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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4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점

조용한 무더위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와카타케 나나미의 '유능하지만 불운한' 여성 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백곰 탐정사 탐정이자 미스테리 전문 서점 '살인곰 서점'의 거의 유일한 아르바이트 생으로 2014년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벌어진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 여섯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마흔을 넘긴 나이를 제외하고는 독신에다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산다는건 여전하네요. 나이 탓에 어깨 근육통 등 건강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탐정으로서 꽤 유능합니다.

읽기 전에는 아무래도 일상계에 가까울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보면 딱히 대단한 사건에 휘말릴걸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처럼 내용과 사건들이 상당히 묵직해서 의외였습니다. "파란 그늘"만 들치기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이며 그 외의 작품들에서는 강력 범죄들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작품별로 분류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조용한 무더위" : 살인 미수
  • "아타미 브라이튼 록" : 불법 약물 제조에 살인과 사체 은닉
  •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 살인과 감금
  • "붉은 흉작" : 호적 도용과 살인 강도
  • "성야 플러스 1" : 살인 사건

이런 강력 범죄들이 왁자지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일어나고, 시니컬한 하무라 시점의 묘사가 더해져 독특한 재미를 안겨다 주는 이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도 잘 살아 있습니다. 진지한 주인공이 자신도 휩쓸린 대소동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우디 알렌이 연상되는 블랙 코미디 스타일이지요. 역시나 시리즈의 매력인 평범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악의'도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추리적으로도 잘 정리되어서 깔끔합니다.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전문 서점'이라는 '살인곰 서점'이 주요 무대이며, '살인곰 서점'에서 매월 벌이는 '미스터리 투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라는게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여러 추리 소설과 작가들이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란 그늘"에서 사건의 진상은 작 중 언급되는 "레베카"의 티 타임 비밀 레시피에 얽힌 진실이 드러난 덕분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에서 피해자가 영국 추리 소설을 읽었다는 수상한 증언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요. "성야 플러스 1"은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이 핵심 소재 중 하나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살인곰 서점 점장 도야마의 입을 빌어 작 중 등장하는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와 추리 모두 충분한 수준이며, 추리 애호가의 덕심(?)을 잘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추리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란 그늘" 7월

단편집을 개시하는 첫 단편입니다. 더위에 대한 하무라의 푸념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그리고 '뱀녀'의 행방을 쫓다가 그녀가 택배 배달원과 손을 잡은 들치기범이라는게 밝혀진다는 전개가 빠르면서도 설득력 높게 진행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무라가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 착의와 차림새, 범인이 이동한 방향이라는 몇 안되는 단서로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도 꽤 설득력 높고요. 평범한 인간의 '악의'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발 벗고 나서는 교통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피해자의 가방을 훔치는 범죄가 그러하지요. 모친의 애끓는 호소에도 가방을 버렸다고 하지만 정작 돌려달라고 한 레시피 노트를 연인에게 선물한 사실을 밝히지 않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추리 모두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이어지는 작품들에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책을 쓴 입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의 핵심인 쓰구미의 노트에 수록되었던 소설 "레베카"와 관련된 레시피가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는 레시피 속 비밀 재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떤 맛일지 아주 궁금하네요. 서점 점장인 도야마가 기획한 7월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달콤한 미스터리 페어" 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추리 소설에 관련된 레시피 책들도 소개되는데 그 중 "Len Deighton's Action Cookbook"은 꼭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작가 렌 테이턴의 레시피인데 레몽 머랭 파이 레시피가 실려 있는 등 디저트 부분이 충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스터리 티 파티 계획도 발군이에요. 미스터리에 등장하는 과자들을 죽 늘어놓고 티 파티를 열다니! 아, 이런 서점이 집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무더위" 8월

전편에 이어 무더위가 이어집니다. 무더위가 일종의 흉기로 사용되기도 하고요. 자치회장은 어머니를 열사병에 걸리게 할 속셈이었거든요. 이 아이디어는 실제 뉴스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설득력도 강합니다. 계절 묘사도 발군입니다.

하지만 범행을 위해 자치회장이 무리하게 거리를 비운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남의 집 에어컨 소리를 귀담아 들을 이유는 없죠. 또 거리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을 수도 있는 등 어차피 통제는 불가능하니까요. 하무라의 탐정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것도 좀 과했습니다. 진상을 깨닫게 되는, 자치회장의 볼펜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점도 감점 요소죠. 이런 부분은 조금 더 정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 9월

하무라 아키라가 이동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이 작품은 특히나 이동이 잦아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악의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이 있는 범죄 모의라는 점, 그리고 과거의 수수께끼를 다양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현재 시점에 밝혀낸다는 고전적, 왕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를 깔끔하게 전개하는 솜씨는 대단합니다. "브라이튼 록"이라는 소설을 시타라 소가 읽은 시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본인이 발로 뛰어 얻어낸 정보와 엮어 진상을 도출하는 하무라의 활약도 눈부실 정도에요. UFO에 미친 부동산업자, 바퀴벌레를 키우는 전 상사맨같은 독특한 등장인물들도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묘사와 맞물려 재미를 더해줍니다.

하지만 결말이 '그래서 어쨌는데?' 수준으로 마무리 되어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수십년 전 사건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무라가 자신이 애써 진상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이게 최선이었겠지만요. 그 외 추리적으로도 '자백'에 의존할 뿐이라 - 다른건 몰라도 시타로 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백이 아니라면 알아낼 도리가 없었으니 -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10월

하무라가 서점에서 전화와 인터넷만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니 현대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 중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학자 탐정' 으로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런저런 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은 동일하니까요. 추리 애호가를 위한 정보도 한 가득입니다. '학자 미스터리 페어'라는 페어의 주제는 심심하지만 그만큼 소개되는 작품들이 친숙해서 마음에 들더군요. '싱킹 머신' 반 두젠 교수를 비롯한 다양한 학자, 박사들이 등장하거든요. 또 피해자가 리모델링 업자라는 걸 듣고 '딕 프랜시스의 주인공이 이런 일을 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너무 뻔해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은퇴한 변호사가 리모델링 업자에게 판 저택이 동기일거라는게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무라의 추리대로 저택에 사체가 묻혀 있었다는 결말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변호사 조카가 호시노 구루미를 살해한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설퍼요. 운 좋게 용의자가 소에지마씨로 특정되었을 뿐, 용의자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궁지에 몰린 소에지마씨가 무라키를 감금하여 인질극을 벌인다는 설정도 지나쳤습니다. 이런 류의 소동극이 작가의 장기이기는 한데, 자극이 자니치다 보면 무덤덤해지는 법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붉은 흉작" 11월

하드보일드 팬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의뢰인인데다가 주요 소재가 "붉은 수확"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킨 다카노바바의 저주받은 땅이니까요. 심지어 고가 간타가 오기 노보루를 살해한 흉기도 '얼음 송곳'입니다!
삼천만엔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 쓰지도 못하고 홀로 약간의 사치만 부리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어간 불쌍한 남자가 주인공이며, 그의 평생의 은인은 광인이 되어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설정도 하드보일드스러웠어요. 냉정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 선생의 한 마디는 화룡 정점이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애매합니다. 가짜 츠노다 지로가 자주 다니던 지압원에서 의료 보험증 사본을 입수하여 '고가 간타'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가고, 그 곳에서 고가 간타가 저지른 살인 사건과 참고인이었던 츠다 지로를 확인하는 과정이 일사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오기 노보루가 지녔지만 사라진 삼천만엔을 츠다 지로가 손에 넣었을 거라는 추리는 딱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고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드보일드라는 의미 외의 가치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성야 플러스 1"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에서 따온 제목이죠. "심야 플러스 1"은 서스펜스 가득한 모험물인데 이 이야기 속 하무라에게 닥친 시련도 "심야 플러스 1" 못지 않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부탁을 들어주고 임무를 완수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성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에요.
그런데 조금 의아했던건 일본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굉장히 두려워 한다는데,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무라에게 폐를 끼치는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무라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작 중 하무라가 부탁받은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한 여정의 정도는 지나친 편입니다. 중간의 여정들은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요. 솔직히 중간 과정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소노다 씨가 "심야 플러스 1"의 가짜 사인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책 도둑들이 사인본을 노린다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하무라의 말대로 옥션에서 2백불 정도면 살 수 있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이유는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 내용은 없습니다. 백골 사체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어차피 본 편 정보로 추리가 가능한 사건은 아닙니다. 고이시바라 미야코 할머니와 사위의 칼부림 역시 억지스러운 요구에 불과할 뿐이고요. 오히려 사위가 딸을 살해한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더라면 말이 되었을텐데 말이죠. 책을 날치기한 2인조의 경우는 앞서 말씀드렸듯 사건 자체의 현실성이 약해서 추리의 여지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하무라의 불운을 잘 드러내고 있고, 중간중간 벌어지는 사건들이 많아서 왁자지껄한 블랙 코미디로 본다면 괜찮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고이시바라 미야코와 사위 사이에서 벌어진 칼부림입니다. 정말 급작스럽게 말려들었는데 미야코 할머니가 하무라의 가방을 잡고 놔주지 않는 등의 황당한 상황이 이어지거든요. 이를 슈톨렌이 해결한다는 결말도 재미있었고요. 그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다 극복하고 모두가 원하는 상황으로 매조지하는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게 크리스마스의 핵심요소이긴 하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재미 만큼은 확실합니다.

2020/02/24

2019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매년 이맘때쯤 발표되는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 소설입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추리 소설을 대상으로, 하우미스터리 회원들이 선정한 결과입니다. 33명만이 참여했을 뿐이지만 투표하신 분들이 대부분 추리 애호가라는 점에서 상당히 공신력있는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대망의 2019년 1~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공동 1위 11표
"미스터리 아레나", 후카미 레이이치로, 김은모, 엘릭시르
"피부밑 두개골", P. D. 제임스, 이주혜, 아작

공동 3위 8표
"조용한 무더위", 와카타케 나나미, 문승준, 내 친구의 서재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황세연, 마카롱

공동 1위인 두 작품 모두 저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다른 추천작들이 궁금하시면 상기 링크를 통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 선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블러디 프로젝트"
  2. "일러바치는 심장"
  3. "조용한 무더위"

2017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21/01/23

추리 소설 1,000번째 리뷰 등록!

2003년 첫 리뷰 "빙설의 살인"에서부터 시작한 추리소설 리뷰가 2021년 1월 23일 오늘 "주석 달린 셜록 홈즈 6"으로 드디어 1,000번째 리뷰를 채웠습니다! 추리 소설 1,000권을 읽고 리뷰를 쓰는게 이 블로그 개설 당시부터 목표였었는데, 2003년 2월에 개설했으니 약 17년, 6,258일만에 목표를 달성했네요. 900번째 리뷰였던 2019년 8월 4일 "조용한 무더위"로부터는 1년 5개월, 17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이전보다 무려 9개월이나 단축되었는데, 작년 리뷰 결산에서 말씀드렸듯 코로나 사태 탓입니다.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지요.

1,000개의 추리소설 리뷰를 쓰는 동안 누추하고 마이너한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리뷰는 쓰면 쓸 수록 힘들고, 최근 방문자 수도 급감한데다가 이글루스 에디터 동작도 엉망이고, 도서 리뷰는 글을 올려도 제대로 노출도 안되는 등 블로그 운영에 대해 이전과 같은 의욕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도 2,000개의 추리 소설 리뷰를 향해 달려 봐야죠.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힘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블로그에 찾아주시고, 관심과 댓글로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이제는 블로그 이름인 "추리소설 1000권 읽기! hansang's world"도 바꿔야겠네요. "추리 소설 천 권 이상 읽은, hansang의 리뷰 세계"가 어떨가 싶은데, 다음 리뷰 올릴 때 까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은 11년 전 EST님이 보내주셨던 "블로그 6주년 축전"을 이용한 것인데 EST님께 특히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추리소설 900번째 리뷰 등록

2020/07/24

녹슨 도르래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5점

녹슨 도르래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점장 도야마 야스유키를 만나, 서점 일을 도우며 탐정 일을 계속한 지 3년째. 하무라 아키라는 전에 없던 생활고로 고생 중이다. 살인곰 서점이 일주일에 사흘만 열게 되면서 수입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다른 대형 탐정사에서 하청을 받아 입에 풀칠을 해보지만, 이렇게 들어온 일들은 대개 위험 부담이 크고 돈도 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야말로 편한 건수라며 일이 들어온다. 의뢰 내용은 일흔네 살 할머니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것.

거절하려 했지만 일당을 올려준다는 말에 하무라는 덜컥 의뢰를 받아들인다. 그렇다. 그 의뢰는 분명 손쉬운 의뢰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행을 하던 중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위를 올려다본 순간, 그 할머니가 하무라 아키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그녀의 불운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그 끝에 과연 구원은 있을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와카타케 나나미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장편입니다. 여러가지 사건이 등장하지만, 하무라 아키라가 히로토의 의뢰를 받아들여 그가 '스카이랜드'에 간 이유를 밝혀내려는게 핵심입니다. 

완벽한 하드보일드 물이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인륜도 저버린 비정한 범죄가 연이어 벌어지며, 연관이 없어보였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이 전부 관련되어 있으며, 관계자들은 모두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전개 모두 완벽합니다.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겨우 살아남은 교통 사고 때, 왜 아버지와 '스카이랜드'에 갔는지?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히로토의 평범하고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의뢰가 하무라 아키라의 조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하드보일드스럽고요. 제가 읽었던 이전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모두 단편이라 미쳐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장편으로 읽으니 확실히 하드보일드를 지향한다는게 잘 느껴졌습니다.

사건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히로토가 아버지와 스카이랜드에 가게 되었던 이유는, 스카이랜드에서 대마를 흡입하고 난동을 피운걸 사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마 흡입은 친구 류지와 함께 했고, 이 일로 취직이 취소될까 겁낸 류지의 가족이 히로토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부자를 브레이크와 엑셀을 헛갈려 차로 치었다는 노인 호리우치는 류지의 외할아버지였지요. 그러나 류지는 죽지 않고 살아났고, 치료를 받으며 탐정을 고용하자 사고를 위장하여 불을 질러 살해했던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까지 히로토의 죽음은 히로토의 아버지 미쓰타카가 각성제를 밀매했던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실제로 이 각성제 밀매와 관련된 인물들의 범죄 행각도 하나 둘 씩 밝혀지고요. 그래서 독자는 하무라 아키라와 함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립니다. 일종의 미스디렉션인데 수법이 교묘해요. 읽으면서 히로토의 죽음이 흐릿해지고, 각성제가 진짜 범행 동기로 보이니까요.

복잡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재미있게 써 내려간 작가의 필력도 대단합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생생함 덕이 큽니다. 본의아니게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리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류지의 모친 때문에 자신의 소유물 중 유일한 고급품인 오리털 이불과 다이쇼 시대 책장까지 망가져 버리는데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이라는 이명에 잘 어울립니다.
다만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고, 탐정으로서의 능력도 괜찮은 편입니다. 수사 방법도 설득력있고 등장하는 소소한 추리들도 좋아요. 히로토의 대학교 버디인 '분페이'의 정체나 마키무라 하나에의 정체를 알아내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여러가지 단서들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히로토의 친구 이즈시가 아이돌 콘서트에 참석했던 영상이 그를 협박하는 도구가 되는 식으로 복선도 잘 짜여져 있고요.

마지막에 수록된, "조용한 무더위"에서처럼 작 중 등장했던 여러 추리 소설들에 대해 소개해주는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라는 부록도 반가왔습니다. "소년탐정 칼레"는 어린 시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구입해봐야겠더군요. 그 외 작품은 엘러리 퀸 등 극소수 유명 작가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번역이라 슬프네요.

그러나 너무 복잡한 구성, 지나친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따라해서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마리카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미쓰타카의 첫 사랑으로, 집안의 반대 때문에 부유한 의사 다쿠마와 결혼한 뒤에도 미쓰타카와 리미 사이를 방해하기 위해 골몰하다가 미쓰타카, 리미 부부가 공갈범 사토 가즈히코를 죽이게끔 유도하고, 이후 미쓰타카를 협박하여 마약 밀매의 길로 끌어들인 인물입니다. 그녀 때문에 여러 명이 죽고 파멸해버린, 한마디로 말해서 하드보일드 작품들에 흔하게 등장하는 절대악, 흑막, 팜므 파탈이지요.
하지만 이 작품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존재가 현재의 사건 - 히로토가 죽은 화재 사건 - 에 영향을 미치는건 없거든요. 미쓰타카가 죽은 이후 그녀가 직접 히로토를 괴롭히러 나타날 이유도 없고요.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던, 히로토는 상관할바가 아니니까요.

또 하무라 아키라가 중요한 단서처럼 언급하는, 그녀의 병원에 전시된 사토 가즈히코의 해골도 과거 범죄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미쓰타카에게 건네받은 일종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면 그뿐이거든요.
도비시마 이치코가 하무라 아키라에게 약을 먹여 교도소에 집어넣는 행동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마약 밀매에 대한 조사가 윗 선까지 닿아 있었다면, 구태여 이런 수작을 부릴 이유는 없습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말대로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도 있었을테고요.
이런건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하는, 경찰 조직과 탐정의 알력, 다툼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나마 이치코를 응징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행동만 볼거리였어요.

물론 이 무서운 여자들의 행동은 이 작품만 놓고보면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이 두 여자에 더해, 마지막에 하무라 아키라를 죽이려고 찾아온 류지의 모친 등 악당이라 할 수 있는 여성들 모두가 지나칠정도로 이기적이고, 극도의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인물들인 탓입니다. 모두들 자기 행동은 아무 문제가 없다, 잘못은 너 (하무라 아키라)와 피해자 (히로토 등) 가 저지른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게 별로 현실적인 설정은 아니지요. 게다가 마리카와 이치코 모두 딱히 등장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무리수였어요.

마지막으로,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사랑의 도피로 사라졌다는 히로토의 어머니 리미의 정체가 히로토의 먼 친척이라고 자칭한 하나에라는 것도 뜬금없었어요. 미쓰타카가 죽고 히로토는 겨우 살아남은 상황에서, 자신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거짓말을 유지해가며 먼 발치에서 아들을 지켜본다는건 설득력이 낮지요. 사토 가즈히코의 죽음이 지금에 와서 다시 드러날 이유도 없고요. 하나에의 정체에 대해서 던져주는 이런저런 단서들도 좀 부족한 편입니다. 이 역시 불행한 운명에 빠진 가족이라는 하드보일드 서사를 그냥 따라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를 현대 일본으로 끌고 온 작품들 중에서는 충분히 손에 꼽을만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가치는 재미에 있습니다. 단편인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한 번에 몰입해서 읽을 정도였거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조금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정리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겁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6/05/10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2) 달콤 미스터리 페어의 비밀 샌드위치

이번에 소개해 드릴 요리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 7월"에 등장하는 샌드위치입니다. 아주 화려하거나 수상해 보이는 음식은 아닙니다. 오히려 티타임에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얌전하고 소박한 샌드위치지요. 그런데 이 작고 평범한 음식이 뜻밖에도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로, 하무라 아키라가 일하는 살인곰 서점의 도야마 점장이 기획한 ‘달콤 미스터리 페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디저트가 나오는 미스터리 소설을 모아 전시하고, 티파티까지 열겠다는 행사이지요. 이 중 한 편이 대프니 뒤 모리에의 "레베카"입니다. 맨덜리의 4시 반 티타임에는 버터를 듬뿍 넣은 크럼펫, 작고 귀여운 토스트, 따뜻한 스콘, 생강 쿠키, 엔젤 케이크, 오렌지 필과 레이즌이 든 케이크처럼 누구라도 혹할 만한 디저트들이 줄줄이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작품 속 핵심은 이런 화려한 디저트들이 아닙니다. 교통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 쓰구미의 어머니는 서점을 찾아와, 딸이 "레베카"의 티파티를 열고 싶어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메뉴 가운데 하나로,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이었다고 덧붙이지요. 쓰구미가 준비했던 속재료는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이었다고 합니다.

커민 시드는 향신료의 하나로 씨앗처럼 생겼고, 음식에 넣으면 조금 이국적이고 묵직한 향이 납니다. 카레에서 맡아 본 듯한 향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비슷합니다. 병아리콩은 고소하고 담백하며, 삶으면 포슬포슬하고 부드럽지요. 으깨면 샐러드처럼 만들기도 좋고요. 짐작컨대 삶은 병아리콩을 으깨고, 소금으로 약하게 간한 뒤 커민 시드를 섞었을 겁니다. 여기에 마요네즈나 버터를 조금 더해 부드럽게 만들고, 식빵 사이에 얇게 펴 발랐겠지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티타임 메뉴로는 꽤 잘 어울리는 샌드위치였을 거예요. 달콤한 과자들 사이에서 살짝 다른 결을 만들어 주기도 했을 테고요.
모양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티파티에 올릴 샌드위치이니, 두툼하고 투박한 형태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부드러운 식빵 사이에 병아리콩 속을 얇게 넣고,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작고 단정하게 썬 형태였겠지요. 삼각형이거나 길쭉한 손가락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맛도 좋았겠지만, 이국적이고 독특한 재료라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떠올릴 만한 샌드위치는 아닙니다. 그런데 도야마 점장이 티파티를 위해 찾은 과자 장인 MIHARU의 글에서,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이 '레베카'의 비밀 재료 샌드위치 재료라며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쓰구미가 사고로 죽어 가던 때 레시피가 적힌 노트를 훔쳐간 범인이 MIHARU라는 걸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보통 미스터리의 단서라고 하면 핏자국이라든가 이상한 쪽지, 누가 들어도 수상한 말 같은 눈에 띄는 걸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 대신에 티파티 메뉴에 들어갈 샌드위치 속재료라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을 사용한다는게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레베카"에는 이보다 더 눈에 잘 띄는 샌드위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맥심의 할머니가 티타임에 먹는 물냉이 샌드위치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되는 오이 샌드위치처럼요. 영국식 티타임을 떠올리면 바로 연상되는 익숙한 메뉴들입니다. 하지만 와카타케 나나미는 이런 샌드위치보다 조금 더 낯설고, 그만큼 더 고민이 필요한 ‘비밀 샌드위치’를 사건과 연결합니다. 그 솜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작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읽어낸 것도 놀랍지만, 그것을 살인곰 서점의 이벤트와 엮어 하나의 미스터리로 다시 조립해 낸 방식이 무척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미스터리는 종종 아주 작은 것에서 움직입니다. 맛있어 보이는 다과 목록 한가운데 툭 끼어 있는 샌드위치 하나, 언뜻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속재료 하나 같은 것에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떠올리면 화려한 케이크보다도 먼저 그 병아리콩 샌드위치가 생각납니다. 가장 수수한 음식이, 끝내 가장 또렷한 단서가 되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 샌드위치 레시피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1. 병아리콩 준비하기
    삶은 병아리콩 1컵 정도를 준비한다.
  2. 향내기
    커민 시드 1작은술을 마른 팬에 약하게 볶아 향을 살린 뒤, 살짝 으깬다.
  3. 속재료 만들기
    병아리콩을 포크로 대충 으깨고, 소금 약간, 볶은 커민 시드, 후추 조금을 넣어 섞는다.
  4. 부드럽게 다듬기
    마요네즈나 버터를 1~2큰술 넣어 질감을 부드럽게 맞춘다. 너무 곱게 갈기보다는 약간 포슬한 느낌이 남는 편이 좋다.
  5. 샌드위치 만들기
    식빵 사이에 속재료를 얇게 펴 바르고,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삼각형이나 손가락 모양으로 작게 썬다. 티타임용이라면 한입 크기로 작게 만드는 쪽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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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4

추리소설 900번째 리뷰 등록

2003년 첫 리뷰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서부터 시작한 추리소설 리뷰가 2019년 8월 4일 오늘 "조용한 무더위"로 900번째가 되었습니다. 계절과 딱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네요.

800번째 리뷰였던 2017년 5월 28일 "허즈번드 시크릿"으로부터 2년 2개월, 약 26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이전보다 3개월 정도 늦어졌는데 아무래도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기는 조금 힘드네요. 나이도 들고, 애도 커 가면서 독서에만 시간을 온전히 내기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초에는 출간 준비로 바빠서 도저히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요. 이제 목표인 1,000권까지 100권 남았는데 이대로라면 2022년 쯤 달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여튼 900권째 추리소설 리뷰를 쓰는 동안 누추하고 마이너한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최근 도서 리뷰는 글을 올려도 제대로 노출도 안되고, 방문객 수도 급감하여 블로그 운영에 대해 의욕은 전혀 생기지 않긴 합니다. 그래도 이글루스가 존재하는 한 리뷰는 계속 올릴 예정이니 관심 있으시다면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그림은 10년 전에 EST님이 보내주셨던 "블로그 6주년 축전"을 이용한 것인데 EST님께 특히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20/05/23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5점

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 6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나'는 남편 맥심과 함께 작은 호텔에 머물며, 과거 함께 시간을 보냈던 대저택 맨덜리에서의 생활을 회상한다.

'나'는 결혼 후 드 윈터 부인으로 맨덜리에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맥심 드 윈터의 전처 레베카가 비참하게 사고로 죽었지만, 아직도 맨덜리에 그녀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다는걸 느꼈다. 그런데 우연히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녀 죽음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맥심 드 윈터는 '나'에게 자신이 그녀를 살해한 뒤 시체를 숨긴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전설적인 장편 소설입니다. 18~20세기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상류 사회와 로맨스, 범죄호러를 결합한 '고딕'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중 한 편이지요. 'MWA 추천 미스터리 100'이나 '동서 미스터리 100' 같은 이런저런 리스트에 포함될 정도로 명성만큼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거의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이렇게 두꺼운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숙제를 끝내기 위한 사명감 비슷한걸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숙제를 끝내기는 정말로 어렵더군요. 이야기의 2/3 대부분이 드 윈터 부인의 1인칭 심리묘사인데, 그녀의 마음에 전혀 공감할 수 없던 탓이 가장 큽니다. 어린 철부지 소녀가 급작스럽게 대저택의 안주인이 된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에요. 그러나 맨덜리 저택과 그 주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라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져 시종일관 소심함을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 눈치를 신경쓰고 그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에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당황스럽고, 철부지였다 하더라도 대저택 안주인으로 몇 개월 보냈으면 당연히 적응을 했어야죠. 몇 개월이 지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극복 하지 못하고 손톱이나 물어 뜯는 모습에는 공감을 할래야 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그녀의 어리버리함이 지나치게 부각되기 때문에, 저택 주변에 항상 맴도는 '레베카'의 그림자가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레베카를 숭배했다는 저택 관리인의 우두머리 댄버스 부인의 악의만큼은 실감나게 느껴집니다만, 이 역시 그녀가 어설퍼서 댄버스 부인의 증오를 초래한 것에 불과합니다.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에게 자신이 이제부터 드 윈터 부인이며, 그녀의 윗 사람이라는걸 처음에 확실하게 인지시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거든요. 댄버스 부인이 굴복하던가,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알아서 떠나버렸을테니까요.
심지어 지나치게 상황 인식이 부족한 탓에 스스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레베카가 정숙하지 못했다는걸 눈치채고 있습니다. 저택을 몰래 방문했던 사촌 파벨이 레베카의 문란한 생활 속 상대 중 하나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고요. 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맨덜리에서 오랫만에 수많은 손님이 방문하는 무도회가 열리는데, 댄버스 부인이 사근사근하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뻔합니다. 그러나 딱 한 명, 주인공 드 윈터 부인만 모를 뿐이지요. 이래서야 드 윈터 부인이야말로 문제의 원흉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남편 맥심이 그녀의 적응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건 이해합니다만, 그녀가 속 시원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더 큰 문제에요. 맥심지어 유일한 그녀의 편인 영지 관리인 프랭크에게는 어려운 상황과 댄버스 부인의 적의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이야기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 와 같은 말로는 부족했어요. 특히나 댄버스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레베카의 사촌 파벨을 맨덜리에 들였던게 탄로난 건은 하인으로서 하면 안될 일입니다. 이걸 꾸짖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댄버스 부인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루함을 참고, 2/3 정도를 지나면 다행히 명성을 회복합니다. 무도회에서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의 복수로 레베카의 옷을 입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진 직후, 레베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맥심 드 윈터는 아내에게 자신이 레베카를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고 고백하고요. 레베카가 저질렀던 온갖 부정들이 여기서 맥심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후 명백한 침몰 흔적때문에 벌어지는 재심리, 자살로 대충 결론내려지지만 이의를 제기한 사촌 파벨의 협잡 등 여러번의 위기가 몰아치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렇게 맥심 드 윈터에게 위기가 연이어 닥치고, 하나씩 위기를 넘는 듯 하지만 위기가 계속되는 전개는 그야말로 '서스펜스'가 뭔지 그 답을 제시해 주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파벨이 찾아와 협작질을 벌이는 날, 여러 명의 관계자들을 소환해 진상이 무엇인지를 추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맥심!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심정으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들더라고요. 아울러 이를 함께 극복해 나가며 소녀에서 진짜 귀족 여성이 되는 드 윈터 부인의 성장기로서도 볼 만합니다. 그녀의 맥심을 향한 장황한 심리 묘사에 더해, 맥심은 레베카를 진짜로 사랑하지 않았고, 진짜 사랑한건 자신이라는걸 깨닫는 장면 등은 이 작품이 로맨스가 중요한 요소인 고딕이라는 장르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고요.

그러나 치안판사 줄리언 대령이 직접 수사에 나설 정도의 단서를 파벨이 제시한게 맞는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레베카가 만나자고 보낸 쪽지를 들고 있던건 사실이지만, 그 쪽지가 레베카가 사망한 날 쓰여졌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지로 지역 명사를 협박한 파벨을 체포하여 재판하는게 당연한 수순이에요.

레베카가 몰래 의사를 찾아간 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걸 알게 되었다는 결말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자살 겸 해서 일부러 맥심 드 윈터를 도발한게 진상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쪽지를 남긴 이유는 설명되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댄버스 부인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맥심 드 윈터가 어찌되었건 아내를 살해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정숙하지 못한 아내에 대한 응징으로 포장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범죄에요. 빅토리아 시기 직후, 20세기 초반에야 레베카의 부정이 죽을 죄였을지는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건 무리지요. 어떤 식으로건 단죄는 필요하다 생각되어서 별로 개운치 못합니다. 단지 저택을 잃은 정도로 끝나기는 부족했어요. 이 때문에 작은 호텔 등에 숨어산다는 현재 역시도 그게 얼마나 큰 벌인지 잘 와 닿지도 않습니다.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레베카의 사인은 사고사이며 결말은 해피엔딩이라는데 저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을 위한 각색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우드식이기는 하지만, 이 쪽이 더 명확해서 좋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울러 진상을 눈치 챈 댄버스 부인의 복수도 허망합니다. 저라면 드 윈터 부부가 돌아온 직후, 불을 질렀을 거에요. 그깟 저택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후반부 1/3은 고딕 미스터리의 대명사다운 놀라운 서스펜스와 몰입감을 자랑하지만, 2/3 분량의 지루함에 대한 압박이 커서 감점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낡은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걸작은 아니라 생각되네요. 현대 독자라면, 영화 쪽을 감상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에서 중요한 요소로 쓰였던, 다과회에 나왔다는 비밀 샌드위치는 어디에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샌드위치는 맥심의 할머니가 티 타임에 먹은 물냉이 샌드위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된 오이 샌드위치가 기억에 남을 뿐인데 말이죠.
여기서 무언가 요리를 발췌한다면, 드 윈터 부인이 처음 보고 놀란 호화스러운 아침 식사나, 매형 자일즈가 감탄하는 영국에서 제대로 된 음식의 대표격인 수플레, 차를 마실 때 빠지지 않는 스콘과 카스텔라가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020/06/20

어두운 범람 - 와카타케 나나미 / 서혜영 : 별점 2.5점

어두운 범람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엘릭시르

여름에는 추리 소설이지요. 좋아하는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단편집입니다. 재미와 완성도 모두 무난하고 평이했습니다. 전체적인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 5편에 대한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리 남자" 

하무라 아키라는 모토미야 하루로부터 군마현 이카호 온천 근처에 외따로 위치한 할아버지 집에 놓여있는 어머니의 유골 항아리를 회수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심령 연구가 히다리 슈지로로 사후 폐허가 된 그 집은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상태였다. 폐가가 된 히다리 슈지로의 자택을 방문한 하무라 아키라는 유골 항아리를 찾다가 '파리 남자'의 습격을 받아 지하실로 떨어졌고, 그 곳에서 예전 안면이 있던 작가 아사쿠라 교스케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굉장히 짧은 이야기이지만, 본격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추리적으로는 빼어납니다. 모토미야 하루의 오빠가 과거 하무라 아키라, 아사쿠라 교스케의 취재 당시 동행했던 카메라맨 오사무였으며, 그가 '파리 남자'라는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단서가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굉장히 짧은 분량임에도 등장하는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적절히 분배하여 단서와 정보를 전달하는 솜씨도 탁월하고요. 아사쿠라는 오빠 일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오빠가 일하다가 다쳐서 다리가 불편하다는 모토미야 하루의 말을 통해 당시 카메라맨이 하루의 오빠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파리 남자'로 보인건 방독면 때문이고, 이는 그 집에서 화산 가스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를 별 거 아닌 듯 했던 TV 속 뉴스 묘사등으로 범인의 동기, 즉 그 집 주변이 '온천 지대'로 확인되어 단순 매각이 아닌 개발을 원했다는걸 풀어내는 추리도 일품입니다.

물론 억지가 없지는 않아요. 아사쿠라에게 심령 스폿으로 공동묘지 터를 추천한건 그 땅의 소유주일 수 밖에 없다는 추리가 그러합니다. 아사쿠라가 인터넷 등 다른 루트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고 있으니까요.
또 집을 동생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유골함이 없다고 모토미야 하루가 집의 매각 계획을 철회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즉, 하무라 아키라를 습격해서 계단에서 밀어 떨어트릴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아사쿠라의 시체도 결국 모토미야 하루의 증언을 통해 행선지가 드러나면 영원히 감출 수는 없었을테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단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작위적인 전개, 약간의 억지는 아쉽지만 항상 위험에 처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추리적으로도 공정한 좋은 작품입니다.

"어두운 범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대단치는 않습니다. 일단 이소자키가 다섯명이나 죽이는 폭주를 저지를 때 부상을 입었던 "죽지 않는 남자" 후쿠모토 다이키치의 옛 여자친구가 유코라는걸 알아내고, 펜레터를 보낸건 유코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 다다노부라는걸 알아내기까지 사용된 페이지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아요. 그만큼 전개가 빠르며 추리의 여지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부각시키는건 이소자키가 왜 폭주를 저질렀는지? 유코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다다노부는 이소자키의 범행 전날 밤, 태풍이 불어올 때 유코는 사라졌는데 사실은 이소자키가 그녀를 죽이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폭주를 저지른게 아닐까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다노부의 계략이었습니다. 전일본이 미워하는 범죄자 이소자키에게 팬레터를 보낸건 누구인지 변호사가 흥미를 갖게하여 그 집을 조사하게 만들고, 그 때 시체를 발견하게 만든겁니다. 목적은 유코의 보험금이었습니다. 실종자에게는 보험금이 나오지 않으니 시체가 발견될 필요가 있었거든요.

이렇게만 보면 꽤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이소자키가 범행을 저질러 수감된 뒤 그의 아버지가 목을 맨 곳에 시체가 있었다는건 애시당초 말이 안됩니다. 자살 당시 현장 조사는 철저히 진행되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시체를 가져다 둔 건 이소자키가 아닌게 뻔하지요. 또 트렁크에 넣었다 한 들, 조사를 하면 사체가 오랫동안 묻혀있었다는 것도 바로 들통날테고요. 그럼 시체를 유기한 제 3자가 있다는 뜻이니 이소자키의 범행은 여러모로 불가능합니다. 즉, 다다노부의 계략은 헛점 투성에 불과해요. 아울러 이 과정을 통해 이소자키가 왜 폭주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유코의 백골에 많은 골절이 보여서 다다노부가 말한, 휠체어를 탄 어머니 범행설의 신빙성을 떨어트린다는 결말과, '나' 역시 다다노부처럼 노모 때문에 미칠것 같은 상황인데 다다노부의 범행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범행을 결심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은 꽤 모골 송연하기는 합니다.
이런 점을 본다면,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기묘한 맛' 류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고령자 부양 문제가 핵심 소재이며, 동기라는 점에서는 사회파 추리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고요. 이렇게 인간 본성의 어두움을 사회 문제와 함께 덜컥 내놓는건 와카타케 나나미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범인의 계획이 헛점 투성이라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이지만, 추리 외에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게 아닌가 싶네요.

"행복한 집"

착하고 성실해 보였던 사람이 악당이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범죄로 가득했다는, 하드보일드스러운 설정을 기묘한 블랙 코미디 느낌의 묘사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런 작풍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나미 하루히코는 바로 전작인 "어두운 범람"에도 출연했었고, 잡지를 위한 취재로 하자키 시의 헌책방에서 일한다는 독신 여성을 만나는 등 작가의 팬이라면 반가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또 고령자 부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점도 전작과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작가가 고령자 부양이라는 현실에 직면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나'가 고령자 부양에 대해 떠올리는 내용은 경험자가 아니면 모를 내용이라 생각되거든요.
추리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없지만, 범인 마쓰바라 사야카와의 취재에서 그녀가 수상하다는 단서는 모두 알려주는 등 정보 제공만큼은 본격물에 가깝게 공정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완성도는 미흡합니다. 내용에서 모호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력만큼은 인정받는, 한창 때인 편집자 세쓰코가 공갈 협박에 횡령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동기부터 불투명합니다. 그녀의 죽음이 마쓰바라 사야카의 범행 때문인지도 명쾌하게 드러나지도 않고요.
미나미 하루히코의 역할 역시 모호한건 마찬가지에요. 그가 세쓰코를 위해 협박 대상을 물색한 조사자인지, 아니면 공범자인지도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마쓰바라 사야카가 범인이라면, "cozy life"의 취재에 선뜻 응한 이유도 모르겠고, 그녀가 마쓰바라 할머니를 죽이고 집을 차지했다면 "cozy life"에 자신의 집을 독자 투고 형태로 소개해달라고 보낼 이유도 없었을겁니다.

와카타케 나나미 특유의 작풍을 잘 느낄 수는 있지만 이러한 점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작업의 일본"이 읽으면 잠이 오는 특효약이라는데, 국내에 출간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요새 불면증이 생겨서요.

"광취"

가리야 마나부의 1인칭 독백같은 이야기입니다. 처음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공손하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서 반말로 강하게, 협박조로 총을 들이대며 수녀들에게 이야기하는게 드러나는 구조가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특별하지는 않으며, 전개는 억지스럽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리야 마나부가 수녀들에게 분노를 터트릴 이유는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 쓰레기인 가리야 마나부의 아버지입니다. 오기와라 미나코가 사생아 분지를 낳고 수녀원에서 쫓겨난건 그 탓이지, 수녀들의 잘못은 아니죠. 수녀원에 돌아가고 싶은 미나코의 소원을 죽은 뒤에도 받아주지 않은 수녀원 측의 처사가 문제가 없는건 아니지만, 이는 분지의 유괴 사건 후 마나부가 언론에 그 이유 - 미나코가 유일하게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건 어린아이의 실종 때 자원 봉사로 카레를 대접했을 때 뿐이라 분지가 유괴를 저지른 것 - 를 공개했다면 원만하게 해결될 수도 있었을겁니다. 구태여 총까지 들이밀면서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이유는 없어요.

마지막 분지가 만든 카레 재료의 정체가 무엇이냐는게 반전처럼 등장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되는데, 장르 문학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미나코의 사체가 카레집 '파라다이스 로스트'에 놓여져 있다는 묘사에서 충분히 떠 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기와라 히로시"어머니의 러시아 수프"가 바로 떠올라서 새롭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인물을 등장시켜 나름의 가족애를 그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 수프의 정체가 '파라다이스 로스트'의 특제 카레와 정체라는 반전과 똑같으니까요.
허나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는 절박한 굶주림이라는 이유가 명확하지만, 이 작품에서 미나코의 사체를 재료로 쓸 이유는 딱히 없어서 그만큼 와 닿지도 않습니다. 이유를 좀 더 모골송연하게 끌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지금으로서는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함과 읽는 재미는 좋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도락가의 금고"

하무라 아키라가 "조용한 무더위"에서처럼 '살인곰 서점'에서 일하게 된 시작을 알리는 단편으로 지방마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모두 디자인이 다른 일본 전통 민예 장난감 고케시의 줄무늬를 금고를 여는 암호로 썼다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 아이디어도 꽤 기발하며, 고우다가 미스터리와 고케시 양쪽 모두의 매니아라는 설정이 덧붙여져 있어 설득력은 높은 편입니다. 후처가 고케시 장인의 여동생이었다니, 장인에게 시켜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암호 고케시를 찾는 하무라에게 고케시 진열장을 넘어트려 상처입힌 범인의 정체는 너무 뻔했습니다. 후쿠시마 별장에는 관리인이 있는데, 그 관리인이 고케시를 만들었던 장인이자 고우다의 매형 안도였다니 이래서야 추리의 여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안도 측에서 하무라를 다치게 만든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안도는 고케시를 만들었기 때문에 암호 고케시 본체 없이도 금고를 여는게 가능했으며, 하무라가 고케시를 가지고 오기 전에 이미 금고를 열어 속의 원고를 빼돌렸으니 하무라와 고케시는 없어도 되니까요.

고우다가 남긴 원고의 내용이 고우다를 배신했던 후처의 언니와 그 연인의 동반 자살과 같은 내용이었다는 결말만큼은 섬찟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안도가 이 원고를 대충 읽었으면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설정 구멍으로 보이네요. 안도는 원고가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보아 읽어본걸로 보이는데, 내용이 자기 동생의 자살이 위장된 살인일 수 있다는걸 모를 수는 없지요. 즉, 설정만 놓고 보면 안도는 고우다가 오래전 에로 소설을 썼다 정도가 아니라, 살인자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즐길 거리가 있기는 한데,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