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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2

수수께끼 그녀 X - 우에시바 리이치 : 별점 3점

수수께끼 그녀 X 12 - 6점 우에시바 리이치 지음/학산문화사(만화)

"가면 속의 수수께끼", "꿈의 사도"의 작가 우에시바 리이치의 만화. 전 12권으로 완결된 작품입니다. 2014년 11월에 완결되었으니 비교적 최신작이죠. 우연찮게 읽기 시작했는데 꽤나 재미있어서 한 번에 읽어버렸네요.

1화는 이전 작들과 비슷했습니다. 타액을 이용하여 감정과 몸 상태를 공유한다는 등의 기묘한 설정, 너는 누구와 첫 섹스를 하게 될 것이다와 같은 충격 발언이 연이어 그려지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뒤로 갈수록 평범한 학원 러브 코미디로 변모해 버립니다! 둘의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에 아이돌 가수의 난입, 학교 축제 등과 같은 대형 에피소드가 끼어드는 전형적인 스타일로요. 물론 작가가 작가이니만큼 아주 평범하지만은 않습니다. 에피소드별로 여전히 일상 속 비일상스러운 기묘함이 계속 감돌거든요. 서로 타액을 공유한다는 설정이 계속 사용되는 식으로요.
게다가 타액을 공유한다는 설정의 러브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두 커플이 끝까지 키스를 하지 않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플라토닉한 러브스토리라니! 12권으로 깔끔하게 완결하면서 우라베의 입을 빌어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준 결말도 아주 좋았고요.

또 히로인 우라베 미코토의 매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완벽한 외모에 운동신경 발군으로 온갖 체육 활동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는 슈퍼우먼인데다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관계자)에게만 따뜻한 나만의 여신이지요. 개인적 견해로 남성 판타지 궁극 히로인의 양대 산맥 - "오렌지로드"의 아유카와 마도카,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단디 - 중 아유카와 마도카의 적통 계승자로서 21세기에도 죽지 않는 생생한 매력을 뽐냅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슈퍼우먼은 아니지만 말이죠. 하긴 우라베 미코토도 항상 가위를 팬티 옆에 끼워 가지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자르고 파괴하는 데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는 만화 같은 설정이 있으려니 동급이려나?

그리고 무색무취, 유유부단의 대명사 카스카 쿄우스케보다 남자답고 확실한 츠바키 아키라도 꽤 호감이 갑니다. 전형적인 하렘 루트를 타지 않고 우라베 일직선, 그러면서도 지킬 것은 멋진 녀석이거든요. 학교 동급생들 앞에서 "코이즈미 마이 러브"를 외치는 단순 일직선 바보와는 다르게 우라베가 입을 댔던 음료수를 마신 뒤 생긴 변화를 눈치채고 달려가 사과하는 섬세함도 돋보이고요.

그 외의 다른 캐릭터들, 안경 로리 거유 오카와 우에노, 스와노 등에게도 이야기를 할애해가며 조연으로의 역할을 주는 디테일도 좋았어요. 특히 오카와 우에노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말로 있음직해 보이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이에 더해 화풍도 청춘 러브 코미디 스타일로 서서히 바뀐 덕분에 여성 캐릭터들의 작화가 아주 매력적이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전작들에서는 좀 어리거나 빈약(빈유)했던 캐릭터들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여성을 예쁘게 그리는 건 만화가로서 상당히 중요한데 그야말로 포텐이 제대로 터진 느낌입니다. 청춘 러브 코미디답게 전작 스타일의 집요한 디테일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등 작가의 스타일 자체가 변한 것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나, 저는 여성 캐릭터의 매력이 더 중요한 성격의 작품이라 생각하기에 "호"입니다.

딱 한 가지 문제라면 타액을 공유하는 설정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겠죠. 우라베와 츠바키 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설정으로 아, 여긴 원래 그런 세계구나... 싶은 정도로 넘어가기는 하는데 좀 대충대충인 감이 없잖아 있어요. 카자미다이 고교 축제에서 상영된 영화 "수수께끼의 그녀 Y"처럼 이유를 대략이라도 밝혀주고 끝을 내는 게 어땠을까 - 영화 속 설정은 이 모든 건 주인공의 착각으로 사실 지구는 멸망한 것이었다는 것 - 싶은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청춘 러브 코미디라는 정말이지 흔하디 흔한 장르에서 약간의 독특한 설정만으로 이만큼의 변주를 끌어낸 점은 정말이지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앞서 말했듯 근본적으로 "플라토닉"한 이야기라는 발상의 전환도 놀랍고 말이죠. 특히나 우라베 미코토의 존재만으로도 러브 코미디 계에서 일정 지분을 차지할 자격은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되는지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되었더군요. 이 역시 차분히 감상해봐야겠습니다.

2016/09/03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점

크리피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외딴 주택가에 거주하며 가끔 TV에 출연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제자 린코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인 고교 동창생 노가미가 연락해서 8년 전 일어났던 미제 사건인 혼다 일가 실종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노가미는 다카쿠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실종된 후 다카쿠라 옆집 노모녀 화재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다카쿠라의 옆집 니시노 일가의 수상쩍은 가족 관계가 점차 불거졌고, 결국 니시노의 폭주가 일어나는데...

격조했습니다. 인륜지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대사인 "이사"를 하느라 지난 한 주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네요.

어딘가의 멋드러진 소개글을 보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출세작이지요. "검은 집"처럼 평범함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싸이코패스의 가공할 범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초~중반부는 인상적입니다. 다카쿠라가 거주하는 주택 단지 구성이 8년 전 히노 시에서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 현장과 유사하다는게 드러나고, 옆집 남자 니시노와 가족이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그 집 딸이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그 뒤 급작스럽게 옆집 남자가 돌변하여 폭주하는 과정까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니시노가 식칼을 집어들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알고 봤더니 옆집 남자 니시노가 모든 연쇄 살인의 범인인 "위장 살인마"이며, 그의 정체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실종된 후 결국 사체로 발견된 형사 노가미의 형 야지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좋았던 중반부를 지나 노가미가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통해 야지마의 범행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후부터는 힘이 빠져버립니다. 370페이지라는 분량에서 240~50페이지 정도가 되면 진상이 밝혀지는데, 이후는 완전히 사족입니다. 너무 일찍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버리니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이렇게 쉽게 밝혀질 것을 뭐 이리 질질 끌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사도 어설펐고요.

게다가 마지막 반전 — 야지마가 죽인 줄 알았던 노가미는 사실 전처 소노코가 죽였다, 야지마는 뒷처리를 도와준 것일 뿐이다, 편지 역시 소노코가 쓴 것이다 — 는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정의감을 불태운 줄 알았던 노가미가 형 야지마 못지않은 쓰레기일 뿐이었다는건 독자를 우롱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상을 밝히는 다카쿠라의 추리도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소노코의 양녀 유가 사실은 실종된 여고생 미오였고, 야지마는 이미 소노코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리기 위한 억지 전개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야지마가 구태여 오와다 옆집에 살면서 정보를 캐내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뭔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 다카쿠라와 여대생 린코의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는 야지마와의 최종 대결에서 오와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 것 이외의 가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린코는 비중에 비하면 하는 것이 너무 없거든요. 비중을 볼 때 다카쿠라의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최소한 범죄 심리학 전문가로서 뭔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장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악의 천재 야지마의 능력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점입니다. 작품의 설득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야지마가 어떻게 가족들을 지배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작중 묘사된 정도로는 설득력이 너무 약해요. 다카쿠라가 잠깐 설명한 대로 공포와 협박, 좁은 공간의 3가지가 갖춰져 마인드 콘트롤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외부 활동을 했음이 분명한 아들과 딸이 잠자코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따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는 탓입니다. 비슷하게 싸이코패스의 치밀한 범죄가 그려지는 작품들 — 앞서 말씀드린 "검은 집"을 비롯해서 — 은 동기는 물론 범행 과정에 있어서도 범행의 현실성을 높게 그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확연히 비교되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역대급 초반부를 지녔지만 중반부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님의 리뷰에 100%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금 조사해보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요소 (린코, 반전 등)를 다 쳐내고 범죄 심리학자 다카쿠라와 형사 노가미 (그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다니모토)가 악의 천재 야지마와 대결하는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낸다면, 즉 선–악 구도를 명확하게 각색한다면 소설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7/10/03

살인자의 선택 - 에드 맥베인 / 박진세 : 별점 2점

살인자의 선택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애니 분은 일하던 주류 판매점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구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쾌활한 여자인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주의자인지, 누군가의 정부이고 만나는 남자하고 모두 자는 방탕한 여자인지, 플라토닉한 연애를 즐기는 순수한 여자인지, 장애인 청년의 말벗이 되어주는 박애주의자인지..
경찰은 그녀의 전남편, 정부, 애인들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편, 악덕 경찰 하빌랜드가 강도에게 살해되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스티브 카렐라는 30분서에서 이동한 형사 코튼 호스의 실수로 용의자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는데...

87분서 시리즈 신작 장편(신작이라 함은 국내 소개 기준입니다)입니다. 

87분서 시리즈답게 수사 과정의 디테일은 마음에 듭니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수사의 모범이랄까요. 또 팔색조 매력의 피해자 여성 애니 분 설정도 좋아요. 그녀의 전 남편, 애인, 친구들 모두에게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기묘한 캐릭터로, 제목인 "살인자의 선택"은 그 중 하나였다는 설정인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일본 만화에서는 히로인일 팔색조 슈퍼 우먼이 단순한 피해자라니! 시대를 앞서간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대로 마무리되기에는 아이디어가 아깝다 싶을 정도에요.
애니 분 외의 캐릭터들 묘사도 좋습니다. 그녀의 딸 모니카 분에 관련된 묘사들 - 특히 버트 클링과의 밀땅과 재치 -도 아주 귀엽고, 이번 이야기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코튼 호스의 데뷰도 아주 강렬하거든요. 코튼 호스의 첫 실수는 정말이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후 시리즈에서도 가끔 언급될만한, 그런 이야기니까요.

작가 특유의 묘사력, 상상력도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승강기 운전원이 수사 중인 버트 클리에게 하는 대사가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밖에 비가 오는 줄도 모릅니다. 빌딩 안 승강기에 8시 부터 저녁 5시까지 묶여있기 때문이지요. 점심도 빌딩 안 지하층 골방에서 먹고요. 때문에 그는 자기와 도시 사람들을 "두더지"라고 묘사합니다. 아이솔라는 현대판(작중 시점으로) 마굴이고, 모두 그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는건데, 지하와 실내만 오가는 상황만 놓고보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인지 굉장히 와 닿네요. 더위나 추위를 끔찍하게 그려내어 아이솔라라는 도시를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로 느껴지게 만든 전작들에 비하면 좀 부드러운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명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일 뿐, 단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완전히 꽝이에요. 애니 분 사건은 전개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 '괴편지'를 찾아낸 것이 해결 방법의 전부입니다. 전체 250여페이지 분량 중 마지막 10페이지 분량에서 해결되어 버려서 허무하기가 이루 말할데 없어요. 이 편지의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또한 운전면허 등록증 서명이 필적 감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상황도 어설픈데,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을 준비한 범인이 충동적으로 자필 편지를 써서 스스로 범행을 드러낸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곁가지로 삽입되어 전개되는 하빌랜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상 강도와의 다툼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상황도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범인 찰스 페터릭의 행보가 여러모로 황당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그는 도난 차량을 도색하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본명과 주소를 기입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 정직 그 자체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때문에 찰스 페터릭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꼼꼼한 수사가 바탕이 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여지는 전무합니다. 백번 양보해도 경찰까지 살해한, 도주 중인 강력범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코튼 호스도 영 별로입니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인기를 노리고 투입한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요. 감식반에서 감식반원 피트와 말다툼하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가 느껴지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의자를 체포하러 갔을 때는 노크를 한다?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기없는 악덕 경찰을 퇴출시키고, 인기가 있을만한 새 캐릭터(코튼 호스)를 등장시키라는 편집부의 요구 사항이 뭔가 부족한 이야기에 결합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이야기 완성도가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차라리 애니 분의 독특한 매력을 극대화시켜 다른 작품으로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14/08/07

맨발의 청춘 - 후지와라 신지 / 김현영 : 별점 1.5점

맨발의 청춘 - 4점
후지와라 신지 지음, 김현영 옮김/눈과마음(스쿨타운)

제목 그대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희대의 표절작 "맨발의 청춘"의 원작인 표제작 외 9편,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50~60년대를 무대로 하여 힘들고 아픈, 심리적으로 연약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은데, 이색적인 문체와 분위기는 제법 인상적입니다. 2차대전 직전, 직후의 생활상, 시대상에 대한 묘사도 괜찮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아빠진 고색창연한 설정이 가득하며, 등장인물과 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전개도 급하게 정리 후 마무리되는게 많고요. 이는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닌 요약된 시놉시스를 보는 느낌을 전해 주어서, 짤막한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읽는게 힘들었습니다. 작가의 유명세와 수상 경력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부실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개인적으로는 관심이 많았던 작품이기에 완독했다는 기쁨은 있지만 딱히 구해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Oldies이기는 하지만 Goodies는 아니었습니다.

10편 중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3편을 짤막하게 소개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무정한 여자"

1952년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남편이 있는 술집 여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땅끝까지 걸어갈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라는 묘사로 자뭇 웅장한 맛까지 느껴지는데, 솔직히 나오키 상을 탈 수준의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하지만, 교도소에서 곧 출옥할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떠납니다.. 라는 너무너무너무나 낡아빠진 설정 탓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맨발의 청춘"

원제는 "진흙투성이의 순정". 수록작 중 거의 유일하게 순정파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야쿠자 꼬붕 겐이 우연히 구해준 재벌이자 화족의 딸 마사미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죠. 당연히 영화하고도 거의 똑같습니다. 너무나도 전형적이라서 지금 읽으니 솔직히 좀 웃기더군요. 그래도 "동반 자살한 여자는 완전한 처녀의 몸이었다"라는 마지막의 약간의 반전에는 좀 놀랐습니다. 그야말로 플라토닉 러브였네요.

"잘가요"

가정이 있는 여자와 남자의 짤막한 일탈을 다룬 작품인데 내용과 전개 모두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륜이라는 감정에 휩싸이는 과정이 상세한 심리묘사로 잘 그려지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무리까지 제법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하나만큼은 시간이 흘렀어도 기본적인 작품 내의 설정이나 감정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2020/01/24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 카노우 리에 / 허윤 : 별점 2점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1 - 4점
카노우 리에 지음, 허윤 옮김/대원씨아이(만화)

80년대를 좋아하는 고교 1년생 오오타키와 야쿠시마루가 서로의 공통점을 알고난 뒤, 알콩달콩한 첫사랑을 키워나간다는 청춘 멜로물입니다.

달달하면서도 순수한, 그야말로 플라토닉한 고등학생들의 첫사랑을 80년대 풍으로 그려낸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부터 그러해요. 전 7권 분량 동안 둘이 교제를 결심하는 것도 막바지인 6권부터이며, 교제를 시작해도 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순진한 아이들이거든요. 지나치게 소심하고 착한 야쿠시마루야 그렇다쳐도, 남자 주인공인 오오타키마저도 큰 가슴에 혹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성욕이나 망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80년대스러워요. 작화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야쿠시마루는 80년대 대표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판박이입니다. 흔치않은 이름부터가 80년대 최고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던 야쿠시마루 히로코에서 따왔으니 말 다했지요. 중간 중간 등장하는 컷 일러스트들도 추억을 돋게 만들고요.

또 이야기의 주요 흐름이 80년대의 아이돌과 그들의 노래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제목의 "슬로 모션"은 물론, 소제목 모두가 당대 인기곡들 제목이며, 그 외 수많은 80년대 아이돌과 노래가 직, 간접적으로 전개에 영향을 주거든요.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소녀 야쿠시마루를 만난 오오타키의 모습 뒤에 두근거리는 감정 표현과 함께 "슬로 모션"의 클라이막스인 '만남은 슬로우 모션' 이 흐르는게 좋은 예입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전 가사가 '갑자기 등줄기를 따라, 사랑의 예감이 달콤하게 달렸어'라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외에도 어떤 순간, 8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던가, 다케우치 마리야의 시티팝은 어른 노래라고 하는 등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장치가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게 끌고나가지 못한 이유도 명백합니다. 뻔한 이야기를 무리하게 길게 끌고 나가서 생긴 온갖 문제가 전부 들어 있는 탓입니다. 우선, 둘의 교제가 시작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너무 깁니다. 아무리 80년대 복고풍 청춘 멜로물이라 하더라도, 21세기에 발표된 작품이 별다른 애정표현도 없이 6권에서야 사랑 고백을 하다니 이건 좀 지나치죠. 나카이도나 고이즈미와 같은 쓸데없는 라이벌의 등장과 이를 통해 삼각 관계나 사각 관계를 끌고가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고요. 별다른 고민없이 그냥 인기있던 작품들의 설정들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하긴, 좀 더 매끄럽게 삼각 관계, 사각 관계를 그려냈더라면 지금보다야 연재가 길게 이어지긴 했을겁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작가의 실력이 부족했던거지요.
여러가지 전개 상의 시행착오 끝에 둘이 사귀기 시작한 뒤도 급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아쉽습니다. 정작 사랑 이야기보다는 야쿠시마루의 성장기 중심으로 이야기도 완벽하게 궤도가 바뀌거든요. 그나마도 좀 극적이었다면 모를까, 클라이막스인 패션쇼가 전혀 와 닿지 않아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야쿠시마루 아버지 실종의 진상도 뭐 그런가보다, 싶은 정도로 넘어가버리고요. 이럴거라면 중간부분을 모두 들어내고 분량을 대폭 줄여서 둘이 교제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나도록 3˜4권 정도로 발표하는게 훨씬 완성도가 높았을 듯 싶네요. 그랬다면 걸작이 되고, 영상화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80년대를 사랑하는 아이들' 이라는 컨셉을 너무 과하게 우려먹는 것도 문제에요. 초반부는 옛날 노래가 등장하는 상황이라던가, 다른 등장 소품들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좋았는데 가면 갈 수록 소재 고갈 탓인지 억지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오타키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밤에 부르는 노래가 "쥴리아의 상심"이라는건 누가 봐도 좀 오버스럽지요.

마지막으로 단점은 아니지만, 80년대 아이돌과 노래들 중 밴드는 고작해야 첵커스, RC석세션 정도만 등장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습니다. 저에게 80년대는 안전지대, 튜브, 사잔, 오메가 트라이브의 시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않고,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전개와 마무리는 영 좋지 못했습니다. 작가와 편집자 모두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요. 권해드리기는 조금 애매한데 80년대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1,2권 정도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 수록 별로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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