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 추정경 지음/다산책방 |
촉망받는 고등학생 테니스 선수 임석이 체포된다. 약물에 취한 채 무면허로 운전해서 김유진이라는 여학생을 치어 중태에 빠트린 혐의였다. 임석은 분류심사원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린다. 빠져나갈 수 없는 혐의와 분류심사원 수감생들 사이에서도 공격당하는 그를 돕는 건 임지선 변호사 뿐이었다.
오랫만에 읽은 한국산 범죄 스릴러.
이야기에는 크게 3개의 축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임석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별로 친해 보이지 않았던 김별과 김유진이 함께 있었던 이유, 임석의 스파링 파트너인 노승모가 거짓 증언을 해서 임석을 함정에 빠트린 이유, 임석이 먹은 각종 약물이 어디에 들어 있었는지, 김유진이 차에 치인 이유, 김유진을 차로 친 사람은 누구인지 등 많은 수수께끼가 복잡하게 얽혀 있죠.
두번째는 실감나는 주니어 테니스 세계입니다. 랭킹과 집안의 재력, 스폰서가 누구인지에 따라 거의 인생이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가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승부에 이기기 위한 치사한 전략, 전술 및 사기에 가까운 연기도 여과없이 드러나고요. <<저스트 고고!>>와는 180도 다른 무서운 세계에요. 라켓이나 거트, 텐션 및 스트로크 등과 같은 전문 용어와 시합 묘사도 좋은 편입니다.
단순한 배경 묘사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테니스 이야기는 첫 번째 임석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거든요. 임석이라는 황금알을 놓치기 싫었던 스포츠매니지먼트 회사 KDC의 구대철 회장이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니까요. 그는 임석에게 도핑 약물을 몰래 먹인 뒤 그를 자신의 회사에 노예 계약으로 옭아맬 생각이었는데, 아들 구성기가 이를 거부하자 임석에게 열등감을 가졌을 친구 노승모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별장에서 파티가 열렸죠. 하지만 자신의 과거 악행을 증명할 증거를 지닌채 김별이 도주한 후 분노가 폭발하여 그 친구 김유진을 살해하려 한 겁니다. 마침 현장에서 약에 취해 쓰러진 임석을 범인으로 위장하고, 아들 구성기를 증인으로 내세워서 말이죠.
세 번째는 임석이 수감된 분류심사원에서의 생존경쟁입니다. 임석이 분류심사원 29호 방에서 방장 해골의 노림을 받으며 방의 막내인 '꼽'으로 지내는 과정, 25호로 이감된 후 25호 방장 석민우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결국 석민우를 쓰러트리고 결국은 해골까지 제압한다는 고등학생 학원 폭력물이나 무협지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나름 읽는 재미는 있었어요.
그러나 이 세 번째 이야기는 임석 사건 이야기와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임석의 성장기 역할만 수행할 뿐이죠. 비중으로 따지면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와 맞먹거나 능가하는 수준인데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온갖 캐릭터의 설정까지 세세하게 설명해가면서 말이죠.
하긴, 이렇게 본 이야기를 흐리는 과한 묘사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임지선 변호사는 바람난 엄마를 아빠가 살해했다는 불우한 과거가 있다는데 내용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어요. 임석 부모님도 이혼 위기이며 구성구의 경우는 아버지가 구대철 회장인지 별장 관리인 임씨인지 모른다, 노승모 아버지는 세신사이다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 화룡정점은 책 서두에 등장하는 박기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내를 잘 만나서 피아제 시계를 차고 다니지만 원래는 테니스 꿈나무였다는 묘사가 한껏 이어지죠. 누구나 주인공으로 착각할 정도로요. 허나 본편에서는 하는게 전무합니다. 그동안 심리 묘사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고 장황한 작품은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등장 인물들 묘사가 많은 작품은 본 적이 없네요. 이런 부분만 다 들어낸다면 중편 이하 분량으로 충분했을겁니다.
에필로그 역시 불필요한건 마찬가지입니다. 임석이 사건 후 테니스 선수로는 실패하고 옛 테니스 아카데미 룸메이트로 세계적 스타가 된 호주 선수의 스탭이 되어 일한다는 내용인데 분량 잡아먹기에 그칩니다. 내용도 별로였고요. 그냥 임변과 만나서 맥주 한잔 하며 구성기와 노승모의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끝났어도 충분했어요.
마지막으로, 임석이 촉망받는 유망주라도 세계 랭커도 아닌데 스폰서들의 관심, 취재 열기는 너무 지나쳐 보였습니다. 지금 주니어 국내 챔피언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에요. 예전 퍽치기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지만 잘 풀려서 프로야구 SK에 지명까지 되었던 '위대한' 이라는 투수가 있었습니다. 야구팬들의 거센 반대로 지명은 철회되고 결국 폭력범이 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인데 왠만한 프로야구팬이 아니면 알지도 못할 사건입니다. 제가 봤을 때에는 이 정도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접대 테니스를 치다가 실제로 성접대를 했다거나 하는 스캔들이 아닌 이상요.
그런데 또 반대로 추리적인 서사, 설명은 부족합니다. 나름 복잡한 상황이 얽혀있고, 임변 (임 변호사)의 조사와 추리가 없는건 아닙니다. 레카차 운전수와의 대화 등은 분명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복잡했던 진상이 밝혀지는건 결국 구성구의 자백, 증언이라 많이 허무합니다. 동영상 촬영과 비밀 웹하드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운전석에 김유진의 피가 묻어 있었다는 정도로는 임석의 무죄 판결은 불가능했을겁니다. 이래서야 잘 짜여진 범죄, 법정물로 보기는 어렵죠.
이야기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모두가 미워하는 악의 화신으로 테니스 실력도 별 볼일 없다던 구성기의 변모가 대표적입니다. 급작스럽게 아버지의 악행을 고발할 정도로 정의감에 불타며 테니스 실력 역시 임석의 라이벌 급으로 격상하는는건 설득력이 너무 낮죠.
또 이러한 구성기의 활약은 이야기 전개에 치명상을 입힙니다. 이렇게 정의감을 불태울거면 애초에 임석, 그리고 김유진을 별장으로 부를 이유가 없어요. 노승모만 불러도 충분하잖아요. 차라리 노승모만 부르려고 했는데 걱정한 임석이 따라왔다면 모를까요. 몇 주가 지난 다음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숨긴 위치를 알려준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아울러 김유정 살인 미수 사건이 일어난 핵심인 김별의 핸드폰 (구대철의 추잡한 무언가가 찍혀 있을)을 마침 그날 찾아서 돌아갔다는 우연까지 겹치면 좋은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국내, 아니 세계적으로도 보기드문 주니어 테니스 관련 범죄 스릴러라는건 독특합니다. 저도 카트린느 아를레의 <<사라진 테니스 스타>> 외에는 접해본 적이 없네요. 여러모로 작가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분량이 너무 많아요. 캐릭터 설정, 이야기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고요. 지금의 절반 분량으로 임석 사건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한국 범죄물의 발전은 느껴지지만 또 아직 갈길도 멀구나 싶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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