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6/03/15

Nobody - DARLIN' DARLIN' (1984)

제 인생 곡이라 할 수 있는 노래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 "きまぐれオレンジロード"의 두 번째 오프닝 곡이었던 "Orange Mystery"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자주, 많이 듣는 곡이지요. 이런 글을 올렸을 정도로요.


하지만 이 노래를 만들었던 'Nobody'라는 밴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리콘 차트에 올랐던 적도 없어서 별로 인기 없던, 그냥 운 좋게 노래 한 곡이 애니메이션과 엮였을 뿐인 밴드라고 생각해 왔었지요.

그런데 얼마전, Spotify를 통해 음악을 검색하던 와중에 Nobody의 앨범을 접했는데, 시대를 앞서갈 정도로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조금 찾아보니, Nobody는 아이자와 토시오, 키하라 토시오 두 명이 결성한 록 밴드입니다. 원래는 유명가수 야자와 에이키치의 백 밴드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인데, 야자와 에이키치가 미국으로 활동 거점을 옮긴 뒤, 먹고 살기 위해서 밴드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실력파 뮤지션답게 다른 가수들에게 제공한 곡들도 많습니다. 그 중의 한 곡이 역시나 "きまぐれオレンジロード"의 명곡인 "NIGHT OF SUMMER SIDE"고요.

제가 들은 이들의 곡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 곡인 DARLIN' DARLIN'을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유튜브 댓글을 보니, 80~90년대 청춘을 보냈던 아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명곡인 듯 한데, 저의 향수도 마찬가지로 자극하는군요. 


아~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집니다.

2026/03/14

추리 소설 속 자동차 :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

그동안 추리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음식은 인물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지요.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꿔,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자동차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자동차는 추리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하고, 완벽해 보이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니까요. 때로는 밀실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차종과 색상, 구입 시기 같은 정보만으로도 인물의 성향과 처지를 드러노기도 합니다. 굴러가기만 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고물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는 탐정 사와자키처럼요. 낡고 오래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BMW’라는 별명답게 튼튼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과 차가 절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를 떠올릴 수 있겠네요.

이처럼 현대 추리소설에서 자동차는 사건과 등장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입니다. 수많은 작품 속에 다양한 차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는 자동차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자동차는 알파로메오 스파이더 3세대입니다.

알파로메오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한 브랜드로, 레이싱을 통해 다져진 기술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운전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자주 언급되며, 스포츠성을 중시하는 제조사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파이더는 1966년 처음 등장한 2인승 오픈 스포츠카입니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맡았고, 유려한 곡선의 차체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화 "졸업"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1993년까지 약 27년간 생산되며 12만 대 이상 판매된 장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중 3세대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후기형으로,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범퍼와 외관을 현대적으로 다듬어 1980년대 감각에 맞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모델이지요.

이 차가 등장하는 작품은 일본의 콤비 추리소설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1987년 작품 "그리고 문이 닫혔다"입니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두 명(이노우에 유메히토, 도쿠야마 준이치)의 합동 필명으로, 이름의 유래는 ‘재미있는 두 사람’(오카시나 후타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도입한 본격 추리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는 피해자의 모친이 사건 용의자 네 명을 핵 셸터에 가둔 뒤 진상을 밝혀내려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피해자 사키코의 애차가 바로 알파로메오스파이더고요. 세대가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발표 시점이 1987년이고 사키코가 부유한 집안의 딸로 최신 유행과 명품을 선호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판매 중이던 3세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려한 빨간색 오픈 스포츠카는 제멋대로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사키코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유이치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일부러 차를 세우고, 루프를 연 채 키스를 나눈다는 묘사를 통해 관심받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이는 2인승 오픈카라서 가능했을 행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자동차는 단순히 이러한 사키코의 성격을 상징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을 당시 타고 있던 차가 바로 이 알파로메오였고, 사건의 실마리 역시 차량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실린 흑백 사진 속 인양된 알파로메오와, 사키코가 생전에 찍힌 컬러 사진 속 차량을 번갈아 보던 유이치 일행은 운전석 시트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두 사진 모두 차량의 왼쪽에서 촬영되었고, 좌핸들 차량이므로 운전석은 카메라 쪽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끌어올린 차량의 시트는 컬러 사진보다 훨씬 뒤로 밀려 있습니다. 사키코가 직접 운전했다면 시트 위치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사건 당시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은 인물이 사키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동차는 단순한 배경, 소품이 아니라 소설의 추리적 핵심 장치로 사용됩니다. 시트 위치라는 사소한 차이가 사고사라는 견해를 뒤집고,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드니까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시각 현장에 있던 네 명 중 타다시는 사키코를 살해한 뒤 차량에 태워 절벽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다시와 치즈루, 아유미는 이후 함께 절벽에서 차량을 발견했지만, 차 안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 사람은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타다시가 차량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그 시간대에 유일하게 자리를 비운 인물은 유이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치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사건 초반에 별장을 떠났기 때문에 살해를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요.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요. 누가 언제 운전대를 잡았고, 사키코의 죽음은 어떻게 연출된 것일까요. 그 진상과 트릭은 "그리고 문이 닫혔다"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으실 때 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한 번쯤 눈길을 주시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26/03/08

왕과 사는 남자 (2026) - 장항준 : 별점 4점

장항준 감독의 천만 관객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를 다루는 사극은 왕위 찬탈 과정이나 권력 다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폐위되어 귀양을 간 단종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시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단종의 삶을 중심에 두며 세조는 나오지도 않고, 한명회가 빌런 우두머리인 사극은 처음 봤는데 굉장히 신선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크게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사료를 토대로 실제로 있었을 법하게 자연스럽게 구성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습니다. 폐위된 뒤 나약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죽을 기회만 찾던 단종이 점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덕분이에요. 동시에 단종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려는 한명회의 계략, 금성대군의 역모가 함께 펼쳐지며 발생하는 긴장감도 제법입니다. 여기에 단종과 민초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엄홍도의 인연과 에피소드들도 큰 재미를 전해 줍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합니다.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과 한명회 역의 유지태의 경우 외모, 발성 등 모든 면에서 두 인물의 대비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이에요. 특히 거대한 체구부터 위압감을 전해주는 한명회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유배지 영월과 음식들 연출도 발군이에요. 이런 디테일이 이 영화의 큰 힘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크게 느껴진건 유해진의 연기입니다. 엄홍도라는 인물이 아니라, 익히 알고 있던 '유해진'이라는 인물 모습 그대로였던 탓입니다. 엄홍도라는 인물에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이게 좋은 연기였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등장도 조금 아쉬웠어요. 단종이 왕으로 각성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삽입된 장면이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CG가 어색하게 느껴졌고 현실성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신파적인 연출도 약간 과한 느낌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가셔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누이가 됩시다”, “차가우셨지요?”로 이어지는 3연타는, '이래도 안 울꺼야?'라는 감독의 의도가 너무 강했어요. 차라리 여운을 좀 더 길게 남겨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고 완성도도 안정적인 작품입니다. 천만 관객을 기록할 정도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크게 빠지는 부분 없이 잘 만들어진 사극 영화라는 점은 분명해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옆 자리에 앉은 딸아이가 거의 오열하면서 보던데 과연 엄홍도가 죽었어도 저렇게 울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는 했습니다.

2026/03/07

워 머신 : 전쟁 기계 (2026) - 패트릭 휴즈 : 별점 2점

미육군 최강 부대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 위한 8주간 훈련에 도전한 81번 훈련병은 우여곡절 끝에 최후의 시험인 '죽음의 행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훈련병들은 예정된 훈련 대신 외계에서 온 전투 기계를 만나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데...

넷플릭스 최신 영화입니다. 주말 맞이로 감상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초반부의 지루했던 배경 설명이 끝난 뒤, 핵심 이야기인 레인저 훈련생들이 벌이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상대 생존기는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미약한 희생자들이 도주하면서 생존하려 노력하는, 거대 크리처 호러물 장르물로의 가장 중요한 재미 요소인 '긴장감'을 잘 살린 덕입니다. 나침반 등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등으로 로봇 등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요. 망가진 무전기,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 고장난 장갑차 등의 여러 제약 사항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고요.

크리처 호러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크리처의 강력함 역시 훈련병들을 압도하며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들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 편이 다 죽는 영화는 정말 오랫만에 봅니다. 최소한 여군은 살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레인저 훈련병'이라는 미 육군 최강 군인들이 희생양 역으로 설정된 점도 좋습니다. 절벽에서의 레펠 기동을 비롯한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인간 이상의 활약이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약의 핵심인 주인공이 '잭 리처' 앨런 리치슨이라는 캐스팅도 딱 맞아 떨어지는 점입니다. 캐스팅이라면, 추억의 배우 데니스 퀘이드의 노병 연기도 반가왔어요.
아울러 주인공이 공병 출신이라서 로봇의 약점을 눈치채고 해치운다는 마지막 장면의 설득력도 꽤 높은 편입니다. 맨 앞의 차량 정비 장면과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군인들이 강력한 외계 크리쳐와 싸워 극히 일부만 겨우 살아남는다는건 "에일리언(2)"과 비슷하고, 이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엇비슷한 재미를 주지만 마지막 10여분이 영화를 완전히 망쳐버려서 아쉽습니다. 외계 로봇의 습격이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이 닥쳤는데 레인저가 되는 결승 라인에 도달하는게 지상 목표라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황당했는데(최소한 부상자는 의무병에게 바로 인계했어야지요),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게다가 막 복귀해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다시 전우들과 출동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비유하자면 "에일리언"의 리플리가 살아서 귀환한 뒤, 군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하고 선봉에 서서 에일리언을 박살낸다는 에필로그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 마지막 10여분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거만 없었어도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한데 아깝네요.
그래도 앨런 리치슨이라는 배우의 액션은 믿을만하다는 확신이 생기기는 합니다. 다른 작품도 찾아보고 싶군요.

2026/03/06

소녀 A의 살인 - 이마무라 아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DJ 신타니 카나는 심야방송에서 ‘F여학원 1학년 소녀 A’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양어머니가 죽은 뒤 양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고, 밤마다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으며 더는 버티지 못하면 자살하거나 양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방송 후, 신타니 카나는 고교 동창 와키사카에게 연락했다. 후요 여학원 교사인 와키사카에게 편지 속 내용이 진짜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와키사카의 조사 결과, 조건에 맞는 학생은 세 명 - 물리 교사 다카스기의 양녀 다카스기 이즈미, 의사의 딸 마쓰노 아이, 경찰의 양녀 스와 준코 - 이었다. 

카나는 세 명을 직접 접촉해 ‘소녀 A’를 찾으려고 연락처도 받았지만, 곧바로 다카스기 히사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강도 사건, 혹은 소녀 A가 이즈미이며 그녀의 복수가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다카스기가 마쓰노 의사를 협박하고 있었다는게 드러나 마쓰노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사를 받던 마쓰노가 “집에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고, 같은 전화를 받았던 스와 경부는 수사를 통해 모든게 신타니 카나와 연결된다는걸 알아내는데...

국내에는 소개된 적 없는 이마무라 아야의 장편 추리소설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은 다카스기 히사오 살인 사건을 쫓는 본편의 이야기와, 한 ‘소녀’의 독백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독백하는 소녀가 본편 등장인물 중 의외의 인물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서술 트릭에 의한 반전이 재미의 핵심이고요.
지금 시점에서 이런 교차 서술을 통한 화자를 오해하게 만드는 서술 트릭은 제법 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995년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했을 겁니다. 지금 읽어도 웬만한 재미는 선사해 줄 정도니까요.

단지 서술 트릭 뿐 아니라, 카나가 협박범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소녀 A’의 편지를 날조한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소녀의 성폭행 피해에 대한 고백을 방송에서 소개한 뒤, 동창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와키사카에로부터 소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계획으로 DJ라는 직업이 갖는 파급력,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양부의 성범죄라는 소재가 결합되면서 ‘개인정보 확인’이라는 위험한 행위가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덕분입니다.

얼핏 사소해 보였던 마쓰노의 주장, 즉 집에 있을 때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사건 해결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등, 앞 뒤가 잘 맞아 떨어지며 막힘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쉽게 읽히며,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니까요.

다만 후반부는 지나치게 뻔합니다. 이즈미의 “알토 목소리”였다는 증언으로 신타니 카나가 전화를 걸었다는게 특정되고 나면, 그녀가 범인이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다카스기는 이전에도 협박범이었으니 카나를 협박한게 범행 동기가 되었을테고, 협박의 원인은 과거 카나가 ‘소녀’일 때 저질렀던 양부 살해일 것, 즉 카나가 '소녀'였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고요. 양부 사체를 고향집에 숨겨두었을 거라는 정황도 뻔하디 뻔합니다.
초반에 소녀가 “혹시 이즈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 끌고 갔더라면 그나마 이런 뻔한 추정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즈미 방의 자물쇠나 전날의 수면제 복용은 경찰 조사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이즈미가 소녀일 가능성’은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소녀들’은 그녀들이 다카스기를 죽일 이유가 희박하니 애초에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즉, 반전의 폭을 초반부터 줄여놓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범죄에 대한 여러 설정들도 설득력이 부족하고 거슬립니다. 대표적인게 신타니 카나에게 ‘운이 너무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 후요 학원에 모친 없이 양부와만 사는 1학년 여학생이 무려 3명이나 있었다
  • 아내가 유키에인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대상자인 다카스기에게 맨 마지막에 걸었다
  • 전화들을 사건의 핵심 용의자 마쓰노와 수사 담당자 스와, 그리고 피해자의 딸 이즈미가 각각 받았다

는 건데, 대상자가 딱 한 명이었거나, 이즈미가 처음 전화를 받았거나 했다면 사건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거에요. 이렇게 악운이 겹치는건, 불운으로 사건을 억지로 진행시킨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습니다.
카나의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 금액이 얼마였든, 2년만 버티면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협박이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는 계산을 생각하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했어야 했나 싶거든요.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듯한 다카스기가 협박에 맛을 들여 계속 협박했다는 설정도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스와 경부가 공무집행 중 사망하게 만든 범인의 딸을 양녀로 키운다는 설정은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독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이야기 안에 꽤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그 사건을 둘러싼 여성의 심리 묘사가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는 점은 좋습니다. 서술 트릭을 잘 활용했다는 분명한 장점도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감점합니다만, 번역 출간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은 합니다.

2026/03/01

그리고 문이 닫혔다(そして扉が閉ざされた) - 오카지마 후타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키코의 죽음 이후, 사키코의 어머니 미타 마사요가 사건 당시 함께 있었던 일행 4명(유이치·아유미·타다시·치즈루)을 집으로 불러 수면제가 든 주스를 먹인 뒤 지하 셸터에 감금했다. 셸터 안 화장실에는 “너희가 죽였다”라는 문구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이들은 사키코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를 두고 서로를 의심하며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사고’로 보였던 사건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사키코가 셸터 안에서 아이스픽에 찔려 죽었고, 그 뒤 누군가가 사고로 위장했다는 진상이 드러난다...

"클라인의 항아리"로 유명한 일본의 본격 추리 작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약 20년 동안의 일본 미스터리 베스트 100에 포함될 정도로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정 사건의 유력 용의자 네 명을 폐쇄 공간인 핵 셸터에 가둔 뒤, 그들끼리 생존 게임을 이어 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1987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류의(예를 들어 이런 작품) 원조인 듯 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본격 추리 작가의 작품답게 논리적으로, 발견되는 단서와 증언들에 의해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됩니다. 이 과정을 밟아 나가기 위한 단서의 제시도 공정하고요. 작품 속 추리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처음에는 사키코의 죽음을 모두 사고사라고 믿습니다.
  2. 사진 속 자동차 운전석 시트 위치를 근거로, 사키코가 혼자 운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운전석 시트가 ‘추락 충격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어려운 방향’이라서, 사키코보다 체격이 큰 누군가가 운전했을 가능성이 떠오르지요.
  3. 셸터 화장실 바닥에서 수건에 싸인 아이스픽이 발견됩니다. “왜 셸터 화장실 바닥에 있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사키코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됩니다. 이후 네 사람은 서로의 알리바이를 교차하며 검증합니다.
  4. 곧이어 셸터에서 사키코의 귀걸이가 발견되면서, 셸터 자체가 살인 현장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5. 사키코의 알파로메오가 나갈 당시 치즈루와 아유미는 별장 2층에 있었고, 차가 나가기 30분 전 유이치는 디지에서 별장으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성립합니다. 따라서 알파로메오를 운전할 수 있는 인물은 타다시뿐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타다시는 절벽에서 돌아올 때 탈 오토바이도 알파로메오에 싣고 갔던 겁니다.
  6. 그러나 이후 치즈루와 아유미가 절벽에서 알파로메오를 발견했을 때, 차 안에 사키코의 사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절벽에서 떨어진 시점은 그들이 차를 본 이후의 새벽이며, 당시 세 사람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차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인물은 유이치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7. 그러나 타다시가 사키코의 사체만 먼저 절벽 아래로 던진 뒤, 얼음을 쐐기처럼 가공해 장치하여 차가 새벽에 자동으로 떨어지도록 만든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스박스 뚜껑이 열려 얼음이 물로 변해 있던 점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됩니다.

타다시의 사체 은닉 이후 밝혀지는 진상 또한 나름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쟁에서 유이치가 밀친 탓에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고, 유이치를 사랑하는 아유미가 이를 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묘사된 유이치와 아유미의 통화를 통해 미리 암시되기에, 치밀하며 공정하다는 느낌도 전해줍니다.

아울러 네 명만 등장하는 폐쇄 공간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셸터의 묘사(아래의 ChatGPT 이미지 참고하세요)와 그곳을 탈출하려는 여러 시도들도 긴박감 넘칩니다. 소규모 무대극으로 각색해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아직 영상화가 되지 않은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던 화자 유이치의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다는 진상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타다시의 사체 은닉 방식 역시 허술합니다. 사체를 단순히 바다에 던졌다면 언제든 발견될 수 있고, 그 경우 사고사가 아니라는 점이 곧바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사체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왜 사체에 돌을 묶는 등의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사키코의 모친이 사고사를 의심해 당시 별장에 있던 네 명을 셸터에 가둔 이유, 그리고 유이치와 그리 오래 함께 하지 않았던(별장에서의 3일 정도 뿐) 아유미가 유이치를 위해서 사키코의 죽음을 은폐할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는건 설명이 부족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멍이 있습니다. 유이치가 화자인 상황에서는, 유이치가 별장을 떠난 뒤 남아 있던 세 명이 사키코를 살해하고 차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뜨렸다는게 가장 논리적인 추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키코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아이스픽을 챙겼다면, 그 대상은 연인을 빼앗아 간 아유미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유미가 반격해 사키코가 사망했고, 아유미의 약혼자 타다시가 사체 은닉을 도왔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애초에 타다시는 동기도 가장 부족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가능성이 아예 제시되지 않는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폐쇄 공간 미스터리의 원조격이라는 의미 외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며 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추천드릴 만한 작품은 아니네요.

2026/02/28

상점가의 전진 - panpanya / 유유리 : 별점 3점

국내에 출간된 전권을 구입해 읽을 정도로 사랑하는 작가 panpanya의 신작입니다. 출간 사실을 뒤늦게 알아 구입이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단편 열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언제나처럼 일상 속에서 기발한 발상을 끌어내 독특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건물’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의 집"은 집 가족이 자라고 성장해 하나의 큰 집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연"은 멀리 보이던 집들이 사실은 건설업체의 간판이었다는 설정입니다.
"슈퍼 하우스"는 집이 일종의 로봇이 되어 외부의 공격을 격퇴합니다.
"즐거운 부동산"에서는 복권으로 택지에 당첨된 뒤 집 프라모델을 구입해 집을 건설합니다.
"윤번지"는 상속받았지만 사라진 땅을 탐정인 주인공과 레오나르도가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과거 투영법 제작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평면 지도로 인해 발생한 사기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입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어긋남을 다시 분석해, 이 ‘윤번지’가 지하에 위치했다는걸 밝혀냅니다.
"빌딩"은 빌딩이 원래 싹이며, 그것을 잘 키워 만들어낸다는 내용입니다.
"상점가의 전진"에서는 확장하고 이동하는 상점가를 따라 주인공이 집을 상점가에 포함시켜 가게를 열고 이사까지 하지만, 다른 현으로의 이동까지는 동참하지 못해 결국 상점가를 떠납니다.

이 가운데에서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적 설명이 잘 결합된 "윤번지"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구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오류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주인공과 파트너인 충견 레오나르도가 어딘가에 도착한 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내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확보할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모은 뒤, 과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추론으로 정답에 접근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추리물 같은 재미를 줍니다. 단순한 귀납적 추리가 아니라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직사각형 모서리 방의 양쪽 끝에서 도쿄 스카이트리와 후지산이 각각 보이면 ‘원주각 정리’가 성립하고, 거리를 감안하면 현재 위치는 미우라 아니면 이타미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시리즈 8편이 대표적입니다.


"올바른 주먹밥 개봉 방법"은 주먹밥 스티커를 훼손하지 않고 뜯어내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뒤의 해설을 보니 작가가 실제로 주먹밥 스티커를 수집하며 연구한 듯한데,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알기 어려운 디테일이야말로 panpanya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구야바노 홀리데이",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 처럼 말이지요.

다만 "집의 집"이나 "빌딩"처럼 설정이 다소 단순한 작품과, "슈퍼 하우스"에서 보이는 panpanya답지 않은 액션물 분위기의 전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공격을 내선번호로 시도한다는 디테일은 재미있었지만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 역시 몇 편은 다소 식상하게 느껴졌고, 이야기로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성립하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npanya 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작품도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

2026/02/27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 이연승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실하고 성실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없애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범죄자로 두 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유기했다. 뛰어난 머리로 검도 호구 가방을 쓰는 등의 작전으로 알리바이도 만들었지만, 경찰도 무능하지 않은 탓에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한편, 어린 딸 가오루 때문에 연쇄 아동 살해범을 강하게 의식하던 호나미는 근처에 사는 다테시나가 수상하다는걸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게 된 장편 범죄물로 이야기는 크게 범인인 마코토의 시점, 어린 딸 가오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 호나미의 시점,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사카쿠치-다니자키 형사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마코토는 검도부 소속이자 방과 후 검도 선생님으로, 호구와 장비를 넣는 큰 가방을 범행에 이용해서 아이를 가방에 넣어 옮긴 뒤 살해했습니다. 형사들은 가방에 아이들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마코토에게 혐의를 두기 시작하고요.
한편 호나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다테나시를 의심해 신고했지만 다테나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풀려나자, 다테나시의 열쇠를 몰래 복제해 그의 집에 잠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오루의 사진과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발견하자 그를 범인이라 확신한 뒤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뒤이어 결말이자 반전이 등장하는데 마코토는 여자였고, 가오루는 마코토의 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호나미는 마코토의 엄마였고요. 즉, 호나미가 ‘딸’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은 가오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코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나미는 마코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테나시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를 죽인거지요.
마코토가 여자였다는 점, 가오루의 친엄마라는 점, 그리고 마코토의 엄마가 호나미라는 설정은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어 반전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서술 트릭과 반전은 그럴듯한 편인데,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코토가 과거 다테나시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해 가오루를 낳으며 남성 공포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탓이 큽니다. 아이들이 가오루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정도를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범행 수법 또한 지나치게 잔혹해 읽는 내내 불쾌감을 줍니다. 사카구치 형사가 사체의 상태를 보고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부분 역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범행 묘사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을 추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나마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 자체를 굉장히 잘 쓴,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의미라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술 트릭은 독자를 속이겠다는 의도에만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해 별로입니다. 독자가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마코토의 초반부 묘사처럼요.

또한 경찰 수사가 다테나시를 범인으로 단정한 채 종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테나시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호나미가 반복적으로 그를 의심하며 신고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마코토 역시 수상한 정황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에 마코토가 호나미의 진심을 알고 죄책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지는 묘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경찰이 이 두 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수사한다면 진상을 밝혀낼 지도 모르는데요. 성모랍시고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통곡"같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코토는 단죄받는다는 결말이 더 깔끔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보다는 서술 트릭을 활용한 다른 유명 작품들을 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2026/02/22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 시즌 1 (2025) - 후지이 미치히토 외 : 별점 2점

전쟁 후 PTSD에 걸려 낙향한 무사 사가 슈지로는 극심한 생활고로 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지만 약 한 첩 쓰지 못했다. 아내마저 병환이 깊어지자, 사가는 무려 10만엔을 준다는 무사 모집 공고에 응해 교토 텐류지로 향했다. 다량의 총으로 무장한 주최측은, 그 곳에 모인 수백명의 전 무사들에게 상대를 죽이며 도쿄까지 오면 10만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한 시대극 액션 드라마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를 배경으로 무사 계급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살육 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인기있을 만한 설정은 다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설정 ‘고독(고도쿠)’가 대표적이에요. 수백 명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을 벌이게 하고, 최후의 생존자만을 뽑는다는 건데, 이건 "오징어 게임"과 다를게 없지요. 고도쿠 배후에 재벌 세력과 경시국이 손을 잡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특기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건 "닌자인법첩"같은 일본 시대극 액션물 설정을 그대로 따 왔고요. 그 외에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많아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만화같은 설정을 보신 전쟁이라던가 폐도령 이후 무사 계급의 몰락과 같은 실제 역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와지 대경시, 4대 재벌 등 실존 인물들을 결합시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고도쿠를 통해 무사 계급을 말살하려 한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목적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검술 액션입니다. 실사 시대극으로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촬영과 합이 좋은 덕분입니다. 특히 슈지로가 PTSD를 극복하고 총을 든 경비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각성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어요. 이 순간을 위해 주인공 사가 슈지로에 대한 서사도 초반부터 잘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살인귀 칸지야 부코츠야 일종의 중간 보스쯤 되는 악역이니 그렇다 쳐도, 키구오미 우쿄같은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까지 개별 서사를 풀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비서 신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짐짝에 가까운 후타바의 동행이나 이로하의 등장과 과거 사부와의 악연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기보다는 분산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가 슈지로가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하고 도쿄에 도착할게 뻔한만큼, 이런 이야기는 시간과 분량 낭비에 불과했어요. 이보다는 닌자 쓰게 쿄진의 목적을 좀 더 집중적으로 풀어냈어야 합니다.

검술 액션도 중반 이후에는 힘을 잃습니다. 파워 밸런스가 이상한 탓입니다. 사가 슈지로는 각성 전에도 칸지야 부코츠를 압도했었는데,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는 슈지로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고전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시원하거나 통쾌한 맛도 없고요.

또한 무사 계급을 이 기회에 몰살시키겠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계획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입니다. 모든 무사들이 고도쿠에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칸지야 부코츠의 살인 행각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민중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무언가는 부족하지만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합니다. 

2026/02/21

잔혹한 여로 - 야마무라 미사 : 별점 2점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는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일본 여성 추리작가 야마무라 미사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설 연휴 때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의외였던건, 수록작 중 세 편은 트릭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통파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특히 "공포의 연하장"이 아주 괜찮습니다.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겨진 유류품을 통해 피해자는 당첨된 연하장을 상품인 우표와 오전 9시 이후에 교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인 거래 증권회사 직원 가사하라는 오전 8시 40분에 출근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보냈지만, 사전에 당첨 유무를 아는건 불가능해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 수도 없고요.
다카기 경부는 연하장에 소인이 없는 점(연하장은 12월 22일까지 접수분은 1월 1일 도착 보장이라 소인이 찍히지 않음)에 주목해서, 빌견된 당첨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사건 당시에 가지고 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당첨 연하장을 가사하라가 미리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증권회사가 직원에게 연속 번호의 연하장 500장을 주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연하장 추첨에서 최하등 우표는 100장당 반드시 3장 당첨되므로, 가사하라는 보내지 않고 남겨 둔 100장의 연속 번호 연하장만 있어도 반드시 당첨 엽서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즉 가사하라는 당첨 번호 발표 후 보관 중이던 연하장 중 당첨된 것을 고른 뒤, 사건 당일 피해자 집에 들고 가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집에 있던 자기가 보낸 진짜 연하장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상품은 따로 교환해서 시체를 발견하러 갔을 때 몰래 피해자 주머니에 넣었고요.

이렇게 일본의 연하장 풍습과 증권 회사의 전통 등을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트릭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지만, 가사하라가 원래 피해자에게 보냈던 연하장이 드러나면서 범행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피해자와 가사하라의 육체 관계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진짜 연하장이 발견되는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도 충분한 수준입니다.

"검은 테두리의 사진"은 오사카로 출장간 범인이 전날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방송이 오사카에서는 그날 방송된다는걸 알고난 뒤, 전날 찍었던 사진을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사실 트릭이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우연과 운이 지나치게 많이 좌우되는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같은 방송이라도 방송하는 채널이 다른데,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체포한다는 결말도 설득력이 약했고요. 앞서 범인 오사와는 '화면만 사진에 담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채널 다이얼이 어떻게 보였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호텔 종업원이 오사와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다고 증언했다니, 사진 따위는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줄 수도 있으니, 애초에 그리 탄탄한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TV를 찍은 사진을 알리바이에 사용한다는 설정만큼은 독특해서 눈길이 갑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 방식인 덕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을 잘 반영한건 분명합니다.

"죽은 자의 손바닥"에서는 셀로판지를 이용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손바닥 도장을 찍는 트릭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두 편 보다는 별로에요.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의 모든 측면에서 기대 이하거든요. 경찰의 추리는 근거없는 첫인상에 기반하고 있고, 범행 방법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위의 세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내용도 그냥저냥합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잔혹한 여로"는 일종의 범죄 반전물입니다. 진범이 드러난 뒤 진범마저 개미지옥에 빠진다는 마지막 부분은 꽤 그럴 듯 합니다. "50퍼센트의 행복"은 오래 전 친자 감정 방식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볼만했던 치정 드라마이고요.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너무 뻔합니다. 결말도 안이하고요.

"고독한 증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떠오르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가사이 나오미의 증언을 회사측, 유족측이 제각각 제멋대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지요.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나오미의 고뇌를 심도깊게 다루지도 못했고, 밝혀진 진상 - 폭탄 테러 - 도 설득력이 약하며, 가사이 나오미가 결국 자고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결말도 영 아닌 탓에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살의의 축제"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돈으로 진범을 날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가 되는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가족마저도 영원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당시 범인과 유족 측 인물들이 당시 상황을 복잡하게 밝히는 결말은 꽤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걸 읽은 바람에 다소 김이 빠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만, 잘 모르는 작가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공포의 연하장"만큼은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2026/02/20

꽃다발은 독 - 오리가미 교야 / 이현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세는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이었던 마카베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기타미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소장 대리인 기타미는 기세의 중학교 선배였다. 마카베가 의뢰를 망설여서 기세는 직접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를 통해 협박은 마카베가 저질렀다는 4년 전 강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났다. 마카베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마카베는 모든 걸 잃고 학교마저 그만둔 채 지금에 이르렀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분량이 비교적 간결한 편이라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마카베에게 익명의 협박장이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협박은 4년 전 그가 저질렀다는 강간 사건과 관련되었고, 협박범은 당시 피해자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마카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도 그가 누명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기타미의 조사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마카베는 억울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이렇게 '원죄(엔자이)'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사회파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뒤이은 전개는 마카베가 정말 결백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을 싹트게 하여 흥미롭습니다. 마카베의 모친도 그의 무죄를 믿지 않고, 마카베 가족이 왜 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 - DNA 검출 -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기세를 통해 소개된 마카베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서, 독자로서는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뒤집어 버리는 덕분입니다. 우선, 4년 전 사건은 피해자였던 나가노 가나미의 자작극이었습니다. 마카베에게 푹 빠진 나머지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성공해서 마카베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박장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의 아버지 나가노가 마카베를 돕기 위해서 보냈던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자연스럽게 믿어온 전제가 뒤집히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 반전이 결혼식 직전의 마카베에게 진상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로 이어지는 결말도 충분히 흥미롭고요. 

그리고 반전은 협박장이 두 종류 - 강경한 경고와 정중한 문체 - 였다는 단서로 뒷받침되는데 이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기타미와 기세는 강경한 경고는 마카베에게 보냈고, 가나미가 받아볼 수 있는 협박장은 정중한 문체로 보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나가노는 처음에 가나미에게 강경한 경고가 전달되도록 협박장을 보냈습니다. 부부의 이름으로 동거 중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내가 우편함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는 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경고가 효과를 보지 못해서, 마카베에게 정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은 물론 독자까지 공정하게 제공한 단서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했다는게 아주 좋았어요.
가나미가 마카베를 옭아매기 위해 벌였던 몇 가지 장치 - 당시 마카베가 연인과 시간을 보냈던 러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DNA를 손에 넣었다는 등 - 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요.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기타미가 벌이는 조사의 상세함도 최고 수준입니다. 주로 탐문과 관계자 면담이 중심이지만, 기타미는 피해자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카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보를 캐 내기까지 하는데 이는 법대생 기세의 입을 빌어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이라고 설명되거든요. 그야말로 일반 '탐정'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를 그려낸 느낌이에요.
개인이 받은 '협박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재를 다룬 점도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 역시 일개 탐정이 해결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죄일테니까요.

그러나 마카베가 받는 협박의 원인이 4년 전 사건일 수밖에 없는 탓에 협박범이 그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가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길어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합니다.  
아울러 중학생 시절부터 탐정으로 활약해 왔다는 기타미의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저해합니다. 굳이 필요했던 설정은 아니었어요. 기세와 기타미의 1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불필요해 보였고요. 

그래도 반전을 중심에 둔 일상계 범죄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26/02/14

진짜 도쿄 맛집을 알려줄게요 - 네모 : 별점 2.5점

일본 현지에 거주하는 저자 네모가 도쿄의 로컬 맛집을 직접 소개하는 가이드북입니다. 조만간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유명 체인이나 후기 위주의 맛집이 아니라, 실제 현지인이 일상 속에서 방문하는 식당과 요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더군요. 

책은 음식 종류를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돈부리, 라멘, 소바와 우동 등 면 요리, 고기와 생선 요리는 물론, 일본식 가정 요리와 양식, 카레, 베이커리, 디저트, 편의점 음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음식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일본 현지인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메뉴들 소개도 인상적입니다. 닭고기 사시미 스테이크나 멸치 육수 츠케멘, 낫토 소바, 토로로, 각종 후라이 요리처럼요.
또 소개된 식당들 대부분이 관광객들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대라는 점도 좋았어요. 각 식당의 대표 메뉴, 가격, 위치, 영업 시간, 휴일 등 기본 정보 역시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요리를 맛있게 먹는 팁은 정말 꼭 참고할만 합니다. 

츠케멘은 히가시이케부쿠로 다이쇼켄에서 개발한 메뉴로 원래는 가게 영업이 끝난 후 직원 식사용으로 남은 면에 라멘 국물을 찍어 먹던게 시작이다, 2000년대 중반에 대유행을 한게 진한 국물에 우동만큼 굵은 면을 찍어 먹는 스타일 츠케멘이다, 가마타마 우동은 가마아게 우동의 일종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동에 날달걀을 얹은 메뉴이다, 이나니와 우동은 1600년대 아키타현 영주 가문에서 먹었던 음식이며 냉우동으로 츠유에 찍어먹는 스타일이다와 같이 각 요리들에 대해서 짤막하게라도 소개를 덧붙여 주어서 일본 음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정보와 함께 요리를 워낙에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어서 꼭 방문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래 가게들은 구글 맵에 저장해 두었지요. 한두 군데라도 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웨이팅이 꽤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네요.

  • 텐동 덴후쿠
  • 카츠동 엔라쿠
  • 토지나이 카츠동 즈이초
  • 소유라멘 키라쿠
  • 멸치 육수 츠케멘 미야모토
  • 이타소바 카오리야
  • 낫토 소바 바쿠잔보
  • 붓카케우동 오니얀마
  • 가마타마 우동 마루카
  • 야키니쿠 잠보
  • 야키니쿠와 곱창 호르몬 마사루
  • 우설 규탄 아라
  • 모츠니코미 아부쿠마테이
  • 아지후라이 아오키 쇼쿠도
  • 카키후라이 타라라
  • 크로캉 쇼콜라 365日
  • 철판 프렌치 토스트 빵토 에스프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우선 양식이나 카레는, 굳이 일본에서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물론 일본에서의 맛은 다를 수 있고, 이런 요리들 애호가도 있겠지만 보통의 여행자 입장에서는 굳이 시간과 동선을 들여 방문할 정도의 메뉴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도판의 품질도 그리 뛰어나지 않으며, 특히 지도가 아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도 큰 단점입니다. 특정 지역별로 맛집을 묶어 ‘아침–점심–저녁’ 코스를 추천해주는 구성이 있었다면 활용도가 훨씬 높았을 텐데 말이지요. 가격 때문이겠지만 지나치게 런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점도 아쉽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참고해 볼 만한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합니다.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2/08

십각관의 살인 1~2 - 키요하라 히로 (아야츠지 유키토 원작) : 별점 2.5점

이번 주는 "십각관의 살인"으로 꽉 찬 한 주네요. 결국 만화 버전까지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마침 리디 북스에서 제공하고 있더라고요.
원작과 거의 똑같은 전개인데, 만화만의 각색 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 가와미나미(카와미나미)가 여자로 바뀐 점
  • 치오리가 술을 먹다가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과 크루즈 여행 중 사고사 했다는 점
  • 마지막 장면에서 엘러리가 밴(반)에게 속는게 아니라 진범을 밝히고 죽는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치오리를 사고사로 만든건 괜찮은 각색이었어요. 치오리만 구명 조끼가 없는걸 알게된 반이 치오리는 사고로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에게 구명 조끼를 빼앗겨 죽었다!고 여기고 복수를 펼친다는건 원작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있는 동기였으니까요. "소년 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 사건"과 똑같은 동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른 건 없습니다. 핵심 트릭인 반의 정체는 모리스였다!는 똑같은 탓입니다. 사실 궁금했던건 모리스가 반이라는걸 어떻게 숨기면서 전개할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냥 헤어스타일만 다르게 - 모리스는 단정하게 묶고, 반은 대충 풀어헤치는 스타일 - 묘사할 뿐입니다. 보다 정교한 만화적인 장치가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작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순정 만화체라는건 작풍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작품의 주인공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십각관에 대한 묘사가 그닥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그래도 긴 장편을 무리없이 만화화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캐릭터들도 대체로 원작과 부합하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하게 읽을 만 합니다.

2026/02/07

Chat GPT가 그린 시마다 기요시 (십각관의 살인)

"탐정 사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고 혹평을 남겼었지만, 탐정들에 대한 일러스트만큼은 좋았습니다. 붓 하나로 그려낸, 음영을 극대화한 스타일인데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아래와 같이 말이지요.

하지만 소개된 모든 탐정들의 일러스트가 제공되지 않아서 다소 아쉬웠었는데, 이번에 "십각관의 살인"을 다시 읽어본걸 계기로, 탐정 사전에는 실려있지만 일러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던 탐정 시마다 기요시의 일러스트를 탐정 사전 스타일로 그려 보았습니다. Chat GPT에게 스타일을 학습시켜서요.

어떤가요? 다소 허당에 가벼운 듯한 느낌을 전해 주었던 작품 속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정도면 대체로의 인상과 원했던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작 중 첫 인상 묘사가 "음울하고 성격이 까다로워 보인다"이기도 하니까요. 아래는 만화 버젼의 시마디 기요시인데, 만화 버젼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물로 보이네요.

다른 탐정들도 시간나면 한 번 시도해 봐야 겠습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

2026/01/31

아사토호 - 니이나 사토시 / 김진아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의 쌍둥이 동생 아오바가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 교수 후지에다가 실종되었고, 교수를 찾던 친구 아즈사도 자살했다. 다른 실종 사건이 여럿 있었으며, 이 모든 사건은 '아사토호'라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나쓰히는 다시 재회한 아키토와 함께 '아사토호'의 정체에 대해 찾아 나섰다. 이 모든건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천과 관련이 있었다...

신예 작가 니이나 사토시의 장편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지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아오바가 신비한 천에 의해 사라진 뒤, 둘 말고는 아무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교수 후지에다의 실종과 교수를 찾던 아즈사의 기묘한 자살, 이 모든 것과 얽힌 책 '아사토호'에 관련된 수수께끼가 이어지는데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나쓰히와 아키토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아사토호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합니다. 아사토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마쓰무라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마쓰무라의 산장 위치를 추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키토는 기록의 증기 기관차에 탔던 시간과 버스를 탄 거리를 토대로 대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장소에서 결국 기요하라 병원까지 이어지는 단서들을 수집해 내어 진상에 도달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사토호'에 대한 상세한 설정들도 굉장히 설득력 높습니다. 저자가 실제로 문학사 전공인 덕분이겠지요. 정말로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실감납니다.

추리적으로는 그 외에도 괜찮은 부분이 제법 많아요. 아키토가 영매사로서 선보이는 짤막한 에피소드처럼요. 일종의 콜드 리딩, 사전 답사와 의뢰인의 현황—신혼부부가 굳이 교외에 있는 단독 주택을 산 이유는?—을 토대로 추리를 통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지요.

호러 장르물로서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아즈사가 남긴 논문이 유서처럼 이어지는 장면이라던가, 후지에다 교수의 아내 미나미의 등장, 그리고 나쓰히가 사라지고 아오바가 나타난 시점에서 '아사토호'라는 책이 고전 걸작으로 널리 퍼졌고 결말까지 달라진 - 원래는 온나니노미야가 추녀였다는 한심한 결말이었는데, 아오바처럼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다는 결말로 -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부분 등은 꽤 섬찟했습니다.

모든 건 앞뒤가 딱 맞게 말이 되는 패턴이고,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히의 생각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진상도 잘 풀어냈습니다. 단순 괴기현상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고 말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해요. 나쓰히는 아오바와 아키토의 환상 속 존재였다는 진상과 이에 따른 시점 변화도 적절했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이, 천을 함께 본 사람들이 원하고 빠져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키토가 일으킨 사고로 크게 다쳐 흉터가 생긴 아오바가 상처 없는 나쓰히로 거듭난 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오바에 대해 나쓰히와 아키토가 이상한 기억을 공유하고, 새롭게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즈사가 원한 건 연구자로서의 성공이었는데, 천이 심어준 건 좌절감이었고, 그녀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원했던 후지에다 교수를 차지한 미나미 이야기뿐입니다.

천을 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종의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서 하나의 우주에 천을 본 사람들이 여럿 얽힌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개입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니까요. '천'이 만든 이야기에서 '천'의 진상을 밝히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요. 기껏 꿈 속에 데리고 왔는데, 이게 꿈이라는걸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의 정체가 밝혀진 뒤의 분량은 많이 길고 애매했습니다. 아오바가 천과 일체화되어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는 장면이 특히 길었어요. 감정 과잉이라 여겨지기도 했고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정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두사"처럼 환상은 환상처럼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한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6/01/30

세계사 만물 사전 - 헤이본샤 편집부 / 남지연 : 별점 1.5점

AK Trivia Book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도감형 사전이지요. 제목 그대로 세계사와 관련된 각종 사물과 개념을 짧은 설명과 도판으로 소개해 줍니다. 

하나의 주제를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매우 짧은 항목들이 이어지는 구성이라 부담 없이 넘겨보기 좋습니다. 한 항목이 대개 도판 하나와 그에 덧붙여진 설명 정도로 끝나는 덕분입니다.
다른 사전이나 도감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소재들이 제법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특히 바다와 선박 관련 정보가 비교적 풍부한 편으로, 범선의 구조를 보여주는 도판이나 돛을 포함한 요트의 상세한 구성 설명은 꽤 볼만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만화 “해왕기”를 볼 때 참고삼아 보아도 좋겠더라고요.
말과 수레, 썰매에 대한 설명도 충실합니다. 특히 썰매를 도판과 함께 체계적으로 소개한게 눈에 띕니다. 여기에 더해 자물쇠와 열쇠, 촛대, 샹들리에처럼 일상적인 소품들의 상세한 설명도 좋고요. 특정 시기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 유용한 정보일 테지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깊이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항목이 도판 하나에 짧은 설명으로 끝나며, 배경이나 역사적 맥락 없이 현상만 나열하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무엇을 왜 그렇게 쓰게 되었는지, 어떤 흐름 속에서 발전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차 구성도 아쉽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분류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국가와 전쟁에서 바다, 범선, 기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기구와 항공기, 말과 수레, 썰매로의 흐름은 그나마 이해가 되는데 이후에 등장하는 농업과 농민, 의상, 민족, 속옷, 우산, 신발 등은 맥락도 불분명하고 주제 간 레벨 차이도 큽니다. 한 책 안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축과 유적, 신화와 신을 다룬 부분은 도판이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고, 설명 역시 관련 전문 서적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서 실망스럽습니다. 굳이 이 책에서 다뤄야 했을 영역이 아니에요. 무기들도 마찬가지고요. 

도판도 수가 많고 성의가 느껴지며 하나의 일관된 일러스트로 제공된다는건 좋은데, 인쇄 문제인지 전체적으로 품질이 썩 좋지 못합니다. 이는 도감이라는 책의 정체성을 미루어 볼 때, 최악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AK Trivia Book 중에서도 최악 중 하나에요. 추천할만한 책은 아닙니다. 

2026/01/25

명탐정 코난 : 17년 전의 진상 (2025) - 야마모토 야스이치로, 카마나카 노부하루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티빙에 업로드되었길래, 작년 말에 기말고사가 끝난 딸과 오랜만에 감상한 코난 극장판입니다. 리뷰가 많이 늦었네요. 정확히 말하면 해당 내용의 TV 시리즈 총집편입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현재 벌어진 체스 대회 살인 사건과 17년 전에 있었던 아만다 휴즈와 하네다 코지 살인 사건이 이어지며 전개됩니다. 현재 체스 대회에 참가했던 쿠로다 관리관이 17년 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설정이지요.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추리적으로 완성도가 치명적으로 낮습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에요. 우선 체스 대회 살인 사건은 ‘다이잉 메시지’가 핵심 단서로 등장하는데, 피해자가 죽기 전에 굳이 이런 암호 같은 메시지를 만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범인의 이름을 쓰면 되니까요. 트릭을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범인이 잔을 깨는 척 자작극을 벌인 트릭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네덜란드의 눈물’이라는 일종의 유리 덩어리를 활용해 잔을 깨뜨렸다는 트릭인데, 번거롭고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한 손으로 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네덜란드의 눈물 끝부분을 부러뜨릴 만년필을 사용하는 모습도 어색할 테고요. 이럴 바엔 잔 깨지는 소리를 녹음해 틀어놓은 뒤 컵을 떨어뜨려 깨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원작 이야기를 읽지 않아서 왜 검은 조직과 럼이 아만다를 살해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독약이 완벽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조직원이 호텔에 침투해 보디가드들을 제압했다면 굳이 독을 사용할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괜히 다이잉 메시지를 남길 시간만 준 셈이니까요.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독약 설정도 유치했고, 다이잉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도 유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리고 17년 전 당시 현장에서 도주했던 생존자, 아만다의 보디가드 아사카가 현재 소년 탐정단의 부(副)담임인 루미 선생님이라는 설정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초반부터 ‘수상하다’는 분위기를 깔고 가서 대단한 반전도 없었고, 코바야시 선생님을 죽을 지경으로 만들면서까지 검은 조직을 노렸지만 결국 헛수고로 끝난 결말도 황당했습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더군요. 키안티 등의 저격을 코바야시 선생 일행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도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긴 시리즈를 끌고 가는 중간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졸작입니다. 등장인물의 매력도 별 볼 일 없고, 추리와 트릭은 엉망이며, 액션은 부족하고 작화 역시 수준 이하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총집편 "흑철의 미스터리 트레인"은 이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는데 아쉽네요. 앞으로 총집편은 웬만하면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2026/01/24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 (2025~2026) : 별점 3점

"흑백요리사 시즌 2"는 지금은 흔해빠진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다른 요리 서바이벌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 이미 성공한 셰프들과 신인들을 대결시킨다는 대결 구도를 잘 살려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워낙 쟁쟁한 셰프들이 백수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참가자는 단연 후덕죽 셰프입니다. 50년이 넘는 요리 경력을 지닌 요리계의 거물이 자신의 긴 이력에 기대지 않고, 거의 자식뻘에 가까운 후배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연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큰 감동이었습니다. 결승 직전까지 가는 엄청난 실력이 함께 한 덕분이지요. 특히 당근 요리 지옥에서 요리괴물과 맞붙은 대결은 무협지의 비무대회에서 원로 고수와 신예 후기지수가 맞붙는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긴장감과 재미가 넘쳤습니다. 그날의 당근 짜장면은 단연 최고의 한 수였고요. 만약 그게 결승 요리였다면, 요리괴물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애청하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친숙해진 셰프들의 출장도 반가왔습니다. 손정원 셰프야 백수저로 등장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정호영 셰프와 샘 킴 셰프는 솔직히 초반에는 애매하거나 웃음 후보가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 경연에서 예상과 달리 끝까지 잘 버텨주어서 좋았어요. 특히 정호영 셰프는 탑 4에 오르는 성적으로 실력을 분명히 입증했지요. 대진운이 따른 측면도 있겠지만, 이런 경연에서 운 역시 실력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결과라 생각됩니다.

또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나치게 캐릭터를 과시하거나 센 척에 집중하는 흑수저 요리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요리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매너 있게 경연에 임하고 있어, 시청자로서 불편함 없이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시즌 1에서 중간에 하차했던게 이상한 캐릭터 만들기에 의한 불편함 때문이었는데, 그런걸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대결도 꽤 잘 짜여 있습니다. 개인전과 팀전의 배치, 그리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요리 천국과 요리 지옥이라는 대비되는 무대는 흐름을 단조롭지 않게 만듭니다. 특히 요리 지옥에서 진행된 당근을 활용한 30분 요리 대결은 이번 시즌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라 할 만합니다. 제한된 재료인 당근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발상과 요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결과물의 완성도 역시 납득이 갔습니다.

결승으로 이어지는 서사도 인상 깊었습니다. ‘나를 위한 요리’라는 결승전 주제는 경쟁의 끝에서 요리사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들었고, 최강록 셰프의 우승은 단순한 실력 경쟁을 넘어 감정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감동과 재미를 모두 잡은,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시즌 1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백수저 참가자들 사이의 급 차이는 여전히 큽니다. 각종 대회 우승자, 미슐렝 스타 셰프와 단순히 방송 출연 경험이 많은 스타 셰프를 같은 선상에서 경쟁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참가자 선별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재 스님은 사찰 요리의 대가이지만 육류나 오신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제약을 안고 있고, 고기굽기 연구소장의 경우는 BBQ에 특화된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문 셰프라고 보기 애매한 참가자, 혹은 특정 장르에만 지나치게 특화된 참가자들은 애초에 어느 정도 걸러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괴물의 캐릭터 만들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굳이 그렇게까지 센 척하는 연출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대결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흑백 팀전이 가장 큰 문제에요. 여기서 패한 팀은 전원이 탈락한다는 규칙인데, 흑수저들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으니까요. 패자 부활전으로 두 명을 살려주기는 했지만, 그 중 한 명이 누가 봐도 결승까지 올라갈 요리괴물이라서 긴장감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팀을 섞거나, 최소한 두 팀 씩 나눠 경쟁하게 했다면 긴장감과 공정성을 모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심사위원 평가 역시 쉽게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백종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진 탓이 가장 크지만, 안성재 셰프의 심사 또한 일관되게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특정 분야에 대해 가혹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심사위원 수를 늘려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었더라면 더 좋았을거에요.

그래도 잘 짜인 미션과 인상적인 참가자, 그리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결말을 보여준 재미있는 시리즈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요리 서바이벌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2026/01/23

수상탑의 살인 - 김영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년간의 연구 끝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지구환경과학부 전 교수 박종호는 거액의 돈을 들여 동해 바다에 스스로 떠 있일 수 있는 거대 건물인 수상탑을 만들었다. 

종호는 특별히 선정한 몇몇 사람들을 수상탑으로 초대했는데, 초대한 당일 수상탑에 폭우와 강풍이 덮쳤고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유일한 탈출 수단인 배마저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탑 정원 벤치에서 무언가에 찔려 죽은 종호의 딸 가온의 사체가, 종호의 잠긴 방 안에서 종호가 목이 베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건 해결을 위해 마침 지도 교수와 함께 수상탑에 방문한 이론입자물리학 전공 대학원생 한규현이 탐정으로 나서는데...

"법의 체면"에 이어 한국 추리 소설은 올해 벌써 두 번째네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제41회 한국추리문학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국내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 미스터리를 정면으로 내세우는게 특징입니다. 특히 트릭은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밀실 트릭과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플랫폼과 밸러스트 등을 이용해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기묘한 구조의 수상탑 설정과 잘 결합되어 있거든요. 이 설정과 수상탑 방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단단한 문, 기묘한 발코니 여닫이 구조가 트릭의 핵심이고요. 

박종호 사건에서 범인 가온은 범행 당시 수상탑을 바다 밑으로 가라 앉힌 뒤, 자기 방에서 5층 종호 방 발코니로 떠 갔습니다. 종호가 놀라 발코니로 나왔을 때 종호의 목을 칼로 그어 살해했고요. 한규현 등이 현장 조사를 했을 때 발코니 문은 열려 있었지만, 5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서 밀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1층과 다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종호의 애인 승희 살인 사건은 더 대담합니다. 가온은 약간의 조작(화약 폭발?)으로 승희 방문이 열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승희는 욕실 비상구로 탈출하려고 했는데, 위층인 3층 내부는 탑이 가라앉은 탓에 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상구를 열자, 4m의 물기둥이 승희를 직격해 사망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약간의 특수 설정을 활용한 본격물적인 트릭은 꽤 괜찮습니다. 추리를 위해 필요한 정보와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수상탑도 본격물 무대로는 완벽합니다. 외부와 단절된 클로즈드 써클이며 그 자체가 트릭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요. 이런 설정은 그간 한국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부분이라서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소설로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개가 느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약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한규현은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너무 평범합니다. 심약하고 수동적인 성격이고, 유머 감각도 전무하다시피해서 이야기를 이끌 만한 매력이 없어요. 독특한 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 하나 쯤은 필요했지만, 그런 역할을 해주는 캐릭터는 끝내 등장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도 과도하게 많습니다. 석승준 교수, 대학원생 박규리, 음모론자 태용제는 이야기에서 실질적인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사건 해결에도, 긴장감 조성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고요. 분량만 늘리는 인물들로 빼는게 더 나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동기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자신이 후원하던 아이가 아버지의 실험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는다?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종호와 승희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차별했다는 설정도 앞부분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동기는 뒤늦게 억지로 덧붙여진 느낌입니다.

그리고 트릭은 나쁘지 않은데, 세세한 부분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우선 승희 사건은 가온이 사망한 뒤 일어났는데 누가, 어떻게 수상탑을 침수시켜 트릭에 사용될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물론 가온이 종호 사건을 일으킬 때 3층도 침수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경우 다음날 범행이 발각될 우려가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범인을 찾기 위해 탑 전체를 수색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종호가 수상탑이 아예 가라앉을걸 예상하고 수상탑의 발코니와 문을 침수에 대비하는 형태로 만들었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수상탑이 가라앉은 건 가온이 완전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억지로 만든 상황입니다.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첫 방문한 한규현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설비를 갖출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거대 구조물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가 손쉽게 휴대폰 앱으로 가라앉히고, 폭탄으로 보트를 폭파시키고 단단한 문을 봉쇄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이에요.

무엇보다도 범인 가온이 종호 방에서 탈출하다가 청새치의 습격으로 죽었다는 진상은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니까요. 실제 사례를 좀 찾아보아도, 낚시 중이거나 배 위에서 잡은 청새치의 몸부림에 찔려 죽은 경우는 있어도 바다에서 공격받아 죽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불빛에 돌격한다는 습성도 없고요. 불가능 범죄를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에 불과합니다.
이후 가온의 시신이 부서진 수상탑의 정원 벤치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결과도 우연입니다. 시체가 떠내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트릭을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한건 큰 감점 요소입니다.

정보 제공이 지나치게 공정한 탓에 독자가 진상을 추리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탑'의 기묘한 설정이 트릭에 사용되었으리라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과 지적인 쾌감을 오래 느끼기는 힘듭니다. "유리탑의 살인"처럼 나름의 반전이라도 선보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국 추리 소설로는 보기 드문 본격물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분량을 줄이고 밀도를 높였다면 훨씬 나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2026/01/18

파이어 펀치 1~8 - 후지모토 타츠키 : 별점 2점

"체인소맨"으로 인기 절정을 달리는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첫 장편 연재작입니다. 연재 당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작품이지요.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아그니, 그를 이용해 자신만의 영화를 만드려는. 아그니를 신으로 숭배하는 산, 아그니와 대척점에 서 있다가 그를 포용하게 되는 유다 등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으로 일종의 초인물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현 시점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물론 재생 능력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지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이는 벌을 받은 아그니가 복수를 다짐하는 초반부만큼은 대단합니다. 구세주가 고통을 잊고 현재의 안식을 찾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추종자들 때문에 다시금 고통으로 뛰어든다는 일종의 윤회, 종교적 세계관을 독특하게 풀어낸 것도 작가가 될성부를 떡잎이라는걸 느끼게 해 주고요.

그러나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잘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토키타와 함께 연극, 연기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야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탓이 큽니다. 아그니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려는게 목적인 토키타 자체는 독특해서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야기에서 겉돕니다. 완벽한 영화를 위해서 모든걸 통제하려는 흑막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재미와 흥미만을 위해 순간순간을 살아가려는 즉흥적인 모습만 보이니까요. 모든게 연기이고 연기가 중요하다는 그녀의 말과는 정 반대로, 본능에 충실한 삶을 이어갈 뿐입니다.
또 이 연기라는 설정도 문제입니다. 그냥 원래의 신, 구세주가 싸구려 B급 영화 이야기였다는 정도, 그리고 얼음의 마녀 따위는 없고 지구는 멸망해가는 중이다는 진상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아니면 차라리 복수를 위해 유다와 맞서 싸우는 평범한 이능력 배틀물로 끌고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작가가 이야기 전개를 위해 둔 무리수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얼음의 마녀 스랴죠. 굳이 그녀가 튀어나올 이유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비중도 변변찮고요.  막판에 작화가 볼썽사나울 정도로 무너지는 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압도적인 초반부는 볼 가치가 있지만, 끝까지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1/17

굿뉴스 (2025) - 변성현 : 별점 2.5점

일본 여객기가 테러조직 적군파에 의해 하이재킹되었다. 테러범들은 평양으로 향할걸 요구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중앙정보부장 박상현의 지시로 박상현의 수족 아무개와 관제사 서고명 중위가 활약하여 여객기를 김포 공항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김포를 평양으로 착각하게 만들 속셈이었지만, 라디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는걸 알아챈 테러범들이 속지 않자 대치가 시작되었고, 결국 시간 내 평양행이 결정되지 않으면 자폭하겠다는 테러범들의 최후 통첩이 전달되는데....

작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전용 한국 영화입니다. 별다른 사전 정보없이 감상하였습니다. 꽤 진지한 테러범과의 협상 중심의 영화일줄 알았는데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라서 의외였네요.

블랙 코미디에 어울리는 재기발랄한 연출이 눈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지점에서 말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화면을 그 설명에 잘 어울리는 상황에 맞춰서 가볍게 웃음을 끌어내는 방식이 꽤 자주 나옵니다. 일본 여객기 통신망을 북한보다 먼저 잡아내는게 핵심인 초반부 작전에서, 이를 서부극에서의 일대일 결투로 묘사하는 식으로요.
이런 연출을 비롯해서 전반적으로 한 번에 빵 터뜨리는 개그를 의도했다기 보다는, 피식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타율이 꽤 괜찮은 편입니다. 실제 '요도호 사건'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지만 코믹하게 변주한 각본도 나쁘지 않아요. 평양 공항으로 위장한 김포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안의 테러범들이 평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개' 등과 벌이는 상황들 - 공항 건물에서 테러범이 햄버거를 먹는 흑인을 보고 따지자 서고명 중위는 '소련인'이라고 대꾸하고, 비행기 기장은 푸시킨도 흑인이었다고 말하는 등 -이 대효적인 예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역의 류승범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뺀질대고 깐족거리는 톤을 유지하면서도, 웃기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잔인성과 권력의 냄새를 슬쩍 끼워 넣는 균형이 꽤 좋습니다. 유머러스한 악역이라는 말이 딱 맞는데, 과장되지 않게 리듬을 타는 방식이라 장면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능력있는 군인에서 출세에 눈이 먼 야망가, 거기서 다시 인질들 생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서고명 중위의 연기도 돋보였어요. 홍경이라는 처음 보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일본 테러리스트들, 비행사, 정부 고관 역할을 맡은 일본 배우들도 대체로 안정적입니다. 특히 "백야행"의 야마다 타카유키가 한국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건 개인적으로 꽤 뜻밖이었는데, 연기도 좋았습니다. 거의 유일한 인격자(?)지만, 막판에 흥분하는 장면에서 제대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가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잘 알겠더군요. 중반까지는 여객기를 김포 공항에 착륙시키기 위한 작전을 나름대로 치밀하게, 그렇지만 일본, 한국, 북한, 테러범들 모두 바보스러운 모습을 극대화하며 블랙 코미디를 잘 섞어서 그려내는데 그 이후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탓이 큽니다. 급작스럽게 인도주의자로 거듭난 서고명의 딜레마 - 출세냐, 인질들의 생명이냐! -를 그리는 건지, 각자의 이익과 유불리에만 골몰하는 인간 군상을 다루는 사회 풍자물인지(누가 봐도 윤석렬-김건희 부부가 떠오르는 영부인의 등장까지 포함해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비행기가 평양으로 간 뒤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마무리되었으면 그래도 깔끔했을 텐데, 이후의 내용은 완전히 군더더기처럼 느껴집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서고명 대위를 “완전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겠다” 같은 의도를 넣으려 한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생각되거든요. 이외에도 어색하게 메시지나 사상을 끼워 넣으려는 듯한 부분들은 모두 영 별로였습니다. 별로 웃기지도 않고요. 차라리 코미디로 계속 밀어 붙였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괜히 러닝타임만 잡아먹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아무개'의 존재입니다. 중앙정보부장이 뭐가 아쉬워서 신원도 불분명한 이런 인물을 국가간 외교가 얽히는 거대한 작전에 핵심 인물로 기용할까요? 북한 출신이라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럽고, 아무개가 뉴스까지 조작하며 진실을 대충 숨긴다 어쩌구 하는 메시지도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무언가의 전문가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배우 설경구의 연기도 별로였고요. 이 인물을 빼고, 중앙정보부장과 서고명 중위, 테러범들을 중심으로 하여 블랙 코미디 하이재킹 군상극으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기발랄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는 장점이지만, '아무개'라는 존재의 무리수와 후반부 사족, 그리고 전반적인 영화 톤을 제대로 잡지 못해 러닝타임이 늘어진건 단점입니다.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는 볼 만 합니다. 

2026/01/16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2점

영화까지 발표되었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작가 세스지의 신작입니다.

전작은 여러 형식의 기록들을 이어붙인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괴이 현상의 실감을 높였는데, 이번에는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따릅니다. 때문에 형식은 유사하지만 별로 실감나지는 않았어요. 여러 기록들도 작중에서는 모두 심령 현상이 일어난 해당 장소와 관련된 괴담을 '날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괴이한 심령 현상들도 복수라고 볼 수 있는, 일종의 '윤회'라는 식으로 풀어가는데 깔끔한 느낌을 주지는 못합니다. 등장인물들의 개별 서사도 이야기에 충분히 녹아들지 않고, 주어진 떡밥들 역시 모두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작가의 욕심이 지나쳐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섬찟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모로 전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상세한 괴담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태 오두막

유튜버 이케다와 팬북을 출간을 진행 중이던 고바야시는 재생 횟수가 많았던 동영상에 그럴싸한 괴담을 날조해서 꾸며 넣기로 했다. 출판사가 혹하게 만들이 위해서였다. 첫 번째 대상은 '변태 오두막' 촬영 영상으로, 산 속의 이른바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 도촬한 듯한 사진이 널려있는 기묘한 곳이었다.
날조에도 리얼리티가 필요하다는 고바야시의 주장으로, 이케다는 '변태 오두막'처럼 '인형'을 버린 폐가를 취재했던 유튜버와의 인터뷰를, 고바야시는 '변태 오두막' 속에서 발견된 사진에 대한 추가 취재를 진행하는데..

괴담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를 저주하려는 사람들이 저주의 대상 사진을 집어 넣는 곳이었습니다. 유키에는 불륜 상대의 아내 료코가 이혼해 주지 않아서 그녀를 저주하려고 오두막에 사진을 집어 넣었고, 이후 료코는 자살했습니다. 자살 후 유키에의 딸 유카에게 료코가 윤회하여 빙의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료코 사진이 '정화' 의식 때에는 부풀어 올라 있었다는 묘사는 확실히 섬찟했고요.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찾아낸 정보라고 설명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인터뷰,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드러내는건 전작과 비슷했지만 전작보다는 더 소설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진상을 유키에의 독백으로 마무리한건 문제입니다. 유카가 마지막에 말한건 맥락 상 "용서 못해"일텐데, 이를 표현하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이 진상은 맥락적으로도 이상해요. 변태 오두막의 저주가 통해 료코가 죽었다면, 료코의 영혼 역시 저주로 죽는게 맞지 않을까요?

유키에의 독백말고 그냥 그녀가 딸을 방치하여 죽였고,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후일담 기사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천국 병원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괴담 작가 호조가 '천국 병원'에 대한 괴담을 찾아냈다. 폐암으로 연명 치료 중이던 할머니가 그만 편해지기를 바랬다는 한 소설가의 고교 시절 추억담으로, 이후 소설가는 자살했다...

앞부분 소설가의 회고는 괴담이라고 보기 어려운 담담한 이야기로 실망스럽지만, 뒤이은 청년들이 병원에서 벌인 담력 시험 체험기는 오싹합니다. 천국 병원의 막혀있던 병동에서 '괴이'를 마주쳤다가 쫓기는 과정의 서스펜스, 그리고 일행을 쫓던 머리가 커지던 괴이가 들고 있던 친구 휴대전화 번호로 아직도 전화가 걸려 온다는 후일담까지 완벽했던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소설가의 회고를 틀어서 진상, 즉 소설가는 할머니가 미워했던 양녀였고, 소설가는 사신과 거래하여 할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아울러 병원이 '제로 자기장'에 위치해서 괴현상이 많이 발생한다는 설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이거나 설득력이 높지는 않지만, 단순 괴담에 그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니까요.

그러나 소설가가 할머니를 저주로 죽게 만든게 그리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건 문제입니다. 할머니는 나쁜 사람으로 그려진 탓에, 그냥 보면 정의구현으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소설가가 저주의 역풍을 맞은 듯한 현실은 별로 와 닿지 않네요.

어리석은 세 사람

등장인물들의 과거 - 이케다는 과거에 호감을 품었던 유코를 저주로 죽게 만들어서 유령을 쫓는 유튜버를 하게 되었다, 호조가 유령을 볼 수 있어서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다가 교생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등 -가 펼쳐집니다. 책 전체로 보면 징검다리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뒤에 이 과거가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그냥 이 부분만 놓고 보면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는,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윤회 러브 호텔

러브 호텔에 그려진 괴상한 벽화와 여러 소문에 대해 논의하는게 대부분인데, 대체로 굉장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마무리하는게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스토커 피해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죽은 여성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지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에 불과한데, 스스로 스토커 게이이치에게 뭔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묘사는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에요.

불확실한 괴이

앞서 날조를 위해 만들었던 이야기들 모두 고바야시의 음모였다는게 드러납니다. 유령을 믿지 않는 이케다가 유령에 홀리게 만드는게 목적이었지요. 이케다에게 뭔가 괴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책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세사람"처럼 각자의 사정과 과거가 펼쳐지는 징검다리 이야기입니다.

한낱 패밀리 레스토랑

이케다에게 달력 일정에 유코의 기일이 기입되었고, 기분 나쁜 장난 전화가 걸려왔고, 움직일리 없는 유튜브 동영상 속에 괴이한 여성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자주 보던 버튜버의 화면이 기이하게 바뀌는 등의 괴이 현상이 일어났다...

이케다의 괴이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앞서 선택되었던 괴담들 모두가 일종의 '윤회'를 다룬, 괴이가 다시 태어난다는 괴담이었다는게 설명되기 때문에, 책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부분이지요.

한낱 옛날 이야기

세 명 모두 누군가를 죽였었다, 그리고 죽였던 여자들이 유령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유령에 홀렸던 이케다가 신관인 호조 아버지의 도움으로 벗어나고, 책은 출간이 결정된다는 결말입니다. 앞서 그들이 각자 보았던 괴이들은 각자가 죽였던 피해자들이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윤회에 관련된 로쿠부 살해 괴담을 이방인의 피가 필요했다로 연결하는 아이디어만큼은 참신했는데 회수가 안 된 떡밥이 너무 많고 - 이케다는 유코를 죽이지 않았는데 무엇에 홀린건가? 호조의 교생 선생은 어떻게 죽었는가? 윤회는 모든 저주의 대상에 해당하는가? 등 -, 등장인물들의 일이 모두 잘 풀린다는 결말은 허무합니다. 최소한 고바야시는 이케다를 괴이에 홀리게 만들려는 악의가 있었던게 분명하니, 이 작자만큼은 벌을 받으면 했는데 말이지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2026/01/11

100m(2025) - 이와이사와 켄지 : 별점 2.5점

빠른 발로 반에서 인기가 많은 토가시 앞에, 항상 달리기만 하는 전학생 코미야가 나타났다. 토가시는 코미야의 재능을 알아보고 더 빨라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한동안 달리기를 피했던 토가시는 고등학교에서 다시 육상에 복귀해 전국 대회에 출전했지만, 그곳에서 다시 만난 코미야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성인이 된 토가시는 회사 소속 선수로 뛰다가, 슬럼프에 빠져 기록은 나오지 않는 중 부상을 입고나서야 처음으로 ‘왜 자신은 달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전 일본 육상대회 100미터 결승전에서, 다시 한 번 코미야와 같은 트랙 위에 서는데...

단거리 육상, 그중에서도 100미터라는 아주 짧은 거리를 통해 인물의 시간과 감정을 그려낸 독특한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실험적이면서도 개성 있는 연출입니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촬영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특히 비가 내리는 트랙 위에 선 선수들을 카메라가 패닝으로 훑는 장면은 엄청났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정말 대단하네요.
음악 활용도 좋고, 작화 역시 뛰어납니다. 손으로 그린 배경들은 여러 스타일로 변주되며, 상황에 맞게 잘 어우러집니다. 한 마디로 완성도 높은 잘 만든 애니메이션입니다.

이야기는 특별한건 없습니다. 대부분 성장기에 가까운 스포츠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만의 매력도 존재합니다. 명확한 성장을 보여주고, 교훈을 또렷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점입니다. 경기 결과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 장면들이 반복되고, 마지막 최종 결전마저도 같은 방식으로 끝맺거든요. "러프"에서의 마지막 장면 같은데,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진지한 성장기라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스토리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다는 명확한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토가시의 시점에서 보면, ‘달리는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가 초등학교 때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토가시가 부상과 나약함을 극복하고 달리기와 마주하는 일종의 인간 찬가로 보기도 어려워요. 부상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마지막 경기의 결과가 어땠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 탓입니다.
코미야의 시점으로 달리기밖에 없는 절박한 아이의 성장기로 보기에는, 코미야의 절박함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어요. 초반 이후에는 이미 완성된 강한 선수처럼 묘사되어 성장기의 느낌도 약하고요.
그렇다고 토가시와 코미야의 청춘을 그린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학창 시절의 비중이 너무 짧고, 토가시의 육상부 부활 이야기는 진부한 클리셰의 반복일 뿐입니다. 자이츠나 카이도 등 다른 선수들의 서사도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100미터를 누구보다 빨리 달리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된다"는 작품의 명제도 참 별로입니다. 그게 뭐든, 누구보다 우수하면 대접받는게 당연하니까요. 이걸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처럼 풀어놓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단점은 명확하지만, 결과물 자체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워낙 완성도가 높아 추천할 만 합니다.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애니메이션을 비교적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일 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야기 맥락보다는 시각적인 새로움을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6/01/10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2025) - 라이언 존슨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드 신부는 몬시뇰 윅스 신부가 지배하는 일단의 추종자들 중심의 성당 보좌로 부임했다. 그는 윅스 신부의 비정상적인 운영과 범죄에 가까운 행동에 분노를 쌓아가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  윅스 신부가 미사 중 밀실에서 살해당하자 범인으로 몰렸고, 유명한 탐정 브누아 블랑이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지만 윅스 신부의 부활 후 정원사 샘슨의 죽음, 의사 냇 박사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는데...

미국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인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 최신작입니다. 그런데 분위기와 접근 방식은 전작들과 꽤 다릅니다. 전작들은 브누아 블랑이 직접 휩쓸린 사건을 추리해 나간다면, 이번에는 주드 신부를 도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조력자일 뿐이라는 점에서요. 작품의 주인공은 주드 신부거든요. 비교적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던 전작들에 비해 종교와 신앙, 개인의 분노와 죄책감 등 묵직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도 차이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주 괜찮습니다. 고전 본격물 팬이라면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밀실 트릭이 펼져지는 덕분입니다.

게다가 정보 제공이 공정하다 못해 노골적입니다. 영화에서 존 딕슨 카의 “할로우 맨(국내 출간명 "세 개의 관")”에 등장하는 밀실 트릭 강좌가 직접 인용되기 때문입니다. 브누아 블랑은 장치 트릭 설명에서 멈추지만, 이 뒤에는 '시간차 트릭(살인이 발생한 시점과 발견된 시점이 다르다)'가 이어지는데 실제 범인은 이 트릭으로 범행을 저질렀거든요. 마사는 흉기인 칼 머리의 악마 장식과 동일한 장식을 윅스 신부 미사복 등에 미리 꿰메 두었습니다. 그리고 밀실로 향한 윅스 신부가 항상 마시는 술에 약을 탔고, 술을 마신 신부가 쓰러진 후 피 주머니를 터트려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냇 박사가 상태를 확인하는 척 하다가 악마 장식을 떼고 진짜 칼로 찔러 죽였던게 진상이지요.
이를 진범이 아니라 주드 신부로 혐의를 돌리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윅스 신부의 부활을 그린 불가능 범죄도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당연히 시체를 바뀌치기한 것이고(대역은 당연히 윅스 신부와 닮았고, 관을 만들고 나중에 죽은 샘슨이지요) 트릭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주드 신부가 신앙심과 개인적인 분노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서, 그가 보고 듣는 정보가 어느정도 왜곡되었다는걸 활용하여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그가 ‘부활한 몬시뇰을 자신이 죽였다'고 믿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정말 극적으로 잘 연출했어요.

한편으로는 8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보물 찾기도 병행되는데 이 역시 관객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유일한 단서인 ‘이브의 사과’를 분해한 뒤, 나중에 그게 일종의 '보석함'이었다는걸 드러내는 식으로요.

동기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마사는 성당을 지키기 위해 윅스를 죽였지만, 동시에 그가 부활한 것처럼 꾸며 성당을 되살리고자 했던 겁니다. 윅스 신부가 입을 열면 경력이 끝장날 위기에 빠진 냇 박사가 실행범으로 동참했고요. 그러나 냇은 8천만 달러짜리 보석 앞에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샘슨을 죽인 뒤, 마사까지 죽이려 했지만 되려 그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그리는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워낙 유명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시리즈답게 이번에도 배우들 캐스팅이 엄청 화려한데, 마사 역의 글렌 클로즈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평생 헌신했으나 내면에 분노를 품은 인물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표현해 냅니다. 주드 신부 역의 조쉬 오코너는 흔들리는 신앙과 불안한 정신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몬시뇰 윅스 역시 광기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보여주며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다른 배우들 연기도 다 좋아요.

그런데 너무 길다는 단점은 큽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조쉬 신부가 윅스 신부와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 여러가지 관계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탓입니다. 물론 인물들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윅스 신부가 추종자들을 마지막에 협박했더라도 경력을 잃을 위기에 빠진 냇 박사와 작가 리오 말고는 동기가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시몬이 실행범일리는 없고(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걸 보여주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지만), 베라 변호사는 아버지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서 동기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즉, 이런 인간관계는 관객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사족입니다.
신앙심과 개인적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드 신부의 딜레마 역시 흥미롭지만 이렇게 길게 풀어낼 정도로 재미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드 신부의 정신력이 너무 약하지 않나 싶은 생각만 들어요.

브누아 블랑의 매력도 잘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는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사의 자백을 유도하는데, 이는 정의 구현에 충실했던 그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는 추리 기계가 갑자기 따뜻한 남자로 돌변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마사가 용서와 구원의 이미지를 남긴 채 생을 마감하는 결말 역시 식상할 뿐 아니라, 끝까지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는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지막에 보석이 주드 신부가 만든 십자가 그리스도 상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 역시 뻔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는건 분명합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아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작보다는 훨씬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