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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9

천사의 잠 - 기시다 루리코 / 오근영 : 별점 1.5점

천사의 잠 - 4점
기시다 루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북스캔(대교북스캔)

교토의 의학부 연구원 아키자와 소이치는 조수 결혼식에서 13년 전 불같이 사랑했던 여성, 아키호 히후미를 만났다. 소이치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지듯 떠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지만, 뜻밖의 만남 앞에서 반가움보다는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이미 중년이 되어 있어야 할 그녀가 20대의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그녀의 딸은 열다섯 살 소녀로 성장해 있는데, 어째서 그녀만은 세월을 거스르듯 오히려 13년 전보다 더 앳된 모습인 걸까?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 다시 그녀 주변을 맴돌던 소이치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를 사랑한 주변 남자들이 모두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사라졌던 13년 동안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살인 단백질 이야기"로 접했던, 유전병인 치명성가족성불면증 (FFI)를 앓다가 죽어가는 가족이 주요 소재입니다. 자세하게는 몰라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라 반갑더군요. 그나저나,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읽고나서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10년도 더 전인 2006년에 이미 관련 작품이 발표가 되었었네요.

소재도 반갑지만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여러가지 음식들 묘사에 더해 패션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빨간색 코트에 초록색 정장을 받혀 입는다던가 초록색 캐시미어 재킷에 하늘색 원피스, 노란 부츠에 파란색 가방이라는 히후미의 패션은 화려한 수준을 넘어선, 상상도 잘 안 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컬러 조합이니까요. 교토를 주 무대로 하여 은각사, 은사탄 등 각종 명소와 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전해주고요.

그러나 소재와 약간의 묘사만 괜찮을 뿐, 내용은 수준 이하입니다. 아무리 현실을 뛰어넘는 이야기는 없다지만 실존하는 이탈리아 FFI 가족 이야기보다도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어딘가에서 괜찮아 보이는 실화를 접한 뒤 깊은 조사 없이 그냥 동기로 이용해서 책을 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작품 내용만 본다면 프리온 어쩌구, 유전병 어쩌구를 소재로 사용할 이유도 없어요. 그냥 심장 이식이 필요했다고 해도 무방했을테니까요. 

그리고 범행 동기인 히후미의 에마에 대한 걱정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자신의 딸에게 같은 병이 유전되었을지 모른다는건 어마어마한 고민이겠지만, 아무런 의학적 검사 없이 그냥 '유전병이니 죽을거야' 라고 생각한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프랑스의 유명한 연구소까지 갔다 왔다는 설정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보면 이미 20세기 후반에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유전자 변이에 대한 검사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발표된 시점에서는 이미 발병 여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거에요. 최소한의 검사도 없이 무조건 병에 걸릴거라고 믿는다? 최소한 '의학 미스터리'라고 홍보한다면 이런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그래도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만큼은 설득력이 있다고 칩시다. 저 역시 딸이 병을 앓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고쳐주고 싶을테니까요. 하지만 프랑스 연구소에서 5억엔을 기부받으면 치료약을 완성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설정, 이 5억엔이 동기가 되어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살해하는 연쇄 살인극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지금도 프리온 관련 병의 치료제는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냥 완벽한 사기지요. 5억엔이라는 애매한 금액은 대체 뭔가 싶고요. 차라리 피실험자로 자원한다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그걸 위해 최소한의 체류비를 목표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말은 되니까요.

연쇄 살인극 이야기는 더 가관입니다. 핵심 트릭인 '바꿔치기' 부터가 어이 상실이에요. 아무리 지인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나이부터가 차이나는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삼는다는 것 부터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것도 불법 체류자를 자신의 대역으로 마련한다? 완전히 비상식적입니다. 게다가 불법 체류자를 가르쳐서 한 사람의 간호사로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도 말도 안되지요. 간호사들의 업무가 그렇게 호락호락할걸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대역 본인도 아니면서 13년전 소이치와의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 히후미 본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걸 너무 쉽게, 대충 넘기고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왜 이런 범행을 저지르는지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13년 전 시점에서 히후미는 굉장한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되며 나름 유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5억엔을 위장 결혼과 살인으로 마련하느니 지위가 높은, 예를 들면 의사와 결혼하여 마련하는게 더 현실적인 방향입니다. 최소한 살인 계획을 짜기 전에 그런 노력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히후미는 서슴없이 살인을 선택했어요. 그렇다면 5억엔을 마련하려면 범행을 최소화했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연쇄 살인극을 벌이고요. 경찰을 우습게 알아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더라도 동기가 명확한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범행이 연달아 성공할리도 없어요. 공범자를 밝혀내는게 수사의 기본이니 분명히 꼬리를 잡혔을겁니다. 부유한 남편들이 연달아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면 더 이상 희생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근거지를 옮기지도 않고 버티는 건 무슨 배짱인가 싶네요.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키자와 소이치의 존재도 작품을 수렁으로 몰고갑니다. 히후미를 불같이 사랑하여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그녀를 '가장'한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원래의 히후미는 가차없이 버린다는 이야기의 결론만 놓고 보면, 사랑 따위는 없고 결국 그냥 젊고 예쁜게 좋았을 뿐이라는 거니까요.
또 새로운 연인이 히후미와 교제할 때 옆집에 살던 중국에서 온 매춘 소녀 레이카였고, 히후미가 소이치와 동거를 결심한게 레이카를 자신의 대역으로 삼으려던 의도였다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유치하고 어이없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레이카가 소이치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안 넣으니만 못한 설정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에 얹은 음식물 쓰레기 느낌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소재는 흥미로우나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한 졸작입니다. '의학 미스터리' 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함량 미달이고요. 추리적으로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오래전 작품으로 이미 절판되었지만 혹시나 눈에 뜨이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전무합니다.

2024/08/17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4점
최희주 외 지음/나비클럽

구독 중인 서비스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봄 호에 이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수록 단편들이 대체로 호러 성향을 띄는게 특징입니다.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뻔한 설정과 전개를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좀 더 신선한 발상과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딥페이크 업체 추적기
실제 있던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사진, 동영상 딥페이크 제작을 요청하면 건당 돈을 받고 결과물을 보내주며, 심지어는 업체의 API를 연결하여 직접 생성할 수도 있는 현실을 취재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취재를 통해 딥 페이크 범죄가 널리 확산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규제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범죄는 여성들 피해가 많은데, 저도 딸 아이의 아빠로서 좀 더 강한 처벌이 시행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취재라는 점에 더해, 이전 호보다 더 논픽션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탁묘
작가 효진은 고등학교 동창 애희와 동네에서 오랫만에 재회한 뒤,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날, 손을 다친 애희가 찾아와 자기와 남편 지욱에게 닥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번 호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작. 두 여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공포물인데, 수상이 당연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빼어난 흡입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되살아난 지욱이 효진에 대한 집착만 남아 그녀를 덮치는 결말도 강렬했고요.
 
그러나 애희가 살해한 지욱을 윗층 할머니가 되살려냈다는건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고양이를 되살린 것, 고양이를 죽게 만든 택시 운전 기사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등의 다른 설정들도 마찬가지에요. 기묘한 집안 물건들 정도로 이런 능력이 가능하다고 하는건 무리입니다. 주술이건, 부적이건, 조금이라도 설명을 덧붙여 주는게 좋았을겁니다.
또 효진이 지욱과 불륜관계라는 뻔한 설정도 별로입니다. 게다가 효진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건 반칙이에요. 특히 애희가 남편 불륜 상대와의 문자를 봤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커녕 제 3자처럼 "화양연화" 운운한건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수상자 인터뷰에서 밝혔던 창작 동기 - 층간소음 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복수심으로 윗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훔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를 잘 살린 것 같지는 않네요.

메리
의대 진학을 앞둔 '나'는 아르바이트로 삼촌의 스마트 축산 건축업을 돕기 위해 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성적 노리개인 정신지체자 '메리'의 아기가 죽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된 메리는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데...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의 결과로 빚어지는 복수극.
그러나 핵심인 '메리'의 복수심에 대한 빌드업보다는 '나'의 개인 심리 묘사에 치중한 탓에 복수극으로서의 맛은 다소 부족합니다. 도축 현장과 가축 축사 등이 어우러진 배경 묘사는 그럴듯하지만 지나치고요. 복수극이라면 그에 걸맞게 화끈하게 달려주는게 낫습니다. 괜한 문학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어요.
메리의 복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유사성이 짙다는 문제도 큽니다. 복수 장면도 독극물을 먹은 잔치 참석자들이 복통으로 몸부림치는걸 난도질로 끝장낸 상황인데, '나'가 창고에서 걸어나와 문을 나서는 중에 이 모든게 이루어진다는건 이상합니다. 최소한 사전에 독극물을 먹였다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환상통
두 손이 잘려나간 환자가 자신의 손이 자기 목을 조르는 환상에 시달렸다. 그 상황에서 20여년 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아이 이름을 불렀다. 딸은 백화점 붕괴사고로 환자 눈 앞에서 죽고 말았었다. 

환상통과 거울 치료 등 의학적인 부분에서의 디테일은 볼만했던 작품.
하지만 죽어가는 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건 많이 뻔했고 이야기 전개에서 의외성도 별로 없습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이게 무슨 장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호러는 아닌데, 그렇다고 심리 스릴러도 아니고... 여튼 장르물로의 기대에는 전혀 값하지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수지
제주도의 물 빠진 저수지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한 구는 박서현의 남편 시신이었다. 남편은 같은 마을 동우 엄마와 불륜 관계였고, 박서현도 요가 수강생 은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사건이 등장하고,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힘든게,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경찰 수사에 의해 모든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건 조현병 환자인 박서현의 망상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박서현도 은우와 불륜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망상 때문에 은우와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지요.
반전은 괜찮았지만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장화 홍련(영화)"와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가 블랙박스와 사진 등을 통해 현실이 드러나는건 영상물에 어울리지, 소설에는 잘 어울리는 작법이라 할 수도 없고요. 소설이라면 독자도 속일만한 디테일한 묘사가 많았어야 했습니다. 
또 이야기와는 별 관계없는 제주 무당(심방) 관련 설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야기의 본질만 흐립니다. 흥미롭기는 한데 작품에 잘 녹아들지는 못해요. 박서현이 귀신에 홀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제주 무당 관련하여 작가가 '내가 이렇게까지 자료조사를 했다!'는걸 과시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드는 탓에, 차라리 이 설정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스트 하이커
휴직 중인 경찰 수연은 동료 태현을 쫓아 찾아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 태현은 아내 살해 용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진 상태였다.

수연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영원히 떠도는 - 제목 그대로 '고스트 하이커'가 되어 '부랑'을 하는 - 내용의 작품. 
솔직히 장르가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진상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연이 결혼한 태현에게 집착한 나머지, 태현의 아내는 자살했고 태현은 부랑자가 되었다던가, 수연이 베로나 실종 사건에서 알랭이 수상하다는걸 리즈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던가 하는건 모두 수연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애매한 사건들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 보다는 중간에 수연이 죽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복선을 삽입한 뒤, 수연이 유령이라는걸 드러내는 전개가 더 좋았을거에요. 정교한 맛도 살리면서 말이지요. 여러모로 부족하고 애매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읽는 네 가지 키워드 2 : 욕망과 갈등의 논리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에 대해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연재물. 이번에는 '사연'과 '한'이라는 한국 미스터리만의 특별한 주제에 대해 "아홉 꼬리의 전설"과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라는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저 두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에 가까와서 별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 두 작품이 한국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도 아니니까요. 보다 보편 타당한 고전을 예로 들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과 해석이라면, 연대순으로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을 당시 주요 사회 현상과 연결하여 통사적으로 설명하는게 더 와 닿았을것 같네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외 비평, 인터뷰, 추리 퀴즈 등은 점수를 주기 애매해서 생략합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내용들도 아닙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3/02/19

죽음의 샘 - 미나가와 히로코 / 권일영 : 별점 2.5점

죽음의 샘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권일영 옮김/시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0년대 독일, 아이를 임신한 채 애인에게 버림받은 마르가레테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의 시설 '레벤스보른'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나치 독일이 순수한 아리아인종, 즉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었다. 시설의 최고 책임자인 의사 클라우스 베셀만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에리히와 그의 형 같은 존재 프란츠를 양자로 삼기 위해, 두 사람이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마르가레테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마르가레테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독일 패망에 즈음하여 연합군의 침공이 피난처를 덮치자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아이 미하엘을 지키기 위해 프란츠와 에리히를 버리고 마는데....

나치 독일의 인체 실험을 주도했던 의사를 주요 소재로 다룬, 거의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 장편입니다. 그 동안은 일본 작가가 2차 대전과 관련된, 그리고 독일인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쓴 것이라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접했던 주간문춘 미스터리 리스트에 실려있는 것을 알고 읽게 되었네요.

작품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는 클라우스 박사와 결혼한 마르가레테 시점으로 독일 3제국 패망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2부는 권터와 게르트 2명의 시점으로 1부 이후 15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나치 독일의 실험이나 잔당을 다룬 작품은 그동안 많이 접했었고, 특히나 광기의 의학 실험을 다룬 작품은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나 "모레"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광기의 나치 의학 실험이 아니라, SS 출신의 의학 박사 개인의 욕심을 위해 벌어진 사건들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온갖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거대한 서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요한 등장인물은 몇 없을 뿐더러, 이 몇 명의 인물들이 거의 모두 우연으로 얽혀 있는 등의 작위적인 설정이 너무 강한 탓입니다.

예를 들면, 미하엘의 친부 권터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데 그가 물려받은 폐허가 된 성이 클라우스 베셀만이 노리는 지하 통로의 입구로 되어 있다든가, 마르가레테와 레벤스보른에서 인연이 있는 브리기테의 아들이자 클라우스의 아들일 수도 있는 게르트가 이런저런 우연으로 미하엘의 대부인 SS 출신 대령이 이끄는 국방 스포츠단에 입단하고, 우연한 기회에 프란츠와 에리히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는 식입니다. 우연도 이 정도라면 너무나 지나치죠.
무엇보다도 마지막 폐허가 된 성에서의 결전의 작위성은 정말이지 읽는 사람을 어처구니없게 만들어요. 대령이 마르가레테나 게르트 등 처음 가본 사람들이 척척 찾아내는 비밀의 방을 15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다가 하필이면 마지막 그 시점에 그곳을 덮치는 하등의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도 않으니까요.

또 클라우스 베셀만의 예술에 대한 집념이 초반부터 강하게 묘사되어 이후의 전개가 어느 정도 예측되는 등, 잘 짜여진 스릴러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늘려 놓았습니다. 의학 실험이라 할 수도 없는 "거세"가 주요 테마라서 광기의 의학 실험 따위는 곁가지 이야기일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대관절 레나는 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2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게르트와 헬무트로 대표되는 주변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런 것들만 들어내도 분량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클라우스 베셀만 박사가 악역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예술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는 것도 별로였어요. 빈 소년 합창단원에게 꽂힌 SS 친위대원의 사랑 이야기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물론 15년 뒤 만난 에리히는 사실 미하엘이며, 미하엘인 줄 알았던 소년은 클라우스와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 허나 이는 2부 시작되면서 마르가레테가 운 좋게(?) 미쳤다는 설정으로 이루어진 서술 트릭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고, 마지막 "후기를 대신하여"라는 챕터는 살짝 서늘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큰 한 방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일본인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라 권터가 쓴 작품의 일본어 번역본이라는 장치는 안 나와도 그만이었고요.

내용 자체가 불쾌하고 찜찜하나 계속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흡입력은 있지만, 그저 그뿐,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 그냥 완독했다는 것에 만족하렵니다.

2010/06/04

왕실 미스터리 세계사 - 피터 하우겐 / 문희경 : 별점 3점

왕실 미스터리 세계사 - 6점
피터 하우겐 지음, 문희경 옮김/다산초당(다산북스)

역사 속 왕실의 유명한 죽음과 사건들을 현대 의학과 기술로 재조명한 독특한 역사서입니다. 재미있는 역사 관련 서적을 꾸준히 출간해온 다산초당에서 출간한 책이네요.

목차를 살펴보면 약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여러 서적에서 접해본 내용이 많다는 점인데, 유명한 왕실 속 사건들이 주로 다뤄져서 더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서왕의 정체, 리처드 3세와 런던탑에 갇힌 조카들, 프랑스의 철가면 죄수, 나폴레옹 독살설, 아나스타샤 공주 이야기 등은 이미 다른 책이나 매체에서 여러 번 다뤄진 바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장점은 이미 알려진 내용을 최근 정보와 이론으로 다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철가면에 대한 이야기는 루이 14세의 아버지나 쌍둥이 형제일 것이라는 뻔한 설이 아니라, 허례허식과 대접받는 것을 좋아했던 교도소장이 체면을 위해 죄수를 꾸며냈다는 이론을 소개합니다. 이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독살설도 현대 의학을 통해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아나스타샤 공주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황제 일가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 근처에서 황태자와 대공비(공주) 중 한 명의 유골이 여전히 발견되지 않아 여전히 미스터리라는 점은 새롭게 접한 정보였거든요.

또한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습니다. 리처드 3세가 죽인 조카를 자칭한 퍼킨 워벡 이야기나, 어린 왕 루이 17세를 사칭한 사기꾼들의 이야기가 눈에 띕니다. 특히 인디언 혼혈이면서 루이 17세를 자칭한 미국인 사기꾼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던 에피소드였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을 위해서 왕관도 버리고~"라는 노래로 유명한 윈저공과 심슨 부인 이야기였어요. 윈저공이 변태적 성애환자라 심슨 부인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라는 이론이 등장하는 등 예상 외로 파격적인 내용이 많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윈저공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고에 대한 마지막 분석도 현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결국 음주운전에 의한 사고였다는 결론이지요.

하지만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요제프가 17세 소녀와 함께 시체로 발견된 마이어링 사건에 대한 설명은 아쉽습니다. 다양한 이론 중 프러시아 암살자가 범인이라는 설은 흥미로웠지만, 사건의 핵심인 밀실 트릭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입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이라는 식으로 흐지부지 마무리된 점도 불만스러웠고요. 이 사건이 영국에서 벌어졌더라면 셜록 홈즈가 해결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상세한 자료조사와 풍부한 도판을 바탕으로 쉽고 재미있게 서술된 흥미로운 역사서입니다. '세계의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3/01/02

그림자 없는 범인 (일본 추리소설 단편집) - 사카구치 안고 외 : 별점 2점

그림자 없는 범인 - 일본 추리소설 단편집 - 4점
사카구치 안고 외/유페이퍼

장르문학 전자책 전문 독립 출판이라는 미증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페가나 북스의 책. 현재까지 페가나 북스 출간작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 (페가나 북스 자료 참조)라고 합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난, 총 5편의 퍼블릭 도메인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불연속 살인사건"의 사카구치 안고, "도구라 마구라"의 유메노 큐사쿠,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사오 주란, "연애곡선"의 코사카이 후보쿠, "혈액형 살인사건"의 코가 사부로로 구성된 저자 목록은 꽤 화려한 편이라 할 수 있죠.

상세하게 소개하자면,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사카구치 안고의 "그림자 없는 범인"은 마에야마 이사쿠라는 재산가의 죽음 뒤 벌어진, 이해관계자들의 좌충우돌 군상극입니다. 그런데 누가 진범인지도 드러나지 않는 등, 사건만 있고 추리의 과정이 없어서 추리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좀 더 과장되게 묘사했더라면 시대를 앞서간 괜찮은 블랙코미디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범죄소설도 아니고 풍자소설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인 유메노 큐사쿠의 "S곳 교살사건 서양부인"은 기이한 상황에서 벌어진 문신녀 마리 부인 살인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나가는 내용으로, 그로테스크한 범행 현장, 종잡을 수 없는 증언, 명탐정 이누타 박사의 등장 등 고전 정통파 분위기를 한껏 내 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밝혀진 진상이 영 아니라는 점과, 추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비현실적이면서도 대충대충 넘어가는 요소가 너무 많다는 점이죠. 예를 들면 문신은 설득력 없는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도구일 뿐이고(비밀 정보를 숨기기 위한 문신이라는 설정이 과연 말이 될까요? 어떤 멍청한 정보원이 핵심 증거를 몸에다 새긴답니까?), 수수께끼의 핵심인 토사쿠 노인의 증언—보름달을 보았다—은 단지 각성 상태에서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 등이 있겠습니다. 이런 점을 전부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세 번째 작품인 히사오 주란의 "곤충도"는 변격물 분위기의 초단편 호러 판타지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오싹한 맛을 전해주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외에는 너무 짧아서 별로 이야기할 건 없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코사카이 후보쿠의 "바보의 독"은 정통 추리 단편으로, 잘 짜여진 설정과 복선에 의외의 반전까지 등장하는 통쾌한 소품입니다. 오쿠다 부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을 놓고 부인의 아들인 켄키치, 야스이치에게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게 전개하다가, 부인 죽음의 진상과 야마모토 의사의 살의를 밝혀내는 결말이 아주 깔끔하거든요. 야마모토 의사가 켄키치의 연적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밝히는 것이 약간 반칙 같기는 하나, 그 외에는 완벽한 좋은 의학 미스터리물입니다.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 작품은 코가 사부로의 "호박 파이프"로, 이전에 읽었던 "혈액형 살인사건"에도 수록된 작품입니다. 작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합니다. 별점은 역시나 2점.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쳤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사카이 후보쿠의 "바보의 독" 한 편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되기에 초창기 일본 추리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네요.

물론 단편 5편(그중 1편은 초단편) 수록된, 일반 책으로 친다면 문고판 100여 페이지짜리 전자책 가격이 2,000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긴 하나, 최소한 저는 돈은 아깝지 않았습니다. 우려했었던 번역 문제도 크지 않았으니 만족합니다.

덧붙여 페가나 북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 첫 번째로 출판사명으로 책들이 검색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알라딘에서는 유페이퍼가 출판사로 잡혀 있어서 검색이 안되더군요. 두 번째로는 네이버북스에서도 구입할 수 있었으면 하고요.

마지막으로, 국내 장르문학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페가나 북스의 도전이 성공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퐈이팅~!

2020/05/05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6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6 - 8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의 의사" 

티벳 불교 색채가 진하게 남아있는 인도 라다크 지방에 방문한 신라는, 전통 의료인 '아무치' 얀단의 부탁으로 보물 찾기에 나섰다. 서양 의학도 배우고 싶어하는 얀단을 돕기 위해 스승 챤단이 귀한 약재를 팔아 학비를 대 주기로 했지만, 급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탓에 약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C.M.B 스러운 현학적인 즐거움이 가득했던 작품입니다. 등장인물의 직업인 티벳 전통 의료인과 이야기의 무대인 히말라야 산, 보물을 노리는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는 속임수로 쓰이는 산 산호 등에 대해서도 특유의 만화적이면서도 친절한 설명으로 쉽게 전해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티벳 불교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가 많은데, 만다라와 전통 사원의 스투파, 챠크라와 같은 해당 정보가 보물을 감춘 장소와 연결된다는 점이 아주 돋보어요. 만다라와 사원 바닥의 챠크라라는 단서를 눈치챈 뒤, 챠크라는 '문을 밖으로 여는 것' 인데 사원의 문은 안으로 밀어 열기 때문에, 밖으로 밀면 숨겨진 장소가 나온다는 추리가 꽤 그럴듯했거든요. 사원의 문을 밖으로 미는 장면은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멋졌고요.

딱히 범죄라는게 등장하지도 않고, 보물이 숨겨진 장소에 대해 여러가지 알아낼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 일단 벽이 비 정상적으로 두껍잖아요? - 추리보다 지식 전달 측면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완성도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루바이야트 이야기"

오마르 하이얌의 4행 시집인 '루바이야트'를 둘러싼 살인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C.M.B로는 이례적으로 2화 분량을 사용해가며 조금 긴 호흡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11세기 사마르칸트에서의 이스마일파 하산과 그의 친구 오마르의 이야기와, 현대에서 벌어진 살인과 루바이야트를 둘러싼 음모를 모두 다루기에는 어느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핵심 소재인 '루바이야트'라는 시집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기대에 값합니다. 상세할 뿐 아니라, 그 유래와 현재까지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이를 이스마일파의 하산, 아사신, '산의 노인'과 연결시키는 과감한 아이디어 역시 돋보였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트릭이 꽤 괜찮은 덕분입니다. 첫 번째 밀실 트릭, 즉 완벽하게 잠겨진 공간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상황은 '창'을 이용한 것인데 꽤 현실적이라 설득력이 높습니다. 높은 탑에서 사람을 밀어서 추락사시킨 트릭은, 탑 아래에서 발판이 되는 판자를 들어 올린 것으로 이 역시 그럴듯했어요. 사람이 민 것처럼 꾸미기 위해 윗 옷에 손자욱을 남겨 따로 유기한 작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사소한 말 실수가 범인을 드러내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 이야기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많이 등장했었죠. 그러나 다른 에피소드의 경우, 억지스러운 말 실수도 많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합리적입니다. 범인의 말 실수는 가짜 루바이야트를 담고 있던 물건을 가방도 아니고, 상자도 아닌 일본식 '보자기'로 표현했던 것인데, 이는 물건을 담아 온 피해자가 일본인이었던 덕분으로 서양인은 알기 어려운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번째 사건 현장의 나이프가 흉기가 아니라는걸 경찰이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아무리 이국 경찰의 부실 수사로 치부하더라도 문제가 있는건 사실입니다. "미스터리 민속 탐정 야쿠모"에서 더 멋진 방법으로 같은 트릭이 사용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두 번째 트릭이 사용된 사건입니다. 트릭을 이용해 '사고 현장인 탑에 올라간 사람은 없다'는 상황을 만드는게 범인에게 딱히 도움이 되는게 없거든요. 추락사한 플럼과 범인 로즈의 대립이 살짝 있기는 했지만, 로즈의 목적인 루바이야트 발굴은 이미 시작된거나 다름 없으니 그녀가 이런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없어요. 차라리 트릭을 사용하지 않고 '자살'로 꾸몄다면 억지스러워도 말은 되는데, 가공의 범인을 꾸며낼 이유 역시 없습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밀실이 된 건 범인의 의도가 아니라 피해자가 들고있던 나이프가 흉기로 오해된 까닭으로, 여기에 맛들인 범인이 불필요한 단서를 추가했다는게 이유라고 설명되는데, 사고사나 자살을 구태여 살인으로 위장할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

즉, 트릭은 좋았지만 실제 범행에 사용될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셈입니다. 트릭이 아깝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카스미장 사건"

경시청 형사 타나바다는 부랑자로부터 '카스미장'이라는 아파트 관리인이 최근 보이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었다. 조사를 나선 그녀와 동료는 관리인의 아들을 만났고, 들어간 카스미 장에서 혈흔 등의 범죄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들은 카스미 장의 위치가 좋다는 이유로 수상한 부동산 업자가 아파트를 팔 것을 강요했다고 말했고, 부동산 회사에서는 무언가를 파묻은 도구를 보게 되었다. 이를 사건화하기 위해 사체를 찾아내야 하는 타나바다는 부동산 회사에서 가져온 흙을 신라에게 전달하여 사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려 하는데...

이전 작품에서 등장했던 신참 형사 타나바다가 등장하는 사기극입니다. 카스미장 아파트 관리인은 자기 발로 사라진 것이며, 아들은 아들을 자칭한 사기꾼으로 사체 발견 뒤 경찰에 의해 아들임이 공인되어 당당하게 아파트를 매매하려 했다는 진상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타나바다 등이 발견한 관리인의 사체 일부는 사기꾼의 아버지 손목이었습니다. 사기꾼이 진작에 자연사하여 매장되었던 자신의 아버지 사체의 손목만 관리인의 시체처럼 위장하여 암매장한거죠. DNA 검사를 통해 사기꾼 자신이 시신의 혈육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기 위함으로, 이를 위해 카스미 장과 꾸며낸 가짜 부동산 회사 등에 여러가지 조작한 단서를 남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타나바다 등은 이에 홀랑 속아 넘어갔고요.

또 조작에 말려들어 사기꾼의 계획대로 행동하던 타나바다가, 마지막에 '형사의 감'은 무엇이 진짜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선배 형사의 충고를 토대로 진상을 풀어낸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형사의 감'이 대관절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해답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본인 스스로 정답이라고 생각할 때까지 생각해 본 결과로, 단순한 '감'은 아닌 것이죠.

그러나 이야기를 무리하게 C.M.B 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는 조금 거슬렸습니다. 대표적인게 부동산에 약간의 흙더미를 남겨 놓은 걸로 경찰이 사체(로 위장한 손목) 를 찾게 한다는 조작입니다. 이 흙더미에서 신라가 특정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곤충을 발견하여 암매장한 장소를 알아낸다는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강원도 산간 일대에 서식하는 곤충이다" 정도의 정보로 달랑 형사 2 명이 암매장한 손목을 발견한다?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보다 많은, 다른 정보가 필요했어요. 예를 들면 부동산 회사 차량이 어느 국도를 이용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본 편 이야기는 좋았는데, 무리한 시리즈화로 오히려 감점 요인이 생겼다는 점에서 무척 안타까왔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차라리 신라가 등장하지 않고 우직한 경찰의 수사로 암매장 장소를 발견했다고 하면 별점 4점 이상은 충분했을겁니다.

그래도 3편 모두 평균한 별점은 3.5점. 간만에 재미와 정보 제공, 추리 요소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다음 권에서도 이 분위기 쭉 이어가 주었으면 합니다.

2015/11/21

W의 비극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2.5점

W의 비극 - 6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손안의책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학 재벌 와츠지 가문의 딸 마코의 가정교사인 이치조 하루미는 마코의 박사학위 논문을 도와주기 위해 일족이 휴가를 보내는 후지 5대호, 야마나카 호반의 별장을 찾았다. 그러나 그날 밤, 비명 소리와 함께 와츠지 요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마코는 할아버지에게 강간당하기 전, 저항하다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다고 고백했다. 일족은 추문을 덮고 마코를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강도가 잠입했다고 진상을 조작하려 하는데...

나쓰키 시즈코의 대표작입니다. 오래전 절판본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었는데, 고맙게도 재간되었더군요. 몇 년 전 일이긴 하지만 다시 읽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의외였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일까요? 예전에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더군요.

물론 아래의 "민법 제 891조 2항"에 기초한 설정과 진상은 여전히 괜찮습니다.

* 민법 제 891조 아래에 해당하는 자는 상속인이 될 수 없다.
2. 피상속인이 살해당했음을 알고 이를 고발하지 않거나 고소하지 않은 자. 단, 그자에게 시비를 변별할 능력이 없을 때나 살인범이 배우자 또는 직계 혈족이었을 때에는 예외로 한다.

유산 상속이 진짜 동기라는 사실을 숨기고 별장에 모인 일족과 관계자들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이 진상을 독자에게 교묘하게 숨기고 경찰과의 두뇌 싸움을 그린 도서 추리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전개도 훌륭합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후지 5대호 지방 중 아사히가오카 야마나카코촌을 무대로 여정 미스터리 분위기를 선보인 것도 좋고요.

하지만 민법 제 891조 2항의 존재가 300여 페이지의 분량 중 약 200페이지, 즉 2/3 지점에서 드러나는게 문제입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흘러가며, 급격히 힘을 잃거든요. 이어지는 다쿠오의 조사로 '배우자 또는 직계 혈족은 예외'라는 점까지 밝혀지면서, 이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 인물이 단 두 명만 남게 되어버리게 되어 더 뻔한 전개로 흐르고요.

게다가 마지막에 범인인 와츠지 미치히코와 이치조 하루미가 1:1로 담판을 짓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오래된 서스펜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같은 작위적인 전개의 끝판왕이었어요. 악당이 아무런 실익도 없이 진상을 고백하며 여주인공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녀를 흠모하는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나 구해준다는건 지금은 멸종해버린 설정이라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이전까지 별다른 암시가 없던 하루미와 쇼헤이에게 갑작스레 연애 감정을 부여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쇼헤이는 어떻게 하루미가 어디 있는지 알았을까요? 그것도 경찰보다 먼저요?

상황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와츠지 미치히코는 요시에만 잘 회유해서 입을 다물게 한 뒤, 마코의 단독 범행으로 계속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전혀 없고, 진상을 아는 사람도 요시에와 마코뿐이니까요. 버티기만 했다면 그의 승리는 거의 확실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미를 납치해 살해하려 하다니, 어처구니없습니다.

요시에가 쇼헤이를 유혹하려는 시도 역시 전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하루미)가 엿듣고 있다는 전제에서나 성립하는 작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코의 뒤에 있는 인물이 미치히코나 요시에밖에 없다는 점에서 독자의 시선을 요시에 쪽으로 강제로 돌리려는 장치라는 건 알겠지만, 좀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핵심 설정만큼은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멋진 아이디어지만, 전개가 뻔하고 마무리도 작위적이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예전의 호평에는 절판본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는 개인적 감상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읽었던 모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일족이 모인 파티에서 유이한 두 외부인 중 한 명이 살해당하자, 일족은 다른 한 명을 범인으로 만들려 한다는 서늘한 작품이었지요. 이 작품처럼 제가 와츠지 일족의 일원으로 현장에 있었다면, 이치조 하루미를 범인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와츠지 요헤가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을 듣고 유혹하려 했다가, 요헤의 모욕적인 거절에 격분해 살해했다. 하지만 요헤의 반격에 함께 죽게 됐다는 시나리오,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