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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

2026/04/12

Chat GPT가 그린 히이로 사에코 경정 ("붉은 박물관" 시리즈)

전에 "십각관의 살인"의 주인공인 시마다 기요시를 Chat GPT로 그려 보았는데, 이번에는 "붉은 박물관" 시리즈의 히이로 사에코 경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히이로 사에코 경정은 국가 공무원 1종 시험에 합격해 경찰청에 들어온 커리어이면서도, 한직인 범죄 박물관 관장을 9년째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의사소통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탓입니다. 하지만 '날씬한 몸매와 그 위에 걸친 백의만큼이나 하얀 피부. 어깨까지 길게 기른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인형같이 차갑고 단정한 외모. 긴 속눈썹으로 에워싸인 쌍꺼풀진 커다란 눈.'으로 부하인 데라다 사토시가 '설녀'라고 부를만한 외모의 소유자입니다.

굉장히 만화적인 설정이지만, 이런 묘사가 아무래도 그림으로 그려내기가 쉬울 것 같아서, 이전 시마다 기요시 일러스트의 프롬프트를 조금 수정하여 그리라고 시켰는데, 결과물이 실로 놀랍습니다.

Chat GPT의 성능이 업그레이드 된 덕분인지, 묘사가 상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와 같이 그냥 일러스트로 사용해도 무방할 결과물을 뽑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일러스트레이터가 설 자리가 없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2025/07/20

도쿄의 뮤지엄을 어슬렁거리다 - 오타가키 세이코 / 민성원 : 별점 2.5점

만화가 오타가키 세이코가 도쿄 시내뿐 아니라 요코하마, 하코네, 유가와라, 사이타마 등 도쿄 근교를 포함한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직접 방문한 뒤, 그 경험을 일러스트와 함께 풀어낸 에세이집입니다. 저자의 시선과 감상이 담긴 일러스트가 좋아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느낌을 전해 줍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곳을 소개해드리자면, 도쿄 국립박물관은 저도 첫 일본 여행 당시 방문했던 기억이 나서 반가왔습니다. 저는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기나 모자이크 타일 벽 같은 세세한 디테일이 특히 인상적으로 묘사되는 덕분에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은 파울 클레를 비롯해 히가시야마 가이이 같은 일본 국민 화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장소일 것 같고요.
 요코하마 미술관에서 열렸던 동서양의 교류를 주제로 한 기획전 소개도 좋았습니다. 판화가 하세가와 기요시, 설치미술가 스가 기시오, 그리고 달리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당시 전시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스미다구의 호쿠사이 미술관에서는 '가나가와오키의 큰 파도' 같은 대표작을 상설 전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입니다.
도쿄 근교 하코네에 위치한 랄리크 미술관은 아르누보 유리공예의 대가 르네 랄리크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공간으로, 오리엔트 특급 열차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리소설 팬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어질 만한 장소입니다.
사이타마 국립 현대 미술관의 의자 컬렉션도 흥미로운데, 전시된 의자에 직접 앉아볼 수 있다는 점은 흔치 않은 경험일 것입니다. 입장료가 단돈 200엔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가성비 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곳입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뮤지엄 공간과 건축의 아름다움을 조명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사쿠라 조소관은 '동양의 로댕'이라 불리는 아사쿠라 후미오가 설계한 공간으로, 붉은 마노를 갈아 벽에 바르고, 외벽에는 전복 껍질을 가루 내어 덧칠했다는 설명만으로도 그 정성과 고집이 전해집니다. 단게 겐조의 작품이라는 요코하마 미술관, 유서깊은 료칸을 개축했다는 유가와라 미술관,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한 국립신미술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는 국립서양미술관 역시 건축물만 보아도 좋을 것 같고요. 특히 국립서양미술관은 일본의 유명했던 미술품 수집가 마쓰카타가 수집했던 컬렉션 중심인데 밀레, 마네, 모네, 고흐 등 유명 작가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있다니 빼 놓기 어렵지요. 이 정도 전시품에 입장료 500엔은 너무 싼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간단한 주위 소개도 볼거리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 현대미술관이 있는 기요스미시라카와는 커피 애호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동네라고 합니다. 미술 감상과 함께 거리 산책, 카페 탐방까지 더해진다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입니다.

컵 누들 뮤지엄이나 에비스 맥주 기념관 같은 공간들도 저자 특유의 호기심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집니다. 특히 요코하마에 위치한 컵 누들 뮤지엄은 음식에 대한 책을 발간한 경험이 있는 제 입장에서 더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네요. 마침 관련 책도 읽어본 적이 있고요. 에비스 맥주 기념관도 첫 일본 여행 당시 방문했던 곳인데, 또 가 보고 싶어집니다. 도쿄 스테이션 갤러리처럼 기차역 안에 위치한 미술관도 새로운 발견처럼 다가왔고요.

이렇게 저자의 시선을 따라 읽다 보면, 책 속의 여러 미술관을 메모해 두고 언젠가 직접 방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책의 상당수가 기획전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이미 끝났을 전시에 대한 내용은 독자 입장에서 실용성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상설 전시나 소장품 중심의 소개가 더 많았더라면, 아니면 뮤지엄 주변의 관광 정보가 더 곁들여지는게 보다 활용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겁니다. 또한, 박물관들을 지역별로 묶어서 지도와 함께 코스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더라면 여행자에게 훨씬 더 유익했을 텐데, 저자 주관적인 구성으로 묶여 있는 탓에 실용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흥미도를 찾기 어려운는 뮤지엄들이 등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담배와 소금 박물관, 도라상 기념관 등은 개성은 있으나, 일부 독자에게는 굳이 찾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공간일 수 밖에 없지요. 또 모든 주석을 책 뒷부분 미주 형식으로 처리한 것도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본문 하단에 각주를 바로 넣는 방식이었으면 훨씬 읽기 편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또는 근교 여행을 계획 중인 분이라면, 이 책에서 소개된 뮤지엄 중 한두 곳을 골라 직접 둘러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책 속의 어슬렁거림을 실제 여행으로 확장해 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여, 혹시 도쿄에 여행간다면 하루 정도 뮤지엄 둘러보는 코스가 무엇이 좋을지, 제 기억에 남은 뮤지엄 중심으로 ChatGPT에게 물어보았는데 아래 코스를 추천하네요. 우에노 미술관 트리오 코스는 다음 여행에 참고해야겠습니다.1~2년 안에 꼭 가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코스 1: 우에노(Ueno) 미술관 트리오

도쿄 국립 박물관 (Tokyo National Museum) → 국립서양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 도쿄도 현대미술관 (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장점: 모두 우에노 공원 내 도보권. 이동 시간 최소화, 하루에 세 곳 방문 가능

코스 흐름: 도쿄 국립 박물관 (추천 관람 2h) – 일본·아시아 전통·불교미술과 국보 컬렉션이 압도적 → 도보 5분 → 국립서양미술관 (추천 관람 1.5h) – 피카소, 고흐, 폴록 등 서양미술 정수 → 도보 5분 → 도쿄도 현대미술관 (추천 관람 1.5h) – 국제전시와 현대미술 대규모 기획전

총 소요 시간: 관람 5h + 이동 10분 + 휴식/점심 포함 약 6시간 → 오전 9시 시작 시 오후 3~4시 일정 종료 가능

코스 2: 도쿄 북·서쪽 모던 아트 여정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MOMAT) →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또는 스미다구 호쿠사이 미술관

장점: 일본 근대·현대 미술 → 전통 장식 미술 순으로 다양한 감상 가능

코스 흐름: MOMAT (Takebashi 역) – 2~3시간 → 이동: 지하철 도자이선 → 오모테산도역 환승 → 긴자선 →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1520분) 관람 1.52시간 또는 지하철 이동 → 스미다구 호쿠사이 미술관 (약 20~30분 이동, 1–1.5시간 관람) 

총 소요: 관람 3.55h + 이동 4060분 → 여유 있게 오후 일정 종료 가능

2026/04/10

기억 속의 유괴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5점

저자의 "붉은 박물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작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않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단편다운 기발하고 신선한 부분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록작 전부가 빼어나지는 않고, '설녀' 히이로 사에코 관장의 만화적인 설정은 여전히 별로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고생 추락사 사건"

1991년 2월, 기타구 도립 니시가하라 고등학교에서 2학년 여학생 후지카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후두부를 화단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친 것이 사인이었고, 사건 당시 아래층에서 일하던 작업자는 옥상에서 한 소녀가 "이제 곧 작별이네요.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유리코가 선배에게 고백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졌고, 같은 미술부 3학년 남학생 세 명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고 공소시효까지 만료되었습니다.

'붉은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던 사건의 전제를 뒤집어 버립니다. 당시 고백한 사람은 유리코가 아니라 그녀의 후배인 1학년 여학생이었고, "이제 곧 작별"이라는 말 역시 죽음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 전학을 뜻하는 말이었다고요. 그래서 당시 1학년생 가운데 전학을 간 학생을 추적해, 그 학생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연쇄 방화 사건"

1990년, 후추, 고쿠분지, 구니타치, 다치카와 일대에서 연쇄 방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이나 교환 방화설은 설득력을 잃었고, 여러 건 가운데 한 건만 진짜 목적이고 나머지는 위장이라는 해석도 방화 횟수가 너무 많아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범인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건의 실마리가, 범인을 신고하려다 살해당한 가타노 사치에의 전화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야채 장수 오시치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확인된 유일한 공통점은 방화 대상이 된 집들이 모두 24~25년 전에 지어졌다는 점뿐이었습니다.

사에코는 우선 소거법을 이용해 범인이 찾고 싶어 했던 대상들을 추려냅니다. 소방관은 다른 사람이 출동할 수 있어서 제외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동시에 특정한 조건을 가진 집들을 계속 태웠다는 점을 연결해 사건의 목적을 밝혀냅니다.

그렇게 해서 추리해 낸 진상은 현장검증 책임자 벳쇼가 진범이며, 그는 연쇄 방화가 일어나면 동일한 수사 인력이 반복적으로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특정 시기에 지어진 집들 가운데 한 곳의 바닥 밑에 묻혀 있을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안의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켰습니다. 시신이 훼손되거나 혼동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시치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고, 연쇄 방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통해 범인의 목적과 정체를 밝혀 나가는 추리도 빼어납니다. 어머니의 사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치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단점이 조금 거슬리지만, 큰 흠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토막 사체 사건"

1999년 3월 23일,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머리와 몸통, 양팔의 위아래 부분, 양다리의 위아래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위가 관절을 중심으로 절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보통 토막 사체는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절 부위를 추가로 정교하게 잘라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두고 흥미로운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사에코는 범인이 "가동 범위가 큰 관절"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고 보고, 이것이 시신의 마지막 자세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는 죽은 뒤 사후 경직이 일어나 특정 자세로 굳었을 것이고, 그 자세만 보면 범행 현장이나 범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이지요.
또 범인은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굳은 자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시신을 관절 위주로 절단해 유기했다는 점을 통해 사에코가 지목한 범인은 피해자의 지인 쓰카모토 가즈오였습니다.

피해자는 가즈오의 중고차 가게에서 차를 타며 자주 놀았는데, 차에 앉아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 뒤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피해자가 운전하는 자세로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즈오는 피해자의 아내 오리에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남편 호소다의 성으로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막고 싶어서 시신이 빨리 발견되도록 유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처럼 사후 경직으로 범행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절'을 제거했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네요. 정말 획기적입니다. 단편 특성상 용의자가 몇 명 등장하지 않아서 범인이 빠르게 짐작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회사원 살해 사건"

1990년 3월 14일, 미나미시나가와에서 회사원 후지시로가 살해당했습니다. 후지시로는 주변 동료들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게 만들고, 그런 상황을 즐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많았고, 사건 역시 원한 관계를 중심으로 수사가 전개되었지만 유력한 용의자에게 알리바이가 있어서 결국 미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평균 이하였던 졸작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에코는 후지시로가 속한 재료과 멤버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혀 가는데, 그 전제부터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협박이나 금전적 압박이 특정 부서 사람들에게만 향했을 리 없으니까요.
또 후지시로의 집에 있던 의자의 위치를 보고 그가 어깨를 다쳤다고 추리하는 부분까지는 흥미롭지만, 그것이 사건 해결의 핵심 근거가 되는 과정은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의자를 무엇에 썼는지는 피해자가 죽었으니 밝힐 수 없기도 하고요. 청소하느라 빼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에 더해 진범 사와모토가 구보데라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을 빼앗았다는 반전은 최악입니다. 앞서 구보데라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제시해 놓고, 나중에 사실은 그 인물이 이미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고 뒤집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를 납득하게 할 만한 사전 단서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억 속의 유괴"

26년 전, 다섯 살이던 토다 나오토가 유괴당했습니다. 당시 범인은 몸값을 요구했지만, 결국 별다른 이유 없이 나오토를 풀어주었다.

친모가 나오토와 동반 자살을 할 목적으로 납치했지만 양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뒤, 양부모는 친모의 사체를 유기하고 나오토가 납치당한 기억을 왜곡시키기 위해 유괴 사건을 자작했다는 것이 진상입니다.

양부모가 매년 어디론가 참배를 갔던 점, 범인의 이상했던 당시 몸값 요구 같은 단서는 있지만 친모의 정체 등 독자에게 공유되지 않는 정보가 많아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납치와 유괴,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소품 느낌을 준다는 점도 별로였고요. 납치와 살인은 우발적이고, 유괴가 작위적인 연극인 탓이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4/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8. 만화경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8. 만화경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임차인들이 사무실에 들러 연락 사항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전화 사용도 많아져 통화 소리와 담배 연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탓에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 다음 날,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데츠바가 마이코를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토모히로의 초칠일 전인 토요일로 정했고, 시간은 추후에 알려주겠다고했다. 카오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내 생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라고 상기시켰었다.

그래서 시간 확인차 카오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마와리 집안의 가정부였는데, 꼼꼼한 성격 탓인지 카오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무실 전화번호를 꼼꼼히 물어보았다.

토우이치는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장례식 이후 마사오를 만나지 못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녘에는 마사오의 꿈을 꾸었다. 마사오는 죽은 줄 알았던 토모히로와 팔짱을 끼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사오는 샹보르관을 나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토시오는 가슴이 먹먹해져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맛은 이상하게 달콤했고, 아침에도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9만 파운드짜리 자동 음악 기계인가 ......"

아까부터 신문을 읽고 있던 후쿠나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동 음악 기계?"

마이코가 되물었다. 요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술품 경매입니다. 영국 버크셔 백작의 성, 멘트모어 타워스가 경매에 나왔다고 하네요."

"백작님도 돈에 쪼들리는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문제지요. 7대째가 막대한 상속세를 물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은 달마니라는 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눈에 띄는 미술품은 전부 그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일부라도 대단한 재산인가 보군요."

"그렇죠. 세계 각국에서 3만 명의 바이어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경매는 열흘 동안 계속된다고 합니다. 멘트모어 타워스는 18세기부터 백 년 동안 수집한 프랑스 그림과 가구, 도자기, 시계 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니까요요.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책상이 5만1천 파운드, 방금 말한 두 마리의 새가 조각된 루이 15세의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 루이 16세 시대의 자카드 로스가 만든 필사 인형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필사 인형이라고 하면 글씨를 쓰는 인형인가요?"

"그렇겠지요."

"설마 인형 안에 아이 같은 걸 넣는 장치는 아니겠죠?" 

"하하하, 우다이 씨가 말씀하신건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인데요, 그런 트릭도 물론 있었지만  18세기에는 이미 카라쿠리 인형의 기술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트릭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만의 힘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글씨를 쓰는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지루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그만큼 트릭을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장난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트릭으로 보충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마술은 기계공에서 마술사의 손으로 넘어갔고, 기계공은 기계의 가능성만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명한 자크 드 보캉송이 활약했습니다. 보캉송은 클레오파트라의 뱀, 파우누스 신의 옆구리 피리 부는 사람 등 많은 카라쿠리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리였습니다. 이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헤엄을 치고,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데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목을 쭉 뻗어 쪼아먹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까지 했다고 하네요. 이 오리는 훗날 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우당(Robert Wodan)의 손에 의해 수리되었고, 동시에 모든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하고요."

"마술사가 인형을 고쳤다고요?"

"그 당시 우당은 아직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그 후 우당은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 다양한 카라쿠리를 만들었지요. 줄타기하는 인형, 기계 없이 움직이는 시계, 컵과 구슬의 기예를 하는 인형까지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마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나중에는 마술사로 변신해 마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지요. 오리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수영하는 오리를 팔던 장사치가 있었어요."

"저는 몰라요."

"뭐 오래 전 이야기니, 그렇겠죠. 이 오리는 더러운 통 안에 떠서 신기하게도 스스로 헤엄쳐 다녔어요. 그리고 가끔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물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기계 장치인가요?" 

"아니요. 보캉송의 오리도 저렇게 생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물의 움직임에는 기계에는 없는 불규칙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노점상 오리는 그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오리를 사면 어디서든 팔고 있는 평범한 셀룰로이드 오리를 줍니다.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그 종이에는 오리를 움직이는 비결이 적혀있었죠."

"네?"

"<오리의 목에 실을 달고 그 끝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매달아 두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닌가요?"

마이코는 입을 열었다.

"사기는 아닙니다. 속임수죠. 에도 시대부터 있던 장난감이에요. 원래 이름은 '부동새'였어요. 가마우지를 본뜬 장난감이었지요. 분세이 말기, 우에노야마시타 부근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셀룰로이드 오리는 장사치들 사이에서는 '즌부리코'라고 불렸습니다. ......반대되는 트릭도 있었어요. 이것은 만든 시체 인형을 살아있는 까마귀가 쪼아댄다는 것이었죠."

"시체 인형?"

"네, 막부 말기에는 기괴한 구경거리가 활발하게 등장합니다. 이른바 시체 세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익사체를 모방한 인형으로, 물벼락에 맞은 얼굴 등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시체를 진짜 까마귀가 쪼아댔다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시체에는 미꾸라지가 숨겨져 있었군요."

토시오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역시 우다이 씨네요. 맞아요. 재미있는 것은 미꾸라지를 너무 많이 먹은 까마귀가 쓰러졌다는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즌부리코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팔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사람이라면 화를 낼 것 같네요"

"그게 문제에요. 옛날 사람들도 화를 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싼 거지요. 저런 걸작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게 나을거에요.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테고요. 아이디어라고 하면, 187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의 메카니컬 뱅크도 아이디어만으로 팔렸죠."

"메카니컬 뱅크? 들어본 적 없는데요?"

"기발한 구조의 저금통이었는데요. 주물로 만든 견고한 구조로 동전을 넣는 상자 위에 사람이나 동물의 장난감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이 중에 ‘조련사’라는 저금통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동전을 조련사의 손에 들고 상자에 달린 레버를 누르면 옆에 있던 개가 뛰어올라 조련사의 동전을 물고 저금통 안으로 떨어트립니다. ‘광대’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레버를 누르면 입이 열리고 손이 움직여 동전을 입에 집어넣고요. 가장 걸작은 '정치가'라는 저금통입니다. 큰 의자에 꼿꼿이 앉은 정치가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무게에 의해 팔이 움직여 주머니에 만들어진 동전 넣는 구멍에 동전을 쏙쏙 집어넣습니다. 정치가의 무표정한 얼굴이 참 웃기죠. 그 외에도 마술사, 펀치 앤 주디, 엉클톰, 링컨 등 200여 종의 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금통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모터가 움직이면서 상자 안에서 해골 손이 나와서 동전을 잡고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장난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그런 게 메카니컬 뱅크, 즉 기계식 저금통입니다.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모터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런 소박한 점이 좋았어요.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쿠고(落語) 속에만 남아 있지만, 히다리 진고로(ひだりじんごろう)가 만들었다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마네키네코(招き猫)가 그것이에요. 손바닥 위에 정해진 수의 동전을 올려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장치인데, 이것도 메카니컬 뱅크, 기계식 은행의 일종이었을 것 같네요."

"히다리 진고로는 장난에 관련된 전설이 많네요."

"맞아요. 카라쿠리에는 전설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라쿠리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현존하는 물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나무와 종이로 만든 집에 살았고, 도시의 역사는 큰 화재의 반복이었으니까요."

"외국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야 많죠. 물론 중요한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하지만 런던 박물관에 가면 17세기 마스켈라인의 카라쿠리을 볼 수 있습니다. 조라든가 사이코라든가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메카니컬 뱅크도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취재한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요. 뉴욕의 사미엘 F 프라이어 씨가 수집한 것으로 주모우의 카라쿠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어요."

"주모우라고 하면 비스크 인형이네요."

"우다이 씨, 잘 알고 계시네요."

"저를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닮았네요. 주모우의 작품은 카라쿠리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나 한다니까요…."

소우지 씨는 주모우의 인형을 몇 점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 기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도중에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카츠 씨 회사, 정말 바쁘신가 봐요. 몇 번을 전화해도 통화 중이었어요."

"미안해요." 

카오리는 시간을 지정했다. 내일 1시에 나사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우다이 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카오리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네, 카네이션이 좋아요. 연홍색으로, 아셨죠?"

카오리는 그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이 뭔지 알아?"

다음 날, 나사 저택으로 향하는 에그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렇겠지. 꽃말은 열애야."

"...... 그러나 그녀가 지정한 겁니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의외로 진심인걸까?"

"카오리 씨에게는 슌키치라는 약혼자가 있어요."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이지?"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못 올거야.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앞둔, 장난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니깐. 토요일이라고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해. 특히 젊은 평사원은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어. 괜찮아. 정 어려우면 카오리의 억지에 당한 척 하라고."

어제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니 씻겨 내려간 단풍의 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나사 저택의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인상보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저택 건물의 비틀림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벽은 원래는 선명한 주홍색으로 빛났을 터였지만 지금은 기괴한 검붉은 색이었고, 벽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담쟁이 덩굴이 겹겹이 쌓인 모양은 마치 거대한 뱀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당나라 풍의 기와에서 튀어 나와있는 푸른 오각뿔 모양의 탑은 기괴한 조합으로 보였다.

흙담은 곳곳이 무너져 무질서하게 관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당초 문양의 철책문은 열린 채였다. 토시오는 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놓여 있다. 소우지의 애마(愛車)일까? 토시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저택 맞은편은 낮게 경사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왼쪽의 기하학적인 녹색 면이 이야기로 들었던 미로인 것 같다. 연못과 미로 건너편에는 녹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오리는 빨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카오리만 알고 있던 토시오에게 카오리의 모습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카오리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가슴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까지의 카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시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카오리의 뺨에 금방이라도 수줍은 홍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안내할게요."

카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탑 아래가 홀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카오리의 방이었다. 계단, 난간, 문짝의 나무는 모두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지금까지의 건물 인상과는 달리 밝은 색채로 가득했다. 창문이 두 개 있는데, 한 쪽 창문을 통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가 오빠 방, 그 앞이 아버지 방이에요."

카오리 씨가 설명했다. 그 안쪽이 조리실이고, 가사 도우미의 작은 방이 있다고 한다. 2층은 카오리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아틀리에라고 했다.

"그런데 아틀리에로 마사오 씨가 이사를 올지도 몰라요."

"마사오 씨가?"

토시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두 사람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제가 권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햇어요. 방금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오 씨는 이 집에 계신가요?"

"그래요."

카오리는 하얀 화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연신 모양을 다듬었다.

"뜻밖의 선물 ......"

카오리는 꽃병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꽃병 옆에는 길쭉한 화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오리는 마사오와 소우지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사오를 불러들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리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전부 카오리 씨의 작품인가요?"

마이코는 아까부터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카오리의 방에 화사한 색감이 넘쳐나는 것은 밝은 색감의 그림들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적인 면과 선의 교집합이 선명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조금 과장된, 시제품 같은 느낌이에요."

카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이코는 그 중 한 장의 그림에 마음이 꽂힌 듯 했다. 중앙에 패턴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림이었다.

"만화경을 보는 것 같네요......"

마이코는 이렇게 평했다.

"훌륭해요."

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만화경이라는 제목이에요. 언젠가 만화경을 보다가 그 그림의 주제가 떠올랐어요. 만화경의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어요."

토시오는 만화경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만화경이라고 하면, 장난감?"

"그래요, 만화경. 카츠 씨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은 멋진 만화경들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카오리는 일어서서 유리장 문을 열고 예쁘게 채색된 원통 몇 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원통은 미세한 체크 무늬가 있고 한쪽에 작은 렌즈가 달려 있었다.

"만화경의 원형은 영국의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물리학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원형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색종이를 사방의 거울에 비춰서 다른 쪽의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인데, 이 만화경에는 그 종이가 없죠. 파타노스코프라고 해요."

토시오는 원통에 눈을 돌렸다. 원통 안쪽에서 마이코의 얼굴이 여러 개로 분해되어 겹쳐 보였다. 그 기형적인 이미지에 숨을 죽였다.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망원경과 만화경을 합친 거죠."

파타노스코프는 마이코에게 넘어갔다. 마이코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파생품 중 하나인데, 작은 조각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통을 움직이면 안쪽의 거울이 움직여요."

그 작은 조각은 불규칙한 색종이 등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통을 움직이면 인물이 요염하게 얽히고 설키며 갈라졌다.

"통이 아닌 만화경도 있어요. 스피아로스코프라는 것은 두 장의 맞닿은 거울 아래에서 무늬가 있는 원반을 돌려서 그림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거예요. 안티스코프예요."

카오리는 또 다른 검은색 통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내 얼굴 좀 보세요."

그것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카오리의 얼굴이 삐뚤빼뚤하게 휘어져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크고 작은 눈알이 흔들거렸다. 코만 거품처럼 날아와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만화경의 어떤 파생품에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불규칙한 형태도 순식간에 규칙적인 대칭으로 바꿔버리는 거울의 마술이죠. 그런데 안티스코프는 어떤 질서정연한 대칭도 비틀어 버리고 말아요. 원통 안의 거울을 구부러뜨린 것이겠지요. 이걸로 보면 인간의 형상은 모두 벨마이어의 인형처럼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 ‘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의 매력은 정돈된 형태가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하게 변하는 기괴함이에요."

토시오는 안티스코프로 카오리가 그린 만화경을 보았다. 색채가 뒤틀리고 흐르고 기묘하게 뒤섞여 마치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만화경에 열광하는 나를 보고 오빠가 만화경을 준 적이 있었어요. 작은 평범한 만화경이었어요. 한참을 들여다 본 나에게 오빠가 이상하다며 거울을 건네줬어요. 거울로 보니, 내 눈 주위에 동그랗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어. 만화경 눈과 맞닿는 부분에 먹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 장난이 심하지 않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정부가 들어왔다.

"......어르신께서 손님을 모셔다 달라고 하십니다."

마이코와 카오리가 방을 나갔다.

토시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바로 앞은 화단이었을 것이다. 잡초 사이로 기하학적인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 연못 쪽으로 튀어나온 석가산이 있고, 그 위에 기울어진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 서면 정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 앞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경사면 끝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물줄기는 연못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연못 왼쪽 안쪽에 있는 미로에 눈이 갔을 때였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볼품없죠?"

정신을 차려보니 카오리가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정원도 운치가 있지요."

토시오의 말에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 씨, 아첨을 잘 못하시네요."

카오리는 토시오와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 저 멀리."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쳐다보니 카오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 씨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마사오 씨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텐데...."

젊은 여성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감상에 젖어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카오리는 토시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우다이 씨 이야기란,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처럼의 배려이긴 하지만 마이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어려워 보이던데요."

"맞습니다 ......."

토시오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첨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대답은 당연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연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을 아시나요?"

카오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열애일 거에요."

"알고서 주셨군요."

"카오리 씨의 희망이었으니까요. 슌키치씨가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회사가 바쁘겠죠."

카오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당신, 대단해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좀 더 센스 있는 대사를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이런 건 어때요?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토시오는 카오리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시도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은, 진짜 미로가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제 미로에 관한 책도 조금 읽었죠."

"그럼 잘 알고 있겠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카오리는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등지고 정원에 면한 문을 열었다. 문은 무거운 기척을 내며 열렸다. 화단으로 나가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화단을 지나면,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로 굽이굽이 연못을 향하고 있었다. 연못은 예상외로 물이 맑고 깨끗했다. 카오리의 모습을 발견한 새하얀 오리 서너 마리가 헤엄쳐 왔다.

"샘이 의외로 풍부해요."

카오리는 한 마리씩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을 따라 왼편으로 가니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 높은 담장 같은 울타리가 보였다.

카오리는 울타리 앞에 섰다. 그곳은 울타리가 끊어지고 안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입구인데, 자신 있어요?"

"있습니다."

토시오가 대답했다.

"그럼 안내해주세요."

"카오리 씨는 미로 길을 모르시나요?" 

"몰라요. 어렸을 때는 오빠랑 자주 놀았는데, 그 때는 작은 나뭇가지의 조합이나 길의 느낌으로 절대 길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는 그런 직감이 예민하잖아요. 카드 뒷면의 작은 얼룩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미로에 계속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도 둔해졌을 거예요."

"그럼, 제 손을 잡고 가시죠."

토시오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토시오의 오른손을 잡았다. 토시오는 미로에 들어가자마자 왼손을 뻗어 울타리 왼쪽에 댔다.

"뭐하는 거에요?"

"미로 책에 나온 방법이에요. 이 왼손은 절대로 울타리에서 떼지 말고 걸어야 해요.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왼손을 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다만,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만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길은 쾌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울타리 덤불이 길을 좁게 만들고, 나뭇잎에는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묻어 있었다.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왼손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타원형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의자요. 길을 잃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돌의 중앙에는 빗물을 통과시키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토시오는 의자 앞을 지나쳤다.

꽤나 긴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도착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둘이 들어왔던 원래의 입구였다.

"실패했네요."

"아닙니다. 자, 아직 손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책에 보면 미로를 한 번 빠져나와서 바깥쪽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융통성 없는 방법이네요, 뭐, 괜찮아요."

두 사람은 미로의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이 미로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뒤에서 카오리가 말했다.

"내기할까요?"

"무엇에요?"

"만약 카츠 씨가 골인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는 잘못하는데요."

"하지만 미로에는 자신이 있지요?" 

"네, 있어요."

"있어요. 그럼 내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카츠 씨에게 키스를 할게요."

카오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다시 입구로 나왔다.

"내가 이겼네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토시오는 카오리의 손을 놓았다. 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 미로와 복연결 미로 두 가지가 있어요. 단연결 미로라면 지금의 방법으로도 골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미로는 복연결 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연결이 뭐예요?"

"이 미로의 울타리를 모두 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 끈의 한쪽 끝을 잡고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단연결 미로라면 모든 끈이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복연결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땅 위에 남겨진 밧줄이 생기게 됩니다. 햄튼 코트의 미로 역시 복연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연결 미로에서도 골인 지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뭐라고요?"

"예를 들어 백묵 등으로 길의 왼쪽에 선을 긋고 가는 거죠. 모퉁이를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양쪽에 두 줄로 체크된 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양쪽에 두 개의 선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피해서 지나가야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최단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고요. 즉, 표시된 길 하나만 따라가면 되니까요."

"좋은 방법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잠입한 테세우스는 미녀 아리아드네스로부터 받은 비단실 구슬을 풀면서 나아갔다고 하죠. 테세우스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비단실을 가져올까요?"

"백묵을 준비해 왔어요."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백묵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왼손으로 벽을 쓰다듬으면서 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는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올게요."

카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기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알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요."

카오리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최단 거리를 찾아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달려갔다.


미로를 백묵으로 체크하며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땅은 어둡고, 백묵은 쉽게 끊어졌다. 땅에 웅크리고 선을 긋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탓에 토시오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허리를 크게 펴야 했다. 카오리는 현명하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나중에 경찰 수사관에게 끈질기게 추궁을 당하게 되지만, 십오 분, 삼십 분 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폭발음은 한 번 뿐이었다. 토시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작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물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이 예민해져 있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금세 작아졌고, 곧 사라졌다.

토시오는 무언가 모를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느다란 백묵의 선을 따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폭발음의 방향은 물론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미로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잘 살펴본 덕에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만은 면했다.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그 길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화단 쪽으로 올라가려다 마주오던 마이코와 부딪혔다.

"무슨 소리야?"

마이코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어요. 미로 속에 있었으니까요."

"연못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연못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로 안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그럼 전망대 정자 쪽으로 가보자."

마이코는 방금 왔던 화단 길을 되돌아갔다. 저택 앞에 소우지가 서 있었다.

"오, 비스크, 아니, 우다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소우지 씨는?"

"제 방에 있었어요. 왠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보았습니다."

"정자 쪽으로 가 보시죠."

세 사람은 일단 저택 앞을 나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공터 앞을 지나 정자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갔다.

정자에 도착하기 전,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붉은 옷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마사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오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마사오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토시오는 카오리를 일으켜 세웠다. 토시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카오리의 얼굴 밑에 고인 피였다.

카오리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왼쪽 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알이 부서지고 찢어진 붉은 살덩어리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매캐한 피 냄새 속에서 토시오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카오리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사라지고 주위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