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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3). - 아야츠지 유키토

### 4. '금단의 계곡'의 젊은이들
같은 8월 1일 오후. 장소는 바뀌어, 여기는 M** 마을 사람들이 '금단의 계곡'이라 부르는, 돈돈산의 서쪽이다.
돈돈다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파이프 바위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꺾이는 샛길이 있다. 경사는 동쪽에 비해 훨씬 완만하고, 발밑 상태도 좋다.
자세한 위치 관계는 첨부된 지도(27페이지 "현장 부근 약도")를 참조해 주시고, 이 길을 내려가 만나는 계곡의 한 구석에 어제 저녁부터 두 개의 빨간 텐트가 쳐져 있었다. 포우가 말한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인들"의 일행이었다.

*
"요우지. 유키토는 어디 갔어?"
물길에서 돌아온 반 다이스케가 나무 그늘에 앉아 계곡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아사노 요우지에게 말을 걸었다. 요우지는 스케치북에서 눈을 들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글쎄"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사키를 또 괴롭혀서 혼내줬더니, 혀를 내밀고 도망갔어."
다이스케는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렇듯, 유키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머리도 나쁘고 난폭하며, 성격도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나이에 맞는 분별력도 전혀 없다. 저 아이가 내 친동생이라니, 정말 한심하고 어쩔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이스케는 H**대학 이학부 2학년으로, 이번 봄에 스무 살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해, 틈만 나면 이렇게 가까운 산으로 캠프를 오곤 했다.
이번 일행은 다이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중학교 때부터 산행을 함께했던, 소꿉친구인 아사노 요우지. 같은 H**대학 문학부 2학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대학에서도 미술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
그의 여동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사키.
요우지의 미술 동아리 후배로, 사키의 남자친구이기도 한 사이토 사카에.
그리고, 다이스케의 동생 유키토.
캠프 계획은 다이스케와 요우지가 세웠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사키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본래 목적이었고, 사이토 사카에를 초대한 것은 요우지였다.
처음에는 네 명이 갈 예정이었지만, 유키토가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거절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울부짖는다. 엄하게 꾸짖으면 엄청난 소리로 운다. 부모님도 늦둥이로 태어난 유키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래서 결국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유키토는 골칫덩어리다.
최근 초등학생 치고는 작고, 겉모습은 얌전해 보이지만, 제멋대로 자라서인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발달이 현저히 늦어졌다. 열두 살이 되어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별을 거의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싸움을 하고 수업을 빼먹는 문제아였다. 아직 잡힌 적은 없지만, 도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이웃집 고양이를 모닥불에 던져 죽인 일도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유키토의 소행이었다. 새해 첫 참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데려가면, 주차된 차의 타이어에 못을 박거나, 커터칼로 다른 사람의 옷을 찢는 등, 범죄에 가까운 나쁜 장난을 일삼았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언젠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될 게 뻔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유키토가 그런 행동이 "나쁜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미 삼아 하는 것이다. 어딘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다. 특히 국어와 사회는 최악이라, 이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한탄했다. IQ는 그렇게 낮지 않고, 오히려 우수한 편이라지만…….
"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텐트 안에서였다. 바로 아사노 사키가 뛰쳐나와 오빠 요우지에게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거 봐요, 오빠. 내 배낭 안에……"
투명한 비닐봉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 안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또 그 애 장난이야."
"정말 미안해, 사키."
다이스케는 황급히 사과했다.
"나중에 잘 말해둘게."
"유키토를 데려온 건 정말 실수였어."
라고 요우지가 말했다.
"정말이야! 이제 지긋지긋해."
사키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졌다. 아까는 스치면서 유키토에게 가슴을 만졌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유키토는 최근 여성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앞날이 걱정되어 다이스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말하긴 그렇지만, 그 애는 정상 아니야. 분명 어딘가 이상해. 어제도 내 엉덩이를 만지고, 나중에 바지를 보니 빨간 손자국이 있었어. 아마 피였을 거야.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해."
다이스케는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이토 사카에가 능선길 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혼자 산책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사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또 유키토야? 뭐, 뭐.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상대는 아이잖아."
사카에는 아주 느긋한 태도였다.
"사이토 군. 유키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위쪽에서 봤어요. 저쪽 다리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더니, 혀를 내밀었어요."
"다리라면, 막다른 곳에 있는 출렁다리?"
"네."
위험하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아무리 문제아라도, 역시 동생은 동생이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유키토에게 관대한 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흥. 저런 녀석, 계곡 아래로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
사키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 5. 유키토의 수난
반 유키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가 좀! 도와줘!"
아까부터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넓은 산 속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의 캠프까지는 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라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다리 앞에 있던 그 더러운 표지판. 거기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경고였을까?
"노후화로 위험"—그 글자는 국어를 잘 못하는 유키토는 읽을 수 없었다.
현수교를 건너는 것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쳤다. 양손으로 로프를 더듬듯이 잡으며, 군데군데 큰 틈이 난 판자 위를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씩 갈 때마다 다리 전체가 삐걱거리고 흔들렸는데,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재미있었다. 점점 흥분한 나머지,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뛰어갔는데, 그 순간이었다. 유난히 큰 삐걱거림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다리의 형태가 무너졌다. 다리를 지탱하던 로프가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유키토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계곡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하의 악동 유키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너편까지는 20미터 가까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로프 한 줄과 거기에 매달린 몇 장의 판자뿐이었다. 강한 바람에 휘말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로프에 손을 대보았지만, 크게 흔들리더니 남아 있던 판자가 계곡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유키토의 체중을 견딜 수 없다. 이쪽 길은 절벽 때문에 2미터 정도만 가면 막힌다. 주위는 모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한 절벽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유키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다. 작은 그늘도 없는 천연 발코니였다. 이대로 2, 3시간만 이 뜨거운 햇볕 아래 있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유키토는 간절히, 매주 보고 있는 TV 속 변신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빌었다.
"도와줘…"
이제는 외치는 것도 지쳐갔다. 이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려던 그때,
"유키토!"
능선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다이스케의 목소리였다.
"형!"
유키토는 손을 흔들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부서진 현수교 건너편에 다이스케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야, 형. 도와줘."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
다이스케가 큰 소리로 답했다.
"기다려. 지금 모두를 데리고 올 테니까. 알겠지? 거기서 움직이지 마. 무리하지 마!"
"—알았어."
"괜찮아. 금방 돌아와서 도와줄 테니까. 아무튼 가만히 있어."
그리고 다이스케는 몸을 돌려 능선 길로 돌아갔다. 오후 2시 반의 일이었다.

### 6. 다가오는 그림자
다이스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키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쏟아지는 햇볕의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인 유키토도 이 상황에서는 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오지 말 걸, 그런 짓을 하지 말 걸...'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유키토는 그대로의 자세로 다이스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의를 품은 어떤 존재의 그림자가 다리 건너편에 나타났을 때도, 유키토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M** 마을의 오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숲이 끊긴 곳에 생긴 광장에 모여, 모두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옷을 벗고 건강하게 뛰노는 아이들, 나무 그늘에서 바느질을 하는 젊은 여자들… '수염의 노사' 포우는 광장 한쪽에 있는 노천 온천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그런 마을의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희미하게, 무언가 이상한 외침이 들려왔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지금 그 소리는?'
중얼거리며 포우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흰머리가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출렁다리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오후 2시 40분의 일이었다.

*
다이스케가 캠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50분이었다. 능선길을 따라 곧장 달려와, [샛길 C](지도를 참조할 것)를 뛰어 내려왔다.
나무 그늘에 깔린 그라운드 시트 위에 사키가 누워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텐트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사키, 사키야!"
"응?"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사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다이스케를 보고,
"무슨 일이에요, 반 씨? 그렇게 급하게."
"큰일났어. 요우지와 사이토 군은 어디 있어?"
"무슨 큰일이죠?"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요우지가 텐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이스케는 서둘러 사정을 설명했다. 요우지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아랫입술을 내밀었고, 사키는 "꼴 좋다"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흠. 그거 우리만으로는 어쩔 수 없겠네."
요우지가 말했다.
"어쨌든 빨리 돈돈 마을로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해야겠어."
"부탁해. 나는 다리로 돌아갈게. 사이토 군은 어디에 있어?"
"낚시하러 계곡으로 내려갔어."
라고 사키가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사키는 여기서 대기하고, 그가 돌아오면 함께 다리 쪽으로 와줄래?"
말을 끝내자마자, 다이스케는 뒤돌아섰다.

### 7. 유키토의 최후
다이스케가 돈돈 다리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다. 같은 경로를 거쳐 올라왔지만, 능선까지는 오르막길이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서두르지 말자,' 라고 여러 번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다리의 상태를 생각하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키토를 진정시키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다행히 날씨가 나빠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다리 앞에 도착했다.“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붙잡고 체중을 지탱하며,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하려고 다리 너머를 보았다. 그때――.
다이스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유키토가 없었다.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20미터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시야는 탁 트여 있었고, 다이스케의 시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서진 다리의 모습도 아까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곧이어 다이스케는 다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리 중앙에 도착하자, 그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다이스케는 유키토의 작은 몸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은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절망을 억누르며 다리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해야 유키토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곧 알게 되었다. 유키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다이스케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유키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유키토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며, 다이스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
사이토 사카에는 캠프를 떠나 혼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고 고생을 했지만, 결국 본류의 돈돈 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가에 서서 사카에는 오른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돈돈 다리라는 현수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양쪽 절벽에는 끊어진 로프가 늘어져 있었고, 강가에는 다리의 잔해로 보이는 나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카에는 조심스럽게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나아가다 문득, 건너편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키토?"
그는 소리쳤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은 불어나고 흐름도 거셌다. 어디서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사카에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몇 미터쯤 위쪽으로 가보니, 여기저기 바위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었다. 저 바위를 따라 건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카에는 낚싯대 등이 들어있는 배낭을 강가에 던져두었다.
여러 번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려가 보니, 쓰러져 있는 것은 역시 유키토였다.
"이봐, 괜찮아?"
소리치자, 그에 답하듯 소년의 입에서 "으으"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이봐."
"……으으"
사카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이 위에서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봐, 유키토. 이봐."
등을 받치고 여러 번 불러보았다. 유키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여다보니, 갈라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으……으……"
어쩐지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듯했다. 유키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뭐?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당했다……"
"뭐라고?"
"……밀……쳐……졌……"
소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했다" "밀쳐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는 바로 다잉 메시지였다. 그리고——.
"사……사……아……"
그렇게 결국, 악동 유키토는 숨을 거두었다.

### 8. M** 마을의 소동
돈돈 다리의 북쪽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정보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정찰을 다녀온 엘러리가 전해주었다. 죽은 사람은 유키토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어제부터 '금단의 계곡'에 머물던 외지인들 중 한 명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유키토는 문제의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다"고 했다.
포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며, 좋아하는 도토리를 씹어 먹으면서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엘러리,"
마침내 포우는 엄숙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젊은 리더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일을 나에게 맡겨보는 게 어떻겠느냐?"
"맡기죠,"
엘러리는 대답했다. 포우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모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좋다, 우리 중에 이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금단의 계곡'에 간 카도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우리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된 소년의 동료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포우,"
엘러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년은, 하지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살인, '금기를 어기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더럽혀진 땅'에 온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죽였다는 것은, 이중의 '더러움'이 아니겠느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러리는 반론하지 않았다. 포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리 쪽에서 그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장에 있었다. 그때 여기에 없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 여기서는 가칭 X라고 부르자, 그 X가 있다면, 당연히 그때 이 광장에 없었던 자일 것이다..."
모두에게 물어본 결과, 문제의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엘러리와 그의 아내 아가사, 엘러리의 두 번째 아내 올츠이, 그리고 엘러리와 아가사의 아들 카, 이 네 명 뿐이었다. 이 중 카는 어제 다친 이후로 여전히 누워 있었다.
"아가사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포우의 질문에 중간 키의 아름다운 여자가 일어섰다. 아가사였다. 그녀는 작년 봄, 숲에서 곰에게 공격받아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잃었지만, 그 기품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났다.
"저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중환자 상태인 자신의 아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올츠이는? 어떻게 했느냐?"
올츠이는 아가사보다 한참 작은 젊은 여자였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포우의 질문에 그녀는, 오후 내내 광장에서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엘러리, 너는 어떻게 했느냐?"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은 엘러리는 현재 리더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듯 강한 앞니를 드러내며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혼자서 숲 속에 있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저도 그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포우."
"흠."
고개를 끄덕이며 포우는, 그 비명 소리를 들은 후 잠시 지나 엘러리가 광장에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자. 돈돈 다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시간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그리고 포우가 광장에서 엘러리를 본 시간은 정확히 25분 후인 오후 3시 5분이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이번 장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은 "고뇌하는 자유업자" 린타로이다. 린타로가 그의 애견 타케마루와 함께 파이프 바위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곳에서 약 세 시간, 즉 오후 4시가 조금 넘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즉,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M** 마을에서 능선 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그 통나무 다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신의 시점'을 취하는 작가가 지문에서 이렇게 명시하고 있으니, 그 사실은 틀림없다.
작가의 인터뷰에 응한 린타로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 통나무 다리는 그 시간 동안 항상 제 시야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놓쳤을 가능성은 없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알아챘을 것입니다."
다만――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두 번 정도, 그의 발치에 있던 타케마루가 심하게 짖었다는 것이다. 타케마루는 겁이 많기 때문에, 아마도 풀숲에서 뱀이라도 보고 놀랐을 것이라고 린타로는 이야기했다.

*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 두세 가지 설명을 추가하겠다.
M** 마을 및 ‘금단의 계곡’의 캠프지에서 돈돈다리로 가는 길은, 첨부된 지도에 표시된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포우 일행만이 아는 비밀의 지름길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범람한 동쪽 지류에 대해서도, 그림에 표시된 것처럼, 적어도 파이프 바위 부근보다 하류 부분에 대해서는, 그 통나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더 상류로 돌아가면 바위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가령 포우가 말하는 X가 M** 마을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마을에서 돈돈다리까지 가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루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횡도 B]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2. 일단 [지류 A]의 상류로 돌아가서 강을 건너고, [횡도 D]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각 루트의 소요 시간을 기록해두자면, 1번 루트는 가는 데 35분, 돌아오는 데 20분, 2번 루트는 가는 데 1시간 반, 돌아오는 데 50분이 걸린다.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단 소요 시간이다.
가능성을 논하자면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돈돈다리까지 가는 루트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횡도 D]에서 한 번 능선길로 나온 뒤 [횡도 C]를 내려가거나, [지류 B]를 따라 계곡을 내려간 뒤 [횡도 A]를 올라 다시 능선길로 나오는 등의 극단적인 우회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정규 “길”을 통하지 않고 능선까지의 경사를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앞서 언급한 1번과 2번 루트에 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다.
추가로,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경우, 엘러리의 알리바이는 오후 3시 5분 이후 완전히 성립한다. 아가사와 올츠이에 대해서는 모두 오후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전혀 없다. 아가사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다고 하지만, 위독한 상태였던 카는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한편 캠프의 네 명은, M**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들은 오후 2시 40분 시점에서는 모두 단독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각자의 증언에 따르면――
- 다이스케: 모두에게 유키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능선길을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 사키: 캠프의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 요우지: 텐트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 사카에: 낚시를 하기 위해 [지류 B]를 내려가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사건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오후 2시 40분에 포우 일행이 들은 문제의 비명은 확실히, 유키토가 돈돈다리 북쪽 절벽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을 때 외친 목소리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인 작가가 지문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 틀림없다.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
○ 문제 1
반 유키토를 죽인 X의 이름을 맞춰주세요. X는 단독범으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 제3자의 범행도 아닙니다.
○ 문제 2
범행 방법은? X는 어떻게 유키토를 죽였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으로는, 연, 행글라이더, 낙하산, 기구, 괴인20면상이 애용하는 미니 헬리콥터 등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도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초능력이나 우주인, 이공간통로 등 초자연적인 존재나 개념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퍼즐 미스터리의 규칙에 따라, 본문에는 전혀 거짓된 기술이 없음을 여기에 명시합니다. 또한, 논리가 무의미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도 동일한 규칙을 설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X 이외의 것들의 대사에는 거짓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위 조건을 바탕으로 답을 제출해 주세요.
건투를 빕니다.


2025/11/21

다크 플레이스 - 길리언 플린 / 유수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5년 전, 오빠 벤이 저질렀던 가족 몰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리비 데이는 '킬 클럽' 라일의 요청으로 사건 재조사에 나섰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결정적 증언을 했던 리비는 조사를 통해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나를 찾아줘"로 확 뜬 길리언 플린의 또 다른 범죄 스릴러입니다. 568페이지라는 어마무시한 분량으로 제목은 주인공 리비의 어둡고 질척한 과거 추억을 의미하며, 리비가 이런 '다크 플레이스'의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지요. 

길리언 플린 특유의 치밀한 묘사가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데이 가족에게 닥쳤던 경제적 몰락, 심리적 붕괴, 특히 패티와 벤의 절망적인 내면 묘사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생생합니다. 읽다 보면 나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탕에 함께 잠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주인공 리비가 어린 시절 증언으로 벤을 교도소에 보냈는데, 25년이 지나 성금이 다 떨어진 탓에 오빠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돈으로 조사에 나서는 딜레마도 리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다가오고요.

전개도 여러 복선을 통해 정교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진범 중 한 명인 캘빈 딜이 '킬 클럽' 모임 초반에 언급되고, 리비의 도벽이 디온드라의 DNA를 입수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식으로요. 특히 벤을 흠모하던 크리시의 거짓 고발로 인해 패티가 아들 벤을 아동 성추행범으로 오해하게 되는 부분이 탁월합니다. 디온드라가 임신해서 벤은 중고 아기 옷을 잔뜩 사고 아이 이름을 정하기 위해 여러 이름을 노트에 써 두었는데, 이걸 본 패티가 심증을 굳히게 되거든요.
또 현재 시점인 리비의 시선과, 1985년 사건 당일을 시간대별로 따라가는 패티(엄마)와 벤의 시점을 교차해 보여주는 구성도 좋습니다. 현재 시점의 리비의 조사와 실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순서대로 이어지며 결국 진실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정통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고, 특별한 트릭이 있지는 않지만 결정적 장면 하나는 인상적입니다. 당시 살해된 미셸이 짝사랑하던 남학생 '토드 델헌트'의 이름을 크리스탈이 언급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데, 이미 살해된 가족만 아는 이야기를 만난 적도 없는 크리스탈이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리비는 미셸이 딱 9일 동안만 썼던 1985년 일기장에만 그 이름을 적었고, 크리스탈이 일기장을 읽었다고 추리합니다. 일기장은 범인밖에는 가져갈 사람이 없으니, 디온드라가 범인이라는 의미이고요. 이는 꽤 타당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지나치게 깁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인물도 별로 없는데, 그들의 심리 묘사가 많아서 읽는 내내 피로감을 느꼈고요. 그 중에서도 리비의 아버지 러너 데이와 벤의 여자친구 디온드라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로 거북했습니다. 읽으면서 여러차례 그만 두게 만들 정도로요. 

후반부로 갈수록 우연이 너무 과도하게 겹치는 점도 아쉽습니다. 사건 당일, 패티가 생명보험금으로 빚을 갚기 위해 캘빈 딜에게 자신의 살인을 의뢰한 날, 공교롭게도 디온드라가 집에 들어와 미셸을 죽이고, 이를 본 데비가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캘빈의 모습을 본 탓에 살해당했다는 전개는 너무 작위적입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거슬립니다.  벤이 디온드라의 가명을 문신으로 새긴 이유, 일가족 몰살이라는 대형 사고 이후 실종된 디온드라가 사건과 엮여 함께 수사되지 않은 이유처럼요. 그 작은 시골 동네에서 벤과 디온드라가 사귄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트레이마저 조사를 받았는데 말이지요.

디온드라가 미셸을 살해한 동기도 석연치 않습니다. 아무리 분노가 폭발했다고 하더라도, 10살 아이를 죽인다는건 영 납득하기 힘듭니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이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아울러 이 때 디온드라가 미셸을 살해하는걸 방조한 벤 역시 지은 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5년 동안의 수감 생활은 했어도 쌉니다.

결정적으로 절정부에서 리비가 크리스탈에게 공격받는 장면과 탈출극은 정말 억지스럽습니다. 크리스탈이 ‘토드 델헌트’라는 이름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리비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도 납득이 잘 가지 않았고요. 리비가 의심을 품기는 했지만, 그게 디온드라가 범인이라는걸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미셸의 침대 시트에서 디온드라의 DNA가 검출되었다는 점 역시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벤과 디온드라가 사귀었고, 디온드라가 벤의 아이까지 가졌는데 그녀의 DNA가 집 안에 남아 있는게 뭐가 그리 이상할까요? 미셸의 시신에서 디온드라의 DNA가 검출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그것도 아니라서 핵심 증거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25년간 디온드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벤이 진범이 그녀라고 밝힐 까닭도 없을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 특유의 문체와 분위기, 구성은 뛰어나고 완성도도 높지만 과한 작위성과 무리한 전개 탓에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길리언 플린 특유의 어두운 심리 묘사를 즐기고 싶은 독자라면 도전해볼 만하겠지만, 일반적인 추리 소설 독자에게는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영화화 되었지만 망했다는데, 이해가 됩니다.

2005/01/26

이상한 집 - 모리스 르블랑 / 도화진 옮김 : 별점 3.5점

이상한 집 모리스 르블랑 지음, 도화진 옮김/태동출판사

여배우 레진느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를 선보이는 오페라 극장에서의 패션쇼에서 갑자기 화제가 발생하고 레진느가 납치된다. 그녀는 다이아몬드를 빼앗기고 겨우 풀려나지만, 모델 아를레트가 동일 인물에게 같은 장소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모험가 장 당느리는 그 장소가 유명한 자선사업가 멜라미르 백작의 저택임을 밝혀낸다. 

장 당느리, 다이아몬드 상인 반 후벤 등과 동행했던 베슈 반장은 현장에서 백작을 검거하고 백작의 가문에 이상한 도벽의 피가 유전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사건은 거의 해결되는 듯이 보이지만 정체불명의 호남아 앙투완느 파즈로가 등장하여 관련 인물들을 소집한 뒤 백작의 무고를 주장하여 백작은 풀려나게 된다.
앙투완느 파즈로는 장 당느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를레트의 환심조차 얻어 그녀와 결혼까지 발표하게 되며 장 당느리는 질투와 사명감에 불타 파즈로의 정체와 사건의 진정한 흑막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아르센 뤼뺑 시리즈 중 한권. 원래 이 시리즈는 성귀수씨가 번역한 까치글방 책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마침 자주가던 헌 책방에 이 태동출판사 책이 싼값에 나와 있어서 그냥 구입해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번역 등은 괜찮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책이 작고 가벼워서 마음에 들더군요.

일단 뤼뺑은 자신의 본명 대신에 요트로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온 모험가 장 당느리 자작이라는 인물로 등장하여 활약하는데 무려 3명의 여성을 유혹하는 바람둥이로서의 뤼뺑, 불가사의한 범죄를 풀어내는 탐정으로서의 뤼뺑, 정체가 밝혀지기까지 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가볍게 탈출하는 뤼뺑, 베슈 반장을 데리고 노는 뤼뺑 등 뤼뺑의 모든 매력이 전부 등장해서 뤼뺑 팬에게는 큰 재미를 안겨다 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또 이전에 읽었던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와 "바리바"에서 인상적인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베슈경감이 등장해서 역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막강한 라이벌이자 연적으로 묘사되는 앙투완느 파즈로가 뤼뺑과 좋은 승부를 계속 펼쳐보여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뤼뺑을 묘사하는 앙투완느 파즈로의 한마디가 뤼뺑을 굉장히 잘 나타내고 있어서 인상적이네요.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바람둥이... 당신들 모두를 휘어잡으려는 교활한 돈주앙" ^^
내용도 뤼뺑 시리즈 특유의 모험담과 활극이 추리와 잘 어우러진 형태로 유머도 넘치고 평균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안정적인 퀄리티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작품처럼 모험담 중심으로 추리가 곁들여져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추리적인 부분의 수준도 높아서 멜라미르 백작 가문의 굴절된 역사가 인용되는 약 4대, 반세기에 걸친 장대한 수준의 역사적, 공간적 트릭은 - 이 트릭은 엘러리 퀸의 "신의 등불"의 모티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상당한 수준이에요. 놀라운 수준의 퍼즐 미스테리는 아니지만 트릭에 관련된 앞부분의 복선이나 단서가 상당히 공정하고 설득력있는 편이라 공들여 잘 짜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아쉬웠던 부분이라면 관계자를 전부 모아놓고 일종의 "깜짝쇼"를 펼쳐 사건을 마무리 할 때 입니다. 종반까지 강력한 적수로 묘사된 파즈로가 이 깜짝쇼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며 계속 끌려다녀 결말이 너무 시시해졌기 때문이에요. 좀 더 파즈로와의 대결 구도를 유지했으면 재미있었을텐데 말이죠. 뭐 이 정도로도 뤼뺑 상대로는 제법 오래 버틴 것이긴 하지만요. (나름대로 승기를 잡기까지 했던 뤼뺑의 몇 안되는 적수 중 한명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발표된 순으로 보니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와 "바리바" 사이에 위치한 작품이던데 세 작품 모두 뤼뺑-베슈반장 이야기로 매력적이면서 재미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유쾌한 악당 뤼뺑의 매력을 느끼시기에 충분한 만큼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도 이제 후반 작품들만 읽어보면 완독할 수 있을것 같아 기쁩니다!

2014/04/09

백일홍 나무아래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백일홍 나무 아래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총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후기작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초기작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는 트릭 위주의 정통파 추리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이라 괜찮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직후 일본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낸 점, 긴다이치의 첫 탐정 사무소의 위치 등 세밀한 설정과 묘사도 돋보였고요. 또한 "살인귀"와 "백일홍 나무 아래"는 에도가와 란포의 향취가 느껴지는 변격물적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란포의 여전한 영향력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낡은 점이 분명하고,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헛점도 많습니다. 전체 별점은 2점 입니다. 다른 단편집인 "혼진 살인사건"처럼 작가의 최고작과 비교하면 조금 뒤처집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면 읽어볼 만하지만,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수록작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살인귀"

우리 이웃 중 한 명은 살인귀일지도 모른다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추리소설가 야시로 류스케가 우연히 만난 미녀와 의족, 의안의 사나이와 얽혀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지요.

장점은 꽤 그럴듯한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피해자인 가가와가 사실은 가해자였다는 반전도 괜찮고요. 복선과 우메코의 자살이라는 의외의 상황도 설득력 있게 제시됩니다. 시대적 배경을 활용한 동기도 마음에 드네요.

그러나 사건 자체가 운과 우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 긴다이치 코스케가 모든 것을 알아낸 뒤 가나코를 방치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점, 야시로와 가나코의 동반자살이라는 불필요한 사족은 아쉬웠기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야시로 류스케라는 이름에서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살인사건'"이 떠올랐습니다.

"흑난초 아가씨"

도벽이 있는 부유한 집 아가씨가 훔친 물건과 전쟁 당시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자살용 청산가리를 지급했던 시사적 소재를 결합한 작품입니다.

두 가지 소재를 결합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과격한 연쇄살인 전개가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핵심 설정에서도 헛점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범인이 매장 주임 교체를 간과한 점이나, 급작스럽게 살인을 저지른 점은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긴다이치 탐정 사무소가 처음 등장하는 묘사는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간결함이 아쉬웠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향수 동반 자살"

화장품 회사 총수의 의뢰로 카루이자와에서 총수 손자의 동반 자살 사건을 수사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와 도도로키 경부의 이야기입니다.

카루이자와의 풍광을 살짝 보여주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과 도도로키 경부의 등장 등은 팬으로서 반가운 점이었지만, 사건 전개는 순전히 운과 우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줄 알았던 유리코가 살아났다는 설정은 코미디에 가까웠어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백일홍 나무 아래"

옛 전우의 부탁으로 과거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입니다.

전우의 증언만으로 진상에 도달하는 점은 안락의자 탐정물 같지만, 범인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핵심 트릭은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습니다. 이 탓에 평작 수준에 머무릅니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연상시키는 변격물적 설정과 전쟁 직후 도쿄의 묘사는 볼거리였지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12/06

Q.E.D Iff 증명종료 11-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1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의 두 번째 시즌도 10권을 돌파했네요. 이번 권에는 강력 사건만 두 편 연이어 등장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많고, 생각할 거리도 전해주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평균하여 별점은 3점입니다.

에피소드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할 수 없는 증인" 

4년 전, 토마는 정원사 래디쉬와 알게 됐다. 토마는 해고된 래디쉬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래디쉬는 토마의 돈도 훔쳐 사라져 버렸다.
8개월 뒤, 어니언과 마약 판매를 놓고 대립하던 콘 시럽이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총, 발자국 등 증거에 따르면 범인은 어니언이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으로 유명한 래디쉬가 어니언의 알리바이를 보장한 탓에 검사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다행히 토마의 도움으로 어니언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 때 래디쉬도 토마의 돈을 훔친 혐의로 3년형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뒤 지금, 어니언의 부하 갈릭 오일은 출소한 래디쉬에게 '복수'라며 토마의 연구를 훔치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알리바이 깨기 작품입니다. 어니언의 알리바이는 사건이 발생한 8시 20분에 래디쉬 등 지인들과 농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래디쉬는 그 시간은 마침 3쿼터가 한창이라서 어니언이 자리를 비웠다면 바로 알아챘을거라고 증언했고요.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은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 중계를 봤다는 겁니다. 음식을 주문한 뒤, 래디쉬에게 배달 음식 대응을 시키고 그 때마다 수분간 중계를 일시 정지하는걸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였다면 3쿼터가 한창 진행될 8시 20분에 '하프 타임'이 걸리도록 만든 거지요. 어니언이 범행을 저지르고 돌아오는데에는 하프타임 15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범행 후 3쿼터를 함께 볼 수 있었고요.
대단치는 않지만, 현실적입니다. 트릭 외에도 토마가 래디쉬를 구속되게 만든 이유 - 래디쉬는 도벽이 있었고, 콘의 마약도 훔쳤었으며 법정에서 위증을 한 것 보다는 단순 절도가 형량이 낮기 때문 등등 - 라던가, 토마가 함정을 파서 배후인 갈릭 오일을 체포하는 이야기 등의 곁가지들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복선 회수를 잘 해서 이야기 완성도는 제법 괜찮아요.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우선 트릭을 수사기관이 눈치채지 못했다는걸 제일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녹화 중계를 봤다는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요? 미국은 PVR 기능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수사관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어요. 또 녹화 중계를 봤다면, 구태여 pause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을 늦춰서 시작하면 되니까요. 녹화 중계라기 보다는 타임 쉬프트 기능 -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타임 머신' 이라고 불렀던, 외부 저장장치에 라이브 방송을 저장해서 돌려보는 기능 - 을 썼다는게 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영수증에는 보통 접수 시간이 출력됩니다. 증거로 래디쉬 서명이 있는 사건 당일 영수증이 이미 확보되어 있었지요. 이 시간을 확인하면 실제 중계 시간과 래디쉬가 인지하고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도 증명 가능했을거에요.
마지막으로 아무리 래디쉬가 정직한 남자라도, 그의 증언만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교도소에 3번이나 갔다 온 어니언의 친구 증언을 사법부가 그렇게까지 신뢰하리라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아울러 갈릭이 토마 노트를 훔쳐 팔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토마가 쓴 노트를 카메라로 찍었지만 이를 공항에서 회수한다는 결말도 어설펐고요. 아예 의미가 없지야 않겠지만, 이미 메일로 어딘가에 보냈을게 뻔한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 이름도 대충 생각한 티가 물씬 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작은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물에 빠진 새" 

202X년, 일본은 AI 재판관을 도입했다. 그 뒤 20년이 흐른 204X년, AI 관리관인 미즈노 규사쿠가 아내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아내가 호스트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하고 둘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미즈노는 AI 재판관으로부터 장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미즈노는 항고하고, 변호사 견습인 미즈하라 가나가 이를 돕던 중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년 전에 수상한 사람이 AI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미즈노에게 전화를 걸었고, 사건이 벌어진 날 급히 집으로 가라고 전화해서 집에 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미즈노는 가나에게 'MIT를 중학교 때 졸업한 천재'에게 AI에 정말 문제가 있는지, 자신이 숨겨놓은 코드를 보여주고 확인받아 줄 것을 부탁하는데....

204X년의 일본에서 변호사 견습생 가나와 천재 프로그래머 토마가 활약하는 일종의 평행 우주 세계관으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AI가 재판하는 시대는 곧 다가올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실제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이 작품은 그런 상황을 가정하여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Q.E.D 시리즈 장점이기도 한 일종의 '학습 만화' 인 셈이지요.
제목인 '물에 빠진 새'부터가 AI 재판관의 특징을 잘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새가 물에 빠진걸 상상하죠. 그러나 AI는 '새'를 갈매기 등으로 해석합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가장 있음직한 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즉, '융통성' 이라는게 발휘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AI는 불법적인 조사를 인정하지 않고, 증거에 합리적 의문이 있으면 무죄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어서 결론적으로, 검찰의 기소가 성공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이럴 경우 강력범이 풀려날 가능성이 생긴다는 문제는 있지만 무고한 피해자는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여러가지 유착과 오판을 사전 차단한다는 장점이 더욱 커 보이네요.

그러나 당연히 AI 재판관이라도 문제를 일으킬 여지는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버그' 가 원인입니다. 검찰은 이를 이용하여 미즈노가 실형을 선고받게 만들지만, 토마가 모든걸 밝혀냅니다. 이를 위한 토마의 추리쇼가 법정에서 재판관, 검사와 대결을 통해 펼쳐지기 때문에 '법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부분의 완성도도 제법 높아요. 사건 현장은 부부 침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버그를 알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일부러 '부부 침실'과 '두 사람의 방'이라고 나누어 부르고, 위치도 '길'과 '복도' 왼쪽이라고 말할 때마다 다르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버그 탓에 AI는 원래 같은 공간을 나누어 생각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방'에는 침대가 있는데 사건 현장인 '부부 침실'에는 침대가 없어서 제3자가 숨어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 결과 미즈노가 범인이라는 판결이 내려진거고요. 꽤 그럴싸하죠?
이러한 추리쇼가 펼쳐지는 와중에, AI가 사건 현장이라며 침대와 다른 가구가 없는 썰렁한 방 이미지를 화면에 띄워주는 장면은 극적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이런게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장점이라 생각되네요.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기발한 장치 트릭이 하나 등장합니다. 미즈노를 옭아맨 현장 증거를 만들어 내었던 트릭입니다. 아래와 같이 문 손잡이 뒤에 나이프를 테이프로 붙여서 문을 여는 미즈노의 지문이 묻게 만든 겁니다. 부자연스러운 지문의 끊어진 형태는 스카치 테이프 자국이고요.


그러나 트릭은 억지스럽습니다. 이런 손잡이는 손 끝으로 잡는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감싸 잡는게 당연하니까요. 미즈노가 문을 열 때 이상함을 느낄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미즈노 아내의 불륜과 비밀 번호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얼굴 인식은 사진으로 돌파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은 미즈노의 회사 동료 유자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범행을 저지른 동기와 행동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버그를 팔았지만 이를 미즈노가 눈치챌걸 두려워해서 말살시키려고 했다는데, 버그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잖아요? 유자와가 코드가 기록된 노트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게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보이지는 않았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AI가 오류를 일으킨 원인을 납득하기 힘들어요. 만화에서도 평면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법정에서는 구두로만 사건 현장을 설명 AI에게 별다른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검찰이 구두로만 설명했다면 AI가 아니었더라도 해석에 오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204X라는 근미래인데, 다른 20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묘사들도 고민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204X년에 숫자 암호키와 얼굴 인식으로 집에 출입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지문이 결정적 증거가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이럴 바에야 AI가 재판하는 가상극 형태로 꾸미는게 어떨까 싶네요. 시즌 1 27권 수록작인 "입증책임"처럼 모의 재판 형식으로 말이죠.

그래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었던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6/11

범죄 캘린더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범죄 캘린더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엘러리 퀸 단편집으로 비교적 후기작입니다. 엘러리 퀸이 주인공인 라디오 드라마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읽다보니 확실히 라디오 드라마구나 싶었습니다. 설득력있는 동기, 복선으로 뒷받침되는 탄탄한 이야기 구조보다는 극적인 상황을 쉽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릭도 정교하기 보다는 말로 전달하기 쉬운 트릭들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책으로 읽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트릭들은 추리 퀴즈 수준이고,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탓에 동기와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낮은 탓입니다. "~ 모험" 이라는 제목 때문에 걸작 단편집이었던 "엘러리 퀸의 모험" 수록작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캘린더'라는 제목답게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한 편씩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해당 월에 이야기가 진행될 필요가 있었던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3월의 소득세 신고, 5월의 전몰 장병 기념일 정도만 특정 날짜와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뿐이에요. 10월의 할로윈과 12월 크리스마스에 사건이 벌어지는 두 작품은, 날짜를 사건과 무리하게 연결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망작이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라디오라면 모를까 책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믾지 않고, 권해드리기도 어렵습니다. 엘러리 퀸의 이름만 믿고 읽으시면 실망하실 거에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부자 모임의 모험" 

이스턴 대학교의 유서깊은 야누스 클럽의 멤버 빌 업다이크가 엘러리 퀸을 찾아왔다. 야누스 클럽은 13학번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현재 생존자는 7명 뿐이었는데 그 중 3명이 최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업다이크는 야누스 클럽 안에 5명으로 이루어진 내부자 모임이 20만달러라는 돈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자신과 또 다른 멤버 중 생존자가 모든 걸 갖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48시간 뒤, 빌 업다이크는 살해되고 말았다.

1월의 야누스 클럽 정기 모임 날짜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로 야누스 클럽이니, 내부자 모임이니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핵심은 암호 트릭입니다. 피해자 업다이크가 내부자 모임 멤버들 이름에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남겼었고, 그 말이 유일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 트릭은 미국인이 아니면 풀 수 없는,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쉽게 풀었음직한 트릭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멤버들 이름을 변주하자면, 황연세, 한국민, 양홍익, 김아주, 서인하인 식이지요. 업다이크의 경우는 부부의 이름을 합쳐 윌러임 앤 메리 칼리지라는 약간의 변주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식으로 박성균, 최관이라는 식이니 딱히 정교한 장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라디오에 적합한, 추리 퀴즈에 가까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전개도 정교하지 못하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3명의 회원이 우연찮게 자연사한 뒤, 살의를 품었다는 동기를 잘 풀어내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대통령의 5센트 은화 모험" 

미모의 아가씨 마사 클라크는 전보로 엘러리 퀸과 죠지 워싱턴 관련 골동품 수집가 패치, 희귀 주화 수집가 체크 남작부인, 희귀 서적 수집가 쇼 교수를 불러모았다. 죠지 워싱턴이 남긴 칼과 은화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는 오래 전 죠지 워싱턴이 마사의 조상 시미언 클라크를 만났을 때 농장에 묻었던 물건들이었다.

2월 죠지 워싱턴 생일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전무합니다. 시미언 클라크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워싱턴이 당시 심었던 나무 중 하나 아래에 칼과 은화를 묻었다고 쓰여 있거든요. 이건 암호도 아닙니다. 당연히 별다른 트릭도 없어서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이 말에 따라 마사 클라크 가족이 워싱턴이 심었다는 나무 12그루 밑을 모두 파 보았지만, 칼과 은화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더 황당합니다. 원래 13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가 죽어 버린 탓이라는데 정삼각형 모양으로 간격까지 정확하게 심은 12그루의 나무는 멀쩡하고, 삼각형 한 가운데 심은 나무만 죽었다는건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게다가 13그루 나무를 심었다는 엘러리 퀸의 주장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미국 건국은 13개 주였기에 나무는 13그루를 심었어야 한다!"라는게 근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또 애초에 농장을 잃을 위기였다면, 나무 밑이 아니라 나무 근처 땅을 모두 파 보는게 정상 아니었을까요? 전개도 이상합니다. 이야기 처음에 패치 등 관계자들을 불러 모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 문제 투성이의 본편 이야기보다는, 엘러리가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가 추리적으로 더 볼만했습니다. 돈이 많지만 자동차를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엘러리의 비서 니키가 미인인 마사 클라크를 질투하는 묘사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네요. 추리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이클 마군의 3월 15일 모험" 

퀸 경감의 옛 동료였던 사립탐정 마이클 마군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3월 15일 소득세 신고를 앞두고 관련 서류를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서류 도난 당시, 사무실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엘러리 일행은 다시 사무실에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사무실을 관리하는 카슨 부인이 참혹하게 살해된걸 발견하는데...

이야기 초, 중반부까지는 "왜 도둑은 소득세 신고와 관련된 서류를 훔쳐갔을까?"가 핵심입니다. 이는 마군의 서류 중에 사교계 지배자 벤돔 부인의 딸이 도벽이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으로 밝혀지고요.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기묘한 사건이 특별한 강력 범죄와 연결되는 전개는 재미있었습니다. 소득세 신고일이 3월 15일이고, 소득세 신고용 자료가 협박의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3월이라는 날짜와 이야기를 엮은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마군이 화재 소동을 일으킨 뒤 서류가 도난당한걸로 위장했고, 이를 카슨 부인이 눈치채 죽였다는 진상은 여러모로 불합리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엘러리를 찾아와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하소연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앨러리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냥 강도가 살해한걸로 무마할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엘러리 말대로 벤돔 부인을 협박할 생각을 버리고 카슨 부인을 죽인거라면, 더더욱 서류가 도난당했다는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어요. 협박할 생각을 버렸다면, 카슨 부인에게 불을 지른 이유를 둘러대는게 살인보다는 훨씬 나은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게 오피스를 쉐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안일한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마군이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한 시점보다 나중인 신문지가 들어있었던 증거는 명확했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아주 잘 만든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황제의 주사위 모험" 

퀸 경감은 엘러리, 니크와 함께 오랜 친구 짐 해거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역으로 마중나온 짐의 아들 마크 해거드는 아버지 짐이 살해당했다며 10년 전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해거드 가족은 아버지를 쏜 건 가족 중 한 명이라며 지난 10년간 지옥처럼 살아왔다고 말했다. 엘러리는 짐이 죽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황제의 주사위'에 주목해서 범인을 알아내는데...

짐이 쥐고 있던 주사위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였습니다. 두 개 중 한개가 항상 6만 표시한다는 의미로, 6번 피스톨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의미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 뒤는 가관이에요. 6번 피스톨은 왼손잡이가 잡기에 용이해서, 가족 중 유일한 왼손잡이인 딸이 범인이라는 추리가 펼쳐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총을 쏘는 것도 아니고, 꺼내는데 왼손잡이냐 아니냐가 뭐가 중요할까요? 중요했다 한 들 이 정도로 딸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그 총은 '왼손잡이만 잡을 수 있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거든요. 칼리굴라와 주사위 속임수에 대해 이런저런 소개도 이야기에는 하등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잡지식에 불과했고요.

무엇보다도, 3월 마지막 날에 수수께끼를 풀어내며 이 모든게 퀸 경감과 니키, 해거드 가족이 함께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을 속이기 위함이었다는 반전은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40년 전 결혼식과 10년 전 40번째 결혼 기념일에 선물을 드렸다는 모순은 말장난이면서도,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서 속임수같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게티즈버그 나팔의 모험" 

엘러리가 니키와 함께 한 충동적인 게티즈버그 여행 중에 자동차가 고장나버렸다. 그 때 잭스버그 군수 스트롱이 그들을 도와준 뒤, 마을에서 진행하는 남북전쟁 전몰장병 추모일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날 남북전쟁 생존자가 게티즈버그 나팔을 부는게 전통이었는데, 작년에 생존자 중 가장 고령이었던 케일럽이 나팔을 불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건강했고, 다른 생존자 2명과 남북 전쟁 중 찾았던 보물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군수는 수상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몰장병 기념일 아침에 또 다른 생존자 애브너 체이스가 뇌졸증으로 사망하고, 기념일에서는 나팔을 불던 마지막 생존자 잭 비글로마저 나팔에 묻힌 독으로 죽고 마는데...

어디선가 읽었던 작품. 4월 전몰장병 기념일에 맞춘 이야기는 깔끔합니다. 노인들이 이야기하던 거액의 보물은 휴지조각과 같은 남부 정부가 발행했던 지폐라는 설정도 좋았고, 애브너 체이스의 손녀 시시가 진범이라는 반전도 그럴듯했거든요. 이를 드러내기 위한 엘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잭 비글로가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된건 애브너 체이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우연 덕분이었다는게 핵심이지요.

하지만 이 추리로는 시시가 진범인지, 잭 비글로의 손자 앤디가 진범인지는 드러낼 수 없습니다. 앤디가 할아버지가 남긴 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에, 그 돈을 보다 빨리 갖고 싶어서 할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즉, 엘러리는 그냥 용의자를 한 명 추가한거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법정에서도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완벽한 얼개를 갖추고 있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전개되는 수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약 손가락의 모험" 

트로이는 딸 헬렌 결혼식에 엘러리를 초대했다. 헬렌을 흠모했던 루즈 때문이었다. 그는 헬렌이 헨리 예이츠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의를 드러내다가, 이후 갑자기 변심해서 사죄하고 신랑 들러리로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심한 불안감을 느낀 트로이의 부탁으로 엘러리는 벨리 경사와 결혼식에 참석해서 루즈를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식 직후 헬렌은 결혼 반지 속 독침에 의해 살해되고 마는데...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엘러리가 범행을 막지도 못했고, 경찰보다 범인을 찾아내는데 늦어버린 완벽한 실패담이라는겁니다. 엘러리는 루즈가 아닌 신랑 헨리 예이츠를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거는 결혼만 하면 헬렌의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하지만 결혼 반지는 왼손에 끼고, 압력을 가해 독침이 튀어나오게 하려면 왼손으로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범인이다! 라는 논리로 루즈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흉기인 반지 조사로 경찰이 밝혀내고요. 이렇게 엘러리는 체면만 구긴 셈이며, 사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종료되기 때문에 추리물로는 볼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고, 이렇게 길게 풀어낼 필요도 없는 졸작입니다.

"추락한 천사의 모험" 

센터 저택에는 기괴한 키마이라 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현재 센터 제약 사장인 마일스의 아내 도로시는 니키의 친구로, 그녀가 니키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걸 고백한 뒤 마일스가 저택 지붕에서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에 깔려 죽을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조각상은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의 아틀리에 지붕 쪽에 위치했었다. 데이비드를 의심한 마일스는 엘러리 퀸에게 관련된 조사를 의뢰했고, 데이비드 아틀리에를 조사하기 위해 엘러리가 방문한 날 마일스는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데이비드는 실종되었고, 도로시가 범행을 자백하는데...

도로시의 불륜 상대가 밝혀지기 전 까지, 범인은 데이비드 아니면 마일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마일스만 없으면 센터 제약과 그 아내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일스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복수심으로 데이비드를 실종으로 위장해서 죽이고, 다친걸로 위장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상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비서 하트가 폭죽으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살해했다는 겁니다. 즉, 도로시가 사랑에 빠진게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가 아니라 비서 하트였다는 반전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상식을 깨는 맛은 괜찮았습니다. 7월 4일 독립 기념일과 '폭죽'을 연결한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캘린더라는 주제에도 잘 맞을 뿐더러, 간단한 트릭이지만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상을 드러내는 핵심 증거 중 하나가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들고요.

물론 편의적인 전개를 위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일스가 총에 맞았을 때, 누가 쐈는지 보지 못했다는게 대표적이지요. 여기서 그가 죽지 않은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작위적이고요. 차라리 죽는게 전개면에서는 더 깔끔했을거에요. 또 45Kg이나 되는 조각상에 데이비드를 죽인 뒤 매달아 물에 빠트리는게 혼자서 어떻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가능했을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도로시가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이유가, 하트가 총을 쏘는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통 본격 추리 단편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평작은 충분히 되는,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잘 짜여진 단편이었으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늘 귀의 모험" 

유명 탐험가 에릭슨은 결혼한 조카딸 잉가의 남편과 그 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엘러리 퀸에게 의뢰했다. 잉가의 남편 홉스-왓킨스 부자가 에릭슨이 거주하는 섬에서 잉가와 자기를 살해하지 않을까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섬에는 캡틴 키드가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고, 엘러리는 보물 찾기 핑계를 대고 섬으로 향하는데..

엘러리는 키드가 남겼다는 일종의 암호를 간단히 풀어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그 보물은 키드가 묻은게 아니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그 증거가 보물 상자 속 '백금' 이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백금은 1900년대 이후 보석 셋팅에 이용되었기 때문으로, 박학다식한 엘러리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보물은 홉스-왓킨스 부자가 훔친 장물로, 장물을 공식적으로 유통하기 위해 키드 전설을 이용했다는 앨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에릭슨이 죽기 전 쏜 총알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롱 존의 의족에 박혔기 때문이라는건 많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롱 존이 홉스-왓킨스 부자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가 에릭슨을 단순한 탐욕으로 죽였다고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어요. 보물을 묻은게 부자라는게 증명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에릭슨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습니다. 롱 존이 자백한다 한들,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롱 존을 이용해서 에릭슨을 죽이는 전개만 빠졌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좀 아쉽네요.

"세 개의 R의 모험" 발로 대학 학장 발로 박사는 엘러리 퀸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 문학을 가르치는 칩 교수의 실종 때문이었다. 니키와 함께 미주리 주에 있는 발로 대학을 찾은 엘러리는 칩 교수 방의 핏자국,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 된 책을 통해 교수가 6월 30일 밤에 살해당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칩 교수가 여름을 보낸다고 알려진 아칸소 주 통나무집에서 칩 교수의 백골화된 사체와 그가 쓰던 추리 소설인 "세 개의 R의 모험" 원고를 발견하는데...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대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게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건 연극이어고, 엘러리 퀸은 발견된 시체가 백골이었다는걸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고작 10여주 동안 사체가 백골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동기는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 홍보를 위해서였지요. 유명 탐정이 헛다리를 짚은 이야기를 기사화할 생각이었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깔끔하고, 주어진 단서도 공정한 괜찮은 본격물이에요.

하지만 교수들이 꾸민 계획은 여러모로 부실했어요. 핏자국을 발견한 시점에 경찰을 부르지 않은 이유부터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제가 탐정이라면 먼저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했을 겁니다. 또 백골 사체가 이상하다는 근거도 빈약합니다. 사체를 백골로 만드는 무슨 방법을 썼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죽은 고양이의 모험" 

니키 포터 양은 저주받은 검정 고양이 모임 회합에 엘러리 퀸과 함께 참석했다. 10월 31일의 챈슬러 호텔에서의 비밀 회합은 니키의 친구가 개최한 할로윈 파티였었다. 파티 중 추리 게임을 하다가 참석자 중 한 명인 크롬비가 살해당했고, 동기는 그의 무분별한 여자 관계 때문으로 드러나는데...

핼로윈 파티에 대한 장황한 묘사를 빼면,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파티를 위해 복잡하게 꾸며놓은 호텔 방을, 불이 꺼져 있었던 추리 게임 당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냐는 것이지요. 엘러리 퀸의 추리는 이 방을 꾸민 루시 트렌트가 범인이라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방을 꾸몄다고해도 과연 어두운 상황에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또 파티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 추리 게임이 시작되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외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루시 트렌트 범인설은 이렇게 설득력이 약합니다. 복잡한 여자 관계가 동기인데, 정작 당사자가 아니라 그 동생이 복수했다는 설정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초대해서 추리 게임을 하는 동안 저지를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도 몇 명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 게임이라는 작 중 소재처럼, 추리 퀴즈 수준의 졸작으로 점수를 줄 여지는 전무합니다.

"비밀을 폭로하는 병의 모험" 

추수감사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배달하던 엘러리 퀸과 니키는 우연히 방문한 프랑스 레스토랑이 마약을 밀매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캐리가 마약 밀매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누명을 썼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체포하기 전에 마약을 건넨 웨이터가 살해되는데...

우연히 방문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샤토 디켐"을 주문하니 마약이 나오고, 우연히 탄 택시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택시 운전사가 흑막이라서 그가 레스토랑 웨이터를 살해했다는 내용의 작품. 우연으로 점철된 전개로 실소를 자아내는 졸작입니다. 작품이 아니라 입문자용 추리 퀴즈라고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황태자 인형의 모험" 

입슨 양이 30년을 쏟아 부어 만든 인형 컬렉션인 '돌렉션'문제로 변호사 본들링이 퀸 부자를 방문했다. 컬렉션 중 가장 가치가 큰, 49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황태자 인형을 유명한 예술품 도둑 코머스가 훔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입슨 양 유언으로 돌렉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백화점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고, 퀸 부자는 직접 경찰과 함께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했지만, 인형은 결국 가짜로 바꿔치기 당하는데...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예고장을 보내는 전설적인 괴도가 등장한다는 만화같은 설정의 작품입니다. 

진상은 간단합니다. 변호사 본들링이 도둑 코머스였던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인형을 직접 바꿔치기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본들링이 예고장을 보내면서까지 사건을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 꾸준히 예고장을 보내왔다면 모를까, 예고장을 보낸건 이번이 처음이라고도 하니 더더욱 불필요한 행동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을 변장시켜 경찰의 시선을 끈 행동 역시, 대역들이 체포되면 금방 드러날 유치한 작전이었고요. 그냥 다이아몬드가 사라진다면 본들링이 무조건 혐의를 받을 테니 그 혐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본들링이 범인이라는 엘러리의 추리는 너무 당연해서, 그의 정체는 어쨌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이런 위험을 짊어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산타클로스로 변장해서 인형을 지켰던 벨리 경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작품다운 왠지모를 유쾌함과 활기는 좋았지만, 추리 퀴즈 수준밖에 안 되는 작품이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중반에 잠깐 라디오 극본을 그대로 옮긴 듯한 부분이 있는데, 의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라디오 극본이라는걸 알려주기 위한 의도였다면, 극본 전체를 부록처럼 수록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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