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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30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도진기 : 별점 2점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4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룸살롱에서 일하던 정유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하던 아래층 남자 이필호가 함께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정유미의 집에 침입한 이필호가 정유미를 찌른 뒤, 정유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이필호를 살해한 것 처럼 보였지만 이유현 반장은 아파트 경비 조판걸을 기소했다. 조판걸이 고진의 도움으로 풀려난 후 고진은 진범이 따로 있을거라며 자기 추리를 들려주었다. 이유현 반장은 고진의 추리대로 정유미의 애인 김형빈에 대한 수사에 나섰지만 김형빈의 탄탄한 알리바이는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전작에 이어 읽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범인이 아랫층 이필호 집 베란다를 통해 이필호 집으로 들어간 뒤, 내부 계단으로 정유미 집에 들어가 정유미를 살해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이필호가 죽기 전 했다는 말 - 정유미를 자기 것으로 하겠다 - 과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 등으로 설득력있게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고요. 윗층 남자가 들었던 '쨍그랑' 소리는 이필호의 열쇠를 베란다를 통해 던져 넣을 때 났던 소리라는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열쇠의 존재가 이필호 범인설을 무력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잘 짜여진 트릭이라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김형빈은 '노인 성애자'로 그 대상이 정유미의 가정부인 할머니 황금순이었으며, 질투에 눈이 먼 황금순이 정유미를 살해했다는 진상과 반전이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비현실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김형빈의 이상한 성적 취향은 정유미의 룸살롱 동료들 증언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도록 전개됩니다. 김형빈 모친 집에 강도가 침입했던 사건도 황금순의 질투 - 모친을 또 다른 애인으로 오해 - 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요.

그러나 이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깁니다. 우선 이유현 반장이 아무리 보아도 타당한 이필호 범인설을 놔두고 왜 제 3자 범인설을 포기하지 않는지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형사들의 대화로 어떻게든 수사의 당위성을 펼쳐보려 하지만, 이필호가 범인이라는 심증만 굳게 만듭니다. 근거라는게 예를 들면 피해자가 죽기전 "강도!"라고 외쳤기 때문이라는데, 복면을 하고 침입했다면 누군지 모르는게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 외의 주장들 역시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이보다는 이필호가 범인이겠지만 뭔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졌던 이유현이 고진에게 의견을 물었고, 고진이 사건 이야기를 들은 뒤 이필호 집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다른 누군가가 상황을 조작했을 거라고 알려주는게 훨씬 바람직했습니다.
외부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필호가 범인일텐데, 경비원 조판걸을 범인으로 기소한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증거가 없다고 이유현 스스로도 인정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건 공권력을 가장한 폭력입니다. 고진의 몇 가지 주장에 반론도 하지 못하는 이유현의 모습은 한심과 무능 그 자체였고요.

이후 고진이 개입하여 김형빈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추리를 들려주면서부터는 더 기가 찹니다. 누가 봐도 김형빈이 가장 수상합니다. 정유미가 번 적지 않은 돈은 김형빈에게 흘러들어갔고, 김형빈은 현관 비밀 번호를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유현의 수사를 통해 김형빈이 범인이 아니라는게 너무 빨리 밝혀져서 전개가 이상해집니다.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는 이유현의 무리한 수사와 김형빈의 반론으로 이유현이 망신당하는 과정이 반복될 뿐이니까요. 이런 점에서는 신인 작가라는 티가 물씬 나더군요.

"조판걸", "황금순"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이름들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아래 <<아오이 호노오>>에서처럼 이름만 가지고도 캐릭터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굉장해! 이름만 읽어도 이미지가 떠오른다! 네이밍 능력이 장난아니야! 
이것이 일류 원작자의 힘이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다소 변태적이면서 엽기적인 동기가 엮여 있다는 점에서는 에도가와 란포나 요코미조 세이시와 같은 일본 변격물 느낌도 전해주는데, 이런 작품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테고요. 그러나 전개면에서는 미숙한 티가 많이 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9/05

가족의 탄생 - 도진기 : 별점 2.5점

가족의 탄생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먹고 사는 김진구에게 여자친구 혜미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다. 얼마 전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일식 요리사 이교준의 의뢰였다. 그는 아내의 사고에 두 처형이 관련되어 있다며, 갓난 자신의 딸 아름이 100억대인 장인의 유산을 독식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구는 젊은 새어머니의 유산까지 아름의 것으로 해 줄것을 약조하며, 이교준 명의의 3억짜리 집을 담보로 잡았다.

그러나 두 처형도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며 이교준을 의심한 나머지, 이런 류의 범죄에 해박하다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고용하고, 김진구와 고진의 두뇌 게임이 시작되는데...

눈에 뜨일 때 마다 집어들고 읽게 되는 도진기 작가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해결사 김진구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함께 등장한다는게 특징이고요. 그러나 공동 주연 작품은 아닙니다. 각자의 의뢰인이 적대하는 관계라서,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과 괴도 키드' 라기 보다는 '소년 탐정 김전일 대 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에 좀 더 가까운 셈이지요.
이 중 주인공은 김진구입니다. 고진은 남고운, 남문영 자매로 부터 받은 '제부의 유산 상속을 막아달라' 라는 의뢰만 해결하고 빠지는 반면, 나머지 사건과 유산 상속 정리는 김진구가 해결해버리고, 작 중 비중도 두 배 가량 될 정도로 높으니까요.

그래도 남유정 사망 사건 해결은 나름 둘이 함께 힘을 합치기는 합니다. 이 사건에서 유산 상속 문제가 비롯된건 물론, 추리적으로 작품의 핵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처음에는 단순 교통 사고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교준이 동승하여 남유정이 운전하던 미니가 김순옥의 모하비와 추돌했고, 조수석에 탔던 이교준은 생명을 건졌지만 남유정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탓에 사망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사건은 이교준이 일으킨 살인 사건으로, 진구의 말에 따르면 '3중 방어막'이 쳐진 교묘한 계획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어막은 원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인 혐의를 찾아보기 힘든, 단순 교통사고로 보이도록 꾸민 겁니다. 그러나 이교준이 김순옥과 불륜 관계라는게 밝혀져 첫 번째 방어막은 뚫리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두 번째 방어막은 '고의적인 충돌 사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불륜을 목격한 남유정이 과속하여 추격하다가 모하비에 추돌하여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는 주장이에요.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남유정이 고의적으로 추돌하게 만들었다는건 증명할 수 없어서 단순 사고로 처리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그러나 남유정의 목에 교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살인이라는게 밝혀진 뒤 마지막 방어막인 '정황의 방어막'이 등장합니다. 이교준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김순옥의 모하비에 타고 있어서 범행을 저지르는게 불가능했다는게 정황입니다. 하지만 진구는 남유정 목의 교살 흔적은 왼손잡이의 흔적인데, 가족 중 왼손잡이는 이교준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CCTV에 찍힌 모하비는 추돌 부위가 이미 부숴져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모하비와의 추돌은 조작된 것이고,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을 목 졸라 죽인 뒤, 자기 무릎에 시체를 앉히고 전봇대에 추돌하여 사고를 위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3중 방어막이라는 말만 그럴듯하지, 그다지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실제 자동차 추돌 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점, 사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점, 꽤 장기간 불륜 관계였던 김순옥과 이교준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점 등 사고 발생 시 수사에 나섰던 경찰의 무능이 확실한 탓입니다. 진구의 말 대로 조금만 파고들면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결합된 수상한 사건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소한 명확한 사인은 검증했어야 합니다.

추리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고진과 진구가 사고 전 CCTV를 입수하여 이를 단서로 이교준의 공작을 증명하는게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니가 한 쪽으로 쏠린걸 과학 수사까지 이용하여 검증한 디테일은 좋지만, 이게 이교준의 범행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문제는 큽니다. 진구가 이교준이 범인이라며 쏘아붙이는 것들 - 범인은 남유정을 목졸라 죽이고는 미니에 싣고 달리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살인자는 왼손잡이인데 가족 중 이교준만 왼손잡이다. 미니는 남유정 남편인 이교준의 불륜녀가 운전하는 모하비와 부딪혀 사고가 난다, 그 모하비는 CCTV를 통해 보니 사고 전에 이미 충돌 부위가 부서져 있었다 등등등 - 은 모두 정황 증거 뿐이에요. 왼손잡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증거도 아니고요. 제 생각에 이교준이 유죄 판결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추리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유산 상속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법조인 출신 작가라 그런지, 현행법에 기초하여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덕입니다. 고진과 진구의 활약도 대단하고요.

우선 고진이 의뢰에 따라 이교준의 친권을 박탈하여 아름이 몫의 상속분을 빼앗습니다. 이교준의 딸 아름이가 사실은 남유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불륜녀 김순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는걸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아름이의 친부임을 주장한 남유정의 불륜남 원경호 소동에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증거를 확보한 거지요.
또 진구와의 조사 결과 공유를 통해,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 사망 후 남유정 - 원경호의 딸인 진짜 아름이를 자신과 김순옥 사이의 딸로 바꿔치고, 아름이를 입양 기관에 보냈다는 걸 알아냅니다. 아내가 죽은 뒤, 가사 도우미를 해고해서 아름이가 바뀐걸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장님이고, 다른 친척들은 아름이에게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이는 진구가 이교준의 집을 방문하는 제일 첫 장면에서, 부부의 사진은 있지만 아이 사진이 없는 복선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친부가 아니더라도, 아름이는 부부 사이의 딸이므로 이교준이 친권자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자기 친딸과 바꿔치기하고 입양 기관에 보낸 사람에게는 친권 자격이 있을리가 없으니 친권 상실 청구를 하면 이교준은 아름이 몫을 못 받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유정 몫의 대습 상속은 유지되는데, 이 역시도 진구가 남유정을 살해한건 이교준이라는걸 밝혀내어 상속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앞선 순위나 동순위 상속인을 살해하면 상속권을 잃는 법 때문입니다. 결국 이교준은 빈털터리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의 전개인데, 그 뒤 다른 상속인들 모두의 상속권이 날아가버리는 전개는 예상치 못했네요. 새어머니 유재연이 낙태를 한게 발단입니다. 그녀는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갖지만 이런저런 부담감으로 낙태를 선택합니다. 이 낙태에 그녀를 미워하던 두 의붓딸 남고운, 남문영 자매가 진구의 권유로 모처럼 동행했고요. 그러나 유재연이 가진 아이가 남현호 할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법률상으로는 엄연히 부부간의 아이이고 적법한 상속인입니다. 즉, 상속인을 살해한건 마찬가지라 그녀도 상속권을 잃고, 낙태에 동행했던 두 딸도 낙태를 도운 공범으로 상속 자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즉, 남유정의 딸 아름이가 유일한 상속인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낙태가 상속을 막는다는건 정말이지 처음 접해보았는데, 완전 대박이네요.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작가라 쓸 수 있던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의뢰대로 상속을 막은 진구가 의뢰인 이교준에게 당신이 살인범이라는걸 밝혀낸건 의뢰와 관계 없었으니 보수를 챙기겠다며 쿨하게 마무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어요. 가족이 모두 파멸하는 결말인데, 워낙 많은 분량에 걸쳐 비호감을 끌어온터라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 자신만의 가족을 꿈꾸었던 이교준, 그리고 가족이지만 각자 자기 생각만 했던 남씨 일가족이 무너진다는건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러나 이 유산 상속 과정가 전부 잘 짜여져 있는건 아닙니다. 콩가루 집안이 모두 몰락한다는건 지나치게 전형적인데다가, 남고운, 남문영 자매는 악인도 아니기에 결말이 썩 개운하지 않거든요. 막내 동생을 제부가 죽였다고 의심하여 제부에게 유산이 가는걸 막으려고 노력하는데,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으니 그녀들은 잘못한게 없습니다. 오히려 새어머니 유재연의 낙태를 도와준건 순전한 선의였기에,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악당 김진구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김진구가 작중에서 벌인 활약과 행동은 모두 이교준의 범행을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이교준의 의뢰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건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유재연의 임신과 낙태, 그리고 진구의 권유를 받은 남씨 자매가 낙태 수술에 동행했기 때문으로, 진구의 활약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걸 보면 그다지 정교하게 잘 짜인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부부가 모두 불륜을 저질러 같은 시기에 혼외자를 낳는다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고, 우연과 작위적인 설정이 많이 결합된 전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낙태를 통해 기존 알고 있던 유산 상속의 상식을 깨 버린 아이디어 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 한데,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진짜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서두와 에필로그에 "정신자살"의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다음 작품과 연결시키는 구성을 갖추고 있는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2023/09/24

붉은 집 살인사건 - 도진기 : 별점 2점

붉은 집 살인사건 - 4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진은 암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빠 남성룡의 유산 상속에 대해 의뢰한 남광자를 만나러 우면동 붉은 집에 방문했다. 붉은 집 1층에는 서씨 가문, 2층에는 남씨 가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진은 1순위 상속자인 남성룡의 딸 남진희가 모든걸 상속받기에 상속은 오빠와의 협의가 전부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과거 있었던 2건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과거 서씨 가문의 가장 서판곤이 남씨 가문의 모친 이분희와 재혼 후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백솔 사체로 발견되었던 사건과 서판곤의 아들이자 현재 서씨 가문의 가장 서태황의 아내 박은순이 강도에게 살해당했던 사건이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며,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날거라 여겼던 고진의 직감대로 6개월 뒤 남진희가 실족사라는 형태로 사망했다. 고진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미모의 맹인 남진희에게 매료되었던 탓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것을 결심하고 친구이자 우면동관할서의 반장 이유현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과거 판사였던 도진기 씨의 데뷰작이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작품. 제목이 달라져서 몰랐는데, 10여년 전에 읽었던 <<어둠의 변호사>>와 같은 작품이더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바뀐 제목에 낚여서 다시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주요 트릭과 진상은 대충 잊어버렸던 터라 새롭게 읽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네요.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트릭과 두뇌 싸움, 복선이 가득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크게는 아래와 같이 서형일이 만든 트릭 세 가지, 그리고 남성룡의 계획 두 가지가 눈에 뜨입니다.

서형일의 트릭
  1. 박은순 살해 당시 알리바이 트릭
  2. 남진희 사건을 일으킨 원격 조종 트릭
  3. 남진희 사건 당시 알리바이 트릭
남성룡의 계획
  1. 서형일의 다아잉 메시지를 이용하여 서태황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계획
  2. 서형일을 움직여 남진희를 살해하도록 만든 계획

서형일의 첫 번째 알리바이 트릭은 유럽 여행 중 살인을 위해 이미 한국에 들어왔지만, 유럽에 남아있던 지인애게 당일 한국 날씨를 확인하여 엽서를 보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순히 '서형일의 필적'이 근거라는건 증거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한국 날씨 예보 종류는 몇 개 없기에 날씨에 대해서만 여러가지로 다르게 기입한 엽서를 준비해서 - 같은 내용으로 "맑음", "흐림", "비" 등으로 만들어 놓는 식으로 - 해당 날짜 예보에 맞는 엽서를 골라 보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인어공주 동상에 돼지 피를 뿌린 것도 서형일의 공범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현장에서 체포되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최대한 몸조심하면서 숨어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조작까지 해 가면서 엽서를 만들어 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남진희 침실 구조를 이용하였습니다. 남진희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침대 위치를 정 반대, 대각선 위치로 옮겨놓았던 겁니다. 원래 위치에서 문을 열면 거실로 나갈 수 있지만, 바뀐 위치에서 문을 열면 계단으로 추락하도록요. 수면제, 방의 구조 등 여러가지 단서와 상황을 잘 조합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침대 위치를 옮기는 조작을 위해 사고 전날 부산으로 이동할 때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입니다. 상, 하행선 고속도로 휴게소를 오갔다는 다소 간단한 내용이지만 실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었어요.
 
남성룡의 첫 번째 계획은 서형일이 남긴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되었다는걸 알고 녹음기를 그대로 두었던 겁니다. 자신이 서형일의 친부라는건 아무도 모르니, 서형일의 양부 서태황이 죄를 뒤집어 쓸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진상과 동기 를 밝히는 핵심 소재가 된다는 정메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조종하기 위해 유언장 정보를 흘려 살의를 부추켰다는건 뻔했지만, 언제나 설득력을 보장하는 동기인건 분명하고요.

하지만 확실히 처음 읽었을 때 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일단 '잘 쓴' 작품은 아닙니다. 묘사가 튀는 부분이 많고, 고진과 이유현의 추리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진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끌고가는 맛이 부족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별로입니다. 일본 변격물을 연상케하는 엽기 범죄가 명문가 - 서울대학교 교수와 2성 장군 집안이니... - 에서 이어진다던가, 맹인과 트랜스젠더가 혼재하는 복잡한 가족 설정들 모두가 비현실적이었거든요. 거의 마지막까지 서태황과 서두리를 악역으로 묘사하는건 '얘네들이 범인일거야! 그렇겠지?'라는 작가의 의도가 심하게 드러났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피는 유전된다는 이론을 작품 전체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루할 뿐더러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전혀 찬동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격 추리물을 추구한 작풍 탓이겠지만, 작 중에서 주요 정보를 노골적으로 알려주어서 추리하기 쉬웠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뭔가 상세한 묘사가 있거나 하면 금새 이게 단서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남진희가 추락사한 침실 현장에 대한 극도로 상세한 묘사, 그리고 박은순 사건 당시 서형일의 알리바이에 관련된 묘사들이 대표적입니다. 남진희 사건은 묘사만 보아도 트릭은 잘 몰라도 수면제로 깊이 잠든 남진희와 방의 구조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형일의 알리바이도 신문 기사를 통해 곧바로 가짜라는게 드러나고요. 날씨에 대해서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몰라도, 범인이 서형일이라는건 금방 알 수 있어요.
남진희 사건 때 서형일이 톨게이트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도 알리바이 조작일거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작품 발표 시기는 2000년대 이후인데, 이 때 고속도로 CCTV가 없었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무슨 차를 탔는지를 알면 고속도로를 이용한 서형일의 알리바이는 금방 깨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경찰 수사를 거의 없다시피 묘사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서형일은 유럽 여행에서의 알리바이, 고속도로 휴게소 알리바이 모두 협력자가 필요했습니다. 주변 인물과 연락 내용만 살폈어도 협력자를 알아내어 범행을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그런 수사는 벌였어야 했는데 수사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살해하고 그 죄를 서태황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된건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 다이잉 메시지(?)만 없었어도, 남성룡 역시 용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의가 넘쳤다 한들, 이렇게 무모하게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0여년 전 보다 감점하여 2점입니다. 데뷰작인 탓에 여러모로 욕심을 부린 티가 많이 납니다. 서형일의 억지스러운 알리바이 트릭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 빼고, 남성룡이 남진희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 - 아내가 떠나면서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 - 와 괜찮았던 남진희 원격 살해 트릭만 가지고 짧고 깔끔하게 다듬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17/04/14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도진기 : 별점 2.5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6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는 미모의 중년 여인 김명진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명진은 20년 전 죽은 남편 신창순, 그리고 남궁현, 임의재, 한연우 네 명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나, 장난스러운 내기 끝에 신창순과 결혼했었다. 과거의 남자 세 명과 김명진의 동생 김해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움에 나섰다...

현직 판사이자 소설가로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 해도 무방할 도진기의 장편으로 시리즈 캐릭터인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합니다. 

제가 읽었던 이전의 '어둠의 변호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법정에 선 고진'의 활약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법정 미스터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속에서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재판을 통해 피고인을 유죄로 만드는데 정평이 난 실력자 조현철 검사와 불꽃튀는 대결을 벌이거든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서로 배심원을 설득하고, 재판을 유리하게 이끄는 배틀이 아주 볼 만 합니다. 조현철 검사가 은근슬쩍 끼워넣었던 거짓말 탐지기 조사 결과를 뒤집는 변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말싸움도 현란하기 그지 없고요. 작가가 현직 판사이기에 쓸 수 있었던 묘사들,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재판 속행과 보석 신청 등 모든 상세한 설정들이 그러합니다. 이 정도면 해외 유수의 법정 미스터리물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만 하지 않나 싶을 정도에요.

법정에서의 대결이 중심이라서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수많은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딱 한 가지 등장하는 트릭의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신창순 살해에 사용된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체가 발견된 이유와 범인 임의재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역업자라는걸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하우더닛" 물로서의 진가도 발휘됩니다. 결국 유럽에 있는 사람만 가능한 트릭이기에 범인이 임의재다!는 건데 꽤 설득력 있었어요.

지고지순한 일종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6명의 청춘들이 처음 만난게 격동의 1990년대라 더 와 닿았고요. 저 역시 1990년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지요. 이 사랑의 중심에 놓여있는, 작가의 이상형을 투영해 놓은 듯한 김명진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팜므파탈과 정 반대인, 순진무구한 천사같은 캐릭터를 잘 그려 놓았거든요. 작중 한연우의 표현을 빌자면, 오디오 기기에 취미를 갖는 사람들에게 마크 레빈슨 같은 존재랄까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작위적 장치들이 많이 거슬립니다. 너무 '소설'을 의식한 티가 물씬 났어요. 신창순이 아내를 학대하던 인간 쓰레기였다는 중요 정보를 나중에 밝히는게 대표적입니다. 살인의 가장 큰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변론을 맡은 변호사에게 그러한 정보를 숨긴건 말도 안돼지요. 임의재가 차용증을 가지고 김명진을 겁박하는 장면 역시 나중에 고진과 이우현의 인기척을 느끼고 쇼를 했다고 밝혀지지만 억지스러웠고요. 독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 묘사였습니다. 그 외 많은 부분에서 작가가 한연우를 범인이라고 유도하는 것도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트릭도 순간 이동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디테일은 그닥입니다. 1주일에 걸친 운송기간 동안 사후 경직으로 뻣뻣해진 시체를 어떻게 무마했을지가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상당한 재산가로 묘사되는 임의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현지 조사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강도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언급되는데, 누군가를 고용하는게 훨씬 쉽고 간편했을겁니다. 중국인들이 당한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처리되었을 확률도 높고요.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기가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20년이 흘렀습니다. 과거가 다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백야행" 시대에나 먹혔음직한, 자신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여자를 위한 순애보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에요. 그나마 "백야행"은 현재진행형이기나 했지, 20년 후에도 그렇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달리기 시합에 이어서 김명진이 술을 먹은 후 강제로 관계를 가진 탓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는 설정도 영 와닿지 않더군요. 1990년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덧붙이자면 심장 판막증이 있는 임의재가 장거리에 도전할 만큼 김명진을 사랑했다는 것도 작위적이라 별로였어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랑했다면 중간에 포기하면 안되는거잖아요? 차라리 뛰다가 쓰러져 기절이라도 하던가..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대 착오적인 순애보는 거슬리며, 작위적인 요소가 많아 감점하지만 미녀와 청춘,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고 법정 미스터리물로는 평균 이상은 되는 작품입니다.
블라디보스톡과 한국을 오가는 스케일도 크고 법정물로는 충분히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미녀의 존재도 확실하니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네요.

2012/02/26

어둠의 변호사 - 도진기 : 별점 2.5점

어둠의 변호사 - 6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둠의 변호사라 불리는 고진은 남광자라는 여인에게서 오빠의 유산 상속과 관련된 의뢰를 받았다. 유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남씨 집안과 같은 저택 1층에 거주하는 서씨 집안 사이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참극, 그리고 2년 전 살인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흥미가 생긴 고진은 남씨 집안의 무남독녀 남진희를 만난 뒤, 시각장애가 있는 그녀를 돕기 위해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남진희가 살해당하는데...

오래전 남씨, 서씨 가문에서 벌어진 이분희 살인사건, 2년 전의 박은순 살인사건, 남진희 살인사건, 마지막의 서형일 살인사건까지 총 4건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며, 의외의 진상과 함께 다양한 트릭이 사용된 한국 본격 추리물입니다.

복잡하고 치밀한 인간관계, 과거에서 이어진 비극, 악마적인 핏줄에 의한 범죄 등 여러 비현실적인 설정 -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르네요 -을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 녹여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가문이 얽히게 된 이유인, 전 남편이 도망간 뒤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한 이분희와의 관계라든가, 서형일을 입양시킨 이유 등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이거든요. 주요 등장인물의 설정, 주택 명의, 집을 나간 아버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설명 등도 상세하게 덧붙여 설득력이 높습니다.

트릭도 뛰어납니다. 이분희 사건의 진상도 놀랍고, 서형일 사건의 다잉 메시지도 설득력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박은순 사건과 남진희 사건 두 건에서 사용된 여러 트릭은 풍성하면서도 추리 애호가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박은순 사건에서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위조 여권 전문가’라는 특이한 전문가가 필요했다는 점, 그리고 현지에서 벌인 돼지피 사건은 경찰에 검거될 위험성이 컸다는 점(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위조 여권 등이 밝혀지며 모든 것이 끝장날 상황)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또한, 남진희 사건의 경우 별장의 설계 자체와 함께 수원 톨게이트에서의 소동 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러나 이는 극의 흐름을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개의 문제가 더 컸는데, 탐정 역할을 맡은 고진을 비롯해 용의자로 등장하는 서씨 가문의 형제들의 캐릭터가 천편일률적이었고,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가 지나치게 알리바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현대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지루해집니다.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를 독자들이 끝까지 가져가도록(특히 서두리) 구성한 것 같지만,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어요. 차라리 서씨 가문의 형제들을 동시에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소거법 형태로 진행했더라면 더 흥미로웠을 겁니다.

단서 제공 방식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유언장의 첫 번째 버전이나, 서형일의 배낭여행 당시 친구의 행적 등 당연히 조사되었어야 할 단서들이 뒤늦게 등장하는데, 현대 경찰 수사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개에 우연이 많이 개입된 것도 본격 추리물로서는 감점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더부살이하는 노인의 정체와, 그로 인해 밝혀지는 저주받은 핏줄의 정체가 우연히 밝혀지는 과정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외에, 판사 출신 작가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법률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는데, 단점은 아니지만 전문 분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점을 많이 언급했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소설일 뿐만 아니라, 완성도와 트릭 면에서도 한국 추리소설 장르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첫 장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놀랄 만한 수준이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와 시리즈였습니다. 시리즈 후속작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2012/04/23

정신자살 - 도진기 : 별점 1.5점

정신자살 - 4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길영인은 아내 한다미의 가출 이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인터넷에서 '정신자살연구소'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정신을 파괴하여 자살 없는 인생을 살게 해 준다는 연구소 소장 이탁오 박사의 말에 혹한 길영인은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시술비를 지불하고 정신자살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시술 이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에 더욱 집착하며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작품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건너뛰게 되었네요. 전에 읽은 "어둠의 변호사"가 요코미조 세이시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먼저 좋았던 부분부터 이야기해보죠.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둠의 변호사"와 비교할 때 소설적인 완성도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편인 덕분이겠죠? 문체나 전개가 모두 세련되어졌습니다. 길영인이 "정신자살"이라는 독특한 말에 이끌려 이탁오 박사의 연구소에 찾아가는 과정과 정신자살 시술 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를 파헤치며 진상을 더듬어 가는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전작과 달리 고진과 이유현 형사 콤비의 캐릭터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진의 가벼운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채로웠고요.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인 트릭도(중반까지는) 괜찮은 편입니다. 4년 전 이탁오 박사가 저지른 첫 사건인 박재성 - 우호선 사건에서의 트릭은 장편에서 캐릭터 소개에 사용되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후 신재인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트릭도 복선이 잘 설계되어 있으며, 신재인 집에서의 소실 트릭도 괜찮았어요.

또 전작에서의 아쉬웠던 점 - 판사가 쓴 작품이지만 실제 법률을 이용한 부분이 별로 없다 - 를 초반 염상우의 친족상도례 작전에서 잘 써먹습니다. 때문에 여기까지는 별점 3점, 아니 4점 가까이 줄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나... 마지막 진상과 반전이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일단 다중인격이라는 길영인 사건의 진상은 현실적이지 않고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요. 1인칭 시점에서의 수기와 전개를 통해 서술 트릭 같은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한데, 뜬금없이 밝혀지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나마 두 가지 - 1년 전 프리버드의 전화와 펜션 사건에서의 길영인 전화 - 단서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리 띄엄띄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한초록이 끝까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뭐 다중인격 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다음, 펜션에서의 살인 사건에서의 과일을 이용한 트릭은 어떨까요? 그림 몇 장 본다고 과일을 가지고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럴 능력이 있다면 수박을 깎아서 사람 모양을 만들거나, 아니면 화장실 휴지를 적셔서 종이찰흙을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인간거미 합체 장면은 정말이지 나오지 않는 것만 못했습니다. 작품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설픈 에도가와 란포 흉내 내기에 불과했으니까요. 게다가 그 이유가 체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극치. 다시 병원으로 보내 둘을 나눠 놓으면 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탁오 박사도 불법 시술로 구속되었을 테고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덧붙이자면, 이탁오 박사 캐릭터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작품에 현실감을 심는 데는 오히려 장애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초, 중반부의 전개는 좋았고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도 있으며, 세 번째 장편다운 완성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특히 마지막 장면 두 페이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추리소설의 현재이자 미래를 나타내는 작품이고 시리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일본 추리소설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해 보이네요.

2013/09/21

순서의 문제 - 도진기 : 별점 2.5점 (그러나 강추!)

순서의 문제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현직 판사이시기도 한 추리소설가 도진기씨의 단편소설. 한국 작가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변호사 고진 시리즈 장편(이거라던가 이거)은 트릭은 인상적이었지만 전개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워낙에 트릭이 뛰어난 작가라서, 차라리 트릭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단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이 책은 그러한 저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작품별 편차가 커서 평균이 깎였지만, 뛰어난 작품은 한국 추리문학 역사에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한국 추리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순서의 문제"

대리운전을 하는 주인공 진구에게 한 손님이 원주 터미널에서 전화 한 통만 걸어주면 50만 원을 준다는 알바를 제의했다. 의뢰를 수락한 진구는 알바의 이면에 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서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전 법대생이자 철저한 이성주의자인 주인공 김진구가 첫 등장하여 거액이 얽힌 범죄의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협박하는 이야기. 안티히어로 스타일의 주인공 캐릭터가 독특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서 단순히 원주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과 집주소, 주변 탐문에서 시작하는 개인적인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됩니다. 강현의 동기인 이른바 '순서의 문제'가 적절하게 사용된 것도 마음에 들고요. 트릭도 순간이동 트릭을 두 가지나 복합해서 사용하고 있어서 풍성합니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시체를 이동시키는 방법의 설득력이 약간 낮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강현을 협박하는 장면이 작위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단점은 사소할 뿐이며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대모산은 너무 멀다"

진구가 여자친구 혜미가 목격한 지하철의 수상한 남자의 행적을 가지고 순수한 추리를 펼쳐보이는 안락의자 탐정물.

추리적으로 논리정연하고 그럴듯하기는 하나 정말로 그것이 사실로 맞아떨어졌다는 것은 좀 억지스럽더군요. 자기 얼굴이 할퀴었다고 손을 잘라서 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정말이지 몇 명이나 될까요? 그것도 잘 모르는 산으로 버리러 간다... 솔직히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진구의 추리는 그럴듯하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추피추의 꿈"

진구가 혜미와의 마추피추 여행에서 비행기를 놓친 뒤의 이야기를 다룬 일상계.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려우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결국 목적지는 같다는 콜럼버스적인 마인드가 돋보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티켓다방의 죽음"

해미의 외숙부가 출장 중 여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결과는 자살. 그러나 보험금 문제가 있어서 혜미의 부탁과 보험금의 20%를 조건으로 진구는 타살 여부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진구의 목적은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라 외숙부 양문요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걸 경찰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라는 설정부터가 독특합니다. 

진구가 벌이는 여러 가지 작전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흉기 집중 효과를 응용하여 목격자인 다방아가씨 유현아에게 다른 사람 사진을 보여주어 증언을 헛갈리게 하고, 외숙부 양문요가 첫 자살을 시도할 때 1/3 남아있던 청산가리가 시체 발견 시에는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타살설을 주장하는 식인데 경찰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럴 듯 했습니다.

결국 노력이 벽에 부딪힌 뒤 우연히 얻은 단서를 바탕으로 진상에 접근하는 과정과 보온병을 이용한 작전 역시 탁월했고요.

단점이라면 여관주인 여춘길이 5만 원권을 1만 원권으로 바꾸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우연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춘길 방에 침입했을 때 관련된 단서를 발견했다는 식으로 전개했더라면 더 깔끔했을 것 같습니다. 여춘길이 1만 원권으로 바꾼 동기도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지폐에 청산가리를 묻힐 생각을 하느니 돈을 숨긴 장소에 숨어 있다가 미행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 행동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마지막에 첫 등장에 보여준 지폐를 이용하여 극적 반전과 함께 독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결말도 아주 좋은,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신 노란방의 비밀"

살인범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한 소녀 은비의 증언은 그곳이 노란색 방이었다는 것.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의 집은 노란색과는 거리가 멀어 경찰 수사가 난항을 겪는데...

공감각을 가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소리와 시각의 치환을 다룬 소품. 제목은 거창하나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벌이는 느낌이라 딱히 와닿지는 않았어요. 외려 진구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더 재미있었던, 쉬어가는 작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뮤즈의 계시"

진구, 해미는 살인 사건의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해미의 직장 동료 김주희와 그의 동거남 하성남의 집들이 파티 때, 하성남의 아내 선혜영이 살해된 사건 재판이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시체를 옮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구, 해미와 함께 있으면서 살인을 저질렀는지? 라는 두 가지 수수께끼를 만든 트릭이 돋보입니다. 특별한 곳에 위치한 집과 그 집의 구조도를 잘 이용한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이 이용되었는데 아주 괜찮았거든요. 결정적 단서가 되는 USB 음악 재생 아이디어는 정말 기가 막혔고요. 트릭의 정교함과 아이디어는 고전 황금기 걸작에 비교될 만 합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해서 팬에게 서비스하는 모습도 좋았고, 작가의 경험을 잘 살린 법정 장면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과연 살해 현장에서 시체를 옮겼다는 것을 현대 법의학이 알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생기기는 하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최고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환기통"

보석 도둑을 쫓던 경비원이 살해된 사건의 진상을 다룬 소품.

진구와 해미가 처음 만나게 된 당시에 벌어졌던 사건을 그리고 있는데 트릭은 실제 사건 현장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되었더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에 그다지 눈여겨볼 건 없습니다.

오히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과정이라던가(어차피 체포되었으니까), 환기통 안에서 구멍을 내었는데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어색한 부분이 거슬릴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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