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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할거 없어서 몰아본, 요새 핫한 넷플릭스 액션 영화 3편

"그레이맨" 

한줄평 : 돈을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넷플릭스에서 사상 최고액 (2억 달러)을 투자하여 제작했다는데, 솔직히 망작입니다.

거대 조직에 의해 킬러로 키워졌지만 그 조직에게 배신당한다는건 너무 흔한 설정이었고,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는 CIA 부문장이 자기 친구이자 사설 용병단 리더인 로이스를 시켜 식스를 뒤쫓게 하는 전개 역시 특별한 반전을 찾아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전개에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전 팀장이었던 피츠로이가 뒷통수를 한 번 쳤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던가, 자기 경력이 제일 중요했던 미란다가 식스와 갑작스럽게 힘을 합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미란다가 도와줄걸 확신한 것으로 보였던 식스의 행동 - 로이스의 총구 앞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는 - 도 이해가 되지 않고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돈을 많이 투자했기 때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류의 영화에서 특별한 설정이나 이야기를 기대하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액션 장면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시종일관 액션이 이어지기는 하는데, 화끈함과 기발함 모두 평이한 수준입니다.

그나마 도심을 가로지르는 '트램'과 추격하는 자동차들이 겹치는 액션이 펼쳐지는 프라하 도심 추격 씬은 볼만합니다. 복잡한 무대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트램 지붕에 올라간 식스가 트램이 지나가는 건물 유리창을 통해 트램 내부의 적 위치를 인지하고 총으로 쏘는 장면처럼요. 피츠로이와 그 조카를 왜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조카 클로이 앞에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나타나는 모습은 전형적인 클리셰이기는 하나 꽤 멋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데,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게 거대한 제작비를 썼다는 겁니다. 로저 코만이 이야기했던 대로, 2억 달러를 썼으면 2억 달러를 쓴 티가 확실히 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카터"

한줄평 : 액션은 좋은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악녀"등의 작품으로 액션 영화의 장인으로 거듭난 한국 감독 정병길의 신작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각본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카터가 왜 기억을 잃고 소녀를 찾아 나서는지, CIA는 왜 남의 나라에서 무리한 작전을 펼쳐가면서까지 소녀를 확보하려 하는지, 북한 쿠데타 세력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되는건 하나도 없습니다. 카터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고, 누구랑 왜 싸우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도 독특한 촬영과 액션은 괜찮았어요.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를 하나의 씬으로 찍은 듯한 촬영인데, 중간중간 무리수가 보이기는 해도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촬영과 결합된 액션도 화끈하기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레이맨"보다는 화끈하지만, 더 잔혹하고 더 말이 안됩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작품이에요.

"R.R.R"

한줄평 : 어이는 없지만 재미는 있었다.

인도산 액션 영화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를 무대로 인도 독립 운동가 두 명 - 빔과 라주- 의 활약이 그려집니다.

가장 눈에 띄는건 액션입니다. 화끈함을 넘어서 과장이 정말 심하거든요. 초반 불타는 강에서 빔과 라주가 위험에 처한 소년을 구하는 장면을 필두로 하여 기존 상식과 물리 법칙을 뛰어넘는 액션이 난무합니다. 단 둘이서 활과 창만으로 영국 총독의 군대를 쓸어버리고 총독부 관저(?를 날려버리며 총독마저 없애는 결말의 액션 장면이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여기에 액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영화 특유의 뮤지컬스러운 노래와 군무가 빠지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이 안되기는 하는데, 재미있게 보기는 했습니다. 두 친구의 고민도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고, 권선징악이 명확한 이야기 구조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우리나라로 따지만 백범 김구 선생이 각시탈로 나와서 일본군을 쓸어버리다가 마지막에 일본 총독마저 없애버린다는 영화인데 이런게 재미가 없을리가 없잖아요? 어이없는 액션도 흥을 돋우는 요소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누구에게나 권해드릴 수는 없지만 취향이 맞으신다면 꽤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9/11/02

대한제국 황실 비사 - 곤도 시로스케 / 이언숙 (신명호) : 별점 3점

대한제국 황실 비사 - 6점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언숙 옮김, 신명호 감수/이마고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궁내부 사무관으로 특채되어 이왕궁에 입궁한 뒤 각종 궁내 대소사의 실무자로 일했던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입니다. 일본인 시각에서 한일 병합과 이왕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지요. 대한제국의 황제가 이왕가로 격하되며 겪게 된 온갖 수모가 일본인 시각에서 담담하게, 하지만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망국의 왕가로서 당연히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수모겠지만, 이를 '대일본제국' 신민의 시각으로 바라본 글을 읽자니 굉장히 기분이 묘해집니다.

심지어 저자 곤도는 일본인이지만 이왕가에 대한 충심도 갖춘 인물이라는 점에서 내용이 무척 기묘한데, 곤도의 이러한 성격 덕분에 진짜 매국노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을사5적 중에서도 최고의 악질이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완용을 기억하고 있는데 곤도의 시각에 따르면 한일병합의 1등 공신은 윤덕영입니다. 병합 외에도 매국노 역할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로 설명됩니다. 특히 순종의 도쿄 방문에 대한 이야기는 곤도 마저도 '자작의 잔혹하고 악랄한 수단'이며 '극도의 모욕을 준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에요. 나라를 침략한 일본인이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조선 매국노라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습니다.
또 이완용 후작보다는 송병준 백작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론을 환기시키고 움직이는 능력이 출중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더러운 친일파들이기는 마찬가지만 이래서야 이완용 혼자 너무 독박을 쓰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앞으로 친일파를 욕하는 자리가 있다면 윤덕영과 송병준의 이름도 꼭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한일 병합에 따라 겪는 치욕적인 역사 한 가운데에서 당시 곤도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겪었던 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압권입니다. 대표적인게 윤덕영의 활약(?)으로 성사된 순종이 일본 천황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경성에서 부산까지 특별 열차로 이동하고,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시모노세키에서 나고야를 거쳐 도쿄에 도착하여 천황을 만난 뒤 교토, 미야지마, 시모노세키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의 일정별, 장소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친왕의 일본 유학과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 대조전 화재와 그에 따른 대조전 중건, 고종 사망과 뒤따라 벌어진 만세 운동, 고종의 능묘를 선정하는 문제 등 소개되는 이야기들 모두 실무 책임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이 중 만세 운동은 고종 황제의 국장을 일본 예법 형식을 강조해서 촉발된 것이며, 무저항주의 민중운동이라고 정확히 서술하는 등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눈에 뜨이는 점입니다. 가장 큰 이유가 한일 병합이라는 점을 간과하고는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요.

또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제법 많습니다. 조선에서 '목마 사업'을 운영했었다는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수원역 근처에 목장을 조성하여 운영하였으며, 데라우치 총독이 특히나 관심을 가지고 원조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무척 새로왔어요. 궁내부 운영의 여러가지 디테일도 재미있었는데 특히 매달 왕에게 5,000원, 왕비에게 2,500원을 친용금으로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밖에도 정기적인 용돈이 6만원 이상, 임시 용돈이 2만원 이상이었다니 상당한 금액이지요. 1927년 1원의 가치는 2010년대 기준으로 3만원 ~ 6만원 사이라고 하니, 중간값인 4만 5천원이라고 해도 매월 2억이 넘는 금액을 수령한 셈입니다. 왕비까지 합치면 3억이 넘고요. 나라는 망했어도 호의호식은 했겠구나 싶네요.

시간 순서에 가깝기는 하나 이야기 전개에 두서가 없고, 과연 이런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인상적인 독서였습니다. 한일 병합, 일제 강점기 초창기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외의 다른 사실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생각되거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3/13

앙코르와트 - 후지하라 사다오 / 임경택 : 별점 2.5점

앙코르와트 - 6점
후지하라 사다오 지음, 임경택 옮김/동아시아

주석, 인용, 참고 문헌 포함하여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앙코르와트의 '발견', '발굴', 그리고 '연구와 관리' 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대한 분량만큼 담고 있는 정보는 알찹니다. 책은 19세기 후반, 앙코르와트의 문물을 프랑스에 소개한 들라포르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일종의 보물 탐사와 같은 느낌으로 유적의 문물을 반출한 인물입니다. 식민지의 주인인 프랑스가 유적을 보호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약탈꾼에 불과하지만, 앙코르 유적의 미적 가치가 높다는걸 서구 사회에 알린 공적은 있습니다. 직접 쓴 저서와 삽화는 물론, 평면도 등을 바탕으로 유적의 조화로운 구조를 잘 알린 덕분이지요. 또 발굴되거나 발견된 조각을 가지고 상상하여 그가 그려낸 바이욘 사원의 복원도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당시 고고학 수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연구였다는 점에서 노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 해요. 만국 박람회에서 유적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등 이 유적을 알리는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했다는 것도 그의 노력을 증명하는 사례이고요.

들라포르트 사후 소개되는 내용은 주로 '극동학원'의 활약상입니다. 앙코르 유적의 연구를 주도적으로 행한 단체로, 유적의 총 책임자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이 된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이는 프랑스가 고고학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과거를 소생시키고, 중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했기 대문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할 때, 한반도와 중국 북부에 걸쳐 대규모의 고고학 조사를 진행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극동학원 초기 프랑스인의 태반은 고고학자도, 미술사가도, 학자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군인이나 관리와 건축가가 식민지 고고학에 매료되어 경력을 쌓아나갔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네요. 이 뒤로부터 세데스, 골루베프 등 주요 인물들과 반테아이 스레이 유적 등에 대한 연구 결과 등 극동 학원에 관련된 대한 수백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설명이 이어지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이후, 일본이 잠시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했을 때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지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책에 따르면 극동학원의 연구는 묻혔던 유적을 새로이 발굴하고, 폐허를 보수하는 등 유적 보존 등에 나름 기여한 긍정적 결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을 관광객 등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는 등의 도굴과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네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상납이라던가, 일본과의 고미술품 교환을 통한 미술품 확보까지 행하였고, 심지어 유명 작가인 앙드레 말로조차도 1923년 23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를 방문하여 유적에서 몰래 부조물을 잘라내어 밀반출하려다 실패했다는 일화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몰염치와 야만에 치가 떨릴 뿐입니다. 말로가 체포되어 재판에서 패소한 이유는 극동 학원의 독점적 지위를 훼손했기 때문일 뿐, 그 행위 자체가 비난받은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조선 등을 식민지로 지배하여 비슷한 원죄가 있는 일본의 학자가 견지하여 책을 썼다는게 조금은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발견과 발굴,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들라포르트 이야기는 모험탐험 이야기와 별 다를게 없고, 연구를 거듭해가며 새로이 정체를 드러내는 앙코르 유적의 여러가지 정보들과 새롭게 발견된 멋진 유물들, 이들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 등 볼거리가 많은 덕분이지요. 사료와 도판 역시 최고 수준이고요.

허나 제목만 보고 '앙코르와트'에 대한 역사서겠구나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책이었습니다. 저는 앙코르와트라는 유적 자체의 역사가 궁금해서 구입했지, 앙코르 유적의 연구사가 궁금해서 구입한건 아니란 말이죠. 35,000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앙코르와트 연구사에 관심이 있으실 분들 외 저같이 앙코르와트 유적 자체에 관심 가지신 분들은 실망하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2022/02/25

종장 - 니콜라스 블레이크 / 정병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나이젤 스트렌지웨이즈는 출판사 웬함 앤드 제랄딘사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았다. 누군가 교정쇄를 손 대어 도레스비 장군 회고록의 삭제 필요 문구가 그대로 출간되었고, 그 결과 출판사가 고소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출판사 관계자들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인 결과, 여류작가 밀리센트 마일즈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교정 담당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그녀 소설의 재출간을 반대했던 탓에, 교정쇄에 문제를 일으켜 프로더로오를 제거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의심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녀는 출판사 안에서, 그것도 프로더로오 바로 옆 사무실을 빌려서 자서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도 충분했다. 그러나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밀리센트 마일즈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그녀가 쓰던 자서전 원고를 수정하고 달아났다. 교정쇄 사건이 살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챈 나이젤은 수사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데...

시인으로, 그리고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작품입니다. 전설의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발간된 고전이지요. 지금은 절판된지 오래라 구하기도 힘들지만, 읽는 것도 만만치않게 힘들었습니다. 오래전 일본어 버젼을 번역한 듯한 낡은 문체와 장황한 묘사, 그리고 세로 쓰기 등이 지루하고 장황한 내용과 결합된 탓입니다. 

교정쇄에 손을 댄게 누군지 조사하는 초반부는 그야말로 지루함의 극치입니다. 중요한 등장인물만 해도 스티븐 프로더로오, 밀리센트 마일즈와 출판사 공동 경영자 3인 -아아더 제랄딘, 리즈 웬함, 바질 라일 -에 밀리센트 마일즈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과 과거, 설정 모두를 대화를 통해서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끝없는 대화가 엉망인 번역으로 자연스럽지 않게 이어지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정작 교정쇄를 누가 손 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는 이 부분에서는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밀리센트 마일즈를 바질 라일이, 스티븐 프로더러오를 리즈 웬함이 흠모하고 있었다는 정도의 인간 관계가 드러날 뿐입니다.

다행히 이 초반부를 극복하고, 밀리센트 마일즈가 살해된 다음부터는 꽤 재미있어집니다. 특히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범인이 그녀를 살해하고 자서전 원고를 직접 타자를 쳐서 수정하고 달아나는 장면을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처럼 묘사한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러한 범인의 공작이 모두 경찰에 의해 곧바로 밝혀져 버린다는 전개가 아주 신선했거든요. 독자에게 모두 알려져버린 부분에 분량을 낭비하지 않는건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를 피해자 지문이 타자기에 잘못 찍혀 있다는 등의 단서로 밝혀내는 추리 과정도 볼 만 했고요.

명탐정 나이젤의 수사와 추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경찰은 밀리센트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습니다. 유산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도 있었고요. 그러나 나이젤은 남겨진 밀리센트 마일즈의 자서전 원고를 읽고, 또 이어지는 대화 중심의 탐문 수사를 통해 아아더 제랄딘과 스티픈 프로더로오 두 명에게 유력한 동기가 있다는걸 알아냅니다. 아아더 제랄딘은 밀리센트 마일즈를 강간하려다 실패했던 옛 과거에 덜미가 잡혀 있었고, 스티븐 프로더러오는 동생이 밀리센트 마일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의 변심으로 불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를 여러가지 단서와 증언을 조합하여 밝혀내는 나이젤의 모습은 명탐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두 명 중 아아더 제랄딘이 더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이게 함정을 파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도 그럴싸했고요. 

또 이를 통해 교정쇄에 손을 댄건 스티븐 프로더로오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깔끔합니다. 아들 포올이 학살당하게 만든 총독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는건 누가 봐도 확실한 이유가 되니까요. 이후 프로더로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낸 추리 역시 나쁘지 않아요. 사건 발생 전 이미 현장을 떠난게 확실했던 나이젤을 제외하면, 진범은 교정쇄를 손 댄 프로더로오일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서 출발해서 프로더로오의 알리바이 파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든요. 사소했지만 연결 고리가 되는 단서들도 하나, 둘 씩 설명되고요.

이렇게 추리물적인 가치도 높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밀리센트 마일즈라는 독특한 악녀 캐릭터에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동기들만 놓고 보면, 아아더 제랄딘이나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악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보면 모든건 밀리센트 마일즈의 계획이자 음모, 그리고 그녀의 악한 마음으로 생겨난 사건들이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타고난 거짓말장이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능숙했던 거지요. 살해당한 것도 교정쇄를 손댄걸 알고 프로더로오를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몇 개월에 걸쳐 그의 옆에서 일하면서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였던 스티븐 동생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하겠다고 협박했다는건 정말 생각도 못했던 악행이었어요. 성직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지옥이 아니었을까 싶으니까요. 하여튼, 제가 보아왔던 모든 소설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했던 악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템포 자체가 느리다는건 중, 후반부도 마찬가지이며 억지도 많습니다. 우선 밀리센트 마일즈를 흠모했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한 바질 라일이 범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건, 빼어난 묘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일 수 있는 용의자를 여럿 내세우는건 본격 정통 추리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명에 그쳐야지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을 싸잡아 엮는건 무리에요. 

그 외에도 패륜아 시프리안 그리이드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나이젤을 살해하려고 독을 사용했다는건 아예 설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스티븐 프로더로오의 유력한 동기 중 하나로 제시되었던, 밀리센트와의 관계가 끝나버리고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저자같은 시인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에게 와 닿는 동기는 아니었고요.

아울러 나이젤이 스티븐 프로더로오를 범인이라고 확신한건, 주요 용의자들 대상으로 소거법을 벌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는 프로더로오가 범인임을 확신하기는 힘들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젤 외의 다른 인물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시프리안 그리이드도 여전히 범인일 수 있으니까요. 증거도 프로더러오의 알리바이가 무의미하다는걸 밝혀낸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이젤이 바질과 프로더로오를 데리고 범인의 살해 수법을 재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궁지에 몰린 프로더로오의 자살로 진상을 드러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이거든요. 작가도 이후 경찰 수사 등의 지루한 설명을 이어나갈 필요도, 의지도 없었을 것 같고요. 

문제는 이는 연극적이면서도 과장된 억지의 정점으로, 탐정의 깜짝쇼라는 클리셰의 저열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모로 해결 부분에서의 나이젤은 전혀 명탐정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 진부하고 지루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도 있고,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번역이 굉장히 아쉬웠는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13/01/10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 : 별점 2점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 - 4점
모던일본사 지음, 한비문 외 옮김/어문학사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39 : 별점 3점"

바로 전에 읽었던 「모던일본」의 조선특별호 '조선판' 2호. 당시 1호가 잘 팔렸었나 보네요.

일단 주요 특징은 전편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암울한 1940년대로 진입하였기 때문인지 흥미와 재미만 추구하는 기사는 대폭 줄었으며, 내선일체·흥아 등의 친일적 색채가 더욱 짙어졌습니다. 때문에 재미 자체가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래도 조선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이야기하는 좌담회에서 평양의 기생집 오마키차야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것 - 시인이자 소설가인 다카하마 고시가 1900년대 조선을 여행하고 지은 소설 "조선"에 등장시킨 게 유명해졌다고 함. 참고로 1대 오마키는 1930년에 사망하고, 이 좌담회가 열렸을 때는 하이쿠 시인 구보 고조가 경영 중 - 역대 조선 총독에 대해 소개한 글, "경성 학생생활 르포르타주"라는 제목으로 경성제국대학,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에 대해 정리한 자료, 약도와 함께 소개된 "경성 번화가 탐방기" 등의 기사들은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가 높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미스 조선 선발대회와 같은 참신한 기획도 일부 실려 있으며, 소록도가 아름답다는 의외의 기행문이 실려 있는 등 자세하게 찾아보면 소소한 재미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재미, 내용 모두 확실히 떨어지는 편이라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도 전편만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16/05/31

박물관 보는 법 - 황윤 : 별점 3점

박물관 보는 법 - 6점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유유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상자의 안목"입니다. 간략한 책 소개와 부제를 보고, 다양한 박물관에 대해 어떤걸 관람하면 좋을지를 알려주는 실용서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우리나라 박물관과 유물 수집가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을 정도로요.

책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도굴꾼이 창궐했다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시작합니다. 다행히 1908년 왕립 이왕가 박물관이 세워진 이후, 시장에 나도는 유물들을 웃돈을 얹어 구매함으로써 유물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1908~1917년까지 왕실이 수집한 유물의 규모는 무려 1만 122점, 구입비만 21만원이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1원이 5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100억원 정도 쓴 거니까요. 특히나 국립 중앙 박물관의 핵심 유물인 "금동반가사유상"을 1912년 2,600원이라는 거금에 구입한 것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 일본인 고미술상은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어느 절에서 찾아낸 이 유물을 40원이라는 금액에 사들였다고 하니 정말 남는 장사 했네요. 천벌이나 받아라! 여튼 이왕가 박물관 덕에 해외로 유출되지 않았으며 지금 보험 평가액만 500억원 수준이라는게 다행일 뿐입니다.

다음에 설립된 것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입니다. 식민 통치의 일환인데 총독부의 권력을 앞세워 1930년대 말에는 1만 4천점이 넘는 막대한 전시품을 유치했다고 합니다. 이때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 자신이 수집한 유물을 기증했는데 여기 포함된 것이 또 다른 금동반가사유상이었습니다! 본인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그나마 좋은 일을 해 준 것은 고맙네요.

그 뒤에는 유물 수집가와 그들이 수집한 유물들 이야기입니다. 간송 전형필 이야기는 너무 많이 접해보아서 조금은 식상했습니다만, 이외의 인물들도 소상하게 소개해 줍니다. 악명 높은 유물 반출범 오구라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 조선 최상류층의 친일파 의사 박창훈과 서민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산 성모 병원을 세운 박병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박창훈은 치부의 대상으로 유물을 수집했고, 1940~41년 사이 소장품 전부를 경성미술구락부에 모두 팔았습니다. 거의 600점 가까운 소장품을 4000~7000원 사이의 고액에 매각했다니 어마어마한 돈이죠.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는 후일담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네요. 반면 박병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백자 중심의 수집을 이어간 뒤 후일 소장품 전부를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서 유물 카드에 '수정 (박병래의 호)'가 적힌 유물은 관심 있게 봐 두어야겠어요.

또한 출신 대학이 아니라면 쉽게 가보지 못할 대학 박물관에 대한 상세한 정리도 눈길을 끕니다. 친일파로 유명한 김활란이 이화여대 박물관을 위해서는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는 일화가 특히 재미납니다. 박물관의 상징인 국보 백화철화포도문 항아리를 1960년대 1,500만원 (현재 시세로 30억 이상)에 구입한 것이 그것인데, 이 항아리는 장택상의 소유로 그가 야당 지도자로 활동할 때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내놓았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어서 사립 박물관과 사립 미술관이 소개됩니다. 미국의 게티 미술관을 소개하며 진정한 문화재단의 역할을 알려주는데, 한국 기업 휘하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아무래도 요원한 일이겠죠.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호림 박물관이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제 공부가 부족한 탓에 호림 박물관은 가본 적이 없는데 근시일 내에 꼭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은 근대 미술 및 천안의 씨킴과 아라리오 프로젝트, 아라리오 뮤지엄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는데 한눈에, 책 한 권을 통해 읽게 되니 뭔가 통사적인 흐름이 느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네요.

이러한 미시사적 이야기는 물론, 박물관별로 주요 소장품도 함께 소개됩니다. 주요 소장품이야말로 관람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테니 소개되는건 당연합니다. 이 부분은 책에 대해 가졌던 원래의 제 생각과 비슷하네요. 부록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의 경우, 간략한 약도와 최적의 동선도 수록되어 있고요.

책의 저자인 역사학자 황윤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박물관과 유물에 대한 애정만큼은 깊이 느껴지는 글들도 좋았습니다. 230여 페이지라는 적절한 분량, 책날개도 없는 오래전 문고본 형태의 심플한 디자인에 적절히 삽입된 정밀한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고요.

단 불필요한 장식, 군더더기를 덜어내어(심지어 표지조차 2도 인쇄에 불과합니다) 보급형 책을 만들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9,000원이라는 정가가 적합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더 저렴하던가, 아니면 조금만 가격을 올려서 표지 정도라도 딴딴하게 (?)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박물관을 좋아하시고 우리 유물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번 보실 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박물관별 꼭 보아야 할 유물 목록을 요약하며 글을 마칩니다.

  • 국립 중앙 박물관 - 금동반가사유상, 2층 기증 전시실의 수정 박병래가 기증한 백자들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 호암미술관 - 15~16세기 초기 청화백자, "수월관음도" 등
  • 플라토 미술관 - 로댕의 "지옥의 문", "깔레의 시민"
  • 부암동 서울 미술관 - 이중섭의 "황소" 외 근현대 작품

2006/08/08

밴디다스 (Bandidas) - 조아킴 로엔닝, 이스펀 샌드버그


19세기 멕시코의 한 마을, 미국 은행에 고용된 악당의 농간으로 땅을 잃게 된 마리아 (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마을 은행장의 딸로 유럽에 유학갔다 잠시 귀국한 사라 (셀마 헤이엑) 는 각각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목격하고 마을의 은행을 털어 복수를 꿈꾼다. 한편 사라의 아버지 살해사건 조사를 맡은 미국 경찰요원 퀀틴마저도 그녀들의 정의에 설득되어 같이 강도행각에 나서게 되며 멕시코 총독은 연이은 은행강도 피해 때문에 금괴를 통째로 수송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멕시코의 돈과 땅을 빼앗아가는 미국 강도에 대항한 그녀들의 작은 저항이 성공할 수 있을까?

간만에 본 영화네요. 프랑스, 멕시코, 미국의 합작 제작 영화로 뤽 베송이 각본을 썼습니다. 음악도 에릭 세라가 맡았고요. 무엇보다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3개국 합작이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멕시코 자금이 제일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용만 딱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멕시코의 두 젊은 미녀가 악덕 미국 은행의 끄나풀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ViVa Mexico!"라는 주제의 영화거든요. 요새 미국내에서도 급증하고 있는 라틴계 미국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일까요?

하여간 영화는 위의 내용을 가지고 그야말로 공식대로 흘러갑니다. 두 젊은 미녀의 은행강도를 시작하게 된 원인, 그리고 특훈을 거쳐 은행강도계의 떠오르는 별(?)로 부상하고 두 미녀 모두 마음에 드는 전문가 남성을 멤버로 끌어들여 마지막 최후의 한탕... 이라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전개거든요. 2명으로 축소된 미녀 삼총사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각본이 뤽 베송인 탓인지 의외의 디테일이 꽤 많아서 뻔한 장면의 연속임에도 크게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두 미녀가 각각 특기가 있다는 것 역시 뻔하지만 (마리아는 말을 잘 다루고 명사수, 사라는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와서 똑똑하며 단검 던지기의 명수라는 설정) 그런대로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있어서 크게 위화감이 들지는 않거든요. 또한 은행강도 쟝르(?) 영화답게 나름 재미난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있는데 폐쇄된 은행에서의 변장을 통한 잠입과 탈출이라던가 압력 감지장치가 설치된 은행을 돌파하는 장면은 상당히 기발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처음부터 등장해서 뭔가 대단한 변수를 만들어 낼 것 같았던 남자멤버 퀀틴의 활약과 비중이 애매하다는 것은 의아하더군요. 설정과 캐릭터만 본다면 맥가이버같은 활약을 보여줄 것 같았는데 말이죠. 막판에 두 미녀를 놔두고 떠나는 모습 역시 전형을 깬 파격적인 부분이긴 했지만 싱거운 느낌이 더 강하고요. 그리고 아무래도 여성이 주인공인 탓에 액션이 좀 약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미녀로 잘 알려진 두 라틴계 미녀를 더블로 포진시킨것에 비한다면 영화에 섹시함이 거의 없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제일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뭐 이것저것 따지자면 문제점도 많고 무엇보다도 은행강도들이 조국을 구한다는 말도 안돼는 해피엔딩 등 설득력은 제로에 가까운 스토리라인이지만 한여름 아무생각없이 웃으면서 즐기기에 적당한 영화였다 생각합니다. 대작들 틈바구니 속에서 여름 흥행을 잡기에는 2% 정도(?)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요. 결말에서도 속편을 암시하긴 하지만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PS : 간만에 보는 셈 셰퍼드의 모습은 반가왔습니다만....

2018/06/08

메두사호의 조난 - A. 코레아르.H. 사비니 / 심홍 : 별점 2점

메두사호의 조난 - 4점
A. 코레아르.H. 사비니 지음, 심홍 옮김/리에종


뗏목에서 여러명의 사람들이 절박하게 구조를 기다리는, 메두사 호의 조난을 제리코가 그린 위의 그림은 한 번씩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이 책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메두사 호 해상 조난 사건의 피해자의 수기로 이루어진 논픽션입니다. 이런 류의 해상 재난 관련 논픽션"바다 한 가운데서"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책 소개도 그럴듯해서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네요.

책은 메두사 호가 항해하게 된 이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814. 15년 파리 조약을 통해 원래 프랑스 땅이었지만 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 서해안의 권리가 명확해 진 후, 프랑스가 자신들의 소유지인 거점 도시 생 루이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4척으로 구성된 세네갈 원정대가 출발한 것이 이유입니다. 식민지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3개 중대 250여명의 군인은 물론 신부, 의사, 정원사에 제빵 기술자 등 다양한 직업의 인원들로 구성되었고, 같은 이유로 다양한 물자도 운반하였는데 이 중에는 무려 10만 프랑에 이르는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능한 원정 함대 사령관 쇼마레 탓에 원정대의 기함 메두사 호는 케이프 블랑코 모래톱에 좌초하였고, 무익한 노력이 이어지다가 배의 파손이 심해져 결국 구명정 등으로 탈출하였습니다. 당연히 악천후 등에 의해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한 사고라 생각했었는데, 부주의로 인해 육지 근처 모래톱에 좌초했던 사고라는게 황당했어요.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났다면 당연히 이 사건이 그림의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겠죠? 조난자들의 절반 가까이인 152명이 프리깃함의 자재로 대충 만든 뗏목에 탑승했는데, 노 하나 없어서 다른 구명정 들이 끌어주어야 함에도 이들이 예인줄을 풀어버렸기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가 소수만 구조되는 처참한 비극이 찾아오고 맙니다.
이 비극이 책의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합니다. 주로 뗏목에서 당시 군의관 사비니와 인부 리더 코레아르가 활약하는 내용이고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조난당한 이유도 황당하지만, 무려 백 명이 넘는 사람이 타야 할 뗏목의 준비 역시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나침반 하나 없고 음식도 제대로 싣지 않고 출발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제가 닥치거든요. 심지어 일부 승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기까지 하니 말 다했지요. 이 과정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할 식인도 시작되고요. 결과적으로 10%인 15명만 생존하고, 이 중 5명도 구조되자마자 바로 죽어버리는 참혹한 표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뗏목 조난 외의 나머지 절반 분량은 다른 구명정과 상륙정에 탑승했던 조난자들이 육지로 상륙하여 도보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확실히 바다보다는 사막이 생존에는 더 낫다 싶긴 했어요. 물과 식량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고 탐욕스러운(이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습니다. 멀쩡한 남의 나라를 자기 멋대로 식민지로 만드는 무리들이 염치도 없지...) 무어인들을 만나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망한 사람은 소수라는 점에서요. 애초부터 메두사 호에 있던 군인들 중심으로 확실하게 규율을 잡고, 식량을 확실하게 확보한 후 도보로 이동하는게 더 나은 판단이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표류, 조난 외에도 구조된 이후의 후일담도 상세합니다. 생존자 대부분이 가진 재산 모두를 약탈당하고 알거지가 된 데다가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잊혀졌고, 심지어 사비니의 수기는 정치적인 음모로 이용되고 코레아르는 정부 관계자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등 살아 남은 뒤에도 고초를 겪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수기가 쓰여진 목적은 사비니와 코레아르가 자신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걸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묘사들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어요. 식량이 없어 죽어나가며 식인도 했다고 서술하면서, 또 어떤 부분에서는 국왕 폐하의 신하들을 바닷 속으로 돌려보냈다는 식으로 장례를 치뤄 주었다고 쓰는 등 앞 뒤도 잘 맞지 않고요. 때문에 정말로 함대 사령관 쇼마레의 무능과, 총독의 무자비함도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류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제는 보통 윗 사람들 때문이라는 고금동서의 전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 것 증명된 건 없으니까요. 솔직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도주를 독차지하고 죽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은 인간 말종들이었을 수도 있죠.
게다가 수기 내내 스스로의 영웅적인 행동과 박애정신에 감탄하고, 자기들이 조국과 국왕에 충성하며 헌신하는 국민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도 읽으면서 솔직히 짜증이 났습니다. 이유는 역시나 자신들에 대한 보상 목적이라 생각되는데 오히려 이런 불필요한 묘사로 정작 중요한 표류,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묘사가 희석되고 깊이가 없어지는 탓입니다.

그래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여러가지 디테일들 - 뗏목에서 더위를 잊기 위해 모자에 바닷물을 담가 얼굴을 씻고, 머리를 적시고, 물속에 손을 넣는 것을 반복했다, 사막을 도보로 횡단하던 중 약 2미터 깊이로 모래를 파면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무어인은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불을 붙인 나무뿌리와 함께 잡은 황소를 던져 넣고 모래로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숯불을 덮어 조리했다. 무어족 가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염소 가죽은 방수가 완벽했다 등 - 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도보 횡단 중 만난 무어인의 왕 자이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이드 왕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는 국제인으로 소개되거든요. 왕이라기 보다는 좀 큰 유목민을 이끄는 리더로 보이는데 당대 아프리카 서부 세네갈의 한 지역 부족장이 이 정도의 국제 감각과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건 상당히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토착 민간 요법으로 열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럼주를 넣은 매우 뜨거운 펀치를 '카엔 후추'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추 삶은 물과 함께 큰 잔에 넣어 마시는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 먹는 것과 진배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 묘사는 그닥 상세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애초 글이 쓰여진 목적이 조금은 불순하고, 그래서 저자 시점에서 왜곡된 내용이 많은 듯 하여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인쇄 상태, 폰트 등 책의 만듬새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류의 해상 조난 관련 논픽션을 원하신다면 이보다는 "바다 한 가운데서"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디테일, 깊이 모두 차원이 다릅니다.

2021/04/03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정운현 : 별점 5점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10점
정운현 지음/개마고원

친일파를 조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인물사 서적입니다. 크게 관리, 경제인 (갑부), 지식인, 언론인, 작가 및 예술가, 종교인, 직업적 친일분자라는 7개 분류로 소개됩니다.

서론에서 소개되는, 타국 친일파 처벌 사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3.1 문화상을 수상한 친일파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까지 있다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뒤이은 친일파들의 매국 행각도 화려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 친일파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선대의 재산에 힘입어 해방 이후 한 자리씩 차지했던 후손들의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부분 반성은 커녕 친일 재산을 되찾으려는 등 뻔뻔함으로 일관했으니까요. 최소한 '친일을 해서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해서 못 사는' 나라가 아님을 지금이라도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반대로, 친일 행각을 반성했던 소수는 이 점을 감안해서 대접해야 햘 테고요. 윤서인같은 인간들이 망발을 내뱉는 사회가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는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겁니다.

그럼 몇 명의 인상적이었던 친일파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대우입니다. 3.1 의거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지만 감옥살이 이후 변절하여 일제하 도지사를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이지요. 반민특위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1960년 총선에 출마했다는 뻔뻔함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끌며 수백명의 독립군을 체포, 사살하는데 기여했던 김창영이 반민특위에서 고작 '공민권 정지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해도 마땅한 악질 친일파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김창영이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해방 이후 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죗값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희선은 원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알고보니 변절자로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 노릇을 했다니 기가 찹니다. 

유명했던 친일경찰 노덕술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독립 운동 사건만 취급했던 악질 고등 경찰 출신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될 당시, 무려 34만 1천원이라는 도피 자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질이었지요. 게다가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테러 음모에도 가담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바로 사형을 시켰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등으로 수감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네요. 그 뒤 제 1사단 헌병대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6.25 때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해 구속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응징을 받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조선 제일 갑부의 한 명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 이야기도 볼 만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관직에 있으며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하여 치부한 인물이거든요. 단순 치부였다면 모를까, 재산 증식 및 인맥 확보를 위해 친일파들과 적극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본 밀정 노릇을 하기까지 했다네요. 그나마 그 많던 재산은 해방 이후 다 날리고, 제실도 흉가가 되었다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런 정보로 치부한 공직자들도 모두 패가망신하면 좋겠네요. 

영덕 갑부 문명기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 골몰했던 친일파인데, 1935년에 일제에 10만원을 헌납해 비행기를 기증했다는 일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복엽기!더라고요. 일제에서 누군가 문명기 돈을 빼돌린 모양인데, 전쟁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죠.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런저런 공직에 종사하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연좌제처럼 공직을 박탈할 필요야 없지만, 할아버지 재산이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던 할아버지 못지않은 파렴치한이라는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운동가로 알려졌던 이선근은 열렬한 친일파였던건 물론이고 박정희 시절 유신 독재 찬양에 전두환까지 찬양했던,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더군요. 국립묘지 안장에 아들과 손녀들이 모두 떵떵거리며 산다니, 지금이라도 국립묘지 파묘는 물론 그의 정체와 후손들 모두 널리 알리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에 있었던 신사에서 신직, 즉 신관으로 일했던 조선인 이산연 이야기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덕분에 이산연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처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행방불명된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것 하나만 위안거리네요. 

조선 불교 총 본산 조계종이 일제 강점기 때 생겼으며, 이를 주도했던 첫 종무총장 (총무원장) 이었던 불교계 거두 이종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더러 그 아들은 동국대 대학원장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친일해서 후손이 잘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1급 친일파 조병상 이야기는 좀 놀라왔어요. 직업이 아예 친일이었는데, 학병 출정을 독려하며 자기 아들도 5명 중 3명이나 출병시켰다니 그 충정이 대단합니다. 아들들이 다 생환해서 모두 출세했다는게 좀 쓰린데, 조병상 본인은 6.25때 실종된 걸로 추정된다는게 위안입니다.

친일파 정보는 물론, 일제하 공직자 관등과 같은 볼만한 자료도 많습니다. 최상급은 일왕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조선 내에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두 명 뿐이고 그 다음이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순서입니다.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고요. 지금의 5급 공무원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며,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현재의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군수는 5급 공무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친일파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권한과 재량이 더 많았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당연합니다.

좌옹 윤치호의 친일 논리도 곱씹어볼만했습니다. 윤치호가 친일파가 된 건,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그리고 개화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 그리고 105인 사건 때 겪었던 가혹한 고문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군요. 이후 윤치호는 '황인족 담합론'과 강자에게 약자가 순종해야 평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게 조선이 살 길이라는 등의 등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낸게 더 웃깁니다.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변절하여 친일을 한 이유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다'고 고백했는데, 차라리 이게 더 합리적이지요. 최린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진솔하게 반성과 후회를 보였다니, 같은 친일파라도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을 도운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자 밀정 배정자 같은 경우는 친일의 이유가 나름 합당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좀 애매했습니다. 김인승은 조선 말기,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탈주했던 인물이거든요. 공권력과 싸워서 패배하여 도망친 뒤, 자신을 버린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판 오자서인 셈이지요.
배정자의 일생은 더 기구합니다. 아버지가 대원군 실각 때 한 패로 몰려 처형된 뒤 유랑생활을 하다가 관기로 팔렸고, 그 뒤 중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거든요. 조선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고, 일본에 충성을 바친 이유도 타당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해야 할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결과야 친일인데, 그 이유는 수긍할 만 하니....

이렇게 친일에 대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된 좋은 독서였습니다. 박흥식, 김활란 등 익히 잘 알려진 친일파가 함께 소개된다거나, 그 외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일파들이 많은건 조금 아쉽지만, 책의 취지 상 쉽게 빼지는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빠진 친일파가 세간에서 잊혀질까 두렵네요. 역사 바로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제가 읽은 구판은 절판되었지만, 아래의 책으로 재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정운현 지음/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