보임으로써, 단순 판타지가 아닌 군웅물의 분위기를 선사해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 전쟁 이후 전개되는 왕당파와 귀족파의 갈등 또한 흥미롭습니다. 초반 최강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벤트하임의 생생한 매력 덕분이지요. 

작화도 초반부는 마음에 듭니다. 선이 동글동글하면서도 전투 장면, 특히 머리와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잔혹한 묘사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전해 주거든요. 액션 연출도 괜찮은 편이었고요.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작품의 매력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크리스와 동료들이 바이스 능력을 각성하면서 계속된 전쟁과 결투를 통해 레벨을 올린다는, 뻔한 전개와 설정으로 일관하며 전형적인 회귀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입니다.
초반에 눈 앞의 전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던 캐릭터들 역시 점차 강한 마물과 싸워나가는 전형적인 판타지 주인공과 조력자들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레벨업을 통해 작중 최강자에 등극하는 크리스는 물론이고, 크리스의 동료들 역시 타고난 힘을 지닌 파워형, 백발백중의 궁수, 달인의 딸로 신속한 여성 검사, 불치병을 앓던 방어 전문 검객 등 설정도 익숙하기 짝이 없고요. 그나마 휠켄 정도만 그런대로 수긍할만한 개별 서사가 선보일 뿐입니다.
작화 또한 뒤로 갈수록 초반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잃고, 일반적인 판타지 웹툰과 유사한 형태로 흘러가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반부는 군웅물과 회귀물 특유의 재미를 잘 결합하고 있어서 3점 이상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뒤로는 뻔하고 지루해집니다. 솔직히 오크 웨이브 이후부터는 어차피 강해지는 크리스가 이길거, 굳이 볼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25/05/18

시계 도둑과 악인들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시계 도둑과 악인들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방주", "십계"로 유명한 신예작가 유키 하루오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집. 전직 도둑 하스노가 탐정역을 맡고, 그의 동료로 화가 이구치가 등장하는 다이쇼 시대 무대의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 작품은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연결되어 있어서 느슨한 연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집의 가장 큰 장점은 기발한 트릭과 추리 구조에 있습니다. 불가능 범죄로 보였던 사건이 논리적으로 해결되는데, 이를 위한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말 그대로 '정통파 추리물'인 셈이지요. 유괴, 밀실 살인, 연쇄살인, 보석 도난, 일상계스러운 편지에 얽힌 과거의 비밀 등 사건의 종류도 다양해서 흥미를 더해주며, 다이쇼 시대의 분위기를 잘 살린 묘사, 인물 간의 대화들도 볼거리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하스노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엘리트 출신의 전직 도둑으로, 굉장히 독특한 사고 방식을 갖춘 천재 탐정이라는 비현실적인 인물을 묘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편 전반에 걸쳐 범인의 동기가 전반적으로 약한 탓에, 와이더닛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이 눈에 띄며, 일부 트릭 역시 과정은 흥미로우나 실행 가능성이나 현실성 면에서 허술함이 느껴지고요. 또한 장황한 묘사로 인해 리듬이 끊기거나, 인물의 심리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하스노가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데, 화자가 이구치가 아닌 단편들에서는 하스노의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도 아쉬웠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로 트릭과 분위기는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추천드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에몬 씨의 미술관"

화가 이구치는 친구 하스노에게 시계 바꿔치기를 부탁했다. 이구치의 아버지가 자산가 가에몬 씨에게 판 시계가 사실은 모조품이었고, 가에몬 씨가 그것을 미술관에 전시하려 하자 일이 커지기 전에 진품으로 되돌리려는 목적이었다. 말로 설득하는걸 포기한 두 사람은 미술관에 잠입해서 직접 바꿔치기를 시도하는데...

이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도입부로는 충분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전직 은행원이자 도둑 출신인 미남자 하스노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좋습니다. 다이쇼 시대를 충실히 그려낸 시대 묘사도 매력적이고요. 별 거 아닌 것처럼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정통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도 괜찮은 편입니다. 가에몬 씨의 알 수 없는 언행 - 왜 미술관을 촌 동네에 만들었는지, 왜 미술관을 세우려는데 전시할 그림을 판매할 사람은 불신하는지, 본인은 그림을 보는 눈이 없다고 했으면서 왜 미술관에 소장품을 전시하려 하는지 - 와, 기묘한 미술관의 구조 - 긴 통로 위의 초가 지붕, 두꺼운 벽돌 담장, 화풍이나 시대순이 아닌 뒤죽박죽 전시 배치 - 등은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한 하스노의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미술관은 마음에 안 드는, 진위가 의심되는 소장품을 화재를 위장해 태워버리려고 만든 건물이었다는 것이지요. 하스노가 화재가 일어날 시점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논리적이라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진위가 의심된다면 단순히 폐기하거나 감추면 되는데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들고 복잡한 과정을 택했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추리는 나쁘지 않지만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악인 일가의 밀실" 

미노다 가의 차남 아키마사가 밀실에서 살해당했다. 미노다 저택에는 장남 유키마사, 장녀 미치에, 막내 아쓰요시, 당숙 아키히코 등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를 증오하는 막장 가족이었다. 아키마사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하녀 아쓰코와 함께 상식인처럼 보였으나, 실은 사기를 일삼던 악인이었다. 사기 피해 배상을 위해 저택을 찾은 하스노와 이구치는 하녀 아쓰코를 도와 밀실 살인의 진상을 밝혀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밀실 트릭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빗장으로 굳게 잠긴 문이지만, 사실 빗장은 애초에 바닥에 놓여 있었습니다. 문은 밀실에 굴러다니던 공구(끌)를 열쇠 구멍으로 실을 넣어 끌어 올린 뒤, 고정쇠에 걸어 잠갔습니다. 문을 부술 때 공구는 바닥으로 떨어져 증거가 인멸되었지요. '고정쇠에 꽉 끼어 외부에서 실 정도로는 움직일 수 없는 빗장'이라는 맹점을 깨고 현실적으로도 구현 가능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또 하나의 장점은 피해자가 유키마사였던 이유입니다. 이 막장 가족 내에서는 죽었을 때 곧바로 신고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유키마사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족이라면 죽든말든 아침까지 내버려 두었을거라는 거지요.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증오로 뭉친 가족을 묘사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 역시 동기의 설득력에 큰 결함이 있습니다. 범행 동기가 고작 '성질 고약한 아버지가 보낸 빗장을 망가뜨린 것을 숨기기 위함'이며, 이를 위해 문을 부술 때 망가진 걸로 위장하느라 밀실 살인을 저질렀다는데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문을 부수기 위해 밀폐했다'는게 목적이면, 그냥 불을 지르고 밀실을 만드는게 더 손쉬웠을거에요. 또한, 이따위 동기를 위해 이렇게 쉽게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윤리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워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인물 묘사도 지나치게 1차원적이라, 악한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만화 속 등장인물처럼 느껴집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하녀 아쓰코도 엿듣기 능력자라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해 존재 이유가 애매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트릭은 인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동기와 평면적인 인물 묘사는 끔찍한 수준입니다.

"유괴와 대설 - 유괴의 장 / 대설의 장" 

이구치의 처형 부부의 딸, 미네코가 유괴되었다. 이구치는 하스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유괴범들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둘은 여러가지 단서를 확보하여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 결국 둘은 미네코를 구해내고 범인 일당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품의 백미는 하스노의 추리 과정입니다. 하스노는 범인들이 남긴 몇 안 되는 단서, 예컨대 은행 영업시간 이후에 편지를 보낸 점, 자정에 몸값을 요구한 점, 현금으로만 요구한 점 등을 근거로 범행의 목적이 ‘집에 있는 특정한 현금’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 결과 집안의 돈 중 위조지폐가 섞여 있음을 밝혀내지요.
범인들이 몸값을 받기 위해 장인을 커다란 굴뚝 위로 유도하고, 올라간 틈을 노려 짐을 훔쳐낸다는 설정은 몸값 회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들이 숨겨놓은 돈을 위조지폐 사이에 넣기 위해 위조지폐를 직접 제작했다는 발상도 참신했고요. 

하스노와 이구치가 좁은 은신처 공간에서 강도 일당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장면도 긴장감과 함께 재미를 전해 줍니다. 제한된 환경 안에서 도구를 활용해 열세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은 영화 "나홀로 집에"를 연상케 하고요. 

하지만 동기에 대한 설득력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범인들이 유괴를 실행한 이유는 위조지폐의 출처가 드러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리에를 살해했고, 일본을 떠날 계획까지 세운 상황에서 굳이 유괴라는 위험한 수를 둘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강도 경험이 풍부한 일당이 원래 방식대로 범행을 저지르고 돈을 마련해 떠나게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니까요. 
아울러, 위조지폐를 만들어 돈을 숨겼다는 것도 참신하지만 설득력이 낮습니다. 

또한, 범인 일당이 두 패로 나뉘어 있었고, 아키야마가 만다를 살해한 뒤 미네코가 범인인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이미 돈을 확보한 상황에서 만다 일당을 제거하려 했다면, 더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와 활극은 인상적인 부분이 있지만, 범행 동기와 일부 전개는 여전히 무리수가 많아 감점합니다.

"하루미 씨의 외국 편지" 

이구치와 하스노는 은인인 하루노 사장을 만났다. 하루노 사장은 하스노에게,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도착한 프랑스어 편지를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자매 사이였던 세 명의 여자가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하스노는 과거를 조사하여 편지에 담긴 진실을 밝혀낸다.

이 작품은 앞선 단편들과는 결이 다른, 잔잔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지닌 일상계 힐링물입니다. 사람 사이의 은혜와 보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이 인상적이네요. 하루노 사장이 겪은 삶의 굴곡 — 처음 교제했던 하루미의 사고사, 이어 그녀의 여동생 쓰키요와의 결혼, 그리고 다시 쓰키요의 여동생 야요이와의 결혼 — 은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설득력있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하루미를 구하려다 불구가 되어버린 프랑스인 샹플랭에게 하루미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하루미의 동생들이 하루미의 삶을 대신 살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아주 그럴싸했습니다. 다이쇼 시대라면 더욱 '보은'에 신경썼으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루노 사장이 쓰키요 사후 겪었던 도난 사건은 야요이와 결혼하려는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추리도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해 줍니다.

다만, 아무리 보은이라도 일생을 바쳐 편지를 보냈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죽기 직전까지 야요이가 하루미인 척하며 샹플랭에게 편지를 썼다는건 감동적이기보다는 억지로 보였고요. 야요이가 하루노 사장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를 조금 더 뚜렷하게 드러냈더라면 감정선이 훨씬 명확해졌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따뜻한 이야기와 독특한 진상 설정은 좋았어요. 마무리만 여운을 남겨주었더라면 더 좋은 점수를 주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미쓰카와마루호의 요사스러운 만찬"

전쟁통에 돈을 번 졸부 히로카와는 '흑조회'라는 괴상한 회합을 열어 왔는데, 이번에는 화물선 미쓰카와마루호에서 호랑이를 요리해 먹기로 했다. 만찬 직전에 고용인 데루에는 손님 미나미의 처참하게 훼손된 시체를 발견하고 히로카와에게 알렸지만, 사체는 사라졌고 히로카와는 이를 함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데루에는 하스노 일행에게 사실을 고백했고, 이들은 함께 배 안을 재조사해 나갔다. 

그들은 미나미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던 신문기자로, 손님 중 누군가를 체포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또 다른 손님 히라이가 살해된 후 하스노는 히라이의 시체 유기 방식을 단서로 삼아 범인을 밝혀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수수께끼 풀이의 정석을 따르는 정통 추리물로서의 재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스노와 독자 모두에게 동일한 단서가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호랑이가 있는 창고를 여는 열쇠 주머니를 옮길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사체를 끌어올릴 수 있는 쇠밧줄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 진범이라는건 독자들도 모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의미해 보였던 요소들이 모두 퍼즐의 일부였다는 점도 인상적이에요. 예를 들어, 미나미의 시신에서 살덩이를 베어낸 행위는 단순히 연쇄살인의 특징으로 여겨졌지만, 실은 그것으로 호랑이를 유인해 창고 안 석탄 자루를 꺼내기 위한 장치였거든요. 배라는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건 전개와, 배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비들을 트릭과 연결시킨 설정은 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빛을 발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구리야마의 의도 — 승객 전원을 살해한 뒤 인육으로 식량을 조달하며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설정 — 는 작품에 섬뜩한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화가 이구치와 그의 친구 오쓰키가 나누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대화도 이 작품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입니다. 여성 시신을 훼손해 예술품처럼 연출한 범인을 예술가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원래 이구치는 '예술은 완전히 무의미하면서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오쓰키는 여성 시신을 훼손한 결과물이야말로 '무의미하고 가치있는 물품'이라서 예술일 수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구치는 성적 욕구 때문에 이렇게 저지른거라면, 배가 고파서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만든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고 대꾸하지요. 목적이 있는건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요. 그리고 성욕과 외설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끝나기는 다소 아깝다 싶을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아예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리야마의 범행 계획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전원을 한꺼번에 죽이려 했다는 설정은 독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인육을 식량으로 삼으려는 계획과는 모순됩니다. 굳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었는지도 설명이 부족해요. 추리적으로는 공정함 측면에서는 완벽하지만, 이 탓에 범인을 특정하기 쉬워진다는 약점도 존재하고요. 

아울러 전반적으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는 구간이 많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이야기의 밀도에 비해 분량이 과도하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완벽한 구성과 재미있는 주제의 대화는 돋보이지만, 범인의 계획과 이야기 구성의 일부는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평균 수준은 됩니다.

"보석 도둑과 괘종시계"

이구치는 집에서 괘종 시계를 도난당하고 친구 하스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최근 주변에서 일어난 루비 도난 사건과 이 사건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전말을 들려주었다. 하스노는 이구치의 설명을 바탕으로 관계자들을 만난 뒤, 치밀한 추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전작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사건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장점이라면 많은 수수께기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첫째, 범인은 어떻게 이구치가 철저히 숨겨놓았던 괘종시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는가? 둘째, 범인은 어떻게 미쓰에의 드레스 세 벌 중 진짜 루비가 달린 드레스만을 알아냈는가? 셋째, 수많은 꾸러미 중 어떻게 루비 팔찌가 들어 있는 꾸러미만 골라서 훔쳐낼 수 있었는가?인데 마치 불가능 범죄처럼 보이지만, 모두 논리적인 설명과 함께 트릭이 밝혀지며 독자에게 추리의 쾌감을 선사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트릭은 루비 팔찌를 훔친 방식입니다. 범인은 팔찌가 들어 있는 상자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자 하나만 강제로 열린 것처럼 만들어 미쓰에의 눈에 띄게 했습니다. 이를 보고 미쓰에는 팔찌가 도난당했다고 착각했고요. 이후 고리짝 안에서 상자가 담긴 귤색 꾸러미가 사라졌다고 매니저 미즈타니가 보고했으니, 결국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또한 이전 단편에서 등장했던 괘종시계나 인물 미네코가 다시 등장해 연작의 흐름을 이어가는 느낌도 좋습니다. 단편집 안에서 세계관이 공유되는건 확실히 읽는 재미를 더해주니까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괘종 시계를 발견한 방법입니다. 옷본을 찾다 우연히 시계를 발견했다는게 진상이라 시시했어요.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고요. 거대한 시계를 훔치는 것 보다 루비만 떼어가는게 빨랐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드레스에 달린 진짜 루비를 판별한 트릭도 역시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해당 드레스만 기장을 늘렸다는 트릭이 핵심인데, 범인이 옷본을 바꿔치기한 방법이나 드레스 수선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무엇보다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범인 미즈타니는 대신 보관하던 귀중한 루비를 가문 장남이 팔아치워서 루비를 훔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비의 디자인과 크기까지 완전히 똑같지 않다면, 단순히 같은 보석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진짜 루비만 골라 훔친 이유도 불명확해요. 겉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면, 가짜 루비로 대신해도 되잖아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수수께끼와 트릭의 구성은 기발했지만, 동기와 설정 면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해 완성도를 떨어뜨립니다.

2025/05/17

Q.E.D Iff 증명종료 2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2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통의 시리즈 28권입니다. 이번에는 "행운", "논점 정리" 두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평균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운"

요식업 경영자 쿠마노 츠요시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돈과 애인을 쿠마노에게 빼앗긴 다테 슈지였다. 그러나 다테 슈지에게는 시간 안에 범행 현장까지 도착할 수 없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입니다. 다테 슈지는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서 범행 현장까지 30분 안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이용하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거나, 똑같이 생긴 피자 배달 오토바이를 곳곳에 배치해두고 오토바이가 있는 장소까지 건물 내부를 뛰어서 이동하더라도 30분 안에 이동은 불가능했다는게 경찰 조사 결과였지요.

여기서 목격자의 '전파 시계' 시간을 조작하여 이동 시간을 확보했다는 토마의 추리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조정하는 '전파 시계'의 특성을 이용하려면 전파가 멈추는 '정파 시간'에 범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쉬운 대낮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까지 깔끔하게 설명되지요. 그 날, 그 시간에 목격자의 전파 시계는 배달을 갔던 슈지만 조작할 수 있었고요.

Q.E.D.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수학적 이론 소개는 없지만, 주로 묘사되는 미즈하라 경부와 가나 사이의 애틋한 관계도 인상 깊었어요.

물론, 어차피 방범 카메라로 이동 경로를 특정하면 알리바이 자체가 의미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방범 카메라로 시간을 특정하면 되니까요. 목격자가 전파 시계의 시간이 갑자기 바뀌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본격, 정통파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로는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정파 시간이라는건 처음 알게 된 정보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논점 정리"

가나의 동급생 어머니인 타니시 마키가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해고 위기에 처했다. 마키가 도움을 요청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나는 우연히 사건 해결을 돕게 되었고, 사건 배후에 회사의 경리부장 후지츠보 토시야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후지츠보가 모든 걸 꾸몄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궁지에 몰리는데...

도입부에서 토막 사체를 등장시키는 강렬한 연출이 나오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후지츠보가 공금 횡령 사실을 마키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목 그대로 ‘논점 정리’를 하며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처음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핵심 논점은 마키가 실제로 횡령했는지가 아니라, '회사가 횡령의 증거를 갖고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증거가 없다면 회사와 강하게 맞설 수 있었지요. 그러나 마키는 토막 사체를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 증거에, 횡령 증거를 스스로 찾으려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이때 토마는 다시 논점을 정리합니다. 마키는 함정에 빠졌다고요. 이 지점에서부터 후지츠보가 횡령의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 나가는 전개는 깔끔합니다.

이렇게 ‘논점 정리’라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구성과 장난같지만 현실적이었던 토막 살인 연출 트릭이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래와 같이 토마와 가나의 관계가 명확히 진전된 듯한 느낌을 준게 오랜 팬으로서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이 정도면 다음 권 정도에서는 본격적으로 고백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기네요.

하지만 후지츠보가 조카의 취업 청탁을 굳이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는 단점은 큽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더라면 마키가 스스로 자멸했을 텐데, 괜히 자신에게도 동기가 있는 듯한 연출을 하며 사람들에게 알릴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연출 방식도 유치해서 금방 들통났는데 왜 이런걸까요? 아울러 추리적인 면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5/16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이지은 : 별점 1.5점

초콜릿어 사전 - 4점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지음, 이지은 옮김, 센주 마리코 감수/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초콜릿에 얽힌 다양한 단어와 정보를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그림 사전 형식의 책입니다. ‘미식 관련 도감’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가끔 눈에 뜨이면 집어드는 AK Trivia Book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초콜릿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거나 혹은 연상되는 단어들을 수집하여 ㄱㄴ순으로 보여주는데, 각 단어에 대한 짧은 설명과 간결한 일러스트가 함께 실려 있어서 시각적인 즐거움을 함께 전해줍니다.

170여개에 달하는 단어를 설명해 주고 있어서 처음 접했던 정보가 많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단무지(다쿠앙)에 초콜릿을 씌워 만들었다는 ‘다쿠앙 초코’라는 기상천외한 조합(괴식일 줄 알았는데 다행히 진짜 단무지는 아니고 '설탕에 절인 무"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두 도시 이야기" 속에서 초콜릿을 대접하는 데 하인 네 명이 필요하다 - 한 명은 초콜릿을 따를 기구를 가지고 오고, 한 명은 초콜릿을 섞으며, 세 번째는 냅킨을 내밀고, 네번째는 초콜릿을 따른 사람 - 는 대사 등이 그러합니다. ‘페레로 로쉐’의 ‘로쉐’가 바위라는 뜻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정보였으며, 판 초콜릿이 뚝뚝 부러지는 모습에서 커터 나이프가 발명되었다는 이야기도 신선했어요.

하지만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들로 구성되어 있어 맥락 없는 지식의 나열에 그칩니다. 일본 현지 중심의 소재가 많아 국내 독자에게는 와닿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무엇보다도 수록 단어의 기준이 모호하다는게 가장 큰 단점입니다. ‘리큐르’와 같이 단순히 함께 마시면 좋다는 식으로 설명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왜 함께 마시면 좋은지 설명을 해 주어야죠. 이렇게 아무런 근거없이 마음대로라면, 초콜릿과 잘 어울리는 과자, 와인, 자동차 등 끝도 없이 소재를 댈 수 있으니까요. '선물', '의리초코'는 수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단어와 내용이었고요.

일본 여성 교육 선구자로 1871년 미국과 유럽 각국을 돌았던 쓰다 유메코가 일본 소녀로는 최초로 해외에서 초콜릿을 먹어 보았을거라는 근거없는 추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에 수록되려면,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와쿠라 도모미처럼 해외에서 먹었던 근거가 명확했어야 합니다. 이런 점들이 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립니다. 

도판, 그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일러스트도 제 취향은 아닌데다가, 대부분의 도판이 작아서 제대로 된 정보를 확인하는게 어려운 탓입니다. 유명 산업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가 1962년 일본 후지야의 루크 초콜릿 로고와 패키지를 디자인했다는 정보는 제법 관심이 갔는데, 도판이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엉뚱하고 흥미로운 정보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방향성과 완성도에서 아쉬움이 많아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25/05/11

화산전생 - 정준, 토마씨 : 별점 1.5점

화산의 장로였던 주서천은 죽은 뒤, 과거로 회귀했다. 주서천의 시대에서 암천회와 무림의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던 탓에, 주서천은 영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암천회의 음모 좌절에 새로운 생을 걸었다.

인기 웹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인기가 많다기에 이번 연휴에 몰아서 완결까지 보았습니다. 

뻔한 회귀물이지만 인기작답게 나름대로 독특한 점은 있네요. 단순한 무공 대결보다는 전략과 정보전이 강조된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암천회는 소문과 거짓 정보를 활용해 무림 인물들을 현혹시키고, 9파 1방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질투심과 자격지심을 교묘히 자극해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꽤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 무림맹과 암천회의 결전은 수천의 병력이 각자 군사의 지휘 하에 지형과 다양한 작전을 활용해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무협지보다는 말 그대로 '전쟁'을 그려내고 있고요.

전통적인 무협의 틀을 벗어나, 기관 전문가와 상인이라는 인물을 주력 조력자로 배치한 점도 특이합니다. 기룡 제갈승계는 초반에는 단순한 기관 돌파 전문가 정도의 역할이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다양한 병기와 기관으로 암천회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참호전 당시 첫 등장했던 기관총을 연상케 하는 그의 활약은 열세인 무림맹의 승리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작 중 대립 상대인 '암천회'의 설정도 괜찮습니다. 비록 숙청당할까봐 두려워 숨어지냈지만,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은 암천의 다양한 재보, 자금과 군대까지 엮을 수 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협물은 황실과 거리를 두는게 보통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설정에 녹여낸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았습니다. 

또한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명쾌해서 고구마스럽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주서천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인간 관계를 - 심지어 여자 관계까지! - 칼같이 정리하는 덕입니다. 주변 인물들도 불필요한 감정선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건 마찬가지에요. 선악의 구도도 명확하고, 악인은 반드시 최후를 맞이하는 단순하지만 시원한 구성도 이야기를 더욱 속도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회귀물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전개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구조이며, 과거의 기억으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최강자가 되는 설정은 지극히 뻔했던 탓이 큽니다. '기연이 있는 장소를 미리 알고 찾아서 확보한다'가 거의 전부거든요. 별 탈 없이 레벨(?)을 올린 주인공이 상대방을 모두 해치우며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무협이라는 장르의 틀을 벗어나 전형적인 판타지물처럼 변모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혈마가 강시를 만들고 시신을 활용해 몸을 바꿔치기하며, 인어와 이무기, 현무, 말하는 독거미 등 이종족(북해빙궁은 엘프더군요)과 몬스터에 이상한 주술까지 등장하는데 무협물이 아니라 혼합 장르물 혹은 마법 판타지로 느껴집니다. 등장인물들의 강함을 일종의 레벨처럼 표현하고, 최강자들의 필살기(심상구현이라 부르는)는 각자 독특한 무공이 한 개씩 있다는 것 역시 전형적인 만화 판타지 세계관으로 보이고요. 뒤로 가면 이게 무협물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나마도 무공이라면 모를까 주서천이 마지막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시간을 되돌리는건 어이가 없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아니고... 주서천의 심상구현인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회귀'로 주서천이 치명상을 입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암천회주에게 한 방을 먹이는 정도가 적당했습니다. 

그 외 전개에서 이상하게 늘어지며 억지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아요. 대표적인게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퇴장입니다. 암천회와의 결전 직전에 무림맹 내부의 다툼으로 처형된다는 전개보다는, 백의종군하여 마지막 대결에 참여하게 했더라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비급과 보물이 과도하게 등장하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전형적인 판타지 회귀물과 별다를게 없고 작화가 심하게 좋지 않아서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별호'가 이렇게 별로인 무협지는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검 좀 쓰면 검성, 검신, 검선, 검마로 돌려막는 식이거든요. 제가 만든 챗봇으로 화산파 장문인 검선 우일문의 별호를 만들어보니 '매영검옹(梅影劍翁)'을 추천하는데, 검선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나 싶습니다.

2025/05/10

너의 퀴즈 - 오가와 사토시 / 문지원 : 별점 3.5점

너의 퀴즈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문지원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퀴즈 최강자를 가린다는 Q1 그랑프리 결승에서 미시마 레오는 도쿄대 출신의 천재인 유명 방송인 혼조 기즈나와 맞붙었다. 팽팽한 6:6 상황에서, 혼조 기즈나는 사회자가 문제를 말하기도 전에 정답을 맞추어 우승했다. 레오와 퀴즈 마니아 동료들은 방송국의 '짬짜미'를 의심했고, 레오는 스스로 조사에 나섰다.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퀴즈 사랑에 대해 반추해 나가던 레오는 결국 이건 '짬짜미'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혼조를 만나 진상에 대해 듣게 되는데...

2023년 제23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신예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작품입니다. 작가의 "거짓과 정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어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책 소개만 보았을 때는 퀴즈 마니아의 퀴즈 관련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퀴즈라는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퀴즈에 대한 진지한 접근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과 전략이 존재하는 진지한 ‘시합’으로 설명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퀴즈에는 '확정 포인트'가 있다고 합니다. 문제 중에 퀴즈의 답을 확정할 수 있는 포인트이지요. 그리고 퀴즈 플레이어는 상대보다 빠르게 답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답을 알고 누르는게 아니라 답을 '알 것 같은' 단계에 눌러야 한다는 등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퀴즈 대회 Q1은 실제 대회를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며, 미시마 레오가 퀴즈를 풀어내는 사고를 세밀하게 그려내어 정말 하나의 '스포츠'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안겨줍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퀴즈 관련 정보들도 실제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등장한 서술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듯해 보일 정도로 잘 설명되고요. 작가는 이런 세심한 설정을 통해 퀴즈가 단지 지식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사고와 감각이 살아 있는 장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퀴즈와 인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이 부분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주인공이 겪었던 경험들이 정답과 우연히 연결되었었는데, 이 작품은 퀴즈의 정답, 아니 퀴즈 자체가  레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인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퀴즈의 정답을 맞힌다는 것은 그 정답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해 왔다는 증거다.'라는 레오의 말 처럼요. 그리고 작품에서는 Q1에서 레오가 맞춘 문제를 통해 레오의 인생을 어린 시절 - 퀴즈를 몰랐던 때 부터 퀴즈에 빠지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 부터 돌이켜보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레오가 퀴즈를 정말 사랑한다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고요. 레오가 알고 있던 ‘일본에서 가장 낮은 산’의 정답이 ‘덴포잔’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히요리야마’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레오는 퀴즈가 '살아있다'는걸 깨닫고, 퀴즈에 대해 더 충실감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는 단순히 지식을 외울 뿐이었던 혼조와 비교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미시마 레오도 호감이 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청년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단지 퀴즈에 대한 애정만으로 잘 하게 되었다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등장인물 뿐 아니라, 작가가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여러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하루의 시간대를 나타내는 단어는 모두 태양의 움직임이 기준인데 심야만 성격이 다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 그리고 그게 퀴즈 정답을 말했을 때의 전율과 엮이는 묘사는 정말 빼어났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물로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답네요. 핵심은 ‘혼조 키즈나가 어떻게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말했는가?’라는 수수께끼 풀이인데, 레오가 과거 영상과 시합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은 긴장감이 넘칠 뿐더러, 작은 단서에 의해 하나 둘 씩 수수께끼가 풀려나가는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재미 또한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 비해 진상 자체는 다소 아쉬움을 남깁니다. 혼조가 퀴즈 프로그램의 본질을 꿰뚫고 문제 출제의 경향을 파악했다는 점까지는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Q1 그랑프리에서는 참가자들이 반드시 정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설정은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혼조가 마지막 문제로 과거 악연이 있는 연출자 사카다와 관련된 문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건 도박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외친 이유가 화제를 유도해 이후 자신의 온라인 및 유튜브 사업 홍보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건 최악이었어요. 레오와 박빙의 승부를 펼칠 정도의 인물이기에, 보다 더 강렬한 철학이나 신념을 기대했는데 너무 세속적인 동기라 실망스러웠어요. 이보다는 혼조가 레오를 만났을 때 해 주었던 이야기 - 아픔을 주었던 '곰의 장소'였던 야마가타가 정답을 알려주어 퀴즈에 진정한 매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 가 훨씬 나았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혼조가 도박을 벌인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결정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진상이 실망스러웠던건 혼조의 묘사가 별로였던 탓도 큽니다. 도쿄대 의대 출신의 천재로 사전을 머릿 속에 집어 넣고 있다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설정도 별로고, 어린 시절 학폭같은 불필요한 서사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서 말한 '곰의 장소' 이야기로 끌고갈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퀴즈를 단순한 게임이 아닌 삶과 연결된 진지한 시합으로 그려내며, 미스터리적 긴장감과 감성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05/09

야당(2025) - 황병국 : 별점 2.5점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마약 수사의 뒷거래
모든 것은 야당으로부터 시작된다!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이강수(강하늘)는 검사 구관희(유해진)로부터 감형을 조건으로 야당을 제안받는다. 강수는 관희의 야당이 돼 마약 수사를 뒤흔들기 시작하고, 출세에 대한 야심이 가득한 관희는 굵직한 실적을 올려 탄탄대로의 승진을 거듭한다.

한편, 마약수사대 형사 오상재(박해준)는 수사 과정에서 강수의 야당질로 번번이 허탕을 치고, 끈질긴 집념으로 강수와 관희의 관계를 파고든다.

마약판을 설계하는 브로커 강수,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관희, 마약 범죄 소탕에 모든 것을 건 상재.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이해관계로 얽히기 시작하는데… (공식 시놉시스)

올해 개봉해서 간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범죄 스릴러극입니다. 연휴에 감상하였습니다. 

좋은 흥행 성적이 이해가 되더군요. 시종일관 관객을 몰입시키는 전개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이강수와 오상재 복수극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유튜브 생중계가 일품이에요. 굉장히 대담하면서도, 구관희와 조훈의 추악한 거래를 전국민에게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 통쾌함을 선사해 주니까요. 생중계를 눈치챈 구관희 일당이 다급하게 블라인드를 내리는 장면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생각되고요. 이 생중계를 마지막 순간까지 감춘 구성은,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으로서의 효과를 극대화 해 줍니다. 

등장인물 설정도 좋습니다. '야당'이라는, 전혀 몰랐던 직업(?)을 주요 소재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에 더해, 검사가 절대악이자 최종 빌런으로 대통령 선거의 흐름까지 뒤흔든다는 설정이 최근 현실과 맞닿아 있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구관희 검사에 대한 약간이지만 나름 복잡한 설정도 잘 그려져 있고, 강하늘과 유해진의 연기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줍니다.

하지만 단점도 뚜렷합니다. 우선 이강수라는 인물의 설정이 다소 납득이 어렵습니다. ‘야당’이라는 직업 특성상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그가, 마약사범들과 경찰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요. 아무리 구관희 검사라는 뒷배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고, 이런 경솔한 면모는 이후 등장하는 치밀한 복수극과도 어울리지 않아서 인물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대선후보 아들로 구관희를 설득해 강수, 상재, 수진의 인생을 망치고 복수심을 품게 만든 조훈은 더 최악이에요. 요즘 시대에, 대선후보 아들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고 막나간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잘 나가던 배우였지만 마약으로 인생을 망친 수진은 뻔한 설정이라 진부했고요.

이강수와 오상재가 꾸미는 작전도 설득력이 다소 부족합니다. 조훈의 마약 투약 장면이 담긴 영상을 USB에 담아 야당 의원에게 전달하려다 실패하는 설정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같은 더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이 있는데 굳이 USB를 사용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든요. 이건 오상재가 체포되는데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듀폰 라이터를 이용한 도청 장치 역시 마찬가지에요. 라이터가 영화 속에서 너무 자주 비춰져서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폐인이 되었던 이강수가 마약을 끊고, 체력을 키워 복수에 나서는 과정은 설명이 더 필요했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 걸맞게 수위 높은 장면들도 다소 과합니다. 마약 복용 후 벌어지는 난교 장면이나 과도한 살인 묘사는 굳이 이 정도까지 노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장면을 빼고 수위를 조절해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다면 흥행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겁니다.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인물 설정의 허술함과 작위적인 장치들, 과도한 수위는 몰입을 저해하지만 재미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 범죄극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05/04

오랫만에 베어스 이야기 : 삼성이 레전드를 살려줬지만, 리빌딩이 답이다.

오랜만에 두산 베어스 관련 글을 씁니다. 올 시즌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개막을 맞이했는데, 시즌 초반부터 실망스러운 경기력이 이어지며 글을 쓰는 것조차 망설여졌습니다. 

 외국인 선수들이 제 몫을 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보다 팀 성적이 떨어진 것은 명백히 투수진의 부상 이탈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곽빈 선수, 홍건희 선수, 이병헌 선수 등 작년 필승조의 핵심 선수들이 이탈한 데다, 최지강 선수까지 부진하며 현재 남은 믿을 만한 불펜 자원은 이영하 선수 한 명 뿐입니다. 

그러나 저 선수들의 부상 대부분은 작년 이승엽 감독님의 투마카세 기용 탓이 큽니다. 올 시즌도 감독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선수 기용으로 팀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고 있고요. 프로야구도 '명장'이라는게 존재한다는걸 올 시즌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김태형 감독님이었다면 최소 중위권 싸움은 하고 있을 겁니다. 김태형 감독님 시절에는 이겨야 할 경기는 거의 이겼었지요. 

사실 KT 루징 시리즈에 이어, 작년에 엄청나게 약했던 주말 삼성전이라 호흡기 떼고 감독 경질이 구체화될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의 위닝 시리즈를 거두더군요. 삼성이 레전드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일부러 패한건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말이지요. 그래도 이번 위닝 시리즈에서는 그간 보아왔던 어처구니없던 투마카세, 타마카세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앞으로도 최소한 아래의 사항들을 지키며 시즌을 운영했으면 합니다.

  1. 필승조부터 명확히 정리하라. 최지강 선수는 현재 필승조가 아닙니다. 작년에 무리하게 등판하다 부상당한 이후로는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영하 선수 외에는 넓게 보아도 박치국 선수만 현재 필승조입니다.
  2. 지는 경기에 필승조를 투입하지 마라. 점수 차가 2점이든 1점이든 지고 있으면 이영하, 박치국 선수는 투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베어스가 경기 후반에 상대 필승조 상대로 역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3. 4점차 이상으로 이기고 있는 경기에도 필승조를 아껴라. 이런 상황에서는 홍민규, 박신지 선수 등 롱 릴리프 자원을 활용하는게 바람직합니다.
  4. 계투진은 누구든, 롱 릴리프 보직을 명확히 한게 아니라면 멀티이닝으로 기용하지 마라. 최근 홍민규 선수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투수진에서 또 부상자가 생기면, 그 책임은 오롯이 감독이 져야 할 겁니다.
  5. 이름값으로 선수 기용하는 일은 삼가하라. 2루수로 기용되며 조금 살아나는 모습이지만, 지금의 강승호 선수가 1군 주전 야수로 계속 출전한다면 2군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의 사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몸값 높은 주전이라도 공정한 평가를 해야 합니다.
  6. 2군에서 콜업된 선수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다른 팀들에는 유망한 젊은 야수들이 꾸준히 출전 기회를 받는데, 왜 우리 팀에는 그런 선수가 없을까요?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7. 초구에 무의미하게 건드려 아웃되면, 페널티를 부여하라. 선수들에게 집중력과 타석 운영, 상대 투수 투구수의 중요성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8. 스트라이크존 밖 공에 대한 탐욕 스윙으로 아웃될 때 경각심을 주어라. 도저히 못 봐줄 스윙으로 삼진 아웃될 때에는 벌금 등 내부 규율을 강제해서라도 선수단 전체에 메시지를 주기 바랍니다.
  9. 조수행 선수는 작작 써라. 앞으로는 제발 대주자나 대수비로만 기용하세요. 타석에 김인태 선수, 아니면 최소한 김민석 선수가 들어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수행 선수를 고집하는건 감독의 직무유기입니다.
  10. 후반 초입에 타마카세좀 그만해라. 김인태 선수를 1, 2점차로 이기고 있다고 6회 쯤에 조수행 선수로 바꾸지 마세요. 우리는 필승조가 약해서 1, 2점차는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조수행 선수가 투입되었다고 1점 더 날 가능성도 별로 없다면, 타선의 강력함을 유지하는게 더 나은 방향입니다. 후반에 얼척없는 대타도 그만 쓰고요.

그러나 이렇게 운영해서 이기는 것 보다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연패를 거듭해서 꼴찌를 해도 좋으니 코칭 스탭과 선수단의 전면 개편이 일어나서 진득한 리빌딩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비록 남은 시즌이 아직 길고, 상황을 반전시킬 복귀 선수가 없는건 아니지만, 어차피 우승 전력이 아닌데 왜 투수진을 망치고, 탐욕 스윙하는 고액 연봉자들의 스탯타를 보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작년에 한 해는 제발 리빌딩하자는 글을 썼는데,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2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신인들이나 꾸준히 기용하면 좋겠습니다. 대타로만 쓰거나 선발로 내보내도 몇 경기 부진하면 바로 제외시키는 운영 방식으로는 젊은 선수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명진 선수는 물론, 김민석, 추재현, 여동건, 임종성, 김동준, 류현준 선수 등이 활약하는 베어스를 보고 싶네요.

2025/05/03

브라이턴 록 - 그레이엄 그린 / 서창렬 : 별점 2.5점

브라이턴 록 - 6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런던의 신문 기자 헤일은 브라이턴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뒤, 자신의 불길했던 예감대로 죽음을 맞는다. 그가 생의 마지막 날에 잠시 만났던 여자 아이다는 헤일이 자연사했다는 검시 소견에 의문을 품고서 단서를 찾던 중, 고인이 죽기 직전 들른 곳으로 밝혀진 스노 식당의 직원 로즈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헤일의 죽음을 설계한 젊은 갱 두목 핑키가 먼저 로즈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로즈는 아이다의 추궁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핑키는 점점 다가오는 아이다의 추적을 피해 자신의 살인을 덮고자 또 다른 범죄를 계획하고, 유일한 증인이 될 로즈의 입을 영원히 틀어막을 방법을 궁리한다(출판사 제공).

오랫만에 묵직한, 500페이지가 넘는 고전 정통 장편 범죄 소설을 읽었네요. 그레이엄 그린이 1938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문학과 범죄의 교차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지요. 영국 남부 해안의 휴양지 브라이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 갱과 주변 인물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죄와 구원, 선과 악이라는 주제를 날카롭게 천착하며, 단순한 범죄 소설을 넘어선 문학성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범죄 소설로도 평가가 높습니다. "CWA 선정 100대 범죄소설"에 46위로 선정되었고, 2010년 타임즈(The Times)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범죄 소설 50선”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우선 1930년대 영국 휴양지 브라이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싼티나는 쾌락과 범죄가 넘쳐나는 타락의 도시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등장 인물 역시 브라이턴 못지 않게 생생하게 그려지며, 그 중 압권은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소년 핑키입니다. 술도 못 마시고 여자도 모르는 미성년자가 어른 여럿을 수하에 두고 아무런 죄책감없이 사람을 죽이는 과정은 섬뜩함을 자아냅니다. Brighton Rock의 유튜브 검색 결과에서 Pinkie's first appearance가 가장 먼저 뜨는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건 확실해 보입니다.


그 외에도 핑키에게 푹 빠져 타락하고 마는 순진한 소녀 로즈, 탐정 역할을 자임하는 중년 여성 아이바, 핑키의 부하 스파이서와 커빗, 최초 피해자 프레드 등 주요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상세하고 생생합니다. 

범죄극으로서도 뛰어난 편입니다. ‘프레드의 사인을 경찰은 왜 자연사로 판단했을까?’라는 미스터리도 등장하니까요. 진상은 핑키 일당이 프레드의 입에 '브라이턴 락' 사탕을 쑤셔 넣어 급사하게 만든겁니다. 의도한건 아니라서 트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앞서 핑키 일당의 주무기는 면도날이라는 언급을 계속 해 주었기 때문에 일종의 서술 트릭으로 읽혔습니다.
아이바의 끈질긴 탐문 수사, 그리고 몇 안 되는 핑키가 남긴 단서도 공정하게 공유되며 마지막 아이바의 일격은 추리적인 재미를 더합니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 역시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특히 반전이라 할 수 있는 핑키의 욕설 레코드가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과연 '구원'이라는게 가능할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반면 단점도 존재합니다. 핑키가 로즈와 결혼할까 말까 고민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장황하고 지루했습니다. 또한 핑키가 술을 못 마시고 여자를 모른다는 설정도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다소 지루하고요. 또한 이런 묘사들이 핑키를 철없는 소년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도 문제입니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들을 부리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조직 우두머리'라는 핑키의 독특한 존재감을 희석시키는 탓입니다. 핑키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부족해요. 별다른 완력이나 두뇌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카리스마도 없는데 어린 나이에 범죄조직 우두머리가 되었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프레드의 죽음에 대한 핑키의 두려움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미 경찰이 자연사로 판단한 사건에 몇 가지 단서가 더해졌다고 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핑키의 '두뇌'에 심대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만 들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카톨릭의 구원과 타락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나, 교인이 아닌 독자로서는 크게 와닿지 않아 흥미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교인이었다 하더라도 다소 낡은 논의였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타락한 도시와 범죄 조직, 도덕의 경계를 주제로 한 설정과 상세한 묘사는 좋지만, 개연성과 몰입도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많이 지난 느낌입니다. 

2025/05/02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이노우에 마기 / 이연승 : 별점 2점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4점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론 사업 벤처기업 탈랄리아 직원 다카기 하루오는 어린 시절 형의 사고사를 방조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다카기는 최첨단 조사용 드론 아리아드네의 3세대 모델인 SVR-3가 채택된 지하도시 WANOKUNI 개막식에 참석하는데, 마침 그날 지진이 일어났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사히 대피했지만, 붕괴와 침수가 계속되는 지하 5층에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이 생존자가 헬렌 켈러처럼 시각, 청각, 언어 모두에 장애가 있는 나카가와 히로미라는 점이었다. 물이 완전히 차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여섯 시간뿐으로, 다카기는 동료들과 함께 유일하게 지하에 접근할 수 있는 드론 아리아드네를 원격 조종해 생존자 수색과 구조에 나서는데....

일본 작가 이노우에 마기가 쓴 재난 구조 SF 소설입니다. 구조라는 테마에 첨단기술과 장애인이라는 소재를 결합한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존 재난소설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탈출극 추천'이라는 리스트에서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구조 과정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듬뿍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드론'을 활용하여 헬렌 켈러와 똑같이 시력, 청력 및 대화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지하 도시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설정 때문이지요. 그래서 '드론'은 '촉각'과 '후각' 만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해서 아리아드네는 향수를 내뿜어 도착을 알리고, 점자 카드가 포함된 구호 물품을 투척하며, 장착된 하네스(유도용 와이어)를 잡게하여 경로를 안내합니다. 또 이러한 설정들은 단순한 SF 상상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구조 과정의 설득력을 더해줍니다.

작품의 배경인 지하도시 WANOKUNI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에너지 보존과 탄소 배출 감소, 지진 대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지하 건설의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드론을 활용한 물류 시스템, 개인 맞춤형 서비스, 광덕트를 통한 자연광 유입 등 매력적인 기술들이 상세하게 소개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통신망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드론 조종이 가능했던 원리, 드론의 무선 충전 방식 등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구조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WANOKUNI가 정치적인 이유로 활성 단층 위에 건설되었다는 설정도 괜찮았고요. 

재난 구조 소설답게 구조 과정에서 벌어지는 위기 상황들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진으로 인해 구조용 드론이 추락하고, 지하 4층 스파 구역에서 발생하는 누전, 폭주하는 지게차들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들, 그리고 다카기가 폭로 유튜버의 드론에 맞아 아리아드네의 통제권을 놓치는 장면까지, 하나하나의 위기들이 정교하게 쌓여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울러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히로미가 조명 스위치를 작동시키거나, 쥐떼를 감지하고, 돌진하는 지게차를 스스로 피하는 등, 의아한 행동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정말 시각을 잃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이 수수께끼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상 - 히로미가 사실은 도시에 추락했던 다른 장애인 미도리를 업고 있었고, 모든 기이한 행동들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반전 - 은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요. 아울러 이 진상은 광덕트 붕괴와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진 이유, 이유를 알 수 없는 배낭의 열기 등 여러 복선들과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정교함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난 생존물로서 치명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 대상자인 히로미가 아니라 드론 조종자인 다카기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인물의 긴박감을 그리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카기는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드론을 조작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래서야 일종의 1인칭 슈팅게임과 별다를게 없지요.

또한, 서사의 일부 전개는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예컨대, WANOKUNI 입주식 날 하필 지진이 발생한다는 설정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 맞춘 듯 합니다. 평소대로 일상생활을 하다가 지진이 발생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구조 활동 중에 온갖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다카기, 그리고 계속해서 민폐를 끼치는 니라사와의 모습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특히 장애가 있는 동생을 계속 잃어버리는 니라사와의 행동은 짜증을 유발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애인을 구조하는 독특한 설정과 드론 기술의 활용, 그리고 정교하게 짜인 반전은 매력적이지만, 긴박감을 살리지 못한 시점 선택과 작위적인 전개는 아쉽습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