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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30

검은 집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4점

검은 집 - 8점 기시 유스케 지음/창해

쇼와 생명 보험 교토지사에 근무하는 와카쓰키 신지는 어린 시절 형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고모다 시게노리라는 보험 가입자가 불만을 토로하며 방문을 요청했고, 고모다의 "검은집"에 방문한 신지는 고모다의 아들 가즈야가 자살한 시체를 발견하였다. 가즈야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는 신지는 보험금 지급을 미루고 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해 나갔다. 그러면서 점점 공포스러운 과거의 여러 사건들을 발견하지만, 그에게 점차 위험이 닥치는데....

이전부터 읽고 싶었었지만 절판되어 구하지 못했던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이 양장본으로 재간되었길래 잽싸게 구입했습니다.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검은집"이라는 흉가를 무대로 한 호러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가즈야의 죽음을 토대로 고모다와 그의 아내 사치코를 조사하며 알게되는 공포스러운 과거와 과거 죽음들의 실체, 그리고 신지와 그 주변인물들에게 닥치는 위협과 죽음을 세련된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이더군요.

주인공에게 위기가 찾아오면서부터는 전형적인 스릴러-호러 물의 전개를 답습하지만 스티븐 킹이나 클라이브 바커류의 소설처럼 유령이나 초현상,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평범하면서 주위에 얼마든지 있는 보통 사람들 중에 "감정이 없는 인간 (싸이코패스)"을 악역으로 설정하여 인간의 광기와 잔인성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다른 평범한 호러소설과 구분됩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꺼리낌없이 살인을 반복하는 "싸이코패스"들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하게 묘사됩니다. 유령이나 괴물보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잔인함의 극한으로 치닫는 전개가 더 무섭네요.

이러한 현실적인 공포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필력도 장난이 아닙니다. 특히 중반 이후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작가의 능력에는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요. 덕분에 서스펜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유명한 작품들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또다른 악몽을 예감하며 전율하는 신지의 모습을 그리며 끝맺는 엔딩도 인상적이었고요.

구태여 단점을 찾자면, 신지의 과거에 있었던 형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을 묘사하는 부분은 불필요했다고 생각되며, "감정이 없는 인간", 즉 "싸이코패스"라고 현대적으로 정의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아주 약간 지루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문장이 흡입력있고 전개가 흥미진진해서 쉬지않고 손에 잡으면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생명보험"이라는 사회적 장치를 토대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에 기반한 실질적인 공포와 위험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카드빛으로 인한 신용 불량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살인을 소재로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사실적인 소재로 극도의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할만하죠. 별점은 4점입니다.

조금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영화화가 되었는데 소설을 거의 각색없이 찍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비쥬얼과 공포를 충분히 전해줄 것 같아 한번 구해볼 생각입니다.

PS : 그래도 신지의 애인 메구미의 말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모두 선하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게 훨씬 세상 사는데 도움이 되겠죠?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니까요.^^

2018/10/21

불티 - 시즈쿠이 슈스케 / 김미림 : 별점 2.5점

불티 - 6점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 지방법원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는 일가족 살해 혐의를 받던 다케우치 신고 재판을 마지막으로 퇴관했다. 그의 마지막 판결은 무죄판결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다케우치기 가지마 이사오 바로 옆 집으로 이사왔다. 가지마 가(家)의 모든 대소사에 성의를 다하는 그에게 집안 사람들 모두는 호감을 느꼈지만, 며느리 유키미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법률 미스터리로 유명하다는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장편입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 놓을 수 없다는 뜻의 '철야책' 이라는 별명이 있다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작가의 이력, 그리고 초반부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딜레마 때문에 당연히 법률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싸이코 살인마 다케우치와 가지마 가(家)의 대결을 그린 전형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결에서 전해지는 서스펜스가 읽는 내내 넘쳐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 주기 때문에 '철야책' 이라는 별명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유일하게 비협조적인 인물인 며느리 유키미를 배제해 가는 첫번째 과정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의심들이 쌓여 진상을 알게 된 어머니 가지마 히로에가 위험에 처하는 전개, 뒤이어 집안일에 무심했다가 뒤늦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가지마 이사오와 그를 돕는 유키미의 활약이 교차되는 후반부까지 정말로 흥미진진한 덕분입니다. 다케우치가 수상하다는건 상당히 초반부터 암시되어서, 어떻게 남은 500여 페이지를 끌고 갈까 궁금했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흥미를 더하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특히 유키미 배제에 그녀의 딸 마도카를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쿠르트로 밤 잠을 못 자게 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자기 집에서 약간의 조작으로 마도카가 인형 놀이를 과격하게 하게끔 유도하면서 유키미의 폭행을 끌어내는 식인데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이 높아 감탄했습니다.

아울러 싸이코 다케우치의 설정도 독특해서 나름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사실 착하고 평범해 보였던 지인이 알고 보니 싸이코 살인자더라.. 라는 설정의 작품은 쎄고 쎘죠. 스플래터 고어 호러가 아닌 싸이코 살인자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마 비슷한 설정일 거에요. 주인공이 살인자의 정체를 알아내지만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공이 살인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 역시 대부분 비슷할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살인자 다케우치가 자신의 재력을 활용하여 상대방에게 무한에 가까운 호의를 베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으로부터의 애정과 호감을 강요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큰 차이점입니다. 한마디로 애정과 호감을 자신의 돈과 성의로 사려고 하고, 이를 거절당했을 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호감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착각하는 스토커, 혹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들처럼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인물이 아니라는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케우치는 가지마 이사오가 재판관 시절 무죄 판결을 내린 피고 출신이라는 설정도 새롭습니다. 이는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정말 무죄로 보이는 다케우치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도 정말 진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중반부의 가장 큰 승부인 피해자 유족 이케모토와 대면한 다케우치가 이케모토가 진범이 아니냐고 되묻는 장면이 특히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유키미마저 속아넘어갈 정도이니 독자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원죄 운운한다던가, 재판관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심경을 그려내는 등의 법률 미스터리스러운 설정은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불필요한 묘사였습니다 제목의 '불티' 부터가 사건의 원인이 된 다케우치의 무죄 판결을 뜻하는데(아마도), 내용만 보면 이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다케우치를 스스로 단죄하고 죗값을 받는 가지마에 대한 에필로그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아들을 죽이려 하는 살인자를 누가 가만 놔 두겠어요? 이러한 전개를 통해 사형 선고 등 현재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딜레마를 짚고 넘어가려면 앞부분에서 가지마 이사오가 사형 선고에 극도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더 드러냈어야 합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걸 간접 살인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 스스로 사람을 죽인 상황에 대한 딜레마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억지로 법관 설정과 모호한 주제 의식을 끼워 넣은 탓이 큽니다. 그냥 평범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동네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분량과 내용도 훨씬 깔끔했을테고요.

그 외에도 다케우치의 무모한 범죄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가 수상하다는 걸 가지마 이사오가 몇일에 불과한 조사로 알아내는 전개는 경찰과 검찰이 대체 무엇을 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들며, 사건의 핵심인 다케우치 등에 나 있던, 도저히 혼자서 낼 수 없는 상처를 낸 트릭도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방망이에 줄을 묶어 기둥을 축으로 회전시켜 등을 때렸다는 건데... 이 정도로 세 명이나 살해당한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무죄 판결이 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히로에의 시어머니 간호와 고부 갈등, 유키미의 집안 문제도 사족입니다. 시어머니의 죽음이 사건의 도화선이며 장례 일정과 이야기가 발 맞춰 돌아가기는 하지만 시어머니, 시동생 이야기는 뺐어도 됐을 것 같아요. 읽으면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단점도 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드라마화도 두 번이나 되었을 만큼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조금 고급진(?) 킬링 타임용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참고로, 두번째로 제작된 드라마는 다케우치 역을 춤추는 대수사선의 마시타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연기했다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조금 조사해보니 결말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요. 가지가 이사오가 마지막에 다케우치에게 진짜 유죄 판결을 내리고 다케우치는 자살을 택하는 결말인데 앞서 말씀드렸던 제가 느꼈던 문제점 - 가지마가 살인을 저지르고 죗값을 받는다는 와닿지 않는다 - 을 제작진도 공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2018/10/27

비하인드 도어 - B.A. 패리스 / 이수영 : 별점 1.5점

비하인드 도어 - 4점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arte(아르테)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부부 잭과 그레이스. 남편 잭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유명 가정 폭력 전문 변호사로, 영화배우와 같은 외모까지 갖춘 근사한 남자다. 그레이스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동생까지 사랑해주는 잭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꿈꾸지만... 그녀는 괴물 같은 그의 손길이 사랑하는 동생 밀리에게 닿기 전에 이 악몽을 끝내려 한다. 닫힌 문 뒤에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처절한 심리 싸움이 시작된다...(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책 뒤에 소개된 짤막한 본문 -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공포를 주입할 수 있는 사람. 계속 숨겨 둘 수 있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 보는 한 편 내 갈망을 충족시킬 방법도 마련했어. 뭔지 알겠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잭은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너랑 결혼했어. 그레이스" - 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지인이 싸이코패스였다'는 책을 읽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핸섬하고 친절한 신사로, 결혼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잭이 결혼하자마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돌변한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류의 이야기라면 범인이 치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상대방을 협박하고 죽이려 하는지가 잘 묘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재미 핵심 요소고요.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실패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를 주기 위한 무리한 설정 탓입니다. 잭이 치밀해서 그레이스가 탈출도 못 하고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인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외출도 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다는건 솔직히 말이 안되지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놓기는 했지만 다 핑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있습니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같이 못 간다는 묘사가 등장하니 화장실에서 거울에 몇 자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방법을 생각해 볼 만 한데 절박함이 부족해요. 이래서야 감금과 협박을 즐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위기 극복, 탈출 과정이 재미있느냐? 아닙니다! 겨우 구한 약을 잭에게 먹이고 탈출한 그레이스가 태국으로 여행간 후 완전 범죄를 꾸민다는 내용인데 과정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우 탈출했을 뿐 잭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하실에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벌일 일은 아니잖아요. 이럴 계획이었다면 최소한 책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습니다. 단지 지하실에 가두었다고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잭이 깨어나 탈출하면 모든게 끝나버리니까요. 실제로 잭이 바로 태국으로 쫓아 왔다면 그레이스가 옭아매인 신혼 여행 상황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행을 가장한 죽음을 맞게 되었겠지요.
결말 부분에서 에스더가 그레이스를 도와줘 완전 범죄를 성공시킨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그 전까지 에스더와의 친분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뜬금없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밝힌 이유인 "빨간 방" 의 정체는 말이 되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부 묘사가 너무 부족했어요.

다른 부분들도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와 과거가 복합되어 진행되는 진부한 방식의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밀리의 수면제가 현재에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깔끔했던 것 정도만 볼거리였습니다만, 이 정도도 수습이 안 됐다면 이야기가 성립하지도 않았을테니 딱히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처음에 완벽함을 강요받는 그레이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완벽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허술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상계스러운 특이한 싸이코구나! 싶게 만드는 부분은 독특했기에 차라리 이런 설정을 밀어 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잭이 누군가를 감금해서 공포에 질리게 하는 모습을 즐기는 싸이코패스라는 이야기는 그닥 신선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니, 너무 뻔하죠. 이런 뻔한 내용이니 잭이 남편에게 폭행당한 여자들을 전문으로 변호하는 변호사라는 작위적인 설정은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아이디어라면 잭이 그레이스와 결혼한 이유입니다. 그레이스의 동생 밀리가 다운증후군이라서, 이를 이용해 밀리를 감금하려고 계획했다는 건데 불쌍한 장애우를 학대하는 악당이라는 느낌이 더해져 사악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밀리에 대해 그레이스가 가진 모정에 가까운 애정을 협박의 재료로 쓴다는 것도 그럴듯 했고요. 아울러 사건의 핵심인 공포의 "빨간방" 묘사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장점은 빈약해서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는 결론을 뒤집기는 무리에요. 영화도 많이 제작되는 인기있고 유행하는 소재를 억지스러운 설정을 덧붙여 변주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09/03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점

크리피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외딴 주택가에 거주하며 가끔 TV에 출연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제자 린코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인 고교 동창생 노가미가 연락해서 8년 전 일어났던 미제 사건인 혼다 일가 실종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노가미는 다카쿠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실종된 후 다카쿠라 옆집 노모녀 화재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다카쿠라의 옆집 니시노 일가의 수상쩍은 가족 관계가 점차 불거졌고, 결국 니시노의 폭주가 일어나는데...

격조했습니다. 인륜지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대사인 "이사"를 하느라 지난 한 주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네요.

어딘가의 멋드러진 소개글을 보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출세작이지요. "검은 집"처럼 평범함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싸이코패스의 가공할 범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초~중반부는 인상적입니다. 다카쿠라가 거주하는 주택 단지 구성이 8년 전 히노 시에서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 현장과 유사하다는게 드러나고, 옆집 남자 니시노와 가족이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그 집 딸이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그 뒤 급작스럽게 옆집 남자가 돌변하여 폭주하는 과정까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니시노가 식칼을 집어들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알고 봤더니 옆집 남자 니시노가 모든 연쇄 살인의 범인인 "위장 살인마"이며, 그의 정체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실종된 후 결국 사체로 발견된 형사 노가미의 형 야지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좋았던 중반부를 지나 노가미가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통해 야지마의 범행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후부터는 힘이 빠져버립니다. 370페이지라는 분량에서 240~50페이지 정도가 되면 진상이 밝혀지는데, 이후는 완전히 사족입니다. 너무 일찍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버리니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이렇게 쉽게 밝혀질 것을 뭐 이리 질질 끌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사도 어설펐고요.

게다가 마지막 반전 — 야지마가 죽인 줄 알았던 노가미는 사실 전처 소노코가 죽였다, 야지마는 뒷처리를 도와준 것일 뿐이다, 편지 역시 소노코가 쓴 것이다 — 는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정의감을 불태운 줄 알았던 노가미가 형 야지마 못지않은 쓰레기일 뿐이었다는건 독자를 우롱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상을 밝히는 다카쿠라의 추리도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소노코의 양녀 유가 사실은 실종된 여고생 미오였고, 야지마는 이미 소노코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리기 위한 억지 전개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야지마가 구태여 오와다 옆집에 살면서 정보를 캐내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뭔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 다카쿠라와 여대생 린코의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는 야지마와의 최종 대결에서 오와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 것 이외의 가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린코는 비중에 비하면 하는 것이 너무 없거든요. 비중을 볼 때 다카쿠라의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최소한 범죄 심리학 전문가로서 뭔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장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악의 천재 야지마의 능력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점입니다. 작품의 설득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야지마가 어떻게 가족들을 지배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작중 묘사된 정도로는 설득력이 너무 약해요. 다카쿠라가 잠깐 설명한 대로 공포와 협박, 좁은 공간의 3가지가 갖춰져 마인드 콘트롤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외부 활동을 했음이 분명한 아들과 딸이 잠자코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따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는 탓입니다. 비슷하게 싸이코패스의 치밀한 범죄가 그려지는 작품들 — 앞서 말씀드린 "검은 집"을 비롯해서 — 은 동기는 물론 범행 과정에 있어서도 범행의 현실성을 높게 그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확연히 비교되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역대급 초반부를 지녔지만 중반부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님의 리뷰에 100%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금 조사해보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요소 (린코, 반전 등)를 다 쳐내고 범죄 심리학자 다카쿠라와 형사 노가미 (그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다니모토)가 악의 천재 야지마와 대결하는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낸다면, 즉 선–악 구도를 명확하게 각색한다면 소설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7/08/06

나만이 없는 거리 Another Record - 산베 케이, 니노마에 하지메 / 강동욱 : 별점 1.5점

켄야는 37명을 죽인 연쇄살인범 야시로의 항소심 국선 변호인을 맡았다. 야시로는 직접 쓴 수기가 발견된 뒤, 책임 능력이 인정되지 않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상태였다. 아울러 그는 과거 켄야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으로, 친구 사토루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켄야는 한 명의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사건에 임하는데...

만화 "나만이 없는 거리"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준다는 소설입니다. 자주 찾는 lion heart님 블로그에서 정보를 접하고 관심이 가던 차에, e-book으로 출간되었길래 구입해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분량이 범인 야시로의 수기로, 그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설명에만 집중합니다. 원작 만화 최고의 강점이었던 범인과 사토루의 불꽃튀는 대결, 긴장감 넘치는 심리 묘사는 찾아볼 수 없고, 별다른 수수께끼 풀이나 만화에 있던 떡밥 해결 역시 전무합니다. 한마디로 별개의 책으로 나올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물론 수기를 통해 야시로가 다른 평범한 싸이코패스와는 다르다는 점은 충분히 부각됩니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을 인용해가며 일종의 '선지자'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는건 나름 괜찮았고요. 그냥 나쁜 놈은 아니고, 피해자들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건 신선하게 느껴졌거든요.
인생은 별 거 없고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타성'으로 살아갈 뿐이라는 범행 초기 발상도 꽤나 그럴 듯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 넘쳐나는 바보들에 대한 시선 -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버려 두면 한없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생물이며 '권리'나 '평등'이 공짜라고 착각한다. - 은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기에 공감이 갔고요.
켄야가 야시로의 국선 변호인이 되어 변호를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설정도 꽤 - 켄야와 야시로의 관계만 떠나서 본다면 - 그럴싸했습니다. 의뢰인이 사실은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 변호인의 딜레마와 비스무레하긴 하지만요.

그러나 이외에는 건질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괜찮다고 말씀드렸던 야시로의 동기부터가 사실 문제에요. 그 자체는 설득력있고 나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야시로 캐릭터에는 마이너스인 탓입니다. 만화에서 순수한 절대악으로 보였던 캐릭터가 흐려졌으니까요. "서른 명이 넘게 죽였지만 사실 야시로도 사연이 있었습니다!"라는건 그냥 나쁜 놈, 싸이코패스 보다도 못한 설정으로 보였어요.
게다가 서른 명이 넘는 어린 소녀들을 죽인 놈이 '굴복하지 않는 마음, 용기가 중요하다.',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한 명이라도 더 못 죽여서 아쉽다'가 이 쓰레기에게는 더 어울리죠. 심리 서스펜스물이 감동의 인간 드라마로 돌변하는데, 그 시점이 연쇄살인마 야시로라는건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또 수기에서 언급되는 '스파이스'가 누구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수수께끼처럼 다루어지지만 이것은 일종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외려 진짜 핵심은 마지막에 야시로가 주인공 후지누마 사토루의 타임 슬립을 알아챘다는 건데, 이 역시 만화를 읽은 독자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진상은 아닙니다. 알아챈 이유도 설득력이 부족하며, 수기만 읽고 켄야가 이걸 눈치챘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그 외에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묘사들도 그닥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귀가 들리지 않는 남자의 커뮤니케이션에 '권총'이 필요했다는 장면이 대표적으로, 이 이야기가 '살아있는 한 인간은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도저히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켄야가 '의뢰인을 위해' 변호를 하는 모습을 더 잘 보여주었더라면 오히려 괜찮은 법정물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닙니다. 원작 만화나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고 글을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 탓에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만화의 인기에 기대어 책 한 권 더 팔아먹으려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해 보입니다. 점수를 그나마 약간이라도 준 이유는 그리 히트하지 않은 작품의 외전격 완결편 소설까지 국내에 발간해 준 출판사의 정성 정도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 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해졌다. 며칠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했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렸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서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까운 편입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 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결정적 단서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럽습니다.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탓입니다.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08/12/23

소년탐정 김전일 2부 7 - 아마기 세이마루 / 사토 후미야 : 별점 1점

소년탐정 김전일 2부 7 - 2점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김전일 2부 최신권입니다. 부제목에 적힌대로 "혈류실 살인사건"과 "후도고교 축제 살인사건" 이라는 두개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혈류실 살인사건"은 후도고교가 매년 실시해온 바둑부 합숙 대결에 부원 부족으로 억지로 참가한 김전일, 그리고 인솔교사 대리로 참가한 겐모치 경감 앞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후도고교 축제 살인사건"은 제목 그대로 축제기간 중 사진부 메이트 카페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고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너무나도 재미없고 단순한 이야기였습니다. 혈류실 살인사건의 경우 목을 벤다는 등의 작위적인 알리바이 트릭이야 그렇다쳐도 다이잉메시지를 남긴 방식이나 동기도 설명하기 어려운 등 문제점이 산적해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기"가 뚜렷한 인물이 한명 있다는 점에서 구태여 김전일이 나설 필요가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현역 경시청 경감과 명탐정의 손자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르다니... 이건 범죄 계획을 넘어서서 살인 그 자체에 집착하는 싸이코패스 수준아닌가요?

후도고교 축제 살인사건의 경우도 동기에 관련해서 경찰 조사만 병행되었더라면 어차피 밝혀졌을 범행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트릭인 "커피잔 따뜻하게 만들기" 가 지나칠 정도로, 정말 황당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 트릭이어서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과학적으로 포장하긴 했는데 너무 변수가 많은 트릭으로 생각되거든요. 그나저나 이놈의 고등학교는 왜 아직도 폐교를 안하는거야?

어쨌건, 결론을 말하자면 아마기 세이마루의 능력도 여기까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젠 제발 그만 나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네요.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건만.... 때문에 별점은 1점입니다. "김전일"의 제목을 달고 나와서 어처구니 없는 트릭으로 일관하는 추리만화에게는 절대로 좋은 점수를 주고싶지 않군요. 에잇 저주해 버릴테다.

2010/06/07

분노의 늑대 - 고이케 가즈오 / 고지마 고세키 : 별점 1.5점

원제 "子連れ狼"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아들을 동반한 검객"으로도 잘 알려진 고전 시대극 만화입니다. 주말에 이래저래 집안에만 처박혀 있다가 한번에 읽어버렸습니다.

기본 설정은 당대의 인기작답게, 영화로도 여러편 나왔을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아들을 일종의 무기창고이자 방패와 썰매로도 활용하는 만능(?) 유모차에 태우고 전국을 헤메는 사연많은 최강 사무라이와, 그를 잡으려는 일본 막부 배후의 실력자 야규 가문의 승부를 큰 축이지요. 여기에 주인공인 수구류의 오가미 잇토가 의뢰금 500냥으로 벌이는 다양한 자객 활동이 양념처럼 곁들여진 구성입니다. 다양한 장비가 갖추어진 리어카와 주인공의 먼치킨적인 속성, 그리고 어떤 적도 베어버리는 전쟁용 칼 동태관의 존재는 이 작품이 "베르세르크"에 큰 영향을 준게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참신한 설정과 비교적 괜찮은 자객 활동 에피소드들에 비하면 전체적인 큰 줄거리는 쓰레기라 해도 될 정도로 함량미달이었습니다. 김성모 화백의 만화를 보는 친숙한 느낌이 들 정도로요.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오가미 잇토가 너무 강하다는 것입니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1:1로 상대가 될만한 인물은 야규 가문의 수장 야규 레츠도 단 1명일 뿐입니다. 그 외에는 수 백명이라 하더라도 모두 칼을 든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심지어는 완전무장한 군대와도 승부를 벌여 이길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이렇게 강하면 처음부터 집을 습격한 야규 일당을 다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레츠도와 승부하면 깔끔했을텐데 왜 4년이나 방랑하며 자객활동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가미 잇토라는 캐릭터도 문제가 많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승리를 위해 3살박이 아들을 이용하는데다가 비밀장치가 숨겨진 유모차로 적들을 학살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는 싸이코패스인 주제에 명부마도를 걷고있다고 정당화시키니 이거야말로 자기합리화의 극치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에게 진정한 사무라이 정신을 운운한다니 이런 철면피 같으니라고!
야규 레츠도 역시 뒤로 가면 갈수록 야규가문을 위해 오가미를 모함한 악당에서 어느새 무사도 정신에 투철한 진정한 사무라이로 캐릭터가 바뀝니다. 흥행을 위한 선택인건 분명한데 문제는 악역으로 긴급 투입한 정부의 순역 가이이입니다. 초반의 두뇌파 악당 역할은 잠시일 뿐 곧바로 찌질이 개그캐릭터로 돌변해 버리는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중반부의 결전 이후 "야규봉회장"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야기는 산으로, 달로, 안드로메다로 저 멀리 가버리는 김성모 스타일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제일 웃기는 것은 오가미 잇토가 비밀을 알아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야규봉회장"이 결국 아무 역할도 못한다는 겁니다. 거의 10권 넘는 분량을 무슨 대단한 비밀인양 취급하더니 마지막은 아무 상관없는 그냥 1:1 대결이라니..... 대체 이것때문에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은 뭐였던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40권이나 되는 분량을 한번에 읽게끔 하는 김성모적인 재미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설정 (예를 들자면 "동반검객")은 마음에 들기에 별점은 쓰레기급에 조금 얹어서 1.5점입니다만, 유명세와 영향력에 비하면 너무 실망이 컸습니다. 야규와의 승부보다 자객활동하면서 벌어지는 잔잔하면서도 의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더 좋았는데 차라리 이런 에피소드 중심의 외전이 나온다면 훨씬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2020/05/09

이웃집 소녀 - 잭 케첨 / 전행성 : 별점 2점

이웃집 소녀 - 4점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크롭써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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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에서 구라타 히데유키가 이 책을 산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오늘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극찬했던 말 때문에 구입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제 취향과는 백만광년정도 거리가 떨어진 작품이더군요. 너무나 예쁜 소녀 메그에게 닥치는 처절한 학대가 이야기의 골자로, 미국 시골에서 벌어지는 무식한 광기를 극한으로 그려내는데 묘사가 너무 끔찍한 탓입니다.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어요.

시골 촌 사람들의 비뚤어지고 무식한 광기를 극한으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의 "1922"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끔찍한 묘사도 그에 못지 않고요. 그러나 순수한 픽션으로 나름 '공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킹의 작품과는 다르게,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혐오스럽다는 감정밖에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무식한 아이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학대의 주체인 루스의 언행 하나하나 모두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이 벌이는 고문과 폭행도 마찬가지거든요. 왜냐하면 이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싸이코패스들이 모여서 벌이는 광기의 축제인데, 이를 생생한 작가의 묘사력으로 그려낸 탓에, 더욱 혐오스럽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고요. 

주인공 데이비드가 이들에 휩쓸리는 과정과, 나름대로 이들에 맞서 펼치는 발버둥도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뭔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해 보여서 기분도 별로였고요. 그나마 루스를 살해하는 데이비드의 행동도,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보다는 자위행위와 같은 감정의 배설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 차라리 그녀가 대중의 질타를 받으며 죗값을 받는게 더 큰 형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이 정도면 너무 쉽게, 편하게 죽은 셈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후의 에필로그, 데이비드의 어정쩡한 인생과 루스의 아들 중 한명인 우퍼가 살인마가 되었다는 뉴스 등도 사족일 뿐입니다. 다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그리고 있지 않아서 애매하기도 하며, 솔직히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아요. 잔혹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정상적으로 살 수 없었다는 결말을 그리려고 한 모양인데 이건 너무 뻔하죠.
이렇게 작가의 의도가 뻔하게 드러나는 설정과 묘사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루스가 엄청나게 예뻤고, 그림에 대해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소녀였다는걸 독자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뻔하다는걸 부인하기 힘듭니다. 

전개가 흡입력 있고, 묘사가 걸출하다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읽는내내 끔찍했고 혐오스러웠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드코어 포르노 혹은 하드고어 호러물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잔혹함이 극대화되었던 범죄들, 예를 들자면 일본 시멘트 살인 사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소설처럼 재구성하기 보다는, 실제 사건에 대한 논픽션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좀 객관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는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촉법 소년' 들이 일으키는 범죄에 대해서 용서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루는게 맞지요.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어리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되는 어처구니 없는 법이 시정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19/08/02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2점

죽여 마땅한 사람들 - 6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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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회사를 운영하는 테드 스버슨은 아내 미란다가 건축업자 브래드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실의에 빠졌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은 죽어 마땅하다며 테드가 직접 행동에 나설걸 촉구했다. 릴리에게 빠져든 테드는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브래드가 선수를 쳐서 테드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릴리는 그 둘을 직접 응징하려 하는데...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상당히 좋았던 미국 스릴러입니다. 오쟁이를 진 남편이 살의를 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의 설득 때문이라는 시작은 독특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책 뒤 해설을 보니 영향을 받은 듯, 안 받은 듯 모호하게 쓰여져 있기는 한데 최소한 작가도 존재를 알고 있었던건 분명하네요. 첫 만남 당시 릴리가 읽고 있던 작품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 이니까요.

평이 좋은 이유는 일단 잘 알 수 있습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거든요. 흡입력있는 신선한 전개도 아주 좋고요. 중반부까지 테드와 릴리의 시점을 각각 오가는데 테드의 시점은 릴리를 만난 다음부터의 현재이며, 릴리의 시점은 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두 시점이 합쳐지는 순간, 테드는 살해당하고 이는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줍니다. 그 뒤에도 릴리와 미란다 시점, 미란다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 킴볼 시점과의 교차 전개가 계속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드에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릴리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인상적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싸이코패스로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스타일인데,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보다는 제목 그대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만 죽인다는 차이점이 명확합니다.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추진력, 결단력 역시 매력적이고요. 그녀를 실존하듯 그려낸 묘사도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을 - '낸시 드류' 시리즈를 포함해서 - 좋아했던 소녀로 그려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인 미란다와 브래드 설정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불륜 관계가 아니라 테드를 살해한다는 전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킴볼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를 쓰는게 취미일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연히 쓴 음란한 시가 발목을 잡게 된다는 복선도 치밀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릴리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에릭을 살해한 범행만큼은 돋보입니다. 에릭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견과류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먹인 뒤, 치료제를 숨겨 질식해 사망하게 만드는데 사고사로 보이게끔 다양한 조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견과류는 미리 갈아서 요리에 섞어두었고, 범행 전 에릭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펍에서 열리는 술 먹기 대회에 참여하게 만드는 등의 작전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에릭이 실수로 요리를 먹고, 치료제도 찾지 못해 죽었다고 경찰은 생각하게 되지요.
경찰 킴볼이 의외로 유능해서 릴리와 테드의 관계, 릴리의 거짓말과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도 볼거리입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경찰력에 상당한 신뢰를 갖게 만들 정도에요.

그러나 다른 범행은 그닥입니다. 릴리가 미란다와 브래드를 살해하는 핵심 범행부터가 그러합니다. 특히 브래드를 설득해서 미란다를 죽이게 만든다는 계획이 최악이죠. 브래드가 미란다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릴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란다, 브래드를 살해한 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의 묘사도 나쁘지는 않지만 도로의 CCTV에 촬영되거나 도로 요금소에서 목격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 도로 CCTV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추적이 불가능했을지?에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릴리가 저질렀던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유아 성애자 챗을 숨겨진 우물에 떨어트려 죽인 뒤 챗의 모든 짐도 같은 장소에 버린 첫 범행부터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자체의 설득력부터 부족한 탓입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는 했지만 챗이 우물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지나치게 잘 풀린 느낌이에요. 차라리 뚜껑을 덮고 굶어죽도록 놔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당장은 살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문제에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릴리가 충동적으로 킴볼을 칼로 찔러 체포되는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주대낮에 현역 경찰에게 직접 흉기를 휘두르는건 빠져나가기 힘든 범죄니까요. 킴볼을 없애려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범행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치밀해 보였던 릴리 캐릭터가 막판에 급작스럽게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래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범죄 천재로 보였지만 그냥 어설픈 정신병자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범행들도 어설픕니다.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미란다의 계획? 당연히 실패했을겁니다. 범행 당시 브래드의 인상착의가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릴리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면 킴볼 등 경찰의 수사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거에요. 작 중에 등장하는 것 처럼 가짜 증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테드가 충동적으로 릴리가 근무하는 대학 도시 윈슬로를 방문한 것, 릴리가 테드 사망 후 케네윅을 방문해서 숙박한 것 등의 자잘한 실수도 눈에 뜨입니다. 테드의 실수는 릴리를 곧바로 수사 선상에 올리게 만드니까요. 테드가 미란다보다 선수쳐서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래서야 완전 범죄가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테드와 릴리가 서로 끌렸다는 설정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응징하겠다는 테드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니 등장하니만 못했고요.

작위적인 설정도 많습니다. 테드의 아내 미란다가 에릭과 바람이 났던 대학 시절 친구 페이스이며, 우연히 만난 줄 알았던 릴리와 테드의 만남도 어느정도 계획된 것이라는게 밝혀지는 것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정말로 범행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마지막에, 릴리가 시체를 유기했던 초원 지대가 재개발된다는 마무리도 작위적입니다. 이런 류의 개발 계획을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몰랐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물 설정 및 묘사, 그리고 전개는 뛰어나지만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라 감점합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천재 여성 범죄자가 별볼일 없는 정신병자라는 결말도 실망스럽고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5/01/23

연쇄살인범 지도 매핑 - 브렌다 랠프 루이스 / 이경식 : 별점 2점

연쇄살인범 지도 매핑 - 4점
브렌다 랠프 루이스 지음, 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이런 류 연쇄살인범 관련 논픽션은 그동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꾸준히, 많이 읽어왔습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애호가로서의 흥미, 그리고 창작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자료 및 아이디어 확보 측면에서 말이죠. 허나 세계적인 연쇄살인마가 흔한 것도 아닌만큼 몇권 읽으면 충분하기는 합니다. 특히나 미국에서 발표된 책이라면 미국 중심이기에 미국의 유명 살인마들 - 에드 게인, 테드 번디, 샘의 아들, 나이트 스토커 등등 - 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연쇄 살인범의 범죄 행각을 지도에 매핑했다는 제목에서 뭔가 색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든요. 미드 <넘버스>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수학자 동생이 무작위로 보이는 범죄 행위가 실제로는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수학이론을 통해 밝혀내고 (범인이 범행 장소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숨기기 위해 무작위적으로 범행 장소가 바뀌지만 이러한 무작위는 외려 작위적인 수열을 형성하므로 그 시작점을 수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 범인이 어디 있을지 추론하던 에피소드였죠.

그러나... 지도 매핑은 그냥 범죄 행위를 지도에 그려놓은 것일 뿐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지도가 실려있을 뿐 연쇄살인범들과 그들의 범죄행각을 요약해서 소개해주는 방식은 다른 책들과 대동소이해요.
물론 이 책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가 별 정보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없는 것 보다는 당연히 있는 것이 낫고 그 외의 도판들, 예컨데 피해자 사진들이 조금 더 많이 수록되어 있는 점도 괜찮았어요.
무엇보다도 다른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비키니 살인마 찰스 소브라즈, 트럭 운전사 연쇄 교살범 폴커 에케르트 등의 연쇄살인마들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서는 나름 가치가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씌여졌기에 최근의 범죄, 배낭여행객 살인자 이반 밀라트나 유명한 사건이었던 워싱턴의 저격수 존 앨런 무하메드와 리 보이드 말보, 베르사체 저격범 이야기가 실려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얼마전 보았던 영화 <툼스톤>의 원작 <무덤으로 향하다>의 범인들 모델로 생각되는 싸이코패스 컴비인 태평양 연안 고속도로 살인마 비태커와 노리스 이야기도 충격적이고 놀라왔습니다.


다른 책들에 비해 소설처럼 조금 더 생생하게 쓰여진 것과 체포와 수사 과정 및 범인들이 체포된 이후 사법거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던가, 사형을 기다리고 있다던가, 사형을 당했다던가, 아니면 놀랍게도 해당 국가의 형법이 정해져 있어서 석방되었다던가! (안데스의 괴물 페드로 로페즈) 등의 후일담까지 꼼꼼한 것도 특징입니다. 이반 밀라트 차에 탔던 영국인 여행자가 가방과 여권을 모두 버려두고 달아난 사례처럼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경우 의외로 살아난 경우가 많거나, 최소한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허나 장점보다는 제목에 낚인 듯한 기분도 크며 내용도 아주 새롭거나 하지는 않아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제 이런 책은 좀 많이 지겹습니다...

그나저나 외국 살인자들은 자칭이건 타칭이건 별명이 있는데 참 기묘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별명을 붙이면 장난스럽다고 엄청 공격받을 것 같은데 말이죠. 국가마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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