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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24/08/23

괴물이라 불린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 김지선 : 별점 1.5점

괴물이라 불린 남자 - 4점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미해결 사건을 다루는 FBI 수사팀의 일원이 되었다. 팀의 첫 사건은 데커가 주목한, 고등학교 미식축구 스타 출신 사형수 마스 사건이었다. 멜빈 마스는 20여년 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집행 당일에 찰스 몽고메리라는 사형수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여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데커와 수사팀은 몽고메리가 돈을 받고 위증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냈지만, 몽고메리는 사형 집행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폭발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데커는 마스의 부모 사진이 없는 것, 마스가 전국구 스타가 된 뒤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마스의 부모가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와 같이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마스의 아버지 로이가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걸 밝혀내는데...


특이한 능력을 지닌 수사관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수사하다가, 사건 배후에 거대한 국가적인 음모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챈다는 흔해빠진 스릴러.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이어지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 수사관으로 과잉 기억 증후군에 시달리는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입니다.

멜빈 마스 시점에서의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사형 집행 당일, 누군가 자기가 진범이라고 고백해서 살아났는데 그 누군가가 알고보니 진범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시 사형수가 된다는 뜻이니 매 순간 순간이 긴장될 수 밖에 없지요. 20년이나 버려두었다가 사형 집행 당일이 되어서야 그를 구해준 '누군가'의 의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구해줄거면 더 빨리 구해주던가, 아니면 아예 죽게 내버려두는게 맞을텐데 왜 하필 이 시점에?
마스의 어머니가 말기 뇌종양이어서, 남편이 그녀가 편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준 뒤 살해당한 걸로 위장했다는 진상도 괜찮습니다. 원래 아버지 로이는 소싯적에 흑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테러에 가담했다가, 보험삼아 테러 증거물을 훔치고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스가 슈퍼스타가 되어 행적이 노출되자 다시 죽은척 몸을 숨기게 된 겁니다. 이는 마스의 부모님이 전국방송에 등장했던게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추리와도 연결되며, 숨어 지내고 싶었지만 아들의 출세가 발목을 잡고 만 아이러니한 상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스 이야기 외 다른 모든 부분은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너무 엉망이라서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우선 사건부터 설득력이 없어요. 마스에게 누명을 씌운게 아버지 로이였다는 것부터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약 조직의 성노리개였던 여자를 사랑해서 탈출했는데, 그 여자가 마약 조직 보스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그게 마스였다! 더러운 놈에게 복수를 직접 하지 못했으니 그 자식에게 복수하겠다!는 동기인데 황당하기가 그지 없어요. 이걸 추리해내는건 더더욱 말도 안되니, 추리물로 볼 여지도 없습니다. 등장하는 단서라고는 마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어를 잘했다던가, 집에 은제품이 있었다(조직의 물건을 훔쳐서 나온것)는 정도인데, 이걸로는 턱도 없지요.
마스에게 최면을 걸어 들은 '초차'라는 말을 근거로 로이가 죽은 척 몸을 숨겼다고 추리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초차'는 콜롬비아 칼리 지방의 방언으로는 '주머니쥐'이고 주머니쥐는 죽은척한다는 이유인데, 근거도 빈약하고 억지로 가져다붙인 느낌만 전해줍니다. '창녀'라는 명확한 일반 명사가 있는 단어에 전 세계에서 딱 한 지방에서만 쓰는 방언으로 해석한다는건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20년만에 구해준 이유도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의 '아이는 구해달라'는 유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처구니가 없지요. 병주고 약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과거 마스 사건에서 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사건 당일, 모텔 직원의 증언으로(나중에 위증일 수 있다는게 밝혀지지만) 마스가 집에 들러 범행을 저지를 시간이 있었다는건 증명됩니다. 그런데 마스가 사건을 저지를 동기는 제대로 증명되지 못합니다. 가정 불화가 특별히 언급되지도 않았는데, 얼마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의 계약금 일부 때문에 부모를 죽인다는게 그렇게 설득력있는 동기인가요? 누가 보아도 마스는 수천만불의 연봉을 받을 슈퍼스타가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어머니 루신다의 혈흔이 마스의 차에 남아있다는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이전에 코피를 흘리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변호사만 잘 선임했어도 마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로이가 마스에게 누명을 씌우는게 그렇게 철저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야기도 치밀함, 정교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데커가 NFL에서 뛰었던 미식축구 선수였고, 오래전 시합에서 마스와 겨루었다는 과거가 마스와 연결되어 사건이 시작되고, 결국 둘이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데커의 독특한 특기(?)인 과잉 기억 증후군이 이 작품에서 하는 역할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정체성을 흐립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팀을 꾸리지만 팀원들이 하는 역할도 없어요. 심지어 동료 대븐포트는 비교적 초반에 납치되어 멤버에서 빠지는데,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에요. 다른 멤버들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동료로 여겼던 마스의 변호사 올리버가 알고보니 과거 테러를 저질렀던 삼총사의 밀정이었다는 반전도 별로입니다. 올리버가 주장하던 마스를 위해 제기했던 소송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삼총사 중 한 명인 매클렐런과 함께 찍은 사진같은 억지 증거는 불필요했습니다.
로이가 소싯적 손재주(?)가 좋아서 폭탄을 만들어 테러에 가담했지만, 70대가 된 현재에도 신출귀몰하며 FBI와 거물 킬러들을 엿먹이는 전문가가 된 경력도 불분명하고, 죽기 전 데커에게 지갑을 남겨 도서관증 --> 대출한 책 --> 금고 열쇠로 이끄는 과정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과거 삼총사가 저질렀던 테러 증거가 황당할 정도로 상세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요. 뭐 하나 제대로 와 닿는게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반부는 분명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질낮은 흔해빠진 헐리우드 스릴러로 마무리됩니다. 인기 요소는 잔뜩 집어 넣었지만 설득력도 낮고 정교함도 떨어지는 탓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리즈가 이 뒤로도 몇 편 더 이어지는 듯 한데, 더 읽을일은 없겠네요.

2023/12/17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 이창현, 유희 : 별점 2.5점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 6점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사계절

인터넷 서점 추천 도서로 올라오길래 읽어보게 된 한국 개그만화. 사전에 아무런 정보는 없었습니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요.그런데 조금은 기묘한 독서 모임을 다루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개그를 끌어내는건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캐릭터 개그가 많습니다. 주인공 '경찰'은 "무간도"와 똑같이 조직에 침투한 밀정이며 "사자"는 친구 하나 없는 사회 비적응자이자 살케 팀의 팬이고, "로렌스"는 어이없는 소설을 쓴다는 식으로요. 심지어 독서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은 예티이기까지 합니다. 이들 모두가 크게 터진다기 보다는 피식거릴 수 있는 잔잔한 웃음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제목처럼 독서에 관련된 개그도 많습니다. 1화 첫 페이지에 등장해서 주인공 포스를 내뿜었던 '노마드'가 자기개발서에 빠졌다는 이유로 강퇴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마들렌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며 멤버들마다 각자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는 장면들 처럼요. 책갈피와 목차, 역자 소개, 서문만 보아도 읽을 만한 책이라는걸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실제 책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며 설명되는데, 단순 개그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일리있어 보였습니다. 주석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중요한 내용은 본문에 썼을거라는 이유인데 그럴듯했습니다!


아래와 같이 의외로 실질적인 정보도 제공해주기도 하고요.


소개되는 책도 방대한 편입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 등 반가운 책들도 눈에 뜨이더군요.
하지만 독서 중독자들은 완독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주장만큼은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기는 하지만 대체로 완독을 목표로 하는데 말이지요. 이런 주장은 어디서 따 와서 그려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근거가 될 만한 통계나 기사는 '주석'으로 추가했더라면 좋았을것 같네요.

여튼 이런 캐릭터, 독서에 관련된 개그들은 잔잔하니 좋은데 문제는 결말 부분입니다. 마지막에 '경찰'의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독서 모임 멤버들이 총 출동하여 그를 구해내고, 알고보니 멤버들이 모두 비밀 조직 요원이었다는건데, 솔직히 없는게 나았습니다. 책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장면이었어요. 결말만 현실적이면서도 독서 중독자들과 어울리는 개그로 마무리지었더라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지만, 지금의 결말로는 별점 2.5점입니다. 

2023/04/22

침저어 - 소네 게이스케 / 권일영 : 별점 2.5점

침저어 - 6점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예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사 2과 소속 후와 경부보는 일본의 국회의원인 중국 공작원 - '침저어' - 멕베스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수사에 가담했다. 곧 거물 정치인 아쿠타가와 의원이 유력한 멕베스 후보로 떠올랐다. 아쿠타가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중국 공작원으로 의심받는 우춘시엔과 만났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토 마리가 실종되었고, 그녀의 노트북에서는 비밀 문서인 요코다 페이퍼까지 발견되어 혐의는 더 짙어졌다.
망명 요청을 한 중국 외교관 류잉캉의 증언으로 후와는 멕베스는 조작이라 여기게 되었지만, 수사본부를 장악한 고미 일당은 아쿠타가와가 멕베스이며, 후와는 중국 밀정인 두더쥐로 생각했다. 후와는 어쩔 수 없이 멕베스 사건 지휘자 도쓰이 관리관에게 직접 보고했고, 류잉캉의 증언으로 또다른 거물급 정보원 '시벨리우스'를 체포해서 멕베스 조작설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고미는 직접 류잉캉을 심문하러 나섰지만, 중국 공작원들에게 습격당해 류잉캉은 빼앗기고, 고미마저 치명상을 입었다. 후와의 직속 후배이자 부하 와카바야시는 이 사건이 자기 탓이라 자책했고, 그가 두더쥐였다는게 밝혀졌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포섭되었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와카바야시의 행방을 찾는 무리에 후와마저 납치당했다.
풀려난 후와는 도쓰이 관리관에게 베이징의 책략을 폭로했다. 알고보니 멕베스는 아쿠타가와 겐타로가 맞았고, 류잉캉의 증언을 포함한 모든 건 이를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첩보 미스터리. 일본에서 국제적인 정보전이 펼쳐진다는 설정이 특이했는데, 흡입력은 상당합니다. 거물 공작원 멕베스가 누구인지, 멕베스의 존재 자체가 가짜가 아닌지, 경찰 내부의 두더쥐는 누구인지 등 다양한 수수께끼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입법부와 경찰 조직간의 역학 관계, 고미 일당과 후와 경부보간의 알력 다툼 등 여러 갈등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에서 헛점이 느껴지는건 아쉽습니다. 우선, '멕베스'의 존재가 드러난건 수사본부 발족 2개월 전 미국에 망명했던 중국 고위층 인물 후샤오밍의 증언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 증언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끔 공작을 벌이고요. 그래서 류잉캉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죠. 목적은 당연히 멕베스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왜 아쿠타카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우춘시엔과 만나는걸 방치했냐는 것입니다. 수사가 2개월 뒤에 시작되었으니, 이 만남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멕베스가 아쿠타카와가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그건 조작이었다!'보다는 '멕베스는 조작으로 누구인지 실체가 없다!' 쪽이 훨씬 안전한 선택입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왜 이토 마리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노트북에 비밀 서류가 있다고 조작했냐는 것입니다. 마리는 중국이 죽인걸로 보이는데, 앞서 말했듯 중국은 멕베스라는 존재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쿠타카와가 의심을 살 단서를 조작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래서야 아쿠타카와에게 수사가 집중될 뿐입니다. 게다가 이토 마리의 만남은 후와의 수사로 문제가 없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자료는 '두더쥐' 와카바야시에게 넘겨주었으니 중국도 그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고요. 도대체 중국은 무슨 생각이었던걸까요?
일본측 목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아쿠타카와가 멕베스라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이중 스파이였으니까요. 수사에 나서지 않으면 중국이 이상하게 여길테니 외사과를 투입하기는 했지만, 아쿠타가와의 정체가 드러날 수사를 진행할 필요는 없었어요. 드러난 증거로 소모적인 수사만 시키다가, 멕베스가 조작된 정보라는 것만 고미 일당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고 수사본부를 해산하면 됐습니다. 물론 이토 마리가 실종되고 노트북에서 기밀 정보가 발견된 이상, 누가 보아도 아쿠타카와를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라 수사를 중지시키는건 어려워졌긴 했습니다만. 더더욱 중국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지는군요.
차라리 멕베스는 다른 누군가라고 후샤오밍이 명확하게 말했고, 중국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멕베스는 아쿠타카와다!"라고 속이기 위한 작전을 펼쳤으며, 일본은 "아니, 우리는 차라리 후샤오밍의 증언 자체가 조작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래"라고 받아치다가 후와에 의해 "알고보니 멕베스는 OOO이었다!"라고 드러나는 전개가 단순하지만 더 설득력있었을 겁니다.

이런 알 수 없는 양국 행태에 비하면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와카바야시의 두더쥐 활동은 차라리 깔끔한 편이기는 합니다. 일본측 - 도쓰이 관리관 - 이 와카바야시도 이중 스파이로 이용했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았고요. 문제는 와카바야시를 커뮤니케이션이 지극히 떨어지는 기묘한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감정이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른 인물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후와 경부보는 일본 하드보일드물에 흔하디 흔한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고미 일당은 전형적인 깡패 형사들이고 그 외 인물들도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운 탓입니다. 모든걸 알아챈 후와가 지인이자 어둠의 실력자 왕 영감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사라지면서, 뭔가 후속작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점을 잔뜩 언급하기는 했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첩보물로의 미덕은 잘 살아있고요. 란포상 수상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재미삼아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덧붙이자면, 뒤에 함께 수록된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소감이 놀랍습니다. 작가는 명문대 와세다 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가 "빤한 인생을 살기 싫다" 였다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망해가는 사우나, 어두컴컴한 만화 카페 등에서 일했고 만화 카페에서조차 급여와 직책이 오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껴 사표를 냈다니 놀랍습니다. 1967년 생이니 이런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미 일본에서도 버블 경제는 끝나서 그렇게 만만한 삶을 살기는 힘들었을텐데 말이지요. 또 정작 발표한 작품은 비교적 뻔하다는걸 보면 인생관, 가치관과 결과물이 비례하는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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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23/02/11

닌자의 세계 - 야마키타 아쓰시 / 송명규 : 별점 2.5점

닌자의 세계 - 6점
야마키타 아쓰시 지음, 송명규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제목 그대로 닌자에 대한 모든걸 정리하여 알려주는 책. 구성은 몇 권 읽어보았던 다른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와 동일합니다. 한 개의 주제에 한페이지 설명과 한 페이지 도표, 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은 닌자의 역사에 대해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닌자가 정말로 존재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거든요. 전국시대 당시 첩보를 하는 인간들은 분명 존재했다고 설명해 줍니다. 이들을 모두 '시노비'라고 부르게 되었던건 도쿠가와 막부가 고용했던 이가 사람들이 시노비였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닌자라는 말은 2차대전 이후 야마다 후타로가 쓴 인법장 시리즈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답니다. 당연히 만화 등에 나오는 화려한 인법보다는 첩보, 정찰 업무가 주였고, 인술비전서 최고의 인술로도 '모략'이 소개되고 있다는군요. 원래도 대단치않은 기술을 보유했었고, 전국 통일 후에는 대부분 평범한 하급 무사가 되었버려서 그나마의 인술도 잊혀졌지만, 이가에서만 이가를 맡았던 다카토라에 의해 기술을 발전시킬 '무족인' 제도가 도입되어 기술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막부 말기 이른바 최후의 닌자로 이가의 무족인이었던 '사와무라 진자부로' 가 페리 함대에 잠입해서 조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고요. 뭐, 이것도 인술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첩보 활동이었다고는 하지만요. 이가만큼이나 유명했던 코가 닌자는 무족인과 같은 특권을 받지 못해 결국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에도시대에 예능이 성행하면서 시노비의 기술이 기예로 인기를 끌어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즉, 현재의 닌자 캐릭터는 일종의 광대극 캐릭터인 셈입니다.
이 뒤에는 닌자의 기원에 대한 이론, 유명한 이가와 코가 닌자의 유래와 그 관계, 핫토리 한조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막부 시대 밀정은 닌자는 아닙니다만, 후계자라면 후계자라면 할 수 있겠지요. 에도 시대 호조 가문의 시노비였던 후마 코타로가 도적이 되었고, 그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던 카이의 시노비 코사카 진나이도 결국 잡혀 죽었다는건 역사적 사실로 보여 흥미로왔습니다.

닌자의 도구, 기술 설명 부분도 흥미로왔습니다. 닌자의 옷이 검은색으로 알려진건 에도 시대 무대 공연 때문일 뿐, 실제로는 저렴하게 물들일 수 있는 감즙색 옷이 많았다는 사실에 기반한 정보들도 좋았고, 시노비 두건 쓰는 법, 닌자의 속옷, 수리검이라고 불린 차검의 다양한 형태와 봉수리검과의 차이, 항아리 뗏목, 소형톱 시코로 등위 도구와 자사구리, 츠리가타나, 사게오칠술 등의 인술처럼 도판이 효과를 발휘하는 항목도 많아서 마음에 들았습니다.
닌자는 가난하다는 기본 상식을 가지고 도구 이야기를 풀어내니 얼마나 창작물이 허구인지도 잘 알 수 있었어요. 한번 쓰고 버릴 수리검에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지요. 줄에 가로대를 달고 끝에 갈고리를 붙여 올라가는 사다리 카기시바고는 잘 알려져 있기는 한데, 걸 때 소리가 나서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았을 거라는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겠지요. 이렇게 실제로는 무의미했을 창작품은 그 외에도 물 위를 걷는 신발 미즈구모(실제로는 두께가30cm이상 되었어야 함) 등이 있다네요.
인술비전서도 당연히 후대의 창작품이지만 그 중 <<만천집해>>는 그래도 상당한 연구가 겻들여진 수작이라는걸 알려줍니다. 도판도 곁들여져 있다하니까요.

인술이 나름 효과있는 술법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급박한 전투에서는 간단하고 실용적이며 빠르게 쓸 수 있는 술법이 사용된게 당연하지요. 한 번 성공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으니 비밀도 지켜지고요. 이런건 후대 닌자 만화 설정과 비슷하네요. 당연한 일을 좀처럼 할 수 없는게 인간이라 일부러 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으로 보이지만요. 물론 설명되는 인술은 무슨무슨술....처럼 이름은 거창하지만 뻔하고 어이없는 것들도 많기는 했습니다. 그나마 고양이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다는 찰천술은 기억에 남네요. 죽은 시체의 동공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는 클락성 살인사건의 추리가 떠올랐거든요. 정원 한복판에서 등을 둥글게하고 머리를 숨기며 가만히 있는 메추라기 은신술도 나름대로 그럴듯했고요.
참고로 여우 은신술은 물 속에 숨는 술법인데 만화에서처럼 대나무로 호흡하지는 않았다네요. 굵은 나무가 튀어나와 있으면 이상하니까요. 원래는 얼굴에 나뭇잎 등을 붙이고 얼굴째 내밀어 호흡했다고 합니다. 삼베 뛰어넘기 훈련법은 삼베가 아니라 모시풀이었을거라는 추정도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은 창작물 속 닌자들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타츠카와 문고의 사루토비 사스케, 야마다 후타로의 인법첩 시리즈 특징과 주요 대결구도, 시라토 산페이의 닌자 만화 시리즈 소개, 지라이야 소개 등. 시라토 산페이의 만화에서 인술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건 신선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닌자의 체술이 바탕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예 마법같은 것 보아야 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었겠지요. 그러나 이 부분은 설명 도판이 아쉬웠습니다. 인술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 부분을 실제 만화 이미지로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지라이야의 유래가 중국 소설에 등장하는 도적으로, 도둑질 한 곳에 아래야라는 메모를 담겨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건 처음 알았고요.
마지막 100번째 항목은 실존하는 무술 Ninjutsu입니다. 해외에서는 유명하지요. UFC 초창기(시즌 2)에 닌쥬츠 고수가 나왔던 시합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닌자 역사에 대한 설명 중 야규 일족, 마미야 린조 등 암살, 밀정 활동을 한 실존 인물을 닌자처럼 설명하는건 와 닿지 않았고, 사이고 다카모리까지 언급하는건 도가 지나쳤습니다. 이시카와 고에몬도 닌자였을 수 있다는건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비슷한 기술을 지니고 있있으니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둑이 된 닌자가 많았을거라는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니까요. 마츠오 바쇼 닌자설도 마찬가지, 많이 걸었다는 것과 여비를 누구도 주었는지로 닌자일 수 있다는건 억지입니다.
다른 트리비아북 시리즈에는 파워포인트스러운 도표가 대부분인 책도 있었는데, 이 책은 그래도 일러스트를 통한 설명이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그리 깊이있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없고 가성비도 좋나고 보기 어려우나 실제 역사와 근거에 기반한 설명과 시리즈 취지에 걸맞는 잡다한 정보가 많은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닌자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2021/04/03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정운현 : 별점 5점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10점
정운현 지음/개마고원

친일파를 조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인물사 서적입니다. 크게 관리, 경제인 (갑부), 지식인, 언론인, 작가 및 예술가, 종교인, 직업적 친일분자라는 7개 분류로 소개됩니다.

서론에서 소개되는, 타국 친일파 처벌 사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3.1 문화상을 수상한 친일파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까지 있다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뒤이은 친일파들의 매국 행각도 화려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 친일파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선대의 재산에 힘입어 해방 이후 한 자리씩 차지했던 후손들의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부분 반성은 커녕 친일 재산을 되찾으려는 등 뻔뻔함으로 일관했으니까요. 최소한 '친일을 해서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해서 못 사는' 나라가 아님을 지금이라도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반대로, 친일 행각을 반성했던 소수는 이 점을 감안해서 대접해야 햘 테고요. 윤서인같은 인간들이 망발을 내뱉는 사회가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는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겁니다.

그럼 몇 명의 인상적이었던 친일파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대우입니다. 3.1 의거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지만 감옥살이 이후 변절하여 일제하 도지사를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이지요. 반민특위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1960년 총선에 출마했다는 뻔뻔함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끌며 수백명의 독립군을 체포, 사살하는데 기여했던 김창영이 반민특위에서 고작 '공민권 정지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해도 마땅한 악질 친일파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김창영이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해방 이후 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죗값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희선은 원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알고보니 변절자로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 노릇을 했다니 기가 찹니다. 

유명했던 친일경찰 노덕술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독립 운동 사건만 취급했던 악질 고등 경찰 출신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될 당시, 무려 34만 1천원이라는 도피 자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질이었지요. 게다가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테러 음모에도 가담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바로 사형을 시켰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등으로 수감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네요. 그 뒤 제 1사단 헌병대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6.25 때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해 구속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응징을 받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조선 제일 갑부의 한 명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 이야기도 볼 만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관직에 있으며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하여 치부한 인물이거든요. 단순 치부였다면 모를까, 재산 증식 및 인맥 확보를 위해 친일파들과 적극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본 밀정 노릇을 하기까지 했다네요. 그나마 그 많던 재산은 해방 이후 다 날리고, 제실도 흉가가 되었다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런 정보로 치부한 공직자들도 모두 패가망신하면 좋겠네요. 

영덕 갑부 문명기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 골몰했던 친일파인데, 1935년에 일제에 10만원을 헌납해 비행기를 기증했다는 일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복엽기!더라고요. 일제에서 누군가 문명기 돈을 빼돌린 모양인데, 전쟁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죠.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런저런 공직에 종사하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연좌제처럼 공직을 박탈할 필요야 없지만, 할아버지 재산이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던 할아버지 못지않은 파렴치한이라는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운동가로 알려졌던 이선근은 열렬한 친일파였던건 물론이고 박정희 시절 유신 독재 찬양에 전두환까지 찬양했던,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더군요. 국립묘지 안장에 아들과 손녀들이 모두 떵떵거리며 산다니, 지금이라도 국립묘지 파묘는 물론 그의 정체와 후손들 모두 널리 알리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에 있었던 신사에서 신직, 즉 신관으로 일했던 조선인 이산연 이야기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덕분에 이산연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처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행방불명된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것 하나만 위안거리네요. 

조선 불교 총 본산 조계종이 일제 강점기 때 생겼으며, 이를 주도했던 첫 종무총장 (총무원장) 이었던 불교계 거두 이종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더러 그 아들은 동국대 대학원장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친일해서 후손이 잘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1급 친일파 조병상 이야기는 좀 놀라왔어요. 직업이 아예 친일이었는데, 학병 출정을 독려하며 자기 아들도 5명 중 3명이나 출병시켰다니 그 충정이 대단합니다. 아들들이 다 생환해서 모두 출세했다는게 좀 쓰린데, 조병상 본인은 6.25때 실종된 걸로 추정된다는게 위안입니다.

친일파 정보는 물론, 일제하 공직자 관등과 같은 볼만한 자료도 많습니다. 최상급은 일왕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조선 내에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두 명 뿐이고 그 다음이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순서입니다.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고요. 지금의 5급 공무원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며,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현재의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군수는 5급 공무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친일파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권한과 재량이 더 많았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당연합니다.

좌옹 윤치호의 친일 논리도 곱씹어볼만했습니다. 윤치호가 친일파가 된 건,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그리고 개화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 그리고 105인 사건 때 겪었던 가혹한 고문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군요. 이후 윤치호는 '황인족 담합론'과 강자에게 약자가 순종해야 평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게 조선이 살 길이라는 등의 등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낸게 더 웃깁니다.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변절하여 친일을 한 이유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다'고 고백했는데, 차라리 이게 더 합리적이지요. 최린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진솔하게 반성과 후회를 보였다니, 같은 친일파라도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을 도운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자 밀정 배정자 같은 경우는 친일의 이유가 나름 합당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좀 애매했습니다. 김인승은 조선 말기,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탈주했던 인물이거든요. 공권력과 싸워서 패배하여 도망친 뒤, 자신을 버린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판 오자서인 셈이지요.
배정자의 일생은 더 기구합니다. 아버지가 대원군 실각 때 한 패로 몰려 처형된 뒤 유랑생활을 하다가 관기로 팔렸고, 그 뒤 중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거든요. 조선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고, 일본에 충성을 바친 이유도 타당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해야 할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결과야 친일인데, 그 이유는 수긍할 만 하니....

이렇게 친일에 대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된 좋은 독서였습니다. 박흥식, 김활란 등 익히 잘 알려진 친일파가 함께 소개된다거나, 그 외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일파들이 많은건 조금 아쉽지만, 책의 취지 상 쉽게 빼지는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빠진 친일파가 세간에서 잊혀질까 두렵네요. 역사 바로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제가 읽은 구판은 절판되었지만, 아래의 책으로 재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정운현 지음/인문서원

2018/11/10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상, 하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세트]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상.하 세트 - 전2권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 이후 헤어진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각각 다른 이성 친구와 교제하게 되었다. 오사나이와 교제하게 된 신문부 열혈 부원 우리노는 매달 벌어지는 연쇄 방화 사건에 집중하여 사건을 다룬 기사를 교내 신문에 발표했다. 기사를 통해 몇 개월간 다음 방화 장소를 예언하고 맞춘 우리노는 신문부의 손으로 범인을 잡을 계획을 세우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일상계 추리물의 존재를 우리나라에 처음 알림 소시민 시리즈 신간(이라고 하기는 작년에 나와서 좀 어색하지만 제 기준으로는)입니다. 십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은 아동용 동화같은 커버 일러스트로 충격을 주었는데, 예쁜 일러스트의 양장본으로 재출간된걸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십여년 전만 해도 요네자와 호노부는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거의 전작 출간이 되었을 정도의 인기 작가라는걸 여실히 보여주네요. 이런 추리, 미스터리 장르물의 인기에 저도 약간이나마 기여(?) 하지 않았을까 싶어 살짝 뿌듯하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 작품은 시리즈 1편인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 보다는 2편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과 더 비슷합니다. 조금 긴 호흡의 긴 이야기가 핵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주인공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거주하는 기라시에 매달 장소를 바꾸어가며 방화가 일어나고, 이를 쫓는 신문부 후배 우리노와 이에 얽히게 된 고바토와 오사나이의 이야기가 시간으로 따지면 2학년에서 3학년까지 거의 9개월에서 10개월 동안 펼쳐지거든요.

그런데 방화사건 쪽 주인공은 우리노이며 그와 교제하게 된 오사나이가 양념처럼 등장할 뿐입니다. 고바토가 다른 여자 친구 나카마루와 교제하며 일상계 추리를 펼치는 이야기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어요.
이러한 고바토의 일상계는 다른 일상계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사건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카마루와 함께 데이트를 가던 코바토가 만원 버스에서 누가 버스에서 먼저 일어날 것인지를 추리하고, 나카마루가 이야기해 준 자신의 오빠에게 있었던 기묘한 도난사건에 대해서 추리하고, 헤어지기 직전 나카마루가 토마토를 싫어하는게 아닌가하고 추리하는 정도입니다. 이 중 버스 이야기는 추리에 비하면 분량이 과할 정도로 길어 별로였고, 토마토 이야기는 정말로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도 헤비메탈 음악을 좋아하는 나카마루의 오빠가 3일간 여행 갔다 온 후 집에 유리창에 깨져있고, 누군가 침입했지만 없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기묘한 도난사건 이야기만큼은 꽤 괜찮았습니다. 그동안 오디오 알람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몰랐다는건 말이 안되고, 설령 이런 일이 생겨도 집 주인을 부르지 무단 침입은 하지 않겠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아요. 전부 다 소소하고 심심하지만, 담백한 덕분에 일상계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만 합니다.

그런데 연쇄 방화 사건 이야기는 불만입니다. 물론 추리적으로는 나름 번득이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특히 연쇄 방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습니다. 우리노가 다음 번 방화 장소를 추리해 낸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노의 친구이자 범인인 히야가 우리노의 기사를 보고 그곳에 불을 질렀다는 건데 상당히 의외성이 있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영화 "밀정"에서도 등장했었던, 간단한 트릭으로 용의자를 좁히고 진범을 추리해 내는 과정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제대로 된 추리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의 전편에 걸쳐 탐정역을 수행하고, 온갖 추리를 펼친 우리노의 마지막 추리쇼를 박살내기 위한 오사나이의 복수극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복수를 위한 오사나이의 공작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해있던 우리노와 통화했을 때 고의로 기차 소리를 들려주어 현장 근처로 오해하게 만들고, 범행 현장 근처에 서점에서 책을 산 영수증을 우리노의 눈에 띄는 곳에 놔 두는 식인데 우리노가 이를 추리해낸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렇게 해서 자신을 범인으로 오해하게 만든 의도가 불분명한 탓입니다. 마지막 순간 추리쇼를 펼친 우리노에게 면박을 주고 재기불능 수준의 창피를 주기 위해서? 복수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모든게 작위적입니다. 또 정통 추리물이라면 동기가 무엇인지를 파고들었어야 하는데 우리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는 그런 인식이 전무하다는 것도 실망스럽습니다. 추리를 위한 단서도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요. 이래서야 잘 된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고바토가 마지막에 구리킨톤을 먹으며, 오사나이가 우리노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 5월 이후라고 추리해내고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멋대로 오사나이에게 키스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장면은 깔끔했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복수를 꾸밀 정도의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또 우리노는 명예욕은 있지만 사건에 열정적으로 뛰어든 좋은 녀석인데, 이쓰카이치의 기사로 확인 사살까지 당하니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전개는 작가의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동일한 느낌의 또다른 일상계 시리즈인 고전부 시리즈와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였던 듯 합니다. 고바토가 마지막에 추리를 통해 자기 만족을 채우는 인물이라는 걸 깨닫는다던가, 오사나이는 대단한 행동력과 책략을 갖춘 팜므파탈로 묘사된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요. 소시민을 꿈꾸는 고바토 죠고로와 회색을 신봉하는 에너지 절약주의자 오레키 호타로의 캐릭터부터가 완벽하게 겹치기에,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지요. 아마 시리즈 다음 작품이 출간된다면 고바토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건에 뛰어들어 추리를 펼치고, 오사나이는 추리를 위한 각종 작전을 짜내고 실행하는 행동대장 역으로 묘사되리라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큰 변화가 작품에 좋게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바토야 그렇다 쳐도 오사나이 캐릭터 변화가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억지스러운 복수극 전개가 모두 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냥 예전처럼 한 발자욱 물러나 사건을 추리하는게 훨씬 좋았을텐데, 지금은 여러모로 작위적이고 억지스럽기만 해서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상계 추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드는 구성은 좋고,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도 제법 됩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해요. 억지스럽게 설정까지 바꾸어 가며 시리즈를 이어나가느니 그냥 고전부 시리즈에 집중하는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16/10/10

밀정 (2016) - 김지운 : 별점 2.5점

오랫만에 아내와 함께 데이트 느낌으로 감상한 작품입니다. 추석 연휴 때 감상했는데 리뷰는 좀 많이 늦었네요. 현재 흥행 중이라 이런저런 리뷰와 정보가 이미 인터넷상에 많이 퍼졌을 터이니 짤막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감상 전에는 독립군들이 조국을 위해 활약하는 영화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다르더군요. 좀 오래된 표현이지만 "첩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밀정인지?"를 밝히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이 제법인데, 특히 기차에서 벌어지는 이정출과 김우진, 하시모토가 벌이는 신경전과 추격전은 백미입니다. 마지막 하시모토의 급습, 이윽고 벌어지는 총격전까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계속 이어집니다. 와중에 배신자를 밝혀내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모두에게 다르게 알려주는 장면도 전형적이지만 재미나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무간도"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특정 조직에서 다른 특정 조직을 없애기 위해 누군가를 밀정으로 파견한다... 그런데 그는 그 다른 조직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는 식의 전개가 똑같은 탓입니다. 조직에서 자신이 배신자라는 것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도 그 처절함이 비슷한 수준이에요.

이를 뒷받침하는 송강호 씨의 연기가 아주 출중하다는 것, 그에 반해 공유 씨 연기는 조금 처져 보인다는 것도 무간도스러웠습니다. '양조위 - 송강호, 유덕화 - 공유'인 것이죠. 송강호 씨는 정말 이정출 그 사람이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는데, 법정씬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고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의열단 단장으로 특별 출연한 이병헌 씨의 등장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게를 잘 잡아 주었어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너무 길다는 겁ㄴ비다. 2시간을 훌쩍 넘기는 긴 러닝타임 내내 재미와 흥분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초중반까지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어요.

설정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왜 의열단원들 모두가 꼭 폭탄과 함께 경성에 잠입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의열단원들은 이정출처럼 중간에 기차에서 뛰어내리면 안 되었던 걸까요?

마지막의 테러도 수많은 의열단원들의 희생을 감안하면 큰 성과는 아닌 듯싶어 보였습니다. 이러느니 군경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팠던 시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계기도 되었고, 그럭저럭 재미도 있었던 작품입니다. 경성과 상해에 대한 묘사는 해당 시대를 다룬 작품을 창작하는 입장에서 참고도 되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07/07

염마 이야기 - 나카무라 후미 / 양윤옥 : 별점 2점

염마 이야기 - 4점
나카무라 후미 지음, 양윤옥 옮김/(주)태일소담출판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센구미에 밀정으로 잠입했다가 정체가 들통나 치명상을 입은 아마네는 문신사 바이코로부터 신귀새김을 당한 뒤 불사의 능력을 얻었다. 오갈 데 없는 처지였던 그는 바이코로부터 문신 기술까지 전수받은 뒤 "호쇼" 칭호를 이어받아 문신사 호쇼 염마로 다시 태어났고,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누나의 원수이자 선배 호쇼 야차 추적을 바이코에게 약속했다.

세월이 흘러 신센구미 시절 동료였던 오카자키의 딸 나쓰를 돌보게 된 아마네, 호쇼 염마는 야차가 관계된 일련의 연쇄살인극에 휘말리게 되는데...

우연찮게 불사의 능력을 얻게 된 주인공 염마의 막부말기에서부터 1945년까지의 일생을 다룬 일본산 판타지(1945년이 끝이 아니므로 "일생"이라고 표현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블로그 이웃이신 카구라님의 리뷰를 읽고 관심이 가서 구해보게 되었습니다.

불사의 능력은 결국 저주이며, 사랑하는 사람만이 늙어가는 비련의 상황, 악귀가 되어버린 같은 능력을 가진 존재 등 모든 면에서 유사 설정의 작품들을(특히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모방할 뿐, 그다지 독특한 점은 없어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도 지나치게 흥미 위주이고 전형적입니다(살인마 잭을 모티브로 한 연쇄 살인사건 - 염마를 납치한 광기의 귀부인 사건). 줄거리에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요. 때문에 작품 완성도도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네요.
결말이 여운을 지나치게 많이 남긴 탓에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게 많다는 단점도 큽니다.

완전한 배드엔딩은 아니고, 마지막에는 약간의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남긴다는 점과 막부 말기 자객 출신이라는 호쇼 염마의 설정, 불사의 능력이 "문신"인 신귀새김에 있고 신귀새김은 다른 능력을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디테일은 조금 눈에 띄지만, 그 외에는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주부였다는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그래서일까요? 단점이 더 많은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나름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이 작품보다는 좀 더 성숙해졌을 후속작은 기대해 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