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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18/12/31

2018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7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15차, 열 다섯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8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40 (52)권, 기타 장르문학 3 (3)권, 역사서 9 (1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8 (9)권, 기타 도서 21 (20)권으로 모두 91 (101)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 작년보다는 독서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한달에 7~8권 수준이면 뭐 나쁘지는 않네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8년 베스트 추리소설 :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올해 추리 분야 도서 중 유일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소설이 아니라는게 유일한 단점입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2018년 워스트 추리소설 : "유령탑" 

사실 모리 히로시의 사이카와 모에 시리즈 중 한 권인 "지금은 더 이상 없다"도 올해 별점 1점을 받은 망작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과 그림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고 팔아먹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빠 단독 워스트로 선정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과 설명을 제외하면 건질만한 부분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디 다른 분들은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8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3권, 그 중에서도 두 권만이 정식 출간된 책이라 따로 선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마음의 지배자" 모두 좋았어요. 두 작품 모두 단편집인데 별점 4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말이죠.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8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원더랜드"

역사 관련 서적을 10권 이하로 읽은건 오랫만이네요. 다행히 별점 4점짜리 책은 언제나처럼 존재합니다. 유희와 놀거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한 이 책입니다. 제 리뷰로는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취미와 오락, 유희 관련 문화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년 워스트 역사 도서 : "만물의 유래사" 

미시사 서적과 백과 사전류를 좋아해서 충동 구매한 책인데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위해 만든 시대 착오적인 결과물입니다. 확실히 백과 사전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2018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늑대를 요리하는 법"

올 한해 제법 많이 읽었는데 별점 4점짜리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은 충분했을터라 베스트 도서로 선정합니다.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참고가 될 내용도 많은 좋은 책이에요.

2018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소주 이야기"

미시사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두서가 없고, 소주 자체에 대한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저자 스스로 석달 자료 조사를 거쳐 열흘 만에 쓴 책이라고 하는 말 만큼이나 내용이 두서없는 졸작입니다. 저렴한 가격만이 장점입니다.

2018년 베스트 기타 도서 :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이번 해에 기타 도서의 베스트는 별점 4.5점에 빛나는 이 책입니다. "깃털",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아주 오래된 서점"의 별점 4점 트리오는 조금 아깝네요.

2018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올해 기타 도서는 별점 2점 아래가 없어서 워스트는 딱히 꼽지 않겠습니다. 별점 2점으로 워스트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결산평 : 15년 째라니... 강산이 변해도 이제 한번 반이 변했네요.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냈다는게 너무나 기쁩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20/04/03

[번역] 2DK 개미지옥 - 아토다 다카시

일전에 졸역한 'A 사이즈 살인사건'을 올리며, 반응이 괜찮으면 다음 편도 번역하겠다고 약조한 바 있습니다. 너무나도 엉망인 번역 탓에 송구스럽지만, 즐겨주신 분이 계신 듯 하여 다음 편인 '2DK 개미지옥'도 소개해 드립니다.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추리적으로는 전작보다 훨씬 나은 작품이라 생각되니, 사회적 거리두기로 한창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관리 측면에서 좀 길지만 한 편으로 올리는 점, 참고 부탁드려요.

도요코 선의 N 역에서 하차하여 서쪽의 개찰구로 나오면, 길고 완만한 오르막 언덕이 나타난다.
"아저씨, 비켜비켜! 비켜요!"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아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위험하잖아!"
사무라 에이스케는 다급하게 보도 옆으로 몸을 피했다.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옆을 지나갔다.
언덕의 길이는 50여 미터, 경사는 78도. 확실히 스케이트보드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학교에서는 분명히 도로에서 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시키고 있겠지만, 개구쟁이 아이들이 귀담아들을 리가 없다.
"뭐, 다른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사무라는 석양빛으로 길게 드러워진 아이들의 그림자를 뒤로 한 채, 다시 서둘러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면 바로 묘법사다. 절에는 산호(山呼)와 사호(寺呼)가 있는 법이니, 묘법사도 정식으로는 어딘가산 묘법사라고 불러야겠지만, 사무라도 산호까지는 모른다. 똑같이 시체를 취급하는 장사라도, 수사 1과의 형사가 산호까지 알 정도로 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 리는 없다.
산호가 있는 건 절이 분명 산 위에 있기 때문이다. 묘법사 정문까지 긴 고갯길이 이어진 것에서도 그러한 산호의 유래를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 주변도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적한 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회색 빌딩과 콘크리트 포장길이 무표정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묘법사만 홀로 고집을 부리듯 화려하게 자연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채로 가는 쪽문을 빠져나와 마당 쪽으로 고개를 내밀자, 형형색색의 튤립이 피어 있는데, 툇마루를 따라 화려한 와인잔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
사무라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툇마루 쪽을 향해 말했다.
"여어. 기다렸다고."
감색 티셔츠를 입은 주지 스님이 사무라를 알아채고 고개를 까닥였다. 스님 앞에는 몇 년 전 은거한 노사가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주지 스님은 노사의 머리를 면도하는 중이었다. 노사는 치매가 시작된 후에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이겠지. 사무라와 친한, 현재의 주지 스님은 데릴사위로 노사는 그의 장인이다. 주지 스님이 수행승이던 시절부터 장인의 머리를 깎는 일은 그의 몫이었을 거다. 그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으로, 평소엔 멍한 얼굴을 하는 노사도 오늘만큼은 위엄을 떨치듯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었으며, 그 뒤에서 티셔츠를 입은 스님이 얌전히 면도하는 모습은 시간이 십수 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곧 끝나니까. 2층에서 기다리게."
지켜보던 사무라에게 주지 스님이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푹 쉬고 있으라고."
사무라는 현관으로 돌아 나온 뒤, 젊은 수행승의 안내로 언제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는 아니나 다를까 벌써 바둑판과 방석이 갖추어져 있었다. 오월의 바람이 어디선가 꽃향기를 날라와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인사건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이렇게 상쾌한 봄날 저녁 스님을 상대로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지내고 싶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스님이 큼직한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살인 담당 형사로는 아직 신출내기로 쉰을 넘은 주지 스님과는 부모 자식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났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서로가 상대보다 조금 강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세상에 이렇게 멋진 적수는 없다.
"자, 시작할까?"
스님은 바둑판 덮개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잡을게요'
사무라가 선을 잡았다.
"정선."
"네."
잡은 돌을 세어보니 열한 개였다. 흑을 잡은 사무라는 가벼운 묵례 후, 우상귀에 돌을 두었다. 돌은 고급품으로, 1.5cm 정도의 두께였다. 내려놓은 돌이 바둑판 위에서 살짝 떨렸다.
"오늘은 그쪽부터 두는건가?"
"우선 이쪽 집을 벌어 놓으려고요."
"그렇군."
번갈아 열 수 정도 둔 뒤, 사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혼잣말하듯 사건을 입에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시체가 마중을 나왔답니다."
돌을 집어 든 스님의 손이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이런, 벌써 교란 전술 시작인가?"
"천만에요. 이건 진짜 사건이에요. 지난주 시모키타자와에서 일어난 정말 기묘한 사건이지요."
스님은 사무라의 공격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부처님은 남자였나? 아니면 여자였나?"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아직 식사하기에는 좀 이르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항상 죄송합니다.'
안주는 죽순조림과 참치 초무침이었다. 닳고 닳은 스님 같으니라고. 술은 흠뻑 취할 정도로 마시고, 남의 살도 매우 좋아한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정말로 밝다. 살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묘법사의 사위가 되어 스님이 된 것 같은데, 스님이 되기 전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사무라도 아직 물어본 적이 없다.
수행승이 나가자 사무라가 말했다.
"부처님은 남자입니다."
"그렇군. 그럼, 부처님은 새 신부의 옛날 애인쯤이려나."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럼 신랑의 친구였나?"
"그렇지도 않고요."
"호오. 그럼 신랑, 신부,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고?"
"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 남자가 부부의 2DK 아파트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죽었는데 말이죠."
* 2DK : 방 2개 + Dining Room (식당) + Kitchen (부엌) 으로 이루어진 집
"아이고 부처님, 알몸으로? 그런데 이 돌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나저나 알몸으로 죽으면 안 되지."
스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구석진 돌을 공격해 들어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화요일, 5월 9일의 일입니다. 시모키타자와의 그린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이죠. 스즈미 코지와 스즈미 료코 부부로...."
"잠깐만. 아파트에 살던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닐까?"
".….…?"
"그렇지만 맞잖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직 부부가 아니었으니까."
"아하하하. 스님의 억지는 당할 수 없네요.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결혼한 건 5월 3일입니다. 아파트를 빌린 것은 4월 중순이고요. 남자가 결혼식까지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뒤 일주일간 규슈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돌아와 보니 세상에나! 벌거벗은 남자가 죽어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 이건 안 돼. 방심하면 안 되지. 엄청난 실수를 할 뻔했군."
스님은 입을 삐죽이며 사무라를 노려보았다. 오른쪽 구석에서 사무라의 흑과 대치 중인 백의 생사가 불안했다. 스님은 얼굴을 바둑판에 묻고 그 돌 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무라는 어려운 사건을 맡을 때마다, 고양이가 다래나무에 이끌리듯 묘법사를 찾는다. 그래서 스님은 웃으면서 '자네는 뭔가 풀 수 없는 사건을 만나면 절에 발길을 옮기는군'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의 방문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번 사건은 정말로 기묘했다.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사건이 신고된 날은 5월 9일 화요일이었다. 그날, 시모키타자와의 번화가로부터 조금 뒷골목에 들어간 3층짜리 아파트에 스즈미 코우지, 료코 두 사람이 돌아왔다. 코우지는 굵은 체크 재킷에 밤색 바지, 료코는 꽃무늬 투피스에 연지색 모자를 차려입었다. 낡은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막 신혼여행을 끝낸 뒤, 걸음걸이도 가볍게 둘만의 스위트 홈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신랑이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도 기다릴 리 없는 방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실내에 공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신부가 이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결혼식 전에 짐을 나르고 청소를 하거나, 혹은 내친김에 미래의 배우자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이러쿵저러쿵 몇 번이나 이 아파트를 찾았었다. 그러나 정식 거주자로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시각은 오후 4시가 넘었다. 실내는 밝았다.
"나올 때 커튼 치는 걸 깜빡 한거야?"
며칠 전 신랑은 이 방에서 결혼식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음, 그랬었나?"
코우지는 자신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료코는 시원시원하게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런 다음 오늘부터 자신이 지배하게 될 땅을 점검하듯 부엌을 살펴본 뒤, 욕실 문을 열었다. 순간 숨을 삼키는 듯한 기색이 흐르고, "꺄악!"이라는 비명과 함께 료코가 도망치듯 튀어나왔다.
"왜 그래?"
"사, 사, 사람이......"
료코는 남편에게 매달려 욕실 쪽을 가리켰다. 코우지는 옆에 매달아 놓은 프라이팬을 손에 들고 조심조심 욕실로 향했다. 프라이팬을 든 것은 무의식중에서도 무기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기는 필요 없었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욕실 좁은 욕조 속에서 한 남자가 목을 늘어뜨린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죽었어."
"정말?"
"틀림없어……. 가스가 새고 있어."
확실히 욕실에 발을 들여놓자, 날카로운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즈미 코우지는 서둘러 욕실 창문을 열고 가스 욕조의 밸브를 잠갔다.
"누구야? 이 사람은?"
료코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모르겠어. 난 몰라, 이런 남자."
코우지는 숨을 멈춘 뒤, 다시 한번 욕실로 돌아가 시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34, 5살쯤 되어 보이네."
시체는 섬뜩했지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야. 도대체 누굴까..... 너는 어때?"
새신랑은 "너"라는 호칭을 약간은 어색하게 사용하며 아내에게 말했다. 료코는 두려움을 억누르려는 듯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몰라, 이런 사람."
"그래도 모르니까, 잘 봐."
"잘 보라니......몰라."
"좋아. 어쨌든 경찰에 전화하자."
"으....."
축복받아야 할 새로운 삶의 첫걸음은, 낯선 노출광에 의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죽은 남자의 신원은 알아냈나?"
묘법사의 주지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여 바둑의 형세를 가늠하며 물었다. 바둑은 중반의 접전을 끝내고 종반전에 진입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사무라가 우세했다. 스님은 형세를 단번에 만회할 수단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이제 둘 곳도 없는 곳들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둘 데가 없을걸요? 그 근처는."
"응. 없는 것 같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심야 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라는데, 스님의 두뇌도 그런 구조인 것 같다. 바둑을 두면서 동시에 사건을 추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이 별로일 때에는 아직 추리 쪽도 정리되지 못한, 암중모색의 단계이다. 아까부터 변변한 수가 없는 걸 보면 스님의 추리는 아직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한 듯 싶었다. 사무라는 이 상태에서는 적당히 스님의 비위를 맞추며 질문에 대답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했느냐 하면……."
사무라는 흑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걸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되지...."
팟! 하고 스님의 흰 돌이 응전해왔다.
"우리 경찰은 우수합니다. 당연히 밝혀냈죠."
"그렇군."
"미나토구의, 가전 제조업체 경리부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이름은 코이즈미 노부히코, 나이는 37세. 가족으로는 아내와 자식은 두 명…….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와 유치원 다니는 남자아이입니다. 세타가야의 공단 주택에 살고 있고, 월급은 20 수만엔 정도. 잔업 수당은 부인에게 주지 않고 모두 용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듯한 평범한 직장인이고, 취미는......"
"골프와 마작."
"그것도 추리인가요? 하지만 틀렸습니다. 골프도 못 치고, 마작도 못 한다네요. 취미는 산책과 사교댄스, 그리고 패션이었답니다. 멋 내기를 좋아했다는군요."
"술은?"
"조금."
"유흥 업소는 다녔던가?
"스님이 그걸 물어볼 거로 생각해서 회사 동료에게 물어봤죠."
"잘했네. "
"직장인이라 가보긴 했지만, 부지런히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는군요. 구태여 말하자면 적당하였달까요?"
"흥, 흥......"
스님은 갑자기 화제를 바둑으로 돌렸다.
"어, 거기 그런 수가 있었나?"
"이쪽 돌은 덕을 좀 본 것 같죠?"
"이미 대세에 영향은 없나."
"그런 셈이죠."
"확실히, 여기서 끝났구먼."
"그런 것 같네요."
"유감이군. 이번에는 내가 졌네. 잠시 모습을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늘었는걸? 수사는 대충 하고 바둑책을 읽으면서 공부한 거 아냐? 덕분에 범인은 전부 다 놓치고 말이야."
"와, 엄청난 말씀이시네요. 스님 쪽이야말로 틈나는 대로 비밀로 전해진 전설의 두루마리를 숙독하면서 공부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니, 환절기에는 부처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서 절도 꽤 바쁘다고."
"그래요?"
계가해 본 결과, 흑집은 마흔 둘, 백집은 스물셋으로 덤을 빼도 무려 열네 집 반의 승리였다.
"아이고 망신스러워. 이건 대패야 대패."
스님은 갑자기 생각난 듯 손을 두드려 술을 추가 주문했다.
"그러면 다시 한 판 더?"
"네, 네."
첫판에서 사무라가 이기면 스님은 분해서 꼭 다음에는 이기려고 한다. 착수도 날카로워졌고, 그 영향으로 추리 쪽도 좋아진다. 사무라에게는 더 바랄 나위 없는 결과였다. 사무라는 따끈하게 데운 술을 목구멍에 흘려 넣고, 맛있게 버무린 초무침을 한 입 깨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흑으로 시작하지."
"네."
바둑돌을 치운 뒤,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스님은 흑 1, 3, 5로 시작하는, 슈사쿠 명인의 포석으로 두기 시작했다.
사무라가 손을 잠깐 멈춘 사이,
"그 살해당한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하고 스님 쪽에서 교란 전술을 써왔다.
"고이즈미 노부히코입니다."
"그래그래. 그 고이즈미와 신혼부부의 관계는?"
"그게 아무래도 확실치 않아요."
"호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남편은, 이런 남자는 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내 역시 이런 사람 알 리가 없다고 경찰에서 줄곧 증언하고 있거든요."
"그럼 왜 그 남자가 아파트에 있었지?"
바둑은 포석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심사숙고가 필요한 중반의 공방전에 돌입하였다. 사건의 추리도 조금씩 조금씩, 까다롭고 어려운 부분을 향하였다.
"그게 문제라고요. 아파트 관리인이나 이웃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그런 남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고이즈미 누군가가 전에 그 아파트에 살았던 건 아니겠지?"
"맞아요. 그 부분은 정말로 아주 상세하게 수사를 진행했는데, 고이즈미 노부히코와 그린 아파트를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 깜빡했네!
스님은 정석대로 흑돌을 놓으며 외쳤다.
"뭘요?"
"살인사건이 맞나?, 애초에, 욕실에는 가스 냄새가 났었잖아? 사고사 가능성은 없나?"
이번 한 수로 흑이 형성한 빗살 모양 세력이 백의 중요한 지점을 단절시켰다. 스님의 수는 두면 둘수록 점점 날카로워졌다.
"사고사 가능성도 있습니다. 목욕탕의 가스 욕조는 뚜껑을 닫으면 불이 꺼지도록 만들어진 물건인데, 고무관을 연결한 부분이 느슨하더군요. 그 부분에 가스 누출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하지만 자네 말로는 신혼부부는 아파트로 돌아가서 한동안 가스 냄새를 눈치채지 못했잖아? 작은 아파트 목욕탕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가스가 샜는데, 거실 다다미방에서 알아채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나?"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부부에게 물어보니 남편은 현관을 열자마자 약간 가스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하고, 부인은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너무 놀라서 냄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욕실에 얼마나 가스가 차 있었는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고요.".
"나중에 테스트 해봤을 거잖아. 같은 욕조로."
"물론이죠. "
"어땠나?"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는 꽤 오랜 시간, 대략 한 시간 정도 가스가 누출된다면 모르고 목욕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응, 응. 그렇지. 가스 중독은 먼저 운동 중추를 마비시키니까. 뭐지? 몸이 이상한데?라고 깨달았을 때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스님은 부처님 만드는 법도 잘 아시네요."
"그런 거북한 소리 말라고. 그것보다도 구석의 이 대마 말이야, 이 녀석도 부처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아무리 스님이라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래, 그래."
스님은 다시 바둑판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무라는 화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욕실 정황만으로는 뭐라 말할 수 없어요. 목욕탕에서 가스가 누출되어 일어난 사고사는 도내에도 매년 몇 건씩 신고되니까요."
"그럼 고이즈미 누군가 씨도 사고사라고 하는 게 어때? 경찰도 바쁠 거잖아."
"가능하다면 그렇게 처리해버리고 싶기는 합니다. 위에서도 그럴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사인도 마침 일산화탄소 중독이니까요. 하지만 피해자가 어째서 생면부지의 집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문제에요. 그것 때문에 최소한 저는 그렇게 간단하게 사고사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의 경찰, 민중의 지팡이로서 말이죠."
"고맙군그려."
탁! 소리가 났다. 바둑판 위의 돌이 흔들렸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다.

시신이 발견된 그린 아파트는 콘크리트 3층 건물로 문제의 방은 306호실, 계단을 올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다다미 넉 장 반쯤 되는 식당 부엌이 있고, 오른쪽 안쪽으로 가스대와 싱크대가, 왼쪽에 좁은 널빤지를 세워놓은 듯한 욕실 미닫이문이 있다. 식당 겸 부엌의 안쪽은 다다미 6장짜리 방, 그 안쪽으로 다다미 8장짜리 방이 있는데 신혼부부는 이곳을 침실로 삼으려 했는지 큰 더블베드, 그리고 막상막하로 큰 옷장이 놓여 있다. 사체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된 시간으로부터 40시간에서 45시간 전, 즉 전전날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의 사이이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질식사. 사체에 외상은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약물의 흔적도 없었다.
"자물쇠는 구석구석까지 채워져 있었겠군."
바둑은 세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압승. 사무라는 도중에 돌을 던졌다.
"맞아요. 그리고 혹시 창문이 잠겨있지 않았었더라도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입니다. 현관 말고는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어요."
"현관문은 확실히 잠겨 있었나?"
"남편인 스즈미 코우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군가의 옷과 신발은?
"있었어요. 욕실 미닫이문 위에 선반이 있는데, 거기에 놓인 의상 바구니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군."
세 번째 판은 중반까지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팬티, 셔츠, 양말, 이름이 새겨진 와이셔츠, 영국제 양복 상, 하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명함, 던힐 라이터, 테크노 시계 등. 신발은 구찌 제품으로 신발장 안에......"
"고급품뿐이네. 누군가의 지문은?"
"선명한 것은 침실에서 두 개, 다다미 6장짜리 방 하나, 부엌에서 목욕탕까지 일곱 개 정도."
"기묘하군."
스님이 과장되게 팔짱을 꼈다. 뭔가 복잡한 생각이 뇌리에 오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팟! 사무라의 흑집 안에 백돌을 놓았다. 세력을 새롭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신발에 붙어있는 흙은 아파트 부근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군."
"뭔가 아시겠어요?"
"아니, 아직 아무것도……. 신혼부부 사이는?
"좋은 것 같아요. 뭐, 신혼부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만....... 신랑 선배의 권유로 맞선을 보고 6개월의 교제 끝에 결혼. 당사자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들 모두 좋은 인연이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둘이 죽은 남자를 모른다는 게 정말이겠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정성 들여 수사했지만, 고이즈미와 부부, 구리고 그린 아파트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도 부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확실하겠지."
"이거 참, 송구스럽네요."
"죽은 고이즈미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한 직장인인데, 여자관계는 깔끔하지 못한 편입니다. 4년에 한 번꼴로 부인을 울렸거든요."
"올림픽 같은 남자잖아."
스님은 자신의 농담을 즐기듯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바둑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말 별난 사건이구먼."
"예, 뭐......"
"죽은 남자의 회사는 그래, 경기는 괜찮았다던가?
"최근 몇 년 동안의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요."
"그래?"
스님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지 바둑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사무라 쪽도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좋다.
"좋아."
생각을 마친 스님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사무라의 흑 세력을 비집고 장렬하게 돌을 내려놓았다. 묘수였다. 백에게도 위험한 수였지만, 흑으로서는 도무지 뾰족하게 응대할 방법이 없는 멋진 수였다. 무리해서 장렬한 싸움을 시작하더라도, 결과는 흑의 패배임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아! 굉장한 묘수네요. 완전히 당했습니다."
"아니야, 이쪽도 약점이 있어."
그러나 스님이 승리를 확신했다는건 말투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스님의 추리도 막바지에 이른 게 틀림없다.
"사무라"
"네."
"자네, 피아노 칠 줄 아나?"
"아뇨, 음악은 전혀 재능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 아파트에서는 피아노를 쳐도 되나?"
"예, 일단은요. 피아노를 치든, 방망이를 두드리든 뭘 해도 상관없습니다. 해 본 적은 없지만요."
"그럼 그린 아파트는 어떨까?"
"글쎄요......"
"그린 아파트에서 피아노를 쳐도 되는지,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지, 이 점을 조사해 주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기묘한 질문이 사건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무라는 검은 수첩을 꺼내 스님의 질문을 적었다.
"아무래도 바둑은 이것으로 끝이군요."
스님의 한수로 반상 위의 모든 싸움은 끝났다. 계가해보니 백의 일곱 집 반 승. 종반전에서 스님의 수가 절묘했던 덕분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사무라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니, 아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건 쪽 말인데...."
"네, 네."
스님은 뒤섞여 있는 돌들을 색깔별로 골라낸 뒤, 손끝으로 좌우로 나누며 말했다.
"신혼부부 아파트 침실......"
"예......?"
"거기 옷장 서랍......"
"네?"
"거기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나 들어 있을까?"
"그걸 조사해야 하는 거군요."
"맞아. 내친김에 죽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 이 사람은 텔레비전 영화 따위를 보면서 자주 졸지 않았는지, 부처님 부인에게 물어봐 달라고. 그리고 사건이 있었던 306호실, 베란다에 러닝머신이 놓여 있었는지, 커다란 화분은 없었는지......"
"글쎄요. 그건 분명히......"
"일단 알아봐 달라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그린 아파트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서는 누가 수학을 제일 잘했을 것 같은지......"
"네? 그런 거 물어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까요?"
"뭐, 괜찮아. 아무튼 물어보라고."
"관리인이나 이웃을 만나서 어떻게든 대답을 모아보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해서 수학을 제일 잘할 것 같은 여자를 알아내면, 그녀를 만나서 수학을 제일 잘하는 여자를 만나서 개미를 좋아하는지 물어봐 줘."
"개미라니……. 그……. 저…. 설탕에 꼬이는 그거요?"
"그렇고말고."
"점점 모르겠네요"
"그렇게 불평하지 말고 한번 해 보라고."
"물론 물어보고말고요. 다른 건 없나요?"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오늘은 그 정도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알아낼 수 있겠나?"
"글쎄요."
사무라는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적은 수첩을 쳐다보았다.
"모레, 이틀 후 점심때까진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그거 딱 좋군그래. 나는 그날 2시 즈음까지는 잠깐 본업 쪽 일이 있어서 외출하지만, 3시 이후에는 완전히 비어 있거든. 또 바둑을 두러 오라고. 오늘은 내가 이겼지만, 모레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저는 항상 살인사건을 떠안고 다니기 때문에 바둑에 집중하는 건 어렵단 말입니다."
"천만에. 나야말로 자네가 힘든 숙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다고."
"그럼, 이번의 숙제는 모레 무사히 해결될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지금 여기서 스님의 추리를 물어봤자 말해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모레의 즐거움. 사무라는 그때까지 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탐문과 조사를 해 올 수밖에 없다.
"정말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조금만 더 붙잡고 싶긴 하지만, 자네도 바쁘잖은가."
"그럼 실례했습니다."
현관을 나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또 어디선가 농밀한 꽃향기를 실어 온다. 사무라는 향긋한 냄새를 가슴 가득히 담으며 긴 고갯길을 내려갔다.

이틀이 지나고, 스님에게 부탁받은 조사를 모두 마친 사무라는 약속한 3시에 맞춰 묘법사로 이어지는 언덕을 올라갔다.
"아저씨, 위험해요!"
그저께와 같은 개구쟁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왔다. 사무라는 아이와 지나쳐 절의 입구를 통과했다.
"실례합니다."
"시간을 딱 맞췄군."
스님이 감색 줄무늬 옷을 입은 채 현관으로 나왔다. 지금 외출에서 막 돌아온 것 같았다.
"모처럼이니까 한 판"
"네."
사무라는 한시라도 빨리 스님의 입에서 범인으로 점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듣고 싶었지만, 묘법사 주지 스님의 두뇌는 언제나 바둑돌의 움직임과 함께 활동을 개시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둑을 두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자, 오늘은 기껏해야 한 판이겠네."
스님이 선을 잡은 결과, 사무라가 흑이었다.
"글쎄요. 과연 어떨지....."
"어때, 부탁한 조사 쪽은?"
"네, 다 조사를 마쳤습니다. 만족하실지 어떨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아니, 아니, 천만에."
"우선 피아노는 말이죠."
"그래."
"치는 건 금지입니다. 뻐드렁니에 쭈글쭈글한 아줌마로 엄청나게 짜증나는 스타일인 아파트 관리인이 신경질적으로 답하더군요. 벽이 얇아서 이웃에 폐를 끼치니까 악기류는 절대 사절! 이라고요."
"개,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금지지?"
"아,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드네."
"그리고 다음에는......"
사무라는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맞아, 맞아. 양복장 서랍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 들어 있는지......"
"맞네 "
"스님의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조사해 왔습니다. 손톱깎이, 가위, 양복장 열쇠, 부서진 시계, 클립, 회사 배지, 금속 빗, 안전핀, 샤프펜슬의 이상 아홉 개가 자석에 붙었습니다. 샤프펜슬은 플라스틱이지만 연결 부분이 쇠로 되어 있어서 붙더라고요. 대충 이 정도입니다."
"수고 많았어."
"그다음에 죽은 고이즈미 노부히코가 TV를 보면서 자주 졸았는지 여부였죠? 이건 부인에게 물어봤어요."
"아, 4년마다 눈물을 쏟았다는 올림픽 부인?"
"맞아요. TV를 보면서 선잠 자는 건 항상 자기였으며, 남편은 졸지 않는 쪽이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곧바로 이런 질문이 수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가운 눈총과 함께 쏘아붙여서 혼났습니다."
"그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조사한 건……."
"이봐, 자네 차례야."
"아, 고맙습니다."
사무라는 스님만큼 편리한 이중구조식 두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바둑 쪽에는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은 베란다에 러닝머신과 화분이 있는지였죠?"
"그래. 맞아."
"스님에게 그걸 들었을 때, 나도, 어라?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조사해 봤습니다. 그런데....."
"베란다가 없었어?"
"맞아요. 아예 베란다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베란다에 러닝머신이든 화분이든 놓을 방법도 없죠. 창밖에 있을 수 있는 건 공기와 유령뿐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정말이에요? 바둑처럼 억지 부리시기 없습니다."
"바둑 쪽도 억지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고. 어차피 요즘은 이기기만 하니까 억지 부릴 기회조차 없잖은가?"
"어, 그랬나요?"
"이론보다 증거. 이 수는 어떤가?"
스님이 둔 수에, 사무라 오른쪽 세력이 갑자기 약해졌다. 묘수였다.
"이건......"
"괜찮았지?"
"음....."
절묘한 수를 보니, 스님의 뇌세포는 최고조로 향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조사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예상대로 지금까지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 누가 가장 산수를 잘하는지였습니다."
"산수가 아니야. 수학이라고."
"아, 맞네요. 하여튼 이웃 등을 조사한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3년 정도 전에 이사 간 미야오 씨라는 젊은 부인이 가장 잘하는 거로 결론났습니다. 이분은 약사 면허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이과 전공이라면, 당연히 제일 수학을 잘했을 거라는 이유죠."
"그러면 그 젊은 부인에게, 개미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는가?"
"네, 찾아가 물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권투 선수 말인가요? 라고 되묻더군요."
"무하마드 알리와 착각했군."
* 일본어로 개미는 '아리'
"네, 그래서 권투 선수가 아니라, 곤충인 개미 이야기라고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라고요."
"그 여자는 매력적인 외모에, 두 살쯤 된 아기가 하나......"
"세상에, 맞아요! 스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팟! 스님이 돌을 한층 더 강하게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 여자가 범인이니까"
"정말요?"
사무라는 아연실색하며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동기는? 어떻게 살해한 거죠?"
"본좌는 억지를 잘 부려잖나.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는 없지."
"억지는 농담이었습니다만... 빨리 알려주세요."
"자네 말을 하나씩 하나씩 듣다 보면, 이쯤에 범인이 숨어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
"자 보라고. 죽은 남자에게는 아무런 외상이 없고, 구두에는 아파트 부근의 흙이 묻어 있다고 했지?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죽은 누군가 씨는 덩치가 상당히 큰 데다가 306호실은 후미진 곳에 있고 창문은 높아. 이런 걸 종합해보면, 누군가 씨는 자신의 두 발로 걸어서 306호실에 왔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해."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교댄스를 좋아하고, 패션을 좋아하는 멋쟁이고, 여자 문제로 4년에 한 번꼴로 아내를 울리는 남자가 한밤중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파트를 방문했다는 것은……. 소모산 (作生)!"
스님이 웃으며 선문답의 표어를 외쳤다.
"즉, 여자겠죠."
사무라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306호실의 실제 거주자들은 한창 신혼여행 중. 그렇다면, 이 방에 들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건 관리인이겠지. 하지만 관리인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가 도저히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짜증나는 쭈글쭈글 아줌마였어. 맞지?"
"네."
"그렇다면 그다음 후보는 306호실의 이전 거주자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이사할 때 방 열쇠는 관리인에게 돌려주지만,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여벌 열쇠를 만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건 그렇죠."
"그린 아파트는 피아노를 쳐도 안 되고,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아파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사를 할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306호실에는 지금까지 몇 명의 젊은 부인이 살았으며, 그 부인들이 아이를 낳은 뒤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해. 또 요즘 젊은 부인들이 남편 몰래 남자 친구를 만들고 있을 확률은 약 8%라고 하지."
"정말입니까?"
"아하하하. 주간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매력적인 부인이라면 좀 더 비율이 높을지도 몰라."
"음, 확실히 그 젊은 부인, 미야오 유키에 씨라고 합니다만,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경찰이 이상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아이고, 이거 참, 잘 알고 있다고요."
"그 젊은 부인은 예전에 어딘가에서 고이즈미 누군가 씨를 알게 되어 불장난을 시작했던게 아닐까? 사교댄스를 추는 댄스홀에서 만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별로 좋은 남자는 아니었어. 대단한 악당은 아니지만, 남의 약점을 잡은 뒤 협박하여 용돈을 갈취하는 정도의 범죄는 저질렀을 거야. 목욕탕 선반에 놓인 영국제 양복, 신발장의 신발은 경기가 별로인 회사에 다니는 월급이 20수만 엔인 월급쟁이에게는 사치스러우니까. 미야오 유키에 씨도 이 남자에게 협박을 당했겠지."
"그게 살인의 동기였을까요?"
"아마도. 마지막까지 몰린 나머지 살의를 품은 거야. 3년 전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열쇠를 이용할 생각을 한 뒤, 간단한 조사를 통해 지금 사는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떠나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걸 알아내고는 범행에 이용한걸세. 결혼과 신혼여행은 널리 알리는 경사이니만큼, 이웃에게 물으면 곧바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그 틈을 타서 남자를 유인해서 죽인 거야."
"그랬군요."
"남의 아파트를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속이고는, 남편이 출장을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다는 정도만 말해도 플레이보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 조심을 거듭하여 몰래 숨어들어왔을 테지."
"그리고 그곳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그건 아니야. 가스 목욕 중에 사고로 죽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계획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어려워. 일단 가스가 새는 상태에서 욕조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죽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나 자네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에게는 조는 버릇이 없었어. 욕조에서 자는 사람은 상당히 선잠을 좋아하는 사람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하잖은가. 설령 졸았다 해도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약물 흔적도 없고."
"과연, 일리 있네요."
"게다가 범인으로서는, 혹시라도 이웃들이 가스 냄새를 눈치채면 큰일이란 말이지. 그런 위험한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어떻게...?"
사무라는 남은 돌을 바둑판 위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어라? 돌을 던지는 건가?"
"네, 도저히 승부가 안 되네요."
"음,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러면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고이즈미 누군가가 살해된 건 목욕탕이 아니었어.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는 더 좁고 밀폐된 곳이 필요했어. 바로 침실 옷장이지. 옷장 열쇠는 서랍 속에 있었지? 자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말이야."
"자석에 달라붙는 게 뭔지는 그래서 조사를 시키신 거군요. 그런데 남자는 옷장 안에 왜 들어간 거죠?"
"여자가 시켜서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려는 찰나! 여자가 남편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겠지.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이야.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어. 숨을만한 베란다도 없는 데다가 알몸이고. 그 상황에서 고이즈미 누군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여자가 빨리 옷장으로 들어가요! 라고 말하면 들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지. 그 뒤 옷장 문을 밖에서 잠가야만 열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버려도 수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테고."
"스님, 보고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하하, 그럴 리가. 하지만 이 추리는 대충 맞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건 미야오 유키에 씨에게 자네가 개미 좋아하느냐고 물어봤기 때문이지. 그때 그녀가 새파랗게 질렸다고 했잖은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추리가 맞다는걸 롹신했다네."
사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개미를 좋아하면 어떻다는 것일까. 스님은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도시가스 냄새는 강하니까. 수면제라도 먹이지 않는 한 그렇게 쉽게 큰 남자를 죽일 수는 없어. 옷장 안에 숨어 있어도 가스 냄새가 나면 남자는 난리가 날 테고. 그래서 범인은 냄새가 없는, 순수한 일산화탄소를 맡게 할 생각을 한 거야. 그 뒤 사고사로 수습되기를 꿈꾸며 시체를 욕조에 집어넣은걸세. 잘만 됐더라면, 뭔가 이상한 사고사로 대충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
"그런 걸 생각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실행까지 하려면 확실히 화학에 대해 지식이 필요해. 그래서 수학을 잘하는 여자라는 힌트로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약사님이 등장하시더구먼."
"예"
"실험실에서 일산화탄소를 만들려면, 황산과 개미산을 혼합하면 된다네. 옷장 뒤에 구멍을 뚫어 튜브라도 꽂아두면, 쉽게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형사에게 갑자기 개미를 좋아하느냐는 말을 듣고 그 부인이 새파래진 것은 그 탓이야. 그녀는 개미라는 말을 들으면, 개미산이라는 특별한 약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거든. 범행이 인상 깊게 남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범인이라는 걸 확신한거야. 뭐, 일부 세세한 점은 내 추리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욕실에서 가스 중독을 시키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뒤, 내 추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네...."
스님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건 신식 개미지옥이네요."
"그거 딱 어울리는 말이구먼. 이제부터 그린 아파트로 가서 옷장 뒤에 구멍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그다음에는 그 여자, 미야오 유키에 씨를 다시 한 번 방문한 뒤, 옷장 뒤에 개미구멍이 있었다고 말해 주라고. 매력적인 여성분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몹시 기대되는구먼."
놀랍게도, 스님의 추리는 이번에도 적중했다.

2006/09/18

[번역] 이콜 Y의 비극 (2)

 제 1 막


노리츠키(法月) 경시가 세타가야구 키유텐의 범행현장에 도착한 것은 같은날 오후 아홉시 경이었다. 경시1과 소속이기에 골든위크라 하더라도 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살인사건의 달력에 연휴는 없기 때문이었다.

사체가 발견된 것은 "벨코포"라는 맨션으로 지도 위에는 세타가야구의 북서부, 코우슈 거리와 기치죠우지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게이오센의 치토세가라스야마 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미타카, 쵸우후 양 시와의 경계가 바로 코앞, 지어진지 10년 정도의 저층 맨션으로 자동 잠금 장치 (오토록) 등의 방법 설비는 없었다. 밤이었지만 대충 둘러 보기에도 부자들이 거주하는 고급 맨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요 몇주간, 인접한 양 도시를 중심으로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강도단에 의한 피해가 속출해서 부근 지역에 특별 경계가 발령중이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습격당한것은 편의점과 점포 사무소 등으로 개인 주택에 침입한 예는 없었고, 시간대도 심야 위주로 초저녁때의 범행은 전무했었다. 물론 강도단에 의한 사상자도 있었지만 정황을 볼 때 이 사건은 관련 여부가 크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현관에 서서 경계임무를 맡고 있던 정복 차림의 세이쥬서 (成城署) 경찰요원이 경례로 경시를 맞으며 상황을 보고했다.

"수고많으십니다. 현장은 206호실. 이층의 제일 안쪽 방입니다"

경시는 보고를 받으며 우편함으로 거주인 이름을 확인했다.

[사카자키 요우스케, 미도리]

아이는 없는 젊은 부부 같았다. 살해된 것은 아내 사카자키 미도리 쪽인가? 경시가 들은 것은 젊은 여성의 교살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뿐으로, 피해자의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었다.

206호실에는 한발먼저 도착한 구노우 경부가 현장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감식과가 증거 보존과 채취작업을 하는 도중이라, 실내는 발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경시는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평범한 3LDK 타입으로, 피해자 여성은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전화를 놓아둔 사이드 보드가 바로 앞이었다. 옷은 운동복 상의에 청바지 차림. 운동복 상의의 견갑골 부근에 칼자루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감찰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착이 늦어지기 때문이겠지. 경시는 구노우 경부를 불러내어 여태까지의 조사 상황을 보고받기 시작했다.

"실내에 물건을 뒤진 흔적이 있습니다. 프로의 솜씨는 아니고요. 확실히 예의 무사시노강도단과는 확실히 수법이 다릅니다. 놈들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초보자가 있는 힘껏 방을 뒤진 듯 어질러 놓은 것 처럼 보입니다."
"강도사건쪽의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건가. 피해자는?"
"다치가와 아카네. 24세. 키치죠우지의 한 미니-코미 잡지의 편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노우는 거실 가운데 놓여진 테이블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된 원고가 쌓여 있었고, 원고에는 빨간색 볼펜으로 덧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아들의 방에서 이런 비슷한 물건을 자주 본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는 습격당하기 직전까지, 인터뷰나 다른 뭔가 테이프를 들으며, 기사 수정같은 진지한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이 방 거주자와는 이름이 다르구먼. 누군가?"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을 입에 담자마자 구노우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무언가 납득한 얼굴로 답했다.

"이곳 부부 중 아내의 여동생입니다. 오늘은 언니에게 부탁받아 집을 봐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인 사카자키 요우스케는 회사의 출장으로 어제부터 집을 비우고 있었고요."
"옳커니. 그렇다면 원래 살고 있던 아내와 사람을 헛갈렸을 가능성도 있겠구먼. 첫 발견자는 누군가?"
"사카자키 미도리. 지금 말한 피해자의 언니입니다. 8시 반에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내 쪽이군. 그녀가 경찰에 신고한건가?"
"아뇨. 110번으로 신고한 것은 쯔부라야 아케미(円谷朱美)라고 하는 여성으로 이웃 205호의 거주자입니다. 전화도 여기가 아니라 옆집에서 걸려온 것입니다. 정확한 신고 시각은 오후 8시 35분입니다."

"곧바로 이웃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건가? 그럼 사카자키 미도리는 지금도 205호실에 있는건가?"
"예. 빈혈을 일으켜 침실에 누워있는 상태입니다. 이쪽에서 쉬게하려고 했었지만 거부하더군요. 이제부터 그녀와 직접 경찰에 신고했던 쯔부라야 아케미의 사정청취 입니다만, 경시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사카자키 미도리쪽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같이 가자고. 그런데 시신의 상태도 신경이 쓰이는구먼. 감찰의는 아직 오지 않았나?"

경시는 피해자의 사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노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곧바로 답했다.

"아까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연휴라서 일손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더군요. 어쨌건 이곳은 감식반 여러분께 맡기고 먼저 저쪽 사정청취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찰의가 도착하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말해놓겠습니다."

바로 옆집인 205호실의 거주자는 30대후반의 부부와 소학생의 아들까지 3인 가족으로 집구조는 이웃집과 완전히 똑같았다. 두사람은 거실로 들어갔다. 구청에 근무하고 있는 남편 쯔부라야 다카시는 휴일 밤 벌어진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무말도 하지 않을 것 처럼 입을 앙다물고 있었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내 아케미는 이웃에 면한 벽 한쪽에 기대어 옆집의 수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웃집의 참극 깊은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구노우 경부가 사카자키 아케미의 상태를 물었다.

"조금 더 누워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직도 안색이 나쁘거든요. 얘 나오야! 너는 이제 곧 잘 시간이에요. 어른들의 이야기니까 빨리 너 방으로 가 주렴. 그런데 형사님. 이곳도 이제 위험한 동네가 되는건가요? 방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던데. 그 외국인 강도단, 그놈들의 짓인가요? 도지사도 그런 이야기를 했던것 같아서, 하여간 무섭네요. 조금만 운이 나빴더라면 우리집이 습격당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케미는 그때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데 이상하네요. 우리집은 오늘은 아침부터 유원지에가서 밤까지 집을 비워두고 있었거든요. 이웃집은 여동생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왜 비어있던 우리집이 아니라 이웃집을 습격한 걸까요?"

경시는 그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은것 같다, 라고 말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노우는 천천히 수첩을 열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오늘 외출하였다고 했는데 어느 유원지입니까?"
"요미우리 랜드였어요. 게이오선으로 한번에 갈수 있기 때문인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죠"

"귀가하신것은 몇시경입니까?"
"밖의 레스토랑에서 일찍 저녁을 먹었으니... 7시 30분 경이었어요. 돌아오자마자 옆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그 때는 집에 없는건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문 이미 그런 상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돌아오자마자 초인종을?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택배가 올게 있었는데 혹 집을 비웠을때 배달이 오면 부재 시 옆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했었거든요. 206호실에 물건을 배달해 놓았다는 연락표가 있어서 물건을 가지러 갔던 것 뿐이에요"

구노우는 순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장, 혹은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최근은 어느 택배업자도 물건을 옆집에 맡겨놓지 않는 것이 통례가 아닌가? 그러나 아케미는 바로 답했다.

"말씀드리자면 사가자키씨 집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이런 일은 전에도 몇번 있었어요. 별다른 문제도 없었고요. 문 밖에 짐을 그냥 두고 가버리는 것 보다는 이쪽이 훨씬 안심되지 않겠어요? 혹시 의심스러우시다면 연락표를 보여드릴께요"

아케미가 가지고 온 것은 택배업계 No.1인 대기업 야마네코 운송의 부재자 연락표였다. 고양이 얼굴을 모티브로 한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바로 그 회사로, 연락표의 서명은 "벨코포 시모다 205호실 쯔부라야님"이었고 이어진 연결란을 보니 볼펜으로 "29일 17시 42분, 짐을 배달하였지만 부재중이셔서 206호실의 사카자키 씨에게 맡겨 놓았습니다"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담당자명은 이시와타리였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연락표를 구노의 손에 돌려주고 206호실 상황의 상세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아케미가 물었다.

"부엌 입구 앞에 배달된 물건 박스가 놓여있지 않았나요?"
"네. 어쨌건 아주머니. 조금 이것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영업소에 문의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세요. 그 대신 우리 집 물건은 확실히 돌려주셔야 해요. 아직 이웃집에 놓여있는 상태라서... 두번째로 가지러 갔을 때는 이미 사카자키씨도 나도 그놈의 박스 따위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증거품의 압수라고 하시겠지만 요 다음에 박스까지 함께 돌려주셨으면 해요"
"좀 기다려 주십시오"

구노우는 손을 들어 아케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 두번째로 가지러 갔다니요?"
"그러니까, 사카자키 부인이 막 돌아왔을 때였어요. 아마 8시 반 정도였을까나... 밖의 통로에서 발소리가 들러와서 저는 밖으로 나가 아주머니를 불러 말을 걸었어요. 연락표를 보여주고 말했죠. 배달된 물건을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7시 지나서 한번 벨을 울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까지 말이죠. 사카자키 부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이상하네요? 동생에게 집을 좀 봐달라고 부탁해 놓았었는데요' 라고 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리고는?"

아케미는 턱에 손을 올리고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사카자키 부인은 현관에 열쇠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벨을 누르며 동생 이름을 불렀어요. 그래도 대답이 없자 '아카네 요것이 혼자서 돌아가 버린 것 같네요' 라고 불평하면서 백에서 자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어요"

"그 때, 방 불은 켜져 있었나요?"
"아뇨.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동생의 구두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듯 했어요. '얘가 불도 안 끄고 자고 있나보네. 동생이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짐은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릴께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사카자키 부인은 저에게 사과하면서 안으로 들어갔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곧바로 그게 비명으로 바뀌었고 사카자키 부인이 안에서 맨발로 뛰쳐나왔어요. 저도 정말 놀랐어요"

"그럼 동생분의 시체를 발견한 사카자키 부인이 이 댁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반대였던 것이군요. 당신도 방안에 들어가셨나요?"
"예. 그럼 안되는 거였나요? 그래도 사카자키 부인이 '동생이.. 동생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방 안을 손가락으로 가르켜서, 듣는것 만으로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없잖아요? 보통때는 항상 똑 부러지는 성격인 사람인데 그때는 정말 정신이 나간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카자키 부인을 복도에 남겨둔채 저도 안을 살짝 기웃거려 보았어요. 그랬더니 사람이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 아니겠어요! 힐끗 보았지만 칼에 찔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가가서 천천히 몸에 손을 대 보았지만 그때는 이미___"

아케미는 그 때는 입을 다물고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구노우 경부는 계속 물었다.

"피해자의 몸에 손을 댄 것 말고는 뭐 다른 물건을 움직이거나 만진 것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때는 정말이지 더이상 그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배달된 물건에 대한 것도 어느샌가 잊어버리고, 구두도 뒤집어 신은채로 그 집을 뛰쳐나왔어요. 밖에 있던 사카자키 부인도 끌어당기듯이 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집에 돌아왔죠. 사카자키 부인은 그 쇼크때문에 지금도 누워있고... 어쨌건 저는 남편이랑 아이가 도대체 무슨 일로 놀랐냐고 채근하는 것도 무시한채 110번을 눌렀어요. 그 뒤는 경찰이 출동했고... 그 때부터 이 집에서 한 발자욱도 나가지 않았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그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7시 30분에 외출에서 돌아오셔서 8시 30분에 사카자키 부인이 귀가할때 까지 혹 옆집에서 사람의 목소리나 싸움소리같은 것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아뇨. 배달된 물건을 가지러 가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으면 곧바로 눈채챘을 거에요"

남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다카시는 대답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노우는 경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뭔가 더 질문할 것이 있냐고 물었다. 경시는 조금 생각해 본 뒤 아케미에게 말했다.

"살해당한 사카자키 부인의 동생분과는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습니까?"
"음.. 얼굴은 알고 있었어요. 자주 놀러왔기 때문에 몇번인가 복도에서 인사한 정도였어요. 이야기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죠"

"사카자키씨 쪽은요? 어제부터 출장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신쥬쿠의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어요. 그래서 출장이 많기도 해서 자주 보기도 힘들죠. 언제나 집에 있어서 왕래하는 부인과 비교해 본다면 사카자키씨는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사카자키 부인 주변에 최근 뭔가 이상한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않으셨습니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던가, 가까운 곳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았다던가"
"스토커 같은 것 말인가요? 강도 사건이 아니었나요? 뭐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요. 아 그렇게 말한다면-"

"뭔가 생각나는 것이라도?"
"음, 지금 말씀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요"

아케미는 순간 눈빛이 변하며 입을 살짝 가렸다. 그리고 사카자키 미도리가 쉬는 침실쪽을 한번 쳐다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최근 사카자키씨는 남편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눈치더라고요. 언젠가는 불륜이라도 하지 않는가 의심하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심각하게 물어본적도 있어요"
"그럼 안돼잖아 아케미.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카자키씨 부인이 듣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쯔부라야 다카시가 아내를 타박했다. 아케미는 남편의 얼굴과 침실쪽을 교차하여 바라보고 '하지만-' 이라고 말한 후 금새 고개를 숙인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행히 침실쪽에서는 별 반응도 없었지만 순간 거실에 불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벨이 울리는 소리였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케미가 벌떡 일어나 현관 문을 열러 갔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형사님. 지금 감찰의가 도착했다고 하네요-"

당번의 감찰의는 얼굴은 익히 알고 있는 나카지마라는 남자였다. 아들과 같은 연배로 노리츠크 경시로부터 보여지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는 도착이 늦어진 것과 그 이유를 잠깐 보고한 뒤, 곧바로 사체의 검안에 들어갔다.

"등의 찔린 상처로부터 출혈은 별로 없습니다. 그 대신 입에서 많은 피를 토한 흔적이 보입니다. 칼끝이 폐를 상처내지 않았나 싶네요. 칼이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해서 폐 속의 혈액이 역류해 호흡 곤란으로 질식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직접적 사인입니다"
"즉사했나?"

구노가 서둘러 질문했다. 나카지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찔린 순간부터 사망할때까지 어느정도는 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왼손이 피를 토하는 것을 막으려고 입을 누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닥 위를 기어서 이동한 흔적도 있고요. 몸 아래 숨겨져 있지만, 자 보십시오. 몸에 눌려 가려졌지만 확실한 흔적이 있습니다"

경시는 나카지마가 가리킨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럼 찔린 장소는 어디라고 생각하나?"
"테이블 앞에 앉아 뭔가 쓰고 있는 도중에 뒤에서 갑자기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시에 찔렸달까요. 그 외의 외상은 없고, 찔리기 전에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칼의 각도와 사체의 자세등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단정지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나"

감찰의의 답이 자신의 추정과 일치한것에 경시는 만족을 표현했다.

"사이드 보드에 전화가 놓여 있어서 바닥을 기어서 이동해서 전화기에 손을 뻗어 보았지만 너무 높았던 거군. 피해자는 전화로 구조를 요청하려 했지만 수화기에 손이 닿기 전에 힘이 빠져버린것 아닐까?"
"그렇군요- 아니 조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손에 뭔가 쥐고 있습니다"

나카지마는 서둘러 사체의 오른손을 조사했다.

"볼펜같습니다. 엄청나게 꽉 쥐고 있네요. 손을 조금 벌려 보겠습니다"
"신중히"

구노가 답했다. 나카지마는 감촉을 확인하며 사체 오른손 손가락을 한개 늘려보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후경직이 시작됐습니다. 이 느낌은 사후 약 3시간 정도겠네요"

경시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사망 추정 시각은 6시 반이라는 것인가"
"전후 30분 정도 오차를 둔다면 6시부터 7시 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법해부에 들어갈때 까지 확답은 할수 없지만 어쨌건 그 정도일 겁니다- 꺼냈습니다. 이것은 그쪽에서 처리해 주십시오. 유체쪽은 이제 운반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피해자가 쥐고 있었던 것은 버튼식의 2색 볼펜이었다. 색은 적과 흑. 검은 쪽의 버튼이 눌러져 있었고 앞의 볼 홀더가 밖으로 튀어나와있는 상태였다. 경시는 구노우와 얼굴을 서로 마주 보았다.

"뭔가 써서 남기려 한 것은 아닐까? 범인의 이름이라던가"
"그럴지도 모르죠"

곧바로 경시는 사체 주변을 조사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이드보드의 전화 옆에 놓여진 메모패드와 펜 거치대 셋트였다. 팬 거치대에는 뚜껑을 덮은 검은 사인펜이 꽂혀 있었다.

메모패드의 제일 위의 종이는 새하얀 백지였다-

경시는 낙담의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곧바로 매보패드 우상단에 찢긴 메모지의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바로 전의 한장을 급하게 찢어낸 것 같았다. 경시는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메모페드를 불빛에 비추어 자세히 보고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메모 용지 한 가운데에 뭔가 눌러 쓴 것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2024/07/31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3). - 아야츠지 유키토

### 4. '금단의 계곡'의 젊은이들
같은 8월 1일 오후. 장소는 바뀌어, 여기는 M** 마을 사람들이 '금단의 계곡'이라 부르는, 돈돈산의 서쪽이다.
돈돈다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파이프 바위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꺾이는 샛길이 있다. 경사는 동쪽에 비해 훨씬 완만하고, 발밑 상태도 좋다.
자세한 위치 관계는 첨부된 지도(27페이지 "현장 부근 약도")를 참조해 주시고, 이 길을 내려가 만나는 계곡의 한 구석에 어제 저녁부터 두 개의 빨간 텐트가 쳐져 있었다. 포우가 말한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인들"의 일행이었다.

*
"요우지. 유키토는 어디 갔어?"
물길에서 돌아온 반 다이스케가 나무 그늘에 앉아 계곡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아사노 요우지에게 말을 걸었다. 요우지는 스케치북에서 눈을 들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글쎄"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사키를 또 괴롭혀서 혼내줬더니, 혀를 내밀고 도망갔어."
다이스케는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렇듯, 유키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머리도 나쁘고 난폭하며, 성격도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나이에 맞는 분별력도 전혀 없다. 저 아이가 내 친동생이라니, 정말 한심하고 어쩔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이스케는 H**대학 이학부 2학년으로, 이번 봄에 스무 살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해, 틈만 나면 이렇게 가까운 산으로 캠프를 오곤 했다.
이번 일행은 다이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중학교 때부터 산행을 함께했던, 소꿉친구인 아사노 요우지. 같은 H**대학 문학부 2학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대학에서도 미술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
그의 여동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사키.
요우지의 미술 동아리 후배로, 사키의 남자친구이기도 한 사이토 사카에.
그리고, 다이스케의 동생 유키토.
캠프 계획은 다이스케와 요우지가 세웠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사키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본래 목적이었고, 사이토 사카에를 초대한 것은 요우지였다.
처음에는 네 명이 갈 예정이었지만, 유키토가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거절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울부짖는다. 엄하게 꾸짖으면 엄청난 소리로 운다. 부모님도 늦둥이로 태어난 유키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래서 결국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유키토는 골칫덩어리다.
최근 초등학생 치고는 작고, 겉모습은 얌전해 보이지만, 제멋대로 자라서인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발달이 현저히 늦어졌다. 열두 살이 되어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별을 거의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싸움을 하고 수업을 빼먹는 문제아였다. 아직 잡힌 적은 없지만, 도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이웃집 고양이를 모닥불에 던져 죽인 일도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유키토의 소행이었다. 새해 첫 참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데려가면, 주차된 차의 타이어에 못을 박거나, 커터칼로 다른 사람의 옷을 찢는 등, 범죄에 가까운 나쁜 장난을 일삼았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언젠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될 게 뻔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유키토가 그런 행동이 "나쁜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미 삼아 하는 것이다. 어딘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다. 특히 국어와 사회는 최악이라, 이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한탄했다. IQ는 그렇게 낮지 않고, 오히려 우수한 편이라지만…….
"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텐트 안에서였다. 바로 아사노 사키가 뛰쳐나와 오빠 요우지에게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거 봐요, 오빠. 내 배낭 안에……"
투명한 비닐봉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 안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또 그 애 장난이야."
"정말 미안해, 사키."
다이스케는 황급히 사과했다.
"나중에 잘 말해둘게."
"유키토를 데려온 건 정말 실수였어."
라고 요우지가 말했다.
"정말이야! 이제 지긋지긋해."
사키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졌다. 아까는 스치면서 유키토에게 가슴을 만졌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유키토는 최근 여성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앞날이 걱정되어 다이스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말하긴 그렇지만, 그 애는 정상 아니야. 분명 어딘가 이상해. 어제도 내 엉덩이를 만지고, 나중에 바지를 보니 빨간 손자국이 있었어. 아마 피였을 거야.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해."
다이스케는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이토 사카에가 능선길 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혼자 산책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사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또 유키토야? 뭐, 뭐.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상대는 아이잖아."
사카에는 아주 느긋한 태도였다.
"사이토 군. 유키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위쪽에서 봤어요. 저쪽 다리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더니, 혀를 내밀었어요."
"다리라면, 막다른 곳에 있는 출렁다리?"
"네."
위험하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아무리 문제아라도, 역시 동생은 동생이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유키토에게 관대한 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흥. 저런 녀석, 계곡 아래로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
사키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 5. 유키토의 수난
반 유키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가 좀! 도와줘!"
아까부터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넓은 산 속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의 캠프까지는 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라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다리 앞에 있던 그 더러운 표지판. 거기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경고였을까?
"노후화로 위험"—그 글자는 국어를 잘 못하는 유키토는 읽을 수 없었다.
현수교를 건너는 것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쳤다. 양손으로 로프를 더듬듯이 잡으며, 군데군데 큰 틈이 난 판자 위를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씩 갈 때마다 다리 전체가 삐걱거리고 흔들렸는데,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재미있었다. 점점 흥분한 나머지,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뛰어갔는데, 그 순간이었다. 유난히 큰 삐걱거림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다리의 형태가 무너졌다. 다리를 지탱하던 로프가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유키토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계곡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하의 악동 유키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너편까지는 20미터 가까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로프 한 줄과 거기에 매달린 몇 장의 판자뿐이었다. 강한 바람에 휘말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로프에 손을 대보았지만, 크게 흔들리더니 남아 있던 판자가 계곡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유키토의 체중을 견딜 수 없다. 이쪽 길은 절벽 때문에 2미터 정도만 가면 막힌다. 주위는 모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한 절벽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유키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다. 작은 그늘도 없는 천연 발코니였다. 이대로 2, 3시간만 이 뜨거운 햇볕 아래 있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유키토는 간절히, 매주 보고 있는 TV 속 변신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빌었다.
"도와줘…"
이제는 외치는 것도 지쳐갔다. 이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려던 그때,
"유키토!"
능선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다이스케의 목소리였다.
"형!"
유키토는 손을 흔들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부서진 현수교 건너편에 다이스케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야, 형. 도와줘."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
다이스케가 큰 소리로 답했다.
"기다려. 지금 모두를 데리고 올 테니까. 알겠지? 거기서 움직이지 마. 무리하지 마!"
"—알았어."
"괜찮아. 금방 돌아와서 도와줄 테니까. 아무튼 가만히 있어."
그리고 다이스케는 몸을 돌려 능선 길로 돌아갔다. 오후 2시 반의 일이었다.

### 6. 다가오는 그림자
다이스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키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쏟아지는 햇볕의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인 유키토도 이 상황에서는 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오지 말 걸, 그런 짓을 하지 말 걸...'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유키토는 그대로의 자세로 다이스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의를 품은 어떤 존재의 그림자가 다리 건너편에 나타났을 때도, 유키토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M** 마을의 오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숲이 끊긴 곳에 생긴 광장에 모여, 모두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옷을 벗고 건강하게 뛰노는 아이들, 나무 그늘에서 바느질을 하는 젊은 여자들… '수염의 노사' 포우는 광장 한쪽에 있는 노천 온천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그런 마을의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희미하게, 무언가 이상한 외침이 들려왔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지금 그 소리는?'
중얼거리며 포우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흰머리가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출렁다리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오후 2시 40분의 일이었다.

*
다이스케가 캠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50분이었다. 능선길을 따라 곧장 달려와, [샛길 C](지도를 참조할 것)를 뛰어 내려왔다.
나무 그늘에 깔린 그라운드 시트 위에 사키가 누워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텐트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사키, 사키야!"
"응?"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사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다이스케를 보고,
"무슨 일이에요, 반 씨? 그렇게 급하게."
"큰일났어. 요우지와 사이토 군은 어디 있어?"
"무슨 큰일이죠?"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요우지가 텐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이스케는 서둘러 사정을 설명했다. 요우지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아랫입술을 내밀었고, 사키는 "꼴 좋다"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흠. 그거 우리만으로는 어쩔 수 없겠네."
요우지가 말했다.
"어쨌든 빨리 돈돈 마을로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해야겠어."
"부탁해. 나는 다리로 돌아갈게. 사이토 군은 어디에 있어?"
"낚시하러 계곡으로 내려갔어."
라고 사키가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사키는 여기서 대기하고, 그가 돌아오면 함께 다리 쪽으로 와줄래?"
말을 끝내자마자, 다이스케는 뒤돌아섰다.

### 7. 유키토의 최후
다이스케가 돈돈 다리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다. 같은 경로를 거쳐 올라왔지만, 능선까지는 오르막길이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서두르지 말자,' 라고 여러 번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다리의 상태를 생각하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키토를 진정시키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다행히 날씨가 나빠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다리 앞에 도착했다.“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붙잡고 체중을 지탱하며,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하려고 다리 너머를 보았다. 그때――.
다이스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유키토가 없었다.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20미터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시야는 탁 트여 있었고, 다이스케의 시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서진 다리의 모습도 아까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곧이어 다이스케는 다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리 중앙에 도착하자, 그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다이스케는 유키토의 작은 몸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은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절망을 억누르며 다리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해야 유키토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곧 알게 되었다. 유키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다이스케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유키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유키토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며, 다이스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
사이토 사카에는 캠프를 떠나 혼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고 고생을 했지만, 결국 본류의 돈돈 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가에 서서 사카에는 오른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돈돈 다리라는 현수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양쪽 절벽에는 끊어진 로프가 늘어져 있었고, 강가에는 다리의 잔해로 보이는 나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카에는 조심스럽게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나아가다 문득, 건너편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키토?"
그는 소리쳤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은 불어나고 흐름도 거셌다. 어디서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사카에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몇 미터쯤 위쪽으로 가보니, 여기저기 바위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었다. 저 바위를 따라 건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카에는 낚싯대 등이 들어있는 배낭을 강가에 던져두었다.
여러 번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려가 보니, 쓰러져 있는 것은 역시 유키토였다.
"이봐, 괜찮아?"
소리치자, 그에 답하듯 소년의 입에서 "으으"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이봐."
"……으으"
사카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이 위에서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봐, 유키토. 이봐."
등을 받치고 여러 번 불러보았다. 유키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여다보니, 갈라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으……으……"
어쩐지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듯했다. 유키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뭐?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당했다……"
"뭐라고?"
"……밀……쳐……졌……"
소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했다" "밀쳐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는 바로 다잉 메시지였다. 그리고——.
"사……사……아……"
그렇게 결국, 악동 유키토는 숨을 거두었다.

### 8. M** 마을의 소동
돈돈 다리의 북쪽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정보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정찰을 다녀온 엘러리가 전해주었다. 죽은 사람은 유키토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어제부터 '금단의 계곡'에 머물던 외지인들 중 한 명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유키토는 문제의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다"고 했다.
포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며, 좋아하는 도토리를 씹어 먹으면서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엘러리,"
마침내 포우는 엄숙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젊은 리더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일을 나에게 맡겨보는 게 어떻겠느냐?"
"맡기죠,"
엘러리는 대답했다. 포우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모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좋다, 우리 중에 이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금단의 계곡'에 간 카도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우리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된 소년의 동료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포우,"
엘러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년은, 하지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살인, '금기를 어기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더럽혀진 땅'에 온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죽였다는 것은, 이중의 '더러움'이 아니겠느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러리는 반론하지 않았다. 포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리 쪽에서 그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장에 있었다. 그때 여기에 없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 여기서는 가칭 X라고 부르자, 그 X가 있다면, 당연히 그때 이 광장에 없었던 자일 것이다..."
모두에게 물어본 결과, 문제의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엘러리와 그의 아내 아가사, 엘러리의 두 번째 아내 올츠이, 그리고 엘러리와 아가사의 아들 카, 이 네 명 뿐이었다. 이 중 카는 어제 다친 이후로 여전히 누워 있었다.
"아가사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포우의 질문에 중간 키의 아름다운 여자가 일어섰다. 아가사였다. 그녀는 작년 봄, 숲에서 곰에게 공격받아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잃었지만, 그 기품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났다.
"저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중환자 상태인 자신의 아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올츠이는? 어떻게 했느냐?"
올츠이는 아가사보다 한참 작은 젊은 여자였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포우의 질문에 그녀는, 오후 내내 광장에서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엘러리, 너는 어떻게 했느냐?"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은 엘러리는 현재 리더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듯 강한 앞니를 드러내며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혼자서 숲 속에 있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저도 그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포우."
"흠."
고개를 끄덕이며 포우는, 그 비명 소리를 들은 후 잠시 지나 엘러리가 광장에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자. 돈돈 다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시간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그리고 포우가 광장에서 엘러리를 본 시간은 정확히 25분 후인 오후 3시 5분이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이번 장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은 "고뇌하는 자유업자" 린타로이다. 린타로가 그의 애견 타케마루와 함께 파이프 바위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곳에서 약 세 시간, 즉 오후 4시가 조금 넘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즉,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M** 마을에서 능선 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그 통나무 다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신의 시점'을 취하는 작가가 지문에서 이렇게 명시하고 있으니, 그 사실은 틀림없다.
작가의 인터뷰에 응한 린타로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 통나무 다리는 그 시간 동안 항상 제 시야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놓쳤을 가능성은 없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알아챘을 것입니다."
다만――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두 번 정도, 그의 발치에 있던 타케마루가 심하게 짖었다는 것이다. 타케마루는 겁이 많기 때문에, 아마도 풀숲에서 뱀이라도 보고 놀랐을 것이라고 린타로는 이야기했다.

*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 두세 가지 설명을 추가하겠다.
M** 마을 및 ‘금단의 계곡’의 캠프지에서 돈돈다리로 가는 길은, 첨부된 지도에 표시된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포우 일행만이 아는 비밀의 지름길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범람한 동쪽 지류에 대해서도, 그림에 표시된 것처럼, 적어도 파이프 바위 부근보다 하류 부분에 대해서는, 그 통나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더 상류로 돌아가면 바위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가령 포우가 말하는 X가 M** 마을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마을에서 돈돈다리까지 가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루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횡도 B]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2. 일단 [지류 A]의 상류로 돌아가서 강을 건너고, [횡도 D]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각 루트의 소요 시간을 기록해두자면, 1번 루트는 가는 데 35분, 돌아오는 데 20분, 2번 루트는 가는 데 1시간 반, 돌아오는 데 50분이 걸린다.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단 소요 시간이다.
가능성을 논하자면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돈돈다리까지 가는 루트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횡도 D]에서 한 번 능선길로 나온 뒤 [횡도 C]를 내려가거나, [지류 B]를 따라 계곡을 내려간 뒤 [횡도 A]를 올라 다시 능선길로 나오는 등의 극단적인 우회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정규 “길”을 통하지 않고 능선까지의 경사를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앞서 언급한 1번과 2번 루트에 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다.
추가로,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경우, 엘러리의 알리바이는 오후 3시 5분 이후 완전히 성립한다. 아가사와 올츠이에 대해서는 모두 오후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전혀 없다. 아가사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다고 하지만, 위독한 상태였던 카는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한편 캠프의 네 명은, M**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들은 오후 2시 40분 시점에서는 모두 단독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각자의 증언에 따르면――
- 다이스케: 모두에게 유키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능선길을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 사키: 캠프의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 요우지: 텐트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 사카에: 낚시를 하기 위해 [지류 B]를 내려가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사건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오후 2시 40분에 포우 일행이 들은 문제의 비명은 확실히, 유키토가 돈돈다리 북쪽 절벽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을 때 외친 목소리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인 작가가 지문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 틀림없다.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
○ 문제 1
반 유키토를 죽인 X의 이름을 맞춰주세요. X는 단독범으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 제3자의 범행도 아닙니다.
○ 문제 2
범행 방법은? X는 어떻게 유키토를 죽였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으로는, 연, 행글라이더, 낙하산, 기구, 괴인20면상이 애용하는 미니 헬리콥터 등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도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초능력이나 우주인, 이공간통로 등 초자연적인 존재나 개념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퍼즐 미스터리의 규칙에 따라, 본문에는 전혀 거짓된 기술이 없음을 여기에 명시합니다. 또한, 논리가 무의미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도 동일한 규칙을 설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X 이외의 것들의 대사에는 거짓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위 조건을 바탕으로 답을 제출해 주세요.
건투를 빕니다.


2006/09/19

[번역] 이콜 Y의 비극 (3)

제 2 막

경시는 뭔가 발견했다는, 성취감에 들떠 미소를 띄며, 메모패드를 구노우에게 건네주었다. 구노우는 상사와 똑같이 눈을 의심하며 메모패드를 몇번이나 돌려 보았다.

"볼펜 자국이네요. 이콜 (=) Y 라고 읽을 수 있겠군요"
"자. 이게 바로 다이잉 메시지라는 놈이야. 우리 아들놈이 듣는다면 기뻐서 펄쩍 뛰어오를지도 모를 단서라구"

"그런데 피해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써서 남긴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린가?"

돋보기를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경시는 자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답했다.

"피해자는 전화 수화기에는 손이 닿지 않았지만 메모패드는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있었을거야. 그리고 습격 당했을때 마침 쥐고 있던 볼펜으로 간신히 범인을 나타내는 메시지를 남긴 거라고. 아마도 칼에 찔리기 직전, 혹은 찔린 직후에 범인의 얼굴을 본 것이겠지. 피해자를 찌른 범인은 그때는 그녀가 즉사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실을 나가 강도가 든 것 처럼 보이기 위해 다른 방을 뒤집어 놓았을테니 미처 그것을 막지 못한거지. 메모 패드의 메시지를 눈치챈 것은 위장 공작을 끝내고 이곳에 돌아온 뒤였을 것이네. 메모패드는 마루 바닥 위, 피해자 바로 옆에 떨어져 있었을거야. 범인은 그것을 집어들어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제일 윗장을 뜯어낸 뒤 사이드 보드의 원래 위치에 올려 놓았겠지. 그것만으로도 증거를 인멸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볼펜 자국이 아래 종이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네. - 이 설명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딱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잠깐 생각하던 구노우가 답했다. 경시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뭔가?"
"감찰의의 판단으로는 피해자는 테이블에서 문서작성을 하던 도중에 습격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칼에 찔린 직후에도 눈 앞에는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겠죠. 그 경우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종이를 집을 수 있는데 왜 사이드 보드가 있는 곳 까지 기어가서 전화용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기려 했을까요?"

"좋은 지적이군. 그러나 그 의문도 간단히 설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 피해자는 등을 찔렸던 순간, 그 충격에 의해 볼펜을 손에서 떨어트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볼펜이 테이블 위를 굴러 사이드 보드 앞 까지 굴러간 것이 아닐까?"
"역시나, 테이블 주변에 다른 필기용구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군요. 말씀대로라면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볼펜을 주으러 사이드보드까지 기어갈 수 밖에 없었겠군요. 볼펜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이동하는데 체력을 거진 전부 소진하였을테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마침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있던 메모패드에 손을 뻗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조금은 이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범인은 단독범일걸세. 공범이 있었다면 피해자가 메시지를 남길 여유, 가능성이 거의 없었겠지. 그리고 메모패드의 찢다가 남겨진 조각이 오른쪽 상단에 있는 것으로 보면 범인은 오른손잡이일 가능성이 높겠군. 뭐 여기까지는 상상의 영역에 지나지 않네만, 감식에 메모패드와 볼펜을 중점적으로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겠네. 지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는 아니네만, 뭔가 다른 것이 밝혀질지도 모르잖나?"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메시지가 이 정도뿐이라는 것은 뭔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요. 이렇게 판단하기 어려운 기호같은 것 보다는 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을 써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쓰는 도중에 힘이 빠져버린것이 아닐까? 또 우리들이 보기에는 알수 없지만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본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피해자의 언니에게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겠구먼. 사체를 운반해 나가면 곧바로 사카자키 미도리를 이곳으로 불러와 주었으면 하네"

구노우는 두어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

"아까 쯔부라야 아케미의 증언에 대해서는 경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 남편의 불륜에 대한 증언 말인가? 확실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더군. 남편 사카자키 쿄우스케가 출장으로 집을 비웠다는 타이밍도 뭔가 관련이 있는것 같고. 조금 부인쪽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겠어"

사카자키 미도리는 곧 206호실에 나타났다. 외출때 입었던 옷 그대로 쓰러져 누워 있던 탓에 흡사 전날밤의 과음으로 아침에나 돌아오는 듯한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그래도 한시간전에 받았던 쇼크에서는 어느정도 회복한 듯, 나타나자마자 옆집에 돌려주어야 할 배달된 물건에 대해 신경쓰는 눈치였다.

"물건은 부엌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범인이 손을 댄 흔적도 없으며 송장의 기재도 문제는 없는 것 같고요. 야마네코 운송의 영업소에 문의한 결과 담당자의 확인도 있었습니다. 추후 쯔부라야씨에게 건네드리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은 좀 괴로우시겠지만 동생분의 유체를 발견했을 때의 일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구노우가 그렇게 말하자 미도리는 양손을 허리위에 올려 놓은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에는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술은 앞서 이야기했던 쯔부라야 아케미의 증언과 별로 다른 내용은 없었고 흉기로 사용된 칼도 이전에 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구노우는 생전의 피해자의 행동에 대해 물어보았다.

"동생분은 언제부터 댁에 계신거죠?"
"어젯밤부터요. 남편이 출장가서 없는 동안에는 전부터 자주 놀러오곤 했었어요. 생활비를 굉장히 절약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식사도 별로 잘 차려 먹는 것 같지 않아서, 되도록 우리 집으로 불러 먹이고 싶기도 했고요. 몇년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부터는 내가 부모님 대신인 셈이라 되도록이면 잘 보살펴주고 싶었어요"

"동생분에게 집을 맡기고 외출하신 것은 몇시경이셨습니까?"
"2시 조금 지나서였어요"
"외출은 어디로?"

미도리는 일순 입을 앙다무는 것처럼 보였고, 순간 이젠 어쩔 수 없다라는 시선이 드러났다.

"-게이오선으로 신쥬쿠까지 물건을 좀 살게 있어서..."

구노우의 표정은 순간 굳어 버렸다. 물건을 사러 갔다 왔다면, 집 안에 사온 물건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사온 물건이 있었더라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시체를 발견한 미도리에게는 물건을 달리 어떻게 할 여유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점은 언급하지 않고 구노우는 다음 질문을 계속 했다.

"외출하실 때, 동생분에게 같이 나가시자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 아이가 마침 인터뷰를 수정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때까지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서 널어놓은 세탁물과 시트를 정리해두고, 잠자리를 펼쳐 놓더군요.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하룻밤 더 자도 좋겠지'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잖아'라고 답해주었었어요. 아카네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이여서 휴일도 집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했었어요. 만약 이런 일이 생길줄 알았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나가는 쪽이 좋았을텐데-"

"어제부터 오늘에 걸쳐 동생분에게 뭔가 평상시와 다른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음... 언제나와 같았었다고 생각해요"

"최근 동생분으로부터 일관계, 혹은 남녀관계의 트러블 등의 원인으로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들은 적은 없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생각나는게 없네요. 특별히 사귀는 남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사카자키 부인. 부인쪽은 어떻십니까?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거나 생명을 위협받을만한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미도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 저 말인가요? 하지만 왜...?"
"동생분은 당신 대신에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평범한 강도의 범행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동생분은 이 방에서 혼자서 집을 보던 도중에 등 뒤에서 습격당했습니다. 때문에 당신을 노렸던 범인이 착각해서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혹시 아카네씨가 온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미도리는 입을 손으로 누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아뇨. 남편이 출장을 떠난 뒤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온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렇다면 동생분이 오늘 여기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죠? 스토커 같은 인물이 그녀의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미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별개로 하죠., 혹 그러한 인물이 있다면 부모님같은 당신에게 상담했을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도리는 듣는둥 마는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숙였던 고개를 일으켜 격렬하게 목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한 일을 떠올린 듯, 그 생각을 머리로부터 흔들여 지워버릴 기세였다.

"아뇨. 아니에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노우가 묻자, 미도리는 실수했다는 듯 금방 표정이 굳어버렸고 이윽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는 그녀의 마음 속에 한번 떠오른 의문을 불식시킬 수 없는 듯 복잡한 생각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구노우 경부와 교대하여 질문을 계속 이어나갔다.

"남편분은 신쥬쿠의 여행 대리점에서 근무하신다고요. 이번의 출장지는 어디십니까?"
"교토예요. 어떤 회사의 위안여행인가 뭐래나, 원래 다른 사람이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그이가 교토에 가보고 싶어서 서포트로 동행한 거에요. 어제 아침 여기를 떠나면서 내일 저녁에 돌아온다고 말했었어요"

흡사 책을 읽는 듯한 말투로 건조하게 거기까지 답하다가, 미도리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숙소는 교토의 여관이냐는 질문에도, 고개를 흔들 뿐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내뱉을 용기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젠 마무리인가, 하고 경시는 생각했다.

"그러면, 부인께 잠깐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까의 메모패드를 미도리 앞에 놓았다.

"동생분은 숨지기 직전에 이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메모의 원본은 범인이 가지고 가 버린 것 같지만, 다행히 아래 종이에 볼펜의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콜 Y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메모패드를 본 미도리는 처음에는 숨을 멈추고 망연자실해 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 안색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볼펜 자국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는 한순간 참았던 숨을 한번에 몰아쉬며 말했다.

"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걸 뒤집어 볼 수 없을까요?"
"이렇게 말입니까?"

경시는 메모패드를 거꾸로 놓았다.

"그러니까... 확실히-. 형사님. 이거, 仁 이라는 한자로 보이지 않으세요?"
"인? 흠... 확실히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군요. 만약 이것을 그렇게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도리는 눈을 빛내며, 승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시나마 마유미 (仁科眞弓) 라는 여성을 알고 있어요!"
"그 분은 어떤 분이시죠?"
"남편 회사 부하 직원이에요"
"남편분의 회사? 그 여성이 왜?"

미도리는 뭔가 확신한 듯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아까 쯔부라야 부인이 말했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렇다면 아까 역시 듣고 계셨군요. 그나저나 말하신대로라면-"
"그래요. 니시나마 마유미는 남편 애인의 이름입니다"

메모를 본 뒤 갑자기 사카자키 미도리는 뭔가 깨우친 듯 태도를 바꾸어 그때까지의 애매한 진술을 뒤집었다. 오후 외출의 목적은 물건을 사러 나간 것이 아니고 (물론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게이오선으로 신츄쿠로 이동한 뒤, JR 사이쿄우선으로 갈아타서 도다역에 내렸다고 말했다.

"도다역이요? 사이타마의? 왜 그런 곳에?"
"니시나마 마유미가 살고 있는 맨션을 보러 간 거에요"

미도리가 남편 주위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작년 말 경이었다. 사소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상한 행동이 잦아졌고 그 후 의심만 가득한 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요우스케의 불륜을 확실히 알게된 것은 올해 1월 되어서였다. 부부가 같이 외출했던 날,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쳐서 계장님 이라고 친밀하게 말을 걸던 젊은 여자 - 그것이 니시나마 마유미였던 것이다. 그때는 거리에서의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이었지만, 남편의 당황 - 변명할 수 없는 반응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미도리는 곧바로 두사람의 관계를 직감했고 곧이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고 있지만, 요우스케의 아내인 내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해 라고.

그런 일이 있던 탓에 미도리는 이번의 교토 출장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계장이 된 요우스케가 국내 여행에 써포트로 동행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사실 출발 전부터 거동이 수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2박 3일의 일정이라고는 하지만 교토에 간다고 아내에게 말해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사실은 하루 빨리 귀경하여 불륜의 하룻밤을 그 여자와 보내는 것이 아닐까? 미도리는 그렇게 가슴 속에서 떠다니는 의문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침 놀러온 동생과 상의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 여자 집까지 가서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어때?"

라고 아카네는 말했다. 미도리가 말릴 틈도 없이 남편 서재에 들어간 아카네는 니시나마 마유미로부터 온 연하장을 찾은 뒤 미도리에게 건네주었다. 미도리는 조금 겁을 먹었었지만 아카네가 그녀의 기를 북돋으며 정 뭐하면 자기도 같이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만약 형부가 그곳에 있다면, 내가 언니 몫까지 맛을 보여줄께" 라고 말하는 동생에게
"아냐. 이건 우리들 부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역시 나 혼자 해결하는 것이 좋겠어" 라고 말하고, 집을 봐 달라고 부탁한 뒤, 미도리는 혼자 그 여자의 맨션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 연하장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경시가 요청하자, 미도리는 자신의 백에 손을 뻗어, 속에서 연하장을 꺼냈다. 겉과 뒤 모두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된 조잡한 것이였다. 보낸이의 주소는 도다시내의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라고 하는 맨션의 512호실. 경시는 연하장을 구노우 경부에게 건네주며 조치를 지시했다. 구노우는 곧바로 거실 한쪽 끝으로 가서 휴대폰으로 본부에 연락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주소로 형사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경시는 미도리의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 동생 앞에서는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집을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곳에 가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어쨌든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간 뒤, 다음일은 그곳에서 생각하자,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섰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제발 남편을 보지 않기를 계속 빌기만 했어요"

미도리가 도다역에 내린 것은 오후 3시를 막 지나서였다. 낯선 도시를 헤멘 끝에, 연하장의 주소를 보고 니시나마 마유미의 맨션을 찾아내었을 때는 거의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는 현관이 자동문으로 되어 있어서 외부인은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했었고, 미도리가 현관에서 몇번이고 인터폰 벨을 눌러 보았지만 마유미는 집에 없었는지 512호실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맥이 빠져서 그대로 돌아가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요우스케와 마유미가 어딘가 밖에서 만나 같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맨션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1층 상가 구역에 카페가 있었고, 미도리는 그 카페의 창 바로 옆 좌석에 앉았다. "챨스톤"이라는 한가한 가게로 손님은 그녀밖에 없었다.

마유미가 돌아온 것은 오후 5시 30분 경이었다. 다행히 요우스케와 함께는 아니었다. 미도리는 카페 창 너머로 마유미가 맨션 현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노리츠키 경시는 거기서 미도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5시30분 경이라는 시간이 틀림 없는지 확인했다. 틀림없어요, 몇번이나 시계를 봤는걸요, 라고 미도리가 답했다. 경시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았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니시나마 마유미와는 길거리에서 딱 한번, 스쳐지나가듯 본 적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확실히 같은 여성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미도리는 왜 그런 당연한 것을, 이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확실하게 말했다.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 여자 얼굴을 잊어버릴리는 없잖아요. 그리고 목소리도... 조금 기다린 뒤 나는 카페를 나왔어요"
"니시나마 마유미의 뒤를 따라간 것입니까?"
"예"

가게를 나선 미도리는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현관으로 들어가 다시 512호실 인터폰 벨을 눌렀다. 마유미의 목소리가 들려, 재빨리 화장품 세일즈를 가장해서 마이크를 향해 적당한 말을 몇마디 던졌다. 물론 상대해 줄 리는 없었다.
'곧 손님이 올거니까 그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마유미는 인터폰을 끊었다.

손님이 있다고 말한것은 단순히 방문판매를 쫓아내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도리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까의 카페로 돌아간다면 카페 주인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장소를 바꾸기로 하고 장소를 찾다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이동했다. 맨션의 앞 까지 뻥 뚫려 있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척 미도리는 벤치에 앉았다.

오후 6시 5분경, 역 쪽으로부터 남편과 굉장히 닮은 뒷모습의 남자가 여행가방을 한손에 든 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도리는 얼굴을 숨기고 석양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 계속 그냥 닮은 다른 사람이길 빌었지만, 그것은 남편 요우스케였다. 그는 사람의 이목에 신경쓰는 듯 조용한 걸음으로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 들어갔다.

남편의 모습을 보았지만 미도리는 곧바로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공포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속은 하얗게 되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확실히 아카네와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걸, 이라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곧 저절로 그녀의 발은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 쪽으로 향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그 사이에도 계속, 분명히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그 여자 집을 찾아간 것일거야, 이제 5분만 있으면 기쁜 얼굴로 맨션에서 나오는 그를 볼 수 있을거야, 그런 생각만 가득했어요"

그런 그녀의 생각이 통했는지, 요우스케가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향하는 곳은 길 반대 방향의 편의점 자판기였다. 담배를 사러 나온 것이었다. 자신의 담배 뿐만이 아니라 여성용 담배까지도 같이 사는 것이 보였다. 전부터 담배를 피는 여자는 싫다는 말을 했었는데... 맨션에 돌아가는 남편의 뒤를 숨어서 바라보던 그 때, 비로서 미도리는 배신당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에서는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로부터 3,40분 정도, 미도리는 그녀 주위에 땅거미가 둘러싸기 시작할 때 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전후의 시간 경과를 확실히 기억하기 못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때 쯤 그 자리를 떠났다. 이유는 생각도 나지 않고 알 수도 없었지만 어딘가에 묶인 것 처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허탈한 미도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맨션의 현관앞에 서 있었던 것 정도였다.

"그 피자 배달 말인데요, 어떤 피자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경시가 묻자 미도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였더라... 얼굴을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 전부터 계속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럼 저희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 가게에 물어본다면 배달 시간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인은 그 이후에 뭘 하셨습니까?"
"언제까지 계속 기다린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죠. 깨닫는 것이 굉장히 늦어버렸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여자 방으로 찾아가서 남편의 불륜 현장을 덮치지 않으면 안돼. 늦어지긴 했지만 그렇게 결심 하고 다시 맨션 현관으로 갔어요"

용기를 내어 512호실의 인터폰을 누르고 미도리는 마유미가 답하기도 전에

"사카자키 요우스케의 아내입니다. 남편을 내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소리쳤다. 상대는 숨을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었다. 남편은 안 계시다, 라고 마이크를 통해 마유미는 시치미를 뗐다. 남편이 맨션에 들어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보았다고 답해도 '잘못 보신 거에요'라고 딱 잘라 말했고 있다, 없다의 지루한 문답을 계속하다가 '아까 화장품 판매도 당신짓이었군요' 라는 말을 끝으로 마유미는 회선을 끊어버렸다. 그 뒤도 계속 인터폰을 눌러 보았지만 두번다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분해서, 그 집 우편함에 들어있던 뒷면이 흰 광고지를 끄집어 내어 그 여자에 대한 것을 거기 썼어요. 그리고 아까의 편의점까지 가서 복사를 한 다음 맨션에 돌아와 그 복사물을 맨 끝에서 부터 우편함에 차례로 집어 넣었어요. 니시나마 마유미가 어떤 여자인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쳐 주려고요"
"그 복사물 남은 것은 가지고 있으십니까?"

미도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채, 백 속에서 반으로 접힌 복사물을 꺼냈다. 경시가 펼치자 종이 한 가득 크래용으로 갈겨 쓴 듯한 글자가 나타났다. 루즈를 사용하여 쓴 것 같았다. 문구는 이러했다.

'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 거주하시는 모든 분들께. 512호실의 니시나마 마유미는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오늘밤도 불륜 상대를 방에 데리고 들어와서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 발정난 돼지같은 색정광이 이곳에 살고 있는데 여러분은 괜찮으신가요?'

터무니없는 중상모략 글이었다. 경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미도리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이것도 부족할 정도라고요! 그 여자는 더욱더 심한 짓을 했습니다. 512호실의 니시나마 마유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라고, 그 때 써버리는 것이 좋았을텐데!"
"부인. 기분은 알겠지만-"
"아니요"

위로하는 경시를 미도리는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혼합된 연료가 마음 속에서 타 오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5시 30분에 그 여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뭔가 사러 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런것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 니시나마 마유미는 나와 엇갈려서 이 집으로 들어와서, 나를 죽일 생각으로 아카네를 살해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아무것도 아닌 듯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까 사람을 찔러 죽인 그 손으로 이번에는 내 남편을 방으로 끌어들인 거라고요. 정말 무서운 여자! 그래도 니시나마 마유미의 정체를 알게되면, 확실히 그 사람도 나에게 돌아와 주겠죠. 그러니 형사님. 제발 한시라도 빨리 그 여자를 체포해서 남편의 실수를 깨우쳐 주세요!"

사카자키 미도리의 사정청취를 끝냈을 때는, 오후 11시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경시는 뒷끝이 찜찜한 피로감이 느껴져 당분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노우 경부도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다가 웅얼웅얼 말을 꺼냈다.

"처음은 부인의 진술로 한번에 체포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좀 약한것 같네요"
"아아, 알리바이 때문인가? 미도리의 진술 대로 니시나마 마유미가 5시 30분에 도다시의 맨션에 돌아왔고, 그 뒤에 계속 집에 있었다면 다치가와 아카네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사망추정시각은 6시부터 7시 사이니까"

경시는 괴로운 표정으로 인정했다. 그 일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미도리에게 몇번이나 목격 증언을 확인했었다. 구노우는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 듯한 어조로

"감찰의의 검시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사법 해부의 결과가 나올 때 까지는 속단할 수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을걸세. 감찰의 나카지마는 저렇게 젊어 보여도 실력은 있어. 약간 사망 추정시각의 폭은 넓어질 수 있어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거야. 세타가야와 시이타마의 거리는 택시를 타고 날라온다고 하더라도 왕복 한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니시나마 마유미의 범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분명 이 경우는 남편 사카자키 요우스케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까? 미도리 부인도 처음에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의심한 것 같은데-"
"음. 진술 도중에 갑자기 입이 무거워 진 것은 그 탓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6시15분에 마유미의 맨션에 찾아 왔다는 미도리의 목격증언이 사실이라면, 사카자키의 경우에도 범행 당시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네.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들킨것이 알리바이라니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원"
"하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내와 착각해서 동생을 살해할 일도 없겠죠"
"그것도 그렇지. 미도리가 말한 것 같이, 사카자키가 출장 일정을 조정했다면 조금 수상한 점도 있어. 어떻게 사건과 연결되는 점이 없을까?"
"사카자키가 몇시의 신칸선으로 교토를 출발해도, 표를 살 필요가 있습니다. 도쿄역으로부터 도다시의 마유미의 맨션까지 직행한다면 그게 최고였겠죠. 만약 중간에 비는 시간이 있다면-"

휴대폰 착신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실례, 라고 말하며 구노우가 전화를 받았다. 마유미의 맨션에 파견한 수사관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선수를 쳐서 중요 참고인의 신병 확보에 나선 것이었다. 구노우는 부하의 보고에 귀를 기울인 후, 오늘 밤은 일단 연행할 것을 지시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쪽은 어떻게 되고 있나?"

경시가 묻자 구노우는 보고의 내용에 만족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진술은 사카자키 미도리의 진술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부인이 맨션에 나타나서 인터폰을 눌러 문답이 오간 것도 인정하고 있고요. 그 대신 회사의 상사가 방에 왔다는 것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사카자키는 마유미의 방에 없었단 건가?"
"네. 하지만 별로 이상한 건 아닙니다. 보고에 따르면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는 자동 잠금 현관과는 별도로 안에서부터 잠그는 비상구가 있다고 하는데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곳이 열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사카자키가 도망갔다면 수사관이 인터폰으로 용건을 말하는 사이에 512호실로부터 빠져나와 비상구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높죠. 또한 마유미의 방의 테이블에 빈 피자 박스가 2인분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마유미는 배가 너무나 고파서, 2인분을 먹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요"
"역시, 그렇다면 아까 진술에서 미도리가 목격한 피자 배달은, 니시나마 마유미가 주문했던 피자의 배달이라는 것이구만. 그 배달이 있던 시각은?"
"6시 45분에 주문의 전화를 받아, 피자가 도착한 것은 7시 조금 전. 사카자키 미도리가 인터폰을 눌러 남편을 보내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20분 정도 뒤로 보입니다"
"타임 테이블의 공백이 대충 맞아 떨어져 가는구먼. 오후의 외출에 대해서 마유미는 뭐라고 한다던가?"
"역전의 영화관에 가서 혼자서 영화를 보았다고 합니다. 돌아온 것은 5시 30분경, 그 직후에 화장품 세일즈를 사칭한 여자와 인터폰으로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역시나 미도리 부인의 진술대로죠. 그리고 또 하나, 조사원의 보고에 따르면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현관 우편함에 니시나마 마유미를 중상하는 유인물이 놓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흠, 마유미의 맨션은 도다역으로부터 걸어서 몇분정도 걸리나?"
"도보 5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 미도리가 복사한 유인물을 마유미의 맨션 우편함에 뿌린 것이 7시 30분 전후라고 했으니, 도다역에 도착한 것이 7시 35분. JR 기타게이선으로부터 게이오선으로 갈아타서 치도리야마에 도착한데에 필요한 소요시간은 - 갈아타는 시간을 포함해서 45분 정도인가.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우는데 10분정도 걸릴테니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딱 맞아 떨어지는구먼. 아직 남편 행동에 관한 부분이 남아있지만 미도리의 진술은 대체로 확실하다고 여겨지는군"
"사카자키가 여자 방으로부터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노우가 묻자 경시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론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당연한 반응 아니겠나? 반대로 자기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모처럼의 알리바이를 자신이 버리는 듯한 행동을 취할리가 없었겠지. 확실히 사카자키는 범인이 아니야. 특별히 수배하지 않더라도, 사건의 대한 이야기를 어디 다른 곳에서 듣는다면 창백해진채, 내일이라도 출두할 것이 분명해"

구노우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사카자키 부부의 주위에는 지금까지 범인으로 추측될 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하더라도 강도의 범행이라는 가정도 수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니시나마의 니시(仁)가 아니라면 저 이콜 Y라는 다이잉 메시지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으음... 아들놈의 지혜를 빌리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오늘 오후 이 방을 방문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뒤는 이시바시라고 하는 야마네코 운송의 배달원 정도밖에는 없는데"
"야마네코 운송이라-"

구노우가 아직 팔짱을 끼고 있는 채로 그렇게 웅얼거렸다. 짧은 침묵 뒤에 갑자기 경시는 깜짝놀라 구노우의 얼굴을 보앗다. 구노우의 쪽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이쪽의 얼굴을 놀려 자세히 옅보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대체로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아까의 부재자 연락표는?"

이라고 경시가 말했다. 205호실의 쯔부라야 마유미가 가져온 연락표를 꺼내어 놓고 구노우도 흥분한 어조였다.

"이겁니다. 저 메시지는 문자나 기호는 아니고, 피해자가 고양이의 마크를 닮은 그림을 그려 남긴 것입니다. 한쪽끝에 수염과 입을 그리던 도중에 힘이 떨어져 버린 것이죠. 이 이시바시라고 하는 인물이 배달을 왔다가 젊은 여성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칼로 협학해서 난폭한 짓을 하는 정신이상자라고 한다면-"

경시는 연락표에 눈을 떨구었다. 회사명과 평행하게 고양이의 얼굴을 그린 야마네코 운송의 트레이드 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생긴 도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