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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3

아비무쌍 - 노경찬 / 이현석 : 별점 2점

무협 웹툰인데 초반에는 설정이 신선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노가장이 무림의 영웅이나 천하제일인이 아니라, 세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 홀아비 가장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별한 아내가 남긴 세 쌍둥이를 키우기 위해 그는 원래 하던 해결사 일을 접고, 안정적인 직장인 천룡회 무사로 취직합니다. 그리고 이후 10년 넘게 문지기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운다는 설정이지요. 이 과정에서 추가 보수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가장은 문파의 원한, 가문의 복수, 천하제일을 향한 야망 같은 동기는 없습니다. 오로지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무사히 키우는데 주력하지요. 무림의 명성보다 월급과 안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요. 이런 생활감 넘치는 설정은 그간 제가 읽었던 무협이라는 장르물에서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노가장이 상당한 실력자이면서도 스스로를 하수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무림인들에게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만났던 무림인이 무림 5존의 한 명인 관존이었기 때문에 묵사발이 났던 것 뿐이지요. 하지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노가장은 어떤 임무를 맡던 살아남는걸 최 우선 과제로 삼아 해결사 일을 하며 쌓은 경험과 실전 감각으로 여러 위기를 돌파합니다. 

노가장의 세 쌍둥이 아들과 딸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해서 진행되는 부분도 괜찮습니다. 무공을 배우고, 각자의 성향에 맞게 성장하며, 점점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라서 재미가 없을 수 없으니까요. 아들들과 딸의 개성도 뚜렷하고요.

작화도 좋습니다. 그림체도 독특하지만 액션 장면에서 속도감과 무게감이 빼어납니다. 검과 주먹이 부딪치는 장면, 인물의 움직임, 타격의 순간 표현이 시원하며 절묘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비교적 초, 중반부이며 후반으로 가면 흐려져 버리고 맙니다. 노가장이 무협지 속 절정고수의 반열에 오르며 가장 매력적이며 특별했던 '홀아비 가장의 외벌이 육아 생존기'라는 신선했던 컨셉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뻔한 무협지와 다를게 없어집니다. 

물론 십 여년이 지나, 노가장이 무시받는 수모와 천룡회 내부 암투에 휘말려 부하를 잃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려는 움직임만큼은 흥미롭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림인을 정리하려는 관존의 음모와도 얽히는데, 이 역시 기존 무협지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다른 쓸데없는 설정은 쳐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교의 우두머리 천소소가 왜 등장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행복이를 비롯한 여러 조연도 마찬가지고요. 게다가 비교적 비중이 높았던 천룡회 내부 암투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전개도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핵심인 오문 설정이 지나치게 만화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오행의 성질을 따른다는 설정은 그렇다 쳐도, 사람이 불이나 흙처럼 변해 마인이 된다는 표현은 유치했습니다. 노가장이 신존이 되는 과정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사부가 어떻게 기운을 가져갔는지, 노가장의 변화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는지 등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만큼은 분명히 신선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작품 고유의 색깔이 약해지고, 평범한 강자 중심 무협물에 가까워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26/02/22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 시즌 1 (2025) - 후지이 미치히토 외 : 별점 2점

전쟁 후 PTSD에 걸려 낙향한 무사 사가 슈지로는 극심한 생활고로 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지만 약 한 첩 쓰지 못했다. 아내마저 병환이 깊어지자, 사가는 무려 10만엔을 준다는 무사 모집 공고에 응해 교토 텐류지로 향했다. 다량의 총으로 무장한 주최측은, 그 곳에 모인 수백명의 전 무사들에게 상대를 죽이며 도쿄까지 오면 10만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한 시대극 액션 드라마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를 배경으로 무사 계급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살육 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인기있을 만한 설정은 다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설정 ‘고독(고도쿠)’가 대표적이에요. 수백 명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을 벌이게 하고, 최후의 생존자만을 뽑는다는 건데, 이건 "오징어 게임"과 다를게 없지요. 고도쿠 배후에 재벌 세력과 경시국이 손을 잡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특기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건 "닌자인법첩"같은 일본 시대극 액션물 설정을 그대로 따 왔고요. 그 외에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많아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만화같은 설정을 보신 전쟁이라던가 폐도령 이후 무사 계급의 몰락과 같은 실제 역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와지 대경시, 4대 재벌 등 실존 인물들을 결합시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고도쿠를 통해 무사 계급을 말살하려 한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목적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검술 액션입니다. 실사 시대극으로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촬영과 합이 좋은 덕분입니다. 특히 슈지로가 PTSD를 극복하고 총을 든 경비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각성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어요. 이 순간을 위해 주인공 사가 슈지로에 대한 서사도 초반부터 잘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살인귀 칸지야 부코츠야 일종의 중간 보스쯤 되는 악역이니 그렇다 쳐도, 키구오미 우쿄같은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까지 개별 서사를 풀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비서 신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짐짝에 가까운 후타바의 동행이나 이로하의 등장과 과거 사부와의 악연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기보다는 분산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가 슈지로가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하고 도쿄에 도착할게 뻔한만큼, 이런 이야기는 시간과 분량 낭비에 불과했어요. 이보다는 닌자 쓰게 쿄진의 목적을 좀 더 집중적으로 풀어냈어야 합니다.

검술 액션도 중반 이후에는 힘을 잃습니다. 파워 밸런스가 이상한 탓입니다. 사가 슈지로는 각성 전에도 칸지야 부코츠를 압도했었는데,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는 슈지로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고전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시원하거나 통쾌한 맛도 없고요.

또한 무사 계급을 이 기회에 몰살시키겠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계획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입니다. 모든 무사들이 고도쿠에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칸지야 부코츠의 살인 행각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민중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무언가는 부족하지만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합니다. 

2025/06/27

네가 손에 쥐어야 했던 황금에 대하여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소설가의 평범한 일상을 풀어낸 작품집입니다. 소설가 생활을 시작한 뒤, '야마모토 슈고로 상' 후보가 되기까지를 아우르는 여섯 편의 연작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가와 사토시 특유의 독특한 발상들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 별다를 것 없는 일상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줍니다. 이와 동시에 소설이란 무엇인지, 창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작가적 성찰도 좋았고요. 

이야기마다 밀도나 완성도의 편차가 존재하며, 일부 수록작에서는 특유의 발상이 부족해 다소 평이하게 흘러간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프롤로그

독서광 대학원생인 '나'는 '당신의 인생을 원 그래프로 표현하시오'라는 입사지원서 항목을 높고 고민하다가, 여자친구 미리의 조언으로 입사 지원서에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구직을 위한 동기와 목적이 이야기로서 부족하다고 느낀 탓에 자신의 인생을 소설처럼 바꾸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진짜 소설 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설가가 되기 위해 미리와 이별한 나는 6년 후 소설가가 되었고 미리는 결혼했다.

연작 단편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입사 지원서의 항목 하나를 두고 주인공과 여자친구가 나누는 진지한 토론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여자친구 미리의 조언입니다. '입사 지원서에는 진실을 쓸 필요가 없고, 구직 활동 자체가 하나의 소설과 같으니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말로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이고 참신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생각도 되고요. 결국 주인공이 가짜 인생을 그럴듯하게 써 내려가려고 노력하다가 진짜 소설가가 되고 만다는 결말도 횡당하지만 좋았습니다.

작가 오가와 사토시 특유의 기발한 발상과, 일상을 다루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성이 잘 살아 있는 단편입니다. 미리와의 건조하면서 담백한 관계와 헤어짐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도 하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3월 10일

대지진 3년 후인 3월 11일, 고등학교 동창 네 명이 모여 술을 마셨다. 다들 지진이 일어난 날에는 무엇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바로 전날인 3월 10일에 뭘 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이걸 계기로, 나는 인생의 대부분은 기억에도 남지 않는 평범한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3월 10일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예전에 썼던 핸드폰까지 찾아내어 조사했다. 바로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문자를 통해 홍차와 마들렌을 먹으면서 어릴 적 기억을 세세한 것까지 떠올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날 나는 아카네와 사귀기 위해 영화 초대권을 이용한 수작을 부렸었다는걸 알아냈고, 지금 아카네는 이별을 고했다.

4년 전의 평범한 하루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은 일상 속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마치 추리 소설처럼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사소한 단서들을 따라가며 퍼즐을 맞추듯 과거를 되짚는 흐름이 꽤 흥미롭고, 일상계 추리물로도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약속에 늦잠을 자고는 부끄러워 그 이유를 '숙취'라고 꾸며낸 뒤,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이 자신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거짓이 반복되며 진실처럼 굳어지는 과정은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연결한 구성도 눈에 띄었습니다. 주인공이 아카네와 가까워지기 위해 인용한 질베르트의 이야기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유기적으로 활용되는 점이 돋보였거든요. 처음엔 지나쳤던 대사나 행동들이 나중에 의미를 드러내며, 이야기 전체에 짜임새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공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기억을 왜곡했던 경험을 고백하면서,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단한 사건 없어도 일상을 이렇게 깊이 있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소설가의 본보기

'나'의 친구 니시가키는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인물로, 마음에 들었던 여성 에리카와 가까워지기 위해 작가인 나를 이용하여 결국 결혼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결혼 후 니시가키는 나에게 에리카가 소설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려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알고 보니 에리카는 오라 리딩이라는 점술에 빠져 소설가가 되려고 했고, 니시가키는 그것이 사기라는걸 나와 함께 밝히기로 했다. 처음에는 니시가키가 점술가를 직접 찾아가 사기 행각을 증명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내가 직접 소설 속 인물을 빌려 점술가에게 접근해서 어느 정도 거짓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 역시 점술가의 말에서 분명 무언가를 느꼈다.

'소설을 써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겁니까? 내 경험을 말하면 지금까지 소설의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디어는 퍼즐 조각 같은 것이어서 늘 내 마음속에 몇가지씩 존재한다. 그 조각들을 끼워 맞추면 비로서 소설의 아이디어가 된다. 작품을 구상하는 기간의 태반은 딱딱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을 억지로 겹쳐놓고 겹친 부분을 잘라내거나 공백 부분을 채워넣으면서 모양새를 다듬어 가는데 시간을 쏟는다. 이기고 치대는 사이에 점점 아이디어의 형태를 갖춰 간다.'

점술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적인 의심과 믿음,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교차시키는 구성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오라 리딩이라는 점술이 어떻게 사람을 현혹하는지, 콜드 리딩이라는 간단한 사기 수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재미의 핵심이었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보며 교묘하게 말을 끌어가는 방식은 실제 사례로도 있을 법해서 몰입감 있게 읽혔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디어는 갑자기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끼워 맞춰 가는 과정이라는 설명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작가로서 겪는 고유의 고민과 구상의 실제적인 측면이 잘 전해졌습니다.

다만 이야기 자체는 결국 에리카가 회사를 당장 그만두지 않기로 하면서 비교적 평이하게 마무리됩니다. 앞선 단편들에 비해 기묘한 전개나 파격적인 발상은 덜해서, 그런 부분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다소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네가 손에 쥐어야 했던 황금에 대하여

나는 남이 내 일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타인에게도 참견하지 않는 반면 고등학교 동창 가타기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대로 거리낌 없이 타인의 일에 개입해왔다. 나는 그를 경멸했지만, 완전히 미워하지는 않았고 종종 괜찮은 행동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졸업 후 가타기리는 사기성 있는 투자로 동창들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고 2년 뒤 잠깐 만나 목욕탕을 함께 간게 전부였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잘 나가는 줄 알았던 가타기리는 다시 나를 찾아와 악성 댓글 대응법을 물어보았다. 알고보니 그는 폰지 사기를 벌이던 중이었고, 결국 모든게 밝혀져 파산하고 말았다.

가타기리는 실제로 돈을 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빌린 돈으로 배당금을 주며 허상만 유지해왔다. 나는 그가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삶의 보람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그만의 ‘황금률’ 실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가짜 황금을 좇는 점에서는 가타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재능 없음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길에서 발길을 멈추고 마는 굼뜬 성격,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완고함, 강박적으로 타인과 똑같은 걸 하기 싫어하는 비뚤어진 심사.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결손, 일종의 우매함이 필요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술술 풀리고 갈등이라곤 없는 인생에 창작은 필요 없다.

표제작.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소설가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작가는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오히려 ‘재능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나칠 일에 괜히 발을 멈추는 둔한 성격,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완고함, 타인과 똑같은 것을 하길 극도로 꺼리는 비뚤어진 심사—이런 결손이야말로 소설을 쓰기 위한 조건이라는 설명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갈등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인생에는 애초에 창작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에도 공감이 갔고요.

또 하나 마음에 남았던 건 학창 시절,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친구와도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완전히 연락이 끊기는 현실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친구들이 제법 있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더는 서로의 삶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반면, 가타기리의 사기가 그저 흔한 폰지 사기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기발한 반전이나 의외성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터라, 전개가 다소 평이하게 흘러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결말 부분—즉, 소설가인 ‘나’가 가타기리와 마찬가지로 ‘가짜 황금’을 좇는 사람이라는 식의 연결도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타기리의 행동은 엄연한 범죄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요. 이런 범죄 행위와, 자기 안의 무언가를 꺼내어 소설로 표현하는 창작 행위를 단순히 동일선상에 놓는게 과연 타당할까요? 이를 비교하려면 이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연결 고리 - 예를 들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글이나 아이디어를 도용한 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 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즉, 이 작품 설정보다는 바로 이어지는 "가짜"의 바바 이야기가 비교 대상이 되었어야 합니다.

황금률 등 이런저런 설정을 도입하고, 비교적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특유의 기발하고 기묘한 발상보다는 현실에 많이 매몰되어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짜

나는 교토에서 귀가하던 신칸센에서 만화가 바바 류지를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났던건 1년 전 설 연휴 즈음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술자리였다. 동창 가토가 그를 데려왔다. 바바는 "일본 고등학교 옛날 이야기"라는 만화를 준비 중이었고, 이는 동창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추억담을 수집하는 형식이라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창 도도로키는 바바가 짝퉁 시계를 차고 다닌다며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바바의 만화는 물론 인생 자체가 전부 남의 이야기와 재능을 빌린 표절이었다. 만화조차도 실제로는 그의 아내가 그린 것이었다.

끝없이 표절을 반복하는 바바라는 인물도 인상적이지만, 바바가 표절하게 만든 '나'의 기발한 발상들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나'가 이야기하는 미스터리 소설의 범인 맞추기 방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은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겨야 하므로, 언뜻 보아서는 동기가 없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유력한 범인 후보이다. 마찬가지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요소는 모두 고려한다. 미스터리 소설에 시력을 잃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 실은 눈이 보일 가능성을 고려한다던가, 범행 현장 창문 유리가 깨져 있다면 범인은 외부에서 침입하지도 않았고, 외부로 도망가지도 않았다. 유리가 깨진 건 침입, 도망과는 관계없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범행 시에 깨져버린 안경 파편을 감추기 위해서라던가' 등 재미있는 발상이 가득하거든요. 이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 표절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와 함께 창작이라는게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는 듯한 내용 전개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바바가 워낙에 독특한 인물이니만큼, 이 인물에 대해 보다 깊숙하게 파고든 기묘한 이야기를 풀어내는게 재미면에서는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여러가지 독특한 아이디어가 가득한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수상 에세이

나는 신용카드 도용과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가 된 상황에서 자기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자기를 되돌아보며 일종의 마침표를 찍는 글입니다.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해답같은 내용이 등장하거든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소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감동. 우리는 매일 지금까지 물렸던 것을 접한다. 크든 작든 그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여전히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지요. 이를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첫 문장에 대한 감상을 통해 펼쳐보이는데 여기서는 확실히 작가만의 색다른 발상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얼음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얼음이 항상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인터넷이 처음 연결된 날의 기억에 의존하여 얼음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는데, 이런 발상은 정말이지 부럽습니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만 별점을 주기는 어렵네요.

2025/03/15

도시전설의 모든 것 - 얀 해럴드 브룬반드 / 박숭서 : 별점 3점

도시전설의 모든 것 - 6점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위즈덤하우스

현대의 도시전설, 즉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퍼지며, 사람들의 믿음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해당 이야기들과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랑니를 빼면 기억력이 감퇴한다',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있는 괴한 이야기', '맥도날드 햄버거에 벌레가 섞여 있다' 같은 익숙한 이야기들이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되어 널리 퍼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분석하여 알려줍니다. 관련된 서브컬처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 남자가 여자와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 차를 세우고 시간을 보내려던 중, 라디오에서 갈고리 손을 가진 탈주범에 대한 뉴스가 나온다. 겁에 질린 여자가 집에 가자고 강하게 요구해 남자는 화가 난 채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여자가 차에서 내린 순간, 차량 문고리에 갈고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갈고리 괴담을 소개한 뒤,

'이 이야기는 1967년, 인디애나 대학의 한 여학생이 룸메이트에게 들려준 "갈고리남"을 문자 그대로 채록하여 1968년 학술지 인디애나 민간전승 창간호에 실은 것이며, 민속학자 린다 데그 교수는 이 전설이 최소 1959년부터 전해졌고 지역에서 44종의 변형된 버전이 수집되었음을 보고했습니다. 1960년 디어 애비 칼럼에도 소개되었고, 이후 가장 유명한 미국 도시전설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미트볼스(1979)와 캔디맨(1992), 만화 파 사이드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으며, 많은 소설가들도 이를 차용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공포담인지, 늦은 밤 외진 곳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인지, 혹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는 상황과 자동차 밖에서 갈고리남이 위협하는 구조가 상징적 거세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라는 해설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쿠키를 빼앗아 먹었는데, 알고 보니 남의 쿠키였다는 이야기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 수록작인 "깨진 습관"이 원전인 줄 알았는데, 영국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비스킷 봉지(The Packet of Biscuits)"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의 수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과거 수십 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에 독자 투고로 실린 유머들이 사실은 도시전설의 일환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다는 것도 흥미로왔고요.

이처럼 단순한 유머, 재미난 도시전설 소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함께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과 미디어가 도시전설의 확산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 대한 분석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믿고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허구이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장소(The Holy Place)"라는 도시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의 신도들이 측랑의 특정 지점에 가면 항상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오래된 신도에게 이유를 물어본 결과, 원래 그 지점에는 벽에서 돌출된 부분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습관이 남아 무릎을 꿇는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볼 만한 내용이 많은데,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은 과했습니다.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고, 변형되는 과정에 집중하려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례를 수록하기보다는 보다 핵심적인 이야기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학술적으로 접근한다면 "한국의 학교 괴담"처럼 논문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테니, 어느 정도 균형은 잘 맞춰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수록된 도시전설들이 흥미롭고, 관련된 서브컬처 정보도 풍부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수록 도시전설 한 가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정신병자와 타이어 너트(The Nut and the Tire Nuts)"

어느 시골길을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 차를 세웠다. 그는 당황했지만 곧 잭을 꺼내 타이어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수로 휠 너트 다섯 개를 모두 흘려버리고 말았다. 어두워지는 길가에서 너트를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낙담한 그때, 근처 정신병원의 울타리에 기대어 있던 환자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각 바퀴에서 너트 하나씩만 풀어 끼우면 되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정비소까지는 갈 수 있을 텐데요.”

운전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감탄하며 물었다.

“이렇게 똑똑한 분이 왜 정신병원에 계신 거죠?”

그러자 정신병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건 아니니까요.”

2025/01/25

Q.E.D iff 증명종료 2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27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강력 사건 1편, 일상계 1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2024년 6월의 23권 이후 네권째 만에 평균 이상의 작품을 선보여 주었네요. 앞으로도 이 정도 수준을 계속 유지해주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수록작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형의 집 살인 사건

가나의 입학 절차 때문에 하버드를 방문한 토마와 가나는 회계사 레기 베이커 살인 사건 수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25년 전 발생했던 윌리엄 힐 살인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피해자는 윌리엄 힐 사건 당시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사건 현장에는 윌리엄 힐 사건을 재현한 인형의 집이 놓여 있었다.

인형의 집을 만든 이는 윌리엄의 모친인 카밀라였으며, 토마는 카밀라를 찾아가 그녀가 범행을 지시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암으로 죽어가던 카밀라는 자백하기에 앞서, 25년 전 사건의 진상을 먼저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윌리엄 힐 사건은 범인이 피해자를 폭행한 둔기는 가져갔지만, 나이프는 남겨두었고 혈흔은 사방에 튀었으나 발자국은 없는 등 기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인 윌리엄의 애인이 실종되어 사건은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범인은 회계사 레기 베이커였습니다. 윌리엄 힐은 충동적으로 애인을 살해한 뒤, 레기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레기는 이 틈을 이용해 알리바이 - 차를 가져간 윌리엄 힐에게 차가 없다고 말하게 한 뒤, 윌리엄의 차를 몰고 가겠다고 말하고 바로 현장으로 출발하여 시간을 번 것 - 를 만들고 윌리엄을 살해했습니다. 윌리엄이 가지고 있던 300만 달러를 가져가기 위해서였지요.
레기는 윌리엄이 애인을 죽인 둔기로 윌리엄을 때렸기에 둔기를 가져갔으며, 애인의 피를 숨기기 위해 윌리엄을 난자하면서 현장이 혼란스러워졌던 겁니다.

Q.E.D에서는 정말이지 오랫만에 만나보는 정통 본격 추리물로 설득력 높은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되었고, 기묘한 상황을 풀어내는 추리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Q.E.D의 특징인 '학습 만화'스러운 부분도 과학 수사의 어머니라는 프랜시스 글래스너 리의 생애와 그녀가 만든 '인형의 집' 방식을 소개해 주면서 독자를 만족시킵니다. 그 외에도 가나의 하버드 입학 등이 펼쳐지는 등, 여러모로 오랜 팬으로서 즐길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라면 모를까, 현대적 관점에서는 과학 수사를 다소 무시한 점은 아쉬웠습니다. 25년 전이라고 하면 오래전으로 느껴지지만, 작품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1990년대 극후반입니다. "C.S.I" 시즌 1이 2000년에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당시 현장 조사에서 다른 혈흔을 밝혀내지 못하거나, 자동차 타이어 흔적 등을 통해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건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워요. 이미 핸드폰 시대인데 윌리엄 힐이 집 전화로 전화를 건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윌리엄 힐이 자택에 전화를 두 번 - 레기에게 먼저, 그 다음에 가족에게 - 걸었던건 왜 밝혀지지 않았을까요? 피해자의 모친이 엄청난 재력가로 진상 규명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허점들은 더욱 아쉽습니다. 범인 발자국이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치명적인 단점이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평작 수준은 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임시 특별 침대 열차 사건

"습관에 주의하세요. 그것은 언젠가 성격이 될 테니. 성격에 주의하세요. 그것은 언젠가 운명이 될 테니." - 테레사 수녀.

봉사활동을 위해 아오모리에 간 토마와 가나는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고급 침대 열차에 탑승했다가 부유한 할머니가 급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 사건에 휘말렸다.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모두 사건 현장인 식당칸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할머니의 사망은 단순한 사고였지만, 승객들이 식당칸에 있었던 사실을 숨기려 했던 이유가 충격적입니다. 승객들은 모두 식당칸에서 할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이를 방관했고, 사망 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숨겼던 것입니다.

이후 전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라면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강도와 살인범에게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로 끌고 갔을겁니다. 그리고 방관자 효과 설명으로 마무리했겠지요. 사회파적인 고발, 그리고 Q.E.D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정체성을 선보이기 이해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을테지요.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봉사'라는 개념을 끄집어내며 마무리합니다.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해 "남을 돕는 행동도 스포츠나 공부나 그림처럼 무의식이면서 습관적으로 하면 할 수 있지만, 무의식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급작스럽게 대응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의식은 할 수 없었던 정당성을 생각해낸다. 남을 돕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도록 습관화하는 것은 인격 형성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봉사 활동 경력이 대학 입시 등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드렸던 테레사 수녀의 말로 마무리되고요. 이런 깔끔한 일련의 전개와 마무리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봉사에 대한 개념 역시 그동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많은 반성도 하게 만드네요. 봉사가 몸에 배어 있는 분들은 존경할 수 밖에 없겠어요.

중반에 승객들이 가상의 범인을 만들어내는 전개는 다소 억지스러웠지만, 그 외의 전반적인 내용은 평균 이상의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4/08/02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4). - 아야츠지 유키토

「돈돈 다리, 떨어지다」의 「문제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속으로 살짝 일어난 화를 누르며 U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장에서 꺼내온 우메즈 가즈오의 만화(『오로치』의 SUNDAY COMICS판, 네 번째 권이다)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내 시선을 느낀 U군은 책을 덮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우메즈 가즈오는 몇 번을 읽어도 대단하죠. 저는요, 그를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우메즈 가즈오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의 스승"이라고까지 치켜세우는 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이 이때의 나에게는 왠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승"의 책을 정중히 옆에 놓으며 "자, 아야츠지 씨"라고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떻습니까? 설마 벌써, 풀어버리셨나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렇네요."
U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3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세 번째 세븐스타 담배 포장을 뜯었다. 불을 붙이면서, 지금 느끼는 이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인 악동의 이름이 "유키토"라는 것 때문인가? 그것도 완전히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다. 악의가 있을 리는 없고, 어설픈 농담이라 웃으며 관대하게 넘겨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그렇다 치고, 이 M** 마을 주민들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포",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캠프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끔찍하다. "반 다이스케"는 반 다인의 패러디인가? "아사노 요우지"에 "사이토 사카에"——웃기지 않는다. 전혀 웃기지 않는다. 미스터리 매니아의 유치함이라면 듣기 좋겠지만, 읽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이런 이름짓기는 정말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인물들, 읽다 보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별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범인 맞추기' 단편이라 해도,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A, B, C……로 표기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맞아, 바로 이것이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그 말(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아마추어 학생이다. 여기서는 선배답게 그 부분은 눈감아주고, 어쨌든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한다.
"자, 그럼."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놓고, 나는 「문제편」의 원고를 다시 한번 대충 넘겼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컵에 손을 뻗으면서, U군은 내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작이라고 할 만하군. 꽤 어려운 문제야."
라고 말했다. 사실 나의 진심이었다. 사건의 상황은 이른바 '준밀실'이다. 20미터의 공간으로 격리된 '열린 밀실'에서의 불가능 범죄. 설정과 이야기에서 뭔가 장치가 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초점은 역시 이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20미터의 거리를 극복했는가. 그 트릭을 간파하면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문제'다. 과연……?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한 후, 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다.
"'당했다', '밀쳐졌다', '사……사아……'라는 유키토의 말은, 글 중에 나와 있듯이 '다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지막 '사아'는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려던 것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실지……"
U군은 얼버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가 머리에 오는 등장인물은, 이 중에서는 사키와 사카에군. 사카에는 성도 사이토지. 설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흠. 달려온 사카에의 목소리를 듣고 '사이토 씨'라고 대답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군."
"그렇죠. 하지만, 다잉 메시지라는 건 대부분 보조적인 단서일 뿐이잖아요. 아야츠지 씨의 작품에서도, 항상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그럼, 이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리고 나는 일단 정석적인 '소거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알리바이 등 데이터를 통해 범위를 좁혀나가는 거야. 먼저, M** 마을 사람들부터——"
범행 시각인 오후 2시 40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네 사람이다. 이 중 카는 중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니까, 당연히 제외된다.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체력적으로 생각해도 다리까지 왕복해야 하는 범행은 무리겠지.
엘러리는 어떤가. 가령 어떤 트릭을 써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죽였다고 해도, 그 후 25분 이내——즉 포가 그를 광장에서 본 3시 5분까지——마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든 [옆길 B]를 내려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①의 루트를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이프 바위에 있던 린타로는 그 시간에 통나무 다리를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엘러리도 범행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남은 사람은 아가사뿐이지만, 그녀의 경우 엘러리와 달리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없으므로, ②의 루트를 통해 돌아왔다고 해도 시간적인 모순은 없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는 그녀가 범행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올츠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상대는 20미터의 계곡이니까.
결국 여기서는 네 사람 모두 제외된다. 포가 말하는 X는, 그들 중에는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U군의 반응을 본다. 그는 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고,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얄미운 얼굴이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은 캠프의 네 사람."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나는 소거법을 계속했다.
요우지와 사키는, 오후 2시 40분 시점의 알리바이는 없지만, 다이스케가 돌아온 2시 50분에는 분명히 캠프에 있었다. 범행 후, 10분 안에 다리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다이스케가 다시 돌아온 루트도 20분 걸렸으니까. 예를 들어 [옆길 A]로 꺾어 [지류 B]를 따라 올라왔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외해야겠군.
당연히 다이스케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2시 40분에 범행을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2시 50분에 캠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사람은 사카에인가. 사카에가 빈사 상태의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 — 여기에는 시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그는 시간적인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이스케가 산등성이 길을 되돌아간 것과 엇갈리면서 [옆길 A]에서 산등성이로 올라와 다리까지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디. 그렇게 범행을 끝낸 후, 강으로 내려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지.
물론 사카에가 강가에서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몇 개 있던것 같기는 하다. 때문에 정말로 사카에가 범인이라면, U군이 '페어 플레이의 룰은 엄격히 지켰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건 이상하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걸까.
자, 어쨌건 문제는 그 다음이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로는 사카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키토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황당한 트릭이 떠올랐다.
“흠. 굳이 계곡을 건너 유키토 곁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군.”
“어떻게요?”
“사카에의 배낭에는 이때 낚싯대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튼튼한 긴 낚싯줄을 달고, 그 끝에 예를 들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돌을 묶어서 말이야...”
“휘둘러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맞췄다고요?”
“그런 거야. 무리일까.”
U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이런 건 어떨까.”
극약을 먹는다는 심정이 되어, 나는 거기서 새로 떠오른 트릭을 말했다.
“남아 있던 한 줄의 로프를 따라 뱀을 보내는 거야. 놀란 유키토는... 아니, 이건 안 되겠군. 유키토는 뱀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떻지. 들쥐의 목에 긴 끈을 묶어 로프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구해줄 테니까 그 끈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거지. 멍청한 유키토가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때, 힘껏 끈을 당긴다. 균형을 잃은 유키토는...”
점점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런 물리적인 트릭을 고안하는 게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 U군은 조금 유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는 ‘밀쳐져 떨어졌다’는 것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키토는 어디까지나, X의 손에 의해 ‘밀쳐 떨어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전한 유키토의 죽기 직전의 대사에 ‘거짓’은 없고,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흐음.”
“유키토는 X의 손에 의해 밀쳐져 떨어졌다. 이것은 즉, 범행이 일어난 2시 40분 시점에서, X는 확실히 돈돈다리 북쪽 돌출 부분에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유키토를 거기서 밀쳐 떨어뜨린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슬슬 시간 초과네요.”
라는 무정한 선언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U군은 왼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뒤, “그럼, 이걸로”라고 말하며 ‘해답편’ 원고를 건넸다.
---

### 해답편
○반 다이스케, 아사노 요우지, 아사노 사키, 사이토 사카에 네 명은 시간적 혹은 물리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히 범행이 불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 알리바이가 명기된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X가 아니다.
○따라서 X는 M** 마을의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 중에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카는 범행 불능. 한 팔이 없는 아가사는 범행 불능.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범행 불능.
○이상으로 X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엘러리 뿐이다.
○엘러리는 다이스케가 도망친 후 돈돈 다리를 건너가 유키토를 공격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행 후 다리를 건너 고개 길로 돌아가, [옆길 B]를 내려가 [지류 A]의 나무 다리를 건너는 루트로, 오후 3시 5분에 마을 광장에 돌아왔다.
○동기는 복수. 전날, 아들 카가 '금단의 계곡'에 갔다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잔혹한 소년 유키토의 짓이었다. 사키의 바지에 묻은 빨간 손자국은 그때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끝]
---

"이게 끝이야?"
순간적으로 아연한 후, 나는 물었다. U군은 씨익 웃으며 "네,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만,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냈다. U군은 태연하게,
"왜죠?"
라고 되물었다.
"왜긴 왜야, 이건 전혀 해결이 안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조금 불친절했나."
"불친절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여 따졌다.
"첫째로 말이지, 다리가 부서진 후 남은 로프는, 작은 초등학생인 유키토의 몸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구. 지문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런 로프를, 어떻게 어른인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거리는 20미터나 된다고.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고, 로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 가령 엘러리가 난쟁이고, 또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하더라도, 이 로프를 건너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음, 확실히. 그런데요…"
"그리고, 범행 후는 ①의 루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린타로에게 들켰을 거라고.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야츠지 씨의 오해입니다."
U군은 단호히 말했다.
"사실,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도중에 타케마루가 두 번이나 심하게 짖었다고 했죠. 타케마루는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수상한 자를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짖은 겁니다."
"그럼, 역시 범인 이외의 등장인물의 말에 '거짓'이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왜냐면, 린타로는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그 다리를 건넌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엘러리를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U군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와 나는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른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부서진 돈돈다리를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인데요."
U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아니고 줄타기 명인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남아 있던 로프 한 줄로 계곡을 건널 수 있었던 겁니다. 아주 쉽게요."
"그런…"
나는 산소를 찾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설마, M** 마을이 닌자의 숨은 마을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설령 닌자라 하더라도, 미군의 특수 공작 부대라 하더라도, 이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도전'에 주석을 단 대로, 그런 도구는 여기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라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나는 불안하게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U군도 자신의 담배(같은 세븐스타)를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는 말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줄타기 명인도 닌자도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유키토의 다잉 메시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추고, 나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진 '문제편' 원고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유키토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 같은 묘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설마"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겨우 하나의 단어(설마)가 떠올랐다.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설마 그 '사…'라는 게, '사루(원숭이)'를 말하려고 한 건가?"
"정답입니다."
U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타케마루가 격하게 짖은 거예요. 옛날부터 개와 사이가 나쁜 동물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잖아요. 타케마루와 엘러리는 문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던 거죠."
잠시 멍해져서 중얼거리듯 "원숭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U군은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응시하며,
"처음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으로 돌아가 쓴 것'이라고.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죠?"
"—사기다. 불공평해."
겨우 기운을 짜내어, 나는 항의했다. 그러나 U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M** 마을에 사는 일본 원숭이들을 '인간'이라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같은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라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아닌 생물일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자'라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했습니다.
애초에, 아야츠지 씨, 일본 본토의 산속에 포라든가 엘러리라든가 하는 이름의 인간들이 사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M** 마을의 M**는 'monkey'를, H** 대학의 H**는 'human'을 각각 암시한 이름입니다."
"원숭이를 '남자'나 '여자'라고 썼잖아."
"남자 = 인간 중, 수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수컷도 지칭.
여자 = 인간 중, 암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암컷도 지칭.
출처는 산세이도의 '신명해 국어사전'입니다. '코지엔'이나 '다이지린'이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그건 물론 그루밍을 말하는 거예요. 원숭이의 털 손질. 아시죠."
"—더럽다. 비겁해."
"더럽다니요. 나이 많은 포우가 참나무 열매를 깨물고 있거나,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고 있는 등, 그들이 원숭이라는 복선을 몇 가지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어조를 강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원숭이가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규칙'이라든지 'X'라든지 '복수'라든지......"
그러자, U君은 "어머 어머"라는 듯 얇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전부 어디까지나 원숭이의 세계에서의 일이니까요. 인간과 대화를 나누진 않잖아요? 대사도 전부 캠프의 인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중 괄호로 묶여 있죠. 게다가 고금을 통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부터 도룡뇽까지, 생각하는 동물도 있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동물도 있어요. 인간의 말을 이해하거나, 인간적인 감성으로 행동하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의 미스터리에서도 있었죠. 은퇴한 경찰견의 일인칭으로 쓰인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씨의 '퍼펙트 블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그런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U君은 간단히 "네, 맞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라 '범원숭이 맞히기'죠. 그래서 그런 언어의 엄밀성을 중시해서, 작품 속에서도 아야츠지 씨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한 마디도 '범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X 같은 진부한 미지수 기호를 끄집어낸 건 고육지책이었어요. '문제편'의 체크, 해 보실래요?"
"........"
"꽤나 고심했어요, 그 부분은. 아야츠지 씨라면 분명 그 고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쾌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래서 아마추어 학생은 곤란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독을 품으며, 심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대로 침묵하고 있자,
"저기, 텔레비전 켜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U君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러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상하게 밝고 씩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U君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쩐지 지금 막, 시계의 바늘이 오전 0시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익숙한 연예인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축하해,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화면의 한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잖아."
어째서 U君이 굳이 오늘 밤을 선택해서 나를 찾아왔는지. 하필이면 섣달그믐의 이런 늦은 시간에, 추운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도 연출("복선"이라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이 '범원숭이 맞히기'를 다 읽을 즈음에 딱 새해가 밝는, 그런 타이밍을 그는 노렸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던 것인가.
1992년, 원숭이해의 시작――.
어깨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나는 맛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화가 몹시 하찮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런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져서......
나는 U君 쪽을 보았다. 하지만, 소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검은 배낭도 가죽 장갑도, 크림색에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헬멧도, 거기에는 없었다. "돈돈다리, 무너졌다"라고 표지에 크게 적힌 원고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 잘 아는 이름. 무엇인지 무척 그립고, 그렇지만 조금 얄밉고,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아, 그렇구나'라고 나는 그제야 생각해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그건...... 아니, 이제 그만두자. 이 이상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남겨진 '돈돈다리, 무너졌다'의 원고에 살짝 손을 뻗으며, 다음에 그가 찾아오는 건 언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024/01/14

축제 만세! - 다카기 나오코 / 강소정 : 별점 2.5점

축제 만세! - 6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강소정 옮김/문학동네

모두 11곳의 일본 지역 축제 참여 경험을 소개하는 일상 여행 먹부림 만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신작입니다.

벛꽃 축제나 눈 축제와 같이 유명한 축제는 물론이고 호랑이 춤이 펼쳐지는 하쓰우마 축제, 금붕어 초롱이 가득한 야나이 금붕어 초롱 축제, 로켓을 쏘아올리는 류세이 축제 등 신기한 축제들이 가득하며, 위치도 남에서 북까지 일본 전국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좋아하셨다면, 편집자 바바씨와 함께 했었던 히로사키 벛꽃 축제 재도전, "식탐 만세"에 나왔던 작가 아르바이트 시절 주방장의 창작 요리 가게, 작가의 남편과 고향 가족들 등 반가운 소재도 많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기왓장 위에 녹차 소바를 놓고 계란 지단과 고명을 얹어 따뜻한 메밀 간장을 찍어 먹는다는 야마구치현의 가와라 소바 등 처음 보는 향토 음식들 소개도 알찼고요.

모든 축제가 재미있어 보였지만 딱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의 히로사키 벚꽃 축제가 땡기네요. 벛꽃이 강에 떨어져 분홍색 길 처럼 보이는 '하나이카다'가 사진만 보아도 굉장히 예뻐서, 직접 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가보고 싶은건 아니지만, 다이욧카이치 축제의 기묘하고 거대한 '카라쿠리' 오뉴도 씨만큼은 한 번 실물을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아래의 동작이 궁금하거든요! 그러고보니 올해는 "복잡한 기계장치"도 마무리지어야겠네요.....
가보지 못한 곳,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재미나게 알려주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책으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난무난한 작품이에요. 다카기 나오코 팬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3/07/12

개구쟁이 스머프 완전판 VOL.1, 2 - 페요 / 김동욱 : 별점 2.5점

개구쟁이 스머프 완전판 VOL.1 - 6점
페요 지음, 김동욱 옮김/인벤션
개구쟁이 스머프 완전판 VOL.2 - 6점
페요 지음, 김동욱 옮김/인벤션

제목 그대로 스머프 완전판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책. 두 권 구성으로, <<개구쟁이 스머프>>가 처음 발표된 순서대로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었던 스머프 애니메이션 매니아였기에, 출간 당시 기쁜 마음으로 구입하였습니다. 지금은 찾아보니 이미 절판되었더군요. 인기가 그렇게 없었나?

수록작은 모두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스머프 대왕님>>은 첫 손가락에 꼽고 싶습니다. 투표로 뽑힌 지도자가 독재에 빠지고, 반란이 일어나는 과정을 재미나게, 그러면서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결국 스머프 대왕군과 반란군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파파 스머프가 나타나 "다들 부끄럽지도 않느냐? 꼭 인간들처럼 굴다니!"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고요. 그야말로 걸작입니다.


<<스머페트>>는 스머페트가 첫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애니메이션으로 감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원작은 스머페트가 그냥 떠난다는 결말이라 조금 다르더군요. 하긴, 여자가 남자만 모여있는 집단에 일으킬 수 있는 분란이라서 스머페트가 머물러 있으면 결국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을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말입니다. 2차 대전 중 있었던 유명한 '여왕벌' 사건처럼요.
그 외의 작품들도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에피소드에 관련된 정보도 상세하게 제공해 주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읽다보니 제 기억과 달랐던게. 저는 가가멜이 스머프를 '먹으려고' 잡으러 다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알고보니 스머프가 금속을 황금으로 바꿔주는 철학자의 돌 재료로 쓰이기 때문이더군요. 하긴 먹는건 너무 징그럽긴 하죠.

이렇게 걸작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딱 한가지 불만은 스머프가 처음 등장했다는 만화 요한과 피위 시리즈가 수록된겁니다. 각각 한 편 씩 - Vol.1에는 <<스머프와 요술 플루트>>가, Vol.2에는 <<일곱 샘의 전투>>가 - 수록되어 있는데, 두 작품 모두 기대 이하였거든요. 진지한 바른생활 청년 요한은 별다른 매력이 없고, 장난꾸러기로 사건을 불러오는 피위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입니다. 요술 플루트를 훔쳐갔던 오일리크리프가 나라 밖으로 달아난 척 하려고 한 달이나 숨어있었다는 설정 정도만 건질만 했어요.
스머프가 첫 등장한다는 점에서 뺄 수 없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 시리즈를 빼고 한 권으로 묶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점은 있지만 스머프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지금 보니 Vol.1의 경우는 중고 가격이 상당하네요. 절판 직전에는 대폭 할인하여 5,000원에 팔았었는데요. 제가 이전에 올렸던 글처럼, 앞으로 고가 절판 만화의 길을 걷게 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2023/06/22

오아시스 식당 - 아베 야로 외 / 정문주 : 별점 2.5점

오아시스 식당 - 6점
아베 야로 외 지음, 정문주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문필가, 편집자이자 만화가라는 사코 후미오가 심야식당의 작가 아베 야로와 함께 맛집을 돌아다닌걸 기록한 에세이 모음. 모두 20곳의 식당이 소개되며, 아베 야로와 사코 후미오의 짤막한 만화, 둘의 이런저런 요리를 주제로 한 대담이 함께 수록된 구성입니다.
자기 주장이 약하고 순전히 가게의 맛과 멋을 찬양하는 착한 글들이라는건 심야식당과 일맥상통합니다. 누군가의 쉼터같은 오아시스 식당을 소개하는데 험한 말을 쓸 수야 없었겠지요.

소개된 가게도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전부 대중 식당으로 2~3대가 이어 운영하는 노포가 많다는 겁니다. 일본 양식에서 밥을 함께 담아내는 방식을 처음 고안했다는 유명식당 연와정 - 현재 3대째 - 에서 시작해서, 원조 돈가스 카레격인 '가와킨 덮밥'을 만든 가게의 후계자 - 4대째 - 가게처럼요.
이런 유명 노포들 외에 본인들이 직접 검증한 동네 맛집 소개도 충실하다는게 두 번째 특징입니다. 그래서 현재 사는 곳인 도쿄, 그리고 근처 가나가와 맛집 소개가 12곳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이런 류의 책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고치 맛집도 6군데나 등장합니다. 둘 다 고치 출신인 덕분이지요. 고치 명물 가다랑어 다타키는 다른 작품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베라야키같은 그 지역 사람만 아는 명물 소개는 신선했어요. 얇은 밀가루 반죽에 가쓰오부시, 파래, 파, 덴푸라를 올리고 반죽과 계란을 풀어 덮고 뒤집은 뒤 소스를 발라 먹는 요리라네요.
세 번째 특징은 왠지 모르게 친숙한 식당이 많다는겁니다. 우선은 심야 식당과 관련된 가게가 있습니다. 고엔지의 중화 고토부키로, 가게 명물 부추달걀볶음은 심야식당의 메뉴로도 등장했었지요. 녹말 소스를 끼얹은게 특징입니다.
그 외에도 호놀룰루 식당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칼럼에 등장했고, 대낮부터 술을 판다는 노가타 식당은 <<고독한 미식가>>의 한 에피소드가 바로 떠올랐어요.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성인영화계의 스타였다는 주인이 운영하는 주점 데라코아는 <<술 한잔 인생 한입>>에 등장해도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요. 가본적은 없지만 다 친숙한 느낌입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도키와장 멤버들이 단골이었던 라면가게 마쓰바! 제가 좋아하는 <<만화의 길>>에도 여러차례 등장했었지요. 언젠가 방문해서 라멘은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주다'도 판다니 라면에 한 잔 곁들여야 할테고요. 


물론 맛은 큰 기대하지 않습니다. 글을 보니 전문가가 아닌, 2대의 부인이 조리를 하고있다니까요. 그야말로 가정식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게 더 <<만화의 길>> 스타일 - 고생스럽지만 잔 정이 넘치던 그 시기 - 이라고 생각됩니다.

밥집 탐방이다보니 요리를 따라하기는 힘든데, 한번 해봄직한 요리도 몇 가지 있어요. 요코하마 사이타마야 식당의 커피 소주가 그러합니다. 얼음이 든 큰 유리잔에 1/3 정도 소주를 붓고 그 위에 옛날 느낌 커피 (커피 우유 느낌이라니, 우리나라로 따지면 다방 커피나 맥심?)를 부어 만든다고 합니다. 요새 하이볼 등이 MZ에게 유행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맥심 소주볼' 이라고 팔면 어떨까 싶네요. 술과 커피를 섞어 마시면 건강에 굉장히 안 좋다고 하기는 합니다만....
가와킨 덮밥도 밥 위에 채 썬 양배추, 돈가스를 올리고 닭고기 카레를 끼얹었다니, 맛은 다를지언정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렇게 갈 수 없는 곳을 남의 눈과 입과 귀로 접한 셈으로, 푸근하고 정감어려 좋았으며 재미있는 내용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갈 수 없는 곳들이며, 유통기한이 있을 수 있다는건 아쉽네요. 비슷비슷한 내용이라 뒤로 갈 수록 식상해진다는 문제도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4/13

도라에몽 이야기 - 무기와라 신타로 / 이은주 : 별점 1.5점

도라에몽 이야기 - 4점
무기와라 신타로 지음, 이은주 옮김/대원씨아이(만화)

'후지코 후지오'는 만화 소년 후지모토 히로시가 절친 아비코 모토오와 함께 만화가 생활을 하면서 만들었던 필명입니다. 이 둘의 데뷰와 파란만장한 연재 생활, 그리고 성공은 <<만화의 길>>과 그 후속작을 통해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후지모토 히로시가 아비코 모토오와의 합작을 중단하고, 후지코 F 후지오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직후부터 그의 어시스트로 일했던 무기와라 신타로가 그린 추억담입니다.

무기와라 신타로는 어린 시절부터 도라에몽과 후지코 후지오를 동경하여 만화가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후지코 후지오 상'이라는 만화상에 입선한 뒤, 대학을 중퇴하고 후지코 프로의 첫 번째 어시스턴트로 입사합니다. 그 뒤 여러가지 만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치프 어시스턴트까지 올라가는데, 후지모토는 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진행 중이던 유작 <<노비타의 태엽도시 모험기>>는 후지코 프로의 전력을 모아 완성하고요. 나머지 원고가 유품에서 발견된 덕분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치프 어시스턴트답게 도라에몽 작화 그대로 그려낸 만화가 100여 페이지, 그리고 십여 페이지 남짓한 사진 자료가 수록된 구성입니다.

<<만화의 길>>을 재미있게 읽어서 구입했는데, 솔직히 큰 재미는 없었습니다. 만화가 후지모토 히로시를 영웅처럼 생각하는 제자가 그렸기 때문입니다. 무기와라 신타로와 후지모토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도 모두 미담 뿐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신타로의 원고를 꼼꼼하게 보고 평가를 해 주었다던가, 다양한 세계를 보고 자극을 받으라며 LD로 영화 감상회를 열어준다던가 연극 공연도 데려다 주었다는 등으로요. 후지모토 선생님은 굉장해! 일색인데다가 딱히 극적인 요소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별 재미가 없었어요.
도라에몽의 세로 줄무늬는 톤이 아니라 펜선이고, 도라에몽의 세계가 만화가 후지모토의 세계와 어느정도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 - 진구네 집 검은 다이얼 전화가 버튼식 무선 전화로 바뀐 이유는 후지모토 집 전화가 바뀐 덕분 - 는 재미있었지만 극히 일부에 그칩니다. 제가 기대했었던건 솔직히 이런 이야기였는데, 분량이 너무 적었어요. 제목에 낚인 기분입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도 대단한건 없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도라에몽의 팬이더라도 딱히 권해드릴 만한 만화는 아니었습니다. 분량에 비하면 가격도 비싼 편이니까요,

2023/01/21

도박 중독자의 가족 - 이하진 : 별점 1.5점

도박 중독자의 가족 - 4점 이하진 지음/열린책들

인터넷 상에서 화제이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왜 화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목부터가 잘못되었어요. '범죄자의 가족'이 되어야 맞거든요. 시동생이 가족들은 물론 주변 지인들의 돈을 빌려가고, 심지어 명의 도용 등의 범죄를 저지르면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가정 관계가 파탄이 났으니까요. 시동생이 도박 (정확하게는 주식) 중독자라는건 범행의 원인일 뿐입니다.
이야기도 실제 상황을 만화로 그려낸거라 드라마 요소는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시동생이 도박을 해서 어떻게 큰 돈을 잃었는지, 아니면 가족 돈을 어떻게 빼돌렸는지 같은 범죄 (?)에 대한 내용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요. 가족들이 받은 피해, 특히 맏며느리인 작가와 시어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만 반복적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초반에야 그렇다쳐도, 후반까지 동일한 상황 탓에 변함없는 갈등이 벌어지는건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작가 본인이 피해자라는 시각으로만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는데, 뭔가 공평치 않아보였어요. 시어머니의 무지한 언행 때문에 작가가 상처받고 이혼까지 생각하는게 이야기의 대부분으로, 그 둘 사이에 낀 남편에 대한 배려나 고려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작가와 아들과의 유대관계만 짤막하게 보여질 뿐이지요. 왜 남편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홀하게 다루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봤을 때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낀 남편에게도 지옥같은 생활이었을텐데 말이죠.
시동생은 일용직 등으로 돈을 어떻게든 갚아 나가고 있고, 남은 가족들은 겨우 관계를 복원하고 자기 살 길을 찾았다는 결말은 현실적이기는 하나, 이야기의 완결로 보기에는 부적절했습니다. 인생도 그냥 계속 흘러간다는건 서사구조로 본다면 기승.... 에서 마무리된 것과 다를게 없지요. 도박 중독자인 시동생의 치료와 회생, 아니면 손절(?)한 작가 외 다른 가족의 파멸이라도 그려졌다면 모를까요. 결말에서 시동생 비중은 없다시피한데,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갈등의 매개체 역할만 하고, 결국 치유도 못하고 극적 드라마도 없이 사라져버린거니까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초반부에 토르가 타노스 머리를 날려버리고 영화가 끝나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만화가 그려졌다는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현재의 결과물은 일기에 가깝습니다. 작화도 내세울게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요. 한 편의 완성된 '만화'라고 볼 수 없어요.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어서 딱히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22/11/13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기타쿠니 고지 / 문승준 : 별점 2점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4점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변호사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도시타는 가난한 동네 변호사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의뢰 해결이 주 업무라 법정 다툼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정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보다는 일본 추리 소설 시장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소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일상계 추리 단편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문가 - 서점 점원헌책방 주인, 요리사, 화과자 장인, 시계 수리 전문가, 사진가, 바리스타라쿠고가복화술사, 호텔리어, 심지어 스님까지 - 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자의 직종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그냥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설정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법률 전문가스러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도시타는 화자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일 뿐, 탐정 역할은 도시타의 동생 리쓰가 담당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리쓰 캐릭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일단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시타' 에 관련된 말을 하는 루틴이 있고, 현재 상황과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떠오르게 만드네요. 결은 좀 달리하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설정마저도 똑같고요. 그러나 우영우만큼 호감가게 묘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문가 일상계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에 목숨을 건 나머지 이상한 만화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또 추리한 결과를 형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는데, 여기에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에 더해져 굉장히 비호감이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글래머 소꼽친구 간호사 사키, 여자를 밝히는 스님 마루메, 전 야쿠자 출신이자 현 카페 주인인 이모부 등 비현실적이거나,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괜찮았다면 나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록된 네 편의 단편들 모두 그렇게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이야기 전개가 리쓰 캐릭터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았던 탓입니다. 입 안에 넣은 치과 치료용 충전물이 라디오처럼 동작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따뜻한 인간 드라마 중심의 전형적인 일상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가 일상계로 보기에는 전문성, 일상성 모두 떨어지며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꼽자면 일본에서도 변호사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도?
딱히 영상화 되었다는 소식도 없고, 후속권도 출간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금새 절판된걸로 보면 다른 분들의 평가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고양이'는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므로 집사분들께서는 낚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1화 <<못된 며느리와 낙서 소동>>
고토에 아줌마는 도시타에게 며느리 험담 끝에 며느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토에 아줌마가 돌아간 후, 리쓰는 그녀의 섬망성 기억 상실을 눈치챘다. 형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며느리 에가와 씨를 만나러 갔다가 ,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던 낙서 소동에 휘말리는데...

진상은 알고보니 고토에 할머니의 병을 낫기 위해 며느리 에가와가 마당에 자생하는 디기탈리스 잎을 떼어 말린 뒤 몰래 먹였다는 겁니다. 고토에 할머니는 디기탈리스 잎의 부작용으로 치매와 비슷한 용태를 보인거지요.
그런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디기탈리스가 심장병에 효과가 있지만 독성 또한 강하다는건 정보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 완성으로 '디기탈리스 중독'이 함께 뜰 정도로요. 이걸 약재로만 알고 먹였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자기 험담만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살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이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마무리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도시타가 제대로 된 변호사였다면 며느리를 경찰에 신고하는게 맞았어요.
추리를 하기 위한 정보 제공도 빈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차라리 낙서 소동 쪽이 추리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다른 낙서들과는 그림이 달랐고, 키가 작은 사람이 그렸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하지만 진상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생이 새가 부딛힐까봐 '버드 스트라이크'를 리카 씨네 가게 쇼윈도에 그렸다는게 전혀 와 닿지 않았거든요. 쇼윈도가 그 가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1층 건물 쇼윈도에 새가 날다가 부딛힐일이 그렇게 많을리 없으잖아요. 애초에 범인 신지의 집 창문에 새가 부딛혀 죽은 것부터가 작위적이지요. 이를 리쓰가 맨션의 깨진 창문만 보고 바로 알아챘다는 추리도 비현실적이고요.

아울러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화 <<협상 상대는 요통으로 고생하는 전과자>>
도시타 형제는 연립 재건축을 앞두고, 퇴거를 거부하는 임차인을 설득하는 의뢰를 받았다. 리쓰는 찾아간 임차인 아라키 데쓰조의 집 안에서 '사취'가 나는걸 느꼈고, 여러가지 주변 정보들을 조합하여 그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길고양이를 돌본다는걸 훔쳐온 쓰레기 봉투 속 내용물을 통해 추리하는 과정, 그리고 사취는 길고양이가 물어온 쥐의 시체였다는 진상까지의 전개와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퇴거를 불응했던 이유가 유치원에 드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작위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고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일상 드라마 느낌을 가득 전해주는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3화 <<만화가 지망생과 사라진 유언장>>
도시타는 이모네 카페 단골인 만화가 지망생 레논 씨의 사건 을 수임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형이 레논 씨가 유언장을 숨겼다고 주장해서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논 씨는 도시타에게도 유언장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형이 어머니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을 녹음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수록작 중 유일하게 변호사가 활약할만했던 이야기. 핵심은 '유언장은 어디에 숨겼나?' 라서 변호사가 나설만한 부분은 없지만, 레논 씨가 왜 유언장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레논 씨가 어머니 장례식 초야 직후, 카페를 방문한 뒤 책꽂이 위에 있는 책을 떨어 트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카페의 만화책 중 한 권 안에 유언장을 숨겼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에 대해 사소해보였던 레논 씨의 질문이 중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유산을 형이 아니라 레논 씨에게 전부 남긴다는 거라서 유언장을 숨기고 형과 유산을 반으로 나누려 했다는 동기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바보같아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동기였다면 유언장을 숨기는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식으로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유언장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전개를 보면 더더욱요. 이는 유언장이 없을 경우 법률적으로 레논 씨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4화 <<한심한 피고인과 소음 트러블>>
도시타는 마약용 주사기를 수백개 구입하려다 경찰에게 상처를 입힌 에비스 씨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으려고 도시타는 노력했지만, 에비스 씨는 거부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리쓰가 급작스럽게 증인 요청을 하여 판결은 연기되었다.
그 사이 도시타는 소꼽친구 사키의 소개로 이웃이 내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도모코 씨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도시타 형제는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도시타가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법정에서 날선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왜 에비스 씨가 징역형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추리해낸 뒤, 진상을 파악하여 그의 갱생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도모코 씨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소음 공해는 단순한 소재였고, 도모코 씨 남편이 정리 해고를 앞두고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근무하는 상황의 극복이 핵심이거든요.

드라마 모두 좋은 이야기에요.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에비스 씨 시간의 경우, 오래전 이혼한 아내가 키우던 아들이 칼에 찔린 뒤, 부모는 수혈이 안 되는 탓에 행인들로부터 피를 뽑으려고 주사기를 구입했다는 동기부터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딱히 추리를 할 부분도 없고요.
도모코 씨가 치과 진료를 받은 이후, 이빨에 채운 충전물이 우연히 방송을 수신하게 되어, 일종의 광석 라디오처럼 동작했다는 진상도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겁니다. 설령 실제 일어나더라도 입 안에서 소리가 나는걸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아쉬움이나 여운을 남기기는 커녕 더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만 굳게 만들어 주네요.

2022/05/06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4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1.5점

[고화질]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44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NBA와 프로야구를 챙겨보는 바람에 책을 읽을 짬이 도통 나지 않는 요즈음입니다. 그래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만화를 주로 읽게 되네요. 잊고 지내다가 Q.E.D 신작이 나와서 리뷰를 올렸었는데, C.M.B는 아예 완결까지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동안 C.M.B는 한 권에 단편 3~4편으로 이루어진 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권은 "C.M.B. 살인사건"이라는 이야기 단 한편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게 특이하네요. 마지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대영박물관에서 3개의 C.M.B 반지가 신라 한 명에게 주어져있다는걸 못마땅하게 여긴 것에서 사건은 시작됩니다. 연구 비용을 원하는 학자들의 불만도 폭주했고요. 그래서 박물관은 신라가 가지고 있는 3개의 반지 중 2개를 박물관이 선정한 학자 5명 중 누군가에게 넘겨줄 것, 그리고 신라가 켐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뒤 교수로 일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협상을 위해서 신라는 타츠키와 함께 영국 런던을 찾습니다. 그러나 5인의 학자 후보 중 한 명인 메이슨이 밀실에서 살해되었고, 당연히 신라가 유력한 용의자로 몰립니다. 신라는 알리바이를 증명해서 풀려나지만, 그 뒤 일본을 찾아왔던 3명의 학자들도 차례로 공격받아서 테렌스 행크는 죽고 베르다는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라의 박물관을 범인이 찾아와 신라와 대결을 펼칩니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통해 C.M.B 반지를 버리기로 신라가 결심하는 등 시리즈 전체로 놓고 보면 중요한 전개가 이루어지는데,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메이슨 밀실 살인 사건은 MRI의 강력한 자력을 이용하여 묶여있던 메이슨이 칼에 찔리게 만들었다는 트릭이고, 이미 죽은 테렌스 행크가 신라를 습격한 일본에서의 사건도 범인 올드리치가 행크의 시체를 등에 짊어지고 있다가 내던졌다는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두 가지 모두 납득하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만화니까 그런대로 볼만했달까, 설득력을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마지막에 올드리치가 신라의 박물관에서 신라와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불타는 박물관 공룡 화석 위에서 액션을 펼치는건 아동용 모험 만화와 다름 없고요. 

메이슨 사건은 미이라가 관련되어 있기에 '몰약', 테렌스 행크 사건은 피해자가 황금 가면을 쓰고 있어서 '황금', 박물관에 불을 지른건 '유향'이 관련되어 있고 이 세 가지 키워드는 C.M.B의 뜻인 동방박사 3인과 연결된다는 장치도 정작 사건과는 별 관계가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냥 현학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장치로만 사용되었는데, 최소한 올드리치하고는 연결이 되었어야 했었습니다. 물론 올드리치가 베르다를 태우고 운전할 때, 베르다가 네비게이션을 보는 틈을 노려서 일부러 차를 트럭에 부딪히게 만들고 누군가 공격했다고 주장했던 사건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추리 만화를 그려온 작가의 내공이 어느정도 엿보였달까요? 신라가 반지를 버리고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결심하는 장면도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는 납득할만한 괜찮은 마무리였다 생각되고요.

그러나 장점은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리즈 대미를 장식하는 이야기치고는 너무 별로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빨리 다음 권을 읽고 시리즈에서 손을 떼는게 낫겠어요. 직전에 읽었던 Q.E.D도 실망스러웠지만 이에 비하면 선녀였다는게 더 놀랍습니다...

2022/02/11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쿠스미 마사유키 / 박정임 : 별점 3점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박정임 옮김/살림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먹부림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총 3부 구성인데, 가장 비중이 높은 1부는 혼자서 혼술을 마실 때, 어떤 안주를 직접 만들어 어떤 술과 함께 먹는지에 대해 쓴 글들입니다. 2부는 혼자서 술집에 갈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요. 3부는 술을 다 먹고 마무리로 어떤걸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로 술과 안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술과 안주를 사랑하고,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고집과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술잔이라던가, 차림상의 구성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다츠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고요. 얼마 전에 읽었던 "혼밥 자작 감행"의 쇼지 사다오도 그러했는데, 혼술하는 아저씨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먹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전략, 전술'을 고려해서 안배한다는, "음식의 군사"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돈가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돈가스를 소금, 간장, 소스 순서로 찍어 먹는다던가, 마지막 두 조각을 미리 소스를 뿌려 절여두었다가 밥이랑 함께 먹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에피소드와 거의 똑같았으니까요. 오뎅을 접시에 담을 때 색감을 고려해서 담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쥬쿠 카페 베르크의 커피 역시 "음식의 군사"에서도 소개되었었지요,

그러나 돈가스 정식을 일종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는건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육류에 전채 (야채절임), 샐러드 (양배추), 수프 (미소시루), 푸짐한 채소 요리 (밥)이 곁들여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왕 코스 요리니 주문할거면 값은 비싸도 히레가스 정식을 주문하자라던가, 맥주를 시킬 때 "이집 맥주는 어디 건가?"하고 브랜드를 물어보면 와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에 이르르면, 이런걸 만화로 선보였다면 아주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요리 에피소드보다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의 길" 속 추다와 멘치빵을 재현해 먹는 에피소드는 과연 만화가구나! 싶어서 기억에 남고요.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 더 기억에 남은 것 같네요. 참고로 원작 속 '츄다' 레시피는 소주 3, 사이드 7의 비율입니다. 멘치빵은 아래와 같고요.

기요켄의 슈마이 도시락에 대한 글은 저자의 데뷰작 "스키야키"가 떠올라서 반가왔습니다.

혼자 안주를 만드는 이야기 속 레시피도 짤막하지만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가다랑어 안주입니다. 조금 얇게 썬 가다랑어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파를 잘게 다져서 듬뿍 올립니다. 다음은 양하도 잘게 다지고, 차조기나 깻잎 한 장도 채썰어 올립니다. 마지막이 비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늘 대신 편을 썬 마늘장아찌를 올리는겁니다. 생마늘은 맵고, 간 마늘은 느낌이 약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레몬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먹는다는데, 반주로 니혼슈, 조금 비싼 사케가 제격이라네요. 가다랑어 회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방어회로 다음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방어회는 먹다보면 물려서 남기기 십상이니까요. 

다른 먹부림 콘텐츠에서 탕두부라고 소개되는 물두부 레시피는 정말 쉬워 보여서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냄비에 다시마 한 장을 깔고 물을 담아 가스버너 등에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두부를 넣은 뒤 끓고 나면 간장과 가쓰오부시, 다진 파를 섞은 종지에 찍어 먹으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기로는 '조야나베'도 만만치 않아요. 냄비에 물을 붓고 저민 생강 두 조각 정도를 넣은 뒤 끓이다가 큼직하게 썬 양배추, 기다란 삼겹살을 세 토막 낸 걸 넣고 갈은 무와 다진 파를 듬뿍 넣은 아지폰(감귤 과즙 폰즈 상품명)에 찍어 먹는게 끝입니다. 폰즈가 집에 없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재료나 조리법 모두 너무 쉬워서 당장 해 먹어도 됨직한 수준이네요. 심지어 우러난 국물은 제가 좋아하는 우동 사리를 넣어 먹으면 끝장이라니, 꼭 한 번 해 먹어 봐야 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열한 올리브 오일에 큼직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양배추 볶음, 오니기리를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굽다가 간장과 미림, 미소 양념장을 발라 굽는 오니기리 구이, 간단한 여주 볶음밥, 통조림 참치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 만든 속을 버터 발라 구운 식빵에 끼워 먹는 참치 토스트(굽지 않은 빵에 머스터드를 바른 뒤 슬라이스 치즈를 깔고, 그 위에 참치 마요네즈를 올려 구워도 맛있다네요) 등 대부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만 소개되고 있어서 아주 반가왔습니다.

뻔한 먹부림 에세이지만 재미도 있고, 레시피들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적당합니다.

2021/11/14

Q.E.D Iff 증명종료 16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1.5점

Q.E.D Iff 증명종료 16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의 두 번째 시즌이라고 할 수 있는 iff도 16권 째입니다. 그런데 수록된 두 편의 이야기 모두 억지스러운 설정과 전개로 점철된,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시계탑"은 그나마 추리적으로 약간 볼만합니다만 현실성이 부족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또 두 편 모두 Q.E.D 시리즈일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도 감점 요소에요. 토마와 가나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내용만 보면 '지나가던 명탐정이 수수께끼의 괴사건을 해결한 뒤, 제 갈 길을 간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 애정을 담아서 이 정도이지, 팬이 아니었다면 그 이하 별점도 가능했을 졸작이었어요. 읽다가 힘이 다 빠질 정도였는데, 후속권에서는 부디 만회해주기만을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편 모두 스포일러가 그렇게 의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시계탑"

시계탑이 있는 건물에 저렴한 애프터눈 티 세트를 파는 카페가 생겼다. 가나들은 열광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기업가 데마키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로 바뀌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큰 적자를 보던 끝에, 데마키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투자자 다이바가 실종되고 데마키가 도망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해보니, 시계탑이 있는 건물에서 지난 60년간 2건의 살인 사건, 3건의 실종 사건이 있었다는게 밝혀지는데....

이전에도 등장했던 타나바타 형사가 재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사건은 원래 시계탑 건물에 거주했던 화가 오키 실종이 원인이었습니다. 오키는 시계탑 주인 하토야 가문의 딸 하라코와 사랑에 빠졌었는데, 이를 반대하던 하라코의 오빠 히카루와 만난 후 사라졌었지요. 당시 비명 소리를 들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수색을 진행했지만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고, 사건은 오빠가 말한대로 오키가 돈을 받고 떠난 걸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믿지 못했던 하라코는 시체를 찾기 위해 시계탑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샅샅이 뒤진 끝에도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자, 살인 사건을 저지를만한 사람에게 건물을 빌려줬습니다. 그들이 살인 사건 후 시체를 숨긴 곳에 오키의 시체도 있을거라 생각해서요. 즉, 일종의 집단지성?에 기댄 셈입니다.

하지만 너무 어설픈 설정입니다. 건물을 빌리려는 사람 중 누가 살인을 저지를지를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건물에서 살인이 일어나게 만든 뒤 범인들이 숨긴 시체 실종 사건으로 처리된 시체들)를 따로 가져다 버리는 것보다, 돈을 써서 전문가에게 시체 찾기를 요청하는게 더 상식적일 겁니다. 애초에 범인이 시체를 숨길만한 곳을 조사 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오키의 시체가 시계의 동력 역할을 하는 돌 주머니를 이용하여 감추어졌다는 진상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시계탑 기둥을 조사하지 않았을리가 없으니까요. 설령 사건 직후에는 못했다 하더라도, 시계가 작품에서처럼 동작 이상을 일으켰다면 시체는 당연히 발견되었을겁니다. 그러나 토마가 나설 때 까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시계를 정기적으로 관리했다는 언급까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아울러 주머니에 감추어진 시체가 백골이 될 때까지 들통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어요. 거주자도 있었고, 이런저런 가게가 있었는데 아무런 냄새나 흔적 없이 시체가 자연스럽게 백골이 될 리가 없잖아요. 하긴, 시체가 수십년간 돌 주머니 줄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 자체가 완전 억지입니다. 사건이 대충 무마된 후에, 살인을 저질렀던 히카루가 직접 시체를 없애는게 당연하니까요. 하라코 본인이 건물 안에 범인들이 숨겨놓은 시체를 그대로 놔 두지 않고 따로 처리해 버렸던 것처럼요. 오빠 히카루가 오키의 시체를 진작에 처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어요.

토마와 가나가 사건에 휘말린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며, Q.E.D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부분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서 Q.E.D 시리즈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의미있는 정보는 게스트 하우스 사업이 실패한 원인 - 외국인 여행객들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역이 가까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식사도 쉽고 싸게 할 수 있게 편의점이 가까와야 한다, 목욕탕에 문제가 있다는 클레임을 무시하면 안된다 - 을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읆조리는 정도만 눈에 뜨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소소한 추리, 시계탑 건물에 관련된 나쁜 소문을 없애기 위해 자기 소유 회사가 운영하는 가게를 오픈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려 했다면, 왜 계속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다른 사업자에게 임대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괜찮았습니다. 다이바 실종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무거운 우물 뚜껑에 시체를 묶어 놓았다는 시체 은닉 트릭도 기발했어요. 경찰도 뚜껑이 너무 무거워서 내려 놓지 않고, 옆으로 살짝 옮겨 놓고 우물 속을 조사해서 들키지 않았다는건데, 상황만 놓고 보면 꽤 그럴듯했으니까요. 출동한 경찰조차 무거워서 완전히 내려 놓지 않은 뚜껑을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내려놓고, 시체를 위에서는 안 보이도록 묶은 뒤 다시 혼자서 올려 놓았다는건 여러모로 무리라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준 이하의 이야기였습니다.

"마드무아젤 클루조" 

파리 프루니에 미술관에서 "달과 거북이"가 도난당했다. 프루니에 관장의 요청으로 실수투성이 마리안느 클루조 경부가 사건을 맡게 되었다. 범인이 요구했던 50만 유로는 전달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다행히 그림은 그림 애호가 루이 오규스트의 도움으로 미술관에 무사히 반환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널리 보도된 탓에 프루니에 미술관은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클루조 경부 혼자의 원맨, 아니 원우먼쇼가 펼쳐지는 작품으로 오규스트가 수상하다는걸 눈치챈 뒤 그를 미행하여 그가 원래는 배우였다는걸 알아낸다던가, 돈이 든 가방에 일부러 홍차를 쏟아서 나중에 가방이 바뀌치기된게 아니라는걸 증명한다는 식으로 사건 해결은 모두 그녀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냅니다. 때문에 이 작품은 Q.E.D 시리즈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토마가 하는 일은 전무하다시피하며, 가나가 우연히 크루소 경부와 엮여서 수사에 동행한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만 하니까요. 프랑스 경찰이 생면부지의 일본인 관광객?과 수사를 벌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림 도난과 그림값을 빼돌리는 두 건의 범행이 벌어지는데, 두 개 다 추리가 필요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림 도난 사건은 인기없는 미술관에 손님을 끌기 위한 프루니에의 계획이라는게 처음부터 공개되거든요. 오규스트의 정체는 추리가 아니라 미행으로 알아내고요. 배우라는 오규스트의 정체는 미행이 아니었어도 경찰 조사로 쉽게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요.

'경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실수 투성이인 클루조 경부 캐릭터도 추리 소설에서는 너무나 흔해빠진 설정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왜 새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름부터 당대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에서 따온 듯 싶은데, 뭔가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미술품 도난에 대한 짤막한 정보가 공유되는 것 외에는 건질게 하나도 없는, 전작은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형편없는 졸작입니다.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입니다. 이번 권에는 네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겁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9/18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 하나후쿠 코자루 / 이태용 : 별점 1.5점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 4점
하나후쿠 코자루 지음, 이태용 옮김/성안북스

'산책길에 만나는 풀꽃과 나무의 재미있고 비밀스런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계절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꽃과 나무들 100종을 간단한 만화 한 페이지와 사진과 짤막한 소갯글 한 페이지로 알려주는 책.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만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구입했습니다. 도감류는 원래 좋아했고, 만화도 재미있어 보였으니까요.

일본의 들꽃이지만 민들래, 냉이, 강아지풀, 싸리, 억새, 칡 및 대부분의 나무들은 우리 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가 남편과 꽃가게를 하는 프로 원예가인 덕분에 전해주는 괜찮은 정보도 제법 많고, '석산'은 교배로는 번식을 못 해서 모두 같은 유전자를 지녔다던가, 마타리 뿌리에서 장 썩은 냄새가 나고, 때죽나무의 덜 익은 열매에는 에고사포닌이라는 유독 성분이 있다는 등의 내용은 흥미로왔었고요.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친숙해진 녹나무 소개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부분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우선 도감 측면에서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이 큽니다. '도감' 이라면 모름지기 그림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어야 할 텐데, 만화로 그려낸 그림은 도감으로 보기에는 부실했고,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은 절반 정도는 설명하는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도감'이라는 명칭을 붙인건 사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깊이있는 정보를 알기도 불가능합니다. 사진을 빼면 반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분량으로 깊이있는 설명을 하는건 애시당초 무리니까요. 그나마의 설명글도 인터넷 사전 등에 있는 정보를 반복하는 내용 외 특별한 저자만의 정보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화도 영 별로에요. 꽃과 나무에 관련된 일상툰같은 이야기가 많았더라면 재미라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도감과 만화 양 쪽 모두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