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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3

N - 미치오 슈스케 / 이규원 : 별점 2.5점 (2점에 가까운)

N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수록작들 대부분이 정통 추리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건이 많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등장한다 해도 전형적인 범죄물이나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탓입니다. 예를 들어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은 살인, 사체 은닉과 같은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범죄와는 별 관계없는 인간 드라마입니다. 살인범이 체포되지도 않고요.

그래도 드라마들은 괜찮은 편이고 재미도 있습니다. 인간 드라마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일상계 추리물 (이름 없는 독과 꽃), 성장기 + 청춘물 + 인간 드라마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가족 드라마 + 일상계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등 선보이는 장르의 폭도 넓습니다.
정통 추리물이 아닐 뿐, 추리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특히 <<이름 없는 독과 꽃>>은 작가 명성에 걸맞는, 괜찮은 일상계 추리물이에요. 학교 무대의 가벼운 일상계라는 점에서 요네자와 호노부 느낌이 살짝 들더군요. 결말은 전혀 달랐지만요.

그러나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는 과장 광고였습니다. 세계관과 무대, 등장 인물들이 겹치는 연작 단편 소설일 뿐이에요. 읽는 순서에 따라 대단히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작가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작품이 그걸 잘 반영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기는 힘드네요. 소설이라는 매체에 적합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읽은 순서대로에요.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고등학교 야구부원 신야는 보결이지만 매일 새벽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형 히데오는 고시엔 진출을 눈 앞에 둔 결승전 직전 무리한 포크볼 연습으로 팔꿈치를 다쳤고, 그 이후 자살했다. 신야는 형에게 악질 DM을 보낸 누군가가 보란듯 형처럼 자기를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죽어 버려"라고 말하는 회색 앵무 리쿠짱과 주인인 소녀 나가미 지나미를 알게되었다. 지나미가 죽고 싶어 한다는걸 눈치챈 신야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한 원양어선 선원 니시키모 씨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서 함께 빛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꽃을 보게 되었다.


학원물이자 성장기인 작품. 거대한 꽃을 보았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서로의 속 마음을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곤충 연구원인 나는 버블 붕괴로 전 재산을 잃은 연인 다사카에게 폭행을 당해왔다. 마침내 살해당하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니시키모라는 남자가 다사카를 막는 와중에 먼저 다사카를 죽이고 말았다. 니시키모는 원래 자신이 다사카를 죽이려 했다며, 사체 은닉을 도와준 뒤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경찰이 뒤를 쫓는 상황에서 다섯 줄기 박명광선이 만드는 거대한 꽃을 보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 뒤 나는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니시키모는 원래 빈집털이였으며, 다사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걸 알게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를 구해주었던 동네 소꼽친구였고, 주폭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떠올려 나를 구해주었던 것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에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원양어선 선원으로 나왔던 니시키모의 과거와 정체가 드러나는 작품. '나'와 니시키모의 오랜 인연이 함께 소개됩니다.
범죄물이기는 하지만, 주폭에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에 대한 슬픈 드라마라고 하는게 맞겠지요.
 
하지만 너무 생각대로 뻔하게 흘러간다는건 아쉽습니다. 자기를 한 번 도와준 정체모를 남자에게 푹 빠지고 마는 전문직 여성이라니, 너무너무 뻔하잖아요..... 조폭과 사랑에 빠지는 여의사가 나오는 20여년도 더 지난 신파 멜로물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일일 드라마도 이것보다는 의외성이 있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아일랜드에서 호스피스로 일하는 가즈마는 일러스트레이터 홀리의 터미널케어(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를 맡았다. 홀리의 착한 딸 올리아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기 위해 가즈마에게 시 글래스를 찾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올리아나와 홀리의 언니 스텔라 모두 시 글래스를 찾았다. 그러나 두 개의 시 글래스 중 한 개는 가즈마가 만들어서 놓아둔 것, 또 하나는 원래 스텔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시한부 인생, 소원을 비는 아이템 등은 <<마지막 잎새>>와 비슷합니다. 착하디 착한 사람들만 나온다는 것도요. 착하기 그지없는 올리아나에 대한 묘사가 특히 빼어났습니다.
지금 읽기는 다소 낡은 소재이지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런 서정적인 작품도 쓸 수 있는 작가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이름 없는 독과 꽃>>
중학교 교사 요시오카 리카는 펫 탐정일을 시작한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와 파트너 에조에 마사미와 함께 외딴 섬에 개를 찾으러 갔다가 3학년 학생 이이누마 가즈마를 발견했다. 가즈마는 섬을 찾은 이유는 독 미나리를 캐기 위해서였다. 리카는 가즈마가 어머니의 사고사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허튼 짓을 막기 위해 뒤를 쫓는다.

독미나리를 왜 캤는지?에 대해 조사해나가는 일상계 추리물. 추리 자체는 대단한게 없는데, 중학교 선생과 학생이 얽혔을만한 작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세이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너무 깹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급전개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아울러, 책 뒤 해설에서는 결말에서 사고사한건 펫 탐정들이 찾은 개로 착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됩니다. 개가 죽었다면 에조에가 리카에게 자책하며 꾸준히 돈을 보낼 이유가 없거든요. 더 결정적인 증거는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세이치의 부모도' 나를 벌하지 않았다는 묘사입니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저는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읽는 순서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전대미문의 체험판 소설이라고 광고하는건 무리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중학교 영어 교사를 하다가 은퇴한 '나'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어 회화 실력 부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잔돈을 구걸하는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빼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매개체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 어머니가 죽기 전 말했던 무언가에 대해 들었다.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소녀 몰래 상자를 열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귀국 후 조사하다가 알게된 건 소녀의 죽음이었다. 소녀는 상자 속에 무언가가 없어졌다며 패닉에 빠져 뛰쳐나갔다가 버스에 치였다고 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에서 착하디 착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소녀 올리아나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 이유도 "아이소어호리브르...."라고 말한걸 "I saw a horrible"이라고 이해했던 영어 교사 -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성실한 영어교사 니이마 선생 - 의 무식한 착각 탓이라니 더 입맛이 씁니다. 올리아나는 사실대로 "I saw a holy-blue" 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남의 소중한 상자를 몰래 열어본 행동은 용서가 안되고,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 그것도 영어 교사가 - '리' 발음과 '러' 발음을 헛갈린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자 안에 정말 나비가 들어있있는지, 니이마 선생은 보지 못했는데, 올리아나의 믿음에 의한 환각이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해서 답답했습니다.

본인이 만든 감동을 본인 스스로 무너트리는 이런 작품을 왜 썼는지도 모르겠고,. 이 작품만 읽으면 내용 이해가 힘들다는 점에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도시에서 50년 만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키 부부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사라진 개를 찾기 위해 여형사는 펫탐정 에조에를 고용했다. 꼬박 이틀에 걸친 수색 끝에 에조에는 사라진 개 부차티를 찾아냈다. 하지만 개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알고보니 살해범은 이웃집의 히키코모리 청년 게이스케가 수상하다고 했던 부부의 아들 다카야였다. 여형사는 게이스케의 어머니로 아들이 유죄라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개를 찾아 나섰었다....

<<이름 없는 독과 꽃>>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여형사가 아들을 의심한 나머지 증거를 인멸하려고 개를 찾아 나섰다는 동기가 밝혀지는 장면이 마음에 들었어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자책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런 부분에서 다 큰 어른이지만 의외로 성장기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게이스케와 다카야 증언과 상황이 뒤바뀌는 일종의 반전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헐겁습니다. 다카야가 했던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는걸 에조에가 초반에 눈치채지 못한 이유부터 석연치 않아요. 개와 함께 했던 유년 시절 경험으로 개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자인데다가, 펫 탐정일을 하면서 쌓아온 경력도 있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 거짓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반에 무의미하게 반대 방향을 돌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범인이건, 개를 없앤다고 증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닐겁니다. 범인이 체포된 이유도 개와는 무관했고요. 평범 이하의 범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수록작의 시간대별 순서는 아래와 같은데, 이대로 읽는게 가장 좋아보입니다.
  •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 <<이름 없는 독과 꽃>>
  •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제가 4를 가장 먼저 읽은 이유는, 에이스였던 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Touch>>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2020/10/18

리셋 - 기타무라 가오루 / 고주영 : 별점 2점

리셋 - 4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황매(푸른바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5년, 전쟁 막바지에 아버지 요양차 지방 친척집으로 향하게 된 중학생 마스미는, 호감이 있던 슈이치에게 직접 만든 선물을 전해주고 작별을 고했다. 슈이치와 마음이 통한걸 느꼈지만, 슈이치는 폭격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린이 책을 만드는 직장인이 된 마스미는 초등학교 졸업반 무라카미와 친해졌다. 그리고 그가 슈이치의 환생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일상계 미스터리인 '엔시 씨와 나'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의 '시간과 사람' 3부작 중 한 편입니다. 예전 미스테리아 8호에 수록되었던 요네자와 호노부 특집에서 요네자와 호노부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았던 책입니다. 기타무라 가오루를 좋아하기도 하고, 요네자와 호노부 역시 좋아하는 작가라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품 장르는 생각과는 다르게 윤회전생 멜로물이더군요. 특이한건 핵심인 윤회전생이 초능력이나 특정 장치, 장소와 같은 방법이라던가, 우연한 자연 현상이나 사고와 같은 계기가 없는, 그야말로 단순한 윤회전생이라는 점이고요. 다시 태어난 연인이 원래의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도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 부분들에서 약간이나마 추리적 요소를 기대했지만 찾아보기 힘들어요. 

내용도 윤회전생 멜로물이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수천 수만가지 비슷한 콘텐츠와 비슷합니다. 어린 중학생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만, 남자가 전쟁통에 폭격으로 죽고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채 직장인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환생하여 중학생이 된 남자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여자는 사고로 죽고 다시 환생한다, 그리고 다시 만나 결혼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도 차별화 요소를 찾아 본다면, 우선 슈이치가 마스미가 만나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교감한게 '2차 대전'이라는건 독특했습니다. 마스미와 주변 지인들 모두 유복한 가정이고, 사는 동네도 부촌이라는 설정이라 2차 대전에서 일본이 극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유있고, 공포와 두려움은 찾아보기 힘든 묘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무대로 한 작품들 중에서는 돋보일 정도로 색다른 분위기였어요. 이런 분위기는 작 중, 공습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커피에 설탕을 곁들여 먹는다는 묘사라던가, 마스미 지인 중에서 전쟁 때문에 죽는건 슈이치 말고는 징집된 친구 유코 오빠 밖에는 없다는 걸로 잘 드러닙니다. 

그리고 1, 2부 구성으로 1부는 마스미, 2부는 환생한 슈이치인 무라카미 가즈히코 시점으로 전개된다는건 다른 윤회전생이라 시공간 초월 멜로물과 유사하지만, 성인, 아니 중년 이상 나이가 된 무라카미가 자신이 어린 시절 썼던 일기를 토대로 자식들에게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한다는 2부 구성은 색다른 맛이 있더군요. 당대 분위기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압권이었고요. 아마 저자 본인이 1949년 생이라 직접 경험해 보았던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마스미와 슈이치가 공유했던 기억이, 슈이치가 환생한 무라카미와 마스미, 그리고 무라카미와 마스미가 환생한 마이코가 서로 인연임을 공유하는 방아쇠 중 하나가 ''책" 이라는게 가장 독특하면서도, 마음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이야기 서두에서 갓 알게된 마스미에게 슈이치는 사펠 여사가 쓴 "사랑의 가족"이라는 책을 빌려 줍니다. '사자 자리 유성균'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한 게 이유였지요. 그리고 성장하여 중학생이 된 뒤, 전쟁 탓에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는 마스미에게 슈이치는 기노시타 유지가 쓴 시집 "전원의 식탁"을 빌려 줍니다. 두랄루민이 비행기 제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두랄루민이 언급된 시가 있는 시집을 빌려준 겁니다. 그리고 그 시집에는 '텐 예다 프뤼링 핫 누아 아이넨 마이'라는 슈이치가 쓴 메모가 꽂혀 있었습니다. "춤추는 회의"라는 독일 영화 속 주제가로 '그래도 5월은 한 번 밖에 오지 않겠지'라는 뜻이었습니다. 5월이 생일인 마스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함께 담아 전하는, 애틋한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슈이치가 환생한 무라카미에게 마스미는 기노시타 유지가 쓴 "아동 시집"을, 그 뒤 무라카미가 입원했을 때 "사랑의 가족"을 빌려줍니다. 마지막에 무라카미 가즈히코와 마스미가 환생한 마치코가 만나게 된 건, '텐 예다 프뤼링...'을 무라카미가 부르다가, 그 노래에 마치코가 가능하여 달려나온게 인연이 되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책들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으며, 사소한 단서들을 쌓아 올려 환생과 재회에 이용한건 추리 작가다운 솜씨라 생각되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건 어쩔 수 없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2001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2020/01/24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 카노우 리에 / 허윤 : 별점 2점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1 - 4점
카노우 리에 지음, 허윤 옮김/대원씨아이(만화)

80년대를 좋아하는 고교 1년생 오오타키와 야쿠시마루가 서로의 공통점을 알고난 뒤, 알콩달콩한 첫사랑을 키워나간다는 청춘 멜로물입니다.

달달하면서도 순수한, 그야말로 플라토닉한 고등학생들의 첫사랑을 80년대 풍으로 그려낸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부터 그러해요. 전 7권 분량 동안 둘이 교제를 결심하는 것도 막바지인 6권부터이며, 교제를 시작해도 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순진한 아이들이거든요. 지나치게 소심하고 착한 야쿠시마루야 그렇다쳐도, 남자 주인공인 오오타키마저도 큰 가슴에 혹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성욕이나 망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80년대스러워요. 작화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야쿠시마루는 80년대 대표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판박이입니다. 흔치않은 이름부터가 80년대 최고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던 야쿠시마루 히로코에서 따왔으니 말 다했지요. 중간 중간 등장하는 컷 일러스트들도 추억을 돋게 만들고요.

또 이야기의 주요 흐름이 80년대의 아이돌과 그들의 노래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제목의 "슬로 모션"은 물론, 소제목 모두가 당대 인기곡들 제목이며, 그 외 수많은 80년대 아이돌과 노래가 직, 간접적으로 전개에 영향을 주거든요.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소녀 야쿠시마루를 만난 오오타키의 모습 뒤에 두근거리는 감정 표현과 함께 "슬로 모션"의 클라이막스인 '만남은 슬로우 모션' 이 흐르는게 좋은 예입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전 가사가 '갑자기 등줄기를 따라, 사랑의 예감이 달콤하게 달렸어'라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외에도 어떤 순간, 8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던가, 다케우치 마리야의 시티팝은 어른 노래라고 하는 등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장치가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게 끌고나가지 못한 이유도 명백합니다. 뻔한 이야기를 무리하게 길게 끌고 나가서 생긴 온갖 문제가 전부 들어 있는 탓입니다. 우선, 둘의 교제가 시작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너무 깁니다. 아무리 80년대 복고풍 청춘 멜로물이라 하더라도, 21세기에 발표된 작품이 별다른 애정표현도 없이 6권에서야 사랑 고백을 하다니 이건 좀 지나치죠. 나카이도나 고이즈미와 같은 쓸데없는 라이벌의 등장과 이를 통해 삼각 관계나 사각 관계를 끌고가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고요. 별다른 고민없이 그냥 인기있던 작품들의 설정들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하긴, 좀 더 매끄럽게 삼각 관계, 사각 관계를 그려냈더라면 지금보다야 연재가 길게 이어지긴 했을겁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작가의 실력이 부족했던거지요.
여러가지 전개 상의 시행착오 끝에 둘이 사귀기 시작한 뒤도 급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아쉽습니다. 정작 사랑 이야기보다는 야쿠시마루의 성장기 중심으로 이야기도 완벽하게 궤도가 바뀌거든요. 그나마도 좀 극적이었다면 모를까, 클라이막스인 패션쇼가 전혀 와 닿지 않아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야쿠시마루 아버지 실종의 진상도 뭐 그런가보다, 싶은 정도로 넘어가버리고요. 이럴거라면 중간부분을 모두 들어내고 분량을 대폭 줄여서 둘이 교제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나도록 3˜4권 정도로 발표하는게 훨씬 완성도가 높았을 듯 싶네요. 그랬다면 걸작이 되고, 영상화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80년대를 사랑하는 아이들' 이라는 컨셉을 너무 과하게 우려먹는 것도 문제에요. 초반부는 옛날 노래가 등장하는 상황이라던가, 다른 등장 소품들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좋았는데 가면 갈 수록 소재 고갈 탓인지 억지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오타키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밤에 부르는 노래가 "쥴리아의 상심"이라는건 누가 봐도 좀 오버스럽지요.

마지막으로 단점은 아니지만, 80년대 아이돌과 노래들 중 밴드는 고작해야 첵커스, RC석세션 정도만 등장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습니다. 저에게 80년대는 안전지대, 튜브, 사잔, 오메가 트라이브의 시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않고,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전개와 마무리는 영 좋지 못했습니다. 작가와 편집자 모두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요. 권해드리기는 조금 애매한데 80년대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1,2권 정도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 수록 별로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07/03/05

비밀의 문 - 김래성 : 별점 2.5점

비밀의 문
김래성 지음/명지사

정말 오랫만에 올리는 추리소설 리뷰네요. 그간 NDSL에 빠져 살다가 회사에 기계를 반납한 뒤 겨우 원래의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무섭다 NDSL!)

"쌍무지개 뜨는 언덕"과 "실락원의 별", "청춘산맥"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추리문학으로 등단한,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김래성 선생님의 단편집. 이전에 읽었었고 집에도 계속 있었지만 최근 "설홍주" 관련 이야기를 쓰다가 참고할까 해서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9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말미에는 김래성 선생의 추리문학소론이라는 30년대의 강연자료까지 수록되어 있어서 자료적 가치는 무척 높습니다. 작품들도 20~30년대 분위기가 가득하고요.
아울러 긴장감을 이끌어 내는 솜씨와 극적 반전, 공포 등은 시대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낡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 과연!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생님의 작가적 명성에 비하면 정통 추리 단편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에도가와 란포"와 굉장히 유사한 변격물이 대부분으로 추리물다운 트릭이 등장하는 작품은 거의 없거든요. 그나마 정통 추리에 가까운 작품은 "비밀의 문"과 "벌처기", 그리고 국내 최초의 추리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타원형 거울" 정도네요.
게다가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상투적인 소재가 난무하고 등장인물들도 화가, 작가 등이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 등은 좀 쉽게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뻔했습니다. 지나친 통속성도 거슬리는 부분이었고요. 이러한 부분에서는 국내 후대 작가에게 안 좋은 쪽으로만 영향을 끼친 느낌이 물씬나더군요.

결론내리자면 자료 측면에서야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고 재평가받아 마땅한 작품들임에는 분명하나 추리문학의 효시라는 칭호에서 기대한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 진정한 고전이 되기에는 2% 정도 모자라 보이네요.

저의 베스트는 "타원형 거울" 입니다. 변격물 취향이라면 "이단자의 사랑"과 "악마파"도 아주 괜찮은 발상의 작품이긴 한데 제 취향은 아니라서...
1. 비밀의 문 :
살인광선을 개발한 강박사에게 괴도 그림자로부터 그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가겠다는 편지가 배달된다. 강박사는 예고 시간까지 조수들과 함께 광선 설계도를 철통같이 지키지만 그림자가 정작 훔쳐간 것은 박사의 외동딸 영채였다.
범죄 예고, 유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가 등장하고 있으며 원래 방송극용 대본이었던 탓인지 김래성 선생 작품답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범죄(?) 이야기로 쓰여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트릭은 별게 없지만 꽤 괜찮은 편이고요. 깔끔한 평작입니다.

2. 이단자의 사랑 :
병원 원장 김철하는 간호사로 일하던 애련과 결혼한 사이지만 애련의 전 애인인 시인 추강에게 그녀를 내어주고 대신 1년에 한번만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청을 하여 허락받게 된다.
전형적 변격물로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이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설정을 극단적으로까지 묘사한 작품입니다. 내용은 지루하고 뻔하지만 마지막의 반전인 "고래고기" 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희 아버지도 약 40여년전에 이 작품을 읽었는데 반전을 아직도 기억하시고 계시더군요. 그만큼 당시에는 충격을 안겨다 준 획기적 발상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지금 읽기에는 좀 낡긴 했지만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3. 악마파 :
내가 여동생 루리와 함께 동경에 유학하던 시절 만났던 두명의 미대생 노단과 백추 두명은 루리를 사랑하게 된다. 부자집 아들이며 건장한 체구의 노단과 가난뱅이에 불구자이지만 천재적 화가인 백추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백추가 "제전"에 그림이 입상한 기념 파티에서 벌어진 소동 이후에 행방을 감추게 되자 노단과 루리의 결혼을 허락한다.
역시 전형적 변격물로 화가로서의 창작 욕구를 위해 다른 것의 희생을 강요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냥저냥한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소재인데 "악마파"라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화풍을 굉장히 잘 묘사하고 있어서 꽤나 실감나면서도 엽기스러운 이야기로 완성되었습니다. 김래성 소설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그런 작품입니다.

4. 백사도 :
백사도를 그린 동추라는 화가를 찾아온 나는 그에게서 그림을 그리게 된 처절한 과거사를 듣게 된다.
역시 화가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일종의 밀실 살인 트릭이 등장하긴 하는데 트릭 자체가 주인공의 "꿈"에서 풀린다는 내용이라 추리물로 보기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작품도 기본 이야기 뼈대는 좋은데 괴기함과 엽기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썩 마음에 들진 않네요.

5. 벌처기 :
나는 여류 화가로 행세하며 수많은 남자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아내를 용서할 수 없어서 완전 범죄를 결심한다. 이미 한번 본 영화를 보러 간다고 속이고 집으로 되돌아간 나는 재빨리 아내를 살해하고 극장으로 돌아가지만 곧바로 경찰에 체포되는데...
도서 추리 소설로 볼 수 있는 특이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의 고백에서 시작한 뒤, 변호사의 변론, 그리고 사건이 밝혀지게 된 결정적 증인의 증언이라는 세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특이하고요. 완전 범죄 계획 자체는 너무 조잡하고 유치하며 단서 역시 굉장히 뻔하지만 소설적인 구성이 기발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잘 묘사된 당시 시대 풍경을 읽는 것 역시 재미있었고요.

6. 광상시인 :
나는 아내를 잃은 뒤 정처없이 방랑하다가 그림 그리기 적당한 풍경을 찾아 잠시 머물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시인 추암과 그의 아내 나나를 만나게 된 뒤 둘의 광기 가득한 요구와 사랑에 휘말리게 되며 추암이 나나를 살해한 뒤 시체를 안고 춤을 추는 모습을 목격한 뒤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3년뒤, 나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추암과 재회하는데...
이 작품역시 전형적인 변격물인데 멜로적인 성향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네요. 반전이 약간 충격적이긴 한데 전체적으로 좀 지루하고 심심해서 그냥저냥 평이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7. 타원형 거울 :
추리잡지 "괴인"의 발간인 백상몽은 잡지가 성공하게 되자 현상 공모를 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10년전 평양에서 벌어진 유명한 살인사건의 해결. 거금 300원의 상금을 내걸고 당시의 자세한 사건 현장과 개요를 잡지에 실은 뒤 독자들의 추리를 요청하는데, 10년전 사건의 용의자였던 유시영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추리를 써 내어 당당하게 당선한다. 그러나 유시영은 현상 공모 뒤에 숨겨진 또다른 무엇인가를 눈치채고 백상몽에게 서신을 보낸다.
김래성 선생님이 일본 유학 중 추리전문지에 발표한 국내 최초의 추리 소설. 이야기의 시작부터 상당히 독특해서 인상적이며, 트릭 역시 당시 기준으로 볼 때에는 독창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유시영의 추리 이후 벌어지는 사건과 진범의 정체는 트릭이 공정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보다 교묘하게 잘 꾸밀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도 자료적 가치는 충분하고 내용도 추리적 요소로만 놓고 본다면 괜찮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아야 하는 작품이겠죠.

8. 복수귀 :
박도순과 이철수는 의학 박사와 간호사 숙채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 이철수가 박도순의 논문을 훔친 뒤 도용하여 먼저 박사가 되고 숙채와 결혼하자 도순은 복수를 꿈꾼다.
역시나 남자 둘, 여자 한명이라는 지루한 설정의 반복. 또 여자의 심리 변화가 굉장히 급격하여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반전이 기발하긴 한데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9. 무마 :
나는 정통파 추리 작품으로 이름이 알려진 추리 작가로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량 허군을 통해 라이벌이기도 한 변경 소설작가 백웅이 관련된 엽기적인 살인사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엽기적인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결말도 나름대로 깔끔합니다. 하지만 결말까지의 이야기 전개가 너무 쉽게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이한 것이 단점이네요. 비교적 평이한 수준의 소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5/02/23

아가페이즈 - 야마다 레이지 : 별점 3점

아가페이즈 6 - 6점
레이지 야마다 지음/세주문화

비쥬얼 록밴드 "에로스"의 리더인 미즈키 유리는 천재 기타리스트 및 작곡가로 언더그라운드의 카리스마로 까지 불리우는 인기인이지만 16년동안 자신이 호모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된 불량조직 카르마 레인의 리더 우즈메는 유리에게 연민을 느끼고 유리가 짝사랑하는 야구부 스타 카네다 토라키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유리를 도와주고자 한다. 

하지만 얇은 선수층과 콩가루같은 팀 분위기라는 악조건에서 큐세이 고교를 갑자원에 진출시키기 위해 홀로 팀에서 고군 분투하는 토라키를 위해 유리가 야구로 도와줄 생각을 하고 전설의 풍수사 "세이메이"를 찾아가게 되면서 부터 모두의 운명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풍수마구 5행 5종을 익히게 된 유리는 마구를 하나 던질때 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게 된다는 계약을 하게되고 마구를 계속 던져간다. 기타 연주력, 작곡능력 등을 차례로 잃어가다가 최후의 마구 1개를 남기고 마지막 남은 계약대상인 유리의 목소리만이라도 지키기위해 우즈메와 토라키를 비롯한 팀원들이 힘을 합치지만 결국 지구대회 준결승에서 최후의 핀치에 몰린 유리는 토라키와의 대화끝에 마음을 정리하고 최후의 마구를 던지게 된다...

도대체 이 만화의 쟝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얻은 비쥬얼 호모 열혈 고교야구 청춘 게이 애정 멜로 만화랄까요?

그동안 주류 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모든 코드들을 조합해서 16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면서도 실제적으로 드라마의 무대는 고교야구 지구 예선으로 설정하여 진행하는 엄청난(!) 만화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아다치 테츠의 만화 "세븐틴 러브"가 일단 연상되더군요.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문란한 사생활, 거기에 현란한 대사와 독백이 난무하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제대로 된 어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각각 어두운 가정환경과 주위 환경에 시달리며 여러 비정상적인 생활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도 비슷하네요. 그리고 대충 그린듯한 그림도요.

하지만 이러한 요소는 일부 막나가는 청춘물이나 성장물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왔던 점이라 이 작품만의 독특하거나 특별한 점으로 보기에는 힘듭니다. 결정적 차이점이자 이 작품만의 특징이 있다면 이른바 "청춘애정물"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풍수"와 "야구"라는 황당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서 말이죠.

이 작품에서 이질적인, 제대로 된 어른이 유일하게 붙어있고 재능과 어느 정도 행복한 가정이 있는 존재인 토라키(와 토라키와 연결되는 야무) 만을 제외한다면 작품안에서 크게 진행되는 두개의 사랑의 흐름, 우즈메->유리->토라키->야무->유리 와 마츠오->다키니->류추다 라는 두개의 사랑 모두 당사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첫번째는 주 당사자인 유리는 호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특히 토라키) 노멀이라는 것 때문에, 두번째는 다키니의 죽음 때문에 당사자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지요.

또한 진정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것을 토라키를 위해 버린 유리의 경우를 비롯하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풍수의 이론 (등가교환의 법칙?) 때문에 모두들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전개는 이들의 상처를 더욱 깊고 암울하게 합니다. 이렇게 흡사 인과율의 법칙처럼 정해진 파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는 파국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베르제르크"와도 유사한 전개로 비슷한 전율을 안겨다 줍니다.

혹시 어디서 본듯한 설정이라고요? 최관->현지->오혜성->엄지->마동탁 이 생각나지 않나요? 무엇보다 최근에 거의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인 유리, 즉 오로지 사랑때문에 자신을 파괴해가는 모습은 흡사 엄지를 위해 장님이 되면서까지 시합에 져주기 위해 발광하는 오혜성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집니다. 그러나 오혜성과 미즈키 유리의 차이점은 오혜성은 사실상 더 잃을것이 없었지만 유리는 사랑을 위해서 가진 모든것을 잃게 된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도 결국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엄청난 점수차로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모든것을 희생하여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무참하게 패하는 큐세이의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당연했지만 너무나 어둡고 비극적인 끝맺음이었죠. 때문에 대충 그린듯한 그림체에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더 비장하고 더 암울한 이야기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권에서 모든것을 잃게된 후 각자 스스로의 처지를 알게 되어 행복을 위해 다시 모인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유리의 마지막 피칭로 끝나는 8권정도에서 끝맺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의 전개는 에필로그-후일담 형식의 후반 이야기가 너무 길어 상당히 처지는 편이라서요. 차라리 음악을 포기하고 말없는 풍수 마구 투수로 프로를 재패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음악에 대한 집념과 천재적인 음악성에 대한 묘사가 설득력이 부족해서 마지막 부분에서의 비장함이 약해 8권까지 꾸준히 달려주던 감성이 좀 무뎌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단점을 지적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고교 청춘 애정물이면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전편에 걸쳐 명장면과 명대사가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심각한 대사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특유의 개그와 과장을 계속 선보여서 이질적이고도 해괴한, 하지만 작품에는 너무나 어울리게 구성하는 센스는 놀랍습니다. 아쉽게도 야구만화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설정과 잘 조합된 마구의 특성과 던지는 법,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라이벌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흡사 20여년전의 야구만화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작품 자체도 스토리는 황당무계하지만 사람을 잡아 끄는 매력이 특출나서 몇번이고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작품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그림만 조금 더 좋았더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었을텐데 아쉽군요. 뭐 그나마 요새는 구하기도 힘든 절판도서가 되어버렸지만요... 

개인적인 명장면 베스트...최후의 투구를 앞두고 토라키와 유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너 이 시합전에 자신이 게이라고 얘기했어.. 대답해 유리... 너...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싸워온거냐..?"
"핫 핫 하" 
[물론이야...] "바보-" 
[아주 좋아하고 있어] "시시껄렁한 소리 다 듣겠다" 
[너는...] "미안하지만..." 
[나의 전부야..]"내 타입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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