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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1

희극비기극(喜劇悲奇劇)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 화물선을 개조한 공연용 배 '우콘호'에 시치로는 마술사로 고용되어 조수 마코토와 탑승했다. 그러나 연예인 혹부리 곤타와 세가와 박사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치로 일행은 피해자들 모두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졌다는걸 알아냈다. 시치로는 전처 우타코, 조수 마코토(모리 마리모라는 예명)가 다음 피해자가 될까 걱정하면서 점차 사건에 깊숙히 휘말리게 된다...

일본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본격 추리와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소동극이 결합된게 특징입니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한다는 설정도 독특하고요. 목차의 모든 소제목도 회문으로 구성되어 있을만큼 회문을 전편에 걸쳐 적절히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첫 피해자였던 논 레논(None lenon)이 진범이었고, 그 정체는 그랜트였다는 전개도 좋습니다. 그랜트와 레논은 동일 인물이었으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고 있었다는건데, 이를 마술이라는 소재로 드러내는게 아주 기막힙니다. 

우선 레논의 특기 마술은 얼굴을 가린 채 선보이는 독심술인데, 이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장의 거대한 트럼프를 이용한 마술 리허설도 진상과 연결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바꿔치기 마술이었지만, 곤타만은 그 공연을 유난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곤타는 무대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트럼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해 보였던 바꿔치기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는걸 알아챈 것이지요.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사건 당시 배 안의 전화는 계속 불통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킨 단장은 전화로 곤타의 방에 불려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화는 배 밖에서 걸려 왔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모두 파악하면서 외부에서 바킨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그랜트뿐이었고요.

연쇄살인의 배경이 된, 과거 사이비 종교 집단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근처를 지나던 무일푼으로 궁지에 몰렸던 바킨 단장과 산엔자이 극단원들이 환자들을 돕는 대신 마약으로 독살하고 금품을 빼앗은 사건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이를 통해 범인 그랜트는 사이비 종교 집단 교주로 현재의 살인들은 산엔자이 극단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복수극이었던게 밝혀지는데,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높습니다. 아울러 앞서 결정적 조건으로 보였던 회문 이름은 단순히 회문을 좋아했던 바킨 단장이 단원들 예명을 지어서 생긴 우연의 일치였다는 상황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좌충우돌하는 희극적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곤타의 시체가 들어 있는 호랑이 탈 인형이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면서 벌어지는 대소동이 대표적입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과 황당한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제목처럼 희극과 비극이 뒤얽힌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주인공 시치로가 아주 별로입니다. 아내가 떠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마술사라는 설정, 조수 마코토와 전처 우타코를 둘러싼 관계 모두 진부합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논리적인 추리 과정과 다르게 개별 살인에 사용된 트릭들도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레논이 칼에 찔려 죽은 것처럼 꾸민 방법이 대표적입니다. 배의 근육과 지방을 등 쪽으로 이동시켜 칼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레논이 인도에서 특별한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세가와 박사를 사고사로 위장한 라이터 트릭 역시 가스 라이터에서 나온 불꽃이 사람을 태울 정도로 강하게 번진다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어서 비현실적이에요. 인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망할 정도의 사고가 될리는 없었을 겁니다.

곤타와 타마하의 시체가 뒤바뀐 과정도 별볼일 없어요. 당시 시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인물이 사실상 그랜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일찍 짐작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거 미국의 사이비 종교 집단과 관련된 외국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주요 인물 가운데 그 조건에 맞는 외국인은 사실상 그랜트뿐이니까요. 

그래도 '회문'과 마술이라는 소재의 사용과 추리적인 전개, 흥미로운 과거의 범죄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개별 트릭의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회문과 마술을 결합한 색다른 본격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추천드립니다.

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며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너무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2026/08/02

광장(2025) - 최성은: 별점 2.5점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김부장"을 챙겨봐서인지, 넷플릭스 추천으로 뜨길래 보게 되었네요. 

가장 큰 장점은 액션입니다. 남기준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인지를 과장 없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초반 PC방에서 벌어지는 난투극과 구준모가 숨어 있던 별장에서의 액션은 현실감 있는 타격감과 묵직한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화려한 기술보다 그야말로 상대를 압도하는 힘과 타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서 남기준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단순한 복수극에서 끝나지 않고, 거대한 음모를 결합한 전개와 흑막은 이금손이었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경찰이면서도 돈을 위해 폭력 조직과 결탁한 뒤, 조직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핵심인물 차영도 설정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준모가 죽은 이후 이야기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남기준의 목표는 동생 남기석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는데, 구준모가 제거된 시점에서 그 목적은 사실상 달성되니까요.
이후 이금손과 차영도가 진짜 배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새로운 복수의 대상이 생기지만, 구준모와 이금손, 차영도의 관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다소 억지스럽습니다. 구준모가 남기석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금손과 차영도가 그 선택을 어떻게 유도하고 설계했는지는 작품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탓입니다. 구준모가 두 사람의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후반부 액션의 완성도 역시 초반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PC방과 별장에서 보여준 묵직한 실전 액션과 달리, 끝판왕 격인 재일교포 킬러 카네야마와의 대결은 칼부림 중심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홍콩 액션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에요. 이어지는 차영도와 이금손과의 대결 역시 두 사람이 애초에 남기준과 대등하게 맞설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긴장감을 끌어내기는 힘들고요. 쓸데없이 잔인한 것도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액션과 분위기만으로도 볼거리는 충분합니다. 후반부 이야기와 액션이 초반의 완성도를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킬링 타임용으로는 괜찮습니다.

2026/07/18

신입사원 강회장 (2026) : 별점 2점

얼마 전 종영된 최신작으로 재벌 회장 강회장과 신입사원 황준현의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살인 음모와 미스터리를 더한 드라마입니다. 티빙으로 감상했습니다. 

"재벌집 막내 아들" 원작가인 산경의 원작을 따르지만, 추리 요소를 크게 강화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회장이 황준현의 몸에서 깨어난 뒤 회사를 노리는 자식들의 음모와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는게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강회장의 호적수인 나병모 회장의 딸이자 강회장의 며느리인 나은세가 강재경으로 변장해 병원에 잠입하고 강회장을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인상적이에요. 동기와 근거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제법 추리적으로도 볼만했어요

원작 대비 바뀐 설정들도 매력적입니다. 특히 황준현의 설정이 좋습니다. 평범한 신입사원이 아니라 유망한 축구 선수였지만 뺑소니 사고로 꿈을 접은 인물이라는 배경은 강회장이 그의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니까요. 죽은 줄 알았던 강회장이 살아 돌아오는 반전과 황준현이 원래 몸을 되찾는 해피엔딩도 원작보다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식들 교육을 방치하고 황준현을 무시했던 강회장 자신의 잘못인 만큼, 피해자로서 복수를 이어가는 전개는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강재경과 강재성 남매가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처럼 보이지 않고, 황준현과 강방글의 러브 라인이 이루어지는게 급작스러웠던 탓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또 다른 몸 바뀜 역시 유치하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없는게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교하면 황준현(강회장)의 능력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약간 아쉬웠어요. 회장 시절 알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는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눈에 띄는 활약이 적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으며,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히 추천할 만합니다. 최소한 원작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6/06

리스타트 (Boss Level) (2021) - 조 캐너한 : 별점 2점

전직 특수부대원 로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죽은 뒤 다시 같은 날 아침으로 돌아오는 현상에 직면했다. 전처 젬마가 개발한 장치 때문이라는걸 알아낸 로이는, 젬마를 상관 벤터로부터 구하고 루프와 지구 파멸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하루가 반복된다는 루프물 영화는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소스 코드"를 보았었지요. 

뻔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만의 큰 특징은 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끊임없는 액션의 무대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비슷하지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을 무대로 복선과 음모는 거의 없이 시종일관 액션으로만 밀어붙인다는게 차이점이에요. 맨손 격투와 총격전은 물론이고, 맨몸 스턴트, 자동차 추격, 검술 액션까지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액션은 다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이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들과 악당들을 해치우기 위해 죽어가면서 공략법을 익히고 결국 그들을 극복해 나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선보이는 프랭크 그릴로의 외모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촬영도 화끈하며 적절한 유머와 합도 좋고요.

일종의 게임같은 '공략' 세계관은 전체 전개에서도 일관되게 선보입니다. 루프가 계속되면 세계가 붕괴하기 때문에, 로이는 살아남거나 악당들을 없애는 대신 잠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들과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로요. 그런데 로이는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전처 젬마가 그날 아침까지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로이는 다시 하루를 공략하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적들을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젬마를 최대한 빠르게 구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거든요. 이렇게 단계별로 공략이 진행되며 단서와 조건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원제 "Boss Level"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습니다.

또 아예 복선과 음모가 없지도 않습니다. 로이가 암살자들에게 쉽게 추격당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날 치위생사를 만났는데, 그때 치료받은 이빨에 추적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대단히 놀라운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액션 중심 영화에서 제법 흥미로운 요소로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는 좀 부족합니다. 우선 앞서 액션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는데, 암살자들 개개인과의 대결이 대부분이라서 규모가 많이 작습니다. 루프물답게 반복되는 장면도 많고요. 

또 중반부에서 아들 조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영화 전체가 쉴 새 없이 액션을 몰아치다가 갑자기 멈추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 선택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달리던 액션 영화로서의 기세를 잡아먹는건 사실이에요.

배우들의 활용도 아쉽습니다. 프랭크 그릴로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이름값에 비해 크게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멜 깁슨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별다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년의 대배우가 이렇게 몰락했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만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신선함보다는 액션의 물량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킬링타임용 루프물입니다. 저는 운동할 때 감상했는데 적당했어요.

2026/05/22

맨 온 파이어 (2026) - 카일 킬렌 : 별점 2점

전직 특수요원 존 크리시는 멕시코에서 벌어진 참혹한 작전 실패로 동료들을 모두 잃은 뒤 제대했고, 그 충격으로 심각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까지 기도했던 그의 재기를 위해, 옛 동료 레이번은 브라질에서 운영 중인 자신의 보안 사업에 크리시를 합류시켰다.

하지만 크리시가 브라질에 도착한 직후, 대규모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레이번의 가족을 포함해 3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레이번의 딸 포만이 우연히 외출 중이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문제는 포가 테러범의 얼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범인들은 증인을 없애기 위해 포를 노렸고, 그녀를 향한 공격이 잇따라 일어났다.

크리시는 포를 지키고 레이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거부했고, 홀로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며 포를 위협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데...

A. J. 퀸넬의 소설 '크리시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입니다. 원작 1편, 2편을 참조했다고 하네요. 넷플릭스로 감상하였습니다.

우선 주인공 크리시의 비주얼은 꽤 마음에 듭니다. 소설 속 크리시를 영상으로 옮기면 딱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칠고 무거우며, 어딘가 망가진 듯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습니다. 단순히 멋있는 전직 요원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와 피로를 몸에 달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외형만 놓고 보면 영화 버젼의 덴젤 워싱턴보다는 더 설득력이 느껴집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크리시를 단순한 힘 캐릭터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 속 크리시는 상황을 읽고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지능적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카세트테이프에 약간의 물질을 묻힌 뒤, 그것을 생화학 공격으로 오인하게 만들어 습격의 기회를 만드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설득력도 높으며, 이런 식의 해결 방식은 다른 콘텐츠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것이라 아주 신선했어요.

하지만 이 장점은 단점과 연결됩니다. 크리시가 지능적인 인물로 활약하는 것은 좋지만, 그 대신 기대했던 액션은 많이 아쉬운 탓입니다. "퍼니셔"같은 원맨아미식 활약을 기대했는데 영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의 액션도 크리시가 PTSD를 심하게 겪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무너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답답합니다.

크리시가 상처 입은 인물이라는 설정 자체가 나쁜건 아니에요. 문제는 이 설정이 액션 장르의 재미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겁니다. 복수극이라면 분노가 터져나오며 악당들을 쓸어버리는 통쾌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이야기도 많이 진부합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흑막이라는 전개는 초반부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전의 맛은 많이 약합니다. 그렇다고 중간 과정이 치밀하지도 못하고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궁지에 몰렸는데, '태픈이라면 자기가 죽었을 때 진상이 폭로되도록 안배했을거다. 그러니까 태픈만 죽이면 된다!'는 급전개는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에요. 이런 이야기라면 태픈이 바이크 운전자이자 적의 편이라는걸 알아챈 뒤 바로 결말로 달리는 식으로 짧게 압축했어야 합니다. 전체 분량 중 절반 이상은 덜어내도 이야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거에요.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면들도 작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포가 숨어 있던 빈민촌에서 악당의 하수인이 도주하다가 우연히 포를 마주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연에 기대어 위기를 만드는 장면이 반복되니 긴장감이 생기기보다는 짜증이 먼저 납니다. 더구나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포의 답답한 행동을 부각하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보호받아야 할 인물인데도 호감이 쌓이기보다 사건을 더 꼬이게 만드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크리시의 외형과 몇몇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원작이나 기존 영화판에서 기대했던 처절한 복수극, 압도적인 응징, 크리시 특유의 무서운 존재감을 생각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크리시라는 이름을 가져왔지만, 정작 보고 나면 전혀 다른 작품을 본 느낌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이지만, 크리시 팬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6/05/10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2) 달콤 미스터리 페어의 비밀 샌드위치

이번에 소개해 드릴 요리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 7월"에 등장하는 샌드위치입니다. 아주 화려하거나 수상해 보이는 음식은 아닙니다. 오히려 티타임에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얌전하고 소박한 샌드위치지요. 그런데 이 작고 평범한 음식이 뜻밖에도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로, 하무라 아키라가 일하는 살인곰 서점의 도야마 점장이 기획한 ‘달콤 미스터리 페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디저트가 나오는 미스터리 소설을 모아 전시하고, 티파티까지 열겠다는 행사이지요. 이 중 한 편이 대프니 뒤 모리에의 "레베카"입니다. 맨덜리의 4시 반 티타임에는 버터를 듬뿍 넣은 크럼펫, 작고 귀여운 토스트, 따뜻한 스콘, 생강 쿠키, 엔젤 케이크, 오렌지 필과 레이즌이 든 케이크처럼 누구라도 혹할 만한 디저트들이 줄줄이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작품 속 핵심은 이런 화려한 디저트들이 아닙니다. 교통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 쓰구미의 어머니는 서점을 찾아와, 딸이 "레베카"의 티파티를 열고 싶어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메뉴 가운데 하나로,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이었다고 덧붙이지요. 쓰구미가 준비했던 속재료는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이었다고 합니다.

커민 시드는 향신료의 하나로 씨앗처럼 생겼고, 음식에 넣으면 조금 이국적이고 묵직한 향이 납니다. 카레에서 맡아 본 듯한 향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비슷합니다. 병아리콩은 고소하고 담백하며, 삶으면 포슬포슬하고 부드럽지요. 으깨면 샐러드처럼 만들기도 좋고요. 짐작컨대 삶은 병아리콩을 으깨고, 소금으로 약하게 간한 뒤 커민 시드를 섞었을 겁니다. 여기에 마요네즈나 버터를 조금 더해 부드럽게 만들고, 식빵 사이에 얇게 펴 발랐겠지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티타임 메뉴로는 꽤 잘 어울리는 샌드위치였을 거예요. 달콤한 과자들 사이에서 살짝 다른 결을 만들어 주기도 했을 테고요.
모양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티파티에 올릴 샌드위치이니, 두툼하고 투박한 형태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부드러운 식빵 사이에 병아리콩 속을 얇게 넣고,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작고 단정하게 썬 형태였겠지요. 삼각형이거나 길쭉한 손가락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맛도 좋았겠지만, 이국적이고 독특한 재료라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떠올릴 만한 샌드위치는 아닙니다. 그런데 도야마 점장이 티파티를 위해 찾은 과자 장인 MIHARU의 글에서,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이 '레베카'의 비밀 재료 샌드위치 재료라며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쓰구미가 사고로 죽어 가던 때 레시피가 적힌 노트를 훔쳐간 범인이 MIHARU라는 걸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보통 미스터리의 단서라고 하면 핏자국이라든가 이상한 쪽지, 누가 들어도 수상한 말 같은 눈에 띄는 걸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 대신에 티파티 메뉴에 들어갈 샌드위치 속재료라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을 사용한다는게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레베카"에는 이보다 더 눈에 잘 띄는 샌드위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맥심의 할머니가 티타임에 먹는 물냉이 샌드위치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되는 오이 샌드위치처럼요. 영국식 티타임을 떠올리면 바로 연상되는 익숙한 메뉴들입니다. 하지만 와카타케 나나미는 이런 샌드위치보다 조금 더 낯설고, 그만큼 더 고민이 필요한 ‘비밀 샌드위치’를 사건과 연결합니다. 그 솜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작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읽어낸 것도 놀랍지만, 그것을 살인곰 서점의 이벤트와 엮어 하나의 미스터리로 다시 조립해 낸 방식이 무척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미스터리는 종종 아주 작은 것에서 움직입니다. 맛있어 보이는 다과 목록 한가운데 툭 끼어 있는 샌드위치 하나, 언뜻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속재료 하나 같은 것에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떠올리면 화려한 케이크보다도 먼저 그 병아리콩 샌드위치가 생각납니다. 가장 수수한 음식이, 끝내 가장 또렷한 단서가 되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 샌드위치 레시피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1. 병아리콩 준비하기
    삶은 병아리콩 1컵 정도를 준비한다.
  2. 향내기
    커민 시드 1작은술을 마른 팬에 약하게 볶아 향을 살린 뒤, 살짝 으깬다.
  3. 속재료 만들기
    병아리콩을 포크로 대충 으깨고, 소금 약간, 볶은 커민 시드, 후추 조금을 넣어 섞는다.
  4. 부드럽게 다듬기
    마요네즈나 버터를 1~2큰술 넣어 질감을 부드럽게 맞춘다. 너무 곱게 갈기보다는 약간 포슬한 느낌이 남는 편이 좋다.
  5. 샌드위치 만들기
    식빵 사이에 속재료를 얇게 펴 바르고,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삼각형이나 손가락 모양으로 작게 썬다. 티타임용이라면 한입 크기로 작게 만드는 쪽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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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9

정점 APEX (2026) - 발타사르 코르마우퀴르 : 별점 2점

사샤는 파트너를 잃고 깊은 상심에 빠졌다. 그녀가 무리하게 암벽 등반을 진행했던 탓이었다. 사샤는 슬픔을 잊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오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인마 벤을 만나 쫓기게 되는데...

샤를리즈 테론과 태런 에저튼이 주연을 맡았고, 호주의 거친 오지를 배경으로 인간 사냥의 표적이 된 주인공과 사냥꾼의 추격전을 그린 최신 서바이벌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샤를리즈 테론과 태런 에저튼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두 배우 모두 뻔한 캐릭터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거든요. 덕분에 사냥감과 사냥꾼이라는 단순한 관계가 그런대로 볼 만해집니다. 추격전도 나름대로 두뇌를 쓰는 부분은 괜찮습니다. 초반부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사샤를 낚는 장면처럼요.

호주 오지의 풍광을 활용한 장면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인간의 체력과 판단력이 한계까지 시험받는데, 워낙 대자연이 압도적으로 묘사되어 화면상으로 제법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중반부까지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끼며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오지에 사람을 사냥하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있고, 주인공이 그에게 쫓기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뻔한 탓이 큽니다. 사샤가 등산과 서바이벌에 능한 전문가라는 설정도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는데, 영화는 그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단순한 도주와 추격으로 채울 뿐입니다. 사샤가 지형과 등반 기술을 이용해 벤과 치열하게 맞서는 장면이 더 많았어야 했습니다.

뒤로 갈수록 긴장감과 재미도 떨어집니다. 초반에는 압도적인 자연환경과 인간 사냥이라는 설정이 결합하면서 어느 정도 몰입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지며 액션도 별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결정적 도주 장면의 설득력이 너무 부족해요. 귀를 물어뜯어 위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기대에 비해 너무 시시했습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결말은 아쉬움의 '정점'을 찍습니다. 다리를 다친 벤이 자기 목숨을 순순히 사샤에게 거는 듯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지금까지 사람을 사냥해온 인물이라면 더 집요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마지막 승부를 걸었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찌질한 악당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는 살인마 벤에게서 미친 사냥꾼의 압도적 카리스마를 느끼기 힘들다는 이유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벤 역을 맡은 태런 에저튼의 연기가 아무리 좋아도, 어린아이 같은 인상과 왜소해 보이는 체격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이 역으로 마동석이 할리우드 데뷔를 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고, 시작 부분의 등반 장면과 호주 오지의 풍광을 살린 서바이벌 장면들은 중반부까지 볼 만합니다. 하지만 설정이 뻔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며, 사샤의 전문가적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단점 때문에 감점합니다. 비슷한 장르를 많이 본 관객에게는 새롭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 어려운 그냥저냥한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예요. 굳이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6/04/10

기억 속의 유괴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5점

저자의 "붉은 박물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작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않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단편다운 기발하고 신선한 부분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록작 전부가 빼어나지는 않고, '설녀' 히이로 사에코 관장의 만화적인 설정은 여전히 별로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고생 추락사 사건"

1991년 2월, 기타구 도립 니시가하라 고등학교에서 2학년 여학생 후지카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후두부를 화단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친 것이 사인이었고, 사건 당시 아래층에서 일하던 작업자는 옥상에서 한 소녀가 "이제 곧 작별이네요.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유리코가 선배에게 고백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졌고, 같은 미술부 3학년 남학생 세 명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고 공소시효까지 만료되었습니다.

'붉은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던 사건의 전제를 뒤집어 버립니다. 당시 고백한 사람은 유리코가 아니라 그녀의 후배인 1학년 여학생이었고, "이제 곧 작별"이라는 말 역시 죽음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 전학을 뜻하는 말이었다고요. 그래서 당시 1학년생 가운데 전학을 간 학생을 추적해, 그 학생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연쇄 방화 사건"

1990년, 후추, 고쿠분지, 구니타치, 다치카와 일대에서 연쇄 방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이나 교환 방화설은 설득력을 잃었고, 여러 건 가운데 한 건만 진짜 목적이고 나머지는 위장이라는 해석도 방화 횟수가 너무 많아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범인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건의 실마리가, 범인을 신고하려다 살해당한 가타노 사치에의 전화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야채 장수 오시치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확인된 유일한 공통점은 방화 대상이 된 집들이 모두 24~25년 전에 지어졌다는 점뿐이었습니다.

사에코는 우선 소거법을 이용해 범인이 찾고 싶어 했던 대상들을 추려냅니다. 소방관은 다른 사람이 출동할 수 있어서 제외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동시에 특정한 조건을 가진 집들을 계속 태웠다는 점을 연결해 사건의 목적을 밝혀냅니다.

그렇게 해서 추리해 낸 진상은 현장검증 책임자 벳쇼가 진범이며, 그는 연쇄 방화가 일어나면 동일한 수사 인력이 반복적으로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특정 시기에 지어진 집들 가운데 한 곳의 바닥 밑에 묻혀 있을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안의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켰습니다. 시신이 훼손되거나 혼동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시치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고, 연쇄 방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통해 범인의 목적과 정체를 밝혀 나가는 추리도 빼어납니다. 어머니의 사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치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단점이 조금 거슬리지만, 큰 흠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토막 사체 사건"

1999년 3월 23일,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머리와 몸통, 양팔의 위아래 부분, 양다리의 위아래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위가 관절을 중심으로 절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보통 토막 사체는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절 부위를 추가로 정교하게 잘라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두고 흥미로운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사에코는 범인이 "가동 범위가 큰 관절"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고 보고, 이것이 시신의 마지막 자세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는 죽은 뒤 사후 경직이 일어나 특정 자세로 굳었을 것이고, 그 자세만 보면 범행 현장이나 범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이지요.
또 범인은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굳은 자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시신을 관절 위주로 절단해 유기했다는 점을 통해 사에코가 지목한 범인은 피해자의 지인 쓰카모토 가즈오였습니다.

피해자는 가즈오의 중고차 가게에서 차를 타며 자주 놀았는데, 차에 앉아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 뒤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피해자가 운전하는 자세로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즈오는 피해자의 아내 오리에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남편 호소다의 성으로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막고 싶어서 시신이 빨리 발견되도록 유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처럼 사후 경직으로 범행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절'을 제거했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네요. 정말 획기적입니다. 단편 특성상 용의자가 몇 명 등장하지 않아서 범인이 빠르게 짐작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회사원 살해 사건"

1990년 3월 14일, 미나미시나가와에서 회사원 후지시로가 살해당했습니다. 후지시로는 주변 동료들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게 만들고, 그런 상황을 즐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많았고, 사건 역시 원한 관계를 중심으로 수사가 전개되었지만 유력한 용의자에게 알리바이가 있어서 결국 미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평균 이하였던 졸작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에코는 후지시로가 속한 재료과 멤버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혀 가는데, 그 전제부터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협박이나 금전적 압박이 특정 부서 사람들에게만 향했을 리 없으니까요.
또 후지시로의 집에 있던 의자의 위치를 보고 그가 어깨를 다쳤다고 추리하는 부분까지는 흥미롭지만, 그것이 사건 해결의 핵심 근거가 되는 과정은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의자를 무엇에 썼는지는 피해자가 죽었으니 밝힐 수 없기도 하고요. 청소하느라 빼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에 더해 진범 사와모토가 구보데라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을 빼앗았다는 반전은 최악입니다. 앞서 구보데라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제시해 놓고, 나중에 사실은 그 인물이 이미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고 뒤집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를 납득하게 할 만한 사전 단서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억 속의 유괴"

26년 전, 다섯 살이던 토다 나오토가 유괴당했습니다. 당시 범인은 몸값을 요구했지만, 결국 별다른 이유 없이 나오토를 풀어주었다.

친모가 나오토와 동반 자살을 할 목적으로 납치했지만 양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뒤, 양부모는 친모의 사체를 유기하고 나오토가 납치당한 기억을 왜곡시키기 위해 유괴 사건을 자작했다는 것이 진상입니다.

양부모가 매년 어디론가 참배를 갔던 점, 범인의 이상했던 당시 몸값 요구 같은 단서는 있지만 친모의 정체 등 독자에게 공유되지 않는 정보가 많아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납치와 유괴,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소품 느낌을 준다는 점도 별로였고요. 납치와 살인은 우발적이고, 유괴가 작위적인 연극인 탓이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3/21

발레리나 (2025) - 렌 와이즈먼 : 별점 1.5점

"존 윅" 시리즈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핀 오프 액션 영화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을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컨티넨탈 호텔이나 루스카 로마 같은 익숙한 설정들이 등장하지만, 이미 알려진 장치를 배경처럼 끌어다 쓰는 데 그칠 뿐입니다. 시리즈의 개성을 만들어 주던 설정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여성이 복수에 나선다는 흔한 설정을 포장하는 장식에 불과해요. 사실 "존 윅" 세계관도 서양 관객들에게는 새로왔을지 모르지만, 일본 만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설정들일 뿐이기도 하고요.

이야기도 뻔합니다. 강한 조직의 후계자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운명의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도망치지만 결국 아버지를 잃은 뒤, 다른 조직에 들어가서 실력을 키운 뒤 복수한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인 탓입니다.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 할아버지라는 설정조차도요.
이에 대한 이야기 전개도 엉망입니다. 어린 시절 헤어졌던 언니가 갑자기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세력 간 협상을 위해 등장한 존 윅이 어느 순간 그녀의 편에서 싸운다는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장치였으니까요.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원래 "존 윅" 시리즈 역시 액션이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 작품마다 적어도 하나쯤은 관객에게 강하게 남는 시퀀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레리나"는 그런 인상적인 장면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은 여성의 액션이라서 타격감도 부족하고, 대체로 밀리는 액션이 많아서 시원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발레리나"에 걸맞게, 발레 동작을 액션에 녹여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화염 방사기를 이용한 대결은 눈꼴 사나운 수준입니다. 화면은 요란하지만, 열린 공간에서 총도 충분히 있는 상황에 굳이 화염 방사기를 사용해야 할 이유는 설명이 안되지요. 현실감이나 개연성 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선사하기 위한 욕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이렇게 "존 윅"의 명성에 기댄 졸작이지만 장점이 아주 없지만은 않습니다.무엇보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이 역할에 잘 어울립니다. 다소 가련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소녀 역할을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팬이라면 '존 윅'의 등장과 활약은 이야기의 개연성과는 별개로 즐길만한 부분이었고요.
전직 킬러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 '할슈타트'의 설정 만큼은 아주 괜찮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장점은 너무 사소합니다. 평균 이하의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불과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26/02/22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 시즌 1 (2025) - 후지이 미치히토 외 : 별점 2점

전쟁 후 PTSD에 걸려 낙향한 무사 사가 슈지로는 극심한 생활고로 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지만 약 한 첩 쓰지 못했다. 아내마저 병환이 깊어지자, 사가는 무려 10만엔을 준다는 무사 모집 공고에 응해 교토 텐류지로 향했다. 다량의 총으로 무장한 주최측은, 그 곳에 모인 수백명의 전 무사들에게 상대를 죽이며 도쿄까지 오면 10만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한 시대극 액션 드라마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를 배경으로 무사 계급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살육 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인기있을 만한 설정은 다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설정 ‘고독(고도쿠)’가 대표적이에요. 수백 명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을 벌이게 하고, 최후의 생존자만을 뽑는다는 건데, 이건 "오징어 게임"과 다를게 없지요. 고도쿠 배후에 재벌 세력과 경시국이 손을 잡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특기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건 "닌자인법첩"같은 일본 시대극 액션물 설정을 그대로 따 왔고요. 그 외에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많아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만화같은 설정을 보신 전쟁이라던가 폐도령 이후 무사 계급의 몰락과 같은 실제 역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와지 대경시, 4대 재벌 등 실존 인물들을 결합시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고도쿠를 통해 무사 계급을 말살하려 한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목적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검술 액션입니다. 실사 시대극으로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촬영과 합이 좋은 덕분입니다. 특히 슈지로가 PTSD를 극복하고 총을 든 경비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각성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어요. 이 순간을 위해 주인공 사가 슈지로에 대한 서사도 초반부터 잘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살인귀 칸지야 부코츠야 일종의 중간 보스쯤 되는 악역이니 그렇다 쳐도, 키구오미 우쿄같은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까지 개별 서사를 풀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비서 신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짐짝에 가까운 후타바의 동행이나 이로하의 등장과 과거 사부와의 악연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기보다는 분산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가 슈지로가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하고 도쿄에 도착할게 뻔한만큼, 이런 이야기는 시간과 분량 낭비에 불과했어요. 이보다는 닌자 쓰게 쿄진의 목적을 좀 더 집중적으로 풀어냈어야 합니다.

검술 액션도 중반 이후에는 힘을 잃습니다. 파워 밸런스가 이상한 탓입니다. 사가 슈지로는 각성 전에도 칸지야 부코츠를 압도했었는데,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는 슈지로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고전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시원하거나 통쾌한 맛도 없고요.

또한 무사 계급을 이 기회에 몰살시키겠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계획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입니다. 모든 무사들이 고도쿠에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칸지야 부코츠의 살인 행각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민중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무언가는 부족하지만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합니다. 

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2

전지적 독자 시점 (2025) - 김병우 : 별점 2점

"나 혼자만 레벨업"과 쌍벽의 인기를 누리는 판타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입니다. 세계가 갑자기 '성좌'들의 관전용 무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 속 현실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가 소설 속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설정의 작품이지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기존 회귀물, 전생물과는 약간 차별화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준 설정입니다. 지난 주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되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액션 판타지 장르로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한 편이에요. 안효섭(김독자 역), 이민호(유중혁 역)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도 잘 어울립니다. 두 사람의 호흡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잘 알겠더라고요.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졌거든요. 우선 CG가 전반적으로 부족합니다. 게임 동영상이나 철지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해서 몰입을 방해하는데, 그 중에서도 절정부인 최종 화룡과의 결전 장면이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몬스터들의 디자인 역시 현실감 없이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라 위협감도,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액션도 특별히 합이 잘 맞는다던가, 서로의 특성을 살려 위기를 극복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지 못합니다. 유중호의 이기어검술(?) 등 여러 스킬들은 모두 중국 무협 영화 그대로라서 새로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 구성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단순한 게임 스타일로, 이를 극복하면서 나오는 반전이나 복선은 거의 없습니다. 김독자가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게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고요. 오히려 금호역에서 천인호를 쫓다가 결계에 갇혀 죽기 직전, 갑자기 난입한 이지혜가 구해주는 식으로 우연과 운에 의지한 전개를 보이는 설정 구멍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화룡과의 결전에서 유중호가 죽는 장면도 뜬금없습니다. 유중호가 죽은 것 외에는 김독자의 작전대로 흘러간 건데,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실망하고 감정선을 무겁게 끌고 가는 건 납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추가 아이템을 얻어 칼을 완성해서 화룡을 물리치는데, 그럼 그 전의 작전은 어쩔 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부족한건 이야기 완성도 뿐만이 아닙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현재 상황이 어떤 구조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성좌'의 무대라는 전제는 나오지만, 코인, 아이템, 스킬 같은 기본 설정조차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게임적인 설정이라서 그냥 넘어갔다면, 이 영화를 과연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작과 다른 설정도 문제입니다. 특히 김독자와 작가가 일종의 '게임'을 하는 듯한 설정은 최악입니다.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다면, 김독자의 전능한 예지 능력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부분이었어요. 여성 캐릭터들도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이 캐릭터성을 갖지 못한 뻔한 설정인데다가, 이지혜는 왜 등장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입니다. 연기도 어색한 부분이 많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길영이가 코피를 쏟으며 사마귀를 조종하고, 그 장면을 본 이현성이 각성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유치합니다. 

결론적으로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팬이라면 실망할 수 있고, 원작을 모른다면 초반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CG 퀄리티, 각색 방향, 연출 등 여러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2025/10/24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명칭이나 유래를 잘 알지 못했던 물건들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주는 책입니다. 원래는 매일경제 연재물입니다. 접할 때마다 흥미롭게 읽었는데,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와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습니다. 

단순한 사물 설명을 넘어, 그것들이 가진 인문학적 의미까지 함께 풀어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집 반찬으로 자주 나오는 자차이를 소개하면서, 중국에서는 자차이의 지역별 판매량이 도시화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소비되는 반찬으로 도시 거주 인구수와 비례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지표 역할을 하는 음식이 놀랍게도 커피라고 하네요. 이처럼 단순한 사물에서 출발해, 관련된 사회적 맥락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배달 음식 포장을 벗길 때 사용하는 랩칼을 다루면서는, 우리나라 배달 음식 문화의 역사가 함께 소개되고요. 과거 젓가락으로 그릇과 랩이 닿은 부분을 문질러 벗겨내던 '젓가락 신공' 소개는 저에게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초밥 사이에 넣는 인조 대잎에 대한 설명이 조지 오웰의 소설 "엽란을 날려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저자의 넓은 식견을 느낄 수 있었으며, 상표나 가격이 적힌 꼬리표를 고정하는 택핀 항목에서는 과거 서태지가 유행시키기도 했던, 흑인 문화에서 상표 태그를 떼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문화적 배경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여러가지 설 중에서도 '난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새걸로 가지고 있다'는걸 자랑하고 과시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건 확실히 그럴 듯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자부심의 표현이었다는 것이지요.

도어 스토퍼를 다루며 엘러리 퀸의 "용 조각 문 버팀쇠의 비밀"을 언급한 대목은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반가왔습니다. 참고로, 원래 문 버팀쇠는 여닫이창을 열린 상태로 고정하기 위해 받쳐 세우는 막대를 뜻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역이라고 하네요. 문이 천천히 닫히도록 하는 현관문 위에 달린 장치는 도어 체크, 혹은 도어 클로저라는 것도 도어 스토퍼 설명에서 소개되고요.

뚫어뻥의 어원은 흥미로운데, 1980년대 백광산업이 출시한 '백광 트래펑'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하수구 트랩에 펑크를 내는 도구라는 의미의 '트래펑'에, ‘뚫어’와 ‘뻥’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이 더해진 멋진 네이밍인데 아직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게 오히려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어원이라면 사이펀 펌프로 알고 있던 기름 펌프의 정식 명칭이 '간장 츄르츄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정보입니다.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일본의 기발한 발명가 닥터 나카마츠로, 그의 엉뚱하면서도 놀라운 발명 인생에 대한 짧은 소개도 인상 깊었어요.

여러 익숙한 물건들의 명칭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예를 들자면 중식당 회전 테이블의 '레이지 수잔', 신발끈 끝의 '애글릿', 끈이 통과하는 구멍인 '아일릿', 창문 잠금장치인 '크리센트', 마트 계산대에서 사용하는 막대는 '체크아웃 디바이더', 겨울 가로수에 묶는 볏짚은 '잠복소', 사원증 목걸이 끈은 '랜야드'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신장개업 가게 앞에서 바람에 춤을 추는 풍선 인형에도 이름이 있었는데, '스카이댄서'입니다. 원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 예술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디어를 낸 예술가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민셜, 하지만 특허는 협업했던 풍선 예술가 가짓이 등록했다고 합니다. 가짓은 유대인이었다니 그럴만도 하겠다 싶습니다.

그 외에도 과일을 감싸는 포장재인 팬캡이나 과일망이 재활용이 안 된다는 사실, 회 밑에 깔린 천사채의 한자가 '천사(天使)'가 아닌 '하늘이 내린 채소(天賜)'였다는 등 짧지만 밀도 있는 정보가 가득하고, 단순한 설명을 넘어 인문학적인 부분도 전해준다는 점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핵심이 되는 '그거' 말고는 도판이 부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연재물로 접했던 독자에게 별다르게 새롭게 전해주는 정보도 별로 없고요. '그거' 종류에 따라 분량도 조금씩 다르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인문학, 잡학 서적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볍게, 하지만 의미도 있는 독서를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9/26

돈돈 다리, 떨어졌다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쓴 단편집으로,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독자에의 도전장' 삽입 작품으로 추천받았지만, 국내 번역 출간되지 않은 탓에 원서를 구해 읽었습니다. 수록작 중 표제작은 작년에 번역해서 소개해 드렸던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해서 완독은 좀 늦었네요.

특징이라면 앞서 말한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될 정도로 본격 추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어 '후더닛' 물로는 완벽한 수준이에요. 본격물답게 여러가지 트릭도 사용되며, 다섯 편의 작품을 하나의 연작처럼 묶기 위한 디테일들도 인상적입니다.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에 모두 '다케마루'가 사용된다는 점 처럼요.

그리고 작가가 조금 가벼운 마음을 쓴 팬 서비스용 작품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장난스러운 센스도 가미되어 있습니다. 주요 화자가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인데 건방진 후배 U군의 도전에 패배하는 등 스스로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고, 어떤 작품에서는 범인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이런 부분은 작가의 팬이라면 크게 반길 요소라 생각됩니다.

다섯 편 모두 이야기의 밀도나 묘사는 가벼운 편이며,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보다는 '후더닛'에 집중한 탓에 추리 퀴즈적인 느낌이 들게 만든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독자에게 정정당당하게 단서를 제시하고, 그로부터 추리를 유도하는 정통 본격 추리의 맛을 선명하게 전해주기 때문에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충분히 즐길 만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돈돈 다리 떨어졌다"

서술 트릭을 사용해 범인의 정체를 감추는데,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것 부터가 도무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요. 작가 후기를 보면 1984년 교토대 추리소설연구회 합숙에서 했던 ‘범인 맞히기’의 단편이 원형이라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탓이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지금 시점에서는 40년 전 트릭이니 어쩔 수 없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보우보우 숲 불탔다"

"돈돈 다리"와 유사한 서술 트릭이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이를 반대로 사용했습니다. 확실히 아이디어는 참신합니다.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돈돈 다리"도 작위적이었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도 심하니까요. 이런 점에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보다는 추리 퀴즈에 조금 더 가까워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페라리는 보고 있었다"

아야츠지 유키토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계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색작입니다. 실존하는 편집자 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걸 보면, 의뢰처와 웃고 떠들고 즐기기 위한 친목적인 성격의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실제 사건 추리는 억지스럽고, 그냥 이런 것도 가능하다 수준으로 끝나며 진상은 그야말로 '현실'이었다는 것도 일상계 느낌이고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만 '독자에의 도전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페라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역시 서술 트릭으로 교묘하게 정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인데, 단서는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소노 가의 붕괴"

밀실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이 사실은 자살 사건이었음을 밝혀내는 추리가 아주 그럴싸합니다. 흉기를 사라지게 만든 트릭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요.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 제공도 지극히 공정하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동기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수록작 중 최고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 본인의 '본격 이론'이 꽤 길게 펼쳐지는 것도 볼거리였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의외의 범인"

수년 전 아야츠지 유키토가 참여했던 TV 기획물의 대본이라는 설정으로, 드라마 대본 형식으로 쓰여 독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진범은 화면 내가 아닌 밖에 있는 카메라맨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지금 보기에 새롭지는 않지만 작품에는 잘 어울렸어요. 게다가 단순히 카메라맨이 범인이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카메라맨이 바로 아야츠지 유키토였다는 점이 밝혀지는 반전이 아주 신선했습니다. 이를 위한 정보 제공 역시 바람직했고요. 영상물로 실제로 만들어도 좋을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