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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8

J호러, 할리우드를 쏘다 - 이치세 다카시게 / 이은경 : 별점 2점

J호러, 할리우드를 쏘다 - 6점
이치세 다카시게 지음, 이은경 외 옮김/서해문집

일본의 영화 프로듀서 이치세 다카시게의 자서전. "울트라Q"에 크게 자극받은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서, 미국에서 "그루지"를 히트시킨 성공한 제작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립니다.

성공담은 밋밋합니다. 크게 좌절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일이 별로 없는 탓입니다. 오히려 너무 운이 좋았다는 게 눈에 뜨입니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이 베니스 영화제에 소개되고 26세에 무려 10억 엔짜리 대작인 "제도이야기" 프로듀서를 맡았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때문에 흔해 빠진 성공담류의 재미는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대신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링", "주온"에 이르기까지 이치세 본인이 작업한 작품들은 물론, 관련 인물과 당대에 유명했던 히트작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뒷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본 영화도 상당히 많아서 더 재미있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홍콩 영화의 성장에 깜짝 놀랐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녀유혼"을 봤을 때의 이야기, "공작왕"의 일본 쪽 프로듀서로 일하며 영감을 얻어 "제도이야기" 후속작인 "제도대전" 기획 시 홍콩 영화처럼 SF가 가미된 액션물로 만들면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여 감독도 남내재 ("공작왕" 감독)를 섭외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본인이 감독까지 맡게 된 후 결국 대차게 말아먹은 이야기 등입니다. 발상은 괜찮은 것 같은데, 감독이 문제였나?

또 미국에서 V시네마 제작자로 활동하던 때 지금은 대배우로 성장한 비고 모텐슨, 버지니아 매드슨, 러셀 크로우 등을 출연시켰었던 일화, 그리고 "크라잉 프리맨"을 1,000만 불의 예산으로 제작할 때의 일화도 재미있었습니다. "크라잉 프리맨"의 제작 - 감독 콤비가 "늑대의 후예들"로 대박 떴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에요. 개인적으로 "크라잉 프리맨"은 그런대로 재미있게 감상했었는데, 잘 나간다니 왠지 모르게 기쁘군요.

그리고 제작자로서, 특히 일본 호러 영화의 전문가로서의 명확한 의견 제시도 괜찮았습니다. 일본식 공간에서 공포감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그루지"는 무대를 일본으로 하여 촬영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링"의 미국판에서 사다코가 TV에서 기어나오는 장면이 너무 넓은 집이라 별로 무섭지 않았다는 것을 타산지석 삼았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확실히 도망칠 구석이 별로 없는 좁아터진 일본식 원룸에서 귀신이 TV에서 나타난다면, 도망갈 데가 별로 없긴 하겠죠.

아울러 이 친구 (저하고 거의 동년배니...) 마인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고 관객이 돈을 낸 값어치를 주어야 한다는 건데, 이 부분은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제작자 로저 코먼과 비슷하더군요. 로저 코먼과 비교 자체가 불가할 만큼 필모그래피는 보잘것 없고 성공 자체도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앞으로의 성공 여부도 불투명 ("그루지" 이후는 뭐 별거 없죠)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솔직히 싸이의 빌보드 점령보다도 못한 수준인 "그루지" 성공에만 기댄 철저한 기획 도서입니다. 성공담으로는 별볼일 없고요. 그러나 8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을 중심으로 한 영화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괜찮았습니다. 거의 안 계시겠지만 이 당시 일본 영화나 J호러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26/07/24

203호실 - 가몬 나나미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신입생 오키무라 기요미는 한정된 예산 때문에 도쿄 변두리의 작은 원룸 203호실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방을 꾸미며 자취 생활을 즐겼지만, 어느 날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 뒤 방 안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계속되었고, 무너져 가던 기요미는 호감을 품었던 썸남 니이자토, 그리고 아르바이트 동료 유키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도움은 미미했고, 결국 기요미는 203호실 안의 깊은 어둠에 삼켜지고 말았다... 

가몬 나나미의 "203호실"은 여대생이 기이한 원룸에 삼켜지는 과정을 그린 장편 호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흔히 대저택을 무대로 삼는 전형적인 ‘저주받은 집’ 이야기인데, 이를 가난한 대학 신입생의 원룸으로 축소한게 인상적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취, 천장에서 누군가 뛰어다니는 소리, 사람이 앉았다 간 듯한 바닥의 온기, 기묘한 얼룩과 벌레, 갑자기 젖은 현관 매트처럼 일상적인 소재가 괴이현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공포가 한층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천장 얼룩을 가리려고 붙인 외국 풍경 그림 속 창문을 누군가 긁는 듯한 장면처럼 섬뜩한 묘사도 제법 많고요.

기요미와 이전 세입자들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결말 - '전에 살던 학생이 집세를 밀린 채 도망가 버렸을 뿐이다'. - 도 좋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이 공포심으로 승화되어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단순한 호러가 아니라, 비정한 현대 사회를 고발하기도 하는 멋진 설정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203호실이라는 좁은 공간과 기요미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이야기의 규모가 작은 탓에 뒤로 가면 지루해집니다. 기요미의 행동도 답답합니다. 왜 진작에 방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부동산에 제시할 명확한 사유가 없다는 설명은 한국 독자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행동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가장 큰 아쉬움은 괴이현상의 원인이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03호실에 정체불명의 악의가 존재하고 거주자들을 삼킨다는 사실만 제시될 뿐, 그 기원이나 정체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처럼 괴이의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설명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드렸듯, 극한 외로움으로 기요미가 미쳐버렸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식으로요.

그래도 독자를 섬찟하게 만드는 호러 소설로서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분량도 적당한 편이고요. 헌티드 하우스와 저주받은 집 이야기, J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03/10

보기왕이 온다 - 사와무라 이치 / 이선희 : 별점 2.5점

보기왕이 온다 - 6점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
다하라는 어린 시절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집을 볼 때 정체불명의 회색 덩어리 그림자를 응대했다. '치가쓰리'라는 기묘한 말을 하며 집에 들어오려는 '그것'을 할아버지가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소리쳐 퇴치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할머니로부터 사람을 끌고가는 요괴 '보기왕'을 집에 들이거나 대꾸를 하면 안된다고 들었다.
세월이 흘러 직장을 얻고 결혼한 다하라에게 수수께끼의 전화가 걸려왔고, 수상쩍은 인물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회사 후배 다카니시가 큰 상처를 입고 아내와 딸 치사마저 위험에 처하자 다하라는 고교 동창인 민속학 교수 가라쿠사를 통해 오컬트 작가 노자키와 퇴마사 마코토를 만났다. 그러나 퇴마사 마코토가 알려준 대책이라고는 "부인과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라'는게 전부였다. 다행히 노자키와 마코토는 다하라의 집에 정기적으로 찾아와 아내 가나와 아이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다하라도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만 '보기왕'이 집에 찾아와 부적을 찢고 난동을 부렸다. 겨우 침입을 저지한 마코토는 자신의 힘이 미력하다며 언니를 불러냈다. 언니는 당장은 시간이 없다며 지인들을 부르나 고명한 스님을 비롯한 지인들 모두 겁을 먹고 거절했고 딱 한 명, 부탁을 수락한 영매사 세쓰코마저 한 팔을 잃는 큰 부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다하라는 마코토의 언니 도움으로 결계를 치려 하지만 그것 역시 언니를 위장한 '그것'의 음모였다. 결국 '그것'에게 다하라는 죽었다.

2부
아내 가나는 다하라의 죽음이 기뻤다. 다하라는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라 아내와 딸을 심리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었다. 노자키와 마코토의 도움으로 가나와 치사 모녀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나 다시 '그것'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마코토가 목숨을 걸고 저지하지만 실패했고, 도망치던 모녀를 덥친 '그것'은 치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 뒤 미쳐버린 가나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3부
가나와 치사를 습격한 '그것'으로부터 치사를 지키다가 중상을 입은 마코토를 병원으로 옮긴 노자키는 드디어 마코토의 언니 고토코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치사를 구하겠다며 중상을 입은 마코토에게 휴식을, 노자키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다하라의 본가에 찾아간 둘은 다하라 가족의 숨겨진 끔찍한 과거를 알아냈다. 오래전 할아버지 긴지의 가혹한 폭행으로 다하라의 외삼촌, 외숙모가 죽었고, '그것'은 할머니가 복수와 원망으로 할아버지를 저주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치사를 구하고 보기왕을 퇴치하기 위해 최후의 결전에 나선다...

제22회 일본 호러소설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보기왕' 이라 불리우는 크리쳐와 맞서 싸운다는 정통파 크리처 호러물이죠. 그렇지만 이유없이 괴물이 튀어나와 사람을 도륙하는 흔해빠진 고어 크리처물과는 다릅니다. '보기왕' 이라는 크리처의 정체와 그것이 나타난 이유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고 있다는 차이점 덕분입니다.

'보기왕'이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그러합니다. 일찍이 일본에 진출했던 유럽인들에게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거든요. "부기맨"이 변형된 말이라는데 그럴듯하죠? 또 노자키가 "기이잡설" 등의 이런저런 자료와 고문헌을 뒤지다가 밝혀낸 정체도 꽤 괜찮습니다. 오래전, 먹고 살기 위해서 K시에서는 산에 사는 요괴에게 노인과 아이를 일부러 바쳤다는게 그 유래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요괴가 있건 없건 간에 사람을 납치하는 요괴와 입을 줄이기 위한 마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이야기로 굉장히 설득력이 높아요. '고려장' 이야기와 별 다를 것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크리쳐물인데도 일본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요괴헌터"가 떠오릅니다. 대단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건 아니지만 몇몇 디테일 들이 괜찮다는 점도 비슷하네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저주하여 마도부를 통해 불러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섬찟합니다. 할아버지 긴지의 가혹함과 외삼촌의 죽음 등 앞부분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복선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데뷰작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솜씨입니다.
이러한 전개는 1, 2, 3부로 나뉜 구성에서도 돋보입니다. 1부는 다하라, 2부는 가나, 3부는 노자키가 주인공인데 각각의 이야기의 구멍을 메워나가며 새 주인공의 시각에서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1부에서 다하라가 굉장히 가족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아빠로 '괴물, 혼령은 대부분 빈틈으로 들어온다. 이는 가족 간에 생기는 마음의 빈틈인 '골'을 의미한다.'는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2부의 가나 시점 묘사를 통해 다하라가 사실은 나쁜 아빠였다는게 밝혀지는 과정이 좋은 예입니다.
'알고보니 나쁜 놈' 인 다하라와 소극적으로 상황에 끌려만 다니는 가나가 아닌 진 주인공 노자키와 마코토, 고토코가 전면으로 부상하여 힘을 합쳐 괴물을 퇴치하는 왕도적인 결말도 나쁘지 않아요. 정의롭고 착한 주인공이 악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는 너무 전형적일 수 있지만 이 작품에는 정말 딱 어울립니다. J호러 특유의 찝찝한 결말이었다면 더 마음에 들지 않았을거에요.

크리처물 다운 섬찟한 묘사도 볼거입니다. 일종의 영적 덩어리로 입과 이빨만 강조되는 보기왕에 대한 묘사는 별 거 없지만 '그것'이 고토코를 가장하여 다하라를 농락하는 장면이라던가 '그것'은 뒷문으로부터 들어오는게 진짜 공포라는 앞 부분의 복선이 이어져서, 가나가 화장실 입구에 결계를 치지만 뒷문이 있다며 변기로부터 '그것'이 기어나오는 장면이 특히 압권입니다. 얼마전 일본에서 영화화되어 개봉되기도 했는데 예고편을 보니 화장실 장면은 제대로 등장하는 듯 해서 기대가 됩니다. 소설에서도 아주아주 무서웠으니 영화로 보면 효과는 그 이상일거라 확신이 드네요.

이렇게 대상을 받을만한 좋은 점도 많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앞서 칭찬한 전개에서 딱 한 가지, 가라쿠사가 다하라를 저주했고, 다하라의 남은 가족까지 저주했다는 설정은 과합니다. 술 자리에서 쓸데없는 이야기 좀 들었다고 돈과 노력을 더해 '마도부' 까지 선물한다? 그것도 정작 원망의 대상은 죽은 다음인데? 이래서야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서 등장하지 않는 것만 못해요. 또 마코토는 그럭저럭이지만 그녀의 언니 고토코 캐릭터는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뛰어난 능력으로 괴물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높고, 경찰 최고위층도 움직일 수 있는 어둠의 실력자라는 설정인데, 식신만 나오지 않을 뿐 "마법사의 딸" 에 나오는 일본 최고의 음양사 스노즈키 무잔과 판박이니까요. 만화였다면 모를까 소설에 등장하기에는 비현실적입니다. '보기왕' 처럼 설득력있게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해 주었더라면 조금 나았겠지만 그런 설명도 전무하고요. 이런 점에서 보면 "요괴 헌터"의 한 에피소드로 그려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설 보다는 영화나 만화 쪽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아서 조금 감점합니다만, 재미도 있고 흡입력도 괜찮아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당한 작품입니다. 호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5/07/04

Japan 미스터리 걸작선 1 - 한국, 일본 추리작가협회 추천 / 정태원 번역 : 별점 3점

J 미스터리 걸작선 1 - 6점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입니다. 그런데 선정을 한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했다는 점이 특이하네요. 예전에 읽었지만, 다시 구입했기에 읽고 리뷰 남깁니다.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띄는데, 책 뒤의 설명을 보면 다른 단편선 등에서 이미 소개된 작품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선정하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50주년 기념 앤솔로지라는 주제와는 좀 맞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그동안 소개된 작품들이 일본 추리 문학의 대표작에 더 가까운게 당연하잖아요. 또 이러한 기획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진짜 국내에 초역되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된 건 이상해요.
정통 추리나 스릴러가 아닌 환상문학과 호러, 그리고 SF에 가까운 작품까지 실려 있어 기준이 약간 모호하다는 것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수록된 작품들도 특정 시대나 작가별로 편찬된게 아니라 무작위로 수록되어 있는데, 에드가상 수상작품집처럼 어느 정도는 목차에서도 시대순 같은 기준을 가지고 분류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 추리문학 협회가 선정한 일본 추리 단편이라는 기획 자체가 그냥 놓치기에는 너무 흥미로울 뿐더러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까지 가져다 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광기의 계보", "정사의 배경" 그리고 "살의" 를 꼽겠습니다.
총 세 권이 발간되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건 이번에 구입한 이 1권 뿐인데, 언젠가는 2, 3권도 발견하여 책장에 추가하고 싶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아파트의 귀부인 - 아카가와 지로

새로 이사온 옆집의 미모의 귀부인이 하는 요리의 냄새를 알아 맞출 정도로 후각이 민감한 아내를 가지고 있는 구보는 옆집의 부인에게 호감을 느껴 아내가 집에 없는 틈에 옆집에 찾아간다. 

다른 앤솔로지에서도 많이 소개된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입니다. 추리 문학이라기 보다는 반전의 맛이 있는 스릴러에 가까운데, 너무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 나체의 방 - 호시 싱이치

일본 단편의 거장 중 한명인 호시 싱이치(호시 신이치)의 작품입니다. 우연히 여러 남녀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로 상황 설정이 재미있고 여운을 주는 맛도 잘 살아있어서 역시나 단편의 거장이구나! 싶네요. 다만, 추리물은 절대! 아닙니다.

3. 나폴레옹 광 - 아토다 다카시

아토다 다카시의 초 유명 단편이지요. 제가 이전에 "Y의 거리" 소개 때에도 리뷰했기에 패스합니다. 

4. 고양이의 목 - 고마츠 사쿄

고양이를 키우면 죽는 미래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는 일본이라서 나올 수 있던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반전의 맛도 어느정도 있고 재미도 있지만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니고 SF도 아니고... 여러모로 좀 어정쩡한 느낌입니다.

5. 광기의 계보 - 후지이 레이코

초등학교 교사 게이코는 우연히 들춰본 학생 기누코의 일기를 통해 그녀의 계모가 기누코를 광기로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된다... 

여성작가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작품으로 일기를 주요 매개체, 단서로 하여 전개된다는 특이함에 더해 극적 반전까지 뛰어납니다. 약간의 호러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런데 왠지 영상물에 더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6. 3억엔의 악몽 - 니시무라 교타로

평범한 올드미스 여사원 교코는 어느날 찾아온 변호사에게서 자신이 친절을 베푼 한 노인에게 3억엔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변호사는 자신과 다른 인물을 착각하고 있었고, 교코는 유산을 상속받는 진짜 인물인 아리사와 나미코를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하는데... 

여정 미스테리의 달인이라는 니시무라 교타로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지푸라기 여자" 같은 인물 설정을 가진 완전 범죄물입니다. 조금 의외였달까요. 그러나 기발한 발상에 비해 전개가 뻔하고 치밀함이 많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7.얼굴 - 마츠모토 세이쵸

살인 사건을 저질렀던 배우 이노 료기치는 자신이 주연인 영화가 전국 개봉되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이시오카를 살해하려 하는데... 

"거장" 세이쵸 선생의 작품입니다. 세이쵸 선생 단편은 대표작들에 비해 많이 격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 작품은 꽤 괜찮네요. 특히 범인이 배우이고 영화 개봉 때문에 목격자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은 참신합니다. 하지만 결말이 너무나, 너무나 심하게 아닙니다...

8. 정사의 배경 - 츠츠야 다카오

한 주부가 음독 자살했다. 그녀는 죽기 직전, Y타임즈의 독자 투고란에 과거의 애인에게서 협박받고 있다는 투고를 보내 상담을 의뢰한 상태였다. Y타임즈의 기자 소네는 단순 자살 사건은 아니라는 판단에 독자적인 조사를 개시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데 작품이 굉장히 좋아서 놀랐습니다. 독자 투고와 음독 자살한 여인을 연결시키는 발상도 뛰어나지만 실제 사건의 트릭도 괜찮고 무엇보다 전개가 굉장히 깔끔합니다. 진범과 동기도 납득할 수 있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단편 중 하나입니다.

9. 조건반사 - 오타니 요타로

여배우 미즈사와 미나코는 연기지도 담당 오모리 세이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아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며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알콜 중독으로 바닥으로 추락한 세이지를 거추장 스러워한 미나코는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른바 "조건반사"에 의한 다이잉 메시지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여기서처럼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때문에 기발하긴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져 보입니다. 그래도 꽤 재미있었어요.

10. 벽 - 고다카 노부미츠

아내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벽속에 파묻히게 된 남자의 이야기. 이 한줄이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

11. 살의 - 다카키 아키미츠

옆집의 이마노 부부를 돌봐주던 타누마 변호사는, 이마노의 부인 준코가 질투로 저지른 살인 사건 변호를 맡게 되었다. 타누마는 그녀를 감형시켜 집행유예를 받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어느 날 이마노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는데... 

거장 다카키 아키미츠의 단편입니다. 

이른바 "살인을 하기 위한 살의의 정도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잣대가 어디에 있는가?"가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이 살의를 최소한으로 나타내기 위한 범인의 치밀함, 법의 헛점을 잘 꿰뚫고 저지른 범행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195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보이지 않게 세련되고 꽉 짜여진 구성이 놀랍네요.

12. 소라 - 야마무라 마사오

추리물은 아닙니다. 못살던 시대의 불우한 가족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적나라하게 그린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13. 무서운 선물 - 유키 소지

한 여자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키스했다가 저주(?) 받는 한 바람둥이의 이야기. 전해주는 꽃들의 꽃말로 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 전개는 괜찮지만 마지막에 저주니 어쩌니 하며 마무리하는 결말은 납득이 안됩니다...

14. 연습게임 - 후지무라 쇼타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의 수다를 겨우겨우 참고 살다가 우연찮게 불륜을 저지른 상대 미와와의 달콤한 미래를 위해 그녀를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내와 몰래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아내는 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어 가지키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함정에 빠지는 인물이 등장하는 "함정물"인데, 어차피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를 죽이려 했으므로 그다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반전의 여운을 남기기는 하지만 좀 약합니다.

15. 우물이 있는 집 - 미나카와 히로코

과거 자신이 유괴당한 집에 신혼여행을 오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전개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흘러가는데,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미묘함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비해 결말이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16. 복안 - 소노 다다오

일본의 손다이크 박사라고 불리운다는 복안전문 범의학자 고이케 고로라는 캐릭터가 나와 두개골 복안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작품. 캐릭터 이외의 설정과 전개는 평이합니다.

17. 사랑 - 미야자키 준

동물 뇌세포를 집어넣은 육아 로봇이 저지른 아동 살해 사건 이야기. 아시모프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지만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18. 산키치의 식욕 - 와타나베 게이스케

어려운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고학생 산키치가 우연히 주운 3엔으로 한끼를 해결하는 이야기. 이야기는 꽤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순문학 단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작가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왜 이 단편선에 실려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19. 쇼윈도의 연인 - 요코미조 세이시

소설에 빠져드는 기이한 습성이 있는 청년 다마루 소진은 최근 간행된 소설 "쇼윈도의 연인"을 읽은 직후, 한 양품점 쇼윈도의 마케팅을 사랑하게 되는데...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요코미조 세이시의 단편이라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작품도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외국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성도착적인 애정에 대해 다루는 듯 했는데, 급변하여 놀라운 반전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발표 시대를 감안한다면 정말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거장다운 작품입니다.

20. 범인은 누구인가 - 구사카미 진

쌍동이 중 한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한데 누구인지를 몰라 궁지에 몰린 경찰이 사건을 결국 해결한다는 이야기. "음악"을 주요 소재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지만 트릭과 설정은 마음에 들었어요.

21. 계단을 오르는 남자 - 마유무라 다쿠 

세계가 거대 빌딩화되어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세계. 한 남자가 25.000층의 건물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는 계단을 올라 새로운 층에 도착할 때마다 점차 여행자에서 모험가, 그리고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가 꼭대기 층에 다다르게 되는 날이 오고 군중이 그를 보기 위해 운집한다...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초고층 빌딩 사회에서 목적없이 그냥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주변 인물들에 의해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되는 과정이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너무나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좀 더 생각했더라면 정말 마음에 드는 걸작 단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2019/08/25

테러호의 악몽 1, 2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테러호의 악몽 1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테러호의 악몽 2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1845년, 최신식 함정 이리버스호와 테러호를 타고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발한 존 프랭클린 경 탐사대는 무리한 항해 끝에 얼음 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탐사대를 키가 4m가 넘는 하얀색 괴물이 습격하기 시작했고, 괴물과 추위, 식량 부족 등의 문제가 겹치며 프랭클린 경을 비롯한 탐사대원들이 하나씩 죽어가자 테러호의 함장 크로지어는 배를 버린 후 생존한 탐험대 전부와 함께 육로로 탈출을 결행했다.
그러나 계속된 괴물의 습격과 식량 부족은 생존자들을 계속 괴롭혔고, 누수방지공 히키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의 반란까지 일어나는데...

"칼리의 노래"로 접했었던 댄 시몬즈의 장편 호러 팩션입니다. 실존했던 싱클레어 탐험대에게 닥친 비극과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작가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작품이지요. 실존하는 미해결 미스터리를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코난 도일"J.하버쿡 젭슨의 진술"이 떠오릅니다.

이전부터 굉장히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 2권 합쳐서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어버렸을 정도로요. 재미의 가장 큰 요소는 끔찍한 초극한 상황의 생생한 묘사입니다. 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다시피 포경선 에식스 호의 비극과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에식스 호는 십 수명의 선원들이 주로 '굶주림' 과 싸우며 그래도 다섯 명이나 생존했지만, 싱클레어 탐험대는 백명을 훌쩍 넘는 대원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해 줄어드는 자원만으로 버텨야 해서 직면한 굶주림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몇 수 위입니다. 최고 영하 60도 이하로 떨어져 맨 손으로 총을 잡으면 살갗이 벗겨질 정도니까요.

탐험대를 곤경에 빠트리는 요소로는 괴혈병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묘사도 굉장합니다. 모공 등 모든 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이빨이 빠지고, 붓기가 심해지며 피부의 탄력도 사라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몇몇 선원들이 걸린 납중독 묘사도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죽어가는 핏제럴드 함장의 최후가 특히나 끔찍합니다. 

탐험대를 습격하는 거대 괴물 툰바크의 위협도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4m도 넘는다는 거대한 체구에 속도도 엄청나며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괴물로 인간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나마 탐험대의 발버둥은 테러 호의 항해장 블랭키가 괴물에 맞서 오랫동안 버티며 살아남는 정도에 불과해요. 참고로 블랭키의 사투는 박력이 넘쳐서 전체 내용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많은 어려움에서 드러나는, 인간 관계를 통한 드라마도 탄탄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작중 최고 악역인 누수방지공 코닐리우스 히키의 존재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나, 다른 인물들의 묘사와 설정이 아주 빼어납니다. 실력은 없지만 운과 허세에 의존하는 존 프랭클린을 비롯, 실력은 뛰어나나 아일랜드인이라는 출신 성분 탓에 뼛 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사는 크로지어 함장, 순수한 군인이자 '인간' 인 어빙 소위, 체력이나 능력은 딱히 없지만 열정과 신념으로 무장한 해리 굿서 등 모든 인물들이 눈에 보이듯 그려져 정말 살아 숨쉬는 듯 합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인물들과 인간임을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인간 군상들의 대비도 확실하고요. 사실 극한 상황에서 군율과 군기가 유지된다는게 처음에는 영 와 닿지 않았는데, 묘사를 통해 국가와 인간에 헌신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덕분에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탐험대가 전멸할 때 이누이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히키가 어빙을 죽이고 이누이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탓이라는 설명이 더해진 것도 좋았습니다. 탐험대가 이누이트를 복수 명목으로 학살해서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탐험대의 생존 경쟁만 그렸으면 좋았을텐데,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영역의 이야기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탓입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툰바크, 그리고 툰바크와 관련된 벙어리 여인 실나의 정체입니다. 실존한다기 보다는 결국 이누이트 신화 속의 존재라는 진상은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크로지어 함장이 '천리안'을 갖춘 인물로 그 역시 실나와 결혼하고 이누이트 주술사로 거듭난다는 결말 역시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와 총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부적을 붙여 퇴치한다는, 크리쳐 호러물이 갑작스러운 퇴마물로 전환되는 셈인데 영 개운치 못했거든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TV 시리즈에서는 툰바크가 실체가 있는 괴물로 그리고 있던데 그게 더 나은 선택인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워낙에 압도적인 내용이 많고 재미 또한 빠지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결말만 더욱 현실적으로 그려내었더라면 4점도 아깝지 않았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밀리의 서재' 처음 한 달 무료 프로모션을 통해 읽게 되었는데, 아직 '밀리의 서재' 가입을 하지 않으셨다면 무료로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도 무척 땡기지만, 심하게 무서울 것 같아 망설여지는군요. 호러 무비는 취향이 아니다보니...

2017/06/18

미스테리아 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5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구하게 되면 읽곤 하는 장르문학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5호입니다. 작년 초에 출간된 한참 전 과월호지요. 언제나처럼 특집 기사와 신간 소개, 이런 저런 연재 기사, 인터뷰, 수록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관심 있던건 특집입니다. "음식 미스터리"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 문학 속 요리'에 대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좋은 비교, 혹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재가 진부하다는 겁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흔해 빠진 내용이에요. 도입부의 식인 천재 범죄자 한니발 렉터,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대표적입니다. 그나마도 인터넷을 뒤지면 알 수 있는 내용일 뿐이고요. 정작 기대했던 내용은 실려있지도 않습니다. 저라면 한니발 렉터의 '전두엽 소테'나 네로 울프의 '소시스 미뉴이'를 소개할 때 최소한 해당 음식의 레시피와 조리 사진을 수록했을 겁니다.
이어지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독약에 대한 소개는 '음식 미스터리'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같은 작품 소개가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작품 속 요리를 재현하는 코너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제와 연결되는 요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미스테리아 측에서 별다르게 창작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참고 도서 속 - 주로 "미국 미스터리 작가들의 요리책" -  요리를 재현한 것에 불과해요. 그나마 셜록 홈즈가 '해군 조약문'을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해군 조약문" 속 치킨 커리 정도만 어느정도 주제에 값할 뿐, 재현한 요리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았고요. 

마지막의 '10권의 맛있는 미스터리' 소개는 실망의 정점을 찍습니다. 기준, 근거를 알기 어려운 탓입니다. 일단 소개작 중 "스위트 홈 살인사건",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기나긴 이별"은 절대로 음식 미스터리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억지에요. "어느 백만장자의 죽음"은 아슬아슬하게 음식 미스터리 범주 안에는 들기는 한데,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추천 도서로 떡 하니 내미는 행위는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조앤 플루크의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빈말로도 좋은 작품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 작품들도 음식 미스터리로는 볼 만 하지만, 추천할만한 수준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특별 요리""맛" 외에는 모두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주자면 1.5점 정도? 제 개인 프로젝트에 필적할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조금 안심했지만,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힘든 기획입니다. 

다행히 특집 외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빼어난 리뷰가 많아서 "미스테리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신간 소개 코너는 역시나,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좋은 리뷰들이 많더군요. 솔직히 읽어본 결과에 따르면 좀 과한 홍보의 결과물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번에 소개된 작품 중 마쓰모토 세이초의 "범죄자의 탄생"은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원작, 영화를 함께 소개하는 코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신부""상복의 랑데뷰"보다 낭만적인 애상으로 넘쳐흐른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완성도 면에서 천지차이니까요. 영상화된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연재물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건축가 야스이 도시오의 밀실에 대한 대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써먹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다다미를 걷어내면 아마추어는 다시 깔 수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되는 정보를 토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 놓는 아이디어 - 다양한 기술자들이 등장하는 탐정물 - 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로관을 예로 들며 전기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는 등 건축 전문가의 식견이 느껴지는 여러 코멘트들도 기억에 남고요.

한국의 50~60년대 추리 소설을 발굴한 추리소설 평론가 박광규 씨와의 인터뷰 역시 좋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사고와 관련된 논픽션, 폴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젊은 지식인 발라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특히 범인 크리스티안 발라와 그의 작품 "아목", 형사 브로블레브스키라는 키워드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며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다는 기획물인 '동아시아 미스터리, 정치적 죄와 서스펜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대중 서사의 최고봉이라는 이병주의 "관부 연락선", "별이 차가운 밤이면"과 김내성의 "청춘 열차"는 틈 나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도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척박한 한국 장르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는 좋은 잡지이지만, 이번호는 특집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2편의 단편의 짤막한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나비 부인의 커튼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두 남자가 운영하는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 건너편에 '나비 부인'이라는 카페가 개업했다. '나비 부인'은 가면을 쓰고 서빙하는 독특한 컨셉과 인테리어,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기묘한 노인이 '나비 부인'에서 진상을 부린 다음 날 '나비 부인' 사장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최혁곤의 단편입니다. 시리즈 캐릭터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콤비가 등장하는 단편집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전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쾌한 분위기의 버디물인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별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초반에 나왔던 수상쩍은 노인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등 수수께끼의 여지도 없고요. 

특히 후더닛 물로는 영 아니올시다에요.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일종의 '사이버 테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회파적 측면이 강하며, 이것이 동기로 밝혀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와이더닛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사회파적 설정이 잘 어울리지는 않네요. 인터넷의 비방글로 자살을 한다는 것도 와 닿지 않고요. 또 고3 수험생 투신 사건도 불필요할 정도로 질질 끄는 느낌입니다. 동기 부분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도 와이더닛물로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진범 검은 뿔테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하니까요. 남자 친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아요.
진소담의 가족 관계 증명서 정도만 나름 증거일 뿐, 추리가 모두 정황 증거에 기반한다는 약점도 크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 이하였던 범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버디물로서는 충분히 즐길만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단편집은 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기흥 보리산 자락에 있는 무당의 당집에서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완벽한 밀실 안에서 홀로 생존한 채 발견된 유홍석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판사에게 유홍석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한국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물들을 발표하고 계신 도진기 판사님 - 현 시점에서 변호사가 되셨지만 - 의 스탠드얼론 단편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작가가 뼛속까지 고전 본격물 애호가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1인칭의 수기 형태로 전개되며, 끔찍한 사건이 초자연적인 현상과 얽혀 일어난다는 점이 완전 고전 스타일이었거든요. 비교하자면 코난 도일경의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이라던가, 앰브로스 비어스의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에 수록된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워낙 고전물을 좋아하기에, 완전 제 취향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단지 스타일을 따온 것에 그치지 않고, 무당 '인문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덕분에 독특한 한국적 오컬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특히 그녀가 서상표의 집에 몰래 부적을 붙인게 드러나는 장면은 굉장히 섬찟합니다. 만약 영상화한다면 클라이막스로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문희에 비하면 서상표는 전형적인 한국 쓰레기 남자와 다를 바 없어 지루합니다. 무엇보다도 진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요. 괜찮은 고전 오컬트물이 갑자기 크리쳐 호러로 변질되는데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게다가 잘린 목이 경동맥을 물어 뜯었다면 부검으로 밝혀지는게 당연한데 간과되고 있고, 유홍석이 현장 문을 잠가 밀실로 만든 이유도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등 디테일에서도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고전 스타일 오컬트 호러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를 굉장히 탈 텐데 저한테는 호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부적이 드러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