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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6

문구의 과학 - 와쿠이 요시유키 & 와쿠이 사다미 / 최혜리 : 별점 3점

문구의 과학 - 6점 와쿠이 요시유키 & 와쿠이 사다미 지음, 최혜리 옮김/유유

문구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문구에 대한 책은 좋아합니다. 친숙한 소재가 알고 보면 얼마나 놀라운 창조물인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읽었던 "문구의 모험" 과 비교하자면, "문구의 모험" 은 14종의 문구가 어떻게 발명되고, 어떻게 현대에 이르렀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역사서라면, 이 책은 수십 종의 문구에 대해 2페이지에서 4페이지 정도로 짤막한 분량을 할애하여 작동 원리와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매뉴얼입니다.

그런데 길이도 짧고, 모든 문구에 대해 1 페이지의 도해가 수록되어 이해를 도와주기 때문에 읽기가 아주 편합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도록 간략화하여 구조를 잘 알려주는 방식이 좋아요. 다루고 있는 문구의 종류도 쓰는 것, 지우는 것은 물론 지우고 붙이고, 자르고 묶고, 측정하고 보관하고, 마지막에 종이에 이르기까지 방대하여 재미있는 내용도 많고요. 몇 가지 기억에 남은건 아래와 같습니다.

  • 일본에서 연필을 최초로 사용한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임.
  • 연필 모양에 육각형이 많은 이유는 잘 굴러가지 않으며, 세 손가락으로 쥐고 쓸 때 3의 배수가 쥐기 쉽기 때문.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예네요.
  • 색연필이 둥근 이유는 색연필 심이 부드럽기 때문. 육각형으로 만들면 심까지 거리가 짧아지는 지점이 생긴다(균등하지 않다). 그래서 잘 부러질 수 있다.
  • 최초의 샤프심은 흑연으로 만들어서 지름이 1밀리미터가 넘었음. 흑연과 점토 성분으로는 가늘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샤프심은 플라스틱 수지와 흑연을 원료로 하여 가늘게 만들 수 있다는데, 신기하네요. 왜 연필은 플라스틱 수지를 쓰지 않는 걸까요?
  • 고성능 샤프에 있는 후레후레 기능은 가볍게 흔들면 심이 계속 나오는 기능이라고 합니다. 쓸 때 자동으로 계속 심이 나오는 건가요? 한번 써보고 싶네요. 심지어 미쓰비시 연필의 구루토가 샤프는 쓸 때마다 샤프심을 9도씩 회전시켜 항상 일정한 굵기로 쓸 수 있도록 한다고 하니, 샤프의 세계도 참으로 심오합니다. 샤프를 발명한 히라노 다카아키의 전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 지워지는 볼펜의 원리는 특수 잉크임. 지우개로 문자를 지울 때의 마찰열에 반응하여 잉크가 무색으로 돌아간다. 때문에 종이를 냉동고(영하 20도)에 넣어두면 다시 원래대로 글자가 돌아온다는데, 아 이건 정말 대단해요! 추리 소설에 인용해도 됨직한 멋진 이야기입니다.
  • 사인펜은 수성 잉크 펠트펜에 대한 펜텔의 상표명인데 일반 명사가 된 것.
  • 블루 블랙 잉크(만년필에 사용하는) 지우개는 잉크 화학 반응을 이용. 브루블랙 잉크 속 철이 검은색으로 변하며 산소와 결합하는데, 이 산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수산을 사용한다.
  • 셀로판 테이프의 셀로판 필름은 목재의 섬유로 만든 천연 필름임. 셀로판이라는 용어부터가 식물 섬유를 구성하는 셀룰로오스와 투명하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Transparent를 합성한 명칭.
  • 우표의 접착 성분인 초산비닐수지가 들어 있는 껌을 초콜릿과 함께 씹으면 껌이 녹아버리는데, 초콜릿에 함유된 유지가 초산비닐수지를 녹이면서 일어나는 현상임.
  • 베르누이 커브를 이용한 가위날이 있는데, 자르는 동안 두 가윗날이 이루는 각이 30도를 유지하도록 만든 것.
  • 커터칼은 일본에서 처음 만듬. OLFA (올파) 1956년. 유리조각과 판 초콜릿에서 아이디어를 얻음.
  • 커터 매트는 사실 칼날을 보호해 주는 도구임. 종이를 받치고 자르면 칼날이 쉽게 상함. 커터 매트는 말랑말랑한 층이 칼날을 보호해줌.
  • 스테이플러 침의 단면 비율은 정해져 있음. 3:5
  • 전자계산기와 전화기 키 배열이 다른 이유 : 계산기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2와 1을 붙여놓은 것이며 전화기는 오래전 다이얼식 전화기 숫자 배열을 응용하여 0과 1을 배치한 것.
    둘의 키 배열은 아주 오래전 "어둠의 인형사 사콘" 에서 트릭으로 써먹었던 소재이지요.
  • 정규와 자는 다름. 정규는 선을 긋는 용도이며 자는 길이를 재는 것. 삼각정규는 삼각자. 전형적인 일본식 표현이죠? 그런데 삼각자의 가운데 구멍은 쉽게 집어들기 위해 공기가 빠져나가라는 용도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 인감, 인주가 문구로 소개되어 있는데 일본식 정의인지 좀 궁금합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문구점에서 파니 문구라고 해도 크게 문제는 없겠죠. 그런데 인주는 수은과 유황을 합성한 주 (유화수은) 를 송진, 밀랍, 아주까리 기름 등과 잘 섞어서 반죽한 것이라는데, 수은은 독약이니 인주를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 조사해보고 싶어집니다.
  • 지퍼는 일본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에 있는 회사에서 1927년 자크인 이라는 이름으로 첫 생산. 여기서 자크라는 말이 유래. 자크는 일본어로 돈주머니를 뜻하는 긴차쿠에서 유래된 말. 어원이라는게 알고보면 참 허무한게 많아요. 이 역시 마찬가지.
  • 모조지의 이름 유래는 의외였습니다 정말로 "모조" 해서 만든거라 모조지거든요. 다이쇼 시대, 오스트리아에서 제조한 종이를 모조한 것이 유래인데, 또 재미있는건 사실 메이지 중기 당시 대장성 인쇄국이 제조한 종이 (국지) 를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것을 보고 모조지를 만든거고, 이를 다이쇼 시대에 역수입해 또 모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모조된 종이를 모조한거죠. 제대로 부르려면 "모조모조지"라고 해야겠네요.
이외에도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해요. 일본인 저자가 일본 시장, 환경을 중심으로 적었기에 용어, 그리고 설명해주는 내용이 조금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단점은 있지만 얻는게 더 많았던 독서였어요.
유유 출판사 책 답게 좀 과한 가격은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문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0/12/27

문구상식 - 와다 데쓰야 / 고정아 : 별점 2점

문구상식 - 4점 와다 데쓰야 지음, 고정아 옮김/홍시

모으는 취미도 없고, 그다지 많이 쓰지도 않지만 문구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전 "문구의 과학" 리뷰 글에서 언급했듯 친숙하지만 놀라운 창조물로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는걸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구의 과학" 외에도 "궁극의 문구", "문구의 모험" 등 문구 관련된 여러 책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문구의 대명사인 연필 관련 서적도 여러 권 읽었고요. 이 중 다큐멘터리를 글로 옮긴, 일종의 논픽션인 "그래, 나는 연필이다"와, 거대한 농담과 같은"연필 깎기의 정석"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문구에 대한 미시사적 접근, 혹은 특정 문구에 대한 소개나 저자의 문구 사용에 대한 노하우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책도 문구에 대한 소개와 노하우를 담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들에 비하면 재미도 없고, 내용에 대해 공감하기도 힘들었어요. 

물론 건질만한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다른 책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붙임쪽지'에 대해 한 단락을 할애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풀어놓는 부분이 괜찮았어요. 저도 책을 읽을 때, 읽고 나서 리뷰에 사용하기 위해 포스트잇이나 투명한 필름형 붙임쪽지를 붙여 놓는 편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저자 의견에 공감되는 점이 많기도 했고요. 저도 저자의 말대로 투명한 필름형 붙임쪽지가 왜 3색 이상 컬러로 구성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파일링' 단락도 볼 만 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저자와 같이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지는 않지만 기본 개념 자체는 배워볼 만한 부분이 있었으니까요. 예를 들어 쌓이는 자료는 1차적으로 '즉시 분류'한 뒤, 여유가 생길 때 제대로 분류하라던가, 데이터로 저장할 경우 폴더명의 계층화와 파일명에 신경쓰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업무에 적용해 봄 직 했습니다. 

소개되는 문구도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는 흥미가 갑니다. 첫 번째는 펜텔 오렌즈 샤프입니다. 0.2mm 두께로 경도 B나 2B로 쓰면 부드러우면서도 가늘고 섬세한 글씨를 쓸 수 있다는데 하나 구입하고 싶어졌어요. 가격도 저렴하다고 하니까요. 파카 조터 볼펜은 제가 진급 축하 선물로 받았던 거라 소개 자체가 반가왔고요. 풀과 테이프, 양면 테이프의 장점만 모았다는 '풀 테이프'는 정말 유용해 보여서, 곧 찾아서 구입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내용 외에는 다른 책에서 접했던 내용도 많고, 관심없는 분야 소개도 많은 탓에 지루했습니다. 지워지는 볼펜 프릭션, 샤프심이 회전하는 샤프 쿠루토가, 몰스킨 노트 등은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만년필에 대한 항목은 인터넷이나 다른 책을 통해 알 수 있던 내용보다도 못했고요.
그나마도 필기구 류는 관심있는 분야라서 열심히 읽었는데, 노트와 수첩은 정말 지루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문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이유인 '놀라움과 노력'을 느끼기 힘든 내용들인데다가, 제가 '노트 필기'를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식적인 자리는 회사에서 배포하는 무료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이용하고, 업무 시에는 주로 이면지에 스케치나 노트를 하거든요. 그나마도 그때그때 PC로 바로 옮길 뿐더러, 대부분은 이미 PC나 스마트폰으로 바로 디지털 작업을 시작하기도 하고요. 비싸고 전문적인 노트는 필요가 없어요. 유명한 '몰스킨 노트'도 한 번 써 봤지만, 저한테는 가성비가 최악인 물건이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제품 중 리히트 랩의 '트위스트 노트'는 그래도 혁신, 참신함이 도입된 결과물로 보이기는 하는데, 이 역시 저에게는 가성비가 좋을리 없겠지요. 아울러 도판이 전무하다시피한 것도 큰 약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다른 문구 관련 서적에 비해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런 책을 좀 많이 읽은 탓이 큰데, 이제 이 쪽 분야도 당분간 좀 접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8/04/06

히틀러의 비밀 서재 - 티머시 W.라이백 / 박우정 : 별점 3.5점

히틀러의 비밀 서재 - 8점
티머시 W.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히틀러가 남긴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의회 도서관, 공공 기록 보관소, 민간 보관소 등을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뒤져본 후, 히틀러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영향을 끼쳤을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책입니다. 

'책이 수집가를 보존하며 수집가가 소멸된 뒤에는 그 삶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히틀러의 장서를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시도만큼은 무척 독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리뷰를 쓰면서 제 책장을 쭉 훝어 보니, 정말 저라는 인물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책장이구나 싶더라고요. 요리 관련 서적 20%, 역사서 20%, 과학 관련 서적 10%, 장르문학 30%, 만화책 20% 정도의 구성인데 이 블로그 리뷰 비율과도 비슷하고 실제 제 관심사와도 같으니까요. 장서가 수집한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차는 열개 항으로 나뉘며, 중요한 책도 열 권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은 그 외에도 많은데 이 중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거나 관심을 가졌던 책들을 분류하자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우선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최소한 그러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첫 번째입니다. 오스보른의 "베를린", 직접 쓴 "나의 투쟁",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권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그리고 그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릴 수 있도록 한 스벤 헤딘의 "대륙 전쟁 속 미국" 등입니다.
두 번째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혹은 히틀러에 대해 증언한 인물들이 관련된 책입니다. 히틀러의 정치 인생 초반에 그를 후원하고 이끌었던 유명 작가 에카르트의 "페르 귄트", 유명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이 선물한 "피히테 전집" 이 대표적입니다. "피히테 전집" 은 리펜슈탈과 히틀러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목적 외에도,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도 약간이나마 설명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분류와도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고요.
세 번째는 책 자체가 목적이나 수단이 되어 히틀러 주변에서 움직인 경우입니다. 히틀러가 싫어했다는 로젠베르크의 "20"과 이에 맞서 나치와 카톨릭을 결합시키려 했던 후달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초"는 각각 책 소개와 함께 실제 히틀러 주변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일화가 함께 소개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총통이 실무, 그리고 공부를 위해 읽은 책입니다. "슐리펜",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전기와 각종 전쟁사나 전술 및 각종 무기 관련 서적들 처럼요.
이러한 책들을 히틀러의 성장 과정 순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가 점차 어떤 사상, 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도 대략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고요.

항상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후대 역사가의 사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히틀러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반가왔습니다. 접근 방식이 신선한 덕분입니다. 용감하고 전우애 넘치는, 독일 제국에 충심을 다 한 군인, 생사의 기로에서 짧은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은 노력가,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로 자신만의 이론과 세계를 완성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했던 천재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무기 관련 연감을 통독하여 후일 할더에게까지 한 방 먹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재자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16,000권이 넘는 장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은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써먹었다니 흉내도 내기 힘든 일이긴 하지요. 세계와 맞 상대할 수 있었던 제국을 십 년 이상 철권통치한 인물이 보통 인물일리야 없겠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라는 점에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신반인이더라고요. 물론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우생학을 결합시켜 유대인을 학살한 잔혹한 독재자의 모습, 스스로를 유럽 대륙의 구원자로 생각한 과대망상 독재자의 모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서법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책을 제대로 독파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특정 관념을 형성한 뒤, 책의 목차와 색인을 살펴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결론부터 읽기도 할 정도로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습득하는 방식인데, 논문을 쓸 때의 방식과 비슷하네요. 스스로의 목표나 관념이 명확하다면 나름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책의 목적, 그리고 광고 문구 - 1만 6000권 장서 중 단 열 권이 역사를 바꿨다 - 에 부합하는 내용인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소개되는 절반 가까이의 책들이 최상의 혈통인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관점, 이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반유대인주의 형성에 관련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몇몇 책들은 히틀러가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에요. 이래서야 저자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을 선정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인물을 구체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고요.
물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허나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요. 더 다양한 책들로 다양한 분석을 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임스 쿠퍼의 "가죽 장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카를 마이의 "사막 횡단", 스벤 헤딘의 모험담 등 평소 즐겼다는 모험 소설들도 여러 권 언급되는데, 이런 책들을 좀 더 분석하는 게 더 취지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서재에 각종 추리 소설도 꽂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과연 어떤 책이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소한 제목 정도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이것도 추리 소설 홀대의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그래도 한 인물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는 추천작입니다. 취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신뢰성 측면에서도 다소 부족하지만 읽는 재미도 쏠쏠하니 히틀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5점 입니다.

덧붙이자면, 책장이 소유자에 대해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요새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시대죠. 모든 컨텐츠 소비가 스마트 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수십년 뒤에는 "스마트 폰 로그로 분석한 누구누구" 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8/09/08

깃털 - 소어 핸슨 / 하윤숙 : 별점 4점

깃털 - 8점
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에이도스

깃털에 대해 모든 것을 고찰하여 알려주는 과학 서적입니다. 부제는 "가장 경이로운 자연의 걸작"이지요. 책은 어떻게 깃털이 진화하여 만들어졌는지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깃털의 주요 기능과 목적인 온도 조절과 비행, 그리고 장식 용도 세가지 항목을 각각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요. 마지막으로 인간이 깃털을 활용해왔던 여러가지 사례들을 설명해주며 마무리됩니다.

인터넷 서점 소갯글을 보고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박입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시조새 화석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단락부터 푹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공룡에서 새가 진화했다는 이론을 접했던 세대가 아니라서 더욱 빠져든 것 같아요. 이 책을 통해서 공룡이 갖춘 초기 깃털은 아마도 보온과 장식 용도가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진화하여 일종의 '활공' 용 깃털이 생겨난 것이다라는 진화의 과정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이미 날 수 있는 공룡 (익룡) 이 있었는데 왜 활공용 깃털로 진화가 이루어졌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이른바 WAIR 가설(Wing assisted incline running)로 발과 조합하여 높은 경사를 오르기 위함이라는데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여기서 뛰어내리거나, 날아오르는 방향으로 점점 진화해 나가게 된 것이지요. 퍼덕거리며 높이 올라간 후 퍼덕거리며 뛰어내린다, 너무나도 그럴듯해요!

새의 온도 조절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왔습니다. 새가 영하 수십 도의 높은 고도에서의 비행과 극지방, 물속에서 벼텨내고 뜨거운 열대 기후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가 전부 '깃털' 덕분이라니 놀랍기만 합니다. 덕다운 파카, 이른바 오리털 파카는 우리도 한겨울 보온용으로 친숙한데, 새의 솜털은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대단한 보온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솜털을 포함한 깃털은 현대의 공업 기술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복잡한 구조물(?)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농담삼아 하는 "오리털 대신 닭털을 써서 싸구려다!"는 말은 책에 따르면 근거가 없네요. 깃털의 메커니즘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솜털을 쓰지않고 다른 깃털을 써서 싸구려다!"라고 해야 맞는 말인 것이지요.
새들이 체온이 올라갔을 때 체온을 내리는 다양한 방법도 재미있는데, 동물원 가면 가끔 보는 열대 조류인 큰부리새의 큰 부리도 체온을 내보내기 위해서 크게 발달했다는군요 단지 귀염귀염한 외모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거죠! 이렇게 체온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박쥐와는 다르게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의 신비는 정말 놀라워요.

극락조로 대표되는 새들의 기묘한 깃털 장식들과 인간 사회에서 유행했던 깃털 모자들, 이 때문에 이루어졌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바르바리 타조 밀수 작전, 그 외 깃털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심지어는 화폐로까지 이용되었던 공예품과 예술품들 이야기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양한 깃털 관련 물건들 이야기도 흥미가 넘칩니다. 깃털 책에서 플라이 낚시 미끼라던가 깃털 펜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읽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깃털 펜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책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런건 이전에 읽었던 문구 관련 서적에서 인용해서 다루어 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외에도 재미있는 내용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중국의 이시안 지층, 시애틀의 깃털 회사, 라스베이거스 깃털 의상 제조자, 뉴욕의 깃털 모자 디자이너, 오리건 동부의 플라이 낚시 전문가 등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현지 취재 및 인터뷰를 감행한 저자의 노력과 이러한 연구 와중에 곁들여지는 좌충우돌 경험담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한마디로 지식의 충족과 읽는 재미 모두를 갖춘 최상급의 과학 교양 서적입니다. 도판이 전부 흑백에다가 주요한 도판이 제대로 수록되어 있지 않은 점 때문에 감점하지만 별점 4점은 충분해요. 깃털에 대해 관심이 전무하셨던 분들이라도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처럼 새와 깃털에 푹 빠지시게 될 것을 장담합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10/22

소년 생활 대백과 - 현태준 : 별점 2점

소년 생활 대백과 - 4점
현태준 지음/휴머니스트

그간 격조했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바쁜 요즈음이네요. 주말만 글을 올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뽈랄라 대행진"으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콜렉터인 현태준 씨가 쓴, 한국 프라모델과 완구를 시대별로 망라한 책입니다. 제품 명칭, 스케일, 가격, 출시년도, 주요 특징과 주로 어떤 제품을 베꼈는지가 중심인 간략한 제품 소개가 곁들여진 구성으로, 특히 한국 프라모델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보집을 보는 듯한 재미가 큽니다. 시대를 연상케 하는 패키지와 광고 문구들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덕분입니다. 일본식 발음, 오타, 그리고 반공 분위기가 팽배하던 70년대에 소련기를 출시하면서 "적기를 식별하자"라는 슬로건으로 반공 분위기 속에서도 제품 출시에 문제가 없도록 했던 마케팅 정책 등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조립식'이라는 단어도 반가웠고요. 

70년대 생으로 80년대 모형 라이프를 보냈던 세대라서, 직접 만들어보았던 여러 제품들이 소개되는 것도 무척 반가웠던 점입니다. 몇몇 제품만 꼽아보자면, 우선 아카데미의 연발 루가총은 확실히 만든 기억이 납니다. 정교하고 재미있어서 두어 번 만들었던 것 같아요. "내 맘대로 인디언" 시리즈는 너무 좋아했던 시리즈입니다. 쉽게 만들 수 있고, 결과물도 예쁘고 완성도도 높아서 자주 만들었었습니다. 정말 추억 돋습니다. 건담 시리즈는 그냥 그랬지만,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어딘가 샵에서 전시된 건담 마크 2 조립 완성품을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손가락이 움직이다니! "변신 혹성 전자 로보트 (다이덴진)", "발디오스", 그리고 "가리안 시리즈" 모두 기억에 생생하고요. 보물섬 시리즈는 어린 마음에도 큰 녀석은 너무 비싸서 그림의 떡이었지만, "보물섬 3호 감시전망대"는 확실히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품 소개 외에도 제일과학의 창시자 김병휘 사장 관련 기사처럼 흥미로운 토막 기사도 꽤 괜찮습니다. 중앙매스컴에 근무하던 평범한 광고인이 소년중앙에 실릴 아카데미 광고를 계기로 모형에 흥미를 느껴, 모형점 개업 → 모형 개발 및 판매 → 법적 고초(일본 모형 수입 문제) → 사업 철수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담겨 있습니다. 취미를 살려 일가를 이뤘다는 점은 부럽지만, 동시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차라리 "라면 요리왕"의 후지모토처럼 부업으로 계속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네요.

하지만 이런 추억을 되새기기 위한 용도 외의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좀 부족합니다. 모든 프라모델을 총망라하고 있지는 않으며, 당대 유행과 실제 역사와의 연결 같은 미시사적 시각도 많이 부족합니다.
소련기 출시 시기의 광고 카피, 인기 만화·영화와의 연계 흐름도 짤막하게 언급되긴 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그나마 비중 있게 다루는 저작권 무시, 복제 행태는 이미 다른 컨텐츠를 통해 수없이 접해본 것들이라 신선하지 않았으며, 국내 프라모델 역사 측면에서도 제일과학 외에는 주요 메이커들에 대한 소개가 부족합니다. 아카데미, 아이디어 과학, 에이스 과학, 뽀빠이 과학 등 업체들의 흥망성쇠나 관계자 인터뷰가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특히 명가 아카데미 과학에 대한 소개가 단 한 페이지라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국내 최초 모형 동호회였던 걸리버모형회, 애독했던 "취미가" 기사도 구색 맞추기 수준이어서 아쉬웠고요.

역사적 흐름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모델" 자체에 집중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부족했습니다. 대부분 패키지만 보여주고 러너나 실제 작례 소개는 드문 탓입니다.

한마디로 국산 프라모델 카탈로그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물론 그 자체로 나쁘진 않고 저 역시 충분히 즐겼지만, 미시사적 시각이나 모델 중심 구성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35,000원이라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오래전 읽었던 "클로버 문고의 향수"처럼 오래된 컨텐츠를 시대순으로 조망하려는 의도는 비슷하지만, 깊이와 디테일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6/06

노인의 전쟁 - 존 스칼지 / 이수현 : 별점 2점

“맹세코 그놈을 때려눕히려고 했다니까.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 시켜야 한다지 뭔가."

75세를 맞은 존 페리는 사랑했던 아내 캐시와 사별한 뒤, 미련을 버리고 '젊은 육체'를 준다는 우주개척연맹(CDF)에 입대했다. CDF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우주 식민지를 보호하는 군대로, 외계에서 구한 최신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젊고 강화된 육체를 갖게 된 존 페리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SF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있을 유명작입니다. 미국 작가 존 스칼지의 데뷔작으로, 읽은지 제법 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입대하면 최신의 젊고 강하며 잘생긴 육체로 바꾸어준다는 설정의 참신함입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늙어가고 있는 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 역시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최전선에서 외계인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제대가 가능한 10년 뒤의 생존율이 25%에 불과하고, 두 번 다시 지구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지만,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니까요. 아마 저도 가족에 대한 미련만 없다면 입대했을거에요.

젊은 군인으로 거듭난 존 페리가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 훈련을 받는 장면도 생생합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덕 상사 루이즈의 입담이 돋보였는데, 특히 젊었을 때 광고 문구를 썼던 존 페리와 루이즈 상사 간의 추억담 티키타카가 백미였습니다. 왜 상사들은 이렇게 입담이 좋은걸까요? 사뭇 궁금합니다.

훈련 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외계 종족과의 전투도 흥미롭습니다. 지구인보다 앞선 과학 문명을 지녔지만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해 전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콘수 종족의 설정은 이렇게 소비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어요. 3부 마지막 코랄 행성 전투에서, 어떻게 코랄인들이 도약 추진한 전함의 위치를 파악해 타격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응안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요. 콘수인이 관련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협상을 통해 기기 한 대만 전달된 것이 확인되어, 이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전개가 기승전결이 완벽하여 몰입도를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분명합니다. 우선, 젊어져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SF 밀리터리물에 불과해져 버리고 맙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노인이었던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뭔가 역할을 해 준다면 독특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존 페리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비현실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한 번 죽을 뻔했지만, 그 외에는 영웅이 되기까지 탄탄대로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면 지구에서의 전생이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모두 노인이었던건 마찬가지니, 정말 독특한 경험과 기억이 있었다는 설정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예를 들어 프로 바둑 기사라서 전략적으로 대국을 볼 줄 알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전개도 후반부로 가면 처집니다. 여러 행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단편 에피소드처럼 나열되는 탓입니다. 게다가 사별했던 아내 캐시가 ‘제인’이라는 클론으로 되살아났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지구의 그 누구라도 클론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노인들을 징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시체를 수거해 육체를 복제하면 될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초반부에 젊어지는 시술을 받기 직전 지병으로 사망한 존 페리의 룸메이트 디크는 왜 되살려 클론으로 만들지 않은걸까요? 그냥 존 페리의 러브라인과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고 몰입도도 높았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형적이고 개연성에서도 아쉬움이 커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더 읽어보지는 않을 듯 합니다.

2024/03/24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라플라스의 마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및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물 영화 제작자 미즈키 요시로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나카오카 형사는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경찰 수사 협조를 요청받은 환경 분석 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는 고의로 중독 사건을 일으키는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마테 온천에서 유사한 황화수소 중독사가 또 일어났고, 나카오카와 아오에는 피해자들이 영화 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아마카스도 수년 전 가족을 황화수소 중독으로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아마카스의 아들 겐토를 쫓는 소녀 우하라 마도카와 만난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그녀 주변인물들을 통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이 모든건 뇌수술로 물리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겐토의 복수극이었다....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주년 기념작인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겐토와 마도카가 가진, 물리법칙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구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등으로 꽤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겐토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인 과거 아마카스가 가족을 살해했던 사건의 동기도 놀라왔습니다. 아마카스가 작성했던 블로그 글과는 사뭇 다른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등의 설명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아마카스가 주장하는 천재 이론 -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 과는 반대되는 주제의식 -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는 없다 - 도 와 닿았고요. 암요, 천재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있어야 천재도 빛을 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 뿐이고 대체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선, 전개부터 예상 그대로라 굉장히 평이합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살인은 온천을 방문했던 청년이 일으켰다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 정체도 읽다보면 아마카스 겐토라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전문가 아오에 교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황화수소를 이용한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마도카의 특수 능력이 초반에 밝혀지는 탓에, 그런 능력을 이용한 범죄라는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활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지 않게 전개도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많아서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도카 등 다른 인물들 시점으로의 전환은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나카오카 형사의 수사가 '위'에서의 지시로 마무리되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뇌 수술 덕분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초능력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머리가 좋아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즉, 아래와 같이 '아마데우스 조'가 미사일 궤도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똑같아요.
물이 흐른다던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물리법칙 이용은 듀나의 SF 단편 "나비전쟁"에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했었고요.
게다가 이 능력에 대한 것 모두는 온갖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결국 과학이라기보다는 판타지입니다. 여기에 특수 능력자를 나라에서 관리한다 등의 설정에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코드네임(?)까지 더해지니 이거야 원, X-men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등장인물들도 진부하고 평이합니다. 겐토는 특히 문제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마카스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치사토를 유혹하여 범죄에 끌어들이고 마지막에 함께 죽여버리려고 하면서 정의, 복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심지어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말이죠!
아오에 역시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서 전혀 교수답지 않았을 뿐더러, 아오에가 가족 붕괴를 앞두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우하라 교수가 딸 마도카의 뇌수술을 하게 된 동기인 '토네이도' 사고도 굉장히 억지스러웠어요. 설령 이런 사고가 있었다한들, 딸에게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겐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추리적으로도, SF적으로도, 전개와 완성도 측면에서 별로이며 문제 투성이라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뻔하고 유치한 마블 히어로물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좀 궁금하네요. 예고편을보니 아오에 교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복잡했던 시점 분산을 깔끔하게 정리한 듯 보여서 책보다 좋아보이거든요. 평이하고 쉬운 전개는 영화에는 분명 장점일테고,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장면들 - 특히 클라이막스의 '다운버스트' - 은 화면에서는 꽤 그럴싸하게 보일테니, 최소한 소설 후속권보다는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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