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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4

막대가 하나 - 타카노 후미코 / 정은서 : 별점 2점

막대가 하나 - 4점
타카노 후미코 지음, 정은서 옮김/북스토리

북 스토리 아트코믹스 시리즈 다섯 번째 단행본입니다. 관심이 가던 차에 연휴를 맞이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재 작품인, 과묵하면서도 성실한 남편과 그를 믿고 따르며 묵묵히 내조하는 아내의 잔잔한 일상을 그린 "아름다운 마을" 은 괜찮습니다. 잔잔한 이야기에서 일상 속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하는 좋은 작품이에요. 이와 비슷한 잔잔한 이야기인, 익숙치 않은 초행 심부름길을 다룬 "버스로 네 시에" 도 마음에 들었고요. 특히 이 작품은 앵글을 과감하게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영화적이기도 하면서 시대를 뛰어넘어 신선함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은 그냥 저냥입니다. 우선 "병에 걸린 토모코"는 굉장히 짧은 소품이라 언급하기 애매하고, "내가 아는 그 아이" 는 자신의 감정 표현에 대한 이야기인데 대단한 내용은 아니에요. "도쿄 코로보클"은 이야기는 명확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이야기였고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야기로 성립은 하는데, 마지막 수록작으로 가장 긴 중편 분량의 "오쿠무라 씨의 가지" 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더군요. 전기점을 운영하는 오쿠무라 씨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마도 외계 지성체로 보이는 아가씨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25년전 6월 6일 목요일 오쿠무라 씨가 먹었던 식사에 대해 물어봅니다. 그가 먹은 식사가 자기 선배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다는 이유로요. 그리고 온갖 기묘한 도구로 당시 상황을 추측해 나가는 내용으로 "막대가 하나"라는 대사가 여기 등장하는데...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줄거리를 요약해드리기도 힘드네요. 기묘한 설정과 과감한 묘사들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작품에 제대로 녹아났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아직도 세련되어 보이는 깔끔한 작화와 선 굵은 전개는 충분히 인상적이고, 잔잔한 이야기 속에서 깊이있는 심리 묘사와 기묘한 설정이 가끔 눈에 띈다는 점에서는 "카페 알파"의 직계 조상 쯤 되는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카페 알파" 만큼의 재미나 고즈넉함, 여유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아트 코믹" 취향은 아닌 듯 싶네요.

2009/11/05

군청학사 - 이리에 아키 : 별점 4점과 3점들

군청학사 1 - 8점
이리에 아키 글.그림/중앙books(중앙북스)

군청학사 2 - 6점
이리에 아키 글.그림/중앙books(중앙북스)

군청학사 3 - 6점
이리에 아키 글.그림/중앙books(중앙북스)

아. 정말 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단편집입니다. 제목이 왠지 멋있는데 푸르른 청춘들이 모여든 장소를 의미한다네요. 내용은 꼭 그런것만은 아닌데 좀 의아하긴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엠마의 모리 카오루를 연상하신 분들이 많던데 저 역시도 비슷한 화풍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몇컷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솜씨 등 유사한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지 그 정도로만 규정하는 것은 섭섭한 일이겠죠. 여러 작가의 장점들이 많이 떠올랐거든요.

첫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카페 알파의 아시나노 히토시입니다. 왠지 모르게 느슨하고 나른한 느낌과 정적인 분위기. 조용한 와중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끄는 섬세함과 디테일, 그리고 부드럽게 그린 그림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카와하라 유미코입니다. "전략 밀크하우스"보다는 단편집에서 선보였던, 전형적인 중세풍 판타지를 비롯해서 로맨틱 코미디, 청춘드라마, 학원물 등 쟝르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면서도 그 수준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대단한 능력 때문입니다. 저는 약간 코믹한 분위기의 단편들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허투루 보기 힘들정도의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랍더군요. 

세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백귀야행의 이마 이치코입니다. 이유는 이마 이치코의 오리엔탈 판타지에서 느껴졌던 복잡한 설정과 진한 여운, 그리고 특유의 코믹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작가가 굉장히 유쾌한 인물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작품들에 짙게 배어있는 유머 덕분에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아토리 케이코입니다. 단편 중심이라는 것과 밝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여유있는 화풍으로 그리고 있다라는 것이 정말 놀랄만큼 유사하죠. 아토리 케이코 보다는 조금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들이 많고 드라마를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말이지 비슷했어요. 아토리 케이코는 이미 고인이 되신지라 더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없다는것이 안타까왔는데 이리에 아키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도 많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는 섬세한 심리묘사, 그리고 유머와 더불어 일상속에서 디테일을 잡아나가는 분위기가 왠지모르게 요시나가 후미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급하고 싶네요. 작풍과 표현 방식은 전혀! 전혀 다르지만 뭔가 감수성이랄까? 그런게 좀 비슷했던것 같달까요... 

마지막으로 연상된 작가는 TONO입니다. 구태여 작품을 고르자면 "카오루씨의 귀향"인데 기발하고 독특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것과 유머가 작품에 전체적으로 녹아있다는 것이 비슷했습니다. 판타지에 강점을 보이는 것도 유사했고요.

하지만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이 고르게 완성도가 높다고는 하지만 2권의 "북의 십검"같이 별다른 특색없는 이야기도 있고, 첫 번째 이야기 외에는 그닥 새롭지 않은 핑크 초콜릿 에피소드 연작은 좀 지루했습니다. 

또한 별다른 이야기 전개 없이 특정 상황에만 집중한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보다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압축해서 전달하기도 하지만 여운만 가득할 뿐 이야기가 애매한 에피소드들도 눈에 띕니다. 예를 들자면 1권의 "이계의 창"이나 "숲으로" 를 들 수 있습니다. "박명"도 여주인공이 사실은 장님이었다 정도의 작은 반전이라도 선보이는게 더 좋았을 거에요. 아울러 3권은 전체적으로 1, 2권에 비해 작화나 구성에 힘이 떨어져 보여서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 에피소드로는 1권에서는 "포로공주"와 "선생님 저는"을, 2권에서는 "니논의 사랑"을, 3권에서는 "빨간 지붕의 집"을 들고 싶네요. 별점은 1권은 4점, 2권과 3권은 3점입니다. 2권은 너무 평범했던 "북의 십검"이 절반 이상 분량이라 점수가 깎였고, 3권은 앞서 이야기한데로 1,2권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서 감점했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평균이상은 하는 작품들임에는 분명한만큼 수수하면서도 여유롭고, 그러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즐시기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일단 1권부터 챙겨보시기 바랍니다.

2012/08/04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 - 로드 던세이니 / 정보라 : 별점 2.5점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 - 6점
로드 던세이니 지음, 정보라 옮김, 이승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바다출판사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18번째 작품으로 이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게렉터님 블로그 리뷰를 접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로드 던세이니는 고전 "두병의 소오스"로 접하고 관심이 있었지만, 다른 작품들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차에 반가운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작품들 대부분이 전형적인 "판타지" 문학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제 기대와는 좀 달랐습니다. 반전이 빼어나고 촌철살인의 맛이 있는 "쇼트쇼트" 같은 작품을 기대했었는데 말이죠. 게다가 몇몇 작품은 당최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도 "불행교환상회"나 "어느 여인숙의 하룻밤" 같은 기대에 걸맞은 작품도 실려 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정통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

영혼이 갈 데가 없어 버려진 존재들 속에서 기거하게 된 운명에 처한 남자가 최후에 구원받는다는 초단편. 철학적이면서 "불새 - 우주편"이 떠오르기도 하는 등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너무 짧은 탓에 재미만 놓고 보면 그닥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들판"

들판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관한 이야기. 솔직히 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

"칼과 우상"

철기와 종교의 도입 시기에 벌어졌음직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 결국 종교가 승리한다는 결말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상당한 수작이었습니다. 지금의 세태에 대한 풍자적 의미도 담겨 있는 듯 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카르카손"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카르카손을 향해 무모한 도전을 떠나는 정복자 일행에 대한 서사시. "원탁의 기사" 등이 연상되는 고전 느낌의 정통 판타지 문학입니다. 고전 느낌 그대로라서 의외성이 하나도 없다는건 단점이지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런데, 보드게임 "카르카손"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좀 궁금합니다.

"거지들"

이상한 예언을 하는 거지들과 맞닥뜨린 주인공이 버스 경적 소리로 환영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 "들판"처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별점은 1점.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

표제작. 특별한 줄거리가 있다기보다는 주인공이 얀 강가를 중심으로 한 이국적인 도시들을 여행하며 경험한 것에 대한 기행문 성격의 작품입니다. 문체와 분위기, 설정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국적인 독특함이 일상계스러운 분위기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카페 알파" 등이 떠오르는데, 좀 더 풀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되네요. 혹 후속작이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행교환상회"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것과 교환해 주는 상점에 관한 이야기로, "환상특급"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결말이 예상 범위 안에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런 작품이 좀 더 많이 실렸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별점은 3점입니다.

"어느 여인숙의 하룻밤"

짤막한 희곡. 많은 모험소설에서 접했던 "이교도 유적에 있는 신상의 보석 눈을 훔친 도둑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중반까지는 일당의 브레인 '멋쟁이' 활약 중심의 모험-범죄물이었다면, 마지막 반전 이후 결말은 "기묘한 맛" 장르에 가깝습니다.   

반전이 굉장히 뛰어나서 전편을 통틀어 가장 기대에 값했던 작품이에요. 실제 연극도 보고 싶어지더군요. "두병의 소오스"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7/06/03

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 - 이시야마 아즈사 / 김은모 : 별점 3점

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 - 6점
이시야마 아즈사 지음, 김은모 옮김/북폴리오

구루메, 미식, 음식 관련 만화 홍수의 시대입니다. 꾸준히 사 모으는 몇몇 작품들("술 한잔 인생 한입" 등)을 제외하면 눈길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조금 피로감도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한 권으로 끝나며, 풀 컬러에 동화 일러스트같은 따뜻한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 구입해 보았습니다.

그림 관련 일과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는(듯한) 평범한 처녀 작가의 하루하루의 끼니 소개 만화로, 주로 야식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단한 드라마 없이 먹거리에 집중하는게 특징이고요. 먹거리에 관련된 짤막한 추억, 에피소드와 그날 그날 만든 먹거리에 대해 소개하고 맛있게 먹는 게 전부거든요. 

하지만 꽤 재미있었어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뭐 그리 큰 드라마가 있겠습니까. 이 작품처럼 야식으로 뭘 먹을까에 대한 고민이 그날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게 현실적이지요. 맛있는 걸로 세계 평화가 찾아오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마음에 듭니다. 유사 작품들과 비교하면 '혼밥', '집밥'이 주요 소재라는 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점, 레시피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차별화 요소도 확실하며 작화도 좋은 편이에요.

레시피들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집에서 해 먹음직한 것들이 대부분인 덕분입니다. 오븐 등 거창한 도구도 쓰지 않고 전자레인지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에요. 설거지가 귀찮아 알루미늄 호일을 적극 사용하는 것도 제 스타일이고요. 두께 있는 재료도 넣을 수 있는 '토스터'를 사용하는 레시피가 간혹 있기는 한데, 이 역시 프라이팬으로 대체 가능할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자도 그렇게 소개하더군요.
등장 레시피 중에서 가장 도전해보고 싶은 것은 우동 겉을 물로 적시고 사발에 넣어 랩을 씌운 후 전자렌지에 5분 돌려 맛국물 + 참깨 + 파 + 후리카케 + 날계란 조합으로 먹는 간단 우동! 입니다.

혼밥 야식 이야기 외에도 "여러 가지 야식 편"이라는 제목으로 밖에서 사 먹었던 음식들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뒷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데,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는 흔해 빠진 형식이지만 역시나 따뜻한 그림이 잘 어울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컬러 일러스트 느낌을 주는 먹거리 이야기와는 다르게 모두 펜으로 그려진 전형적인 만화 작화인데, 약간 "카페 알파" 느낌도 나서 저는 이 쪽 작화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구루메, 미식, 음식 만화의 홍수 속에서 소박하게 자신의 위치를 가져갈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이런 류의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8/11/04

악몽을 파는 가게 2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악몽을 파는 가게 2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 단편집 2편입니다. 원초적인 공포보다 순문학 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물씬 풍기던 최근 작풍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수록작들 수준이 높습니다. 전권에서는 "우르"라는 기대 이하의 졸작도 수록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수록작 대부분 완성도가 평균 이상이에요. 과거와 같이 화끈하지는 않더라도, 일정 경지에 오른 거장이 맘먹고 쓴 쉼표같은 작품들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스티븐 킹의 현재를 보여주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뛰어난 작품이 많아요. 작품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허먼 워크는 여전히 건재하다"

도망친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얻은 각각 4명, 3명의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 재스민과 브렌다의 이야기로 암담한 아줌마 버젼의 "델마와 루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둘의 암담함과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심리 묘사 외에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연로한 두 시인의 등장은 뜬금없습니다. 허먼 위크가 아직 건재한 것도 딱히 상관이 없고요.

하지만 두 아줌마들의 암담함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압권이라 그 둘이 순식간에 사로잡히는 자기 파괴적 생각에 동의하게 만드는 수작입니다. 이제는 스티븐 킹을 호러의 제왕이 아니라 암담함의 제왕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요. 같은 암담함이라도 "1922"는 픽션 느낌이 좀 있었는데, 이 작품은 너무 현실적이라 더 와 닿고 무섭습니다. 작품을 쓰게 된 발단이 되었다는 기묘한 교통 사고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컨디션 난조"

아내 엘렌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시체를 집 안에 방치해 놓은 광고쟁이 프랭클린의 이야기입니다. 

이전의 킹이었다면 프랭클린이 아내를 죽였거나, 아내의 시체가 모종의 이유로 되살아났거나, 아니면 시체 냄새를 맡은 아파트 주민들이 좀비같이 변해 거대한 학살을 불러 일으키는 식으로 전개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프랭클린은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인물이며, 그의 행동은 "사랑" 때문으로 묘사됩니다. 결말도 그냥 아내 시체 옆에 머물 뿐이고요.

이렇게 대단한 드라마는 없지만, 킹이 쓴 순애보라는 점 만큼은 독특합니다. 오지 오스본의 발라드같은 느낌이랄까요? 과거의 킹 스타일도 좋지만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철벽 빌리"

전 메이저리그 관계자 조지 그래섬이 스티븐 킹에게 1957년 뛰었던 '철벽 빌리' 라는 선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의 작품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철벽 빌리"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인터넷 용어로 따지면 "야모순바(야구밖에 모르는 순진한 바보)" 그 자체인데, 그래서 무섭거든요. 야구를 하고 싶은 소년에게서 야구를 빼앗으려 하자 모든걸 없애버리고, 친구의 승리가 빼앗겼다고 느끼자 심판을 살해해 버리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캐릭터가 존재함에도 빌리와 그의 잔혹한 행각의 비중보다는 1957년 당시 야생적이었던 메이저리그와 선수들, 시합 장면에 대한 묘사 비중이 높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도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고요. 또 이는 직접 살해 현장을 목격하지는 않은 조지 그래섬 1인칭 시점인 덕분도 큽니다. 조지 그래섬의 입을 빌어 실제 존재했던 팀과 선수들에 대해 조금씩 풀어가며 설득력을 높이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딱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빌리의 사연을 너무 대충 넘긴 부분입니다. 빌리 블레이클리와 그 가족을 살해한 원래의 유진 캣서니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에, 다른 평범한 싸이코 살인마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유진 캣서니스 시기의 암담함을 특유의 묘사로 풀어내었더라면 "1922" 수준의 수작 중편이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스터 여미"

노인 요양원에서 '미스터 여미'라고 불리우는 존재를 목격하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내용의 단편입니다.

노인들이 아직 젊었을 때 빛나던 존재를 목격하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그리고 노인들이 죽기 전 젊었을 때의 설레임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는 묘사는 킹도 늙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네요. 한마디로 죽을 날이 머지 않은 킹의 바람(?)을 그린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토미"

조금 독특한 운문(?) 형태의 짤막한 작품. 그런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를 추억하기 위해 쓴 개인적인 습작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록색 악귀"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돈이 많은 뉴섬은 비행기 사고를 당한 뒤, 지속적인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 바닥에서 잘 알려진 목사 라이드아웃을 초빙했다. 전속 물리치료사인 캣(캐서린)은 그가 사기꾼이라고 확신하는데... 

사기꾼으로 알았던 라이드아웃의 캐릭터가 돋보입니다. 실제로 몸 속에 존재하는,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악귀를 끄집어 내어 잡을 수 있는 능력자라는게 밝혀지는 전개도 좋았고요.

하지만 악귀를 끄집어내는 과정까지의 전개가 너무 길고, 악귀와의 사투도 심심하며 결말도 그냥저냥이라 아쉬움이 더 큽니다. 정전 상태에서 캣의 손으로 무언가 스물스물 올라온다는 정도로는 약합니다. 결국 라이드아웃의 용기에 담지 못한 초록색 통증 악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여러모로 보았을 때, 이 작품만큼은 과거의 크리쳐물 형태로 썼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저 버스는 다른 세상이었다"

뉴욕의 러쉬 아워에 갇힌 광고쟁이 월슨이 우연하게 나란히 선 옆 버스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걸 목격했지만, 중요한 프리젠테이션 생각에 그 사건을 무시해 버린다는 내용입니다.

윌슨에게 연이어 닥치는 불행에 대한 묘사는 재미있는데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네요. 윌슨이 프리젠테이션에 늦지 않을까?라는 드라마가 살인 사건보다도 비중이 클 정도로 사건이 건조하게 묘사되는 탓입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드라마가 없는거지요. 주위 사람들에게 무심한 현대인들, 돈이 더 중요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고 보기에는 풍자 요소도 많지 않고요.

한마디로 평범 이하 수준의 범작입니다. 창작 의도는 알겠지만 제대로 구현되었다고 보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부고"

인터넷 뉴스 매체에서 부고 기사를 쓰는 찐따 마이크에게 가짜 부고를 실제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게 밝혀지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2016년 에드가상 단편 부문 수상작이지요. 

작가가 의도치않게 쓴 글이 현실로 벌어진다는 설정 자체는 평범합니다. 오래전 킹 스스로도 "신들의 워드프로세서"라는 비슷한 작품을 쓰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부고를 쓴 인물 뿐 아니라 근처에 사는 같은, 혹은 비슷한 이름의 인물들이 함께 죽어나간다는 차별화되는 설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크가 오지 와이오밍의 라라미에서 숨어 산다는 결말도 괜찮습니다. 마이크는 (꿈자리는 사납지만) 꽤 괜찮은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는 듯 하고, 그의 능력으로 도움을 준 몇몇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생겼다는 해피엔딩인데 나쁘지 않아요. 최소한 모두 파멸해 버리는 뻔한 결말은 아니었으니까요. 인터넷 매체 '네온 서커스'와 거기 실리는 기사들, 소속 기자들에 대한 정신나간 묘사들도 최신 트렌드 느낌으로 잘 그리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작품들 중에서 돋보이냐 하면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에드가상을 수상할만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이름의 사람들이 죽는다는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냥 도망친다? 이야기를 너무 쉽게 마무리한 느낌이에요. 솔직히 부고를 쓴 후 그것을 기자가 실제로 만든다는 다른 단편들쪽이 더 오싹하죠.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라는 고전 서부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라라미가 정말 미국에서도 유명한 깡촌인가 보네요. 라라미로 도망치면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해결될 정도라니...

"취중 폭죽놀이"

호수 산장에 사는 올던과 어머니가 호수 건너편 대저택에 사는 마시모 가족과 매년 7월 4일, 폭죽 놀이 배틀을 벌인다는 흥겨운 이야기. 결국 올던이 마지막에 구입한 2000달러 짜리 폭죽 "제 4종과의 조우"가 마시모 가족 저택을 홀랑 태우는 결말까지 한 치의 방심도 할 수 없이 유쾌하게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전작에서도 그렇고 킹이 여러 작가의 작풍을 모방하는 취미가 생긴 듯 한데, 이 작품은 어디로 보나 마크 트웨인이 떠오르더군요. 전편에 걸쳐 흐르는 유머도 그렇고, 마지막에 두 가족 모두 집을 태워먹고 화해한다는 결말까지 말이죠.

올슨과 어머니가 알콜중독이었다는 등의 불필요한 설정은 조금 거슬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킹 작품 중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흔쾌히 권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에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여름 천둥"

핵전쟁 이후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로빈슨이 유일한 친구 팀린과 애견 간달프마저 죽자 할레이 데이비슨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소품입니다. 

특징은 죽어가는 생존자들이 보이는 인간미가 돋보인다는 점입니다. 킹의 예전 작품이라면 이들이 사는 마을에 지옥도가 펼쳐졌을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지옥도 대비해서 화끈한 재미가 부족하다는건 단점입니다. "카페 알파"도 나쁘지야 않지만 "세기말 구세주 전설"이 아무래도 더 화끈한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3/01

학생가의 살인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학생가의 살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헤이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않은채 몰락해가는 학원가 카페 '푸른 나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 소모품은 되기 싫으며,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는 바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거리를 탈출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아르바이트 동료 마쓰키가 살해당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고헤이의 연인 히로미마저 피살되고 말았다. 고헤이는 히로미의 동생 에쓰코와 손잡고, 형사 고즈키와 경쟁하듯 사건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들을 비웃듯 학생가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에 시체가 매달렸다. 피해자는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 '수국학원'의 원장 호리에였다. 수국학원은 생전 히로미가 봉사활동을 하던 곳이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추리소설로 1988년 발표된 초기작입니다.

초기작임에도 흥행 작가의 역량은 충분히 보여줍니다. 방대한 분량임에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덕분입니다. 세세한 인물과 배경 설정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히 인공 지능 관련 신기술을 핵심 소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돋보입니다. 공대 출신이라는 배경을 잘 활용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알파고' 덕분에 화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는 소재인데, 무려 30년 전에 도입해서 이만큼 낡아보이지 않게 풀어낸 솜씨도 정말 대단하고요. 버블 시기,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상황도 아련하게 시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러한 시대와 겹쳐진 문란하면서도 대책없는 청춘들의 행동은 80년대 하루키스러웠고요.

추리적으로도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만큼은 괜찮습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며 이 단서들을 바탕으로 의외의 진상 - 모든 범행은 5년전 히로미가 피아노 콩쿨에서 연주를 하지 못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진상을 드러내는 점과 결말만큼은 유명 고전 본격물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각 사건 별로는 큰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건인 마쓰키 사건은 트릭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라 시시합니다. 사건 해결도 피해자가 4년 전 센트럴 전자 주식회사에 근무했던 당시 접촉했던 인물을 찾아낸 경찰의 활약 덕분이라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재미는 없습니다.

두 번째 히로미 사건은 밀실 트릭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지만 허술합니다. 죽은 히로미가 6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출발한 이후 3층에 잠깐 멈췄다가 6층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고, 계단으로는 고스케가 이동하고 있어서 범인이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상황입니다만... 여러모로 완벽한 밀실로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작중 에쓰코의 언급대로 3층, 또는 6층에 거주하는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고, 옥상으로 도망친 후 후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계단을 올라가면서 층별 복도를 과연 그렇게까지 유심히 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칼에 찔린 히로미가 엘리베이터로 도망쳐 6층을 누른 뒤 사망했다는 트릭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의 현장 검증으로 경찰이 범행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구태여 꽃다발을 끝까지 들고 있던 이유도 애매하거든요.

또 첫 번째 , 두 번째 사건을 연결하는 잡지인 "사이언스 논픽션"도 거슬립니다. 잡지 안에 각서가 들어있다는 것을 이하라가 알아챈 이유도 석연치 않고(죽기전에 마쓰키가 실토했을까요?), 각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하거든요. 우선 이하라가 히로미에게서 회수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지막에 고스케를 죽이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증거가 없어진 것이니까요. 반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면 잡지 속에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그것도 이상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사건이자 세 번째 사건인 호리에 원장 사건은 이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트릭없이 우연이 개입되어 미궁에 빠졌을 뿐인 탓입니다. 만약 서점 주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준코의 범행은 여기서 드러났을 거에요. 이 사건은 사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작위적인 전개도 도가 지나칩니다. 만약 이하라가 히로미를 살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로미 살해는 아무리 준코가 안배했다 하더라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이 겹쳐있습니다. 히로미가 도주에 성공했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준코는 대체 어쩔 셈이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흥행작가다운 면모는 충분히 과시하는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