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5/09/28

소스 코드(2011) - 던칸 존스 : 별점 2.5점

시카고행 열차 안에서 콜터 스티븐스 대위는 "션 패트리스"라는 남자의 몸안에서 눈을 떴다. 8분 후 열차는 폭발했고, 콜터는 어둡고 비좁은 캡슐 속에서 깨어났다. 지상 통제관 굿윈과 프로젝트 책임자 러틀리지는 그가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통해 션의 뇌파 잔상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제한 시간 8분 이내에 열차 폭발의 범인을 8분 안에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시카고를 향한 후속 대형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다.

콜터는 수없이 폭발로 인한 죽음과 소스 코드를 통한 귀환을 반복하며, 범인 후보를 줄여나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2차 테러를 선제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8분이 지나도 콜터는 소스 코드를 통해 복귀하지 않고 "션 패트리스"의 육체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콜터는 새로 가지친 시간선에서 굿윈에게 메시지를 보내 소스 코드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평행한 현실 분기를 생성함을 알려주었다.

군에서 개발한 실험 기술을 통해 사망자의 마지막 8분으로 진입해 폭탄 테러범을 찾아낸다는 타임 루프, 시간 여행, 멀티버스 설정의 SF 스릴러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흥행했던 작품인데 넷플릭스를 통해 이제서야 감상했습니다. 

타임 루프·시간여행·멀티버스 장르물은 흔해 빠졌지만, 군사용 ‘소스 코드’라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마법, 초능력이 주류였던 타임 루프 방법을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군에서 개발한 기술로 테러를 막기 위해 이용한다는 발상도 그럴듯 했고요.
또 이를 통해 정의되는 8분이라는 시간 제한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실패를 반복해가며 정답을 찾아내는건 다른 타임 루프물과 동일하지만, 8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엄청난 제약으로 작용하여 긴박함을 더해주거든요. 영화라는 매체에 잘 어울렸던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은 과거를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결말부에서 제시되는 해피 엔딩도 여운을 남깁니다. 콜터가 ‘션 패트리스’의 몸으로 평행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는건 예상 가능했지만, 죽을 뻔 했던 사람들과 즐기는 스탠딩 개그 쇼와 굿윈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콜터의 신체는 '잔해'만 남아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는건 확실한 단점이고, 핵심 설정인 ‘8분’이라는 시간 제약도 논리적으로 어설픕니다. 설명에 따르면 8분이 지나면 션의 의식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8분 뒤엔 반드시 죽는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원 시간선에서 션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데스티네이션"과 동일한 운명론적 설정이라면 크리스티나 역시 예외일 수 없는데 그녀는 살아남는 시간선이 있어서 모순이 생깁니다.
결말에서 콜터의 정신이 션의 육체에 남는 설정도 이상합니다. 소스 코드는 ‘덧씌움’이 될 수 없습니다. 8분이라는 찰나 동안만 임시로 의식을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되니까요. 만약 영원한 덧씌움이라면, 사고로 죽은 뒤 콜터에게 의식이 돌아온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션 패트리스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를 기용했음에도 액션이 별볼일 없고,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기차와 콜터의 캡슐 안에서 이루어지는 등 스케일이 작은 점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32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 탓이겠지만요.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 뻔한 전개, 헐거운 설정 등의 단점은 있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25/09/27

돈돈 다리, 떨어졌다 - 문고판 후기

어제 읽은 "돈돈 다리, 떨어졌다" 문고판의 아야츠지 유키토가 직접 쓴 후기입니다. 재미있는 내용이 제법 있어서, 이 부분만 ChatGPT로 번역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문고판 후기

『どんどん橋、落ちた』라는 이 작품집에는 사실 남다른 애착이 있습니다. 일반 단행본 판본이나 고단샤 노벨스판으로 읽어 주신 분들의 반응은 각자 달랐습니다. 가벼운 ‘범인 맞히기’ 단편집으로 시원하게 즐긴 분도 있었고, “바보 같다”라며 불쾌해한 분도 있었지요. 현대 본격 미스터리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판으로 무겁게 읽은 분도 있었고, 이번 문고판 해설을 써 주신 시노하라 미야코 씨처럼 “애잔한 미스터리”로 받아들이신 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읽든 독자의 자유이며, 한 번 손을 떠난 이상 작가가 “이렇게 읽어 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작품집에 실린 다섯 편 가운데 네 편(제1화부터 제5화)을 1998년 가을부터 1999년 여름에 걸쳐 잇달아 잡지에 발표하던 시절을 돌아보면, 제가 그 작품들을 꽤 절실한 마음으로 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절실한 마음”이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 ‘존재 방식’이 이대로 좋은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내 존재 방식은 이대로 괜찮은가? 결국 그 답은 제5화의 마지막에서 일단 제시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말끔히 매듭지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번 문고판이 이 작품집의 최종판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각 수록작에 대한 짧은 해설을 덧붙입니다.

「どんどん橋、落ちた」"돈돈 다리, 떨어졌다."
(초출 = 아유카와 데쓰야·시마다 소지 편 『ミステリーの愉しみ 第五巻 奇想の復活』 릿푸샤, 1992년 9월 10일 초판)

1991~92년에 걸쳐 아유카와 데쓰야·시마다 소지 두 분이 책임 편집한 앤솔로지 『ミステリーの愉しみ』 전 5권이 릿푸샤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그 최종권 『奇想の復活』은 띠지에 “헤이세이 본격의 기수”라 내세운 젊은 작가 19명의 신작을 모은 책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문장이나 인물 묘사보다 무엇보다 기상천외하고 전인미답의 발상을 담은 본격물을” 써 달라는 편자 시마다 씨의 요청에 응해 제가 쓴 작품이 이것입니다. 데뷔 이래 “인간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상투적인 말을 들으며 내심 질려 하던 차였지만,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애초의 원형은 1984년 여름, 교토대 추리소설연구회 합숙에서 선보인 ‘범인 맞히기’ 단편이었습니다. 기노사키 온천의 어느 여관 큰방에서 십수 명의 회원을 상대로 ‘문제편’을 낭독했을 때의 두근거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젊은 날의 아비코 다케마루 군과 노리즈키 린타로 군도 있었지요. 두 사람을 포함해 거의 모두가 속아 넘어가 주어 무척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진난만했던 때였습니다.

「ぼうぼう森、燃えた」"보우보우 숲, 불타다."
(초출 = 『小説現代メフィスト』 1998년 12월 증간호)

1992년에 「どんどん橋、落ちた」를 썼던 즈음에 떠올려 “언젠가 속편을 써 볼까” 하고 농담처럼 몇 해 동안 품고 있던 아이디어입니다. 제목도 처음부터 이대로 정해 두었지요. 게임 『ナイトメア・プロジェクト YAKATA』 관련 일을 간신히 마무리하고 본업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마음만 앞서 집필에 집중이 되지 않던 1998년 가을, 반쯤은 재활의 뜻도 담아 『메피스토』에 발표했습니다. 그만한 고생은 있었지만 의외로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다만 「どんどん橋」 때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의 ‘고생’이자 ‘즐거움’이었지요. 참고로 이 작품 속에 삽입된 ‘작중작’에는 블랙 유머와 여러 겹의 숨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알아차릴 독자는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フェラーリは見ていた」"페라리는 보고 있었다."
(초출 = 『小説現代メフィスト』 1999년 5월 증간호)

본서에서 유일하게 정식 ‘독자에의 도전장’이 들어 있지 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작가로서 저는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의외이지요?). 등장하는 ‘U야마 씨’, ‘K코 씨’, ‘A모토 군’은 모두 실재 인물입니다. 사건은 물론 완전한 허구이지만, ‘카사이 씨 댁 신짱’을 둘러싸고 작중에 “암시적”이니 “예견적”이니 하는 말이 오가는 대목에는 작은 원 네타가 깔려 있습니다. 굳이 밝히지 않는 편이 멋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신경 쓰이시는 분은 가사이 기요시의 『ミネルヴァの梟は黄昏に飛びたつか? ——探偵小説の再定義』(하야카와쇼보, 2001)을 참조하시길.

「伊園家の崩壊」"이소노 가의 붕괴"
(초출 = 『小説現代メフィスト』 1999년 9월 증간호)

중심 아이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지만, 설정이 설정인지라 선뜻 써서 발표할 결심이 서지 않았습니다. 전년에 우연히 고지마 미야코의 만화 『こども地獄』(분카샤, 1998)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등을 떠밀리듯 결심했습니다. 잡지 발표 당시에는 당사자인 고지마 씨께서 훌륭한 삽화를 그려 주셨고, 이번 문고화에서도 그 그림의 재수록을 생각했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자숙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문제작일지도 모릅니다. 본격 미스터리로서는 그렇지만, 다섯 편 중에서는 오히려 정통파에 가까운 편이 아닐까 합니다.

「意外な犯人」"의외의 범인"
(초출 = 『IN★POCKET』 1999년 9월호)

원본이나 노벨스판의 후기에 적었던 말을 반복합니다만, 작중에도 언급했듯 이 소설은 1994년 요미우리TV 심야 특집 『真冬の夜のミステリー』의 일부로 제작된, 제가 원안을 제공한 추리 드라마 「意外すぎる犯人」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극중극 부분에 배우 이토 세이코 씨가 등장하는 것은 드라마 그대로지만, 그 밖의 배우 이름은 가공으로 바꾸었습니다. 원안을 만들던 시점부터 언젠가 이 네타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설마 이런 형태, 이런 결말의 이야기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인생은 무엇이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고작 3년 전에 묶은 작품집임에도 어쩐지 이상할 만큼 숙연한 기분이 듭니다. 다섯 편 중 세 편에 등장하는 얄미운 젊은이에 대해서는 일단 이것으로 봉인…할 작정입니다만, 글쎄요.

현안인 『暗黒館の殺人』도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2년 반. 헉헉대며 숨이 차오르면서도 슬슬 7합목이 보이는가 싶은 데까지 진행했습니다. 『鳴風荘事件』 이래 무려 7년 만의 장편 『最後の記憶』을 근래에 간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1987년 『十角館の殺人』으로 데뷔한 지 딱 15년. 올가을이 저에게 큰 분기점인 것은 분명하고, 그런 시기에 이 『どんどん橋、落ちた』가 문고화되는 것은, 이것 또한 뭔가 의미심장한 인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도 슬쩍 언급했듯 이 책의 해설을 써 주신 시노하라 미야코 씨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홉 해 전 『海になりたい青』와 『満たされた月』 두 장의 앨범을 잇달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빛바래지 않았습니다. 노랫말처럼 엮인 “애잔한 해설”, 정말 고맙습니다.

2002년 9월
綾辻行人

2025/09/26

돈돈 다리, 떨어졌다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쓴 단편집으로,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독자에의 도전장' 삽입 작품으로 추천받았지만, 국내 번역 출간되지 않은 탓에 원서를 구해 읽었습니다. 수록작 중 표제작은 작년에 번역해서 소개해 드렸던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해서 완독은 좀 늦었네요.

특징이라면 앞서 말한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될 정도로 본격 추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어 '후더닛' 물로는 완벽한 수준이에요. 본격물답게 여러가지 트릭도 사용되며, 다섯 편의 작품을 하나의 연작처럼 묶기 위한 디테일들도 인상적입니다.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에 모두 '다케마루'가 사용된다는 점 처럼요.

그리고 작가가 조금 가벼운 마음을 쓴 팬 서비스용 작품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장난스러운 센스도 가미되어 있습니다. 주요 화자가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인데 건방진 후배 U군의 도전에 패배하는 등 스스로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고, 어떤 작품에서는 범인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이런 부분은 작가의 팬이라면 크게 반길 요소라 생각됩니다.

다섯 편 모두 이야기의 밀도나 묘사는 가벼운 편이며,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보다는 '후더닛'에 집중한 탓에 추리 퀴즈적인 느낌이 들게 만든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독자에게 정정당당하게 단서를 제시하고, 그로부터 추리를 유도하는 정통 본격 추리의 맛을 선명하게 전해주기 때문에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충분히 즐길 만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돈돈 다리 떨어졌다"

서술 트릭을 사용해 범인의 정체를 감추는데,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것 부터가 도무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요. 작가 후기를 보면 1984년 교토대 추리소설연구회 합숙에서 했던 ‘범인 맞히기’의 단편이 원형이라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탓이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지금 시점에서는 40년 전 트릭이니 어쩔 수 없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보우보우 숲 불탔다"

"돈돈 다리"와 유사한 서술 트릭이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이를 반대로 사용했습니다. 확실히 아이디어는 참신합니다.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돈돈 다리"도 작위적이었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도 심하니까요. 이런 점에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보다는 추리 퀴즈에 조금 더 가까워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페라리는 보고 있었다"

아야츠지 유키토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계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색작입니다. 실존하는 편집자 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걸 보면, 의뢰처와 웃고 떠들고 즐기기 위한 친목적인 성격의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실제 사건 추리는 억지스럽고, 그냥 이런 것도 가능하다 수준으로 끝나며 진상은 그야말로 '현실'이었다는 것도 일상계 느낌이고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만 '독자에의 도전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페라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역시 서술 트릭으로 교묘하게 정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인데, 단서는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소노 가의 붕괴"

밀실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이 사실은 자살 사건이었음을 밝혀내는 추리가 아주 그럴싸합니다. 흉기를 사라지게 만든 트릭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요.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 제공도 지극히 공정하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동기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수록작 중 최고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 본인의 '본격 이론'이 꽤 길게 펼쳐지는 것도 볼거리였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의외의 범인"

수년 전 아야츠지 유키토가 참여했던 TV 기획물의 대본이라는 설정으로, 드라마 대본 형식으로 쓰여 독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진범은 화면 내가 아닌 밖에 있는 카메라맨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지금 보기에 새롭지는 않지만 작품에는 잘 어울렸어요. 게다가 단순히 카메라맨이 범인이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카메라맨이 바로 아야츠지 유키토였다는 점이 밝혀지는 반전이 아주 신선했습니다. 이를 위한 정보 제공 역시 바람직했고요. 영상물로 실제로 만들어도 좋을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9/21

우리가 추락한 이유 - 데니스 루헤인 / 박미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아버지를 찾았지만, 그가 친부가 아님을 알게 된 레이철은 기자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그러나 아이티 대지진 취재 후 공황장애에 빠졌고, 결국 생방송 뉴스에서 대형 사고를 친 뒤 커리어를 망쳤다. 브라이언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낸 것도 잠시, 레이철은 브라이언의 거짓말을 여러가지 단서와 미행으로 알아낸 끝에 브라이언을 사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친구 케일럽과 7천만불짜리 거대한 사기극을 진행시켰던 참이었고, 사기 피해자 코터 맥칸은 하수인을 시켜 케일럽을 죽인 뒤 레이철의 목숨마저 노렸다. 레이철은 브라이언이 살아있다는걸 깨닫고 그의 은신처로 향하는데....

데니스 루헤인의 범죄 스릴러 장편입니다. 

가장 큰 강점은 루헤인의 탁월한 묘사력입니다. 보스턴의 거리를 살아 움직이는 듯 그려낸 세밀한 장면 묘사, 상실감과 공황장애 및 복수심 같은 복잡한 심리 상태를 소품과 비유를 통해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솜씨는 역시 대가답습니다. 레이철과 브라이언의 미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둘 사이 감정에 대한 묘사도 역시 일품이고요.

이야기도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초중반부 아버지를 찾는 과정, 중후반부 브라이언의 사기극이 이어지는 전개 모두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특히 출장 중이라던 남편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치는 순간부터 미행과 추적, 그리고 브라이언이 감추고 있던 거대한 사기극이 서서히 드러나며, 결국 브라이언의 이중생활이 레이철에게 발각되는 장면의 긴장감은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브라이언이 레이철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해 단서를 하나씩 던져준 이유도 놀랍습니다. 공황장애로 집 밖으로도 잘 나오지 못하는 레이철을 사기 이후 도주에 가담시키기 위해 억지로 집 밖으로 끌어낸 겁니다! 다른 작품에서는 보지 못했던 참신한 이유였어요. 이럴 바에야 약이라도 먹이고 잠든 상태에서 옮기는게 더 나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
사기극이 드러난 이후에도 레이철이 코터 맥칸의 하수인들에게 쫓기며 총격전으로 이어지는 절정부까지 숨 돌릴 틈 없는 서스펜스가 몰아쳐 독자를 끝까지 붙잡아 둡니다.

미스터리, 추리적 재미도 괜찮습니다. 레이철이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벌이는 여러가지 수사와 추리들도 그럴싸하고, 죽은채 했던 브라이언의 은신처가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방법 - 브라이언이 의도적으로 흘렸던 단서들을 통해 밝혀냄 - , 브라이언의 사기극의 정체, 레이철과 브라이언 부부와 코터 맥칸 하수인들과의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 모두 볼 만 합니다. 한 마디로 장르적 재미를 두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점도 존재합니다. 친부인 줄 알았던 제러미 이야기나 어머니 엘리자베스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치게 장황해 지루합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남편을 쏜 이유가 밝혀지기까지 수백 페이지가 소요되는데 지나치게 길어요. 또한 아버지를 찾는 과정은 레이철이 집요하게 매달린 것에 비해 실제 발견 방법은 직관과 우연에 기대고 있어서 허무합니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고요. 결말도 낙관적이지만 다소 열린 결말이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네요.

그래도 세밀한 묘사와 몰입감 넘치는 서스펜스를 즐기는 독자라면 충분히 빠져들 만 합니다. 늘어지는 부분들 때문에 별점은 2.5점이지만, 추천할 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영화화되면 좋겠습니다. 

2025/09/20

인사이드맨: 모스트 원티드 (2019) - M.J. 배셋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 연방 은행의 금괴를 노린 강도들이 대규모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협상 전문가인 FBI 브린과 NYPD 레미가 현장에 투입되어 강도단 리더 '수배자'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면서 강도단이 은행 지하에서 허드슨 강을 피해 뚫린 옛 터널을 통해 탈출하려고 한다는걸 알아냈지만, 브린도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그 뒤 강도단이 폭약을 잘못 쓴 탓에 터널이 붕괴하여 허드슨 강이 범람했고, 강도단은 일망타진 당하는데... 

나치가 남겼던 금괴를 노리는 강도단의 치밀한 계획이 핵심인 하이스트 무비 장르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계획은 나쁘지는 않습니다. 경찰은 터널이 존재한다는 정보에 혼란을 겪으며 범인들이 그 길로 도주할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는 관객을 포함한 모두를 속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거든요. 실제 계획은 금괴를 녹여 은행 내부의 황동 장식물로 위장한 뒤, 은행 폭파 이후 잔해를 수거하는 업체로 변장해 금괴를 회수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계획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별로입니다. 우선 협상 전문가로 등장하는 주인공 브린과 레미는 이야기에서 거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브린은 심지어 스스로 인질이 될 정도로 무력하기만 합니다. 협상이 도움을 준 부분도 전무해요. 사건의 해결은 모두 강도단의 리더 아리엘라의 계획이었을 뿐입니다. 
괜찮았다는 계획 역시 설득력은 약합니다. 강도단이 금괴를 녹여 황동 장식물로 위장하는데, 그 양이 상당한 탓입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된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처럼 하루 만에 완료된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아리엘라의 목적도 애매해서 이야기의 중심축이 흔들립니다. 오빠를 살리기 위한 금괴 탈취와 나치 잔당 디트리히의 체포라는 두 목적이 충돌하거든요. 결말을 보면 디트리히를 체포되게 만드는게 동기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금괴를 탈취하러 나설 필요도 없었지요. 오빠는 어차피 죽을테니까요. 이렇게 동기가 모호한 탓에 결과적으로 서사의 설득력은 떨어집니다.

바라시 남매 중 막내 에이바는 경찰에 터널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뜬금없이 등장하고 갑작스럽게 퇴장해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나치 금괴라는 설정 또한 새로움이 없고 식상했습니다. 액션 역시 협상가를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 구조 탓인지 밋밋하며, 긴장감 있는 전투나 추격전이 부족해 몰입을 방해했고요.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건, 제가 이 영화를 본 건 인터넷 상에서 접했던 추천 때문인데, 이 영화는 그 영화("인사이드맨")싸구려 후속편이었다는 겁니다. 감독과 주연 모두 바뀐 채 전작의 명성과 설정에 기댄 졸작입니다. 극장 개봉조차 못했는데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한없이 1점에 가까운 1.5점입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금괴를 빼내는 기발한 트릭 하나에 그치는데, 그나마도 억지스럽습니다. 감상에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는 재앙에 가까운 쓰레기입니다. 찾아보실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

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25/09/14

대우주시대 - 네이선 로웰 / 이수현 : 별점 2점

행성 네리스에 거주하던 이슈마엘 왕은 어머니의 사고사 이후 쫓겨날 위기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반의반' 몫 선원으로 우주 무역선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탑승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이슈마엘은 주방장 쿠키, 동료 핍을 비롯한 여러 선원들과 친해지며 자신을 발전시키며,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통해 한 몫 잡을 계획을 세워 진행시키는데...

네이선 로웰의 장편 SF 소설입니다. 특징이라면 우주선이 주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나 액션, 모험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무역’이라는 비즈니스적 요소를 도입한 덕분입니다. 특정 행성에서 싸게 구입한 물품을 다른 행성에서 비싸게 되파는 식의 간단한 구조이지만, 개인별 운송할 수 있는 무게 제한과 부족한 자금으로 단순 운송을 넘어서는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죽 세공이 뛰어난 행성에서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벨트를 사고, 벨트를 팔아 얻은 이익금으로 보석 세공이 특화된 행성에서 버클을 구입한 뒤 일부 남은 벨트에 결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식으로요. 물건을 팔기 위해 행성마다 있는 '벼룩 시장'에 출점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우주선 운영과 생활에 관한 세밀한 설정도 좋습니다. 일종의 인턴이라 할 수 있는 ‘반의반 몫’에서 시작해 한 사람 몫에 이르는 직급 체계, 4개의 직무군으로 구분되며 승급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정책, 선원들이 선박 운영으로 발생한 추가 이익을 규칙에 따라 분배하는 보수 체계, 남녀 구분이 없는 침실과 넓게 보장된 운동 시설 및 사우나 같은 선내 생활 등 생활 전반이 디테일하게 설계되어 있어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앞서 말했듯, 직급에 따라 철저히 관리되는 화물 무게 할당이라는 설정은 무역이라는 소재에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런 점에서는 상세한 설정이 뒷받침된 해양 무역 모험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부실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주인공의 여정이 지나치게 순탄한 탓입니다. 행성 네리스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승선할 기회를 얻고, 첫 임무인 커피 맛 개선도 무난히 해내며, 친구 핍 덕분에 행성간 무역의 요령을 빠르게 익혀서 곧바로 큰 수익을 내는 식이거든요. 실패가 없어요. 주변 인물들 또한 무개성에 모두가 주인공을 돕는 선한 사람들로만 그려져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도 찾을 수 없고요. 우주 공간 항해에서의 위기 역시 전무합니다. 때문에 작 중에서 긴장감 있는 드라마는 찾기 어렵습니다. 전생 지식을 활용해 무쌍을 찍는 이세계 전생물조차 이 정도로 무탈하지는 않을 거에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내 번역이 1권에서 멈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막 무역 협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끊겨 버리니 독자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디테일과 무역 묘사의 신선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완결되지 못했다는 치명적 문제 탓에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25/09/12

사라진 탄환 (Balle perdue) (2022) - 기욤 피에레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노는 의동생 캉탱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이 개조한 클리오 차량을 이용해 상점을 털려다 붙잡혀 구속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차량 개조 실력을 눈여겨본 경찰 샤라스가 그를 팀에 영입한다. 더 이상 마약 밀매 조직의 개조 차량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대대로 샤라스의 팀은 계속해서 성과를 냈지만, 팀원 중 한 명인 야레스키가 마약 일부를 빼돌리는 것을 샤라스가 눈치채게 된다. 결국 야레스키는 샤라스를 살해하고, 그 죄를 리노에게 뒤집어씌운다. 도주 중인 리노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야레스키의 범행을 증명할 유일한 단서인 탄환이 박혀 있는 샤라스의 차, 르노21을 찾아 나선다.  

프랑스의 장편 액션 스릴러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누명을 쓴 주인공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유일한 증거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걸 막으려는 진범과 충돌한다는 이야기로 정통 헐리우드 팝콘 무비 문법에 충실합니다. 별다른 복선이나 곁가지는 없고, 굉장히 단순하고 간결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이 영화만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건 주인공 리노가 차량 정비사라는 설정입니다. 리노가 야레스키의 마지막 포위망을 뚫기 위해 1980년대 출시된 소형차 르노 21을 개조하고 결국 돌파하는 장면에서 이 설정은 잘 활용됩니다. 르노 21 앞에 거대한 구조물을 덧붙이는 식이었는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위 포스터의 저 구조물인데, 포스터를 미리 안 봐서 다행이입니다). 그리고 이 르노21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핵심 증거인 '사라진 탄환'이 바로 이 차량 안에 존재할 뿐더러, 이 차량을 경찰에게 전해주기 위해 직접 개조하여 몰고간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느껴질 정도로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먼저 느낀건 부족한 액션의 규모입니다. 리노가 경찰서에서 탈출하거나, 야레스키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는 장면들은 리얼리티가 있고 처절하지만, 박진감과 시원시원함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리노가 차량 정비사니 별다른 액션을 펼치지 못하는건 당연한데, 최근 영화들은 전직 특수 부대원이나 전직 킬러가 워낙 많이 등장하다보니 심심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습니다. 솔직히 차량 정비를 배우기 전에 알제리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이다!는 설정 정도는 나와줄 줄 알았습니다.
절정부에서 벌어지는 카 체이스도 실망스럽습니다. 도심부에서 야레스키와의 일대일 추격전이 살짝 펼쳐지는 정도라 차량 수나 공간 활용, 폭발 등에서 헐리우드 영화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스케일 면에서 부족하니, 최소한 더 길게, 그리고 스케일을 아이디어 - 르노 21을 정비한 식으로 - 로 극복했어야 했습니다.

주인공 리노의 매력이나 동기 설명도 다소 부족합니다. 샤라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도주하며 진범을 쫓는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레스키가 리노에게 회유를 시도할 때 왜 리노가 끝까지 버텼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대단한 은혜를 받은걸로 생각되지는 않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마지막에서 야레스키가 도주에 성공하는데, 이를 쥘리아가 방조한 이유 역시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간결하고 집중력 있는 서사와 자동차라는 소재는 효과는 좋지만 강렬한 타격감과 대규모 스펙터클 측면에서는 아쉽습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절하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속편이 있던데, 더 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5/09/07

성운아 (星雲児 聖・少年戦士伝) 1~6 - 이케가미 료이치 : 별점 1.5점

'뇌제'는 지구를 파괴시켰다. 우주를 지배하기 위해 5개의 보주를 모아야 했는데, 보주 1개가 지구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택받은 소년 히마코토 이쿠루가 성모의 도움으로 지구의 보주를 입수했고, 보주를 가진 5명의 성전사를 모아 지구 부활 및 뇌제 처단을 위한 모험에 나서는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이케가미 료이치의 '소년 SF 판타지 액션 만화'입니다. 소년 선데이 연재작이지요. 국내에도 1권만 해적판이 소개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잊고 살았는데, 우연히 만보님의 리뷰를 읽고(잘 계시지요?) 찾아보게 되었네요.

무려 40여 년 전 작품이지만 이케가미 료이치의 작화는 압도적입니다. SF 판타지에 걸맞는 세세한 디자인들도 중반부까지는 나쁘지 않고요. 이즈부치 유타카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이 디자인을 맡은 덕분이겠지요. 

이야기도 두 번째 보주를 찾기 위해 향한 혹성 제피로스 에피소드까지는 재미있습니다. 특히 생명통화 '다나피아' 설정이 기억에 남네요. 뇌제는 다나피아를 전투대회 우승자에게 준다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생명통화라는 말 그대로, 많이 얻으면 그만큼 수명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에 혹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 대회에 참여했다가 무참히 죽어갑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다나피아는 전투 대회 희생자들을 통해 만들고 있었습니다! "소일런트 그린"이나 데즈카 오사무의 "2100년 보더플래닛"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는, 80년대에 유행했던 SF적인 반전으로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제피로스의 전투 대회도 단순히 격투 액션이 아니라 경주차 레이스까지 펼치는 풍성함이 좋았고요.

하지만 솔직히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출하 엔딩' 탓이겠지만 제피로스 에피소드 이후 심각할 정도로 줄어든 분량입니다. 앞 부분, 그러니까 기본 설정(5개의 보주와 성전사 등)과 마코토가 첫 번째 성전사 로고스를 만나는 제피로스 에피소드까지는 4권의 분량이 소모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세 명의 성전사와 보주를 입수하고, 뇌제를 물리치는 결말까지는 2권 분량 뿐입니다. 앞서의 분량을 감안하면, 나머지 세 명의 성전사와 함께 하기까지는 최소 6권 분량은 필요했는데 말이지요. 이래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분량이 부족한 탓에 보주도 제피로스에서처럼 어렵게 구하지도 않습니다. 동료가 되면 보주도 그냥 굴러들어오는 식이고, 심지어 메이야는 원래부터 보주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 연재분 한 편 분량으로 이루어진 결말은 특히 최악입니다. 뇌제가 우주를 창조했고, 5개의 보주를 모아 제대로 된 우주를 다시 창조할 수 있다 운운하는 결말은 대사만 오갈 뿐, 뇌제의 강력함이나 보주의 능력 따위는 전혀 와 닿게 묘사되지 못하거든요. 그야말로 "소드 마스터 야마토"와 다를게 없는 셈입니다.

당대 고전 SF 판타지를 지나치게 의식한 설정들도 눈에 거슬립니다. 제피로스 전투대회의 경주차 레이스는 "매드맥스 2"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바루루와 합류하는 에피소드의 수인들은 누가 봐도 "스타워즈"의 이워크이며, 바슈크가 성전사가 된다는 일종의 반전 역시 다스베이더 느낌이고요. 이는 신선하다고 볼 여지가 없지는 않은데, 분량 부족으로 전개가 엉망이라 급작스럽게 등장하여 소모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등장하는 여러 악당들, 기계 장치 및 여러 설정 디자인도 뒤로 가면 갈 수록 엉망입니다. 출하 엔딩이 결정된 후, 디자인을 맡은 전문가들도 기용되지 않았던걸까요? 전혀 SF스럽지도 않고, 유치해서 보기가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반부는 분명 괜찮았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더 큽니다. 만보님 리뷰에 쓰여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2025/09/06

로드워크 - 스티븐 킹 / 공보경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0세인 블루 리본 세탁 공장 관리자 조지 바튼 도스는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속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조지는 물론, 이웃들과 공장이 이전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조지는 모든 걸 내려 놓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아내마저 떠난 조지는 철거일에 더티 해리의 매그넘과 강력한 라이플, 그리고 다이너마이트의 60배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폭탄으로 무장하고 경찰과 대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티븐 킹이 필명 리처드 버크먼으로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특징이라면 호러나 초자연적 요소가 전혀 없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는 겁니다. 평범한 40대 가장이 점차 정신을 놓고 폭주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집요하게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스티븐 킹 특유의 치밀한 묘사는 돋보입니다. 특히 조지가 분노의 이유도 모르면서 도로 때문에 극으로 치닫는 과정의 상황과 심리 묘사, 그러면서 내뱉는 대사들은 압권이에요. TV 구입과 시청이 한 남자의 좌절과 상실감을 이렇게까지 그리는 소재로 활용된다는건 놀랍습니다.

조지가 공사 장비를 화염병으로 불태우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집을 폭파시키는 장면은 충분히 화끈합니다. 특히 끝내 자폭하고 마는건 기묘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닳고 닳은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공권력과 제도를 파괴한다는게 아이러니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대가 된 1973~74년 겨울은 베트남 전 실패와 석유 파동으로 미국에서 침체와 절망이 확산되어가던 시대였는데, 이 시대에 읽었더라면 아마 더 와 닿지 않았을까 싶네요. 

당시 시대를 잘 드러내는 여러 소재들도 볼거리입니다. 식당 주크박스에서 엘튼 존의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흘러나오고, 뉴스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 집과 함께 자폭하는 장면에서 롤링 스톤스의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가 흘러나오는 등의 장면들처럼요(심지어 최후에 듣는 가사는 '그래도 노력한다면 가끔은 당신한테 필요한 걸 갖게 될 거에요.').

그러나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점이 훨씬 더 두드러지거든요. 고속도로 확장 공사라는 사소한 사건 때문에 멀쩡한 가장이 모든 걸 버리고 폭주한다는걸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묘사는 좋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특정 사건을 계기로 한 남자가 미쳐간다는 설정, 사회와 단절된 남자가 분노와 허무 속에서 파괴로 치닫는 서사는 장르 전반에 걸쳐 너무 이미 너무 흔한데, 이 작품만의 독창성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요.
조지가 폭주 과정에서 만나는 21세 히치하이커 올리비아, 암흑가 거간꾼 매글리오리 등과 가까워지는 전개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미쳐가는 중년 남자에게 마약에 찌든 젊은 여성이 호감을 느낀다?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인 발상이에요.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서 40세를 그저 청춘이 끝나고 저물어가는 나이로만 묘사한 것도 100세 시대인 2025년에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솔직히 40세밖에 안 된 주제에 인생 다 산 것처럼 올리비아에게 이제 인생은 달릴 수 없는 공회전 상태이다 운운하는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60세는 되어야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이름에서 기대되는 호러나 스릴러 요소는 별로 없는데다가, 설정과 전개가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5/09/05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 - 시모무라 아쓰시 / 남소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카가와에서 만든 전기 자전거의 결함으로 사람이 죽은 뒤, 회사에는 비난이 폭주했다. 그 때문인지 시카가와 사장이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사장과 관계가 있는 일곱 명의 남녀가 한 폐쇄 공간에 갇혔다. 그들을 가둔 '게임 마스터'는 그들 중 시카가와 사장을 죽인 범인만 살려주겠다며 48시간을 주었다. 사고를 기사화하며 시카가와를 비난했던 기자 카미사와, 피해자 대표 유메코, 사장의 아내 카나에, 시카가와의 부장 린도와 과장 이시와다, 사장의 운전사 쿠라모치와 청소부 하야시의 일곱 명은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며 지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 시모무라 아쓰시의 장편입니다. 

닫힌 공간, 클로즈드 써클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건  "방주"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이라는 제목의 상황을 잘 구현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거리의 상황에 놓인 탓에, 일곱 명의 시카가와 사장 관계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보도, 증거 날조, 거짓 증언 등으로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서 사장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사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으로 이어지지요. 즉 모두가 '범인'입니다. 그러나 자백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자백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자백을 격파하여, 자연스럽게 탐정 역할을 분담하게 됩니다. 즉, 모두가 '탐정'인 거지요. 마지막에는 한 명만 살아남고 전부 죽음으로써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추리적인 부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시카가와 사장의 사망은 그의 사무실에서 발생했고, 이 사무실은 항상 CCTV로 감시되고 있었기에 자살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범인이 되기 위해서는 밀실 살인을 일으켰어야 했기 때문에, 이 밀실 살인의 트릭을 파헤쳐나가게 됩니다. 처음에 CCTV를 피해 사무실에 들어간 트릭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사장을 살해했고, 어떻게 나왔는지를 다른 사람의 자백을 들은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은 더 정교한 트릭을 구성해서 '내가 진짜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요. 여러 명의 추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독 초콜릿 사건"도 떠오르네요.
진범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트릭도 단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 만족스럽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면 CCTV가 가려져 사각지대가 생기고, 탈출할 때는 녹화를 약 30초간 멈춘 뒤 재개되도록 설정(여러 시간 동안 동일한 장면만 촬영한터라, 조사하는 사람도 배속 재생해서 보기 때문에 30초는 눈치채기 어렵다)해서 그 사이에 탈출했다는 트릭입니다. 두 개 모두 기술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의 자백에서도 유메코가 주장한 '냉장고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은 기발했습니다.

아울러 유일하게 실질적인 죄를 짓지 않은 카미사와(과장되게 비난했고, 정보 제공자 쿠라모치에게 금품을 건넨 실수는 했지만 보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므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결말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러웠다는 점에서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오마쥬 느낌도 전해줍니다. 작가의 전작도 다른 작품의 영향이 짙게 느껴졌는데, 이런 스타일의 작법을 즐겨 하나 보네요.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탓입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선뜻 폐쇄 공간에 모여 무려 이틀 동안이나 목숨을 건 추리 게임을 펼친다는게 과연 현대 사회에서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핸드폰 전파 신호가 닿지 않는다는 것 부터가 억지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난입,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이 알고보니 경찰이 탐정들을 고용해 만든 '연극 무대'라는 설정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불필요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상가족놀이"와 흡사한 설정인데 그만큼의 동기나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연극이라는 장치는 빼고 진짜 게임으로 밀고 가는게 훨씬 더 긴장감 넘쳤을 겁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등장한 카미시마가 사실 진짜 사장이었고, 사망한 인물은 사장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결말은 억지의 화룡점정입니다. 경찰 수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닌가요? 카미시마가 다른 피해자들을 단검으로 살해해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린도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진상도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일곱 명이 시카가와 사장이 무고하게 비난받게 된 원흉이라는걸 시카가와 사장이 알아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내의 불륜, 회사 과장 이시와다의 거짓 증언, 운전사 쿠라모치의 증거 조작은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하야시의 경우는 실제로 크게 드러난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대표 유메코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자전거 결함으로 죽은게 아니었다는 것, 카나에의 불륜 상대가 린도였다는 것 역시 알아내기 어렵고요.
작 중에서는 그들을 가둔 건물을 사장실 구조로 만든게 아니라, 그 건물 구조로 사장실을 리모델링했다고 설명되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을 들여 몰래 이런 계획을 구체화했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한참 회사가 비난받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의 구조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전체적인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결말은 억지스러운 반전이 도드라집니다. 흥미는 있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가 작품은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