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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3

살인자의 선택 - 에드 맥베인 / 박진세 : 별점 2점

살인자의 선택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애니 분은 일하던 주류 판매점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구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쾌활한 여자인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주의자인지, 누군가의 정부이고 만나는 남자하고 모두 자는 방탕한 여자인지, 플라토닉한 연애를 즐기는 순수한 여자인지, 장애인 청년의 말벗이 되어주는 박애주의자인지..
경찰은 그녀의 전남편, 정부, 애인들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편, 악덕 경찰 하빌랜드가 강도에게 살해되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스티브 카렐라는 30분서에서 이동한 형사 코튼 호스의 실수로 용의자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는데...

87분서 시리즈 신작 장편(신작이라 함은 국내 소개 기준입니다)입니다. 

87분서 시리즈답게 수사 과정의 디테일은 마음에 듭니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수사의 모범이랄까요. 또 팔색조 매력의 피해자 여성 애니 분 설정도 좋아요. 그녀의 전 남편, 애인, 친구들 모두에게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기묘한 캐릭터로, 제목인 "살인자의 선택"은 그 중 하나였다는 설정인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일본 만화에서는 히로인일 팔색조 슈퍼 우먼이 단순한 피해자라니! 시대를 앞서간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대로 마무리되기에는 아이디어가 아깝다 싶을 정도에요.
애니 분 외의 캐릭터들 묘사도 좋습니다. 그녀의 딸 모니카 분에 관련된 묘사들 - 특히 버트 클링과의 밀땅과 재치 -도 아주 귀엽고, 이번 이야기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코튼 호스의 데뷰도 아주 강렬하거든요. 코튼 호스의 첫 실수는 정말이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후 시리즈에서도 가끔 언급될만한, 그런 이야기니까요.

작가 특유의 묘사력, 상상력도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승강기 운전원이 수사 중인 버트 클리에게 하는 대사가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밖에 비가 오는 줄도 모릅니다. 빌딩 안 승강기에 8시 부터 저녁 5시까지 묶여있기 때문이지요. 점심도 빌딩 안 지하층 골방에서 먹고요. 때문에 그는 자기와 도시 사람들을 "두더지"라고 묘사합니다. 아이솔라는 현대판(작중 시점으로) 마굴이고, 모두 그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는건데, 지하와 실내만 오가는 상황만 놓고보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인지 굉장히 와 닿네요. 더위나 추위를 끔찍하게 그려내어 아이솔라라는 도시를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로 느껴지게 만든 전작들에 비하면 좀 부드러운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명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일 뿐, 단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완전히 꽝이에요. 애니 분 사건은 전개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 '괴편지'를 찾아낸 것이 해결 방법의 전부입니다. 전체 250여페이지 분량 중 마지막 10페이지 분량에서 해결되어 버려서 허무하기가 이루 말할데 없어요. 이 편지의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또한 운전면허 등록증 서명이 필적 감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상황도 어설픈데,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을 준비한 범인이 충동적으로 자필 편지를 써서 스스로 범행을 드러낸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곁가지로 삽입되어 전개되는 하빌랜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상 강도와의 다툼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상황도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범인 찰스 페터릭의 행보가 여러모로 황당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그는 도난 차량을 도색하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본명과 주소를 기입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 정직 그 자체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때문에 찰스 페터릭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꼼꼼한 수사가 바탕이 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여지는 전무합니다. 백번 양보해도 경찰까지 살해한, 도주 중인 강력범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코튼 호스도 영 별로입니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인기를 노리고 투입한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요. 감식반에서 감식반원 피트와 말다툼하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가 느껴지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의자를 체포하러 갔을 때는 노크를 한다?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기없는 악덕 경찰을 퇴출시키고, 인기가 있을만한 새 캐릭터(코튼 호스)를 등장시키라는 편집부의 요구 사항이 뭔가 부족한 이야기에 결합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이야기 완성도가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차라리 애니 분의 독특한 매력을 극대화시켜 다른 작품으로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15/03/12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별점 3.5점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처음 읽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싶네요.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요.

아울러 책 뒤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형식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이야기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수록 작품이 워낙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네요. 아울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 수수께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수수께끼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 -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핵심입니다.

때문에 좋은 미스터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발상은 괜찮았습니다.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 금고털이를 체포했던건 사실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이 겹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그것도 비 오는 상황이라는 걸 특정해서!)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와 잎에 묻은 이물질을 통해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라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행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넜다"는 핵심 트릭도 좋았고요.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 정원사의 일탈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예상 가능한 전개지만, 시대를 앞선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를 시험하기 위해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주는데, 능력자의 평가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자신이 쓴 메모로 바뀌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초능력자의 분석은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검사는 그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들을 활용하여 실제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거든요.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받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에 휘둘려 이십여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데, 백여 년 전 이야기임에도 인터넷상 자칭 전문가나 SNS 루머 등으로 판단을 내리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 안에 숨겨 놓은 비밀 서류 도난 사건을 다룹니다.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 기반 추론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독특한 수사 방식이 돋보이며, 동시에 속물적이고 유쾌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의 의뢰로 15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단서로 펼치는 추리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한 단편이 연상되더군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 뿐. 하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영수증을 통해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이유까지 밝혀냅니다.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추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다만 전개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자인 두 연인 민카와 페파, 그리고 화자인 소우체크의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꼭 필요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몰입해 자신을 바꿔가는 배우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랑자처럼 바꾸어 버린 탓에, 결국 시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봐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사건으로 감사관에게 적발당하고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경감 '나'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1. 헬렌카의 시선을 잠시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는 쉽게 훔칠 수 있었다는 점
2. 시선을 돌리려면 전보나 소포를 보내야 했다는 점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르두비체에서 대거 발송되었다는 점
4. 파르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 중인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고, 주소 오류로 반송되었다는 점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독관이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전근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애인이 익명으로 그 사실을 고발해 감사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상계 추리물로도 수준이 높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벌인 일탈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씁쓸한 결말도 매우 인상 깊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2024/06/15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살인의 쌍곡선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야카와 혼자서 운영하는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에 회사원인 예비 부부 교코와 가쓰로, 역시 회사원인 야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야코, 범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이가라시, 택시 운전사 다지마가 초대되었다. 누군가 설상차를 망가트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야베를 시작으로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는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원에 사선을 그은 기묘한 부호가 그려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하야카와, 교코, 아야코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되어 경찰과 취재 기자들이 곧바로 찾아왔지만, 관설장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으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 니시무라 교타로의 초기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명성에 걸맞는 여정 미스터리, 기차 시간표 트릭이 활용되었었던 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고립된 공간에서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당한다는 점, 그 때마다 볼링핀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설정은 거의 똑같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했다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와 같은 질낮은 졸작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덕분입니다. 특히 '고립된 호텔에서 범인은 투숙객들을 전부 죽이고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트릭이 일품이었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범인 하야카와 형제는 쌍둥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호텔 지배인으로 변장하고 투숙객들을 살해했지요. 그리고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외부에 흘려 경찰과 기자들이 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기자로, 처음에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호텔로 달려왔지만 호텔 앞에서 은근슬쩍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남아있던 범인이 기자인 척 했던 겁니다. 지금 읽어도 그럴싸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앞서 작가가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을 사용했다'고 직접 밝히고, 본문에서도 쌍둥이 고시바 형제가 강도 행각을 벌이지만 경찰이 체포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호텔 연쇄 살인 사건과 겹쳐 진행시켜 트릭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활용한 쌍둥이 트릭 이야기는 하야카와 형제 탈출 트릭이 아니라 고시바 형제 사건에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시바 형제의 강도 행각과 형제를 뒤쫓는 경찰과의 밀땅도 재미있었고요. 
참고로, 이 트릭은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에 사용되었던 트릭과 같습니다. 당시 모 드라마와 표절 시비가 있었던 듯 한데, 애초에 특별히 오리지널임을 내세울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네요....

여기에 더해, 아야코가 범인임을 의심하게 만든 초대장 필적과 유서 - 초대장은 이가라시가 필적 감정을 한다며 모두에게 쓰게했고, 유서는 첫 날 일종의 내기 결과에 따른 자필 문장이었을 뿐 -를 확보한 방법, 다지마가 스키를 부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 등도 괜찮았습니다. 아야코 범인설을 보도하여 하야카와가 기자를 사직하게 만든 결말-진짜 기자가 아닌 가짜였으니-까지 안배한건 보통 솜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호텔에 갇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심리가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교코는 약혼자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각 등장인물들의 매력도 제대로 그려져있지 못합니다. 깔끔하고 담백한건 좋지만, 이 작품은 너무 과했습니다.
범인 하야카와 형제가 이런 거창한 범행을 벌인 동기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만원 전철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니지만, 무려 6명(정확하게는 7명이지만요)을 살해할 정도의 동기인지는 설명해 주었어야 합니다. "상복의 랑데뷰"처럼요. "상복의 랑데뷰"는 짤막하게나마 연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려주고, 그 뒤 이어지는 복수극 과정에서도 1인칭 심리 묘사를 삽입하여 복수와 범행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지요. 이 작품도 그런 묘사가 반드시 나와 주었어야 했습니다.

고시바 형제가 벌인 강도 행각도 소소한 부분들은 억지스러웠습니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고 범행을 저지를 필요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서 형제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요. 쌍둥이라서 당장 체포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체포는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고시바 형제도 복수 대상이어서 강도짓을 제안하고 체포되게 만든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으며, 고시바 형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하야카와의 가면을 벗기는 마무리도 작위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없지만,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졸작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의 좋은 작품입니다. 명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분량도 짧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03/27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김윤정 : 별점 2.5점

잠자는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영국으로 온 그웬더는 남편 자일스가 오기 전, 보금자리로 힐사이드 저택을 구입했다. 그런데 그녀는 집에 대해 알아갈 수록, 자신이 그 집에 대해 이미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웬더는 남편이 없는 동안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남편의 사촌인 유명 소설가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를 찾았다가 미스 마플을 만났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연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후, 미스 마플에게 급작스럽게 떠오른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 힐사이드에서 헬렌의 시체를 보았던 기억이었다.

미스 마플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인터넷 도서관에서 e-book으로 대여해 읽었죠.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의 별점은 3.5점입니다. "공략"에서 이야기하듯, 미스 마플의 존재감이 상당히 희미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실제로 사건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건 그웬다와 자일스 부부거든요. 그웬다가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진상을 둘이 함께 파헤친다는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미스 마플의 비중과는 별개로, 이야기는 재미있고 쑥쑥 읽힙니다. 특히 초반부, 그웬다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묘사가 왠만한 호러물 저리가라 할 정도인 덕분입니다. 그래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겨자색 침실 벽을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로 바꾸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뒤, 침실에 있는 오랫동안 열지 않은 붙박이 장을 열고 난 뒤의 묘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붙박이장 안 쪽만 겨자색으로 덧칠이 되지 않고 '새빨갛고 작은 개양귀비꽃과 수레국화가 번갈아 피어 있는 무늬의 벽지' 상태로 남아있었거든요. 아, 이건 정말 영상으로 봤다면 아주 기가 막혔을거 같아요.

미스 마플도 비중에 비하면 활약은 확실해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명탐정으로서의 역할부터 제대로에요.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추리는 물론, 세세한 추리들 모두 돋보입니다. 그웬더가 기억하는, 선장이 2명이었다는 말을 통해 두 번의 긴 항해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난간 위가 아니라 난간 사이로 홀을 내려다 보았다는 말을 통해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이라고 추리하는 식인데 모두 합리적이에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웬더를 죽이려는 케네디 박사를 층계참으로 뛰어 올라와 비눗물을 뿌려서 퇴치한다는 액션까지 선보입니다. 할머니 특유의 친화력과 풍부한 휴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요.

추리물로서도 꽤 볼만한 편입니다. 대단치는 않아도 설득력 넘치는 트릭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헬렌의 메모가 진짜인지 필적 감정을 할 때, 케네디 박사가 제공한 편지와 필적 견본 모두 본인이 써서 제공한다는게 첫 번째 트릭입니다. 덕분에 메모는 진짜인걸로 일단 판명나죠. 간단하면서도 실현 가능한 트릭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릴리가 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열차가 아니라 한 시간 전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서, 케네디 박사가 알려준 역 전의 역에서 내렸는지에 사용된 두 번째 트릭도 괜찮습니다. 진상은 박사가 살인을 저지른 뒤, 원래 주었던 편지를 없애고 수정된 시간과 장소가 적힌 편지를 남겨놓았을 뿐입니다. 덕분에 경찰은 이 상황을 릴리가 박사를 만나기 전, 누군가를 협박하러 갔다고 오판합니다. 그럴듯하죠?
헬렌이 옷을 가져갔지만, 드레스는 가져갔지만 드레스와 셋트인 벨트와 슬립은 두고 가는 등 조합이 안 맞는다는걸 드러내는, 여성 특유의 관찰력이 돋보이는 장면도 좋습니다. 미스 마플의 추리는 아니고 하녀 릴리가 알아낸 것이지만요.

아울러 살인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는 충고도 돋보였어요.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라면, 지역 토박이인 정원사 등이 몰랐을리 없다. 즉, 모두에게 숨긴 완전범죄였기 때문에, 지금 그 사건을 파헤치는건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크리스티 여사의 또다른 작품인 "누명"이 연상되는 충고죠. 모두가 잊기를 원하고 잊혀졌다면, 그대로 놔 두는게 맞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참고로 잠자는 살인이라는 멋드러진 제목은 이 충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래전 살인 사건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잠자는 살인으로, 자게 내버려 두는게 낫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와 별 상관은 없지만 딜머스에 가기 위해 주치의 닥터 헤이독에게 바닷가 휴양을 조언해 달라고 우길 때의 티격태격도 재미있었습니다. 미스 마플이 과거의 살인을 파헤치러 가기 위해 "딜머스에서 2, 3주일 지내는 것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겠죠?"라고 물어보자 "당신의 임종이 가까워 올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인데, 닥터 헤이독이 이렇게 기지가 넘치고 위트있는 인물인지는 몰랐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읽기에는 쉽다는 문제가 좀 큽니다. 부부가 미스 마플의 충고를 무시하고,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새어머니 헬렌의 오빠 케네디 박사를 만나는 초반부에서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탓입니다.
케네디 박사는 새어머니 헬렌은 다른 남자와 도주했으며, 아버지 핼러데이는 급격히 건강이 좋지 않아져서 요양소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 독자들은, 이런 증언은 피해자는 새어머니이며, 켈빈 핼리데이 소령이 아내를 살해한 뒤 시체를 처리하고 도망갔다고 오해하기 만들기 위함이라는걸 금방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소령이 범인이 아니라면, 소령이 케네디 박사에게 찾아가 살인을 고백하고 함께 돌아왔을 때 시체는 어디갔을까요? 또 헬렌이 다른 남자와 떠났다고 믿게끔 짐을 챙기고 그에 대한 메모를 남긴건 누구일까요? 그리고 헬렌이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몇 개월 뒤 전해졌다는 편지는 누가 보냈을까요? 이 조작을 한 인물은 동일 인물일겁니다. 자일스의 말처럼 핼리데이가 범행을 저질렀지만 은폐할 속셈이었다면, 케네디 박사를 찾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핼리데이는 살인을 했을지언정, 은폐 시도와 관련된 조작을 하지는 않았다는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케네디 박사일 수 밖에 없죠. 현장에 있었고, 현장 조작 및 시체 은닉, 핼리데이의 증언 위조 등이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동기는 이 단계에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동생에 대한 집착 같은 이유였겠지요. 헬렌이 남자와 떠난다는 메모는 나중에라도 준비할 수 있으니, 시체를 어떻게 없앴는지만 고민하면 됩니다. 이건 아마 변경된 집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게 뻔하며, 결국 기묘한 정원 계단을 파헤치면서 사실로 밝혀집니다.

이렇게 초반에 주어진 정보만으로 진상은 모두 추리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케네디 박사 등장 이후에는 부부가 헬렌과 관련되었던 3명의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초반에 던져준 정보가 너무 확실하며, 이 세 명 중에서도 살인을 실제로 저지를만한 인물은 월터 페인밖에 없어서 눈길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스킨 소령이 헬렌과 사랑에 빠졌다 한들 그는 유부남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재키 애플릭은 사랑을 훼방놓은 케네디 박사와 월터 페인을 살해하면 모를까, 헬렌을 살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 지역 내 명사인 의사와 변호사 월터 페인은 그렇다쳐도, 어스킨 소령과 재키 애플릭, 어스킨 소령 부인은 밤에 무덤을 파는게 레어니에게 발각되었다면 빠져나기가 쉽지 않았을거에요. 심지어 재키는 식사에 초대도 받지 못할 정도의 불청객이었죠.
이렇게 범인 후보를 늘리기 위해 월터 페인을 거미에 비유하고, 그가 어린 시절 장난감을 망가트린 형을 거의 죽일 뻔 했다는 등의 묘사를 덧붙인다던가, 어스킨 소령 부인의 극렬한 질투심을 표현하는 등으로 수상쩍게 만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억지스러운 묘사는 오히려 범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들게 만들더군요. 제가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긴 많이 읽었나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의자를 늘리는 전개 탓에 일관성도 좀 없어요. 예를 들면, 미스 마플은 한 사람의 증언만 들으면 안되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야 한다는데 그 말에 따르면 헬렌은 문란한게 맞습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문란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에 그녀는 그냥 호기심 많은 처녀였을 뿐이라고 얼버무리는건 여러모로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시대를 초월할만큼 좋은 작품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발표된지 80여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미스 마플의 팬이시라면 읽어보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사님의 다른 걸작들부터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여사님이 직접 뽑은 본인 작품 베스트 10이 더 좋은 선택일거에요.

2016/07/04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어니스트 브래머 / 배지은 : 별점 2점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4점
어니스트 브래머 지음, 배지은 옮김/손안의책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눈먼탐정 캐러더스"라는 제목의 자유 추리문고로 접했던,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 중 한명인 캐러도스 시리즈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과 겹치는 작품은 2편밖에 없네요(하서판 걸작선에서 읽었던 "브룩벤드 장의 비극"까지 포함하면 3편이지만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좋은 작품들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별로인 탓입니다. 고전 황금기 작품답지 않은 수준이에요. 어떤 작품은 비약이 너무 심하고("디오니시우스의 동전" 등), 어떤 작품("나이트크로스 신호등 문제" 등)은 단서 추적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브룩벤드 장의 비극", "틸링 쇼 미스터리" 두 편은 괜찮지만 양적으로 부족해요.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던 "추리적으로 그다지 정교한 장치는 없다. 이야기의 논리는 합리적이지만 세밀한 복선이나 반전 없이 한방향으로 흘러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에 기복이 별로 없고 드라마도 재미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사건이 시시하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너무나 한심스러운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울러 캐러도스의 능력에 대한 과장이 너무 심합니다. 제목 그대로 장님이기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오감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거든요. 인쇄된 신문도 손끝으로 만져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너무 작은 글씨는 무리라서 비서에게 낭독을 부탁한다지만). 거기에 막대한 재산, 경찰 수사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위에 더해 심장 고동소리를 듣고 명중시킬 수 있는 총솜씨까지! 이 정도면 "데어 데블"에 필적하는 능력자이지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마블 혹은 DC 코믹스에서의 활동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추리 소설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간과한 느낌입니다. 탐정의 개성에 집중하면 잠깐 흥미거리야 될 수 있겠지만, 오래 가기는 힘들죠. 노래 실력 없이 유행과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아이돌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국내에 소개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다른 셜록 홈즈의 라이벌보다야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졌으니 아주 실패한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디오니시우스의 동전"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으로 접했던, 탐정 칼라일과 캐러더스가 처음 만나게 되는 시리즈 첫 단편입니다. 전설적인 명탐정이 첫 등장한다는 것 외에 딱히 언급할 만한 장점은 없으며,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하다는 단점만이 도드라집니다. 칼라일이 가져온 동전을 캐러더스가 이전에 만져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시스토크 경이라는 것 뿐입니다. 동전의 진위 여부를 감정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헬렌 브루네시가 니나 브룬이라는 가명을 계속 써가며 하녀로 일한다는건 추리의 영역도 아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이트크로스 신호등 문제"

"그때 성공을 갈구하는 내 욕망의 잔에 자네의 조롱을 가득 들이붓는 거야." - 캐러더스가 칼라일에게 도와줄 것을 약속하며 하는 말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작은 주택이라도 정부의 합법적인 약탈로부터 안전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 주식 투자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는 캐러더스에게 답하는 파킨슨의 대답

나이트크로스 역에서 발생한 중앙 교외선의 충돌사고로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관사는 통과 신호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신호원은 정지 신호를 바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칼라일은 기관사 허친스 씨의 의뢰로 조사에 나선 뒤 캐러더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진상은 신호등을 바꿔치기한 범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게 과연 사립탐정이 나서서 수사했어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두 명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제3자의 조작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 보는 것이 상식이니까요. 캐러더스의 추리도 거의 없고, 탐문 수사에 의지하는게 전부입니다. 

마지막에 드리슈나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라면 이런 인정을 베풀지 않았을 겁니다. 악당은 지옥으로 가야죠. 또 범인에게 유서도 없는 자살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체 불쌍한 기관사는 어떻게 풀어줄 셈인걸까요?

딱 한 가지, 범인 드리슈나가 수십 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되려 영국 정부와 군대가 인도의 죄 없는 수천 명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논리로 자신이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장면만큼은 인상적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보면 놀라울 정도죠.

"당신은 당신의 정부와 군대가 내 나라의 죄 없는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래도 저 한 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역부족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브룩벤드 장의 비극"

크리크와 결혼한 여동생 밀리센트의 생명이 걱정된 홀리어는 칼라일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현장 조사를 나간 캐러더스는 크리크의 트릭을 눈치채고 범행을 벌일 날짜를 예측하여 잠복하는데...

이런 저런 앤솔러지 등에서도 접해본 나름 대표작입니다. 범인이 공들여 만든 과학적인 트릭이 돋보이지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뒤처졌으며, 범인 크리크가 이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세공을 많이 했다는 단점은 있지만 발표된 시대를 감안하면 큰 단점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충분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먹혔을 테니까요. 의외성 있는, "사랑과 전쟁"을 연상케하는 막장 결말도 아주 괜찮았어요. 지금 읽어도 낡아보이지 않으며, 크리크의 행동도 살짝 이해할 수 있게 만들거든요.

낡긴 했지만 대표작다운, 읽을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리한 스트레이드웨이트 부인"

"어떤 상황에서 누가 뭘 할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지니는 단 하나의 특성만 연구하면 된다는 것이었지." - 캐러더스가 칼라일에게 추리법에 대한 단상을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하는 말.

"원의 호가 아주 작더라도 그 호를 가지고 전체 원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 하인들은 아는 게 거의 없을 거라는 스트레이드웨이트 부인의 말에 대한 캐러더스의 답.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으로도 읽었던 작품. 다시 읽어도 유치하고 조잡한 사기극입니다. 자기 물건이 아닌 물건으로 보험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잃어버린 척 하고 보험금을 타낸다는 건데 발표 당시에는 먹혔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습니다. 부부의 잘못이 크지만 보험사가 과연 이렇게 허술하게 보험을 가입해 주었을지도 의문이고요.

또 목걸이를 잃어버린 척 위장한 것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5천 파운드를 편취하려는 사기 행각이니까요. 그런데 남편이 목걸이를 반납하려 했다손 치더라도(그것도 의사를 처음부터 밝힌 게 아니라 캐러더스의 강압에 못 이긴 것), 이를 캐러더스가 받아들인 것은 엄연한 직권 남용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언급할 게 별로 없습니다. 캐러더스가 부인 장갑의 향수 냄새가 다른 것을 눈치채고 진상을 알아낸다는 것만큼은 캐러더스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지만, 문제는 이 정보가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범죄라 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부르주아 상황극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배우 해리의 마지막 업적"

루카스 스트리트의 사설 대여금고 회사는 런던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매니저만 아는 암호를 먼저 제출해야 하고 그 뒤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여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여금고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단편집에서 돋보이는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진상도 합리적이에요. '범인이 변장하여 12개의 금고를 임대하여 열쇠를 복사하고 반납한다. 이후 아내를 통해 매니저 장부를 몰래 사진을 찍어 암호를 알아낸 뒤, 소유자로 변장하여 방문한다'는 것인데 꽤 그럴싸합니다. 캐러더스의 불에 타지 않는다는 호텔 (결국 화재로 전소해버린)에 대한 견해도 인상적입니다. "그 호텔이 화재에 안전하다고 확신한 조심성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만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해리의 아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건 운과 우연 덕분이었으며, 변장이 만능처럼 사용된건 문제입니다. 아무리 변장이 특기라도 해도 한두 명도 아닌 열 두명을 변장했다? 무리입니다. 마지막에 범인 해리가 교회 간증회에서 구원을 얻어 훔친 물건을 모두 되돌려 준다는 결말도 어처구니가 없었고요.

또 캐러더스가 범인이 미국인일 것이라고 추리한 이유도 비합리적입니다. 현대 미국의 영민하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그를 기발한 장치의 전문가로 키워낸 것이라고? 이건 뭔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중 몇 안 되는 본격 추리물인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틸링 쇼 미스터리"

매들린 휘트마시는 캐러더스에게 아버지 윌리엄이 재산 때문에 오랜 분쟁이 있어온 조카 프랭크를 쏘고 자살했던 사건의 진상 조사를 부탁했다. 프랭크는 운 좋게 주머니 속 시계에 총알이 박혀 살아났었다. 그녀의 몇 가지 증언 - 아버지 서랍 속 총이 사라졌었던 것, 두 번째 총성은 조금 약했던 것 - 을 토대로 캐러더스는 사건을 재수사해 나가는데...

조금 올드하지만 '팜므 파탈'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매들린 캐릭터가 돋보였고, 지나칠 정도로 운이 좋은 프랭크에게 의심이 가게끔 하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우선 매들린부터 살펴보자면, 프랭크가 나쁜 놈이기는 하지만 일말의 죄책감 없이 캐러더스를 이용하여 그를 살인범으로 만드려는 조작을 벌이는 전개가 예상 외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당시 추리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굉장히 활동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생각됩니다.

또 매들린의 조작에 의해 프랭크가 범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결국 최초 알려진(거짓말같은) 진상이 진짜이며, 의뢰인의 의뢰 후 독자에게 공유된 증언과 증거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것 역시 시대를 앞서간 전개였고요.

물론 프랭크의 시계가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긴 합니다. 캐러더스는 여기서 진상을 알고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눈치챘지만, 독자는 시계를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끌려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아주 신선하고 놀라운 요소가 많기에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파운틴 코티지의 소동"

"사람들은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상황들을 운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버리곤 하지요" - 엘시가 최근 닥친 불운을 이야기하자.

칼라일의 사랑하는 조카딸 엘시 부부에게 이웃집에서 콩팥 요리를 정원에 던졌고, 멀쩡한 정원사가 저렴한 가격에 일하겠다고 자원하는 등의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캐러더스는 이 모든 일에 숨겨진 진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데...

일종의 일상계. 사실 지금 읽기에는 좀 뻔합니다. 원래 이 집의 집사였던 옆집 남자는 이 집에 세들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원래 이 집의 정원사였던 남자가 싼 값에 정원을 가꾸어 주겠다고 자원한다면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집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독자에게 보물 찾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주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책인 "돔 너머의 화염"이 독자에게 제공되지 않기에 암호문을 푸는 재미는 전무하고 그냥 캐러더스의 설명에만 의지하고 있거든요.

그 외 콩팥을 던진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에 더해, 도움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염치없는 엘시 캐릭터는 정말이지 호감을 갖기 어려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한마디로 그냥저냥한 소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어둠 속의 게임"

"귀도는 외국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악인 이탈리아인이었다." - 귀도에 대한 소개 중. 발로텔리에게 분노한 영국 팬이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편파적이라 외려 인상적이군요.

비델 경감이 X 백작부인의 의뢰로 중요한 서류를 훔친 귀도 일당의 체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흔쾌히 허락한 캐러더스에게 대영 박물관에서 귀중한 동전이 도둑맞았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이후 정체 모를 이탈리아 여인이 귀중한 동전을 발굴했다며 찾아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인 "디오니시우스의 동전" 사건에 등장했던 위조범 동피에르, 그의 부인 니나 브룬이 등장하여 단편집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식 구조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건은 별게 없어요. 동피에르와 니나 브룬이 동전을 미끼로 캐러더스를 유괴한 후, 귀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두려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후 납치된 캐러더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은신처를 정전시킨 후, 제목 그대로 어둠 속에서 납치범들과 대치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이래서야 추리물보다는 모험물에 가까와 보입니다.

때문에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비델 경감이 어떻게 은신처를 덮쳤는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의 약점만 도드라질 뿐이에요. 비록 캐러더스가 입구에 흔적을 남겼더라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또 과연 어둡다 하더라도 맹인 1명에게 2명, 아니 3명(니나 브룬까지)의 악당이 꼼짝없이 털리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캐러더스의 액션(?)이 펼쳐진다는 점은 놀랍긴 합니다. "데어데블"의 선구자격인 작품이랄까요. 어둠 속 클라이맥스의 긴장감도 대단했고요. 추리물로서 가치는 거의 없지만 만화 같은 극적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장님 슈퍼 히어로물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