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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15

조선남녀상열지사 : 스캔들 - 이재용 - 별점 3점


역시 공짜표로 본 영화입니다. 원래 영화관가서 볼려고 했는데 요사이 운이 좋네요^^

요부와 바람둥이의 정절녀 무너뜨리기
1. 작업 전야- 선수들, 서로를 알아 보다 겉으로는 세도가의 정부인으로 살아가며 남자들을 유혹하는 이중 생활을 영위하는 조씨 부인. 한편,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을 마다한 채, 뭇 여인에 탐닉하고 시/서/화를 즐기는 이단아 조원. 말 못 할 첫 사랑의 상대이자 사촌 지간인 둘은 은밀한 사랑 게임의 동업자다.
 2. 작업 개시- 바람둥이,요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다 어느 날 조씨 부인은 남편의 소실 자리인 어린 소옥을 범해줄 것을 조원에게 제시하지만 조원의 목표는 9년간 수절하여 열녀문까지 하사 받은 숙부인 정씨로 정해진 상황! 조씨 부인은 조원이 성공하면 자신을 허하겠다는 미끼를 던지고 조원은 내기를 수락하는데…
3.작업 진행- 고생 끝 열매가 더 달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갈고 닦은 실력과 술수를 총동원하여 숙부인 유혹 작업에 나선 조원. 하지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접하고 서민을 돕는 등 강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숙부인의 저항은 예상 외로 완강하고, 그럴수록 조원의 전의는 더욱 불타 오르는데...

 1782년에 출간됐던 프랑스의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저는 "위험한 관계"라는 영화로 먼저 접했었습니다. (아래 사진 참고)

두 영화를 비교해 보건데... 저는 한국영화쪽이 더 좋았습니다. 보다 동양적인 정서에 기댄 "스캔들"쪽이 저의 감성에는 더 맞는것 같더라고요.

영화를 보면서 놀란 점 몇가지는, 일단 의상과 소품이 굉장히 좋았고 화면도 예뻤습니다. DVD로 소장하고 픈 생각이 들게끔 하는 영상은 마음에 쏙 들었고요, 전도연이 청순가련 수절 숙부인으로 분한것은 뭐 그냥 그랬지만 이미숙과 배용준의 연기도 좋더군요. 특히 배용준의 연기변신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어투로 바꾼 대사들과 여러 상황설정은 진지한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코믹함과 재미를 주는 요소였습니다. "통하였느냐?""이럴 수가 이럴 수가""""아니 이게 언제 이렇게 커졌답니까" 등등등의 대사들은 영화를 보다 맛깔스럽고 재미나게 하더라고요.

결론적으로 "위험한 관계"나 "발몽"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는 높아진 방화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Well-Made 시대극입니다. 적극 추천!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8/13

소문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 별점 2점

소문 - 4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북스캔(대교북스캔)

"아내의 여자친구"로 접해보았던 일본 여성작가 고이케 마리코의 단편집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싹트는 악의와 살의를 주제로 한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편인 "팽이멈추기"는 너무나 활동적인 남편을 증오하고 조용한 삶을 찾고자 하는 아내의 살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가 너무 심하네요. 남편의 행동이 살의를 불러 일으킬만한 것이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테니 논외로 치더라도, 남편을 이렇게나 증오한다면 이혼을 생각하거나 최소 별거를 염두에 두는게 상식적입니다.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미국 단편에서 많이 봄직한 ‘돈만 쓸 줄 아는, 성적인 매력도 사라진 아내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생명보험’ 이라는 동기라도 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요. 

그나마 마지막 반전이 괜찮기는 했지만 기본 내용이 별로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 "재앙을 부르는 개"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은 같습니다. 유기견을 주워와서 키우게 된 이후, 다른 가족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불행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개를 버릴 결심을 한다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부터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작품에서 설명되듯 정신병원에 가 봐야 하는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주인공의 불륜, 거기서 촉발된 한 여인의 자살 시체 발견 이후 이어지는 반전은 우연과 억지가 어이를 상실한 수준입니다. 주인공이 남자이기 때문에 작가 특유의 섬세한 여성의 심리 묘사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감점 요소고요. 

자살 시체 발견 시의 묘사는 섬찟했던 만큼, 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짤막한 도시 괴담 정도로 풀어나가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세 번째 작품 "쓰르라미 동산의 여주인"은 정통 범죄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이 3류 탤런트인데다가 대부호의 첩과 엮여있는 만큼, 일상계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어렵지요. 그런데 이 작품이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나았습니다. 일상 속에서의 살의를 억지로 끄집어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살의가 싹트는 상황이 더 설득력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범행을 저지른 뒤에 밝혀지는 진상과 반전도 서늘한 맛을 전해주고요.

‘남자를 잡아먹는 요부’ 이미지가 색다르게 구체화된 작품으로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의 현대화된 도시 버전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 작품이자 표제작인 "소문"은 소문으로 인해 직업을 읽게 된 간병인 다마오가 자신을 흠모하는 대학생 게이타에 의해 비뚤어진 방향으로 폭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수록작 중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싹트는 섬찟한 살의’라는 테마가 가장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동기와 과정 모두가 설득력이 있는 덕분입니다. 주인공이 다마요에서 게이타로 옮겨가는 전개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었고요. 노처녀나 중년 독신 여인이 사소한 이유로 폭주한다는 소설은 "유니스의 비밀" 등 많이 있긴 한데 이 작품은 외로운 일본 현대 사회의 일면을 느끼게 하는 여러 묘사와 함께 게이타라는 청년의 이상한 애정이 동기가 된다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책의 평균 별점은 2.25점.. 2점 입니다. 앞선 두 작품이 별로였으며, 기대했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싹트는 섬찟한 살의'라는 테마가 대체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못한 탓입니다.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 역시 크게 돋보이지 않았고요. 일상 속 악의라는 테마를 추리 소설로 구현하는건 아무래도 와카타케 나나미 쪽이 더 나아보이네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신작이나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2024/12/28

사카나와 일본 - 서영찬 : 별점 3점

사카나와 일본 - 6점
서영찬 지음/동아시아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해산물이 일본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다루며,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의미까지 조명하는 책. 총 57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6장 34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별로 해당되는 해산물, 어식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정어리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급 무사 사카이 반시로의 일기에서도 모두 42회 나올 정도로 서민들이 가장 자주 소비하던 음식이자, 당시 가난과 서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재료였습니다. '서민이 자주 먹는 밥반찬은 무엇인가'라는 테마의 '반즈케'에서도 생선 부문 1위는 이와시(정어리)였다고 하고요.
단순히 식탁 위의 먹거리일 뿐만 아니라, 어비(생선 비료)로 활용되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증가는 화폐 경제를 발달시켰고, 쌀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무라이 정권 체제 기반인 석고제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정어리의 활용은 단순한 생선을 넘어 일본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지요.

다시마는 일본 경제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해산물로, ‘다시마 길’이라 불리는 무역 루트를 통해 일본 상업 경제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홋카이도의 다시마가 교토와 오사카로 수송되던 이 루트는 일본 자본주의의 씨앗을 뿌린 경제적 기초였습니다. 한 차례 항해로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1억 엔 정도를 벌어들였다니 대단하네요. 사쓰마번은 불법적인 대중국 다시마 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무기류를 수입하며, 이 무기가 훗날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즉,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일본 역사를 바꾼 거대한 동력이었던 것이지요. 조금 과장된 느낌이지만 재미있는 발상이었어요.

쿠사야는 독특한 냄새와 풍미를 가진 일본 전통 발효 생선입니다. "어시장 삼대째"를 통해 단순한 건어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쿠사야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쿠사야는 해산물이 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례와는 달리, 당시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생존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대 이전 유배지로 알려진 이즈제도와 고토열도에서는 자원이 부족해 소금물을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쿠사야액이 만들어지고 쿠사야가 탄생하게 되었거든요. 이는 단순히 발효 음식을 넘어, 생존 전략으로서의 음식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덴푸라는 에도 시대에 스시, 소바와 함께 미식을 대표하던 외식 메뉴였습니다. 값이 싸고 맛이 좋아 에도의 삼미(三味)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요. 덴푸라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 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습니다. 건강을 중시하던 이에야스는 교토에서 유행하던 도미튀김을 처음 맛보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바람에 복통을 겪었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군요. 그 외 덴푸라가 =일본 음식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다수 소개됩니다.

명절 음식으로 서일본에서는 방어가, 동일본에서는 연어가 명절 요리로 소비되며, 이는 지역적, 계절적 특성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방어는 도야마만에서 잡혀 염장되어 집합지인 내륙의 히다, 그리고 주요 소비처로 운송되었으며 귀족과 무사 계급에게 주로 소비되었습니다. 도야마 - 히다 - 다카야마 - 마쓰모토 - 니가타를 이은 U자 모양 지역이 서일본 방어와 동일본 연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두 갈래 방어 길은 수백 년간 지탱되면서, 각자 고유한 문화가 나뉘는 경계선으로 자리매김하였고요.

가쓰오부시는 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에서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가쓰오부시의 본고장 야이즈는 어선이 징발되면서 마을 기간산업이 존폐 위기에 몰린 탓에, 남태평양의 마리아나제도, 팔라우 공화국,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를 포함하는 남양군도로 집단 이주해 가다랑어 잡이와 가쓰오부시 제조를 이어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난요부시'가 이때 탄생한 것이지요. 야이즈부시와 태평양전쟁 군납에 얽힌 일화도 있습니다. 1942년 해군은 항공대 식량으로 쓰려고 가쓰오부시 가루를 압축해 만든 사각형 조각에 대해 야이즈 업자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업자는 습기와 기온에 따라 부스러질 수 있으니 캐러멜처럼 말캉말캉하게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안대로 납품 계약이 체결되었고요. 군납 제품명은 '반키리 가쓰오부시'로 '적군 만 명을 벤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 난요부시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전황이 악화하면서 남양군도의 야이즈 주민은 수시로 징집돼 전장에 투입되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야이즈 주민 620명이 남양군도로 건너가 286명이 전사했고, 46%는 영영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패망은 자업자득이지만, 어민들은 좀 안됐군요.

그 외에도,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장어 먹는 날 '도요노우시노히'의 유래, '청어 소바'의 유래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도판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생선의 생김새, 특징과 소개된 요리들의 실제 모습과 조리법을 그림과 사진으로 설명해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겁니다. 방어길과 다시마길은 지도가 함께 있었더라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테고요.

또 해산물을 단순한 식재료로 다룬 내용도 많은데, 이 경우는 스시, 타코야키, 사시미나 라멘의 유래처럼 이미 잘 알려진 게 많아서 다소 지루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맥락을 짚어주는 부분도 애매한 게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동과 서를 나누는 방어길입니다. 히다에서 왜 동쪽으로는 방어를 옮기지 않았을까요? 나가노에서 니가타까지의 거리와 도쿄까지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단순히 동쪽에서는 연어를 먹는 걸로 정해져 있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주제 하나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면,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에 버금가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 보였는데 아쉬웠어요.

그래도 일본의 해산물과 엮인 문화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읽을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 해산물이 일본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8/10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 제프리 포드 / 박슬라 : 별점 3.5점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 8점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샘터사

저명한 초상화가 피암보가 샤르부크 부인이라는 부유한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그녀는 피암보에게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듣고 자기를 그려달라'는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의뢰를 합니다. 거액의 보수와 더불어 예술적인 활력을 새로이 얻고자 했던 피암보는 승락한 뒤, 그녀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구체화하지요. '결정학자'라 불리우는 예언자의 딸로 어렸을 때 쌍둥이 눈의 결정을 소유하게 된 뒤 예언능력을 보유하게 되고, 신통한 '무녀'로 알려져 큰 돈을 벌게 되었지만 샤르부크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 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피암보 주위에 창작을 방해하는 괴인이 등장하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연쇄살인극이 동시에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줄거리만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듯 일종의 판타지, 환상 소설입니다. 그러나 샤르부크 부인의 정체를 더듬어 가는 과정과 정체불명의 샤르부크씨, 그리고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괴사건의 진상 등 추리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습니다. 감수성 넘치는 샤르부크 부인의 이야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면서도, 작품의 주 내용이라는 점에서 근대의 아라비안나이트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한마디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작품이에요.

그런데 글을 정말이지 너무 잘 썼습니다. 시적인 표현을 과하게 사용하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전개하는 솜씨가 대단해요. 작중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실재 현실과 겹쳐지게 만드는 팩션적인 구성 - 예를 들어 실존 화가 앨버트 라이더와 그의 그림 "경마장"존 워터하우스의 "사이렌"을 작품에 등장시키는 등 - 도 돋보이고요.
내용이 재미있어서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도 강합니다. 발상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얼굴을 보지 않고 초상화를 그리게 만드는 수수께끼의 여인!

샤르부크 부인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입니다. 독특한 설정에서 오는 힘도 크지만, 창조력을 갉아먹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다른 작품에서 보기 힘든 부분이니까요. 그만큼 야릇한 성적 느낌과 남자를 잡아먹는 요부로서의 존재감이 탁월합니다. 작중 '메두사'로 비유되는 것이 외려 이미지를 제한한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담고 있는 것도 좋습니다. 작품의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끌어올리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피암보가 보이지 않는 존재를 구체화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은 일종의 종교 행위를 표방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외에도 일찌기 신에게 도전했다가 타락한 - 초상화를 실패한 - 타락천사 셴즈라던가, 피암보가 겪는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 도 나름 의미가 있는 등 종교와 관련된 상징들이 작품 안에 가득합니다. 마지막에 피암보가 초상화를 완성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은 이러한 상징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요.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주게 만드는 고대 카르타고의 독약, 한없는 악한 스토커 샤르부크씨의 존재, 허무하면서도 너무 쉽게 간듯한 결말은 조금 아쉽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밝혀지는 샤르부크씨의 정체에 대한 반전, 그리고 결국 피암보가 신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는 기적같은 결말은 맥이 빠질 정도였습니다. 환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던 작품의 분위기를 단번에 허상으로 몰고 가는 탓입니다. 9회말 2아웃까지 퍼펙트로 투구하다가 마지막 타자에게 홈런맞은 기분이랄까요? 차라리 샤르부크씨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피암보의 그림도 환상으로 남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도 정말 잘 쓴,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독특한 장르문학에 빠져들고 싶은 분들께, 고급스러운 환상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1/02/13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레너드 카수토 / 김재성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10점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사"입니다. 말 그대로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의 역사적 변곡점,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는 문학사 서적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하드보일드의 통로 역할을 한 작품으로 소개된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입니다. 가족과 신앙이 도덕적 삶의 기초이고 중심이었던 19세기 모델에서 산업화, 도시화로 급변한 20세기 초 지극히 미국적인 범죄 행위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전통적 가족 모델이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 대쉴 해밋"몰타의 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신뢰의 결핍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기업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지요. 당시 석유 회사에서 시작된 '트러스트' 체제 등장으로 가족 메타포가 기업 세계로 편입되었고, 기업 관행이 모든걸 지배했던 세계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족 관계는 붕괴하고 이기적 개인들이 가족 유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공감따위는 저버리고 돈만 쫓아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과 신뢰가 위험한 세상에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고, 샘 스페이드가 매로 상징되는 '투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1929년 주식 시장 폭락을 반영하며, 매 조각상이 가짜라는건 투기 역시 환상이라는걸 의미합니다. 광란의 투기 경제에 대한 해밋의 비판적 시각을 잘 알 수 있지요. 또 주목할만한건 '진짜 남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쉴 해밋은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건 정당한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페이드는 직업을 잃을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요. 반대로 부자들은 무르고 기괴하게 여성적입니다. 돈 많은 악당들을 여성화하여 폄하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황 시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은 제임스 M 케인의 "밀드레드 피어스"입니다.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가 결합된 작품이지요. 밀드레드는 감상주의에 빠져 완벽한 가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 딸과의 관계가 파괴된 후 술에서 위안을 찾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결말로 가정사는 더 이상 여성 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걸 알려줍니다.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급작스럽게 모든게 변한 탓입니다. 뉴딜은 현대 복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가족이 수행했던 보호 관리 역할을 정부가 맡아 수행했기 때문에 공감과 감성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은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하드보일드 소설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 관료주의가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차지했고요.

대공황 이후 가족은 위협받고, 남성은 남성상의 기본 토대인 가족 부양자로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탄생한게 완벽한 남자 필립 말로입니다. 위협받던 남성상과 파편화된 가족을 구하는 영웅으로, 배트맨과 슈퍼맨 탄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로는 무너진 의뢰인이나 관계자들 가족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감상적이고 선한 영웅이거든요. 이는 구시대 하드보일드 태동기의 냉혹한 회의주의와는 정 반대 모습이에요. 가정이 중심이 되며,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 말로는 더 깊숙이 사건에 개입하고, 더 정서적으로 엮이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기나긴 이별"로 말로는 일이 아니라 일의 수혜자에게도 충성합니다. 이거야말로 감성적인 부분이지요. 이렇게 1950년대에 과도한 남성상을 지닌 폭력적인 마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영웅으로 변한건 냉전 시기, 강한 미국과 안정된 가정이라는걸 유지하려는 분위기 탓으로 설명됩니다. 가장 끔찍했던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여성의 일탈이었고요. 그 덕분에 이 때 진정한 의미의 '요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순위를 매기자면, 일하고 능력있는 여성도 나쁘지만, 동성애자는 전통적 가족의 대립항이라 훨씬 더 나빴고, 무엇보다도 잠재적 어머니 역할을 고의로 방기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최악 중 최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짐 톰슨은 풍요 속 공포와 우려를 표현했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를 잃은 도덕적 불안을 작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작가 작품 속 주인공들 모두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주의적 공감이 최대의 능력으로 묘사되며, 감상주의를 중산층에서 분리해서 상류층에 국한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주의가 위험하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합니다.

1960년대 들어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더욱 친절해지고, 범인들은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탐정들은 가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자에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정도로요. 이 시기, 로스 맥도널드는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그렸는데, 모자간 결합의 단절을 통해 부모들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걸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반항하는 자녀와 무력한 부모라는 1960년대 세대간 갈등을 극명하게 투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해주는건, 연민, 공동체적 결속과 공감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폭력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 사립 탐정이고요. 이렇게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립 탐정 속성의 변화는 여성 탐정들을 등장시킵니다. 반면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이 된 범인들은 결국 연쇄 살인범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연쇄 살인범 소설의 교과서적 캐릭터와 기본 플롯을 제공한 뒤, 포화상태를 넘어서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의 정신질환 정책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괴물로 변한 뒤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쇄 살인범은 이 대상화 작업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현대 연쇄 살인범 소설까지 큰 흐름을 일람하고 있으며, 흑인 범죄 소설과 같은 특이점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미국 근대사와 범죄 소설의 흐름이 절묘하게 일치하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상세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문제라면 저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이나 탐정 스펜서 시리즈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책에서 소개하는, 제가 읽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할 수 밖에 없지요. 60년대 이후 범죄 소설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별로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장르에 대한 문학사이자 비평서로서 재미와 가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와 범죄 소설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리뷰를 쓰기 어려웠어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기 시작했던게 문제였습니다. 약간은 공부하듯 분석하고 정리해야 내용 요약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뷰로 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건 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입니다....

2004/09/09

시행착오 - 앤소니 버클리 콕스 : 별점 4점

시행착오 - 6점 앤소니 버클리 콕스 지음, 황종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런던 리뷰"지에 정기적인 평론을 기고하는 평론가 토드헌터씨는 동맥류로 시한부인생 판정을 받았다. 그는 남은 시간을 가장 값지게 사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사회에 해가 되는, 하지만 처벌 받지 않는 존재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대중 작가 팔로웨이를 유혹하여 가정과 가계를 파탄낸 요부 진 노우드를 표적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경찰은 팔로웨이의 사위 빈센트 파머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여 사형선고를 내렸고, 토드헌터 씨는 그의 무죄와 자신의 유죄를 밝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고발하여 재판정에 서게 되는데...

세계 3대 도서 추리소설 중 하나인 "살의"의 작가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작품입니다. "살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온 탓에 주변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도서 추리처럼 범인역의 토드헌터씨를 미리 밝혀 놓고 있지만 일반적인 상식과는 반대로 범인이 스스로의 범행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면서도 유머스럽게 그리고 있습니다.

좋았던 점은 스스로의 범행을 증명하기 위해 단서들을 나열하고 복선들을 잘 짜깁기 하는 등의 추리적인 요소와 법정에서의 치열한 공방같은 법정 스릴러의 요소가 잘 갖추어진 점, 내용상 탐정역의 비중이 작을 수 밖에는 없지만 중요한 조력자인 범죄 연구가 치터윅씨라던가 법정 장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왕실 변호사 어니스트 프리티보이(!) 경 같은 캐릭터가 잘 살아 있고 각각의 영역 (추리-법정 스릴러)을 확실히 구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사소해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나 단서를 짜맞추고 앞부분의 불필요해 보였던 여러 묘사들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부분들이 많다는 점과 마지막의 반전이 아주 괜찮다는 점입니다.
반전은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하나 저의 생각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으며, 그 모든 내용이 앞에 등장한 단서와 복선에 기한다는 정통 추리적인 요소를 잘 따르고 있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다만 목차에서 각 단락마다 제1부 - 악한 소설풍 (피카레스크) / 제2부 - 신파연극풍 (트랜스폰타인) / 제3부 - 미스터리소설풍 (디텍티브) / 제4부 - 신문소설풍 (저널리스틱) / 제5부 - 괴기소설풍 (고딕) 이라는 재미있는 부제로 구분하여 놓았지만 번역의 미스인지 각 부제별 소설의 느낌은 별로 살아 있지 않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원본은 느낌이 다를까요?
그리고 "시한부인생"이라는 토드헌터씨의 나름대로의 긴장감있는 핸디캡이 거의 노출되지 않고 하나의 설정으로만 쓰인 점은 좀 유감입니다. 유머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는 있겠지만 덕분에 최후의 순간까지도 토드헌터씨의 병과 죽음이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그래도 법정물과 추리물의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독특한 유머가 잘 살아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상당한 분량에다가 등장인물의 수도 많은 편이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충분해요. 때문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만으로 평가하기는 이르겠지만 상당히 즐길만한 작품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대표작이라는 "살의"도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2004/08/24

명탐정 파커 파인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2점

명탐정 파커 파인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최근 구입한 여사님 단편집 중 4번째.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포와로나 마플양이 아닌 "파커 파인"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집으로, 파커 파인은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파커 파인과 상의 하십시오"라는 광고로 손님을 모으는 사람이죠. 지금 용어로는 "카운셀러"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자칭 '마음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무슨 사기꾼 같기도 합니다.^^ 하여간 이 작품집은 파커 파인이 등장하는 총 12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초반 6편 ("중년부인", "불만에 찬 군인", "절망에 빠진 부인", "불만에 빠진 남편", "도시 사무원", "부유한 부인")은 파커 파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카운셀링(?)에 충실한 이야기들입니다.

첫번째 작품 "중년 부인"과 4번째 작품 "불만에 빠진 남편"은 파커 파인이 자신의 부하(?)들인 잘생긴 지골로 클로드 루트렐과 요부 마들렌 드 사라를 이용하여 질투 치정극을 해결하며 2번째 작품 "불만에 찬 군인"은 전속 작가(?) 올리버 부인의 각본으로 비슷한 의뢰를 해 온 두 남녀를 연결시켜 주는 내용, 3번째 작품 "절망에 빠진 부인"은 우연찮게 훔치게 된 다이아몬드 반지를 남모르게 돌려주려는 부인을 도와주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범죄를 밝혀낸다는 추리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고 5번째 작품 "도시 사무원"은 평범한 일상을 지루해 하던 사무원에게 첩보소설적인 활약을 하게 해 준다는 내용, 6번째 작품 "부유한 부인"은 부유한 부인의 공허함을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준다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의 병"을 치료해 준다는 말답게 추리적인 요소는 좀 약하네요. 하지만 이런 저런 인간 드라마를 읽는 재미는 쏠쏠합니다. 특히 유머가 넘치는 전개나 의외의 사건들은 굉장히 흥미진진해서 추리물은 아니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하는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 6편은 본격 추리 단편들입니다. 파커 파인이 여행중에 사건을 전부 만나게 된다는 점과 연쇄살인 같은 큰 범죄는 등장하지 않는것이 특이하네요.

7번째 작품 "원하는 것 모두를 얻으셨나요?"는 남편의 수상한 편지를 보고 불안에 떠는 미모의 부인에게 닥친 보석 도난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하는 내용으로 트릭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 있거든요.
8번째 작품 "바그다드의 성문"은 살인사건으로 버스안에서 외상이 없이 죽은 군인의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범작입니다. 크게 와 닿지는 않더군요.
9번째 작품 "시라즈의 저택"은 시라즈라는 페르시아의 오지에 은둔한 영국 명문 출신의 괴짜 귀족 아가씨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중반부에 트릭을 눈치챌 수는 있었지만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일종의 바꿔치기 트릭인데 파커 파인이 진상을 알아낸 이유 등이 합리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10번째 작품 "값비싼 진주"는 페트라를 여행하던 동행인들 중 미국의 부호의 딸 캐롤이 값비싼 진주를 잃어버리게 되는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역시 범작입니다. 트릭이나 구성이 그닥 좋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11번째 작품 "나일강의 죽음"은 소재나 이야기가 모두 크리스티 여사 스타일 그대로인 작품입니다. 거의 폐쇄된 밀실이라 할 수 있는 나일강 위 배의 선실에서 남편에게 서서히 독살당하고 있다고 믿는 그레일 부인이 독살된 시체로 발견된 뒤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죠. 초반부의 설정과 스토리 전개는 흥미진진하지만 결말은 용두사미로 끝나서 안타깝습니다. 솔직히 이 작품은 트릭적으로 수긍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 작품 "델피의 신탁"은 그리스에서 유괴당한 아들때문에 괴로워 하는 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로 가벼운 소품입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적합한 꽤 그럴듯한 엔딩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점은 없네요.

전체적으로 유머가 넘치고 인간미가 뛰어난 주인공이 등장해서 그런지 읽기에 편하고 그런대로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통 추리 팬으로서는 실망도 컸습니다. 파커 파인도 매력적이고 독특할 뿐더러 시대를 앞서간 감각 같은것도 느껴지지만 추리사적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명탐정 리스트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캐릭터는 아니었으며 (여러모로 탐정보다는 카운셀러나 해결사에 가깝기도 하고요) 추리적인 완성도도 별로였으니까요. 그나마 7편과 9편 정도만 추리적으로 건질만 했습니다.
그래도 내용이 굉장히 부드럽고 쉬운 만큼 추리 초심자, 그 중에서도 여성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