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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3

앙코르와트 - 후지하라 사다오 / 임경택 : 별점 2.5점

앙코르와트 - 6점
후지하라 사다오 지음, 임경택 옮김/동아시아

주석, 인용, 참고 문헌 포함하여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앙코르와트의 '발견', '발굴', 그리고 '연구와 관리' 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대한 분량만큼 담고 있는 정보는 알찹니다. 책은 19세기 후반, 앙코르와트의 문물을 프랑스에 소개한 들라포르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일종의 보물 탐사와 같은 느낌으로 유적의 문물을 반출한 인물입니다. 식민지의 주인인 프랑스가 유적을 보호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약탈꾼에 불과하지만, 앙코르 유적의 미적 가치가 높다는걸 서구 사회에 알린 공적은 있습니다. 직접 쓴 저서와 삽화는 물론, 평면도 등을 바탕으로 유적의 조화로운 구조를 잘 알린 덕분이지요. 또 발굴되거나 발견된 조각을 가지고 상상하여 그가 그려낸 바이욘 사원의 복원도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당시 고고학 수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연구였다는 점에서 노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 해요. 만국 박람회에서 유적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등 이 유적을 알리는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했다는 것도 그의 노력을 증명하는 사례이고요.

들라포르트 사후 소개되는 내용은 주로 '극동학원'의 활약상입니다. 앙코르 유적의 연구를 주도적으로 행한 단체로, 유적의 총 책임자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이 된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이는 프랑스가 고고학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과거를 소생시키고, 중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했기 대문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할 때, 한반도와 중국 북부에 걸쳐 대규모의 고고학 조사를 진행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극동학원 초기 프랑스인의 태반은 고고학자도, 미술사가도, 학자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군인이나 관리와 건축가가 식민지 고고학에 매료되어 경력을 쌓아나갔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네요. 이 뒤로부터 세데스, 골루베프 등 주요 인물들과 반테아이 스레이 유적 등에 대한 연구 결과 등 극동 학원에 관련된 대한 수백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설명이 이어지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이후, 일본이 잠시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했을 때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지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책에 따르면 극동학원의 연구는 묻혔던 유적을 새로이 발굴하고, 폐허를 보수하는 등 유적 보존 등에 나름 기여한 긍정적 결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을 관광객 등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는 등의 도굴과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네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상납이라던가, 일본과의 고미술품 교환을 통한 미술품 확보까지 행하였고, 심지어 유명 작가인 앙드레 말로조차도 1923년 23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를 방문하여 유적에서 몰래 부조물을 잘라내어 밀반출하려다 실패했다는 일화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몰염치와 야만에 치가 떨릴 뿐입니다. 말로가 체포되어 재판에서 패소한 이유는 극동 학원의 독점적 지위를 훼손했기 때문일 뿐, 그 행위 자체가 비난받은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조선 등을 식민지로 지배하여 비슷한 원죄가 있는 일본의 학자가 견지하여 책을 썼다는게 조금은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발견과 발굴,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들라포르트 이야기는 모험탐험 이야기와 별 다를게 없고, 연구를 거듭해가며 새로이 정체를 드러내는 앙코르 유적의 여러가지 정보들과 새롭게 발견된 멋진 유물들, 이들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 등 볼거리가 많은 덕분이지요. 사료와 도판 역시 최고 수준이고요.

허나 제목만 보고 '앙코르와트'에 대한 역사서겠구나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책이었습니다. 저는 앙코르와트라는 유적 자체의 역사가 궁금해서 구입했지, 앙코르 유적의 연구사가 궁금해서 구입한건 아니란 말이죠. 35,000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앙코르와트 연구사에 관심이 있으실 분들 외 저같이 앙코르와트 유적 자체에 관심 가지신 분들은 실망하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2004/12/11

부활하는 군단 1,2 - 웨난 / 유소영 외 : 별점 4점

부활하는 군단 1 - 8점
웨난 지음, 유소영 외 옮김/일빛
부활하는 군단 2 - 8점
웨난 지음, 유소영 외 옮김/일빛

"진시황이 즉위하여 여산에 치산 공사를 벌였다... 지하수를 세번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녹인 구리를 부어 "곽"에 이르게 했다...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 장치가 된 쇠뇌를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도록 했다. 수은으로 온갖 하천과 강, 바다를 만들고, 기계를 이용해 수은이 흐르게 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했다... (사마천, 사기)"

중국의 최초의 진정한 황제라 할 수 있는건 시황제죠. 이 책은 진시황의 병마용갱을 발굴하며 얻어진 고고학적 성과를 자세히 고찰하면서도 당시 시대상황과 중국 고고학계에 던지는 메시지까지 담겨있는 저서입니다.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은 병마용갱의 발견과 발굴에 이르는 숨가쁜 상황과 발견된 유물들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각종 사료들, 발굴된 유물에서 유추한 당시 무기들과 군대 편제, 진법,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와 진 왕조의 사회 구조와 법령 등 역사적 사실까지 고찰하고 유사 유물들과의 비교를 통한 해석을 덧붙여 책의 충실도를 높이고 있죠.

2권은 병마용갱의 또 다른 대 발견이었던 "동거마" 발굴에 관련된 일화와 동마에 관한 자세한 고고학적 연구 및 고찰이 전반부의 주요 내용입니다. 1권에 못지 않을 정도로 자료적 가치가 상당합니다.
중반부에는 병마용을 찾아왔던 각국 유명인사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레이건과 닉슨 등), 후반부에는 2번에 걸쳐 발생했던 "장군용두"도난 사건과 도난 사건에 연루되었던 관계자들의 증언, 그리고 도굴과 문화재 밀반출이 심할 뿐 아니라 기껏 발굴한 유물도 도난과 관리 소홀로 인한 문제점 등의 중국 고고학의 현실과 병마용의 현실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도굴및 유물 보존에 대한 문제점은 유흥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지적한대로 국내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될 것 같지만 하나 부러운 것은 용두 도난사건의 범인들에게 이례없는 중형 (사형, 무기징역 등) 을 선고한 중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중형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진시황릉 지하궁에 대한 각종 사료 조사 및 향후 발굴 계획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항우가 진시황릉을 불태우고 유물을 약탈한 등 여태까지의 사료에서 밝힌 도굴에 관한 것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볼때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아직 발굴 계획은 없다고는 하나 사료적으로 밝혀진 여러 내용만으로도 지하궁에 대한 기대를 높여줍니다.

비록 2권 중반부의 방문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나 도굴에 대해 지나치게 길게 서술한 점, 너무 공산당 정부측 입장을 대변하는 것 처럼 보이는 후반 묘사는 분명 거슬리고 불필요한 부분이며 권당 12,800원이라는 가격도 부담되는건 사실이에요.

허나 역사와 고고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가진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고고학-역사 관련 서적이 그다지 많지 않은 국내 현실에서 거의 독보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세한 도판과 해설이 곁들여져 지적 만족감을 충실하게 해 준다는 것 만큼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 하죠. 저자의 문장력도 상당한 편이라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재미까지 주기도하고요. 때문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책만 출판해도 출판사가 버틸 수 있는 문화적 풍토가 국내에 조성되기 위해서라도 저자의 다른 책 "마왕퇴의 귀부인"도 구입해 봐야 겠습니다.

2008/12/08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 - 류동현 : 별점 3점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 - 6점
류동현 지음/루비박스

최근에 국내외적 문제와 직장문제, 개인적 사생활 문제로 인하여 독서에 힘을 쏟지 못하던 와중에 "렛츠리뷰"에 당첨되어 입수한 책입니다. 어렵고 힘들고 스트레스 많이 받던 차에 하늘의 선물이라 여기고 곧바로 읽어버린 책이죠.

책은 크게 영화 시리즈 4편을 중심으로, 각 편마다 등장하는 유물과 그 유물에 관련된 역사를 다루고 있는 구성으로, 솔직히 신청할때는 훨씬 두껍고 전문적인 책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받고보니 그야말로 "핸드북" 이더군요. 덕분에 쉽게쉽게 빠르게 읽히는 맛은 있었고 인디아나 존스의 팬이라는 저자의 팬심은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전문적"인 느낌은 상대적으로 덜했습니다. 한마디로,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좀더 자세하게 내용을 살펴보자면, 첫번째 편 "레이더스"에서의 성궤 이야기는 그런대로 한 줄기를 잡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는 있지만 (과연 성궤는 언제, 어디서 없어졌으며 지금 어디있을까?) 작가의 말대로 그레이엄 행콕의 "신의 암호"를 지나치게 인용한 마무리가 좀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인디 시리즈 중 제일 재미없게 보았었던 두번째 편 "저주의 사원"은 "상카라 스톤"이라는 등장 유물과 그 배경이 너무 허구인지라 고고학과는 좀 동떨어진 주제로 보였습니다. 세번째 편인 "최후의 십자군"의 성배 이야기는 "다빈치 코드" 덕분에 수없이 많은 자료가 넘쳐나는 이야기라 신선함이 떨어졌고요. 네번째 편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은 영화 개봉 이전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인지 "크리스탈 해골"에 대한 간략한 서술과 마야, 아즈텍 등 중앙 아프리카 고대 문명에 대한 개략만 훝는 정도로 끝나서 좀 더 깊이있는 정보가 필요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뭔가 읽다보면 흥미롭긴 한데 그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갈증만 더하는 꼴이었어요. 그 외에 영화 서두에 등장하는 짤막한 유물들과 TV시리즈 등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고 있으며 부록으로 영화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싣고 있는데, 영화에 대한 정보는 사실 이 책의 주제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좀 실망스러웠고요.

요약하자면 좀 저연령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수준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만한 학습도서에 가깝다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타겟을 좀 잘못 잡은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책의 주제는 마음에 들기에 좀 더 흥미롭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결과적으로 내용이 별반 깊은 수준을 다루고 있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나서는 그레이엄 행콕의 "신의 지문"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좋은 기회 마련해 주신 이글루스와 도서출판 루비박스 관계자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7/05/13

손자병법의 탄생 - 웨난 / 심규호, 유소영 : 별점 2.5점

손자병법의 탄생 - 6점
웨난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일빛

1972년 산동선 임기현 은작산 1호, 2호묘에서 발굴된 죽간과 출토물들에 대해 여러가지를 풀어놓는, 580여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고고학, 미시사, 역사 서적입니다. 웨난 작가의 고고학 관련 책을 워낙 좋아하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는 군단"은 진시황릉에 대한 바이블같은 책이죠. "마왕퇴의 귀부인"은 그만 못했지만 역시 괜찮았고요. "삼성퇴의 고대문명"을 절판 전에 구하지 못한 게 한스럽기만 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부활하는 군단"과 같습니다. 먼저 발굴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이후 유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지금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첫 시작인 발굴 과정부터 드라마틱합니다. 문화대혁명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전문가가 아닌 지역 담당자의 무식한 발굴이 겹쳐져 일어난 엄청난 피해, 고고학자들의 유물을 복원하기 위한 분투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흙탕물 속에서 죽간을 그러잡아 뜯어 올리는 식의 엄청난 발굴이 보여집니다! 이 와중에 정치적인 논리가 개입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고요.
그리고 제목 그대로 발굴된 죽간이 "손자병법"이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묘는 한나라 무제 때로 추정되지만 이 죽간의 필사 연대는 한나라 문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늦어도 서한 전기), 한나라 시대 죽서 "손자병법"은 손무가 직접 쓴 원본일 가능성이 많기에 그야말로 초기 "손자병법"에 대해 생생하게 알게 된 것이라고 하네요. 송나라 판각본과의 대조 결과, 명확한 차이를 보인 부분이 있다고 하고요.
또 "손자병법", "육도", "관자" 등의 고적이 실존하며, "손빈병법"이 발굴되어 손무와 손빈이 각기 병법서를 세상에 전했다는게 밝혀진 것도 큰 성과입니다.
참고로 죽간을 수장품으로 묻은 이유는, 인쇄술이 시작된 당나라 이전에는 모두 손으로 필사했기 때문에 서적이 굉장히 귀해서 수장품에서 서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작산 한묘의 죽간은 크게 열 묶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수량인데 유가의 경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법가 사상이 퍼져나가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되네요. 후대의 '비림비공(임표와 공자를 비판함)'과 크게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죠!

여기까지가 약 12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고, 이어서 360페이지에 걸쳐 발굴된 죽간을 연대별로 구분한 후 실제 해당 시기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항목별 간단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육도" 

강태공이 주문공을 만나고, 주나라가 천하를 재패한 후 봉지로 제나라를 하사받는 과정까지의 이야기.
주문공과 첫 만남에서 강태공이 말한 '삼상주의'는 은작산 한묘 발굴로 알려지게 되었다는데, 최순실에 농락당한 대한민국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네요. '그 능력에 관계없이 사돈에 팔촌을 엮어 관직에 앉힐 경우 그 화가 나라와 백성에게 미쳐 결국 나라를 망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육도"에 대한 설명이 뒤에 이어지는데 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화복과 길흉에 대해서, 인사가 하늘에 달린게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고, 백성 사랑이 치국과 치군에 가장 중요한 전제라는게 분명히 지적됩니다. 천하가 평화로와야 모든 것이 이롭다는 것, 인심에 순응해 천하의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 등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3천년도 더 전에 쓰여진 죽간 속 내용이 지금도 통용될만 하다는게 신기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왕병"

'절개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고집스럽고 답답한 서생에 불과합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지금 세상은 사람 노릇을 하는 데 그리 진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 포숙이 관중을 데려오려 할 때 한 말. 

주 왕조가 쇠학하여 춘추 시대로 돌입하게 되고, 제나라가 관중과 포숙을 얻어 제후국의 맹주를 차지할 때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관중이 죽은 후 그의 언설을 정리한 책이 "관자"입니다. 대체로 군사 사상으로 다섯가지 원칙으로 정의되는데 부국강병, 우병어농, 군정일체, 선계후전, 이인위본, 선전준비가 그것이죠. 은작산에서 출토된 "왕병"은 관중의 정치, 군사 사상에 대한 완전한 작품이며 후대에 전해진 "관자"는 불완전한 작품이라네요.

"안자춘추"

'귤은 회수 남쪽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명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안자는 처음 들은 이름이네요. 사마천 왈 "관중이 죽고 백여년이 지나 안자가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물인데 말이죠. 

안자 안영과 전양저가 힘을 합쳐 제나라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이후 제나라 위왕이 양저의 군사 사상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사마병법"이라지요. 전양저의 친척이자 전씨 가문의 유력인인 전서가 공을 세워 "손"씨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후 손무, 손빈 등의 후손들로 이어집니다.

"손자병법" 

손무가 오나라 국경 궁륭산에 터를 잡고 혁명을 위한 군사조직을 이끌다가 오자서를 만나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뒤는 "열국지" 등에서 본 이야기 그대로,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오자서가 오나라왕 합려와 함께 전쟁을 일으키고, 이후 오나라가 패망할 때 까지의 흥망성쇠가 그려집니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 신선함은 덜했지만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손무가 일종의 도적단 두목같은 포지션으로 등장해서 오자서와 밀약을 나눈다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손무가 오나라의 왕이 되고, 오자서는 초나라의 왕이 된다는 밀약인데, 작가의 창작인지 아니면 뭔가 유래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울러 초나라가 정벌된게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는 연구자들의 의견도 신선했습니다.

"손빈병법" 

오나라를 떠난 손무가 제나라에 정착한 후 증손자 손빈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역시나 "열국지"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방연과의 인연, 귀곡자 문하에서의 생활, 위나라에서 방연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의 처참한 생존 과정과 탈출, 그리고 복수가 차례대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미친 척을 해서 방연의 눈을 피하는 것은 그럴듯한데 제나라 묵적의 제자 금활리라고 자신을 밝힌 인물에게 너무 쉽게 속 마음을 드러내는 전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실제로는 수차례 연극을 더 했을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나머지 200여페이지에서는 현재 도출된 각종 의문과 문제에 대해 다루어 집니다. 대표적인 건 방연이 죽은 마릉의 정확한 위치, 후대에 수차례 대두되었던 손무 허구인물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은작산 손자병법에 의해 밝혀진 진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차이점 - 춘추 말기 낙후된 생산력과 경제력 탓에 손자병법은 속전속결을 주장하며 공성전을 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빈병법이 쓰여진 전국 시대에는 쇠뇌, 투석기와 같은 선진 무기의 도입과 기병전의 증가, 전쟁 규모의 확대 및 도시의 발전으로 공성전을 적극 주장하는 등 전략, 전술, 진법이 크게 변하였음 - 등 입니다. 손무의 고향이 어디인지에 대한 지역과 학계 간 암투 -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고향 소유권 쟁탈' - 도 소개되고 있고요.

그런데 손무 허구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차이는 재미있었지만, 마릉의 위치나 손무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중국 내에서야 관심사일 뿐 저에게는 하등의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역 경제 부흥을 중요시 여기는 듯한 저자의 글도 와닿지 않았고요.

그나마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료가 소개, 인용되는데 그 중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는 항목이 몇가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자 곽말약, 여공아의 주장 중 '춘추'와 '전국'을 나누지 않고 한데 묶어 '춘추 전국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대목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당연히 '춘추 전국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중국 내에서 '두 시기는 사실상 연결되어 있고 그 간격은 약 28년에 불과하여 분명하게 차이가 나기 어렵기 때문에 묶어야 한다!'는 주장이 의외로 소수파라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지금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손무 무덤 발굴에 관련된 이야기 중 합려의 무덤인 검지 발굴을 위해 물을 뽑았었지만 검지 붕괴 위험과 비밀로 남겨두는 편이 지역 관광산업 발전, 경제 효과를 높이는데 유리하여 발굴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알았네요. 어장검 등 각종 보검이 궁금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싶군요.
손빈의 후예라는 손노가 손씨 가족을 연구할 때 '일부 당성이 탁월하고 정치적 견해가 뚜렷하고 영리한' 사람들을 모아 좌담회를 가졌다는 중국 공산당식 마인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 때 손씨 가문 족보를 태우겠다고 소란을 피웠으며, 손씨 가문의 어른인 손지일이 홍위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족보는 잘 숨겨놓아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고요.
손씨 가문 내력을 조사하여 손빈의 무덤 위치와 말년을 알아내는 과정은 조상과 제사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현실과도 잘 맞아떨어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국 내 사학계에서 손씨 족보의 발견이 굉장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라니 족보라는게 참으로 중요하구나 싶더라고요.

이어서 1996년에 벌어진 손자병법 82편의 영인본을 발견했다는 사기극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홍위병이 등장하여 고대 죽간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일부만 건졌고, 필사한 사본만 남았다는 주장에서 시작되는데 고대 죽간을 손에 넣었다는 조부 장서기의 일대기를 분석하여 사기꾼의 주장을 반박하고, 장서기의 진짜 직계 후손이 등장하여 이름 돌림자를 가지고 사기꾼들을 박살내는 전개는 우리나라 상황과 유사하여 재미있었습니다. 가짜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인 분석 결과와 사기에 가담했던 국방대학교 강사 방립중이 벌인 민사 소송으로 벌어진 재판 과정도 법정 추리물 느낌이라 아주 흥미로왔고요. 솔직히 너무 유치하고 어설픈 사기극이라 이렇게까지 크게 이슈가 된 것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죽간과 다른 출토물들의 후일담을 그립니다. 죽간은 그나마 신경써서 보존되었지만, 성 박물관도 문화대혁명에 휩쓸려 직원들이 밭을 경작하느라 관리가 소홀해진 탓에 훼손이 심해졌다니 문화대혁명이 정말 문화와 역사에 몹쓸 짓을 한게 맞는 것 같네요. 그리고 최초 발견자들과 관계자들 후일담도 소개되는데 첫 발견자인 '당나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아내의 외도를 보고 자살했으며, 한묘도 지금은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이후 죽간 소유권을 놓고  벌인 추잡한 암투가 벌어졌다니 이것도 무슨 저주 비스무레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하기사 발굴이라고 해 봤자 멀쩡한 묘를 대놓고 터는 것이니 좋은 결과일리 없겠지요.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 이런저런 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부활하는 군단"이나 "마왕퇴의 귀부인"에 비하면 유물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도판이 극도로 부족, 부실하고 잘 알고 있는 열국지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현대에 이르러 별 관심 없는 중국 지방 행정부의 관광 수익을 노린 이권다툼이 많이 소개되는건 좀 아쉬웠습입니다. 다른 곳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역사편과 쓸데없는 지방 행정부 이야기를 덜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핵심인 은작산 출토 "손자병법"의 발굴 과정과 이로 인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 중심으로만 소개하는 식으로요.  물론 저자의 허락없는 제멋대로의 편집은 안될 말이겠지만요.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손자병법"과 춘추 전국 시대(중에서도 춘추 시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 쯤 볼만합니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딱히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불필요한 내용도 많은 편이고요. 가격도 상당한 만큼 구입하실 것이라면 신중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2013/08/01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 이종호 : 별점 3점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 6점 이종호 지음/인물과사상사

유명한 역사적 발굴과 발굴 대상에 대해 다룬 책.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1장] 발굴의 황금시대를 열다 - 거대한 무덤 건축물의 상징이 된 마우솔레움
  • [2장] 알렉산드로스의 청을 거절한 자존심 - 고대인의 마지막 도피처, 아르테미스 신전
  • [3장] 고고학 발굴사의 기념비를 세운 슐리만 - 트로이 목마의 진실은 무엇인가?
  • [4장]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곳 -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를 찾아서
  • [5장]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 - 니네베의 점토판에서 발견한 길가메시와 노아
  • [6장] 무와탈리와 람세스 2세 - 카데시 전투에 대한 두 가지 기억
  • [7장] 또 다른 메시아의 이름은 무엇인가? - 사해문서와 기독교인들의 딜레마
  • [8장] 세계사를 움직인 공포 - 황금의 제국, 스키타이
  • [9장] 제국의 영원한 지배자를 꿈꾼다 - 지금도 시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병마용
  • [10장] 오빌의 전설과 인간의 탐욕 - 밀림 너머의 낯선 풍광, 대짐바브웨

목차만 보아도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빠져들 수밖에 없겠죠? 이 중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우솔레움, 아르테미스 신전, 아틀란티스와 크레타 섬의 유적, 스키타이 유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우솔레움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지만 피라미드, 로도스의 거상, 바빌론의 공중정원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죠. 개인적으로도 잘 몰랐고, 그동안은 뭐 딱히 대단할 게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러나 왠걸! 피라미드와 비교할 만한 거대한 건축물로, 이름 자체가 거대 무덤 건축물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는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건축에 대한 역사와 발굴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출토된 유물들의 수준이 정말로 대단해서 입을 다물기 어려울 정도더군요. 제가 보아왔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고급이더라고요. 이 거대 유적을 파괴하여 자신들의 요새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무식한 야만인 십자군 기사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한데, 뭐 대부분 천벌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의 아르테미스 신전 역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잘 몰랐던 내용을 많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다산의 상징 같아 보이는 여신상 등 유물들은 물론 발굴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로웠고요. '이교도'의 유적이라 하수도나 건축 보강 자재로 쓰였다는 운명이 안타까운데, 제대로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을 소개하며 아틀란티스 전설에서 시작하여 그에 얽힌 다양한 이론들을 펼쳐내는 부분은 이런 류의 가상 역사물(?)을 보는 재미가 있더군요. 모든 문명의 기원이 아틀란티스일 것이라는 대담한 견해 등이 펼쳐지니까요. 무엇보다도 다른 자료에서는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크레타 섬의 유적 역시 압권이었습니다. 직접 크레타 섬에 가서 보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죠. 크레타 섬의 멸망이 이웃 산토리니섬의 화산 폭발 때문이라는 마지막 결말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스키타이 이야기도 마우솔레움, 아르테미스 신전 이야기와 같이 잘 모르던 것을 알려준다는 게 마음에 들었어요. 이래저래 많이 들어봤지만 실체는 잘 몰랐던 스키타이 민족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물론 그 뒤를 이은 사르마트족은 아마존의 후손으로 알려졌다는 내용 등 여러 가지 설명이 가득하거든요. 이른바 황금의 민족이라는 스키타이의 유물 소개 역시 충실하고요. 사실 유물은 딱히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외에도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유사성을 다룬 내용도 괜찮았어요. 아라라트산 방주 유적으로 끝맺는 마무리는 좀 뜬금없긴 했지만 말이죠.

그러나 위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너무 잘 알려진, 또는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특히 슐리만과 트로이, 미케네 제국 발굴 일화와 병마용갱은 이 책에 수록될만한 비중 있는 발굴이라는 것은 동의하나, 새로운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병마용갱은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웨난의 "부활하는 군단"을 이미 읽었기에 더욱 그러했어요. 각종 다큐 등에서 많이 접했던 사해문서 이야기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중반 이후에는 유적과 역사에 대한 내용에 집중하고 있어서 제목에서의 "발굴"의 비중이 많이 줄어든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마지막 대짐바브웨 유적에 대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한 폐단 이외에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별게 없어서 이 책에 실릴만한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되었고요.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추천. 고대 문명, 유물, 유적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도판도 무척이나 충실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영상물로 접하는 게 훨씬 나은 콘텐츠라 생각되는데, 다큐멘터리로 나와주면 좋겠네요.

2019/03/09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 서동인, 김병근 : 별점 3점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 6점
서동인.김병근 지음/주류성

국내 고고학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신안 보물선의 발굴 물품을 통해 당대 역사를 설명해주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신안선에 실려 있었던 유물들을 종류별로 상세하게 분석하여 당시 어떤 문화가 융성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무역선의 항해 경로를 통해 당시 무역을 통한 문화 교류가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 신안선이 침몰했던 시기의 원나라와 고려를 중심으로 주변국의 당시 시대 정황과 정세는 어때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유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신안선에 가득 실려있던 당대의 고급 목재 자단목에 대해 '힌두어 찬단을 음역한 전단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이후 자단이라는 말로 바뀌었으며,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 사용한 고급 목재로 그 향도 귀중하게 여겨졌다'는 식으로 그 유래와 용도를 알려주는게 좋은 예입니다. 출토된 향로와 화분, 다완 (찻잔)과 주전자 등을 통해 분향, 꽃꽂이, 다도 문화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만 보완되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나와도 손색없다 싶을 정도였거든요.
그 외에도 유물을 통해 소개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주 많습니다. 도자기, 동전과 같은 명확한 유물말고도 목패와 같은 기록물과 게다, 숯돌과 같은 생활 용품 등 워낙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컬러 도판과 지도, 다른 관련 유물에 대한 정보와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는 구성도 좋습니다. 특히 도판 측면에서는 정말이지 나무랄데 없어요.

발굴 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소소하니 재미있습니다. 신안선 발굴로 당시 도자기가 엄청나게 출토되어 우리나라가 당시 도자기 최대 보유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당연히 중국을 제외하고겠죠?) 국제 시장에서 해당 시기 도자기 가격이 폭락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눈길을 끕니다. 도자기만 무려 2만점이 넘게 출토되었다니 폭락할만도 하네요.
또 신안 보물선 덕분에 우리나라가 현재 중국 동전 최다 보유국이라는군요. 한과 후한에서부터 시작하여 신, 당, 북송, 남송, 요, 금, 원과 서하까지 아우루는 28톤, 8백만개에 이를 정도의 양이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동전은 일본에서 대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될 예정으로 보고 있는데, 만약 신안선이 침몰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 가마쿠라 대불과 같은 불상이 한 개 더 생겼을거라고도 하고요. 일본으로서는 아쉽겠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지만 주석이 모두 책 말미에 수록된 점은 아쉽습니다. 페이지 하단에 주석을 소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또 책의 목차가 두서 없는데, 신안 보물선 발굴에 대한 상세한 설명 뒤에 항해 경로를 설명하며 당대 무역, 그리고 주변국들의 상황을 알려준 후 유물 하나하나를 통해 관련된 문화를 차례대로 소개하는게 나았을 겁니다. 발견과 개괄적인 설명, 그리고 좀 더 미시적인 접근이 가능했을테니까요. 지금은 이런 내용이 약간 뒤섞여져 있는 편입니다. 문체도 읽기 편하지 않고요.
그리고 제가 이 쪽 공부가 부족하여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지나친 억측이 아닌가 싶은 부분도 몇 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 고려 개성 상인의 송도부기가 서양에 전해진 후 이게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기를 영어로 북 키핑 (Book Keeping) 이라고 하는게 '부기'의 발음을 베껴낸 표현이라는걸 증거로 제시하는데 좀 아니다 싶었어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르네상스 운운하는건 지나쳤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책 자체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이 조금 쎈 편이기는 하지만 분량과 전 페이지가 풀 컬러라는 점에서는 납득할 만한 수준입니다. 고려 시대 문화와 문화 교류사, 미시사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3/03/25

삼성퇴의 청동문명 1, 2 - 웨난 / 심규호 : 별점 2점

삼성퇴의 청동문명 1 - 4점
웨난 지음, 심규호 외 옮김/일빛
삼성퇴의 청동문명 2 - 4점
웨난 지음, 심규호 외 옮김/일빛
중국 촉 지방에서 발견되어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유명한 삼성퇴 문명의 발굴에 대한 이야기. 
고대 유물 발굴에 대한 괜찮은 논픽션을 많이 발표했던 웨난의 저작입니다. 제가 읽었었던 작가의 다른 논픽션들 모두 기본 이상은 했기에 이 책도 진작부터 읽고 싶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절판된 탓에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서야 읽게 되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드리자면,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유는 제 기대와 많이 달랐던 탓이에요. 제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삼성퇴 문명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누가 이 유물들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두 권 분량의 책에 가득 담겨있을 것으로 기대했지요. 화려한 도판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정작 책에는 삼성퇴의 문명 발굴에 대한 에피소드만 넘쳐날 뿐입니다. 게다가 그 설명도 무척이나 장황합니다. 처음 삼성퇴에서 의미있는 유물을 발굴했다는 연도성의 일화만 보아도 그러해요. 연도성이 청나라 시기 지방 관직을 맡았지만 이후 민국이 되면서 자리를 잃었다는 설명이 3~4페이지 씩이나 길게 이어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설명보다는 실제 발굴이 진행되었던 삼성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와 도판이 추가되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연도성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이후 연씨 일가가 보물을 하나씩 풀면서 그 정보가 학계에 알려지는 과정, 2차 대전과 문화혁명을 거친 뒤 삼성퇴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벽돌 공장이 세워져 유적 일대가 훼손되지만, 학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결국 1호갱, 2호갱이라는 두 차례의 큰 발굴 성과를 내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너무 길어요. 저는 삼성퇴 문명의 수수께끼가 궁금했을 뿐, 이런 발굴 이야기가 궁금했던건 아닙니다. 성과 현에서 출토된 유물 소유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이야기는 반복이 지나쳐서 짜증이 날 정도였고요. 
물론 이런 발굴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재미가 없던건 아닙니다. 길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거에요. 그나마 한가지 웃겼던건 성 고고연구소에서 현과의 협상을 위해 진덕안을 보낼 때 두 청장이 삼국지 고사를 인용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갈량의 출사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진덕안을 파견하여 삼성퇴에 주둔하도록 했고, 현에서 변화가 있을 때 그가 나가서 단기필마로 응대한다, 그 뒤 우리와 같은 대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지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고고학 연구원들이라 이런 인용이 자연스러운건지, 아니면 중국인 특유의 허풍인지 감이 오지 않네요. 

이런 발굴 에피소드들 중심의 1권보다는 2권은 그래도 삼성퇴 문명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이 많이 있어서 좀 낫기는 합니다. 
그런데 가장 현실적이고 이치에 맞는 이론을 엄선하여, 요약 설명해주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이론을 정제하지 않고 모두 수록하고 있어서 다소 복잡했습니다. 대충 제가 판단한 바로는, 고대 사천 지역에 여러 개의 부족 국가(마을)가 있었고, 이 마을의 왕들이 잠총, 백관, 어부, 두우, 개명 등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즉 파국이 고대 기록에서처럼 수도가 사방으로 천도했던게 아니라 애초에 나라가 여러개 있었던 겁니다. 시초라 할 수 있는 잠총 부족은 이유가 무엇이었건 중원에서 남하하여 나라를 만들게 된 것이고요. 이후 두우 시기에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별령이 치수 기술을 활용하여 민심을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이 되어 개명 왕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 왕조는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진나라에 제압당하고 '촉군'이 되고 말았고요. 이후 청동기 문명이었던 촉도 철기 문명인 진나라에 융합된게 간략한 이 지역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퇴의 1호갱, 2호갱에 보물들이 부장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단순 묘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근거는 갱내 기물이 모두 불에 탔다는 사실이죠. 하지만 화장한 왕의 유골이 없다는 점에서 화장묘라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재사갱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출토 유물이 모두 제사에 사용되는 기물이고, 불에 탔다는건 불을 이용한 제사에 사용되었다는 논리죠. 그런데 출토된 유물의 양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아요. 한 나라의 재력을 모두 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유물들이라서, 제사에 한 번 쓰고 버리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삼성퇴 유적은 어부 왕조 당시 수도로 두우 왕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 마지막 제사를 벌이고 전멸한 흔적이다, 거대한 홍수 탓이었다는 등의 이론들이 발표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쟁으로 전멸하고 남은 유산이라는 설이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승리한 국가가 망한 국가의 신묘에 있는 제사용 보기들을 훼손하여 묻어버리는건 충분히 있음직했으리라 생각되거든요. 이 책에서도 이른바 '망국 보기 매장갱' 과 '상서롭지 못한 보기 매장갱' 이라는 해석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있고요. 
그리고 주요 출토 유물의 형태와 용도에 대한 설명, 다른 국가 유물들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특유의 안구 형태와 대담한 문양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허나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앞서 말씀드렸듯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는게 가장 큰 감점 요소입니다. 기이할 정도로 잡다한 주변 이야기가 많은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웨난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독자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요. 2권 내용을 보다 결론 중심적으로 요약 정리하고, 1권 내용은 에피소드 중 중요한 것만 짧게 인용하는 식으로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21/02/12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더글러스 프레스턴 / 손성화 : 별점 3점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6점
더글러스 프레스턴 지음, 손성화 옮김/나무의철학

오래전부터 온두라스 밀림 속에 숨겨져 있다고 알려진 '시우다드 블랑카', 즉 백색 도시라 불리는 유적발굴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정복자 코르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색 도시가 실려있는 다양한 사료 소개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험들부터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특히 미국의 대부호 헤이가 1930년대 미첼헤이스, 1935년 R.S 머레이, 1940년 모드를 고용하여 탐사를 벌였던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사기꾼이었고, 특히 모드는 유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금광을 찾기 위해 탐험에 뛰어들었던 악질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잃어버린 도시 탐험이 시작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율 주행 기술때문에 널리 알려진 '라이다' 기기를 활용했다는 점이었어요. 비행기에 실은 라이다 장치로 조사하려는 장소 스캔을 통해 GPS 정보까지 링크된 완벽한 3D 지도를 만들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실제 밀림을 뚫고 나가는 과정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는데 여러모로 놀라왔습니다. 과거 '인디아나 존스' 등으로 상징되는, 고고학자가 발로 뛰어들어 조금씩 유적의 실체를 벗기고 유물을 발굴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백색 도시 탐사 초반부의 어려움은 발로 뛰는 현지 조사가 아니라 온두라스 정부와 발굴 교섭을 하는 행정 절차였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온두라스 쿠테타로 인해 새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 백색 도시 발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후원했다는 언급도 신선했고요.

백색 도시 실체를 3D 지도로 확인한 뒤, T1 지구라고 부르는 현지 밀림 속으로 들어가 유적을 확인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전직 SAS 장교 출신으로 위험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방송 관계자를 서포트하는 전문가들이 고용되고, 다양한 안전 장치를 거의 완벽하게 확보해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독사를 만나고, 온갖 벌레들에게 습격당하는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지 조사는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프로젝트 리더 스티브 엘킨스가 직접 참여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정글의 법칙" 보다 조금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백색 도시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며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확실히 '내셔널 지오그래피' 소속 기자다운 느낌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중반부까지를 차지하는 백색 도시 탐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책 서두에 던진 질문,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깜쪽같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는가? 에 대한 답이 설명되는 뒷 부분이 진짜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모스키티아 주민들입니다. 원래 이 지역에 작은 부락을 만들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모스키티아 문명은, 수백 Km 떨어진 마야 도시 코판이 강성해지면서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426년 마야인 케트살마코가 코판을 장악했는데, 이 때 코판 지역 원주민들은 모스키티아 주민들과 동일 어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당연히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 뒤 코판과 모스키티아는 5세기 이후 각자 교류하며 발전해 나갔지만 코판에서 왕족들이 신성을 강조하며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다가 기근이 닥치고, 신성이 무너져 주민들이 반기를 든 탓에 코판은 9세기경 붕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이때부터 모스키티아 문명은 더욱 발전하여 마야 스타일 도시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도시 파괴 후 흩어졌던 코판 주민들 일부가 유입된 덕분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밀림에서도 복합 농경 사회를 일구며 발전한 모스키티아 문명도 1,500년 경 갑자기 몰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서구 사회에서의 전염병 유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색 도시 제단에 남겨진 제물들 형태를 볼 때, 살아남은 주민들이 제물을 바치고 떠난게 분명합니다.

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그대로 놔 두고 도망쳐 버린 이유, 그리고 도시가 저주받았다는 전설이 널리 퍼진 이유는? 전염병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치에 맞습니다. 신세계에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을 들불처럼 퍼트렸고, 이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신세계 주민들은 거의 90%가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충분한 근거가 되고요. 코르테스가 단 500명의 군대로 아스텍 제국을 정복했던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로 전염병 덕분인 셈이니까요.
구세계 주민들은 전염병에 어느정도 내성이 있었는데 신세계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는지도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도 볼거리입니다. 구세계에서는 일찍이 온갖 가축을 키웠고, 밀집한 장소에 모여 살아서 병원균 침입 및 전파가 잦았고,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주어서 유전 저항이 생길 수 있었지만, 신세계에서는 가축을 많이 키우지 않고 넓은 공간에 살아서 상대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총, 균, 쇠"와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무자비한 구세계 전염병의 습격을 저자가 온두라스에서 걸려온 풍토병 리슈아만편모충증과 연결하여, 우리는 분명 저주받았으며 이렇게 신세계에서 발생한 미지의 전염병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로 글을 끝맺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와 어느정도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꽤나 깊은 울림을 전해 줍니다. 앞으로 어떤 미지의 병원체가 인류를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는데, 남의 일이 아닌 셈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천연 밀림으로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T1 지구가 온두라스 군대와 고고학자들이 머물며 파괴되어 가는 현재를 취재한 내용인데, 이렇게 사람 손 닿지 않은 비경이 훼손된 책임은 명백히 처음 도시를 찾아나선 전문가들에게 있으니까요. 때문에 그들은 저자처럼 훼손되는 숲을 보고 안타까와 하는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고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냥 발굴에 대한 명예만 얻고, 좋은 방송 콘텐츠 제작한걸로 끝내버리는 행동은 지극히 무책임해 보였어요. 하긴, 구세계 출신인 멤버들이 주도한 탐험과 발굴 자체가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망한 나라를 숨겨진 도시라며 다시 찾아와 마지막으로 바친 제물을 끄집어 낸다? 부관참시와 같은 죽은 자를 죽어서까지 모욕하는 행위와 별로 다를게 없지요. 이래서야 발굴에 참여한 구세계 출신 멤버들이 안 좋은 운명을 맞게 되는건 당연해 보여요.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고인능욕(?)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나라 그 민족 후예들이 중심이 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발굴과 조사도 무인 드론이나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무인 로봇개 등 무인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람 손 닿지 않게 이루어지는게 바람직할테고요.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건 물론, 비교적 재미있고, 건질게 많았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온갖 벌레와 독뱀이 사방에 천지라 쉽게 갈 엄두를 내기는 힘든 곳이지만, 제 평생 한 번 정도는 중남미 고대 문명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네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2020/08/01

현란한 유리 (絢爛たる流離) - 마쓰모토 세이초 / 이규원 : 별점 2점

현란한 유리 - 4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의 소유자들이 온갖 범죄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마쓰모토 세이초의 연작 소설입니다. 1963년에 연재된 작품을 모아서 출간했다니 비교적 초기작이지요. 그래서인지 대담한 시도와 아이디어들이 눈에 띕니다. '연작'이라는 구성과 12편 중 8편의 작품이 두 편 씩 이어지는 구조라는 점, '트릭'이 괜찮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시대별로 상세한 배경 설정과 묘사도 돋보였습니다. 고물이 돈이 되는 상황에서 불량품 철사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티켓" 에서는 시대 상황이 범죄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작가의 조선 주둔군 시절을 바탕으로 한 "백제의 풀"과 "도망"은 경험없이는 쓸 수 없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고요.

그러나 이야기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아쉽습니다. 구태여 연작으로 엮을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들도 많았기에, 12편의 이야기 수를 좀 더 줄이고, 다이아몬드 반지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더 좋있을 겁니다.

단편들 전체를 평균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과 비교하면 많이 처집니다. 이 보다는 저도 몇 편 소개해드렸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려 12편이나 되니 리뷰도 큰일이네요. 읽다 지치실듯.

"토속 인형" 

기타큐슈의 광산 재벌인 야쓰오 광업의 데릴사위 다다오와 딸 다에코 부부는 별거 상태로 지내다가, 불황으로 야쓰오 광업이 무너진 뒤 다다오는 취미인 토속 인형 수집품과 함께 도쿄의 다에코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에코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이 많이 님아 있었던 덕분에 화려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에코가 취미로 배우는 '노' 관련된 사범들이 집에 드나들면서 다에코와 어울리는걸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던 다다오가 병으로 사망한 얼마 뒤, 다에코는 살인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다다오 유골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지만, 다행히 변호사 기타야마의 활약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쇼와 초기 기타 큐슈 광산 재벌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지만, 정말 남의 눈과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듯한 완벽한 3인칭 묘사로 진행되는 부부의 관계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변호인의 변론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토속 인형 수집품에 독살스러울 정도로 도드라지는 빨간색 인형들이 있었는데 이 빨간색은 비소가 함유되어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인형 수집품을 다다오와 함께 화장해서 비소가 검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과학 수사로는 비소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다오의 유해인지, 인형 때문인지)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겠지만, 1930년에는 불가능했을테니 무죄 판결을 받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부부였는데, 금융적인 부분도 다에코가 전권을 쥐고 있고 다다오의 죽음으로 별로 얻어서 다에코가 살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를 법정에서 밝혀 무죄 판결을 끌어내기 때문에 괜찮은 법정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다다오 살해가 급작스럽게, 뜬금없이 일어난다는 점, 특별한 살해 동기가 없다는건 분명한 약점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살의를 품고 비소를 먹였는데, 그 이유가 불분명하니 답답하더군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인의 쓰즈미" 

1편에서 활약한 기타야마 변호사가 다에코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다에코의 노 사범 중 한명인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였다. 그는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흉기인 비수에 강습용 쓰즈미의 끈이 감겨 있었기 때문에 범인으로 몰렸다...

비수가 여자 힘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꽂혀 있었고, 다에코는 흰 기모노를 입고 있었지만 혈흔이 전혀 묻어있지 않아서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결국 다에코가 범인이었다는게 밝혀진다는 이야기지요.

트릭은 간단합니다. 빨래용 대나무 장대 끝에 비수를 묶은 뒤 먼 곳에서 찌른거에요. 지렛대 효과로 더욱 강한 힘이 가해져 깊숙이 찔렀고, 먼 거리라서 흰 기모노에 피가 튀지 않았지요. 트릭의 밑밥을 깔기 위해 다에코가 몇일 전부터 이웃집에 '노' 강습을 권하러 갔다던가, 그날따라 계절과는 맞지 않는 흰 기모노를 입었다던가 하는 사전 준비도 설득력있게 묘사되며,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간단한 조작 - 단도에 쓰즈미 끈을 감아 둔 - 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범행이 작품에서처럼 성공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뼈 등이 있어서 한 방에 가슴을 찌르는건 먼 곳에서는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또 다에코가 범행을 자백한다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버려진 빨래용 대나무 장대에 경찰이 주목한 정도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살해 동기, 즉 남편을 살해한건 다에코가 맞으며 기타야마는 이를 가지고 다에코를 협박했기에 살해했다는 동기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다에코가 다시 처벌 받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사부재리에 대해서는 기타야마가 다에코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동기 없이도 가까운 남자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다에코라는 악녀의 최후를 그렸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추리적으로나 내용면으로나 특별히 건질건 없습니다.

"백제의 풀"

일제 강점기 막판, 전라북도 금읍에서 일하던 일본인 이하라는 아내를 두고 군에 소집되었다. 부대는 집과 가까왔지만 이등병 신분으로 외출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부대의 고급 참모 야나기하라 소좌가 자신의 사택에 하숙한다는걸 알고 난 뒤, 이하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 날, 모악산 기슭 금산사 경내에서 야나기하라 고급참모가 단도같은 흉기로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조선이 무대라서 반가왔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조선 주둔군 소속 일본군인들이며, 살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백제 고찰 금산사거든요. 죽은 야나기하라가 오른손으로 풀 한 줌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도 "백제의 풀"이지요. 전쟁 말기 조선 정읍이라는 지방에 대한 여러가지 상세한 묘사도 돋보였는데 작가가 전쟁 말기, 조선 정읍에서 주둔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티가 물씬 납니다. 내지보다 조선이 안전하다, 미국도 조선은 독립시켜 장차 우방으로 확보해 두고 싶을테니 폭격하지 않을거라는 이하라의 식견이라던가, 불령선인이 범인일 수 있다는 등 디테일들도 좋았고요.

추리적으로도 군인으로 위장한다면 만사형통이었을거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위한 간단한 변장 트릭과 이 트릭이 결국 단서가 된다는 전개 모두 괜찮았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야나기하라 소좌는 사건 당일 누군가 다른 군인과 함께 걸어서 어딘가(금산사) 로 이동하는게 목격되었습니다. 그래서 범인은 정체 불명의 군인이라 여겨졌고요. 그러나 유이치와 친분이 있던 보급 담당자 다카스기의 추리는 달랐습니다. 유이치가 새 군복을 부탁해서 몰래 새 군복 한 벌을 주었지만, 유이치가 새 군복을 결국 입지 않았던걸 단서였어요. 유이치는 새 군복을 어디에 썼을까? 정답은 유이치는 새 군복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몰래 부대를 나가, 군복을 입고 군인으로 위장한 아내와 밀회를 즐겼는데, 그만 야나기하라에게 발각되어 버린거죠. 그래서 아내가 이를 가지고 협박하던 야나기하라를 살해했다는 겁니다. 이 추리가 정답이었는지, 결국 유이치는 사지 오키나와로 전속되어 버린다는게 이야기의 결말이고요. 이 범행을 알아챈 윗 선의 누군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하라 부인이 군인으로 변장해서 금산사까지 이동해 밀회를 즐길 이유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집 근처 어딘가, 혹은 부대 근처 어딘가에서 밀회를 하는게 당연한 발상 아닐까요? 이하라의 장인은 결혼 선물로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줄 정도의 재력이 있는 인물인데, 이 정도 인물의 후광으로도 근처에 있는 아내를 보러가는게 과연 불가능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밀회를 알아낸 뒤, 야나기하라 역시 부인을 절로 꾀어내어 즐기려다가 살해당했을거라는 추리도 이상합니다. 야나기하라는 이하라 부인 집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구태여 밤에 외출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엇보다도 전시에 그나마 편한 조선에 있으면서 아내와 밀회를 즐기려고 몰래 부대를 빠져나간 병사는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 

전라북도 금읍에 위치한 남조선 연안 방비 사단에 새로 부임한 시노하라 겐사쿠 경리 대위는 사택 부인들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고고학 전공자라서 휴일에 금산사 경내를 산책하던 중, 사택 부인 중 한 명인 히사코를 만나 일종의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금산사를 더 자주 찾다가 하숙집 주인인 야마다 기사장, 금읍 최고의 부자 일본인인 속물 오이시 등만 차례로 만난 뒤, 이들이 왜 절에 왔는지 의문을 품게 되는데...

전편에 이어지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최후를 그린 작품입니다. 수수께끼는 야마다 기사장과 오이시가 왜 금산사를 찾는지? 인데, 이는 추리가 아닌 시노하라 대위의 미행을 통해 드러납니다. 야마다 기사장은 절에 초단파 수신기를 숨겨두고 몰래 전황을 들어왔던 겁니다. 기사장은 일본이 망하면 조선인이 봉기할테니 빼돌린 금을 가지고 바로 달아날 생각이었거든요. 오이시 역시 같은 목적이었고요.

여기까지는 꽤 흥미롭지만, 진상이 밝혀지는건 미행에 따른 결과라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이후 전개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합니다. 착하고 순진해보였던 역사학도 출신 군인 시노하라 대위가 일본 패망을 알고 군비를 빼돌리고 오이시와 야마다를 꼬드겨 일본으로 탈출하다가 둘 다 살해한다는 막장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이하라 부인마저 살해하고 반지를 빼앗는다는 암시마저 등장하니 말 다했지요.

일장기에 색을 칠해 태극기를 만들고 봉기한다는 등 당시 조선에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디테일은 여전히 놀라운 수준이고, 일본인들이 자기 하나 살자고 조강지처까지 버리면서 발악하다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어요. 허나 앞서 설명드렸듯이 추리적으로나 전개 면으로나 그다지 점수를 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와 2층" 

전쟁 때 군대에서 운전사로 일하던 하타노는 물자를 빼돌린 뒤 전후 암시장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잡았다. 레이코와 바람이 난 하타노는 아내 아키에와 이혼하고 싶어지지만 위자료가 아까와 죽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타노가 아키에를 살해하는데 사용된 기상천외한 트릭이 눈길을 끕니다. 아키에에게 큰 장화를 뒤집어 씌운 뒤, 곧바로 외출하면서 아랫층 관리인에게 부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니 윗층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피해자는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장화를 벗으려 발버둥 쳤지만, 관리인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올라가지 않았고요. 이후 아키에는 질식해서 죽음에 이르지만 이 때까지는 살아있었으니 범인 하타노의 알리바이도 완벽하게 성립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시한장치 트릭인거지요. 

트릭도 트릭이지만 흉기인 고무 장화는 하타노가 취급하는 물자로 현장에 널려있었다는 점, 또 시체를 발견한 뒤 곧바로 장화를 벗기고 자신이 신어서 증거를 인멸한 마지막 행동이야말로 진짜 탁월한 아이디어였습니다. 하타노가 1년 뒤 암시장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는 허무함도 전후 일본의 상황과 잘 어울렸고요.

범인 하타노가 대단한 완력을 지녔다는 등의 디테일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건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석양에 물든 성" 

스미코는 아버지의 지인인, 국회의원이었다는 아와시마에게 속아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에게 시집간다. 행복했던 나날은 잠깐 뿐, 남편의 광증을 알게 된 스미코는 이혼한 뒤 본가로 돌아온다. 그런데 뻔뻔한 아와시마는 되려 그녀를 농락하고, 살의를 품은 스미코는 아와시마를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한다.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 후계자라는 뻔한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 존재는 사건과는 무관하다는게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솔직히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그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부분도 없어요. 스미코가 아와시마에게 농락당한다는 전개도 지금 보면 영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스미코가 러브 호텔에 투숙한 아와시마에게 수면제를 탄 맥주를 먹이고, 욕실에서 익사시킨다는 범행의 설득력은 높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결국 사고사로 처리될 뿐 범행은 드러나지도 않고, 추리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신세 망친 처녀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인데 전형적이고 뻔해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전등" 

아버지의 골동상에서 일하던 스미코에게 혼담이 들어오지만 계속 거절하던 어느 날, 그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혼담을 가져오던 가나이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추파를 던지던 무라타였다. 둘 중 누가 범인인가?

전편의 주인공 스미코가 이번에는 피해자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스미코가 살해된 시간과 그녀의 방에 침입한 수법 등 범행 관련 정보를 초반부에 상세히 알러줍니다. 이 과정에서 '왜 범인은 살해 후 도주하면서 전등을 켜 놓았는지?'라는 수수께끼도 드러나고요. 전등만 꺼 놓았다면 시체가 보다 늦게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수수께끼가 앞서의 범행 시간, 범행 방법과 조합되어 뭔가 대단한 트릭이 나오겠구나! 싶은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런데 진상은 생뚱맞습니다. 불을 끄지 않은 이유는 범인이 도주할 때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을 무서워한 범인이 경황없이 도주했기 때문이라는 건데, 앞서의 복선이나 단서를 통해 밝혀지는게 아니거든요. 이를 경찰이 밝혀낸건 가나이가 연행된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난 덕분입니다. 운과 우연이 조합된 결과인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착상은 재미났지만, 정교함이 아쉽습니다.

"티켓"

고물상 다이치는 골동상의 첩 스가를 통해 철공소의 폐품 철사를 얻어 팔게 된다. 철사의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폐품 철사를 풀어서 파는데 큰 인건비가 들게 되어 고민 끝에, 고물업자 사카이의 요청 - 철사 푸는 기계를 만들테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 - 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가까지 끌어들여 큰 돈을 투자한 기계는 실패했고, 스가의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다이치는 사카이와 함께 스가를 살해하고 그녀가 가진 돈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는데...

다이치와 사카이가 스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범행 현장까지 끌고가 죽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범인의 완벽한 계획을 파헤치는 수사가 이어서 펼쳐지지는 않고, 사카이가 다이치까지 죽이려다가 자신이 죽고만다는 다소 허무한 결말이라서 도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추리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워요. 사카이가 다이치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왕 한 명을 죽였다면, 한 명 더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이려면 인적없던 스가 살해 현장에서 바로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스가가 가지고 있던 돈을 반으로 나누지 않아도 되니까요. 멀고 먼 시골 촌구석인 현장에서 기껏 도망쳐 나온 뒤, 시체에 유력한 증거인 '기차표'를 남겨두었다는 말로 다시 다이치를 현장으로 보낼 이유는 없어요.

전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돈에 매달리는 인간 군상에 대한 디테일은 좋습니다.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 범행이 일어나기까지의 긴장감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범행 동기가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필"

쓰치다 사부로의 집에 하숙하는 양공주 나쓰코는 대필을 업으로 하는 도쿠라와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빅터라는 중사의 '키푸' (병사 한 명에게만 전속된 아가씨)였는데, 종종 빅터에게 폭행을 당해 멍이 들고 화상을 입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쓰코는 도쿠라와 밀회를 위해 준비했던 집에서 죽었다. 사인은 질식사였는데, 그녀의 몸 어디에도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가스 중독이나 약물에 의한 죽음도 아니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범인이 나쓰코를 어떻게 살해했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인 본격물입니다. 허나 후더닛물은 아니에요. 범인은 도쿠라일 가능성이 가장 높거든요. 가장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뿐더러, 유력한 용의자는 빅터와 도쿠라밖에 없는데 빅터는 나쓰코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범행 방법만 알아내면 되는, 구태여 표현하자면 하우더닛물인 셈이지요.

등장하는 흉기는 전기입니다. 변압기를 연결하여 가정용 100볼드를 승압하여 감전사 시킨 것으로, 도쿠라는 간다에 있는 전기 학교를 졸업했다는 부연 설명도 있고, 나쓰코 시체에 땀을 많이 흘렸다는 단서도 제공하는 등 나름 공정한 정보 제공에도 신경 쓴 티가 납니다.

그러나 전기 감전사의 경우 몸에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도쿠라가 나쓰코 화상 자리에 전선을 가져다 대었다 한들 그 흔적이 완벽하게 감추어졌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요. 또 앞서 말했듯 유력한 용의자는 도쿠라밖에 없기에, 경찰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다면 범행 방법은 몰라도 범인을 밝혀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고요. 무엇보다도 도쿠라의 동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양공주와 관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이 떠오르네요.

"안전율"

도아 철강 회장 가구 류헤이에게 좌익 학생운동 단체인 총학련 재정부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흥미를 느낀 가구는 후쿠시마 준이치와 만나 그들의 사상을 들은 뒤, 2만엔을 기부했다. 그 뒤, 가구는 자신과 내연 관계에 있는 스탠드바 '코스타리카'의 마담 사호코가 바텐더 기미지마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학련 시위를 이용해 기미지마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적군파로 대표되는 60년대 급부상했던 좌익 학생 운동이 등장하는게 이채로왔던 작품. 사회적 이슈를 고발하는 작품을 써 왔던 사회파 작가답습니다. 좌익 운동의 지도부는 대학생 애송이들이지만 당시 사회 지배층들이 상당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묘사도 신기했고요. 또 프락치를 멤버들이 구분하여 린치하기 위해 특별한 표식을 한다는 설정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좌익 운동은 그냥 신기한 소재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를 범행에 사용할 의도였다면 목적, 방법이 명확했어야 하는데 , 단지 등 뒤에 마크를 하는 정도로는 많이 부족해요. 기미지마가 연적이라 할 수 있는 가구의 초대로 선뜻 학생 운동 현장에 나타났다는 내용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시위가 격해지기 전에 귀가해 버렸을 수도 있는 등 헛점도 많습니다. 차라리 마크는 경찰을 속이기 위함이며, 가구 회장이 직접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의 전개가 나았을거에요. 여러모로 너무 대충 넘긴 느낌입니다. 이 한 편만으로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네요.

아울러 "시마 과장"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일본 고위 인사가 내연의 처가 있는게 별로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문제가 되었더라도, 회장이 직접 살인에 나선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림자"

전 편에서 기미지마가 좌익 학생 운동 단체에게 살해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호코가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 이야기입니다. 전 편이 완성된 작품이 아닌 느낌이 든 건 당연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기미지마 살해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니까요. 사호코 마담이 기미지마를 바에서 찔러 죽인 것이라고요. 그 뒤 그녀는 가구를 위해서 죄를 지었기에 그를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랑 이야기죠? 그런데 와 닿지 않기는 전편과 마찬가지입니다. 전 편은 이야기의 구멍이 많은게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범행 방식이 문제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용해 유리를 잘라 흉기로 사용했다는게 특히 억지스러워요. 바에 흉기가 한두개가 아닐텐데 왜 흉기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범행을 저질렀을까요? 그것도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잘라가면서까지? 그냥 유리를 깨도 뾰족한 조각은 쉽게 얻을수 있었을텐데? 게다가 마지막에 다이아몬드에 난 상처가 큰 증거인 것 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걸로 유리를 잘랐다는건 증명하기도 불가능하고요.

경찰 수사망에 반지가 걸리는 것도 우연에 불과한 등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소멸" 

N시 호텔 공사 현장에서 일하게 된 17세 소년 지로는 휴일에 우연히 별장촌 주민 도요코를 만났다. 그녀는 지로가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걸 알고 여러가지 선의를 베풀었고, 지로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도요코는 결혼하여 별장촌을 떠난다고 지로에게 말했고, 지로는 도요코의 약혼자를 살해한 뒤 약혼 반지를 빼앗지만 이후 주박처럼 반지에 얽메이는데....

계급간 격차로 인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살의를 불러온다는 통속적인 내용의 작품. 그래도 밑바닥 노동자와 부잣집 딸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계급 격차를 빼면 '질투심'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도요코가 경찰에게 지로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별장에 초대해서 식사까지 대접해서 별장 고용인들도 아는 사실인데 왜 함구시켰을까요? 그녀 역시 나름대로 지로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걸까요? 하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전무합니다. 

게다가 마무리는 최악입니다. 지로가 증거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두려움 때문에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낮지만, 급작스럽게 반지를 공사현장 철근에 용접한 뒤 철근이 떨어져 이상한 흔적이 들통난다는 결말은 우연치고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심지어 공사장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떨어진 철근 자재에 맞아서 중상을 입고, 그래서 경찰이 함께 현장을 조사하던 중 철근에 백금이 달라붙은걸 알게 된다? 이 정도면 지로가 반지를 낀 채로 사건 담당 형사 앞에 떨어진다 수준의 우연일 겁니다.

고도 성장이 시작되는 상황에서의 빈부 격차, 사회 문제를 통속적이고 다룬 진부한 이야기로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반지를 이야기에 억지로 엮다가 마지막에 없애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