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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4

롱 워크 - 스티븐 킹 / 송경아 : 별점 2.5점

롱 워크 - 6점
스티븐 킹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 개러티는 "롱 워크" 대회에 참가했다. 100명의 도전자가 몇 가지 조건에 따라 걷기 시작하여, 끝까지 살아남은 단 한 명이 우승하여 모든걸 거머쥐는 대회였다. 개러티는 피터 맥브라이스, 올슨, 베이커, 하크니스 등 여러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걷기를 계속하는데...

"통령"이라는 존재가 지배하는 군사국가 하에서 벌어지는 생존 경쟁 게임을 그린 작품으로 호러계의 마에스트로 스티븐 킹이 고등학교 때 쓴 장편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고 합니다.

어머무시한 몰입감만큼은 정말 최고입니다. 430여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인데,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어려울 정도거든요. 대회에 참가한 워커들이 차례대로 죽는다는게 전부인데도 상세한 상황과 심리 묘사, 그리고 명확한 캐릭터 설정 등을 통해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덕분입니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일어나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아니면 심지어 '성욕' 때문에 죽어나가는 과정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이 지옥을 '마치 셜리 잭슨의 단편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 처럼 느꼈다.'와 같이 묘사하는건 역시나 스티븐 킹다왔고요. 이런 묘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롱 워크"에 대한 탄탄한 설정 역시 볼거리입니다. 어떻게 먹고 배설하는지, 게임에 설정되어 있는 제약 사항이 무엇인지 등 디테일이 빼어나서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 만큼의 걸작이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드라마라는게 거의 없는 탓입니다. "롱 워크" 중 경쟁을 통한 긴장감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게임의 규칙 - 워커들끼리의 다툼, 방해는 금지되어 있고 그냥 걷기만 가능 - 때문에 등장 인물들 사이의 다툼은 말싸움으로만 일어납니다. 등장 인물들도 전부 너무나 착하고, 어떻게든 동료들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난 모습만 보여주고요. 덕분에 스크램이 죽음을 맞을 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려는 가슴 뭉클한 장면도 등장하지만 이래서야 너무 심심해요. 그나마 끝판왕격인 스테빈스가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주인공 개러티와 경쟁하기는 하는데, 그 역시 마지막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려서 결말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롱 워크" 만으로 드라마가 어려웠더라면 "롱 워크"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던가 - 스테빈스가 통령의 사생아라는 설정이니 이런 이야기를 집어 넣기 용이했을텐데 말이죠 -, 아니면 개러티가 우승한 후 또다른 사건이 벌어지던가 - 우승자가 다음 통령이 된다던가, 소문처럼 우승해도 바로 죽인다던가... - 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한마디로,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기-승-승-승.... 아주 약간의 결' 구조로 이루어진 셈으로, 이래서야 극적인 맛을 느끼기는 어렵지요. 이렇게 등장 인물들의 죽음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가 전부라면 포르노와도 다를게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자극적 묘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문학적인 성취를 보여준다는 점을 차이점이라고 주장한다면, 거장이 포르노를 찍으면 걸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될까요?

아울러 무한 경쟁 사회에 내몰린 현재의 학생들, 직장인들을 연상케 하는 설정도 몰입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현재의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모두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야 내가 살아남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금수저', '흙수저'처럼 태어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르다는 인식은 이미 상식이 되어 버린지 오래고요. "롱 워크"처럼 가혹하지만 참가자 모두에게 공정한 출발선과 경쟁 기회를 준다면, 패배했을 때의 벌칙이 가혹하더라도 오히려 작금의 현실보다는 낫다 생각되기에 더욱 씁쓸해 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몰입감은 작가 명성에 값하나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인간미,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노력을 경주하는 순진한 사고방식은 이미 90년대에 유통 기한이 만료된 듯 합니다. 작가가 고등학생 때 썼다는 것이 이해가 될 정도에요.

덧붙이자면, 킹이 숱하게 좌절한 상황에서 이 아이디어로 글을 썼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한 지옥도를 그려 냈을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고등학생 리처드 바크만이 아니라 성공한 호러 소설가 스티븐 킹이 쓴 "롱 워크"를 읽고 싶네요. 이왕 포르노라면, 더 화끈하게 가야죠.

2019/08/25

테러호의 악몽 1, 2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테러호의 악몽 1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테러호의 악몽 2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1845년, 최신식 함정 이리버스호와 테러호를 타고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발한 존 프랭클린 경 탐사대는 무리한 항해 끝에 얼음 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탐사대를 키가 4m가 넘는 하얀색 괴물이 습격하기 시작했고, 괴물과 추위, 식량 부족 등의 문제가 겹치며 프랭클린 경을 비롯한 탐사대원들이 하나씩 죽어가자 테러호의 함장 크로지어는 배를 버린 후 생존한 탐험대 전부와 함께 육로로 탈출을 결행했다.
그러나 계속된 괴물의 습격과 식량 부족은 생존자들을 계속 괴롭혔고, 누수방지공 히키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의 반란까지 일어나는데...

"칼리의 노래"로 접했었던 댄 시몬즈의 장편 호러 팩션입니다. 실존했던 싱클레어 탐험대에게 닥친 비극과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작가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작품이지요. 실존하는 미해결 미스터리를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코난 도일"J.하버쿡 젭슨의 진술"이 떠오릅니다.

이전부터 굉장히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 2권 합쳐서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어버렸을 정도로요. 재미의 가장 큰 요소는 끔찍한 초극한 상황의 생생한 묘사입니다. 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다시피 포경선 에식스 호의 비극과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에식스 호는 십 수명의 선원들이 주로 '굶주림' 과 싸우며 그래도 다섯 명이나 생존했지만, 싱클레어 탐험대는 백명을 훌쩍 넘는 대원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해 줄어드는 자원만으로 버텨야 해서 직면한 굶주림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몇 수 위입니다. 최고 영하 60도 이하로 떨어져 맨 손으로 총을 잡으면 살갗이 벗겨질 정도니까요.

탐험대를 곤경에 빠트리는 요소로는 괴혈병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묘사도 굉장합니다. 모공 등 모든 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이빨이 빠지고, 붓기가 심해지며 피부의 탄력도 사라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몇몇 선원들이 걸린 납중독 묘사도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죽어가는 핏제럴드 함장의 최후가 특히나 끔찍합니다. 

탐험대를 습격하는 거대 괴물 툰바크의 위협도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4m도 넘는다는 거대한 체구에 속도도 엄청나며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괴물로 인간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나마 탐험대의 발버둥은 테러 호의 항해장 블랭키가 괴물에 맞서 오랫동안 버티며 살아남는 정도에 불과해요. 참고로 블랭키의 사투는 박력이 넘쳐서 전체 내용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많은 어려움에서 드러나는, 인간 관계를 통한 드라마도 탄탄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작중 최고 악역인 누수방지공 코닐리우스 히키의 존재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나, 다른 인물들의 묘사와 설정이 아주 빼어납니다. 실력은 없지만 운과 허세에 의존하는 존 프랭클린을 비롯, 실력은 뛰어나나 아일랜드인이라는 출신 성분 탓에 뼛 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사는 크로지어 함장, 순수한 군인이자 '인간' 인 어빙 소위, 체력이나 능력은 딱히 없지만 열정과 신념으로 무장한 해리 굿서 등 모든 인물들이 눈에 보이듯 그려져 정말 살아 숨쉬는 듯 합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인물들과 인간임을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인간 군상들의 대비도 확실하고요. 사실 극한 상황에서 군율과 군기가 유지된다는게 처음에는 영 와 닿지 않았는데, 묘사를 통해 국가와 인간에 헌신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덕분에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탐험대가 전멸할 때 이누이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히키가 어빙을 죽이고 이누이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탓이라는 설명이 더해진 것도 좋았습니다. 탐험대가 이누이트를 복수 명목으로 학살해서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탐험대의 생존 경쟁만 그렸으면 좋았을텐데,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영역의 이야기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탓입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툰바크, 그리고 툰바크와 관련된 벙어리 여인 실나의 정체입니다. 실존한다기 보다는 결국 이누이트 신화 속의 존재라는 진상은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크로지어 함장이 '천리안'을 갖춘 인물로 그 역시 실나와 결혼하고 이누이트 주술사로 거듭난다는 결말 역시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와 총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부적을 붙여 퇴치한다는, 크리쳐 호러물이 갑작스러운 퇴마물로 전환되는 셈인데 영 개운치 못했거든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TV 시리즈에서는 툰바크가 실체가 있는 괴물로 그리고 있던데 그게 더 나은 선택인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워낙에 압도적인 내용이 많고 재미 또한 빠지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결말만 더욱 현실적으로 그려내었더라면 4점도 아깝지 않았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밀리의 서재' 처음 한 달 무료 프로모션을 통해 읽게 되었는데, 아직 '밀리의 서재' 가입을 하지 않으셨다면 무료로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도 무척 땡기지만, 심하게 무서울 것 같아 망설여지는군요. 호러 무비는 취향이 아니다보니...

2018/09/22

모략의 기술 - 장스완 / 유아이북스 : 별점 3점

모략의 기술 - 6점
장스완 지음/유아이북스

춘추 전국 시대 처세의 달인이었다는 귀곡자의 '모략' 을 현대 사회에 응용 및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처세술 - 자기 계발 서적입니다. 귀곡자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솔직히 전혀 몰랐지만, '모략' 이라는 제목이 왠지 모르게 와 닿아서 구입했습니다. 조금 찾아보니 그의 저서는 유세가들을 위한 처세를 다룬 책으로, 덕분에 당대에는 희대의 소인배라고까지 불리웠다네요. 그런데 이 정도 처세의 달인이 혼란했던 춘추 전국 시대 당시 한자리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조금 신뢰가 떨어지는군요.

하여튼, 책은 "1부 귀곡자와 생존 전략" 아래 총 네 장의 소주제, 그리고 "2부 귀곡자 핵심 구절 강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의 분량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특정 상황에 대한 중국 역사 속 실재 사례와 그 상황에 대한 귀곡자의 글을 연결시키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고요.

하지만 1부 1장 '처세의 기술'과 2장 '현명한 조직 관리'의 경우는 그럴싸한 소주제와는 다르게 귀곡자의 말에 상황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이야기가 많아서 실망스럽습니다. 송나라 군대가 금나라 군대 몰래 후퇴하는데 성공했던 필재우의 작전 사례에 '일의 변화가 심하여 어떻게 돌아갈지를 잘 알지 못할 때는 물러나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큰 도리다." 라는 말을 연결시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필재우의 작전은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결심이 중요한게 아니라서 전혀 맥락이 맞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3장 기업 경쟁령 높이기'부터는 읽을만 합니다. 실제 사례와 귀곡자의 말의 연결도 매끄럽고, 정말 현재 상황에 어울리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쉐보레 자동차 회사의 세일즈맨 윌리엄의 부동산 구매 일화를 통해 '판매는 남의 비위만 맞추는게 아니라 세심히 관찰해 사용자가 원하는걸 알아내는게 더욱 중요하다'는 비결을 이끌어내고, 연이어 '칭찬으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귀곡자의 말을 설명해 주는 것 처럼요. 쉐보레 외에도 아마존의 사례가 등장하는 등 친숙한 주제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듭니다. 그 외에도 '욕쟁이 할머니' 같은 마케팅 비법도 고객 중심 경영의 하나로 이는 귀곡자의 '깊은 곳을 헤아려 속사정을 파악한다' 는 말과 같은 이치라던가, 일본 대표 세일즈맨 하이라치헤이의 일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자기 말을 듣게 하려면 같은 부류, 같은 욕망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등 재미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 때에 균열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성실과 신용이 중요하다, 부자가 되려면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는 등 당연한 이야기들이 많은 건 아쉽지만, 그래도 옛 지식이 아직도 통용될만한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는 여러모로 반가웠어요.

다음에 이어지는 '4장 직장에서 살아남기'는 유용한 정보가 가득한 이 책의 하일라이트입니다. 소주제 명칭부터 아주아주 마음에 들어요. 우리네 평범한 직장인의 처세라면 직장에서 살아남는 정도가 고작일테니까요. 여기서 몇가지 귀곡자의 비결을 알려드리자면, 라이벌인 동료가 있다면 그에게 뭔가 부탁을 하던가 최소한 한번 쯤 그를 칭찬해보라는군요. 적보다는 친구가 생기는게 낫다는 논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가 한 말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하고, 누군가에게는 3할만 말해야 한다는 등의 화법 관련 이야기는 모두 새겨들을만 합니다.
사내에서 내 진급 문제로 논의 중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서 기회를 잡고 과감하게 결단해야 한다는군요. 어차피 인간 세계는 모두 경쟁이니 모략을 이용해서라도 자리를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아.. 정말 놀라운 식견입니다.
또 조직 관리를 위해서 엄격한 상벌은 필수라는 것도 굉장히 와 닿았던 부분이에요. 특히 벌의 목적은 교육이지 처벌이 아니며, 이는 투명하게 적용되고 공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릎을 치게 만드네요. 

2부 "핵심 구절 강설" 은 처세의 달인 귀곡자의 엑기스만 정리한 60여 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내용으로 부록에 가까운데, 워낙 핵심 정보들이라 이 부분만 따로 정리하여 소개드리고 싶을 정도로 유용한 내용이었고요.

모든 내용이 재미있거나 가치가 있지는 않고, 책을 읽는다고 직장에서의 출세나 생존을 보장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이천년도 더 전 인물이 한 말이 현대에도 조금이나마 통용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는 의의가 컸던 독서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사람 사는 이치는 별로 달라진게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역사나 처세술 관련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 합니다.

2026/02/22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 시즌 1 (2025) - 후지이 미치히토 외 : 별점 2점

전쟁 후 PTSD에 걸려 낙향한 무사 사가 슈지로는 극심한 생활고로 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지만 약 한 첩 쓰지 못했다. 아내마저 병환이 깊어지자, 사가는 무려 10만엔을 준다는 무사 모집 공고에 응해 교토 텐류지로 향했다. 다량의 총으로 무장한 주최측은, 그 곳에 모인 수백명의 전 무사들에게 상대를 죽이며 도쿄까지 오면 10만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한 시대극 액션 드라마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를 배경으로 무사 계급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살육 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인기있을 만한 설정은 다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설정 ‘고독(고도쿠)’가 대표적이에요. 수백 명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을 벌이게 하고, 최후의 생존자만을 뽑는다는 건데, 이건 "오징어 게임"과 다를게 없지요. 고도쿠 배후에 재벌 세력과 경시국이 손을 잡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특기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건 "닌자인법첩"같은 일본 시대극 액션물 설정을 그대로 따 왔고요. 그 외에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많아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만화같은 설정을 보신 전쟁이라던가 폐도령 이후 무사 계급의 몰락과 같은 실제 역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와지 대경시, 4대 재벌 등 실존 인물들을 결합시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고도쿠를 통해 무사 계급을 말살하려 한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목적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검술 액션입니다. 실사 시대극으로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촬영과 합이 좋은 덕분입니다. 특히 슈지로가 PTSD를 극복하고 총을 든 경비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각성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어요. 이 순간을 위해 주인공 사가 슈지로에 대한 서사도 초반부터 잘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살인귀 칸지야 부코츠야 일종의 중간 보스쯤 되는 악역이니 그렇다 쳐도, 키구오미 우쿄같은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까지 개별 서사를 풀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비서 신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짐짝에 가까운 후타바의 동행이나 이로하의 등장과 과거 사부와의 악연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기보다는 분산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가 슈지로가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하고 도쿄에 도착할게 뻔한만큼, 이런 이야기는 시간과 분량 낭비에 불과했어요. 이보다는 닌자 쓰게 쿄진의 목적을 좀 더 집중적으로 풀어냈어야 합니다.

검술 액션도 중반 이후에는 힘을 잃습니다. 파워 밸런스가 이상한 탓입니다. 사가 슈지로는 각성 전에도 칸지야 부코츠를 압도했었는데,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는 슈지로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고전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시원하거나 통쾌한 맛도 없고요.

또한 무사 계급을 이 기회에 몰살시키겠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계획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입니다. 모든 무사들이 고도쿠에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칸지야 부코츠의 살인 행각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민중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무언가는 부족하지만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합니다. 

2019/07/13

검은 개 - 추정경 : 별점 2점

검은 개 - 4점
추정경 지음/다산책방

촉망받는 고등학생 테니스 선수 임석이 체포되었다. 약물에 취한 채 무면허로 운전하다가 김유진이라는 여학생을 치어 중태에 빠트린 혐의였다. 빠져나갈 수 없는 혐의로 분류심사원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임석은 분류심사원 수감생들 사이에서도 공격당했고, 그를 돕는 건 임지선 변호사 뿐이었다.

오랫만에 읽은 한국산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야기에는 크게 3개의 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임석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별로 친해 보이지 않았던 김별과 김유진이 함께 있었던 이유, 임석의 스파링 파트너인 노승모가 거짓 증언을 해서 임석을 함정에 빠트린 이유, 임석이 먹은 각종 약물이 어디에 들어 있었는지, 김유진이 차에 치인 이유, 김유진을 차로 친 사람은 누구인지 등 많은 수수께끼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실감나는 주니어 테니스 세계입니다. 랭킹과 집안의 재력, 스폰서가 누구인지에 따라 거의 인생이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가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승부에 이기기 위한 치사한 전략, 전술 및 사기에 가까운 연기도 여과없이 드러나고요. "저스트 고고!"와는 180도 다른 무서운 세계에요. 라켓이나 거트, 텐션 및 스트로크 등과 같은 전문 용어와 시합 묘사도 좋은 편이고요.
또 이는 단순한 배경 묘사에 그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임석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석이라는 황금알을 놓치기 싫었던 스포츠매니지먼트 회사 KDC의 구대철 회장이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니까요. 그는 임석에게 도핑 약물을 몰래 먹인 뒤 그를 자신의 회사에 노예 계약으로 옭아맬 생각이었는데, 아들 구성기가 이를 거부하자 임석에게 열등감을 가졌을 친구 노승모를 끌어들였던 겁니다. 이를 위해 별장에서 파티가 열렸고요. 하지만 자신의 과거 악행을 증명할 증거를 지닌채 김별이 도주한 후 분노가 폭발하여 그 친구 김유진을 살해하려 했습니다. 마침 현장에서 약에 취해 쓰러진 임석을 범인으로 위장하고, 아들 구성기를 증인으로 내세워서요.

세 번째는 임석이 수감된 분류심사원에서의 생존경쟁입니다. 임석이 분류심사원 29호 방에서 방장 해골의 노림을 받으며 방의 막내인 '꼽'으로 지내는 과정, 25호로 이감된 후 25호 방장 석민우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결국 석민우를 쓰러트리고 결국은 해골까지 제압한다는 고등학생 학원 폭력물이나 무협지같은 이야기인데 나름 읽는 재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이야기는 임석 사건 이야기와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임석의 성장기 역할만 수행할 뿐입니다. 비중으로 따지면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와 맞먹거나 능가하는 수준인데 온갖 캐릭터의 설정까지 세세하게 설명해가면서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될 필요는 없었어요.
하긴, 이렇게 본 이야기를 흐리는 과한 묘사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임지선 변호사는 바람난 엄마를 아빠가 살해했다는 불우한 과거가 있다는데 내용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임석 부모님도 이혼 위기이며 구성구의 경우는 아버지가 구대철 회장인지 별장 관리인 임씨인지 모른다, 노승모 아버지는 세신사이다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룡정점은 책 서두에 등장하는 박기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내를 잘 만나서 피아제 시계를 차고 다니지만 원래는 테니스 꿈나무였다는 묘사가 한껏 이어집니다. 누구나 주인공으로 착각할 정도로요. 허나 본편에서는 하는게 전무합니다.
그동안 심리 묘사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고 장황한 작품은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등장 인물들 묘사가 많은 작품은 본 적이 없네요. 이런 부분만 다 들어낸다면 중편 이하 분량으로 충분했을겁니다.
에필로그 역시 불필요한건 마찬가지입니다. 임석이 사건 후 테니스 선수로는 실패하고 옛 테니스 아카데미 룸메이트로 세계적 스타가 된 호주 선수의 스탭이 되어 일한다는 내용인데 분량 잡아먹기에 그칩니다. 내용도 별로였고요. 그냥 임변과 만나서 맥주 한잔 하며 구성기와 노승모의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끝났어도 충분했어요.

마지막으로, 임석이 촉망받는 유망주라도 세계 랭커도 아닌데 스폰서들의 관심, 취재 열기는 너무 지나쳐 보였습니다. 지금 주니어 국내 챔피언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에요. 예전 퍽치기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지만 잘 풀려서 프로야구 SK에 지명까지 되었던 '위대한' 이라는 투수가 있었습니다. 야구팬들의 거센 반대로 지명은 철회되고 결국 폭력범이 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인데 왠만한 프로야구팬이 아니면 알지도 못할 사건입니다. 제가 봤을 때에는 이 정도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접대 테니스를 치다가 실제로 성접대를 했다거나 하는 스캔들이 아닌 이상요.

그런데 또 반대로 추리적인 서사, 설명은 부족합니다. 나름 복잡한 상황이 얽혀있고, 임변 (임 변호사)의 조사와 추리가 없는건 아닙니다. 레카차 운전수와의 대화 등은 분명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복잡했던 진상이 밝혀지는건 결국 구성구의 자백, 증언이라 많이 허무합니다. 동영상 촬영과 비밀 웹하드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운전석에 김유진의 피가 묻어 있었다는 정도로는 임석의 무죄 판결은 불가능했을겁니다. 이래서야 잘 짜여진 범죄, 법정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모두가 미워하는 악의 화신으로 테니스 실력도 별 볼일 없다던 구성기의 변모가 대표적입니다. 급작스럽게 아버지의 악행을 고발할 정도로 정의감에 불타며 테니스 실력 역시 임석의 라이벌 급으로 격상하는는건 설득력이 너무 낮습니다.
게다가 구성기의 활약은 이야기 전개에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정의감을 불태울거면 애초에 임석, 그리고 김유진을 별장으로 부를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노승모만 불러도 충분하잖아요. 차라리 노승모만 부르려고 했는데 걱정한 임석이 따라왔다면 모를까요. 몇 주가 지난 다음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숨긴 위치를 알려준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아울러 김유정 살인 미수 사건이 일어난 핵심인 김별의 핸드폰 (구대철의 추잡한 무언가가 찍혀 있을)을 마침 그날 찾아서 돌아갔다는 우연까지 겹치면 좋은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국내, 아니 세계적으로도 보기드문 주니어 테니스 관련 범죄 스릴러라는건 독특합니다. 저도 카트린느 아를레의 "사라진 테니스 스타" 외에는 접해본 적이 없고요. 여러모로 작가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분량이 너무 많아요. 캐릭터 설정, 이야기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고요. 지금의 절반 분량으로 임석 사건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한국 범죄물의 발전은 느껴지지만 또 아직 갈길도 멀구나 싶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0/10/23

크림슨의 미궁 - 기시 유스케 / 김미영 : 별점 3점

크림슨의 미궁 - 6점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창해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대기업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회사가 도산해 실업자가 된 뒤 전락한 후지키는 아르바이트에 응모했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신이 든 곳은 '화성' 이라는 설정의, 오스트레일리아에 위치한 '벙글벙글' 국립공원이었다. 후지키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시작하게 되는데....

"검은집", "유리망치" 단 두 편만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인상적이었던 기시 유스케의 장편입니다. 타자로 비유하자면 타율과 장타력을 겸비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재미입니다. 후지키가 알 수 없는 게임에 휘말린 뒤 4가지 '선택지' 중 '정보'를 선택하고, 이후 게임의 단계별로 벌어지는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후지키가 자신의 정보와 아이템을 활용해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는 두뇌게임의 묘미도 느낄 수 있으며, '식시귀'라 불리는 식인종과의 마지막 추격전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긴장감이 넘칩니다. 재미만 놓고 본다면 매우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래된 '게임북'이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정보'라는 선택지를 통해 얻은 단서들이 복선처럼 기능하는 부분도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단점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한 '게임'이고요.

이 작품처럼 '모종의 알 수 없는 단체나 집단에 의해 원치 않는 게임에 참가한 이들이 벌이는 생존 경쟁과 학살극'이라는 설정은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사용된 익숙한 구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라 칭하는데, 이러한 설정의 작품들이 차별성을 가지려면 '게임' 자체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정교하며, 흥미로운지가 핵심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게임'은 초반의 4가지 선택지와 '정보'의 중요성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구조가 허술합니다. 예를 들어, 초반 선택지에서 '호신용'이라는 선택지의 중요성이 간과된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키가 2m에 달하는 세노오가 게임을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플레이어 선택 과정에서 세노오 같은 특출난 인물이 포함되었다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게임'의 목적이나 단계별 과정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참가자들이 아이템을 공정하게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소한 '식량'이라도 공유되었다면 이야기가 전개되지도 않았을 테니, 이러한 요소들은 작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는 아야의 주장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최소한의 논리적인 설명이 더 필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임 마스터'와 '촬영자'라는 설정이 흥미로운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작중에서 거의 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게임 수행 과정에서 게임 마스터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상술한 요소 중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했더라도 게임은 실패했을 겁니다. 때문에 후지키의 추측대로, 이 게임이 모종의 단체가 스토리가 있는 살육극을 스너프 필름으로 제작하고 판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훨씬 더 정교한 구성이 필요했습니다. 수십억의 돈이 들어간 거대한 프로젝트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게임 설정의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게임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점이나 설명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점은 오히려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작품 대부분이 비슷한 방식을 취하긴 하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만약 '게임' 설정이 좀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짜여 있었다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 내에서도 단연 빛나는 작품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2010/11/22

24시간 7일 - 짐 브라운 / 하현길 : 별점 2점

24시간 7일 - 4점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비채

다나는 미국 TV 리얼리티 쇼 "24시간 7일"에 참가하게 되었다. 쇼가 열리는 곳은 자메이카와 아이티 사이의 무인도 '바사섬'으로, 무인도였지만 쇼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쇼가 시작되자마자 참가자 12명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가 괴바이러스로 사망하고, 참가자 12명도 시청자 투표를 통해 1명씩 바이러스에 의해 희생될 운명에 빠졌다. 방송은 차단되었지만, 인터넷과 위성방송 수신기를 통해 중계가 계속 되었고 미국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이 사건의 추이를 검토하며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데...

도서출판 비채의 트위터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된 작품입니다. 비채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줄거리 소개대로 무인도에 고립된 리얼리티 쇼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해 싸워나간다는 내용은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의 공식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앞서 접했던 일본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게임을 어떻게든 설득력 있게 만들려는 배경 묘사가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리얼리티 쇼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컨트롤'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그가 이 게임을 진행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해 줍니다.

반면 이 장르의 핵심은 '참가자들이 어떻게 생존을 위해 싸워나가는지?'라는걸 잊은 듯합니다. 이 장르물은 대체로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보장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선 무언가를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흥미진진한 두뇌 게임이나 참가자 간의 갈등이 잘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요소를 찾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참가자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가 아니라 '시청자'들의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시청률 경쟁이 낳은 비윤리적인 미디어의 행태를 비판하는 의도를 담고 있겠지요. 문제는 게임 참가자들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긴장감과 재미는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약간의 게임 요소, 그리고 시청자를 현혹하기 위한 작전이 등장하지만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사족처럼 느껴졌어요.

또한 지나치게 헐리우드스럽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등장 인물들과 스케일 모두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이거든요. 불치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여주인공 다나(밀라 요보비치?)와, 전직 비행기 조종사로 뛰어난 육체와 지능을 갖춘 저스틴(매튜 맥커너히?) 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 설정은 진부합니다. 결말 또한 너무나 완벽하게 정리된, 그야말로 한 편의 헐리우드 영화 같았고요. 거창한 스케일도 겉보기에는 화려할 뿐, 결국 속이 빈 강정처럼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바사섬이 공격받는 상황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이 '헬리콥터'로 미사일을 피한다는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거대한 작전이 미국 정부 모르게 진행된다는 설정부터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여러 복선과 단서들이 단순한 '떡밥'처럼 보인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이야기를 촘촘하게 구성한 후, 그에 맞춰 단서를 배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로 넣은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요. '컨트롤'의 계획 역시 허술합니다. 참가자 중 누군가가 섬을 탈출하거나, 미군이 섬을 초토화시키는 방식으로 개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고,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허점이 많았습니다. 전개에 중요한 요소였던 '컨트롤의 협력자'에 대해 방송에서 오판한 로릭 박사에 대한 후속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컨트롤'의 동기와 사건의 배경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퍼즐 천재로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터커는 매력적이었고, 기본적으로 스릴과 서스펜스가 보장되는 장르물에 미디어 비판 요소를 결합하려 했던 시도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아무래도 작가의 욕심이 지나쳤던게 아닌가 싶네요. 장르물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미디어 비판에 집중하고 스케일을 줄여서 설득력 있게 진행하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현재의 결과물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헐리우드식 스릴러일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벤트로 읽게 된 도서라 보다 좋은 평을 남기고 싶었지만, 솔직한 리뷰를 남기는 것이 맞겠지요. 아마 앞으로 이벤트 당첨은 힘들 것 같습니다...

2021/06/18

눈물점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점

눈물점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에도물미시마야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모두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권 부터는 전작에서 시집간 오치카를 대신해서 도미지로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전작에서부터 예견된 이 교체는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결과물은 역시나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냥 괴담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한량이라서, 괴담 이야기를 듣는 진지한 목적이 사라져 버린 탓입니다. 괴담 이야기에 대한 별다른 책임감도 느낄 수 없었고요. 그 외에도 전작들에 비하면 괴담들의 섬찟함이나 무서움이 훨씬 덜한 편이라는 점, 그리고 가장 대작인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이 특히 지루했던 점 등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도미지로로의 주역 교체에 대해 갖고 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된 만큼, 이후 이 시리즈를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눈물점" 

도미지로에게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하치타로가 찾아왔다. 그는 과거 자신의 집이었던 두부가게 '마메겐' 일가족을 파괴했던 눈물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과거 마메겐에서는 형수들과 누나가 남자 가족을 잇달아 유혹했었다. 마지막에 큰 누나가 아버지를 유혹하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큰 누나의 '눈물점'을 잡아 뜯어 잘근잘근 씹어버렸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가출한 뒤 죽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악령이 눈물점 형태로 여자에게 씌워지면, 남자를 유혹하게 된다는 뻔한 이야기인데다가, 악령이 '마메겐' 여자들에게 씌워져 가문을 박살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아버지가 사과했다던가, 가출했다던가 하는걸 미루어보면 뭔가 여자에게 원한을 산 듯 한데, 암시만 줄 뿐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냥 재수없게 귀신에게 씌웠다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가출해서 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창피해서? 그렇다면 눈물점의 여자가 아버지가 죽은 자리에 귀신으로 나타날 이유는 없지요. 어머니가 가족이 흩어지는걸 허락한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하치타로의 부인은 얼굴이 점투성이었다는 결말과, 어린아이답지 않게 똑똑했던 막내 누나 치이 캐릭터는 괜찮았습니다. 치이는 눈물점이 수상하다는건 알지만, 이를 방관하는걸로 그려지는데, 차이가 주도적으로 활약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아무래도 단점이 더 많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시어머니의 무덤" 

꽃놀이 철, 비단 장사집 노부인 오하나가 찾아와 고향 벚꽃 마을에서 있었던 무서운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다. 마을에는 묘지 언덕에서 꽃놀이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오하나의 집 가가리야의 여자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가가리야 증조 할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다가 자살한 뒤 가가리야 여자들은 꽃놀이 때 묘지 언덕에 오르면 죽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가가리야에 며느리 오케이가 들어온 뒤, 당찬 그녀의 주도로 가가리야 여자들은 묘지 언덕 청소를 위해 꽃놀이 전날 묘지 언덕에 올라갔다. 그 때 무언가에 씌인 어머니가 며느리를 죽였고, 그 뒤 행복했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과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내렸다는 저주에 대한 괴담. 미야베 미유키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 꾼인지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꽃놀이 묘사에서 시작해서 평화로왔던 벛꽃 마을 묘사, 말괄량이 며느리 등 저주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재미있게 묘사하다가, 과거 증조 할머니의 저주와 그 저주의 재림이 이어지는 클라이막스까지 달려가는 전개가 절묘하고, 호흡과 긴장감도 최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눈물점"처럼 저주에 대한 이유 설명이 없지 않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증조할머니가 비정상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해서 생겨난 것으로 설명되고 있거든요. 물론 왜 미워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며느리 뱃속 아기까지 죽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심지어 그 저주가 미워하는 대상인 며느리가 죽고 나서도 몇 대를 이어서 내려올 까닭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정도라도 설명이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괴담이나 퇴마물에서 저주는 어쨌건 이유가 명확해야 이야기가 성립되니까요.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혹은 저주 때문에 죽거나 피해를 받더라도 이유를 알아야 하는 탓이지요.

그러나 이 괴담이 현실화된 과정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벚꽃 마을 사람들 행동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거든요. 마을의 유력자인 가가리야 가문 며느리가 꽃놀이 때 저주로 비참하게 죽었다면 꽃놀이를 계속 그 곳에서 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최소한 위험한 묘지 언덕을 오르는 계단은 보수했었어야 합니다. 이래서야 저주로 인한 죽음을 그냥 가만히 기다린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너무 설득력이 없어요. 

마지막에 도미지로가 오하나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어깨의 손자욱은 밀기 위함이 아니라 안아주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도 멋지기는 하지만 도미지로가 말해서 별로 어울리지 않더군요.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으며 여자도 아니고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고 아픈 경험도 딱히 겪어본 적 없는 도미지로가 한참 어른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오하나에게 할 말은 아닌 듯 싶었거든요. 도미지로가 이야기를 듣는 역할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제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만든 결말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괴담으로의 재미는 확실했고, 미시마야 시리즈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지만 단점도 명확해서 감점합니다.

"동행이인"

이번에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미시마야를 찾아온 건 나이 쉰 살의 파발꾼 출신 지배인 가메이치였다. 그는 파발을 위해 달리던 어느날 들러붙었던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귀신이 그에게 들러 붙었던 이유는, 귀신 간키치처럼 가메이치도 당시 처자식을 잃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들과 장, 단점이 완전히 반대인 작품입니다. 장점이자 차이점이라면, 귀신 및 기타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완벽하다는 점이에요. 가메이치에게 귀신이 달라붙은 이유는 줄거리 소개와 같고, 간키치가 귀신이 되어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난건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이고 (얼굴이 없으므로), 얼굴없이 가메이치를 뒤 쫓을 때 고개를 계속 끄덕이던건 울고 있어서였습니다. 아버지 찻집에 벼락이 떨어진건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고요. 물론 여관 부뚜막에서 화재를 일으킨 이유는 애매합니다만, 이 정도면 귀신에 관련된 거의 모든 현상에 대해 충실하게 설명해 준 셈이지요. 

파발꾼 이야기답게, 당시 에도에서 도카이도를 통해 가는 지방과 길에 대한 풍부한 묘사도 특징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시대물이지만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전해주네요. 파발꾼과 파발 업무에 대한 세세한 설명도 좋았고요.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는 단점은 큽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치유에 대한, 감동 계열의 이야기인 탓입니다. 솔직히 이게 괴담인가? 싶을 정도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이라면 일단 무섭고 봐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정체 불명의 저택에 여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괴저택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모아 신처럼 그들을 가지고 놀 속셈이었다. 과거 예수교를 믿었었지만, 기도에 보답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참한 일을 겼었던 저택 주인의 분노와 원념 탓이었다. 올곧은 무사 긴에몬이 지휘했지만 여섯 명은 차례대로 비참하게 죽어갔고, 결국 긴에몬, 진자부로, 오아키 3명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최후의 힘을 모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저택의 심장부인 불타는 화산 장지문을 뚫고 나갔다. 그 때 긴에몬은 저택 주인인 검은 무사와 싸운 뒤 용암에 삼켜졌지만 진자부로와 오야키는 살아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저택에서의 일로 건강을 해친 진자부로는 죽기 전 이 경험을 도미지로에게 이야기해 주는데...

한 편의 장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분량을 자랑하는 대작.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모인 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는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을 연상케 합니다. 제가 명명한 명칭인데 (원조!), 이 장르는 보통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살아남는 방식, 또는 갇힌 공간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탈출하는 방식 중 한 가지 방식을 따릅니다. 특정한 룰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고요. 

이 작품에서의 룰은 "6명 중 5명이 죽어야 탈출할 수 있다", 즉 최후의 한 사람만 탈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택은 초반에 이를 노골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첫 번째 방식, 즉 사람들간의 아귀다툼과 생존경쟁으로 진행되나 싶었어요. 그러나 의외로 이야기 전개는 두 번째 방식이더군요. 서로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탈출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이는 인격자이자 참 리더인 긴에몬의 존재 덕분입니다. 하긴, 한 명만 살아남는다면 검술에 능한 무사를 하녀와 부잣집 마나님, 도박에 미친 한량과 주정뱅이 목수, 약국집 후계자가 이길 수 있을 턱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탈출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밝혀낸다는, 이러한 전개의 핵심 재미요소를 간과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저택에 갇히고, 죽을 위기에 처한건 모두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며, 제령이나 퇴마의 방법도 합리적이지 못한 탓입니다. 애초에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니, 없애는 방법이 합리적일리 없지요. 마지막 탈출도 모 아니면 도 방식으로 우격다짐에 불과했고요. 

또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다보니 별로 무섭지도 않다는 점도 단점이에요. 차라리 첫 번째 방식으로 서로 살아남고자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식으로 전개하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건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호러물에 꽤 잘 아울리는 방식이니까요. 미시먀야 시리즈 초반에 비슷한 이야기가 몇 편 있었지요. 이 시리즈도 점점 인간미,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걸 알려주는 이야기가 많아지는걸 보면, 미야베 미유키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네요. 아울러 이런 전개로 반전이라면 반전인, "진자부로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는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것도 유감스러웠습니다.

이야기도 다른 작품들에 비교하면 지루합입니다. 저택이 악의를 드러내는 과정까지가 너무 긴 탓입니다. 우선 오아키가 한텐을 보내어 에둘러 이야기거리가 있다고 요청하는 시작부터 진자부로의 이야기까지의 분량 낭비가 심하거든요. 괴저택의 기묘한 디테일도 어린아이들 동화같은 내용과 분위기라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내용에서 불거지는 "예수교" 설정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분량 낭비였습니다. 저택 주인의 원한과 분노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있게 그려지지도 못했어요. 꽤 괜찮은 설정이었는데, 불필요한 정보로 낭비된 느낌이 들어 아깝더군요. 화자인 진자부로도 등장 인물들 중 가장 호감가지 않는 인물이라 읽는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가진 재주도 없고, 용기도 없고, 별다른 계획도 없으면서 일행 마사키치를 질투하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진자부로가 도박에 미쳤다는 묘사도 지나치게 많고요. 엄연히 진자부로가 도미지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니만큼, 이런 쓸데없는 묘사들은 좀 걷어내는게 좋았을거에요.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도미지로가 최악이라는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교 관련 천조각이 들어간 한텐을 한 번 만났던 골동품 가게에 맡기는 행동 때문입니다. 여러 명의 목숨이 걸려 있을 물건인데, 굉장히 무책임했어요. 이야기 때 무슨 과자를 먹을지 정도의 고민도 하지 않은 듯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오야키가 '미시마야의 괴담회는 단순한 놀이일 뿐'이라고 일갈해도 할 말이 없겠지요. 제 생각도 오야키와 같습니다.

그래도 저택이 악의를 드러낸 뒤, 이노스케가 딸을 사창가에 팔아먹은 죄를 고백하고 검은 무사에게 참살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생존자들이 탈출할 때까지 달려주는 부분만큼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괴현상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묘사가 탁월하고, 괴저택과 그 안의 괴이 현상에 대한 상상력도 빼어난 덕분이지요. 에도 시대에 대한 디테일도 역시나 최고 수준으로, 특히 예수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교라는 말만 듣고도 도미지로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예수교를 얼마나 배척했는지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작품은 이전에 본 적도 없네요. 신불을 믿는 사람이 예수교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럴듯하게 설명되고 있고요. 현재와 사뭇 다른 당대 상황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마사키치가 이노스케가 죽은 뒤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설정이 대표적이에요. 온갖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이라면 이 정도로는 정신이 무너지지 않겠지요.

이렇게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무섭지도 않았고, 설명도 부족하며, 도미지로의 부족함이 두드러진 작품이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