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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3) 무덤 위 에로그로 식탁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이단자의 사랑"입니다. 이 작품은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34년에 단편 "타원형의 거울"로 데뷔한, 국내 최초의 본격 추리소설 작가 김내성의 단편입니다. 저는 절판된 지 오래된 단편집 "비밀의 문"을 통해 이 작품을 접했는데, 다행히 최근 복간되어 이제는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책으로도 출간되었으니 참고하세요.

의사 김철하는 애련과 약혼했지만, 1년에 한 번만 그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고 그녀를 시인 추강에게 양보합니다. 추강이 그녀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련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추강은 그녀의 묘 위에 복숭아나무를 심습니다. 애련의 살과 피로 자라난 복숭아 열매를 김철하가 보는 앞에서 홀로 독점해 맛보기 위해서였지요. 추강은 김철하가 찾아오는 날마다 복숭아를 따 먹으며 그의 앞에서 자신의 승리를 과시합니다.

이 장면은 추강의 광기 어린 독점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묘사가 정말 일품입니다. 탐미적이면서도 에로틱하고, 변태스러우면서도 그 과즙이 입안에 흥건하게 고이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미녀의 무덤에서 자란 과일로는 복숭아만 한 게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복숭아는 원래 미녀를 상징하는 과일이기도 하니까요.

복숭아는 본래 "손오공"에 등장하는 천도복숭아처럼 장수의 상징이자 귀신을 쫓는 신령스러운 과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농밀한 여인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는데, 복숭아의 특성과 맛 때문일 겁니다. 맛있는 복숭아를 뜻하는 '수밀도'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껍질이 얇고 살과 물이 많으며 달콤한 맛'이라는 뜻이 미녀와 연결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요. 뜻 뿐만이 아니라, 높은 당도에도 불구하고 저칼로리에 수분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다이어트에 좋고, 비타민도 많아서 피부 미용에도 좋으며, 피부의 멜라닌 생성을 촉진하는 타이로시나아제라는 성분을 억제해서 피부 미백 효과도 볼 수 있다니, 미인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과일입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추강은 한여름 날 복숭아를 따서 껍질째 먹는데, 이 방식이야말로 복숭아를 제대로 먹는 방법입니다. 껍질에 비타민 E 등 유익한 성분이 많고, 높은 온도에서 단맛이 더욱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강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김철하는 복숭아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가져온 고래고기 통조림만 먹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래고기의 정체를 알아챈 추강에게 김철하가 "고래고기다!"라고 외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43년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입니다. 당시 고래고기는 가장 싸고 대중적인 고기였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도 전쟁 전후에 고래고기가 저렴한 서민 음식으로 자주 언급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이전에는 포획량이 많아 흔한 음식이었습니다. 지금은 포경 금지로 인해 귀하고 비싼 음식이 되었지만요.

고래고기는 육고기와 생선의 중간 맛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회나 수육으로 먹었고 일본에서는 스테이크나 꼬치 요리로도 소비되었습니다. 외국 사례를 보면 "모비 딕"에서는 스테이크로 먹는 묘사가 등장하고, 아이슬란드에는 고래고기 꼬치가 전통 요리 가운데 하나라고도 하네요.

콜레스테롤 없는 불포화지방산을 다량 함유하고 있고, 온갖 비타민도 골고루 들어 있어 영양가도 뛰어나지만, 특유의 냄새 때문에 호불호가 갈립니다. 철 성분이 많은 고래의 피가 썩으면서 나는 냄새인데, 고래는 죽자마자 바로 피가 부패되기 시작합니다. 육지 동물보다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은 탓이지요. 헤모글로빈은 단백질이라 곧바로 썩거든요. 그런데 고래는 정식으로 잡을 수 없어서 그물에 걸려 죽은 경우 등에 한해서만 유통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피를 곧바로 뺄 수 없어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작품에서처럼 통조림으로 만들 때는 냄새가 심한 싸구려 고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진한 양념을 사용해 냄새를 잡고 맛을 균일화하는 조림 방식으로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야마토 조림' 고래고기 통조림이 있습니다. 설탕, 생강, 간장 등으로 조린 이 요리는 냄새를 잡고 고기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다만 고기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짐작하시듯, 작품 속 고래고기 통조림 속의 고기는 고래고기가 아닙니다. 조리 방식도 장기 보존을 위해 소금에 절인 뒤 말렸을 뿐이지요. 같은 재료,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육포는 야마시로 아사코의 "엠브리오 기담" 수록작 "지옥"에도 등장합니다. 산적들에게 잡힌 주인공이 구덩이에 갇혀, 산적들이 던져 준 육포로 연명하다가 함께 갇혔던 신혼부부 중 신부가 도망친 날, 신선한 고기가 던져졌다는 내용이 압권이지요. 지옥 구덩이에서 주인공이 탈출에 성공해 산적 일가를 구덩이에 가둔 뒤 벌어진 참상도 상상을 초월하고요. 참고로 야마시로 아사코는 "ZOO""GOTH"의 작가 오츠 이치의 또 다른 필명입니다. 작품도 과연 오츠 이치구나 싶어요.

"이단자의 사랑"은 지금 기준으로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에로그로' 코드가 과도하고,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이 짙으며, 흔한 삼각관계 치정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과학자의 대결 구도도 다소 부자연스럽고요. 그러나 반전만큼은 강렬합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약 50년 전에 이 작품을 읽으셨는데도 이 반전을 아직도 기억하실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해 사용된 복숭아와 고래고기의 대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복숭아는 농밀하고 탐미적인 에로스를, 고래고기는 거칠고 냉혹한 그로테스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에로그로'라는 키워드를 음식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리메이크한다면 어떤 통조림이 적합할까요? 저는 골뱅이 통조림을 떠올렸지만, 고기 형태가 너무 달라 쉽게 들통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통조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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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5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유감.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2점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센텐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국내 미출간 단편집이라 하여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챗GPT를 통한 자동 번역이 어느 정도 보편화된 시대에, 이런 수준의 번역을 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래는 이 책의 "폴스타호의 선장"의 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는 비스킷 반 탱크,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커피콩과 설탕의 매우 제한된 공급이 남아 있었다. 후방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하리코 양고기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사치품이 많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50명의 인원이 먹기에는 매우 한정된 양이었다.

창고에는 밀가루 두통이 있고 담금질한 담배만 많았다. 모두 합쳐서 18일이나 20일 동안 절반의 배급으로 선원들을 지탱할 수 있는 양이었다. 

...

"여러 시즌 동안 우리나라에 온 배 중에는 오래 된 폴스타호 만큼 많은 석유 돈을 벌어들인 것이 없었고, 너희 모두가 그 돈을 나눠가졌지. 다른 불우한 녀석들이 와이프를 편안하게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너희들은 그 여유를 누렸다. 너희가 그것을 얻은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해야 하며, 우리가 실패한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다. ."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담금질한 담배'라니....  아래는 원문(저자 사후 70년이 지난, 저작권이 풀린 퍼블릭 도메인이라 무료입니다)을 찾아서 챗GPT에게 번역을 시킨 결과물입니다. 그냥 보아도 수준 차이가 확연하지요. 번역본이 임의로 원문을 줄인 것도 눈에 뜨이고요.

선수 쪽에는 비스킷 반 통,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그리고 커피콩과 설탕은 아주 적은 양만 남아 있었다. 선미 쪽 창고와 보관함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해리컷 양고기 등 사치품에 가까운 식료품들이 제법 있었지만, 승무원 50명에게 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저장실에는 밀가루 두 통과, 담배는 무제한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져봤을 때, 모든 인원이 절반의 배급량으로 나눠 먹어도 18일, 길어야 20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

“그동안 이 땅에 오는 배들 중에서 ‘올드 폴스타’호처럼 많은 기름 돈을 벌어들인 배는 없었고, 여러분 모두 그 덕을 봤잖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집에 아내를 안심시키고 떠났지만, 다른 불쌍한 놈들은 돌아와 보니 여자가 구빈원에나 들어가 있지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를 원망할 수 있다면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이번 전에 대담한 모험을 해서 성공했었고, 이번엔 실패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울고불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 "

하여튼, 이따위 결과물을 돈 받고 팔려고 했다는게 황당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기에 점수를 따로 주지는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책은 사라져주면 좋겠네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북극성 호의 선장"은 다른 단편집에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단편은 무료 텍스트를 챗 GPT에 번역을 시키는게 훨씬 나을겁니다.

2025/04/04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김성준, 김주식 : 별점 4점

미친 항해 - 8점
마이크 대쉬 지음, 김성준.김주식 옮김/혜안

마이크 대쉬가 집필한 역사 논픽션입니다. 1628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바타비아 호가 이듬해 6월, 현재의 소호주 해안 인근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한 뒤 생존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BBC History Magazine과 History Today 등의 권위 있는 역사 전문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항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선장이었지만, 직급상 최고 책임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대상인' 프란시스 펠사아르트였습니다. 선장 야콥스와 펠사아르트 사이의 갈등은 여자 문제 등으로 항해 중부터 깊어졌고,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부상인'이자 전직 약제사였던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였습니다. 그는 선장을 꼬드겨 선상 반란을 모의했는데, 바타비아 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면서 계획이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사아르트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바섬으로 떠난 틈을 타서 코르넬리스는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체계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식량과 식수를 가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서, 반항할만한 불순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펠사아르트가 구조대를 이끌고 보물을 회수하러 돌아오면, 그 배를 점령해 해적 생활을 하려는 계획으로요. 그래서 병자와 노약자,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약 115명에 달하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계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회수할 보물이 많기에 구조대 인원이 많지 않을거라는 코르넬리스 생각대로 구조대가 움직였거든요. 그러나 말라 죽으라는 의도로 다른 섬으로 보내졌던 위이버 헤이스와 건장한 남성들이 우물을 발견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코르넬리스의 학살을 알게된 후 방어 거점을 구축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코르넬리스는 친위대를 이끌고 위이버 헤이스를 속이려다가 사로잡혔고, 코르넬리스의 후임이 일당들과 함께 위이버 헤이스 섬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대상인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스럽다고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라웠어요. 여튼, 위이버 헤이스와 코르넬리스 세력은 각각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으로 사람을 보냈고,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에서 위이버 헤이스가 이겨서 폭도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코르넬리스의 음모는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난파 후 서사만으로도 영화나 소설로 각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코르넬리스가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학살을 지시하며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세계 전생물'로 바꾸어 보아도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와 조직(동인도 회사)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종교론과 조직에서의 직위를 무기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는게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저자 마이크 대쉬는 방대한 사료 조사와 기록 분석을 통해, 사고 외에도 각 인물의 생애와 심리, 사회 구조적 배경까지 책에 촘촘히 담아냅니다.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가 처한 시대와 개인적 몰락, 종교적 배경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업 구조와 식민 경영 방식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납니다. 실제로 코르넬리스의 생애만 따로 정리한 분량이 3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이 꼼꼼하게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놀라운 수준입니다. 코르넬리스의 아내에 대해서까지 최대한 조사해서 수록했을 정도니까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당시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설명 역시 상세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항해 중 먹거리 설명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바다 고기를 낚으면, 누가 고기를 낚든 매일 맨 처음 낚은 고기는 선장의 몫이었고 그 다음 12마리 정도는 상인과 사관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인정된 순서에 따라 고기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게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그래서 선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조림에 든 고기와 콩, 건빵으로 알려진 딱딱한 빵인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는 음식의 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 도축한 돼지와 소를 사들여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피도 빼내지 않은 채 바닷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리된 고기는 쌌지만, 아주 짜서 조리를 하려면 청수에 담가 짠 맛을 빼내야 했는데, 항해 중에는 한정된 식수를 절약하기 위해 바닷물에 넣어 끓였다는군요. 얼마나 짰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말린 생선도 싣고 다녔는데, 대구가 대부분이었다네요. 말린 대구는 스튜로 끓여서 역 시 말린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함께 먹었고요. 그 외 먹거리들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호 선원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잘 먹고 잘 마신 편이라는게 충격적입니다. 부과된 노동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가혹했던 항해에 대한 설명 등 재미있는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이렇게 재미와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 모두 빼어난데, 코르넬리스가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이라던가, 후일담 이후 코르넬리스가 정신병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 비중이 지나치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들 후예가 살고 있을거라는 추측도 마찬가지고요. 섬에서의 학살도 논픽션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책의 디자인과 구성도 옛스러워서 읽기 불편했고, 도판도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입니다. 난파에 대한 논픽션을 세 권째 읽게 되었는데 - "바다 한가운데서", "메두사 호의 조난" - 대체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장르인 것 같네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06/09

All of panpanya

최근 푹 빠진 작가 panpanya의 국내 소개된 작품 8편을 모두 완독하였습니다. 제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 (5)
  2. <<두 번째 금붕어>> (4)
  3. <<동물들>>, <<구아바노 홀리데이>>, <<게에게 홀려서>>, <<물고기 사회>> (3)
  4. <<침어>> (2.5)
  5. <<아시즈리 수족관>> (1.5) 
전권 평균 별점이 3점 이상이라니 놀랍네요. 
완독 기념으로 전권 리뷰를 올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즈리 수족관 - 4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초기작 중심 단편집. 작화는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편안함과 거침이 공존하고 있어요. 특유의 부드럽고 편안한 그림체가 아닌, 정석적인 만화식 펜 드로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는게 특이했습니다. 뎃생력은 영 아니었습니다만.
수록작은 기묘한 수족관, 기묘한 상점가, 기묘한 박물관, 두 번째 교토 타워와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방문한 방문기가 많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까지 가서 망자의 거리를 방문할 정도입니다. 환상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문제는 대부분 '우연히' 그 곳에 가서 기묘한 공간을 보고 올 뿐 특별히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완성된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설정이 치밀하지 않고 기존 작품들의 재구성이나 패러디가 많아서 신선함도 부족하고요.
그나마 이야기로 볼 수 있는건 <<심부름>> 정도입니다. 어머니가 써 준 심부름 메모에서 알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걸 사기 위해 없는게 없다는 완전 상점가 까지 여정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구입해 온다는 이야기죠. 

주인공의 기묘한 착안에 따른 노력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특유의 매력 포인트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판기 안에 동물들이 들어가 움직인다는걸 알고 나서,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동 자판기를 자유연구 과제로 제출하여 동물들에게 자유를 선사한다는 <<자판기>> 정도만이 기대에 값합니다.
그 외에는 수족관에서 보여줄 물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이야기로 주인공을 구하고 격류에 휩쓸린 레오나르도가 물고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결말의 <<너의 물고기>>가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딱히 재미가 있던건 아니지만, 파트너 레오나르도가 첫 등장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반면 제목의 수록작이야말로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습니다. 열 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작품으로 별 비중은 없거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기대와 전혀 달랐고, 습작 수준의 수록작도 많아서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구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침어 - 6점
panpanya 저자/미우(대원씨아이)

단편보다 짧은, 쇼트쇼트라 부를 만한 초단편이 많이 수록된게 특징. 
벌 서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걸 깨닫는다는 <<벌 서는 법>>, 일상 속 이야기를 짧은 분량 안에서 무려 12년에 걸쳐 빌드업하고,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끝맺는 <<가로수의 순서>>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교적 긴 이야기로는, 비가 올락말락 하다가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질 때 우연히 만난 개구리 덕분에 무사히 귀가한다는 <<비 오는 날>>이 기묘하면서 따뜻하고 서정적인 느낌이라 좋았고요.

표제작, 그리고 젤리같은 물고기 뉴 피시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을 그린 <<뉴 피시> 두 작품은 '물고기'를 주 소재로 삼은 단편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뉴 피시>>는 물고기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식품이었는데, 맛이 없어서 외면받았지만 주인공 활약으로 기사회생하게 된다는 내용이고, 표제작은 전설의 편안한 오더메이드 베개 '침어'의 존재를 알고 쿠슈 카고시마로 떠난 주인공과 레오나르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너무 편안해서 베개로 쓰이던 물고기 '침어'는 실존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베고나면 죽어버려서 (물밖에 나와 하룻밤이 지나게 되니까), 그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베개를 만든게 현재의 '침어'였습니다. '침어' 베개를 구입한 주인공은 운 좋게 해변에서 진짜 침어를 한 마리 주웠고, 그래서 가끔 침어에 얼굴을 파묻곤 한다는 결말로 끝나는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일상 이야기처럼 펼쳐놓는 전개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반면 신주쿠 지하의 이상한 공간에서 피자 만두를 찾는 <<지하답사>>는 제법 길지만, 작화나 전개 모두 초기작 느낌으로 <<아시즈리 수족관>>과 비슷하더군요.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직은 스타일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감점합니다만, 볼 만한 작품도 제법 많았습니다.


두 번째 금붕어 - 8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연구'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많다는게 특징. 소재도 다양합니다. <<멜로디>>는 저녁이 되면 마을에 울려퍼지는 음악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울려퍼지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도 재미있고, 결국 찾아낸 음악의 정체도 기발했어요. '숨바꼭질'을 잘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고민이 펼쳐지는 <<숨바꼭질의 주의사항>>, 매미 소리를 겨울에 틀면 따뜻함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계절 보내는 법>>, 완벽한 등교길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펼쳐보이는 <<통학로의 소양>> 등도 모두 독특하고요. 그 외에도 소품 서랍을 정리하는 방법, 풍선 편지를 개조했더니 영원히 날게 될 지도 모르는 물건이 되었다는 등 다른 수록작들도 갖가지 분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망라하여 선보여줍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주인공이 항상 무언가를 깨닫거나 익히고 끝나는데, 그게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연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 속 사물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보여주는 작품도 많습니다. 전자동 부적 제작 기계가 어떻게 '공덕'을 부여 받는지를 그려낸 <<길흉화복 챙기기>>는 정말 생각도 못했던 전개를 보여줍니다. 해변의 집과 해수욕장의 시즌 오프 방법이 등장하는 <<바다 폐장하는 법>>도 그러하고요.

학교에서 키우던 금붕어를 잃어버린 뒤 새로운 금붕어를 구입하러 나서는 표제작은 그닥이었지만, 전체적으로 panpanya의 독특함과 기발함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구야바노 홀리데이 - 6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단편집이기는 한데, 무려 3부작 여행기 <<구야바노 홀리데이>>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
표제작 외에는 작가의 다른 단편들처럼 뭔가를 만들고, 찾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엉터리 일기술>>, <<비교 비둘기학 입문>>, <<부호>> 등 일상에 밀착해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일상 속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건 분명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됩니다. <<고구마 줄기 원더랜드>>는 는 고구마를 캐면서 땅 속을 헤집고 다닌 끝에 진짜 맛있는 군고구마를 알게되지만, 다시 캐 낼 수는 없게 되었다는 다소 환상적인 이야기인데, 결말만큼은 현실적이라는게 인상적이었고요.

그런데 표제작은 구야바노를 찾기 위해 필리핀을 간 여행기라 달리 기발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지는 못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해서 재미있기는 했는데, 작가의 특징이 온전히 발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게에게 홀려서 - 6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기묘한 반전들이 있는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게 특징. 
워싱턴 조약에 위배되는 왕도룡뇽을 키우다가 아마존으로 가서 놓아주지만, 알고보니 왕도룡뇽은 일본 원산의 고유종이었다는 <<왕도룡뇽 사건>>처럼요. 최고는 완벽한 일요일을 보내기 위해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일요일 준비에 바치는 <<perfect sunday>>입니다. 완벽한 일요일을 위해 온갖 기계 장치를 만들고, 일요일 산책 코스까지 사전에 답사하는 등 준비를 마치지만 '소풍은 당일보다 전날 준비와 저녁이 더 설레었던 것 같다'는걸 깨닫고, 알고보니 그 날이 일요일이었다는 반전, 다행히 다음날도 공휴일이었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쇼트쇼트 중에서는 <<decoy>>가 기억에 남습니다. 호수에 띄워놓은 가짜 나무 오리를 디코이라고 하는데, 동료로 착각하고 찾아온 오리를 그리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계속 그러다보니 수면을 잘 그리게 되있다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끝납니다.
암흑 전골 세트가 초심자 용이 있었다는 <<전골>>, 파인애플이 어떻게 열리는지 몰라 조사하러 나섰지만 결국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파인애플을 모르신다>>, 살아있는 돌고래 계산기가 리만 가설을 풀어낸다는 <<계산기의 마음>>도 재미있었고요. 인터넷에서 먼저 유명해진, 단무지만드는 프라모델이 나오는 <<DANMUJI DREAM>>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별다른 내용이 없었던 표제작이나, 전철에서 몸을 두고 내린다는 등으로 비교적 평이한 발상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어서 수록작별로 재미와 수준에 있어 다소 편차가 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동물들 - 8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앞 부분은 일상 생활을 소재로 - 특히 이사에 대해서 - 에서 지극히 평범하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단편들이, 뒤에는 제목에 걸맞게 붉은귀 거북이라던가, 야생동물 마미와 같은 동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동물 마미에 대해 그려낸 <<마미>>는 panpanya 작품 치고는 꽤 큰 스케일 - 일종의 대형 로봇까지 등장하는 등 -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무지나>>는 마미와 똑같은 동물인 무지나가 등장하는데, <<마미>>와는 다르게 일상과 결합된 전개를 보여준다는게 재미있었어요. 주인공이 무지나를 구해주자, 무지나는 은혜를 갚기위해 도토리를 가져오고 주인공이 도토리로 빵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전개되거든요. 같은 동물로 정 반대 분위기의 이야기를 그려낸, 일종의 '빛과 그림자'인 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쪽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panpanya 특유의 상상력과 기발함이 가득하며, 뒤에 용어집이 수록되어 있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 - 10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환상의 동물 츠치노코를 발견하고 난 뒤 생활을 그린 <<츠치노코 발견하다>>, 츠쿠바산 관광 이벤트에 당첨되어 말하는 여행권과 함께 투어를 떠나는 꽤나 긴 이야기인 <<츠쿠바산 관광 불안내>>, 쓰레기도 돈을 주고 사는 상점에 대한 <<도가니>>는 기발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 가공의 세계관을 재미나게 묘사한 작품들입니다.
표제작인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은 주먹밥이 굴러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내용인데, 비현실적인 설정을 일상과 결합하고, 그것을 '연구'하면 어떤 결과물이 될까?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고요.
언덕 위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올라가는 <<거기에 언덕이 있으니까>>와 카스텔라풍 찜케이크의 맛에 빠져 잘 수급되지 않는 찜케이크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는 일상의 디테일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 등장하는 짤막한 일기도 이러한 일상성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환상, 기발한 설정, 연구, 일상 등 panpanya의 대표적인 매력 포인트를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의 차이가 뭘까요? 좌석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하네요. <<츠쿠바산 관광 불안내>>에 나옵니다!


물고기 사회 - 6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일상'을 특별하게 그려내는 panpanya의 매력 포인트가 잘 살아있는 작품집. 
<<맞지않는 계절>>은 크리스마스 산타 썰매의 순록은 아르바이트였고, 썰매도 평상 시에는 주차 중이라는 독특한 일상성이 좋습니다. 일상과 환상의 결합을 보여준달까요. 기묘한 일상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매력적이었어요. 여행을 갔다가 이상적인 기념품을 직접 만드는 <<선물의 마음가짐>>이 대표적입니다. 최애빵 '카스텔라 풍 찜 케이크'를 소재로 한 연작은 일상성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카스텔라 풍 찜 케이크 생산 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생산품을 구하기 위해 편도 2시간 반 걸려 3개를 확보한다던가 -서울에서 대전 정도를 가서 호두과자를 사온 느낌 -, 직접 만들기위해 다양한 연구를 거치고, 생산이 재개된 후 재 구입을 위해 발품을 팔다가 안정적인 주문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을 담담하지만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레시피 소개도 충실하고요.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에요.


하지만 물고기가 진화하여 인간의 해산물 가공 공장을 인수하여 자체 통조림을 납품하게 된다는 표제작은 별로였습니다. 일상도 아니고, 환상으로 보기에는 상상력이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상 쪽에 집중하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2/25

세상의 종말에도 무너지지 않는 100가지 삶의 지혜 - 아나 마리아 스파냐 / 정윤희 : 별점 2점

세상의 종말에도 무너지지 않는 100가지 삶의 지혜 - 4점
아나 마리아 스파냐 지음, 정윤희 옮김, 브라이언 크로닌 그림/위너스북

표지와 앞 부분 몇 페이지 소개에 혹해서 구입한 책. 크게 4개의 챕터로 나누어서, 세상에 종말이 왔을 때 익혀두면 유용한 기술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한 페이지의 일러스트와 한 페이지의 짤막한 소갯글로요.

하지만 수박 겉핥기 수준에 그치는 내용은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먼저 소개되는 지혜인 "가축 돌보기"의 핵심이 "가축에게 깨끗한 물을 주고 말끔한 우리를 제공하고 스트레스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것 처럼 말이죠. 새 소리 듣기, 통조림 만들기, 붕대 만들기 등등은 한 두페이지 이상의 내용 보강을 통해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이 역시 대단한 디테일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임시 거처 만들기와 길 찾기, 말과 노새에게 마구 씌우는 법 등 비교적 상세한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지혜는 나름 괜찮으나 이런 내용은 극히 드뭅니다.

100가지 지혜의 선정 기준이 불분명하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서, 예를 들어 핵전쟁 이후라면 방사능을 피하는 방법같은게 주로 소개되는 식으로 챕터를 구분하여 핵심 지혜를 선정했다면 좋았을텐데 지금은 그냥 작가 머릿 속에 떠오른 대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이거든요. 우선순위가 한참 낮아보이는 매 길들이기라던가, 활강하기, 맥주 만들기, 잉크 만들기 등은 물론, 뒷부분의 라틴어 이름 익히기, 베란다에 앉아 있기, 신나게 웃기, 방콕하기 등은 아예 기가 찰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100가지 지혜에 곁들여져 있는 일러스트만큼은 무척이나 우수합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높은 퀄리티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색감과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샘플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주 멋지지 않나요?



덕분에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용도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2/02/11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쿠스미 마사유키 / 박정임 : 별점 3점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박정임 옮김/살림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먹부림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총 3부 구성인데, 가장 비중이 높은 1부는 혼자서 혼술을 마실 때, 어떤 안주를 직접 만들어 어떤 술과 함께 먹는지에 대해 쓴 글들입니다. 2부는 혼자서 술집에 갈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요. 3부는 술을 다 먹고 마무리로 어떤걸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로 술과 안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술과 안주를 사랑하고,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고집과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술잔이라던가, 차림상의 구성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다츠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고요. 얼마 전에 읽었던 "혼밥 자작 감행"의 쇼지 사다오도 그러했는데, 혼술하는 아저씨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먹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전략, 전술'을 고려해서 안배한다는, "음식의 군사"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돈가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돈가스를 소금, 간장, 소스 순서로 찍어 먹는다던가, 마지막 두 조각을 미리 소스를 뿌려 절여두었다가 밥이랑 함께 먹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에피소드와 거의 똑같았으니까요. 오뎅을 접시에 담을 때 색감을 고려해서 담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쥬쿠 카페 베르크의 커피 역시 "음식의 군사"에서도 소개되었었지요,

그러나 돈가스 정식을 일종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는건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육류에 전채 (야채절임), 샐러드 (양배추), 수프 (미소시루), 푸짐한 채소 요리 (밥)이 곁들여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왕 코스 요리니 주문할거면 값은 비싸도 히레가스 정식을 주문하자라던가, 맥주를 시킬 때 "이집 맥주는 어디 건가?"하고 브랜드를 물어보면 와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에 이르르면, 이런걸 만화로 선보였다면 아주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요리 에피소드보다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의 길" 속 추다와 멘치빵을 재현해 먹는 에피소드는 과연 만화가구나! 싶어서 기억에 남고요.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 더 기억에 남은 것 같네요. 참고로 원작 속 '츄다' 레시피는 소주 3, 사이드 7의 비율입니다. 멘치빵은 아래와 같고요.

기요켄의 슈마이 도시락에 대한 글은 저자의 데뷰작 "스키야키"가 떠올라서 반가왔습니다.

혼자 안주를 만드는 이야기 속 레시피도 짤막하지만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가다랑어 안주입니다. 조금 얇게 썬 가다랑어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파를 잘게 다져서 듬뿍 올립니다. 다음은 양하도 잘게 다지고, 차조기나 깻잎 한 장도 채썰어 올립니다. 마지막이 비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늘 대신 편을 썬 마늘장아찌를 올리는겁니다. 생마늘은 맵고, 간 마늘은 느낌이 약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레몬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먹는다는데, 반주로 니혼슈, 조금 비싼 사케가 제격이라네요. 가다랑어 회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방어회로 다음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방어회는 먹다보면 물려서 남기기 십상이니까요. 

다른 먹부림 콘텐츠에서 탕두부라고 소개되는 물두부 레시피는 정말 쉬워 보여서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냄비에 다시마 한 장을 깔고 물을 담아 가스버너 등에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두부를 넣은 뒤 끓고 나면 간장과 가쓰오부시, 다진 파를 섞은 종지에 찍어 먹으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기로는 '조야나베'도 만만치 않아요. 냄비에 물을 붓고 저민 생강 두 조각 정도를 넣은 뒤 끓이다가 큼직하게 썬 양배추, 기다란 삼겹살을 세 토막 낸 걸 넣고 갈은 무와 다진 파를 듬뿍 넣은 아지폰(감귤 과즙 폰즈 상품명)에 찍어 먹는게 끝입니다. 폰즈가 집에 없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재료나 조리법 모두 너무 쉬워서 당장 해 먹어도 됨직한 수준이네요. 심지어 우러난 국물은 제가 좋아하는 우동 사리를 넣어 먹으면 끝장이라니, 꼭 한 번 해 먹어 봐야 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열한 올리브 오일에 큼직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양배추 볶음, 오니기리를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굽다가 간장과 미림, 미소 양념장을 발라 굽는 오니기리 구이, 간단한 여주 볶음밥, 통조림 참치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 만든 속을 버터 발라 구운 식빵에 끼워 먹는 참치 토스트(굽지 않은 빵에 머스터드를 바른 뒤 슬라이스 치즈를 깔고, 그 위에 참치 마요네즈를 올려 구워도 맛있다네요) 등 대부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만 소개되고 있어서 아주 반가왔습니다.

뻔한 먹부림 에세이지만 재미도 있고, 레시피들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적당합니다.

2022/01/22

혼밥 자작 감행 - 쇼지 사다오 / 정영희 : 별점 3점

혼밥 자작 감행 - 6점
쇼지 사다오 지음, 정영희 옮김/시공사

일본의 만화가겸 에세이스트 쇼지 사다오의 먹부림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아주 오래전, 이시카와 쥰의 "만화의 시간"에서 넌센스 만화의 제왕으로 접했던 작가지요. "만화의 시간"도 구입한지 20년을 훌쩍 넘어가는데,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조금 찾아보니 중고가가 어마무시하게 형성되어 있더군요. 살짝 기뻤습니다.

하여튼, 별 기대없이 심심풀이로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일상 속 소소한 혼술과 혼밥에서 맛있게 먹기 위한 자기만의 디테일과 원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제가 사랑하는 먹부림 만화 "술 한잔 인생 한입"과 추구하는 바가 일치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와마 소다츠가 에세이를 쓴다면, 딱 이런 글들을 쓸 거라 확신이 들 정도에요. 설견주는 우아와 숭고의 세계이므로, '하아~ 쓰읍~' 하면서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부산스럽게 고기를 구울 수도 없다던거나, 요시노야에서 아침을 먹게 되면 단연코 낫토 정식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술 한잔 인생 한입"에 그대로 등장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애정하는 먹거리에 대해서는 고민과 연구를 거쳐 자신만의 레시피를 정립하는 모습도 이와마 소다츠스러웠는데, 200억엔 짜리 레시피라는 '정어리 통조림 덮밥'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정립한, 최고의 레시피라는데 잠깐 소개해드리자면, 먼저 정어리 통조림 뚜껑을 따고, 그 째로 가스 불 위에 올려 데웁니다. 덮밥용 그릇에 뜨거운 밥을 풀고 그 위에 삶은 계란 흰자를 잘게 다져 5mm 두께로 덮고요. 잘게 다진 양파도 같은 식으로 덮은 뒤, 뜨거워진 정어리 캔을 뒤집어 밥 위에 덮습니다. 마지막으로 줄기를 제거한 무순과 잘게 썬 우메보시를 뿌리면 완성이라는데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어지네요. 우메보시는 없으니 대신 레몬을 뿌리면 되겠지요? 참치 통조림으로 해도 괜찮을 듯 싶어요. 이외에 버터 간장밥이나 계란프라이 덮밥에 대한 작가만의 레시피라던가 기존에 존재하지만 따라해봄직했던 무채 된장국, 두부 한 모 통째로 덮밥 레시피도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이런 요리를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파고든다는 점이 이 에세이의 매력 포인트인 거지요.

라멘집 사장을 관찰하거나, 카레 국물 부족에 대해 논하는 에세이들도 인상적이었어요. 돈가스 카레를 먹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꽤나 긴 분량의 고찰도 그러하고요. 이런 소재를 이렇게까지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다는게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고기 망치와 스테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샬라핀 스테이크'라는 나름 전문성 있는 지식을 풀어놓는 의외의 모습도 볼거리였고요. "오니기리는 속 재료 주변을 밥이 감싸고 있어서 첫 입은 맨밥일 경우가 많아서 정말 싫다"는 글처럼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글도 좋았고, 직접 그려낸 일러스트들도 책에 잘 어울렸습니다. 아래의 돈가스 카레의 종류에 대해 그려낸 그림처럼, 내용에도 딱 들어맞고 이해하기도 쉬운 일러스트들이었거든요.

물론 자신의 주장을 절대 옳다고 우기며 절대로 고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은 꼰대스럽기는 합니다. 내 주장이 절대 옳고, 다른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또 사회적인 관계를 아예 드러내지 않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이 정도 경력, 나이가 있는 작가가 혼밥, 혼술과 자작을 추구한다는게 쉬이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류의 먹부림 에세이 중에서는 재미, 가치 모두 좋았습니다. 자신만의 고집은 "맛의 달인" 원작자 카리야 테츠, 이자카야 술안주 류가 대부분인 소재와 유머스러운 분위기는 "고독한 미식가" 등의 원작자 구스미 마사유키를 떠오르게도 하는데, 양 쪽의 장점만 잘 합쳐서 재미나게 구성한 덕분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 수록 왜 "술 한잔 인생 한입"처럼 만화로 그리지 않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고전 4컷만화스러운 그림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내용이었다면 꽤 잘 어울렸을거라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저자도 지금은 만화가보다는 에세이스트로 인지되는 경향이 큰 것 같기는 합니다만...

2021/01/10

일본요리 뒷담화 - 우오쓰카 진노스케 / 장누리 : 별점 2.5점

일본요리 뒷담화 - 6점
우오쓰카 진노스케 지음, 장누리 옮김/글항아리

제목이 꽤 강렬해서 관심이 갔던 책. 저자는 일본 최초 요리점 중 하나 우오쓰카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고물상을 운영하는 등 자신만의 삶을 산 괴짜 우오쓰카 진노스케입니다. <<격식 파괴 요리책 한 그릇 더!>>의 원작가로 더욱 친숙한 인물이지요. <<한 그릇 더!>>에서는 싸게, 쉽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이 책은 일본 식문화 전반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을 담고 있습니다. 뒷담화라기보다는 일본의 식문화에 관련된 여러가지 주제를 '교육'이라는 큰 틀로 묶어 풀어내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건강하게 먹는 방법에 대한 교육, 제대로 된 일본 요리와 식문화에 대한 교육, 음식에 대해 정확하게 정보를 파악하는 교육 등이 수록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에세이 형식으로 읽기 쉬웠으며, 흥미로운 내용도 제법 많았던 덕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참치회에 대한 이야기처럼 일본 요리에 대해 알려진 상식들을 깨는 이야기들이 제일 좋았습니다. 원래 참치회는 굉장히 쌌고, 특히 대뱃살은 거의 버리는 재료였는데, 전후 사람들이 진한 맛을 추구하면서 대뱃살 인기가 폭발해서 현재의 위치에 올랐다고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이미 1915년에도 대뱃살은 최고급 재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나 다이쇼 시대에는 보존, 유통 기술이 부족해서 지방이 많아 상하기 쉬운 대뱃살을 유통하기 어려웠을 뿐으로, 보존과 유통 기술이 발달하면서 원래도 맛있었던 대뱃살이 각광받게 된 것이라네요. 입맛이 변한게 아니라요.
고래 고기 이야기는 충격적이기 까지 합니다. <<맛의 달인>>에서도 일본 전통 식문화라고 강하게 주장했었는데, 고래 고기도 원래 잘 먹지 않았다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1939년 잡지에 실린 기사를 통해 1935년 남극 빙해 지역 포경 시작 전까지 대다수 일본인에게 고래고기 요리법이나 맛은 익숙하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래 된 일본 고유 풍습이 아니라는 거지요. 잡지 기사 하나만으로 근거를 삼는건 좀 애매한데, 과연 뭐가 맞는건지 자료를 더 찾아보고 싶어지는군요. 이전에 썼던 글을 아예 고쳐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옛 일본에서는 회를 찍어먹을 때 술을 졸여서 조미료로 썼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이리자케'라는 조미료로 우메보시, 술, 가쓰오부시를 졸여서 만듭니다. 짭쪼름하면서도 시큼 달큼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시도해보고 싶군요. 맛술에 액젓, 식초를 조금 섞으면 비슷할까요?
마지막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토불이'는 원래 '인과응보'와 같은 뜻의 불교 용어라고 하네요! 이를 1907년 일본 육군의 이시즈카 사겐이 일본인은 일본 식자재를 일본 전통적인 방식으로 먹자며 제안한 사상의 슬로건으로 유명해진게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말인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어요.

제목의 '뒷담화'에 가까운 쓴소리들도 일부 실려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과 같은 '단란한 식탁'은 없는 시대이다, 지금의 현미는 다이쇼 이전 현미와 다르며 에도 시대 사람들은 백미에 치우친 극단적 편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현미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등이 그러합니다. 이 중 '장수한 사람들이 먹은 식품을 예로 들어 이런걸 먹어야 장수한다!'는 억지라는 주장은 굉장히 와 닿더군요. 10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이라면, 아무래도 태어난 곳에서 줄곧 먹어온 음식은 한정적이었을게 뻔하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해요.
많지는 않지만 <<한 그릇 더!>>와 같은, 간단한 비법 레시피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이소'에서 1000원으로 구입 가능한 재료'로 만든 요리들은 <<한 그릇 더!>> 그 자체더라고요.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모두 공감할 수 있었던건 아닙니다. 보존식을 만들어서 두고두고 먹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낭비되는 재료 소모를 줄이자는 주장이 그러합니다. 전통을 지키고, 더 맛있고 영양가 있게 음식을 먹자는 취지는 알겠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이라 생각되었거든요. 이미 조리는 극도로 단순한 형태로 제한하는 상품들이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빠르고 편한 조리가 더욱 각광받는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니까요. 이런 주장을 펼치느니, 차라리 유기농으로 재배한 재료를 전통 방식으로 조리하여 밀키트나 통조림, 레토르르 형태로 제공하는 기업체를 스스로 차리는게 나을겁니다. 햇볕에 쬔 고기가 맛있다면, 직접 만들어서 팔면 되잖아요?
또 지금은 제철인 음식이 없는데, 제철 음식을 먹자는 주장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사시사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농작물 재배 방식이 발전되고, 해산물은 양식이 가능해진 덕분입니다. 반대로 이를 제철에만 먹는다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요. 해당 계절에 작황이 불량하면 그 해에는 특정 작물을 못 먹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현대 사회에서 양식없이 조업으로만 해산물을 채취한다는건 더 말이 안되지요. 해산물 자원 씨가 마르고, 가격도 폭등할게 뻔합니다. 제철이 없어짐으로 음식과 재료에 고마와하는 마음이 희박해진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현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오히려 최대한 기술을 활용하여 먹거리를 제공하는게 먹는 것 만큼은 빈부격차를 최소화하는게 제대로 된 발전 방향이라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일본 관점에서만 쓰여졌다는 것도 우리 입장에서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단 레시피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파는건 별로 없어 보여서 재현은 어려워 보이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지만, 저자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없고, 근거가 더 보강되어야 하며 일본 시각으로만 쓰여진 글들도 제법 많아서 감점합니다. 일본 요리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면, 딱히 권해드릴 책은 아닙니다.

2020/05/01

머드맨 1, 2 - 모로호시 다이지로 / 김동욱 : 별점 3점

머드맨 1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김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머드맨 2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김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모로호시 다이지로판타지 만화입니다. 일본 전통 설화를 현대로 끌고온 "요괴 헌터"와 비슷하게 전설을 현대 무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인류학자의 딸 나미코는 아버지가 뉴기니에서 데리고 온 원주민 소년 코도와와 함께 살게 되는데, 코도와는 사실 학자가 원주민 여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학문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일부러 오지 마을 촌장에게 양자로 보낸 뒤, 코도와 몸에 새겨진 문신의 비밀을 밝혀내려 한 거죠. 그러나 억지로 문신의 비밀을 알아내려 한 교수의 행동은 정령 머드맨에 의해 들통납니다. 이후 코도와가 응 바기를 불러 그를 응징하며 자신이 뉴기니의 성스러운 숲을 지키는 후계자라는걸 드러내는게 1화입니다.
이어지는 2~3화는 문명을 거부하고 뉴기니의 전통 신앙을 지키려는 코도와가 슈퍼 히어로처럼 활약하는 독립적인 이야기입니다. 2화는 뉴기니는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이후, 시간의 흐름이 멈춘 상태의 세계라는 신화적인 내용이며 3화는 뉴기니를 전염병으로 초토화시킨 문명 탐사대에 대한 복수극이거든요. 복수극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일종의 중간 다리 역할에 지나지 않지만 파푸아 뉴기니가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장소로 덕분에 독특한 생태계가 이루어졌다는 설정은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4화부터는 완결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파푸아 뉴기니 전설인 카우나기, 나미테 이야기가 핵심이지요. 전설 속에서 둘은 위대한 가면의 비호를 잃고 숲에서 달아나고, 옹고로의 바위 안에 숨겨져 있던 악령인 아엔의 가면이 그 둘을 쫓습니다. 겨우 탈출한 둘은 위대한 자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유한한 삶을 살게 되지만, 카우나기의 몸에 새긴 문신 덕분에 자손은 숲과 정령의 가호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신을 새기다 피가 판다누스 나뭇잎에 튀고, 이 나뭇잎은 자라서 무엇이든 먹는 나라모로 성장해서 카우나기와 나미테를 위협합니다. 전설에서는 나미테가 죽은 뒤, 그 몸에서 먹을게 자라났다게 결말입니다. 덕분에 나라모도 먹을게 생긴 것이죠.
카우나기와 나미테가 다시 부활한게 코도와와 나미코라는 설정으로, 둘은 전설 속 둘의 모험과 똑같은 경험을 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나 코도와와 나미코는 전설대로의 결말을 거부하고, 그들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야기 속에 비행기가 신의 선물을 가지고 와서 모두를 풍요롭게 해 준다는 '카고 컬트'를 이야기에 잘 녹여낸 부분도 흥미롭지만, 다시 부활하여 사람들을 위협하던 나라모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 숲도, 산도 모두 먹어치울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일본의 야마비시 상사가 전설 속 숲에서 천연가스와 석유를 발견하여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고, 야마비시 상사의 로고가 나라모 문양과 같았다는 후일담도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네요. 지금 보기에는 좀 낡은 환경 보호 메시지이기는 해도, 전설과 합쳐서 좋은 시너지를 내거든요.
코도와와 나미코가 죽지 않은 만큼, 코도와가 나미코와 결합하여 후손들을 낳아 문명에 대항하여 위대한 숲의 의지를 이어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도 좋았어요.

파푸아 뉴기니의 전통 설화가 일본 전통 설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과감한 아이디어도 눈길을 끕니다. 코도와 몸의 문신이 일본 죠몬 토기와 이어지는 초반부 설정도 흥미로우며, 신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옹고로'는 일본 전설의 섬 '오고로노지마'이며 카우나기와 나미테는 이자나기, 이자나미와 같다, 즉 세계의 근원은 하나라는 결말도 굉장히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로호시 다이지로 작품과는 다른 큰 특징도 있습니다. 바로 '코도와'가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지닌 일종의 히어로라는 점입니다. 전설 속 수호령 머드맨을 부리며 숲길을 열어 빠르게 이동하고, 뛰어난 활 솜씨로 악당들을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덕분에 아엔의 가면과의 사투 등에서는 다른 모로호시 다이지로 작품에서 보기 힘든 액션씬이 가득 펼쳐지는게 좀 신기했습니다.

솔직히 일본 전통 설화와의 연결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고, 아무리 좋았다하더라도 카고 컬트, 일본의 종합 상사 등의 소재가 녹아들기에는 분량이 좀 부족했습니다. 더욱 긴 장편으로, 아니면 차라리 코도와가 뉴기니 주술로 문명과 싸우는 옴니버스 단편으로 구성된 액션 시리즈로 그려내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래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매력은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각 권말에 각 3 ~ 4편씩 수록된 단편들도 다른 곳에서 접한게 많지만 1권의 "유니콘 사냥꾼"과 2권의 "인간 대 통조림", "왕의 죽음"은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를 상징한다고 해도 부족함 없는 멋진 단편들이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이미 절판되었고, 중고 가격도 어마어마한데 e-book으로 나와주기를 바랍니다.

2020/01/1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1)

식사는 하셨어요? Buonappetito! - 6점
야마자키 마리 지음/애니북스

"테르마에 로마에"로 히트를 친 작가 야마자키 마리의 이탈리안 식도락 일상계 만화입니다. 크게 이탈리아 유학 당시, 결혼 후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일본에서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식도락' 측면에서는 결혼 후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유학 시절은 너무 가난해서 변변한 음식을 먹은게 별로 없고, 일본에서의 이야기야 특별한 음식이 나오지 않는 반면 이탈리아인 남편과 시부모가 등장하는 정통 이탈리아의 생활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재료라던가, 새로운 맛이 많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비싸고 귀한 특급 올리브 오일, 이탈리아의 연말연시 요리 등 여러가지 새로운 소재들에 작가 특유의 유머가 더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 등장한 흰 빵과 수프와 같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좋았고요.

또 몇몇 요리는 간단한 레시피까지 소개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재미, 신선함에 실용적 가치까지 있다면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계속 나오면 좋겠네요.

하나씨의 간단요리 3 - 4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미즈사와 에츠코 그림/미우(대원씨아이)

출간된 지 2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군요. 사실 TV 드라마까지 나온 인기작이기는 해도 1, 2권은 제게는 그닥이었습니다. 작화도 마음에 들지 않고, 주인공 하나 씨의 대책없는 성격도 취향이 아니었거든요. 간단 요리라는 제목에 어울릴만큼 둥장하는 레시피도 간단하지만, 특별히 따라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요.

3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하나 씨의 대책없는 귀차니즘은 더욱 업그레이드 되기까지 했습니다! 요리들도 전골, 볶음 국수, 샤브 샤브 등은 손도 많이 가고 재료도 제법 많이 필요한 음식들인데, 이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컨셉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래서야 '간단 요리'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요. 

그나마 취지에 부합하는 건 고등어 통조림 밥과 생고추냉이 아보카도 덮밥 정도인데 문제는 역시나 전혀 따라서 해 먹어 보고 싶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어 차밥 김가루는 제법 땡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재료를 쓰는 탓에 따라하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제 편견을 깨기는 커녕 더 굳게 만들었습니다. 가볍게 읽을 만은 한데, 더 이상은 구입할 생각 없습니다.

우연한 산보 - 6점
다니구치 지로 만화,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미우(대원씨아이)

이 만화는 제목처럼 요리가 중심은 아니고 산보가 중심이기는 합니다. 1~3화 까지는 특별한 요리가 등장하지 않고요. 그러나 4화 이후부터는 산보 도중에 먹는 음식도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4화 히피 축제에서는 오신코, 5화 한밤중의 고야에서는 고야 참플, 제 6화 개와 연식 야구공에서는 스콘, 제 7화 하모니카 요코쵸에서는 카레와 맥주, 제 8화 메지로의 카키모치에서는 쇼유 라멘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고독한 미식가" 처럼 음식 구성과 맛을 상세히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요리들의 묘사는 마음에 들었지만 이 정도로는 역시나 요리 만화라고 부르기는 무리였을까요? 산보와 함께 음식의 비중을 좀 더 높여주었더라면 주인공이 술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 "고독한 미식가"와 다른 일상계 요리, 식도락 만화로 그려질 수 있었을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또 원작인 쿠스미 마사유키의 후기와 뒷 이야기가 너무 길게 수록된 것 역시 감점 요소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래저래 조금 애매한 결과물이네요.

2019/12/14

세계의 전투식량을 먹어보다 - 키쿠즈키 토시유키 / 오광웅 : 별점 3점

세계의 전투식량을 먹어보다 - 6점
키쿠즈키 토시유키 지음, 오광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굉장히 특이한 주제를 깊숙이 파고드는 AK Trivia book 시리즈의 한 권으로, 제목 그대로 세계의 전투 식량과 그 역사, 기타 관련된 정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반에 등장하는 여러 국가들의 현용 전투 식량에 대한 소개부터가 엄청난 수준입니다. 레이션 별 칼로리까지 소개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왠만한 쇼핑몰에서 다양한 국가의 전투 식량을 구입할 수 있어서 특별한 내용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허나 하루의 3끼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등 이 책에서 제공하는 상세 정보를 알기는 어렵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는 확실합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전투 식량에는 치킨 누들, 즉 라면이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 전투 식량은 그 맛이 빼어나서 과연 프랑스답다, 스위스 전투 식량은 그냥 민간 시장용 시판물을 패키징한 것에 불과하다는 등의 재미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소개된 국가들 전투 식량 중에서는 러시아 것이 가장 탐나네요. 

이러한 현용 전투 식량 소개 외에도 미국 독립전쟁에서부터 다루고 있는 병영식의 역사 등 관련 자료도 풍부합니다. 미국 남북 전쟁부터 통조림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깡통 통조림을 생산했던 밴 캠프사와 언더우드사는 현재도 건재하며, 당시와 똑같은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니 한 번 구해서 먹어보고 싶어집니다.

뒤로는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과 현대의 병영식이 소개되는데 역시나 흥미롭습니다. 병영식, 전투 식량의 발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일람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전투 식량이 별 차이가 없는게 좀 의외였습니다. 2차 대전 때 어느정도 전투 식량의 형태가 완성된 탓이겠지요?
그리고 병영식은 기본적인 주식 외에도 초콜릿이나 잼, 사탕류와 기타 국가별 특이한 음식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레이션을 구성하는 가열제와 액세서리 백으로 제공되는 각종 액세서리 및 커틀러리와 식기, 조리 도구 등 관련된 아이템들 소개도 빼 놓지 않습니다. 

전투 식량 속 단골 아이템을 꼽아서 언제부터 전투 식량에 포함되어 제공되었으며, 국가별로 어떤 차이를 보내는지를 알려주는 챕터도 흥미로우며, 맨 마지막에 '오래전 야전식을 재현하자!'는 취지로 소개하는 미국 독립전쟁, 남북전쟁과 구 일본 육군 야전식 레시피도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보입니다. 딱히 해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요.

아울러 이 모든 내용이 방대한 도판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확실히 일본인들이 뭔가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드는건 잘하네요.

그러나 일본인이 쓴 책이라 일본 자위대,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구 일본 육군의 전투 식량과 병영식에 관련된 정보가 많다는 건 아쉽습니다. 자위대 전투 식량은 전 메뉴를 소개하고 있기까지 하거든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그래도 대한민국 육군의 전투 식량도 소개되고 있다는게 위안거리겠지요.
그리고 전투 식량 소개와 역사 및 기타 정보가 이른바 선진국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단점입니다. 제 3국이나 아프리카 등의 전투 식량 소개가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겁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저처럼 '잡학다식' 쪽 분야에 관심있으신 분들이라면 다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책이거든요. 전투 식량도 좀 사 먹어 봐야 겠군요. 러시아, 없다면 프랑스 것이라도요. 또 AK Trivia book 시리즈도 몇 권 더 구입해 보아야겠습니다.

2019/11/29

회색 인간 - 김동식 : 별점 2점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꾸준히 업로드한 글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과거 하이텔 시기에나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의 재림이네요. 올린 글의 분량만 따지만 거의 "태백산맥"에 육박한다니 그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이텔 시기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등과는 명확히 다른 점은, 굉장히 짧은 꽁트, 아니 쇼트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무려 스물 네 편이나 수록된 단편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기묘한 설정, 그리고 그 기묘한 설정 때문에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탐욕이 생겨나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는 결말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기묘한 설정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지만, 그냥 기묘하다는 상황에만 매몰되어버린 이야기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건물이 급작스럽게 식인 괴물로 변하여 밖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식인 빌딩", 인간이 녹았다가 다시 돌아오면 완벽한 컨디션이 된다는 기적의 물 정화수가 대유행한다는 "흐르는 물이 되어"가 대표적이에요.
또 기묘한 설정에 기댈 뿐,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반전도 뻔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우팅"에서 인류 모두가 인조인간이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차라리 연구소 경비병들만 진짜 인간이었다는 반전이라도 넣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나마 조금 신선한 반전들도 대체로 기존 상식이나 그때까지의 현실을 반대로 뒤집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식상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에서 나이를 먹지 않게 만드는 영원의 구가 사실은 저주였다던가,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무적의 재생력을 안겨다주는 선물로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피노키오의 꿈"에서 피노키오의 소원이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건강한 소나무가 되는 것이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반전이라도 있는 이야기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특별한 반전 없이 인간미, 감동 쪽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 이야기들은 더 엉망이에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땅을 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먹을게 부족해서 문화는 사치였지만, 어느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화가 생겨난다는 결말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인간도 아니라는 주제인데, 솔직히 억지스럽죠. 이런 상황이라면 집단이 생기고, 자체적인 법률이 생기는게 타당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이 그냥 살기 힘든 상황만 길게 묘사되는 것도 지루하고요.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간미는 "도박묵시록 카이지 외전 반장의 일일 외출록" 에서 훨씬 더 재미있게 잘 그려졌다 생각됩니다.
손가락 여섯개인 신인류를 낳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계획이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밝혀진 후, 손가락 여섯개인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생각이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꿈같은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 없고요. 괴물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접했었던 설정도 많습니다. 어설픈 풍자, 별 것 아닌 내용을 길게 늘려쓴 이야기도 눈에 거슬렸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답게 반짝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이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노인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자 노인이 자신이 부자라면서 통조림을 5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 신에게 소원을 빌 당사자로 선택되는 개인에게 닥치는 집단 광기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신의 소원", 노인을 가상 세계에 모신다는 발상이 그럴싸 했던 "디지털 고려장" 등이 그러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의 전개가 뻔하고 결말의 반전이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거나 아예 없다는 단점은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

다행히 설정도 좋고, 전개도 괜찮으며 결말과 반전도 완성도 높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재활용" 입니다. 돈만을 위해 살아온 두석구가 딸이 교통사고로 죽자, 13일 내 시체 세 구를 섞어 넣으면 한 명이 부활한다는 주술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생존은 랜덤이라 딸이 살아나지 못하자 두석구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13일 동안 이 주술을 계속 시도하고요.
그런데 영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영혼들은 두석구의 딸 부터 영혼을 찢어발긴다는 마지막 반전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두석구는 딸이 살아날 때 까지 주술을 시도할테니 영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딸부터 처치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이를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마지막 대사도 좋았고요.
쇼트쇼트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합니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도 평균 이상입니다. 정대리가 가진 보물인 쇠구슬은 손을 대면 비가 오게 만듭니다. 김대리는 이를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을 대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흐려지기만 할 뿐이고요. 그런데 아기가 손을 대자 지진이 발생하여 결국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원리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날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지요. 기묘한 설정도 좋지만 제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모녀, 한 사내와 협곡에 갇힌 김남우가 극심한 굶주림 끝에 식량으로 희생될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협곡에서의 식인"도 기묘한 맛 측면에서는 꽤 괜찮습니다. 김남우의 편인줄 알았던 사내가 놀랍게도 급작스럽게 김남우를 살해하는데, 알고보니 그들 4명은 모두 가족이었던 반전 덕분입니다. 김남우가 가족을 경계하고 오히려 위협할까 두려워 남인척 김남우 편에 섰다가 배신을 했던 거지요. 살아난 가족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는다는 마지막 한 방도 묵직하고요.
아쉬운건 에이즈가 지금은 그렇게 위험한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좀 더 '천벌'에 가까운 병에 걸리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살인단백질 이야기"에 나왔던 프리온을 활용한 병이 어땠을까 싶네요. 식인으로 전염되고, 치사율 100%이니까요.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도 반전이 좋습니다. 사이비 종교 교주 두석구가 지옥에서 악마들의 부탁으로 죄인들에게 환생을 약속하는 환생교를 만들어 포교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 통제를 잘 하려는 악마들의 계획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나 1년 뒤, 절대자가 강림하여 두석구를 찢어 발기고 죄인들의 희망을 끝냅니다. 죄인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었다가 큰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말인데 아주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하여튼, 전체 평균해서 별점을 주자면 2점입니다. 모든 수록작 중 세네 편 정도가 중간 수준, 세 편 정도가 중간 이상, 한 편이 수작이고 나머지가 모두 기대 이하이니 이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반 타작도 하지 못한 셈이니 전반적으로 좋은 단편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 창작하여 발표한 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등단도 한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음에는 보다 완성도있게 다듬어 발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2018/05/20

늑대를 요리하는 법 - M.F.K 피셔 / 김정민 : 별점 3.5점

늑대를 요리하는 법 - 8점
M.F.K 피셔 지음, 김정민 옮김/다른목소리

미국에서 태어난 M.F.K 피셔, 메리 프랜시스 케네디 피셔가 쓴 음식과 삶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1942년 발표된 고전으로 제목의 "늑대"는 위기 상황'을 의미하는 "문가에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문구에서 따 왔습니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의미하지요.

제목 그대로 미국 대공황기 등 여러 힘든 시기를 보낸 저자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소개됩니다. 그 중에서도 물자, 재료가 부족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해 먹는지에 대한 방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생선, 고기, 빵, 수프 등 생각할 수 있는 주요 재료별로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다양한 내용 중에서 우선은 눈물 겨울 정도의 절약 비법이 눈에 뜨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불 없이 요리하는 방법입니다. 건초 통을 감싸고 그 안에 음식을 넣은 뒤 통의 뚜껑을 덮는 방법인데, 발효(?) 열을 이용하는 것일까요? 또 당시 통화 기준이기는 해도 50 센트로 차리는 극빈 요리에 도둑질, 야생에서 얻은 식재료를 이용한 "나는 자연인이다" 스타일 요리, 심지어 음식 뿐만이 아니라 대체 커피라던가 술값 아끼는 비법으로 가짜 보드카 제조법까지 등장합니다. 가짜 보드카는 물 1쿼트, 글리세린이나 설탕 1 작은술, 레몬 1개의 껍질, 오렌지 1/2개의 껍질을 20분 동안 아주 약한 불에서 끓인 뒤 알코올 1쿼트를 더한 후 바로 뚜껑을 덮고 식힌 뒤 걸러서 만든다고 하는데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진짜 위기 상황, 즉 "등화관제" 상황에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가스가 전기보다 빨리 끊긴다는 등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려 동물들을 위한 절약 방법도 관심 가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그냥 안 먹고, 아끼는 방법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워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저자의 철학이 가득 담겨 있는, 궁상맞지만 매력적으로 보이는 요리 레시피도 많습니다. 단순한 미국 가정 레시피가 아니라 유럽, 심지어 간장과 누룽지 등 중국에서 비롯된 재료를 사용하는 요리를 가르쳐 주는 식이라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에요. 그 중에서도 파리식 양파 수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만족을 주며 언제나 위로가 되고 마음에 남는 소박한 수프라는 미네스트로네 레시피는 꼭 따라해 보고 싶더군요. 집이나 시장에서 가장 흔하고 싼 재료로 만드는 게 최고라니 더할 나위 없죠. 가끔 집에서 궁상을 떨며 혼술을 즐기는 이와마 소다츠가 떠오르는 메뉴들도 좋습니다. 이런 저런 선반에 채운 통조림들을 결합해서 먹는 레시피들 처럼요.

이러한 레시피, 조리법 외에도 커피 찌꺼기를 바늘 겨레 안에 넣으면 바늘이 녹슬지 않는다, 핸드로션 대신 버터 포장지를 손에 문지르고 나서 버리라는 등의 생활 꿀팁도 많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시대 착오적인 내용들, 그리고 말을 타다가 생긴 타박상은 말 바로 옆 축축한 잔디를 상처 부위에 고정한다는 말도 안되는 민간 요법이 대부분이긴 합니다만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어서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글의 흐름 속에서 저자의 여러가지 철학을 강하게 피력하는 장면들도 기억에 많이 남네요. 개인적으로는 어린이도 사람이기 때문에 맛, 질감, 자극 면에서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것을 얻기 위해 "생각하며" 먹게 해야 한다는 교육 이론이 와 닿았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잘 먹는다" 는 중국 속담에서 시작하여 "우리 나라는 현명하지 못하다!" 고 일갈하는 장면은 "맛의 달인" 의 지로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렇게 재미있고 한 번 읽어보면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흰 빵을 증오하는 저자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집에서 직접 빵을 구워 먹기 까지 해야 하는지 등 내용 모두를 동의하기는 어려우며,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많이 낡았고 번역 문제겠지만 문체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는 문제들, 무엇보다도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도판이 하나도 없다는 큰 문제는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5점인데,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이 아깝지 않았을 거에요. 요리, 음식 들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현대를 무대로 "좀비를 요리하는 법"과 같은 개정판이 나와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조금 찾아보았는데 이 책 발표 시점에서 저자 나이가 34살이라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의 잔소리 섞인, "옛날에는 이랬지" 스타일의 글들로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 할머니가 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요. 대체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또 아래와 같은 평균 이상의 미모도 놀랍고요. 여러모로 관심을 가져볼 저자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