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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2

미각의 번역 : 요리가 주는 영감에 대하여 - 도리스 되리 / 함미라 : 별점 2.5점

독일 여성 영화 감독 도리스 되리의 요리 관련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접한 음식과 사람들, 그 안에서 느낀 단상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요리 소개나 맛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음식과 문화, 기억, 철학이 뒤섞인 글들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많아서 일기같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요.

놀랐던건 저자의 방대한 식견입니다. 김치에 대한 언급이 대표적이에요. 한국의 김장을 단순한 발효 기술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을 만드는 레시피’라고 표현하는데, 외국인이 쓴 글에서 김치가 아니라 김장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언급했다는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유에 대한 글에서 부처가 고행으로 쇠약해졌을 때 젊은 여인이 건넨 우유로 생명을 구했다는 불교 일화를 인용하고, 두부를 이야기할 때 일본 선종의 도겐 젠지의 말을 함께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독일 사람이 이런 정보를 대체 어디서 얻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글 사이사이에 동물이 급격한 변태를 겪는 이유가 ‘더 많은 먹이를 먹기 위해서’라는 과학계 이론같은 여러 정보들이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입니다. 예를 들자면 바움쿠헨이 일본에 전해진 과정은 의외로 전쟁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네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서 제빵사로 일하던 독일인 유흐하임이 전쟁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이송된 뒤 굽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뉴욕의 대표 음식으로 언급된 ‘루스 앤 도터스’의 비알리와 베이글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이 가게는 1907년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조엘 루스가 세 딸과 함께 1935년 창업한 곳이라는 군요.

간단한 레시피도 몇 가지 소개됩니다. 독일에서 품종 보호 정책으로 사라졌다는 ‘린다’ 감자를 활용한 감자샐러드는 감자를 껍질째 삶아 얇게 썰고, 여기에 양파, 식초, 설탕, 식용유를 넣어 만듭니다. 한 번 도전해보고 싶네요.
연두부 반쪽과 아보카도 반쪽을 함께 갈아 얼굴에 바르라는 피부 관리용 레시피도 새로왔고요. 아보카도가 저렇게 쓰기에는 좀 고가라 도전은 꺼려집니다만..

이외에도, 커피 유행에 대한 단상처럼 공감할 만한 일상적 시선도 있어서 좋았고, 책의 만듦새도 깔끔합니다. 선명한 일러스트, 판형, 종이질과 인쇄 및 장정 모두 빼어나거든요. 어른들을 위한 선물용 책으로도 괜찮겠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글루텐 프리나 환경오염, 미세 플라스틱 같은 주제를 다룬 글들은 다소 단조롭고 설명 위주로 흘러가는 탓에 흥미가 떨어집니다. 전체적으로 정보는 많지만 글마다 담고있는 내용, 수준의 편차도 있는 편이고요. 그리고 '요리'나  '식문화', '음식', '미식' 등의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상적인 요리 이야기보다는, 음식에 얽힌 문화나 개인적 사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2/28

사카나와 일본 - 서영찬 : 별점 3점

사카나와 일본 - 6점
서영찬 지음/동아시아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해산물이 일본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다루며,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의미까지 조명하는 책. 총 57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6장 34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별로 해당되는 해산물, 어식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정어리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급 무사 사카이 반시로의 일기에서도 모두 42회 나올 정도로 서민들이 가장 자주 소비하던 음식이자, 당시 가난과 서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재료였습니다. '서민이 자주 먹는 밥반찬은 무엇인가'라는 테마의 '반즈케'에서도 생선 부문 1위는 이와시(정어리)였다고 하고요.
단순히 식탁 위의 먹거리일 뿐만 아니라, 어비(생선 비료)로 활용되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증가는 화폐 경제를 발달시켰고, 쌀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무라이 정권 체제 기반인 석고제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정어리의 활용은 단순한 생선을 넘어 일본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지요.

다시마는 일본 경제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해산물로, ‘다시마 길’이라 불리는 무역 루트를 통해 일본 상업 경제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홋카이도의 다시마가 교토와 오사카로 수송되던 이 루트는 일본 자본주의의 씨앗을 뿌린 경제적 기초였습니다. 한 차례 항해로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1억 엔 정도를 벌어들였다니 대단하네요. 사쓰마번은 불법적인 대중국 다시마 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무기류를 수입하며, 이 무기가 훗날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즉,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일본 역사를 바꾼 거대한 동력이었던 것이지요. 조금 과장된 느낌이지만 재미있는 발상이었어요.

쿠사야는 독특한 냄새와 풍미를 가진 일본 전통 발효 생선입니다. "어시장 삼대째"를 통해 단순한 건어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쿠사야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쿠사야는 해산물이 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례와는 달리, 당시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생존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대 이전 유배지로 알려진 이즈제도와 고토열도에서는 자원이 부족해 소금물을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쿠사야액이 만들어지고 쿠사야가 탄생하게 되었거든요. 이는 단순히 발효 음식을 넘어, 생존 전략으로서의 음식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덴푸라는 에도 시대에 스시, 소바와 함께 미식을 대표하던 외식 메뉴였습니다. 값이 싸고 맛이 좋아 에도의 삼미(三味)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요. 덴푸라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 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습니다. 건강을 중시하던 이에야스는 교토에서 유행하던 도미튀김을 처음 맛보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바람에 복통을 겪었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군요. 그 외 덴푸라가 =일본 음식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다수 소개됩니다.

명절 음식으로 서일본에서는 방어가, 동일본에서는 연어가 명절 요리로 소비되며, 이는 지역적, 계절적 특성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방어는 도야마만에서 잡혀 염장되어 집합지인 내륙의 히다, 그리고 주요 소비처로 운송되었으며 귀족과 무사 계급에게 주로 소비되었습니다. 도야마 - 히다 - 다카야마 - 마쓰모토 - 니가타를 이은 U자 모양 지역이 서일본 방어와 동일본 연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두 갈래 방어 길은 수백 년간 지탱되면서, 각자 고유한 문화가 나뉘는 경계선으로 자리매김하였고요.

가쓰오부시는 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에서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가쓰오부시의 본고장 야이즈는 어선이 징발되면서 마을 기간산업이 존폐 위기에 몰린 탓에, 남태평양의 마리아나제도, 팔라우 공화국,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를 포함하는 남양군도로 집단 이주해 가다랑어 잡이와 가쓰오부시 제조를 이어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난요부시'가 이때 탄생한 것이지요. 야이즈부시와 태평양전쟁 군납에 얽힌 일화도 있습니다. 1942년 해군은 항공대 식량으로 쓰려고 가쓰오부시 가루를 압축해 만든 사각형 조각에 대해 야이즈 업자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업자는 습기와 기온에 따라 부스러질 수 있으니 캐러멜처럼 말캉말캉하게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안대로 납품 계약이 체결되었고요. 군납 제품명은 '반키리 가쓰오부시'로 '적군 만 명을 벤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 난요부시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전황이 악화하면서 남양군도의 야이즈 주민은 수시로 징집돼 전장에 투입되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야이즈 주민 620명이 남양군도로 건너가 286명이 전사했고, 46%는 영영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패망은 자업자득이지만, 어민들은 좀 안됐군요.

그 외에도,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장어 먹는 날 '도요노우시노히'의 유래, '청어 소바'의 유래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도판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생선의 생김새, 특징과 소개된 요리들의 실제 모습과 조리법을 그림과 사진으로 설명해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겁니다. 방어길과 다시마길은 지도가 함께 있었더라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테고요.

또 해산물을 단순한 식재료로 다룬 내용도 많은데, 이 경우는 스시, 타코야키, 사시미나 라멘의 유래처럼 이미 잘 알려진 게 많아서 다소 지루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맥락을 짚어주는 부분도 애매한 게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동과 서를 나누는 방어길입니다. 히다에서 왜 동쪽으로는 방어를 옮기지 않았을까요? 나가노에서 니가타까지의 거리와 도쿄까지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단순히 동쪽에서는 연어를 먹는 걸로 정해져 있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주제 하나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면,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에 버금가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 보였는데 아쉬웠어요.

그래도 일본의 해산물과 엮인 문화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읽을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 해산물이 일본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9/18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5 - 토마토수프 / 문기업 : 별점 2점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5 - 4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전권에서 민다나오 섬을 떠난 시그넛 호는 새로운 동료인 에라스모를 만나 프리타스 섬으로 보물을 찾는 항해를 떠난다. 그러나 폭풍우로 보물 탐사를 포기했고, 해적질과 여행에 질린 댐피어와 일부 동료들은 동인도에 남게 되는데...

이번 권에서는 풀로 콘도르 섬에서 광둥성 남해안을 거쳐, 대만과 루손 사이의 바탄 제도 , 보루네오 섬 남단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다시 수마트라까지의 장대한 항해가 펼쳐집니다. 조금만 더 올라왔다면 '조선'도 볼 수 있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그런데 요리에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이래서야 '맛있는 모험'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중국 차, 황주 등이 등장하기지만 '차'나 '술'을 요리라고 부르기는 힘들지요. 이미 완성된 제품이기도 하고요. 대왕 조개살 요리는 전권에서 등장했었던 해산물 요리들과 다르지 않아 식상했고, 바탄 제도 원주민들이 만든 염소가 씹어 삼킨 위장 안의 풀을 삶은 것과 다진 물고기 살을 섞은건 요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 정도만 인상적이었는데, 첫 번째는 매너티 고기입니다. 맛있다는게 신기했거든요. 하지만 그냥 삶은 고기 말고 좀 더 요리같은 요리를 보여주는게 좋았을 듯 합니다.
두 번째는 '메로리'입니다. 판다누스 나무열매를 익힌 뒤, 과육을 깎아내 반죽하여 굳힌 것입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건망고'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외에도 '다마르'라는 나무 수액을 이용한 역청 만들기같이 재미있는 정보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원주민들 - 바탄 제도 원주민의 생활과 식습관, 오스트레일리아 어보리진의 무소유(?) 삶 등 - 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댐피어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버린 뒤, 함께 낙오한(?) 동료들과 일종의 요트로 먼 수마트라로 향하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건 분명한데, 과연 어떻게 될지? 다음 권을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맛있는 모험' 부분이 부실하니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무리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6/30

재난의 세계사 - 루시 존스 / 권예리 : 별점 2.5점

재난의 세계사 - 6점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눌와

폼페이 베수비오산 분화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일본 도호쿠 지진까지 총 11개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 소개하며 설명해 주는 책. 

몰랐던걸 새롭게 알게되는 재미가 컸습니다. 몇 가지 설명드리자면,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네요.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되며,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훌륭한 천연 요새가 되어 주고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베수비오산 일대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습니다. 유명한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산 분화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구조차 향했던 도시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래도 질식사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두 번째 분화로 사망한 폼페이 희생자들은 화산설쇄류로 타죽었거든요. 섭씨 2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무려 시속 480Km로 이동하여 사람을 덮쳐 닿자마자 사망했습니다. 정말 끔찍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최소 8.5에서 9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철학과 과학에 뚜렷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가는 성스러운 날, 교회가 가득찬 아침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 보였으니까요. 교회에 간 독실한 신자들은 목숨을 잃고, 근처 홍등가 창녀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여 기독교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돌로 지었고 홍등가의 집들은 나무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무는 돌보다도 유연하고 흔들림을 잘 견뎌 사망자가 적었던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네덜란드 정부가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 사상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숭배한 포르투갈을 신이 벌하였다면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783~18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산 분화는 인류역사상 임명피해가 가장 컸던 자연재해로 총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이었고 전 세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 탓입니다. 극심한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몬순이 사라져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화산은 자연재해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층권의 기체 조성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권 하층부는 극지방에서 밀도가 낮아서 아이슬란드 화산은 성층권으로 물질을 보내기도 쉬운 탓에 피해가 더 컸지요. 다행히 화산 폭발의 영향은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온실가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은 당시 폐쇄적이었던 중국 환경 탓에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저뚱 사후 4인방이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고전에서 지진은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 외에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음기가 강해져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하들이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경우, 또다른 하나는 여자가 정치에 나서는 경우로요. 4인방, 그리고 중심인물이 마오의 아내 장칭이라는게 이 경우에 해당되어, 인민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데 꽤 그럴싸 했어요.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의 죄수의 딜레마도 기억에 남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제방에 막대한 압력을 가할 때, 위험에서 마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맞은편 제방을 부수는 겁니다. 건너편 이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딜레마'라는 말이 걸맞는 상황입니다. 놀라운건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건너편 제방을 부쉈다 - 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 발생 시 일어났던 참극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소개된건 참 고마왔어요. 이 책에서는 학살 이유를 전통적인 세계관을 대체할만한 과학 이론이 부족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작위성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주장은 말은 되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인종 차별과 범죄는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방을 보강하게 시켰다가, 제방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서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도록 만든 범죄처럼요. 제방이 무너진 뒤 재방 붕괴지점 근처에 구조를 위해 동원된 배에도 백인과 흑인 모두 동등하게 타지 못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불과 4년 뒤라 세계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미국의 당시 사회 특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수십년의 차이는 있었을터라, 단지 세계관에 따른 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참극과 학살은 인종 차별과 인종 혐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걸 분명히 해 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이외의 토막 상식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미시시피강 홍수 때 구호활동을 지휘했던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건, 당시 흑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배신하여 흑인 표를 잃고 루스벨트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지원금이었던 10억 달러의 연방정부 자금 중 7억 달러가 불분명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도 새로왔습니다. 그냥 없다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잭 리처'가 나서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지진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많은데, 지금도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규모 5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측했지만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성공한 예측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도 새로왔어요.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규모 5의 두 배이기 때문이라지요. 어차피 지진 관련해서는 확률에 대한 논의를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세계사'라는 제목에 걸맞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볼 부분이 많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주로 과학과 재해 전, 후의 대책에 대한 주장이 보다 많은 편입니다. 마지막 장은 아예 지진에 대비해야 하는 내용이고요. 앞서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 좋았을겁니다.
설명도 쉽고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도판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6/14

유리병 속 지옥 - 유메노 큐사쿠 / 이현희 : 별점 1점

유리병 속 지옥 - 2점
유메노 큐사쿠 지음, 이현희 옮김/이상미디어

이 책은 데뷰작 "기괴한 북"을 비롯하여 11편의 단편과 단편 모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시골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모아 짤막하게 소개하는 "시골의 사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였다면 섬찟했겠다 싶은 이야기들이 몇 편 있었던 덕분입니다. 못생긴 과부가 딸의 연인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가 파국을 맞는 "오래된 냄비"가 대표적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로 황당무계한 아이디어가 바탕이 된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중국 최고의 진귀한 차 '곤륜차'를 마시는 방법을 장황하게 펼쳐놓는 "미치광이는 웃는다", 사람을 마약으로 취하게 만든 뒤 레코드를 들려주어 그대로 재생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한 "인간 레코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그렇습니다. 로마노프 왕가의 아나스타샤 공주가 살아남아 탈출했다는 설정의 단편 "사후의 사랑"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느낌을 줍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가 치정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갱"의 당시 탄광 분위기 묘사와 같은 디테일들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전개가 황당해서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거나, 비슷한 설정과 전개가 반복되는 탓이 큽니다. 정신병자가 나오는 몇 편의 이야기들이 특히 그러했어요. 에도가와 란포의 변격물적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완독하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더 이상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4/06/02

절벽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절벽의 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각 단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편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연결고리를 가지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구조이지요. 마지막 단편은 총 정리하는 결론에 가깝습니다.
단편별로 여러가지 트릭이 사용되며 추리도 많이 펼쳐집니다. 의외의 반전도 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전개가 억지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개에 포함되었어야 할 내용을 마지막 사진으로 퉁친건 '실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편의에 따른 '반칙'에 가까왔습니다. 그나마 사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마지막 단편 뿐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미나게 절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구니오는 자살 명소 유미나게 절벽 옆 터널에서 사고를 당했다. 불법 유턴을 하던 차 탓이었다. 사고를 유발한 차 운전자 나오는 구니오를 구해주기는 커녕 현금을 빼앗은 뒤 살해했다.
구니오의 아내 유미코의 옛 연인인 형사 구마지마는 전력으로 사건 수사에 나섰지만, 나오가 살해당했고 동승자였던 히로도 실종되고 말았다. 구마지마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지만, 유미코를 또다른 동승자 마사가 노린다는걸 알고 황급히 유미코의 맨션으로 항했다....


구니오가 사고 당시 죽지 않고 실명했으며, 죽은건 조수석에 있던 네 살배기 아들 나오야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일당이 사건 당시 현금을 훔치려고 지갑을 확인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추리, 그리고 구니오가 집에 찾아온 히로를 손쉽게 살해한 방법 - 궁도부였던 아내 유미코의 화살을 이용 - 과 범행을 은폐하는 과정도 깔끔하게 진행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이비 종교 '십왕환명회'도 작품 내에서 단순히 들러리가 아닌 제 역할 - 히로 사건 은폐를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 마지막의 사고 등 - 을 충실히 해 주고 있고요.

하지만 구니오가 살아있다는걸 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리 잘 만들어진 서술 트릭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구니오가 복수를 위해 나오의 차 깜빡이 커버와 동일한 걸 구해 사건 현장 근처에 놓아두고 잠복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최소 몇십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의 깜빡이 커버를 알아챈다? 대단히 큰 덩어리도 아니고 부서진 조각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나오가 알아채고 차를 세운 뒤 커버를 회수했다 한들, 때마침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등 범행에 딱 맞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 정도 억지가 필요하다면 실명한 구니오가 나오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것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늘이 나오보고 살해당하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설득력없는 내용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건너온 초등학생 커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부모님의 방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볼 정도였다. 환영 퇴치를 위해 문방구를 찾은 커는 기묘한걸 목격했다. 젊은 남자의 묘한 모습, 안쪽 방 고타쓰 앞에 쓰러지듯 놓여진 발, 뒤섞인 문구류, 얼핏 보인 바닥 얼룩.... 커는 남자가 주인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멀쩡했고, 추리를 털어놓은 친구 야마우치도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문방구 할머니의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어른 문구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 문구가 놓여진 상황에서 출발하는 커의 추리는 깔끔합니다. 뉴스를 통해 진짜 피해자가 밝혀지고 범인인 조카와 할머니가 커를 납치하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하지만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 숨어 있다가 커를 구해준다는 결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야마우치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 커를 구해주는지도 설명이 없는건 마찬가지고요. 차 안에 숨었다는 것도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으로 살짝 알려주기는 하는데, 본 편에 녹여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칙으로 보일 뿐이에요. 커가 보아왔던 환영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데, 커가 환영을 본다는 설정보다는 커와 야마우치와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그려내는게 나았을 겁니다. 커 주변을 야마우치가 항상 멤돌았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는 안 된다"
십왕환명회의 간부 미야시타 시호가 자택에서 목을 멘 사체로 발견되었다. 신참 형사 미즈모토는 또다른 간부 모리야 다쿠미가 그녀를 살해했고, 이를 알아챈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마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시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고민했다. 그러나 미즈모토는 파트너이자 선배 다케나시와 술을 먹다가 트릭을 간파해내는데...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 미야시타 시호의 방은 제대로 잠겨진 밀실이 아니라 자석으로 '스마트록'을 붙여 임시로 만들어진 밀실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동산 회사 사장 앞에서 잠겼다는걸 보여준 뒤, 열쇠로 문을 열 때 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면서 회수했던 것이지요.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에요. 문제는 눈에 뜨이지 않고 록을 회수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실제로 현장에 함께 있던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에게 곧바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또 모리야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좋은 후더닛, 와이더닛 물이라기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나카가와 도루의 수첩을 조작해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렸고, 진상을 알아챈 미즈모토마저 살해했다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였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만....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수첩 조작도 마지막에 사진으로 설명해줄 뿐, 앞선 본문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살하려던 구니오는 옛 제자를 만난 뒤 다시 삶의 의지를 찾는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작품. 짤막한 에필로그에 가까우며, 이 작품만 단독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서 단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에필로그. 결말답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경찰 내 협조자가 누구인지? 사고를 당한건 누구인지? 히로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진상은?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건을 조작한건 누구인지? 미즈모토를 누가 살해했는지? 등 모든 떡밥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라서 첫 사건에서 구마지마의 사고사를 거짓 증언했고, 세 번째 작품 사건에서의 은폐와 미즈모토 살해를 저질렀다는 고백을 선보이는게 핵심이지요.
에필로그라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지만, 시력을 상실해서 아내 유미코에게 사건 진상 고백문을 쓰게 했지만, 알고보니 백지였다는걸 마지막 사진 한 장으로 밝히는 반전은 강렬했어요.
 
그러나 다케나시,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의 진범 모리야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는건 문제에요. 깔끔하게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이 한 편 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서 별점을 주기도 어렵네요. 구태여 준다면 2.5점? 반전만 좋았습니다.

2023/11/04

허상의 어릿광대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허상의 어릿광대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모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원숙기를 넘어선 달인의 경지에 이른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 전개가 능수능란합니다. 사건에서의 불가능한 현상 조사를 구사나기가 의뢰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서, 유가와가 사건에 뛰어드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끼워넣는 솜씨가 기가 막힐 정도에요. 덕분에 유가와의 조사도 사건과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 - "2장 투시하다", "4장 휘다" - 와, 반대로 유가와가 경찰까지 속여가며 범인의 실수를 유도하는 이야기 - "5장 보내다" - 가 공존하는 등, 변주의 폭도 굉장히 넓습니다. 이렇게 내용을 풍성하게 가져간건 영상화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과학을 이용한 트릭들이 별로인 탓이 큽니다. 추리의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유가와의 도움 없이 경찰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는 이야기도 많은데다가, 동기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에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은 느껴지지만, 정교한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장 현혹하다"
종교단체 구아이회의 교조 렌자키는 "염"을 사람에게 보내는 능력이 있었다. 주간지 기자가 취재차 참석한 자리에서 경리담당 부장 나카가미가 염을 받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도 나카가미에게 손을 대지 않아서 사건은 자살로 굳어져 갔고, 기자도 '염'을 받고 몸이 따뜻해짐을 느낀 뒤 기사를 발표해서 구아이회의 교세는 더 확장되어 갔는데....

상대방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 자살까지 유도한 방법이 무엇인지가 핵심 수수께끼입니다. 유가와가 밝혀낸 진상은 일종의 '전자레인지' 효과였습니다. 원격으로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피부 아래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추리의 여지는 없다시피 합니다. 애초에 교조가 '염'을 보내는건 특별한 방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방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다는건 당연합니다. 경찰이 진작에 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건물을 조사하지 않은게 의아할 뿐입니다. 
또 장치 출력을 강하게 해서 나카가미가 지독한 뜨거움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자살하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카가미가 조금만 자리를 이동해도 뜨거움으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하거든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염'을 받으면 안되니 장치는 명확한 조준이 필요했을테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을테니까요.
유가와가 대학 노트 사이에 감열지를 숨겨놓아서 트릭을 눈치챘다는 방법도 이상했습니다. 그냥 주머니같은데 넣어 두었어도 똑같았을텐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트릭 만큼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아쉬웠습니다.

"2장 투시하다"
투시 능력이 있는 호스티스 미카가 살해당했다. 수사 결과 손님이었던 니시하타가 범인이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공금 횡령의 증거를 미카가 투시했던게 동기였다. 그런데 미카는 어떻게 명함과 가방을 투시했을까?

구사나가기 해결하기 어려운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 유가와를 찾아가곤 했던 그간 시리즈의 전개 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구사나기의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사체에 남겨졌던 희귀한 담뱃재가 클럽 손님 중 한 명과 관련이 있었고, 그와 같은 회사에 다녔던 니시하타가 미카와 마지막에 만났던 손님이었다는걸 알아내서 체포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유가와도 범인 체포와는 무관하게 미카의 투시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했다는걸 밝혀내는 활약을 선보입니다. 최신 장비인데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밝혀낸 단서가 계모의 진심을 담은 메모를 찍은 사진이었다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작 중에서처럼 명함을 읽는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찍힐까?라는 의문은 가시지않았고, 어두운 바나 영화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확인했다면 들통났을 것 - 밝은 액정 화면이 티가 날테니 - 같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경찰이 가택 수사를 했음에도 이 특수한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카와 계모와의 관계를 다룬 신파조의 이야기는 많이 유치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장 들리다"
구사나기는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환자 가야마를 제압하다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가야마는 환청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수사해보니 가야마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영업부장 하야미 다쓰로가 기묘한 단어를 검색한 뒤 자살했었다는게 밝혀졌다.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환청을 들리게 만들었다는건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초반에 이명 현상을 겪는 여직원 무쓰미가 등장했고, 가야마가 환청 현상을 겪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기술을 이용했는지만이 궁금할 뿐인데, 범인이 전자파를 피해자들 머리에 쏴서 소리를 들리게 했다는 진상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작중에서도 소형화가 어렵다는 설명이 될 정도의 장치인데, 이런걸 개인이 개발해서 소지하고 운용한다는건 비현실적이니까요.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남 탓만하는 범인 고나카 설정도 진부했고요.

수사를 구사나기의 경찰학교 동창이자 관할서 형사인 기타하라가 맡도록 해서 수사 1과와 관할서 사이 갈등을 그려낸건 좋았고, 유가와의 논리 정연함을 기타하라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드러내는 솜씨는 좋았지만 이야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4장 휘다"
프로야구 선수 야나기사와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수사를 맡았던 구사나기는 방출 후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던 야나기사와가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데이터 측정을 도와줄 수 있는 유가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상심에 빠진 야나기사와의 기량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데...

강도 살인사건 범인은 구사나기에 의해 쉽게 체포됩니다. 이후 야나기사와의 재활과 더불어 피해자 다에코가 가지고 있던 쇼핑백 속 선물이었던 자명종을 누구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밝혀내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일상계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에코가 '자명종'을 남편의 현역 생활 연장에 도움이 될 대만 프로야구 관계자에게 선물하려 했고, 중국에서는 시계를 선물하는 행위인 '송종'의 발음이 '임종'과 똑같아 자명종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진상도 일상계스러웠고요. 

다에코가 타고 있던 차에 소화기 분말이 묻었다는걸 알고, 호텔 주차장에서 소화기가 분출된 시간을 알아내서 다에코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조사하는건 경찰 구사나기가 아니
었다면 조금 힘들었겠지만, 일상계물로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수작입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이번 단편집 수록작들 중에서도 에피소드들이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5장 보내다"
하루나는 텔레파시로 쌍둥이 언니 와카나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 형부 이소가이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귀가한 이소가이는 중상을 입은 와카나를 발견했다....

쌍둥이 사이에 텔레파시가 오갈 수 있다는걸 범인도 믿을 수 있게끔 그럴듯하게 설명한 뒤, 범인의 실수 - 친한 지인인 진범을 모른척하고, 진범이 외모를 크게 바꾸는 등 - 를 유도한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 데이토 대학 교수 유가와가 직접 나서서 텔레파시가 근거가 있는 것 처럼 조사했기 때문에 범인도 깜빡 속아넘어갔던 것이지요. 이 모든걸 안배한 유가와의 추리와 능력이 빛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텔레파시는 실체가 없지만, 자매간의 정은 유효하다는 결말도 좋았고요. 

다만 이소가이의 동기가 명확하므로, 경찰 수사로 충분히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장 위장하다"
구사나가와 유가와는 시골 읍장이 된 대학 동창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살인 사건 수사를 돕게 되었다. 유가와는 구사나기가 찍은 현장 사진을 보고 현장이 조작되었다는걸 알아내는데....

흔들의자에 앉은채 산탄총에 맞은 시체라는 현장 사진만 보고 조작을 눈치챈 유가와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운동에너지, 작용과 반작용을 언급하며, 흔들의자에 앉은 사람이 총에 맞으면 반동 때문에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물리학자다운 추리였어요. 발견자 다에가 현장을 조작한 이유도 그럴듯했습니다. 원래는 의붓아버지 다케히사가 다에의 친모인 아내를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다에의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다에는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순서가 반대인 것처럼 현장을 조작했던 겁니다.

다만 사건의 동기인 아내의 불륜은 식상했으며 , 다에가 현장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 이를 유가와의 말대로 '우수한 일본 경찰'이 현장 조사로 밝혀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장 연기하다"
극단 '파란 여우'의 연출가 고마이가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전 애인 아쓰코로, 그녀의 알리바이 트릭은 구사나기가 이미 밝혀냈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유가와는 소도구인 칼이 흉기라는건 이상하다는데 주목하여 진상을 추리해낸다.

아쓰코가 고마이를 찌르고 휴대폰을 조작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과정이 맨 처음에 나오는 도서 추리물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라 생각하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곧바로 구사나기가 모든걸 꿰뚫어보고 밝혀내서 좀 놀랐습니다. 구사나가도 그리 만만한 친구는 아니네요. 
고마이의 현 애인 구도 사토미가 진범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였으며, 경찰이 사건 진상을 파헤치기 힘들었던 불꽃놀이 사진은 단순히 유리창 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다는 디테일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살인범이 되어 경찰에게 쫓기는 심리를 느껴보고 싶었다'는 아쓰코의 동기, 그리고 재봉 가위를 흉기로 사용한 사토미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극단 소도구인 칼을 흉기로 위장한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범인을 극단 사람 내부인으로 한정해버리면 기껏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짜낸 트릭들의 가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4/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6. 비스크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6. 비스크 인형
어두운 마을에서 마와리 가의 한 귀퉁이만 희미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에 세워진 몇 개의 화환이 희미한 흰 그림자처럼 보였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몇 대의 차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일행이 역으로 향하는 길로 사라졌다. 토시오는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손에는 마사오의 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양쪽에 하얀 연등이 노란 빛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정면에 흰 나무 제단이 놓여 있고, 검은색 액자 속에는 토모히로의 얼굴이 있었다. 어제 마이코가 보여줬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웃지 않는 토모히로는 흑백이라서 그런지 훨씬 더 우울해 보였다.
흰 천이 걸린 관 앞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은 야위었지만, 목소리는 힘찼다.
"안녕하세요, 또 뵙게 되었군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마이코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옅은 색의 안경을 쓴 소우지였다. 마이코는 깜짝 놀란 듯이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당신, 누구죠?"
마이코는 생각하는 척했다.
"싫은데요. 벌써 잊어버리셨나요. 어제 만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요."
소우지는 마이코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보세요, 샹보르관 앞에서 나를 지나쳤잖아요."
마이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살짝 쳐다보았다,
"당신은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한 번 본다면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과 꼬 닮았으니까."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
어제 마이코를 본 소우지가 같은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실례지만, 당신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인형과 꼭 닮았어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나요?"
"아니요, 하지만 주모우라는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인형이라고 하니까 기억이 났어요. 프랑스의 인형 제조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거 참 반갑네요. 내가 만난 여성 중 주모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비스크 인형이 뭐지요?"
"19세기에는 고급 패션 인형이 활발하게 만들어졌어요. 비스크 인형은 주모우 사가 1840년대에 개발한 인형이에요. 인형의 목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만들어졌지요. 라틴어로 비스는 두 번이라는 뜻이고, 큐이는 구운다는 뜻입니다. 즉, 두 번 구웠다는 뜻이죠. 고온으로 구운 초벌구이 목에 색을 입히고 다시 저온으로 구우면 지금까지 없던 아름다운 피부색이 만들어져요. 피에르 주모우의 인형은 모두 당신과 같은 매력적인 얼굴로 만들어졌어요."
"고마워요. 비스크 인형이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피에르의 아들인 에밀 주모우는 인형의 기능적인 면에서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용수철 장치로 인형이 움직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마술을 부리기도 하죠. 오르골이 달린 것도 있고, 소리 내어 말하는 인형도 만들어졌어요. 저도 몇 점 가지고 있는데,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군요."
"꼭 보고 싶네요."
"당시는 고체, 슈미트, 스테넬 등 인형 제작자들의 군웅할거 시대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왜인지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에 가장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자의 마음도 빼앗으려는 거겠지요."
소우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토모히로와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마이코는 토시오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저거 마사오 씨의 가방 아닌가요?"
"네, 어제 마사오 씨를 차에 태워 드렸어요. 그 때 가방을 잊어버리셔서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당신들이 마사오 씨의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토모히로는 안타깝만, 마사오 씨가 경미한 부상으로 끝난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독경도 끝났을 테니 나중에 옆방으로 오세요."
"하지만 마사오 씨와는 어제 만났을 뿐입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방금 전에 회사 사람들이 방문했던 탓에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라, 마사오 씨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소우지는 토시오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 두 사람을 초대했다.
국화 생화 한 가운데에 마사오가 앉아 있었다. 원래의 하얀 얼굴은 상복의 검은색에 싸여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가느다란 어깨는 그대로 슬픔의 선이었다.
마사오 옆에 작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마사오의 어머니로 생각되었다. 눈빛이 마사오를 닮았다. 어제 대문 앞에 서서 마사오와 토모히로를 배웅하던 노파였다. 작은 무릎 위에는 낯익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도망치려 하는 아이를 노파는 계속 달래고 있었다.
마사오 앞에는 대머리 노인이 앉아 있었다. 토모히로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었다. 토시오는 마와리 데츠바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독수리 같은 눈빛과 한 줄로 굳게 다문 입이 굳은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데츠바는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다. 뚱뚱한 몸을 구겨 앉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데츠바 옆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토시오는 이 여성의 존재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마이코의 입에서 단 한 번도 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는 스물다섯, 여섯 살, 빨간 머리, 입술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밝은 느낌의 미인이지만 검은색 옷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토시오의 귀에 닿기도 전에 경을 읽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마이코는 두 손을 모아 염주를 쥐고 있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옆에서 바라보며 향에 불을 붙였다.
소우지가 나와서 두 사람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해바라기 공예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두 사람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잠시 후 경을 읽는 소리가 끊겼다. 스님이 다른 방으로 간 것 같았다.
"잠깐만요, 마사오 씨"
소우지가 불렀다. 마사오가 방으로 들어오자 소우지는 가방을 내밀었다.
"이분들이 전해주셨어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지."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가방을 쳐다보았다.
"없어진 줄로만 알았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토시오는 마사오의 눈빛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팔에서 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제가 떼어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마사오는 가방을 소중히 받았다.
"내용물을 확인해보는게 좋겠어."
소우지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런 무례한 짓을..."
마사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토시오는 무거운 공기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다.
"상처는? 아프지 않습니까?"
마사오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 뺨을 바라보았다. 뺨에는 검붉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토시오는 상처의 흔적보다 구부러진 하얀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리는?"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걱정 끼쳐 드렸네요."
데츠바가 와서 앉자 소우지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데츠바는 말없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주모우.......실례지만,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요."
마이코는 명함을 꺼냈다. 소우지는 마이코의 명함을 보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었다.
데츠바 옆에 앉아있던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은 소우지의 여동생이었다. 소지는 마사오를 구해줬을 때의 토시오의 행동을 보고 온 듯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오리(香尾里)였다.
"카오리, 너도 그렇게 영웅에게 구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쥰키치가 알게 된다면 화내지 않을까?"
소우지가 말했다.
"오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카오리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카오리는 쥰키치와 내년에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시마키 쥰키치 군은 해바라기 공예의 유능한 개발부원이랍니다."
카오리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카오리의 손을 뿌리치고 테이블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토우이치군, 엄마한테 혼날 거야. 또 이빨이 상할지도 몰라."
카오리가 말했다.
"정말 단 것을 좋아한다니까."
마사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소우지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말했다,
"아빠가 너무 엄격했던 것 같아. 본인이 단 것을 싫어했으니까. 아이는 금지하면 더 많이 먹고 싶어하는 법인데 말이지."
소우지의 비판적인 말투에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빠는 토우이치를 정말 귀여워 해 주었어요. 치과에 데리고 간 적도 있었죠."
마사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니 양손 사이에는 하얀 손수건이 비벼져 있었다. 토우이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머니의 슬픔을 감지한 듯 마사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봉제 곰 인형을 들고 왔다.
"자, 토우짱, 이제 자러 가자. 곰 인형을 들고 ......"
"엄마, 부탁해요"
마사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토우이치를 맡기려 했다. 토우이치는 봉제 곰 인형을 내던졌다.
"오, 오랜만인데."
소우지는 곰을 집어 들었다.
"토우이치는 곰 인형을 가지고 자나요?"
"그게 없으면 잠을 잘 못 자요."
마사오가 말했다.
소우지가 계속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상하네. 안 움직여."
곰의 목에 달린 스위치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마사오가 들여다보았다.
"마사오 씨는 장난감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배터리가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배터리가 있다면 제대로 걸을 수 있을 텐데........"
소우지는 곰 인형의 등을 열어 보았다.
"야, 배터리가 없구나. 다음에 건전지를 사서 아저씨가 움직여 주도록 하지. 이 장난감은 누가 사 준거죠?"
"토모히로요."
소우지는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토우이치는 소우지의 손에서 곰 인형을 빼앗았다. 마사오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토우이치를 안고 방을 나갔다.
"항상 혼자 자요?" 
소우지가 물었다.
"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사오는 토우이치의 흐트러진 옷깃을 고쳐주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좋은 습관이네."
"토모히로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소우지는 입을 다물었다. 마사오는 일부러 계속 토모히로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같았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스님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남색 도포 차림의 스님은 바쁜 정치인 느낌으로, 말도 많았다. 어느새 자신이 젊은 시절 유학했던 유럽의 풍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형이 일찍 죽어서 가업을 잇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서양미술로 가문을 일으켰을 텐데 말이죠."
그는 물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마사오가 부드럽게 토시오와 마이코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모히로가 부탁한 것이 있었군요."
마이코 일행이 토모히로의 차를 뒤쫓고 있는 것을 택시 기사가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래,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마이코도 주변을 피하듯 말했다.
"비밀이었나요?"
"글쎄요......"
"저는 토모히로의 아내입니다. 그 조사 내용을 알려주시겠어요?"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 거래할 회사의 신용조사였어요. 해바라기 공예에는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으로요."
"새로운 거래 ....... 그 조사는 끝났나요?"
"이제 보고서 작성만 남았어요."
"그 보고서를 저한테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에게? 읽고 어떻게 하실 건가요?"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남편이 당신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요?"
"어제 러더퍼드 데이비스 씨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토모히로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격렬한 명령을 떠올렸다. 토모히로가 왜 있지도 않은 약속을 위해 마사오를 이용하려 했던 것일까?
"나는 최근 들어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토모히로의…."
마사오는 말끝을 흐렸다. 스님이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소우지가 부탁한 택시가 아직 오지 않았다. 소우지는 택시 회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코는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소우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녀에게 호송을 받다니, 고마운 일이군."
스님이 말했다.
"그 대신에, 승차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던게 당신들이었나요?"
마이코와 스님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절이 있는 곳은 데츠바의 집과 같은 오노와였다. 토시오는 처음 가는 오노와라는 곳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맞습니다.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게 설마 운석일 줄은 몰랐네요."
"구약성경에 있잖아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돌을 내려 원수를 죽였다는 말이요. 이 큰 돌이라는 것은 운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운석비였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운석비? 비처럼 운석이 떨어지는 게 있나요?"
"거대하고 부서지기 쉬운 성질의 운석은 지구 대기에 뛰어들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운석비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아니, 얼마 전에도 보도된 적이 있었어요. 1976년 중국 동북부 길림성 지역에 떨어진 운석비는 그 범위가 무려 오백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수집된 운석은 백 개 이상, 최대 1,770Km의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는 직경 2m의 분화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도시에라도 떨어지면 대재앙을 피할 수 없었겠군요"
"떨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죠. 하여튼, 토모히로 씨도 불운한 일을 당했어요."
"데츠바 씨도 낙담했을 것 같네요."
"글쎄요, 고집센 녀석답게 별로 티는 내지 않더군요. 물론 마음속으로는 그렇지야 않았겠지만….."
"그렇게 고집많은 분으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당신은 처음 봤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데츠바를 압니다. 꽤나 대단한 녀석이에요. 첫째, 그 나이가 되어도 의사에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건강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그럴리가, 나야 건강하지만 데츠바는 얼마 전에 가벼운 뇌출혈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런데도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고요?"
"아니, 그때는 갔죠.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이번에는 혈압이 너무 내려가서 2주일 동안 머리가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온 의사를 돌려보내고 말았죠. 그런데 데츠바의 의사 혐오증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에요. 그의 아내가 죽은 이유가 의사의 오진 때문이었거든요. 장폐색을 잘못 진단했었지요. 데츠바의 동생 류키치, 그는 토모히로의 아버지인데, 류키치의 죽음도 의사 탓으로 믿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사오 씨에게 혈압을 재도록 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가?"
“그녀는 원래 큰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어요. 혈압 강하제도 마사오 씨가 구해 온 것만 마십니다. 매일 아침 한 알씩, 캡슐에 든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에요. 그 고집스러움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데츠바의 아버지는 어른스러운 분이셨지만…..."
"데츠바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해바라기 공예를 만들었던 호도라는 분인가요?"
"맞아요. 호도씨는 내가 어렸을 때 두세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데츠바를 꼭 닮았어요. 다만 스케일은 더 컸지요. 메이지의 낭만도 가지고 있었고요. 어쨌든 저 이상한 나사 저택을 지은 사람이었으니까."
"나사 저택... 이름만 들어봤어요."
"마침 절로 가는 길에 나사 저택 앞을 지날 거예요. 한밤중의 나사 저택은 또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죠."
"오싹한 건물인가요?"
"지금은 낡아서 그래요. 새 건물이었을 때는 묘하게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데츠바 씨는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네, 아들 소우지, 딸 카오리와 함께요. 살기 불편할 것 같지만, 소우지는 일종의 호사가고, 카오리는 화가 지망생이니 그 집에 잘 어울립니다."
"언제쯤 지었습니까?"
"다이쇼 초기, 아직 서양 건축이 드물었던 시대. 정석적인 건축법에 맞지 않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슈발의 궁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슈발의 궁전?"
"프랑스 남부 드롬주 오트리브 마을에 세상에 보기 드문 건축물이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 프랑스에 갔을 때 관람료를 내고 구경해 본 적이 있지요. 돌과 시멘트로 마구잡이로 만든 궁전입니다. 궁전이라고는 해도 인도 사원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옆은 페르시아풍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벽면에는 여기저기 기괴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요. 마치 아이가 종이 한 장에 생각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자재로 성을 그려나간 것처럼 슈바르의 궁전에도 온갖 상상력이 쏟아 부어졌습니다. 단 한 사람의 손길 하나로요."
"단 한 사람의?"
"네, 우편배달부 페르디난트 슈발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돌을 주워와서 짓기 시작했고, 완성될 때까지 무려 34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조개껍데기를 주워다가 집을 지은 사람, 빈 병으로 건축을 한 사람 등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가하면 이상한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동물입니다. 돈이 없어도 그러한데, 돈과 권력이 있으면 오죽하겠습니까. 엄청난 건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다이묘들은 더욱더 큰 성을 짓고 싶어했지만, 절반은 도락이라고 할까, 취미라고 할까, 장난 같은 부분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천수각과 같은 아름다움은 만들 수 없죠"
"아름다움 못지않게 기묘한 동물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장난감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신전이나 궁전에는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크로커다로폴리스의 미궁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고대 이집트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궁인데 열두 개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천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해요. 그 기술과 규모는 피라미드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로였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궁전 안에는 여러 가지 큰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문을 열면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강렬한 빛이 쏟아져 눈부시게 빛나는 방. 바닥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방……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 미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미궁에는 왕과 신성한 악어가 조용히 묻혀 있었습니다. 미궁이라고 하면 테세우스가 잠입했다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미궁도 유명하죠. 테세우스는 아름다운 아리아드네가 준 비단실을 풀면서 미궁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하지요. 아무래도, 미녀가 등장하니까요. 미녀는 어디에 곁들여도 좋지요"
"그건 그렇겠죠."
마이코는 여유롭게 웃었다.
"로마 시대에는 시빌의 신전이 유명한데요. 이 신전에 있는 제단에 불을 붙이면 저절로 안쪽의 성소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 속임수는 잘 먹혔던 모양이에요. 후대에 이르러서는 여기저기서 같은 장치를 갖춘 신전이 만들어졌다니까요. 속임수를 모르는 신도들은 상당히 놀라고 두려워했다죠. 옛날에는 신기한 작용을 하는 사술이 곧 종교와 연결되곤 했습니다. 사실 이 장치는 이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에 달궈진 공기의 팽창하는 힘이 신전 문에 전달되는 것 뿐이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데 자동문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라도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님이 장난을 치면 속아넘어가 버릴 겁니다."
"스님도 그런 수법을 사용한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그래서 가난합니다. 종교나 돈과 무관하게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사실 대단한 문화에요. 서양에는 취미로 하는 카라쿠리 집들이 즐비하게 있어요.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카라쿠리 저택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집이란 살 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는 책상과 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되면 스님 같은 건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스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하면, 마와리의 나사 저택 정원에는 정교한 라비린토스가 만들어져 있답니다."
"미궁이라고요?"
"미로입니다."
토시오는 스님의 기상천외한, 초현실적인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호랑가시 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진 미로죠. 호랑가시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자라 있어서 건너편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길은 한 사람이 편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인데, 여러 가지 막다른 골목이 만들어져 있어 쉽게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미로의 중심에는 뭐가 있는 건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중앙은 다다미 10쪽 정도 넓이인데, 그냥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에요. 이 미로를 만든 호도는 자주 미로 중앙에 앉아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미로 안에서는 어떤 방해물도 들어오지 않으니 아주 좋았겠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미로 속을 돌아다니는 호도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답니다. 일종의 루드비히 2세 같은 느낌인데 뭐, 서양식 미로는 지금도 드물겠죠."
"서양에서는 정원 안에 미로를 자주 만들지 않나요?"
"미로가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바로크 시대였을 거예요. 미술사에서 말하는 매너리즘의 전성기였어요. 이상향 '유토피아'로서의 우주를 세련된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을 중시했던 시대입니다. 정원에는 반드시 미로와 분수, 카라쿠리와 시계인형이 놓여졌어요. 지하에는 동굴을 파고 물장난으로 움직이는 동물 등을 모아 놓았고요. 17세기 프라하 궁정에는 전 세계의 기괴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 '스펙타클라 파라독스렘(Spectacula Paradoxa)'이 있었습니다. 황제 루돌프 2세는 알킨볼트라는 예술가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에게 기괴한 그림 '트롱프뢰유'를 그리게 하고, 여러 가지 기괴한 물건을 만들게 했습니다. 황제의 취미의 영향일까요? 17세기 프라하에는 연금술사, 수정술사, 예언가, 마술사, 점성술사, 주술사 등이 우글거렸다고 하네요. 코펠리우스의 모델이 된 기계공 코펠키, 골렘을 만든 레웨 베자렐도 이 시대 사람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카라쿠리와 금발의 마녀와 같은 움직이는 인형을 제작한 트로이의 오르간 연주자 레잔도 이 시대 사람이었고요. 금발의 마녀는 훗날 존 팬리 경 살해 사건에서 신비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길은 좁아지고 오르막길이었다. 오노는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도시의 불빛은 멀리 눈 아래로 사라졌다.
"그 시대는 예술과 과학, 주술과 마법, 속임수, 사술이 혼돈의 미분화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켐페른 남작이 만들고 레겐스부르크의 기계학자 레오나르드 멜첼의 손에 의해 유명해진 자동 체스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인형을 움직이는 물건이었죠. 실제로는 속임수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당시 카라쿠리의 대부분은 이런 속임수를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이는 에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훈몽감초(訓蒙鑑草)”라는 마술의 수수께끼를 풀이한 책이 1730년에 간행되었는데, 기적적으로 현존하고 있어 당시의 마술을 알 수 있는데, 그 안에 천신기 승려의 차술이라는 속임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 살 정도의 어린이를 차대 위에 올려놓고 입과 팔다리로 인형을 다양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중국인 인형 휘파람 불기 장치 속임수도 비슷한 속임수에요. 인형의 휘파람 관이 지하를 통해 대기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이 관에 숨을 불어넣거나 목소리를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66년이 지나 1796년에 출판된 “기교도휘(技巧図彙)”를 보면 그런 속임수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오직 기계적인 장치만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명한 차 운반 인형을 비롯한 모든 카라쿠리는 지금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하여튼, 이 시기에 기술과 사술은 깨끗하게 분리된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은 다소 마술적이지만 매력 넘치는 아이디어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동 인형이 진지하게 '진지'해졌다는 것이군요."
"네. 옛날에는 연금술사들도 금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어떻게 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열중했던 것 같아요. 1780년대에 카리오스트로라는 이름의 연금술사의 실험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도가니 안에 구리와 마테리야프리마라는 비약을 넣고 봉인합니다. 무게는 정확하게 측정되고, 도가니는 교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가니가 뜨거워진 뒤 봉인을 풀면 용해물 속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금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모든 무게를 재는데, 실험하기 전의 무게와 실험 후의 무게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요."
"정말인가요?"
"지금 이대로 실험을 해도 학자라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요. 학자는 마술사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속임수가 있는 거군요."
"그렇져. 카리오스트로는 처음에는 도가니를 갈아 끼우는 유치한 방법을 썼는데, 그것이 들통난 뒤, 이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합니다. 자랑할 만한 트릭이에요. 도가니의 바닥에 금을 깔았던 겁니다. 금 위에 아말감으로 만든 얇은 바닥을 만들어 덮었고요. 열을 가하면 저온에서도 녹는 성질이 있는 아말감이 녹으면서 밑에 숨겨져 있던 금이 ......"
그때 갑자기 좌회전하는 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토시오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토시오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어이쿠,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사 저택의 미로 이야기였어요."
마이코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탈선할 것이 뻔했다.
"그랬지. 그 미로는 좀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건 말씀드렸나요?"
"모양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미로는 정오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앙에 놓여 있는 돌 테이블도 오각형인 거죠. 울타리로 만드는 형식은 햄튼코트의 미로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역시 호도답게 똑같이 흉내내지 않았더라고요. 호도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재미도 알고 있었던 거지요."
"햄튼코트의 미로라고 하면?"
"윌리엄 3세의 햄튼코트 궁전에 만들어진 미로를 말합니다. 이 미로는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나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파란 눈을 가진 여자와 함께요."
"로맨틱하네요"
"그런데 관광객이 가득 차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죠. 관광객이 가득 차서 빙빙 돌고 있었거든요. 둘만 남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 거지요.. 미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로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가고, 다음 두 갈림길은 모두 오른쪽으로, 그 다음에는 모두 왼쪽으로 꺾으면 미로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는게 순서거든요. 미국에서는 1941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하모니 미로가 복원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미로는 종교적인 교회 미로죠."
"재미로 만든게 아니라요?"
"애초에 인간의 참된 길과 죄악으로의 길이 뒤섞인 미로는 올바른 참된 길을 걷는 것의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아까 말한 크레타 섬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 왕의 미궁 안에는 소머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서식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전설 역시 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종교적 동굴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산 하나를 깎아 만든 오부네의 대동굴도 지금까지 종교적 수행의 도장이 되고 있고요. 또한 로자몬드 궁전의 미로는 헨리 2세가 애첩 로자몬드를 왕비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에 따라 미로를 만든 동기도 다양하죠."
"마와리 호도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호도는 본질적으로 장난감 같은 것을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그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지요. 벼락부자 시대에는 10엔짜리 지폐의 10을 1로 바꿔서 요정에서 1엔으로 썼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으니...... 자, 나사 저택이 저기 보이네요."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길 왼쪽은 다소 가파른 경사면에 관목인 관목이 이어져 있다. 오른편 안쪽, 나무들 사이로 달빛에 비춰진 검푸른 덩어리가 보였다. 그  덩어리는 불규칙하게 늘어선 바위처럼 보였다. 토시오는 속도를 줄였다.
나사 저택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 아니었다. 보통으로 지었다면 평범한 2층짜리 양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강렬하게 대칭을 기피한 것 같았다. 아메바를 닮은 비대칭 형태가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저 첨탑은 프랑스의 포 성을 모방한 것 같은데, 나사 저택의 탑은 오각형으로 되어 있네요."
탑이라기보다는 건물을 관통하는 창끝처럼 보였다. 건물 중앙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저택의 맞은편은 저지대여서 작지만 연못이 있어요. 바위 사이를 뚫고 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하는데, 크기에 비해 물의 양이 많습니다. 연못 건너편에 예의 오각형 미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물론 차 안에서는 연못도 미로도 볼 수 없었다. 저택 안에는 불빛 하나도 없다. 낡은 대문 기둥에 약한 불빛이 켜져 있을 뿐이다.
차는 곧 나사 저택을 지나쳤다.
5분 정도 더 가니 나사 저택 옆으로 오래된 절이 보였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요."
스님이 마이코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로, 프라하의 궁정, 햄튼코트의 궁전, 나사 저택 ......
토시오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좁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서로서의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편함에 엽서가 들어 있었다. 에도 시게오(江藤重雄)가 보낸 것이었다. 토시오와 동일본 신인왕전에 출전하기 직전, 에도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에도는 이 소식을 듣고 슈젠지(修善寺)로 돌아간 뒤 체육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생선가게의 가업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도는 토시오의 패배를 알고 있었다. 놀러 오세요. 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읽은 토시오는 차가운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 같은 시각, 마사오의 아들 토우이치(透一)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토시오는 이 사실을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2023/04/08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5. 오뚜기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5. 오뚜기

마이코가 사무실에 나타나자 정체된 방의 공기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마이코는 검은색 정장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색 옷은 몸매를 날씬해 보이게 했고, 빨간 스카프가 잘 어울렸다.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신문을 읽고 있는 후쿠나가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운석이 차에 부딪히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고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보도되고 있었다. 사고 조사에는 많은 과학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토모히로의 차를 불태운 것은 틀림없이 운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현장에서는 무게 13kg, 지름 20cm 정도의 석철 운석이 수습됐다.

"운석이란 유성이 타다 남은 찌꺼기잖아요?"

"유성이 타는 것은 아닙니다."

후쿠나가는 신문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태양계에는 무수히 많은 고체 물질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구에 닿으면 지구의 인력으로 끌어당겨지죠. 물질의 기세가 거세져 초속 수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공기 중으로 돌진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수천 도의 마찰열이 가해져 갑자기 기체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이를 증발이라고 합니다. 이 고온의 가스가 빛을 내는 겁니다. 불이 타오르는 것과는 다르죠."

"시골에 가면 맑은 밤하늘에 유성을 자주 볼 수 있잖아요."

"우다이 씨, 유성은 하루에 몇 개나 떨어진다고 생각하세요?"

"한 시간에 두세 개 정도일까요?"

"육안으로 볼 수 있는건 그 정도겠죠. 하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유성을 포함하면 하루에 지구로 날아오는 별은 대략 수십억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수십억 개라고요?"

토시오도 그 숫자에 조금 놀랐다.

"네. 그런 유성은 그냥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먼지처럼 지상에 떨어지죠. 그래서 지구의 질량은 매년 4백만 톤씩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떨어진 유성 먼지의 양은 지표면 3미터를 덮는다고 계산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운석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별도 꽤 많다는 얘기군요."

"그런데 또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유성이 되는 물질은 대부분 쌀알 정도, 설탕 한 알 정도 큰 것들만 떨어지거든요. 이건 아까 말했듯이 공기 중에 들어가면 금방 증발해버립니다. 드물게는 큰 물질이 운석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 수는 극히 적습니다. 한 해에 오백 개 정도라고 하네요."

"그래도 오백 개나?"

"지구의 3분의 2가 바다니까, 지상에 떨어지는 건 백 오십 개 정도일겁니다. 확인된 숫자로 따지면 그보다 더 적고요."

"그중에는 꽤 큰 것도 있겠군요."

"그렇죠. 가장 큰 운석은 서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바 운석. 69톤이나 된다고 하니 대단하지요. 일본에서는 1885년 오쓰(大津)시에서 발견된 다카미(田上)운석이  가장 컸어요. 최근에는 1975년 오후 7시에 보름달의 몇 배나 되는 불덩어리가 세토나이카이로 떨어지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지요. 발견되면 1톤급 운석으로, 다카미시마 앞바다에 떨어져서 다카미시마 오키(高見島沖)운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상태로 현재 조사 중이에요."

"그런 것이 도시에 떨어지면 큰 재앙이 되겠군요"

"석유 공업 단지나 신칸센 열차에 떨어진다면 큰 사고가 나겠죠.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런 대형사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예전에 이탈리아의 한 신부가 운석의 직격탄을 맞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54년 미국 앨라배마주에 떨어진 운석은 사람의 집 지붕을 관통해 그 집에 있던 여성이 부상을 입었고요. 기후에 떨어진 가사마쓰 운석도 사람의 집 지붕을 뚫고 들어갔었어요. 이번 사고도 그렇고, 어쨌든 정말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운석에 맞은 사람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걸까요?"

후쿠나가는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사람의 회사, 해바라기 공예는 어떤 회사일까요?"

마이코가 물었다. 후쿠나가는 조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감 제조업이요. 저는 예전에 장난감 업계 신문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장난감 업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후쿠나가 씨는 어떤 업계든 잘 아는군요."

마이코가 칭찬한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해바라기 공예는 그렇게 큰 회사는 아니지만 역사는 꽤 오래됐어요. 뭐, 전통 있는 노포 부류죠. 마와리 가문이 요코하마로 이주해 와서 농사를 짓는 한편 부부가 작은 인형 제작을 시작한 것이 가에이 말기였는데, 마와리 사쿠조(馬割作蔵)라는 남자였습니다. 아내는 요코하마 출신이지만, 사쿠조는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어요. 마와리 가문에서 출생을 철저히 숨긴 느낌입니다. 나는 업계 인명록을 편집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는데, 해바라기 공예를 창립한 사람은 사쿠조의 아들인 도키치(東吉)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호도(蓬堂)라는 이름을 쓰게 되지요. 하지만 그 전에 아버지 사쿠조가 츠루슈도(鶴寿堂)라는 작은 장난감 가게를 운영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해바라기 공예에서 선대인 츠루슈도는 소개하고 있지 않나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잘 모르는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사쿠조 자신과 그의 아들 호도는 사쿠조를 은폐하려 했던 것 같지만요. 내 생각에 사쿠조는 어느 번(藩)의 하급 무사로, 어떤 잘못으로 번에서 쫓겨나서 아내의 생가로 이주한 것 같아요. 그 원인이 뭔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을테고요. 그래서 숨긴 것이겠죠? 사쿠조는 아내의 땅으로 오자마자 아내의 생가 근처에서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사가 장난감을?"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사와 장난감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어요. 센다이의 향토 장난감에 츠츠미 인형이라는 것이 있어요. 알고 있나요?"

"아니요."

"도호쿠의 대표적인 도자기입니다. 동북 지방의 풍토를 반영하는 애잔한 아름다움으로 인형 애호가들이 애지중지하고 있지요. 이 인형의 기원은 발꾼의 부업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다테라는 땅은 리쿠우(陸羽) 가도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지요. 다테 가문에서는 이곳에 하급무사들의 집을 배치했는데, 봉록이 적었던 탓에 부업을 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도공들과 함께 만든 것이 츠츠미 인형이라고 하고요. 이런 사례는 이 밖에도 있었어요.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여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면서 더 많은 궁핍한 무사들이 생겨났고요. 메이지 초년, 이미 무사들이 가진 물건을 팔기 시작했죠.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판다고 하면 뭘 내놓겠습니까?"

"사치품이겠죠."

"그렇죠, 무사의 아내의 혼수품, 값비싼 히나(ひな)인형 등이 거리의 대로변에 진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사치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습니다. 봉록이 적었던 하급무사들은 팔아먹을 물건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장난감을 만들게 된거지요. 나고야에는 나고야 토인형이라는 향토 장난감이 있어요."

"그것도 무사들이 만들기 시작한 건가요?"

"네. 오와리 도쿠가와번의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교토의 후시미 인형 기술을 배웠다는군요. 히나인형과 연극용 인형, 장식용 말과 토종 방울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어요. 메이지 말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최근에는 만드는 사람이 줄어들었다고 하네요. 관동지방의 인형으로는 사이타마현 이와쓰키(岩槻)의 이와쓰키가 유명하고요."

"알고 있어요. 히나 인형의 대부분은 이와쓰키에서 생산된 것이지요."

"이와츠키의 인형이 현재처럼 번영하고 있는 것은 메이지 유신 때문이기도 해요. 오쿠라 류지로라는 원래 무사였던 사람이 가문을 버리고 에도에 와서 인형에 손을 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메이지 유신 때 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와쓰키에 피신했는데, 이미 이와쓰키에는 인형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 땅은 닛코 가도의 길목에 있어 닛코 도쇼구(日光東照宮) 건설을 마친 장인들이 이와쓰키에 정착해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하는데, 오쿠라 류지로(大倉留次郎)는 그 곳에서 인형의 옷 입는 기술을 가르쳤고, 오늘날에는 이와쓰키 인형의 공로자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혁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장난감을 만들어내는군요."

"재미있는건 이번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와쓰키에 피난을 오게 된 수많은 장인들이 이와츠키 사람들과 함께 군수 공장에 징용되어 일했는데, 이는 이와츠키의 인형계에는 행운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장인들은 본업으로 돌아갔지만, 이와츠키의 인형 기술은 여기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거든요."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는 것이군요."

"낙오된 무사들이 만들게 된 장난감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로 킨스케마리(金助毬, 금방울)가 있네요. 큰 공이 되면 6, 70센티미터나 되죠. 물론 손으로 잡고 노는 것은 아닙니다. 3월 3일 히나의 날 장식용으로 만들어졌어요. 홍백색 비단으로 꿰매고, 모란에 당사자, 마차, 송죽매 등을 금실과 은실로 수놓습니다. 실로 만든 공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것 중 하나입니다. 이 금방울은 가고시마번 하급 무사 부녀자들의 수공예품이기도 하지요. 절기가 다가오면 그녀들은 보라색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금방울을 팔러 다녔고, 이것이 명물이 되었어요."

"연극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네요."

"그림이 되지요. 어느 날, 부인이 불쑥 상대의 얼굴을 봅니다. 젊은 날의 연인으로 지금은 가게의 주인이 되었구나. 억지로 시집갔지만 남편은 폐번으로 인해 봉록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길거리로 나가 공을 팔아야만 하는 신세. 세상의 이치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황당한 이 만남 ......"

"무사들이 만들기 시작한 장난감이 아직 남아 있나요?"

마이코가 말문을 막았다. 후쿠나가가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네, 아직 있어요. 야마가타의 이타지시(板獅子)는 쇼나이(庄内)번의 무사들이 만들기 시작했지요. 시코쿠의 다카마쓰하리코는 다카마쓰번의 가신인 카지가와 마사요시가 창시했고요. 마쓰에 번에서는 아네사마, 도야마 번에서는 흙인형......"

"그래서, 마와리 사쿠조는?"

"아, 그렇죠. 가에이 말기, 오노와에 정착한 사쿠조는 농사를 짓는 한편 작은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쿠조는 금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가자시(假裝師)의 하청으로 가쿠라스즈(神楽鈴)와 철제 비야봉 등을 만들었어요."

"비야봉이 뭐예요?"

"10센티미터 정도의 철제 장난감이지요. 머리는 고리 모양이고, 두 개의 다리가 나와 있습니다. 고리를 입에 물고 발을 손가락으로 튕기면 비야봉이라는 소리가 납니다. 분세이 연간에 유행해서 아이도 어른도 모두 비야봉을 가지고 놀았어요. 어른들을 위해서는 은으로 만든 고급품도 등장해 한동안 금지된 적도 있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졌어요."

"옛날에는 신기한 장난감이 많았군요"

"네, 그런 장난감은 요코하마의 외국인들의 눈에 들어왔죠. 이국적이고 정교한 일본 장난감은 특히 외국 업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장난감의 수출은 이렇게 해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죠. 죽방울, 수중화, 작은 우산 등이 수출 1호였다고 합니다. 사쿠조도 이런 와중에 '츠루슈도'라는 가게를 만들었습니다. 기우카아가, 코보시, 장난감 기츠키, 판카라쿠리 등이 주요 상품이었습니다. 일부는 해바라기 공예에 그대로 옮겨져 지금도 생산되고 있습니다. 츠루슈도의 장난감은 모두 소품이지만, 고급스러운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기츠키는 용수철 스프링을 사용했고, 도금 기술을 장난감에 도입한 것도 츠루슈도가 가장 빨랐던 것 같아요. 해바라기 공예는 지금도 도금 공장을 가지고 있지요."

"기츠키? 지금도 달그락달그락 새라는 장난감이 팔리고 있어요."

"그건 기츠키를 개량한 거지요. 원래는 모래 같은 건 안 쓰고 그냥 스프링으로만 만들었어요. 이 장난감은 지금의 해바라기 공예 사장인 마와리 데츠바가 아이디어를 더해 부활시킨 거라고 하네요."

"마와리 데츠바는 호도의 손자죠?"

"맞아요, 그 전에 사쿠조의 아이, 도키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순서겠지요. 도키치가 해바라기 공예의 창시자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했듯 도키치는 훗날 호도(蓬堂)라는 호를 쓰게 됩니다. 호도는 일대의 기인이어서 수많은 기행이 남아있습니다.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네요.”

"장난감 장사가 장난감을 싫어하면 곤란하잖아요."

"호도는 원래 장난감을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아버지가 한쪽 팔로 낑낑대며 장난감을 만드는걸 보아왔기에, 그에게 장난감은 고통의 상징이 되어버린거지요. 그런 경험이 있기에 본질적으로 장난감을 싫어하게 된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요."

"본업에 열중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 대신에, 돈 장사에 손을 대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돈 장사?"

"당시 멕시코에서 주조된 은화는 품질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막부에서는 대항 차원에서 양은과 동질의 안세이일분은(安政一分銀)을 주조했습니다. 이 질이 좋지 않은 은을 '도로은(ドロ銀)'이라고 불렀지요. 도로의 시세는 요코하마에서 형성되었는데, 호도는 이 도로 시세꾼으로서의 재주가 뛰어났답니다. 그래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군요. 호도의 기행 중 하나로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텐포센 (천보전)으로 바꾸어 항아리 속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텐포센이라고 하면 그, 놋쇠로 만든 돈을 말하죠?"

"네, 덴포 6년(1895년)에 처음 주조된 텐포 통보를 말합니다. 가치는 백문으로 당백전이라고도 불렸지만, 실제로는 그 액면 가치는 전혀 없어서 메이지 신통화 체계로는 8리로만 통용되었습니다. 한 푼에 2리 부족하다는 뜻에서 조금 모자란 사람을 텐포센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죠. 그런 가치없는 텐포센을 실제로 모았을리는 없으니, 저축했다기 보다는 텐포센이라고 불릴 만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던게 와전된게 아닌가 싶어요. 그 중 하나로 호도는 오와노 땅에 우스꽝스러운 집을 지었습니다. 서양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형용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나쁜 취향을 가진 건물로, 현지 사람들은 나사 저택이라고 부르지요."

"나사 저택이라니........"

"호도는 어둠의 영역에서는 네지베에(ねじ兵衛 / 나사 아저씨)라고도 불렸기 때문입니다. 네지베에가 만든 뒤틀린 건축물이니 나사 저택인거지요. 현재도 오노와에 남아있고, 데츠바가 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장난감 사업이 호도에게 적합했다고도 볼 수도 있어요. 즉, 전후의 훌라후프나 닥종이 인형 등의 광기 어린 유행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장난감 업계는 상당히 투기적인 성격이 강하죠. 호도는 그 투기성을 잘 포착할 수 있었어요. 다이쇼(大正)시대에는 도르래를 이용한 장난감이 기록적인 수출을 기록하기도 했고요. 판매 가격이 1달러로 속칭 '원달러 물건'이라 불리며 수출의 꽃이었던 셈입니다. 유명한 독일 라이오넬의 기관차는 당시 가치로 한 대에 천엔이었다고 하니 일본 장난감이 얼마나 저렴했는지 알 수 있을거에요. 호도는 그 흐름을 잘 올라탔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도로은 시세에 정통했다 한들 나사 저택과 같은 자유분방한 집을 지을 수는 없었을거에요."

"호도에게 자식은 있었나요?"

"쇼이치로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해바라기 공예를 물려받았지만, 호도처럼 될 수는 없었어요. 어쨌든 해바라기 공예는 호도 혼자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호도가 죽으면 쇼이치로가 감당할 수 없었을겁니다. 한편 장난감 업계는 쇼와(昭和)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호황을 누렸고, 양초를 응용한 폼폼마루, 용수철로 걷는 펭귄, 뒤집히는 쥐, 깡충깡충 뛰는 병아리 등 걸작이 속속 등장해 구미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카니발용으로 활발히 수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해바라기 공예는 한 시대 전의 장난감을 세밀하게 만들어내는 방식을 택했죠. 쇼이치로는 일찌감치 일에서 손을 떼고, 젊은 두 아들이 해바라기 공예를 이어받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마와리 데츠바(馬割鉄馬)와 류키치(龍吉) 형제였습니다."

"지금 사장님이신 거군요."

"네, 두 사람은 능력도 있고 일도 잘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중에서도 쇼와 13년, 구리, 황동, 철강을 사용한 내수용 완구 제조가 금지된 것이 큰 타격이었지요. 수출액도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참담한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백깨비도 도자기로 대체되고, 셀로판 풍선은 종이로, 고무공마저도 결국 사라졌으며, 두 사람은 군수 공장에 징용되어 종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장난감은 부흥했을텐데..."

"그렇죠, 하지만 수출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환율 변동과 불량 완구 등의 문제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해바라기 공예의 첫 번째 히트작은 달가닥달가닥 새인데, 데츠바의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그 전후로 동생 류키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류키치의 하나뿐인 외아들이 이번에 기적과 조우한 토모히로죠"

"후쿠나가 씨의 지식에 놀랐어요. 데츠바를 많이 찾아뵈었나 봅니다."

후쿠나가 씨는 겨우 웃었다.

"아니요, 그 할아버지는 고집불통이라서 좀처럼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뭔가 구멍이라도 찾아볼까 해서 연구 좀 했죠."

"구멍이 있었나요?"

"아니요, 완패입니다. 구멍은 커녕 티끌만한 허점 하나 조차 찾기 힘들었습니다."


마이코는 토시오를 우다이 경제연구회의 모회사로 데려갔다.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상가 건물로, 1층은 중국 음식점이었다. 건물의 크기는 니시키 빌딩과 거의 비슷한 크기인데, 다이토 흥신소는 4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네, 다섯 명의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이코는 책상을 돌며 한 명 한 명에게 토시오를 소개했다. 모두 50~60대였다. 마이코는 마지막으로 층 안쪽에 앉아 있는 백발의 남자 앞에 토시오를 데리고 갔다. 다이토 흥신소의 요코누마 소장이었다.

요코누마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

토시오는 그저께까지의 일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복서였어."

마이코가 대신 말했다.

"호오......."

요코누마는 다시 한 번 토시오를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이상의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요코누마는 두 사람을 비교했다.

"설마."

마이코가 웃었다.

"마이코는 유도 3단이었지?"

"그만해. 이런 곳에서."

"그런데, 어제 교통과 교도 형사가 전화가 왔다고 하지 않았어? 무슨 일이야?"

"내가 마와리 토모히로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 사고와는 상관없겠지?"

"그래. 하지만 교도 씨는 변함없이 끈질긴 사람이야.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고 하니 앞으로 한번 들러볼 생각이야."

"그래. 만나면 잘 부탁해."

대동흥신소를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마이코는 밥을 먹자며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카레라이스, 어때?"

어제 다방에서와 같은 분위기다. 토시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이코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돼."

토시오는 웃으며 카츠동 덮밥이 좋다고 다시 말했다.

"그럼 됐어."

마이코는 큰 소리로 주문한 뒤 가방을 열고 작은 인형을 꺼냈다.

"마사오의 가방에 들어 있었어."

"그 사람의 가방을 열어 보았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행동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사오는 동네 약국에서 수면제를 살 수 있는 처방전도 가지고 있었어. 나머지는 흔한 물건들이었는데, 이 인형이 특이하더군. 그래서 가져왔어. '마도죠'라는 장난감은 아무래도 이것인 것 같거든."

마이코는 인형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마사오의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 꺼려졌지만, 마도죠라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

15센티미터 남짓한 여자아이 인형이다. 눈이 크고 뺨이 부풀어 올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양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빨간 드레스, 빨간 신발. 보기에는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형이었다. 토시오가 의기소침한 얼굴로 인형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이코가 말했다.

"등에 단추가 달려 있어. 그것을 눌러봐."

토시오는 인형의 등을 살폈다. 마이코의 말대로, 등짝의 옷감 아래에 작은 돌기가 느껴졌다. 토시오는 그 버튼에 힘을 주었다.

'딸깍'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인형의 목이 빙글빙글 돌면서 뒤쪽을 향했다. 인형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싫다 싫다를 하는 인형이 있었다. 그런 종류일까. 그러기에는 뒤쪽을 향한 모양이 기괴했다. 토시오는 다시 한 번 등쪽의 버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인형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 얼굴을 보고, 무심코 인형을 떨어뜨릴 뻔했다. 토시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변해버린 인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이 귀까지 찢어지고 긴 독한 붉은 혀가 떨고 있었다. 두 눈이 2센티미터나 튀어나왔고, 게다가 한쪽은 빨갛고 한쪽은 흰 눈이었다. 머리는 대머리, 회색 두개골에 거미줄처럼 생긴 혈관이 거미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토시오가 버튼을 눌렀다. 인형이 다시 뒤로 돌아갔다. 계속 버튼을 누르자 원래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위로 향했다.

"악취미같은 장난감이야."

마이코가 비판했다.

"이 인형은 하나의 목에 두 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하나는 소녀의 얼굴이고 하나는 해골의 얼굴이야. 해골의 얼굴은 목 밑부분에 아래쪽으로 숨겨져 있고. 처음 버튼을 누르면 소녀의 목이 뒤로 젖혀지지. 다음 버튼을 누르면 목이 위로 올라가고 숨겨져 있던 해골의 얼굴이 위로 향하게 돼. 동시에 여자아이의 얼굴은 아래쪽을 향하게 되어 숨겨져 버리고. 목은 인형의 몸통에서 지지대가 나와서 양 귀에 붙어있는데, 머리카락으로 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

"마도죠라는 것은 ‘마도녀’를 말했던거군요."

토시오는 인형을 마이코에게 돌려주었다.

"이런 인형, 팔릴 것 같아?" 

"안 팔릴 것 같아요. 모양부터가 보기 싫잖아요. 여자애들이 보면 울음을 터뜨릴 거예요. 기계적으로도 그렇게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요."

"토모히로가 죽기 직전까지 이 인형에 대해 말한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인형의 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을지도…. 인형의 몸 안에 뭔가 소중한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재보의 행방을 기록한 고문서 같은거?"

마이코는 놀란 표정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재미있겠는데."


에노키마치서에 도착한 마이코는 마치 내 집에 온 듯이 편안한 발걸음으로 교도 형사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교도 형사는 삐뚤빼뚤한 입을 크게 벌리고 마이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이코가 없어진 후로 외로웠다고."

마이코는 여기저기서 경찰관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나한테 반했나 봐."

"뭐야. 그냥 싸움이 부족해졌을 뿐이야. 요코누마 씨는 어떻게 지내?"

"변함없어. 교도 씨를 만나다고 했더니 안부인사 전해달라고 하더군. 어제는 카츠군을 잘 돌봐주었지? 고마와."

"그거 말이야."

교도 형사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쪽에서 얘기하자"

그는 일어서서 계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서 한 작은 방 문을 열었다.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허름한 방이었다. 교도 형사는 접이식 의자를 펴서 두 사람에게 권했다.

"마이코는 왜 마와리 토모히로를 쫓아다녔지? 일 때문인가?"

"그런 것도 있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그 사건을 명백히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 사건... 마이코가 그만두게 된 그 사건 말인가?"

"그래, 내 뇌물 사건"

교도는 괜찮냐는 듯이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 사람한테도 이야기해주면 좋겠어."

"알겠어, 그 사건은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에노키마치에서 마이코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를 세웠었지. 그러자 차 안에 있던 남자는 갑자기 너에게 돈을 주고 달아났어. 마이코가 그 돈을 주머니에 넣는 것을 목격한 남자가 소란을 피우며 경찰차를 불렀었고."

"그래, 확실히 나는 돈을 주머니에 넣었어. 남편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게 사실이었거든."

"우다이 군이 과격파의 돌팔매질로 다리에 부상을 입은 직후였으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었어. 망설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거야. 하지만 그 차를 놓칠 생각은 절대 없었어."

"그런데 지나가던 한 남자가 마이코에게 돈을 요구했다며 욕설을 퍼부었지. 마이코는 그 남자와 철저히 맞서 싸웠어야 했어."

"다들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흔들린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어. 나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썼고."

"마이코는 원래 생각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였으니까."

"지금은 달라졌어."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아직 고생이 뭔지 몰랐군, 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 상태로 두면 안 되겠더라고."

"우다이 군을 위해서도 말이야."

"그래, 왜 그때는 그걸 몰랐을까? 나는 경찰을 불러 신고했던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가 얼마 전에 교통법규 위반 때문에 벌금을 많이 낸 직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정말인가? 분풀이로 그런 증언을 한 거로군."

"그리고 최근에 우연히도 나에게 돈을 준 남자를 찾았어."

"그거 참 대단한데! 두 사람의 새로운 증언이라면 마이코의 억울한 누명도 깨끗이 벗겨질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게 생겼어. 그 남자가 바로 마와리 토모히로였거든."

"......"

"대동흥신소에서 온 일 중에 토모히로가 의뢰한 신용조사가 있었어. 첫눈에 토모히로가 돈을 주었던 그 남자였다는걸 바로 알아보았지. 에노키마치도 해바라기 공예와 오노와를 잇는 길이었고. 나는 토모히로에게 칼을 들이댈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 조사 보고서를 전달한 후 추궁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토모히로는 마사오를 데리고 갑자기 떠나려고 했어. 나는 깜짝 놀랐고, 어쨌든 비행장에서 그를 붙잡아 말만이라도 남겨두려고 했지. 그 여행길에 토모히로가 죽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채."

"벌금형에 처해진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불안한데."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구. 사실 다른 증인이 한명 더 있어."

"다른 증인?"

"토모히로의 차 뒷좌석에 한 노인이 타고 있던걸 봤어. 그 노인은 토모히로의 삼촌인 마와리 데츠바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노인이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할까?"

"기억하게 만들거야. 몇 번이든 찾아가서라도."

"호오, 오뚜기같군."

"내가 오뚜기라고?"

"이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가나자와의 오뚜기는 미인이야.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나는 다시 복직해서 교도 씨와 맞붙을 생각이니까. 각오하라고."

"월급은 싸다구."

"알아. 지금 하는 일도 계속할 생각이야."

교도 형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마이코를 바라보았다.

"조금 만나지 않은 틈에 빈틈없는 여자가 되었네. 그나저나, 어제 사고는 신문에서 읽었어. 그 사고였구나."

"그래."

"오늘 밤이 토모히로의 철야네."

형사는 마이코의 검은 옷을 보았다.

"데츠바를 만나러 가는거야?"

"만날 거야. 하지만 철야 상황에서는 그 사건 이야기를 꺼내진 못하겠지. 그냥 얼굴을 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해줘."

"교도 씨, 조금 만나지 않은 틈에 인간적인 대사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