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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8

살인의 문 1, 2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2점

살인의 문 1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살인의 문 2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다지마 가즈유키는 치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 뒤 들불처럼 번진 소문 탓에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가 꽃뱀에게 걸려 집안이 파산하고 말았다. 겨우 취직한 다지마는 어린 시절 친구 구라모치 때문에 이런저런 사기 행각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3년 발표 장편입니다. 제목은 주인공 다지마가 마지막에 구라모치를 죽이려다 망설인 순간, 구라모치가 습격당해 식물인간이 된 사건에서 형사가 한 말에서 따 왔습니다. 어떤 계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인이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지마에게는 그 계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계기가 있어야 살인자가 되는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작품은 제목만큼 거창한 사건이 벌어지는 추리물이나 범죄물은 아닙니다.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듯한 주인공 다지마가 초등학교 동창이자 친구 구라모치와 악연으로 엮여 보낸 평생을 그리는 대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평생이라고 해도 30대 정도에 불과하지만....
하여튼, 작가의 다른 작품인 "백야행"이나 "비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장기간에 걸친 등장 인물들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환상적인 요소도 없고, 범죄물이나 추리물도 아닌 드라마로 접근하고 있다는게 차이점입니다.

물론 다지마를 정신적으로 옭아매는 구라모치의 사기 행위와 직접적인 살인을 비롯하여 수 차례의 살인 미수, 혼인 빙자 사기와 결혼 사기 등 온갖 범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범죄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특히 사기 행위의 디테일,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사기인 금 예탁 사기의 디테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다지마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게 아내 미하루라는걸 밝혀내는 과정도 아주 그럴싸 합니다. 뻔한 트릭이고, 증거도 스토커 행위로 얻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설득력이 높게 느껴졌어요.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모두 다지마가 구라모치 때문에 평생 짊어지고 가게 된 불운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범죄 소설 전문가라서 범죄가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보조적인 장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야구 이야기였다면 에이스였지만 어깨가 망가져서 선수 생명이 끝나고, 연인은 타 팀 4번 타자와 결혼한다는 "공포의 외인구단" 서두와 다름없는 셈이에요. 오혜성에게는 손 감독이라는 스승이자 멘토, 그리고 엄지라는 목숨을 건 집념의 대상이 있었지만 다지마에게는 불운만 가져다주는 악우 구라모치만 있었다는 정도만 다릅니다.

이렇게 범죄물, 추리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기대와 살짝 다르지만 흡입력 만큼은 정말 대단합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이혼, 아버지의 파산에 이은 몰락과 전학 등으로 겪게 되는 이지메, 첫사랑 소녀는 구라모치와 사귄 뒤 자살하고 그 뒤 구라모치와 엮여 이런저런 사기 행각에 가담하다가 조금 삶이 나아지나 싶을 때 만난 여자 탓에 비참한 결혼 생활을 거쳐 이혼하는 등 행복이라는 걸 거의 느끼지 못하는 어마무시한 삶이 정말로 파란만장하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수준만 놓고 보면 기리노 나쓰오의 주인공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에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이렇게 불행한 등장 인물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파란만장하기는 한데,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딱히 알맹이가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일단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다지마의 선택이 항상 안 좋은 결과를 낳는게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실수를 했을까 싶을 정도라 설득력이 떨어지고 답답합니다.

게다가 중요한 실수는 모두 다지마 본인의 실수라서 딱히 구라모치 탓을 할 이유도 없어요. 첫 직장에서 다단계 판매 회사의 사기스러운 아르바이트에 대해 잠깐 만나던 가나에에게 말한 것도 다지마 본인의 실수이고, 미하루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다지마 본인이니까요. 미하루와의 결혼은 구라모치의 음모가 있었다 하더라도 결혼하라고 등을 떠민건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혼한 뒤 삶이 팍팍했다 하더라도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명백한 본인 잘못이고요.

첫사랑 요코의 자살도 구라모치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요. 정황 상 요코의 아이가 구라모치의 아이라는건 증명할 수 없거든요. 결국 진상은 밝혀지지도 않잖아요?
그 외에도 보석을 파는 다단계 회사 사기, 동서 상사의 금 예탁 사기, 마지막의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 모두 본인이 돈 때문에 구라모치와 협력한건 사실입니다. 양심의 가책 어쩌구 해도 무려 3번이나 유사한 범죄에 발을 담근 주제에 정의로운 척을 하는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요. 아무리 바보라도 이 쯤 되면 구라모치를 멀리하는게 당연할텐데, 그런 부분에서의 설득력도 약합니다.

아울러 다지마가 불행에 빠지게 된 계기인 부모님의 이혼은 구라모치가 퍼트린 소문에서 시작되었다는 마지막의 반전도 문제에요. 구라모치가 금수저 다지마에게 열등감을 가진 나머지 그만큼 성공하지 못하면 내 수준으로 떨어트리겠다! 고 결심했다는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보면 다지마의 어머니가 시어머니에게 살의를 품었던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시도도 있었고요. 즉, 구라모치가 소문을 낸 건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소문은 진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운이 좋아 범행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소문을 내지 않았어도 동일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원인을 구라모치에게 돌리는 건 무리입니다.
그리고 다지마의 집안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꽃뱀에 걸려든 탓입니다.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꽃뱀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지요. 아버지는 결혼 중에도 가정부 아주머니와 불륜을 저지른 호색한이니 별 차이가 없었을 것 같아요.

구라모치가 다지마에게 집착했던 이유로 구라모치의 성공 철학 - 성공하려면 내버릴 돌이 필요하니 버리기에 만만한 인재를 항상 곁에 두어야 하고, 그 인재는 믿을 수 있어야 하는 상대여야 한다 - 이 소개되는데 이 역시 합리적이지 못해요. 구라모치가 다지마를 사기 사업에서 내버린 적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다지마는 월급 한 번 밀리지 않고 잘 빠져나간 편입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인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에서는 구라모치가 마음만 먹으면 다지마를 사기의 책임자, 총책으로 둔갑시키기 어렵지 않았던 점에서 볼 때 더더욱 그러합니다.
수차례 등장하는 다지마의 살해 계획도 반복되어 지루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청산가리 등 기껏 구했던 독극물은 다 어쨌는지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캐릭터도 분량에 비하면 별로입니다. 특히나 다지마는 묘사된 양에 비하면 알맹이가 너무 없어요. 대표적인게 어린 시절 독에 탐닉했다는 묘사입니다. 덕분에 이지메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딱히 어울리는 결과를 빚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지마가 반했던 유키도 사기꾼에 대항하던 강단있는 아가씨에서 어느새 구라모치에게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으로 전락하고요. 언변좋은 사기꾼 구라모치만 그나마 볼 만 했습니다.
그런데 구라모치의 행각을 보면 다지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었건 간에 액면가만 놓고 보면 평균 이상의 친구가 맞아요. 금전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그러합니다. 이전 사기 행각에서의 소소한 도움은 둘째치고라도 마지막에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에서는 거액의 돈을 댓가없이 빌려주고, 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지급하며 임원 대우로 데리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재미는 있지만 설득력없고, 흥미위주의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는 무협지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는 무협지는 주인공이 성장이라도 하지, 다지마는 끝까지 제자리 걸음이라는 점이지요. 즉, 무협지보다도 못합니다. 흡입력은 대단해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아주 빼어나나 작가의 최고작으로 보기에는 무리네요.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4/12

헬로 네즈미 - 히로카네 켄시 : 별점 2.5점

헬로 네즈미 28 - 6점 켄시 히로카네/대원씨아이(만화)

아카츠카 탐정 사무소라는 탐정사에서 근무하는 일명 "고슴도치"인 고로와 그의 동료인 전 도박사 출신 큐사쿠, 통칭 "구레"를 중심으로 한 사무소의 멤버들이 펼치는 옴니버스 드라마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인 "시마과장"은 이래저래 욕도 많이 먹고 문제도 많은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 자체를 끝까지 읽게 하는 통속적인 재미 하나는 대단하지요.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재미만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스타일이라고는 해도, 감수성에 치우친 드라마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눈물이 너무 많고 사랑도 너무 많은 순정파적인 전개라, 2000년대에 보기에는 짜증날 정도였거든요. 거기에 그림체 역시 전통 극화체에 가까운 탓에 뎃생력과 구성력은 나무랄데 없다 하더라도, 역시나 요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내용 자체는 재미있습니다. 눈물 쏙 빼놓는 에피소드들 뿐만 아니라 웃기는 이야기에서 대하 액션, 거기에 괴담과 사극, SF까지 통통 튀는 전개는 옴니버스 캐릭터 극의 장점을 잘 살린 이야기로 보여지며,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추리물도 포함해서요. 물론 "인간 교차점" 스타일의 드라마들은 좀 지루한 맛도 없지 않습니다만....

추리적으로 본다면 탐정 사무소의 탐정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의뢰들어오는 사건은 단순한 조사나 사람 찾기 같은 일(이게 물론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탓에 관련 에피소드가 많지는 않습니다. 전 29권 분량 중에서 진정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소수 정예인지 나름대로는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개 있습니다. 특히 감금장소나 스토커 잠복 장소를 알아내는 실질적인 조사 방식은 개인적으로는 높이 평가합니다. 꽤 현실적이면서도 나름 추리적 요소가 괜찮거든요.

그러나 중반이후에는 소재고갈인지 너무 이야기가 비약해 버려 실망스러운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심령퇴마물", "흡혈귀", "UFO" 에피소드들은 사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에요. 또 일상적인 이야기와 단순 범죄 사건에서 상당한 스케일의 범국가적 스파이 액션까지 다루므로 이야기의 고저가 심해서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평균정도의 재미는 가져다 주는 만화입니다. 별점은 2.5점.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고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보수 우익 취향의 만화가로 알려진 히로카네 켄시의 작품이라 앞으로도 구해 볼 생각도 없지만 그냥저냥 지나다가다 눈길한번 줄 만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추리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듯 하군요.

PS : "아"로 시작하는 탐정 사무소 이름때문에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보고 제일 위에 있어서 의뢰한다는 고객들 에피소드가 꽤 많더군요. 가가 탐정 사무소도 실패한 전략은 아닌 듯....

에피소드 중 추리물을 뽑아본다면

5~6권 - 고로의 애인인 란코의 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던 비리에 대한 에피소드 :
이 에피소드는 일종의 정경유착에 따른 거대한 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킬러까지 등장하며 과격한 액션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정경유착에 관한 디테일이 굉장히 좋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다이잉 메시지 해독이 등장하는데 꽤 괜찮습니다. 좀 더 소규모의 음모였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오버하는 경향이 있어서 약간 아쉽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였습니다.

7권 - 기억상실중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공백의 격류" :
십수년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사고로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의뢰인의 과거를 조사하는 에피소드로 만화에 딱 어울리는 단서들과 내용전개가 독특하며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8~9권 - "유괴" 에피소드 :
한 대기업의 데릴사위 사장이 내연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유괴당해 탐정 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는 에피소드입니다. 돈을 주고 풀려나기는 하지만 사회적 응징을 위해 유괴범을 조사하여 소재를 파악하는 과정이 현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14권 - 연쇄 살인마 이야기인 "빨간색의 혼란" :
싸이코 연쇄 살인범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는 뻔하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14권 - 정체모를 인물이 가입한 보험금을 타게되는 한 주부의 에피소드인 "정체불명의 사례" :
어느날 아무 생각 없이 베푼 선행으로 보험금을 받게되는 한 주부, 그리고 그 보험금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정통 추리적 요소가 많으면서도 내용 전개도 깔끔하며 반전도 상당히 괜찮은 에피소드입니다.

16~17권 - 의학교수와 브로커가 관련된 스캔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다룬 에피소드 :
범행 장소와 공개된 장소 양쪽에서 동일 시간대에 존재하는 알리바이 트릭을 파헤치는 에피소드로 트릭은 생각외로 시시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꽤 재미있습니다.

19~20권 - 한 여인의 완벽한 복수극을 다룬 "의문의 편지" :
자신이 살해될 것을 예상한 한 정치인의 정부가 펼치는 완벽한 복수극인데 시한 장치를 이용한 편지 발송 트릭이 등장합니다.

20권 - 모닝콜을 통한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모닝콜" :
아침에 모닝콜을 받았다는 용의자가 그 시간에 절도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인데 사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쓰이는 소재를 트릭에 이용하는 발상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24권 - 일본 전통 이야기에 대한 숨은 진상을 파헤치는 "사랑밖에 난 몰라" :
일종의 번외편으로 에도시대에 있었던 방화사건에 관련된 진상을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원전격 이야기를 잘 몰라서 몰입은 쉽지 않았지만 역사 추리물 적인 요소가 강하고 트릭과 전개도 재미납니다.

26권 - 한 여인의 밀실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긴머리의 여인" :
시체 이동을 통해 자살로 위장된 한 여인의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로 전편을 통해 가장 독특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현실감은 왠지 많이 떨어지는 트릭이지만 발상이 무척 기발하며, 사건의 발단이 되는 단 하나의 단서를 쫓아 현장 조사 등을 통해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 좋습니다.

29권 - 도쿠가와의 매장금을 찾는 "보물 찾기" :
암호 트릭이 등장합니다. 암호 자체의 수준은 평이하고 일본어를 좀 알아야 해독할 수 있어서 아쉽지만 너무 어렵지도 않고 나름의 바탕이 있어야 풀 수 있어서 꽤 재미있는 암호로 보입니다.

2005/12/28

자학의 시 (自虐の詩) - 고다 요시이에 : 별점 5점

자학의 시 2 - 10점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세미콜론

"이 세상에는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 하니까요. 무언가를 버리면 또 다른 무언가를 반드시 얻게 되죠." - 유키에

역시 이번 일본 여행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이시카와 쥰의 "만화의 시간"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글을 읽고 꼭 보고 싶었는데 하라주쿠 북 오프에서 발견하고 반값에 구입하게 되었죠.

별다른 직업도 없고 경마와 빠칭코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마음에 들지않는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식탁 뒤집기는 예사인 조폭 출신의 건달 이사오, 그런 이사오의 아내로 하루하루를 괴롭고 고단하게 살아가지만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유키에의 이야기로 문고본 상,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권은 주로 유키에와 이사오의 결혼생활, 특히 이사오의 막나가는 모습과 고단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유키에의 일상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하권은 유키에의 성장과정, 그리고 결혼까지의 일대기 - 어머니가 어릴적 도망나가 정말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도망치듯 도쿄로 상경하여 술집에서 일하다가 조직원 이사오와 만나 결혼하게 되는 - 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읽어본 감상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소재와 캐릭터가 개그 만화의 소재로 쓰이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개그만화이기에 일단은 확실히 웃겨주면서도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인지, 그리고 사는데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정말로 찐한 감동과 재미가 넘치는 진정한 걸작입니다.

또한 이 대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전부 4컷 만화로 진행된다는 것도 놀라운 점이에요. "보노보노"나 "아즈망가대왕"과 같은 스토리성 4컷 만화도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작품이야말로 4컷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저에게 열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동명 타이틀로 여러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각각 연재되었던 모양인데 이 문고본은 유키에와 이사오의 이야기만 모아서 출간되었다고 나와 있군요. 다른 이야기도 정말이지 궁금해 집니다.

여튼, 2005년도의 만화 베스트로 뽑습니다. 별점은 5점.
이름없는 작가이고 사실 거의 팔리지 않을 것 같아 국내에 출간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에도 꼭 소개되어 유키에와 이사오의 멋지고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주위 분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2015.07.21 업데이트하며 국내 출간 정보 링크 추가합니다.

PS 1 : 이시카와 쥰이 극찬한 만화는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인 자신의 만화는 일본에서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말이죠...
PS 2 : 대표적 꼴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작품 해설이 권말에 있는 것이 너무나 불만이긴 합니다. 찢어버려야 하나....

2013/09/23

전쟁 연대기 1/2 - 조셉 커민스 / 김지원, 김후 : 별점 4점

전쟁 연대기 1 - 8점
조셉 커민스 지음, 김지원.김후 옮김/니케북스
전쟁 연대기 2 - 8점
조셉 커민스 지음, 김지원.김후 옮김/니케북스

제목 그대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주요 전쟁에 대해 기원전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부터 최근의 이란 - 이라크 전쟁까지를 2권 800여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설명해 주는 전쟁사 - 미시사 서적.

개인적으로 역사 서적, 특히 미시사 서적, 그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나 전쟁사를 다룬 책들을 좋아해서 많이 읽은 편입니다. 이 책 작가의 전작을 비롯해서요. 그런데 이 책은 다른 책들과는 비교를 불허합니다. 주요 "전쟁"에 집중하는 것은 다른 전쟁사 서적과 유사하나 해당 전쟁의 동기와 결과, 그리고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병기는 물론 이후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를 1, 2권 800페이지 이상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다양한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굉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내용이 알차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항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1권에서는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 임진왜란, 대북방 전쟁이 눈에 들어옵니다.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은 몬테수마 왕이 다스리던 멕시카 제국을 정복한 코르테스의 정복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동안은 신병기의 힘으로 코르테스가 비교적 수월하게 정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압제에 시달리던 지역민의 협력을 통해 2만 ~ 2만 5천 명이라는 군대를 출력시켜 병력의 우위로 제압한 것이라는 점은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임진왜란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죠. 약간의 오류가 있기는 해도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핵심 전쟁으로 한산도 대첩을 꼽은 것, 의병의 활동을 중요한 포인트로 잡은 것 등이 좋은 예입니다.

대북방 전쟁은 스웨덴의 카를 왕과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맞붙어 자웅을 겨룬 내용인데, 그야말로 군웅물을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였습니다. 대하드라마나 만화의 소재로 사용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2권에서는 태평천국의 난, 영국 - 줄루 전쟁, 멕시코 혁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의 홍수전과 태평천국군의 흥망성쇠는 공부가 부족하여 다른 곳에서 접해 보지 못했었는데, 광신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느끼게 해 주었어요. 식량이 떨어진 난징에서 홍수전이 "모두 만나를 먹게 해 주겠다"며 잡초를 뜯어먹었다는 것이 그 전형이겠죠. 그리고 홍수전이 선교사에게 받은 "권세양언"이라는 전도서가 결국은 이 난의 원인인데, 성서의 내용을 중국식으로 열정적, 예언적으로 바꾼 탓이 크다는 내용도 충격적이었어요. 그야말로 혹세무민이 따로 없는 것이니까요.

영국 - 줄루 전쟁에서는 줄루왕 케츠와요가 끝까지 영국군과 협상하려 했으나, 영국이 협상 조건으로 내놓은 줄루족 부대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할 수 없어서, 결국 파멸적인 울룬디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네요. 전사들에게 체면과 자부심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확실히 나았을 겁니다. "캄 브레이커"의 명대사가 떠오르네요. "패배를 인정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인거야!"

마지막 멕시코 혁명 이야기는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는 판초 비야가 누구인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줘서 좋았습니다. "비바 사파타!"로 유명한 사파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판초 비야와 사파타가 손을 잡았더라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멕시코가 더 살기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태여 약간의 단점을 들자면 아무래도 서양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쪽 역사에 많이 치중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이야기들이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운 시각, 다양하고 화려한 도판으로 상세하게 설명되기에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번의 긴 추석 연휴를 즐겁게 보내게 해 준 일등공신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당분간 전쟁사 책은 안 읽어도 되겠어요.

덧붙이자면, 인터넷 교보문고 특가로 50% 할인된 가격에 구입하여 기쁨 두 배였습니다. 정가로 구입해도 후회가 없었을 텐데!

2012/05/29

완전연애 - 마키 사쓰지 / 김선영 : 별점 2.5점

완전연애 - 6점
마키 사쓰지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 마키 사쓰지의 작품으로 (굉장히 낯선 작가인데 꽤나 평이 좋아서 읽게 되었네요. 프로필을 보니 오랜 경력을 지닌 작가라서 좀 놀랐습니다) 일본 서양화의 거장 나기라 다다스 화백, 본명 혼조 기와무를 주인공으로 하여 2차대전 직후, 쇼와 43년(1968), 쇼와 61년(1986) 세 건의 사건을 펼쳐 그리는 대하 장편 추리 연애 드라마입니다. 크게 연애물과 추리물,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죠.

먼저 연애물 속성부터 살펴보지요. 사랑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사건을 저지르고, 복수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러나 혼조의 사랑은 약 칠십여 년에 걸친 그의 일생과 함께 다루어질 정도로 장대하기 때문에 스케일 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득력 부분에서 별로 와닿지 않아서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어도, 최소한 유사 작품들과 차별화는 됩니다. 그리고 제가 연애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딱 한 번의 관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또 다른 주변인의 존재 등은 "노르웨이의 숲" 느낌도 전해주는 등 연애물로서는 제법 괜찮은 수준이 아닌가 싶었어요.
마지막의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마스코가 등장할 것은 예상했지만 KIWAMU => MIWAKU라는 애너그램을 이용한 이름이라는 장치가 꽤 그럴싸했고, 혼조 임종 시의 마지막 말과 그에 얽힌 마스코의 상념은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결국 진상이 혼조 혼자만의 착각으로 한 여자만 바라본 것이라는 허무한 결말입니다. 이거 참... 무려 세 건의 범죄가 얽힌 한 대화백의 일대기가 고작 장대한 짝사랑 이야기라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도모네의 밀당에 넘어간 희생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여자가 제일 무서운 것 같습니다.

또 낡아 보이는 여러 장치들이 좀 거슬리더군요. 평생 단 한 번 가진 하룻밤 관계로 아이가 덜컥 생겼다는 설정이 대표적이겠죠. 무슨 정자왕도 아니고.... 그 외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 관계 설정도 진부했고요.

추리적 속성도 첫 번째 사건은 혼조 기와무의 시선이라서 사건과 동시에 진상이 밝혀지지만, 이후 두 건은 혼조의 제자 미와쿠의 시선이라 마지막 부분에서 진상이 밝혀지는 독특한 전개 방식은 매력적입니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식칼로 첫 번째 상처를 위장한다는 트릭과 대나무 조릿대 등의 디테일한 소품 및 미 군정 당시 시대 상황, 피해자의 도착증적인 성벽에 대한 증언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잘 맞물리는게 굉장히 좋았고요. 이 사건 하나만큼은 별 네 개가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극한의 밀실이라는 두 번째 사건,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된 세 번째 사건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진상을 너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제가 추리 애호가로 쌓아온 나름의 덕력도 있겠지만, 트릭이 너무 쉽고 의외성이 별로 없어요. 시공을 초월한 단도에 의한 살인과 발자국 하나 없는 밀실이라는 만화 같은 상황 자체가 자살을 반증하는 요소잖아요? 솔직히 경찰 수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게 더 의외입니다. 별명에 대한 진상 등 디테일한 부분의 장치가 몇 개 눈에 뜨이기는 하나 딱히 특출난 수준도 아니고요.

세 번째 사건은 범인의 오랜 고민과 노력이 투입된 나름 거대한 장치가 사용되었고, 해결에는 여러 관계자 - 미와쿠, 오세키에다가 탐정 마키 사쓰지까지 - 머리를 맞대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가장 공을 들인 트릭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기부터 문제입니다. 외도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사실을 진짜 남편이 깨달았다고 살의를 품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게다가 트릭을 만들기 위한 억지도 지나쳤습니다. 용의가 갈 수 없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내어 피해자를 유인한다는 발상, 알리바이 트릭을 위해 샴쌍둥이까지 등장시킨 설정은 어이를 상실케 했거든요. "쌍둥이를 등장시키면 안 된다"라는 녹스의 규칙을 딱히 예로 들지 않더라도, 집 가정부에게 증언을 시키기 위한 트릭에 들인 공치고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공정성도 떨어져서, 어렸을 적 자는 모습에 대한 술회라든가 가슴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가 정보를 얻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장치였어요. 게다가 3억 엔 사건까지 녹여내려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습니다.

그래도 혼조라는 인물의 일편단심, 변치 않는 애정을 그리는 장대한 드라마가 당시 일본의 사회상과 얽혀 현실적으로,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그려져 사백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대장편임에도 쉽게 읽히는건 분명합니다. 여러 호평에는 수긍이 가네요. "회귀천 정사"처럼 첫 번째 사건까지만 잘 정리된 중편이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도 드라마와 추리 모두 평작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딘가 긴 여행을 떠나실 때 적절한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2008/10/17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이철 : 별점 5점!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10점
이철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과 같은 시리즈로 제목 그대로 일제 강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당시 조선의 스캔들(?) 11개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경성스캔들" 이죠.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은 읽고나서 실망이 컸지만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책의 차이점은 정말로 "충격적이고 몰랐던" 역사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설명하면서도 쉽고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는지의 여부입니다. "조선을..."은 일단 읽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너무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최소한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물론 이 책도 제목과는 다르게 당대에 그다지 충격을 전해주지 않은 스캔들도 몇 건 다루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도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모든 에피소드가 기대했던 것 만큼의 충분한 재미는 전해 줍니다.

또한 11개의 스캔들 중 익히 알고 있었던 사건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른바 "사의 찬미" 사건이나 여류화가 나혜석의 사건 두가지 밖에 없었다는 것도 책의 가치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아울러 이 두 사건 역시 알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자세하게,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지루한 맛은 전혀 없었다는 것도 탁월하고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의 정사 사건이었습니다.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과 기생이라는,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신분, 재력의 차이로 비극으로 끝난 너무나 순정 만화같고 일일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정파적이고 비극적인 로맨스가 1920년대에 존재했었다는데 놀랐네요. 여러 권의 소설과 영화로도 가공되었을 정도로 당시에 큰 충격을 준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이렇게 유명한 이야기가 지금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조금 궁금해 지기는 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장병천 아버지의 형제인 장택상씨의 권세로 사건을 은폐한게 아닌가 싶은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친일파들의 행각은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당대 매스컴들과 이른바 "지식인" 들의 편견과 비뚤어진 시각을 보여주는 김명순 사건과 독살미인 김정필 사건도 흥미로왔으며, 유명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다수 등장하는 대하 서사시와도 같은 "제4부 - 경성을 붉은색으로 물들인 혁명적 연애 사건"의 이야기들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불꽃같은 삶과 격동의 시대가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조선과 중국, 소련, 해방 후 북한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에 정말로 조선 해방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삶, 체포와 탈옥, 탈출, 고문 등의 고난의 세월 및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남한에서는 매도되었다는 점과 북한에서는 대부분 숙청되었다는 비극적 종말까지 모두 갖춘 극적인 이야기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의 여러 정사사건, 자유 연애주의자들과 신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동성애자 자살 사건 등 흥미로운 주제가 한 가득입니다. 목차만 읽어도 읽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말이죠.

역시나 "경성탐정록" 자료로서 구입한 책이었지만 의외의 재미와 새로운 역사를 알게되는 재미가 쏠쏠하여 횡재한 기분까지 드는 책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재미와 더불어 당대의 여러 사료와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기에 자료적 가치까지 충분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또다른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2015/07/27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 닐 맥그리거 / 강미경 : 별점 4점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 8점
닐 맥그리거 지음, 강미경 옮김/다산초당(다산북스)

최근 산 책 중 가장 두껍고 무거운 책입니다. 대영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중 인류의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꿰뚫는 대표적인 유물 100개를 엄선한 뒤, 해당 유물로 알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인류학적 정보를 전해줍니다. 인류가 처음 등장하여,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고, 농경 생활을 시작하고, 목축을 시작하고, 문명이 생기고, 조직이 커져 나라가 되고, 종교가 등장하는 등의 과정을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식이지요. 매일 자기 전 몇 개씩 읽었는데 드디어 완독하게 되었네요.

유물 하나당 길지 않은 분량(5장 안팎)으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처음 보는 신기한 유물도 많고 분량에 비하면 담고 있는 내용과 시각이 새롭고 독특한 것이 많아 좋았습니다. 석기를 가지고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 2차 가공이 필요한 곡물을 재배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바로 "가공"의 필요성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적다는 점 때문이라는데 무릎을 칠 만 했어요. 당시 인류는 거의 헐벗은 상태로 별다른 도구도 없었을 테니, 웬만한 초식동물과 경쟁하기도 힘겨웠을 테니까요.
다기 세트를 가지고 당시 영국을 분석하는 발상도 굉장히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차가 맥주를 제치고 국민 음료로 부상하면서 영국이 바뀌어 갔던 그 시점을 다기 세트로 설명해주는데, 예를 들면 다기세트 중에 우유 단지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도시 거주자가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며 이는 교외 철도망이 등장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는 식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시아파 이란의 아바스 1세는 보기 드문 정치적 식견, 종교적 실용주의를 지닌 대단한 통치자였더군요! 자신의 영지에 기독교 성당까지 지어주다니! 게다가 지금 서방과 날선 대립을 보이고 있는 현재의 이란 헌법에서도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네요. 놀랐습니다.

그 외에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더 꼽아보면, 18세기 경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북을 우선 꼽고 싶습니다. 가슴 아픈 과거의 유물로 아프리카 노예가 유럽인의 배를 타고 영국령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뒤, 고향을 추억하는 유일한 물건으로 애지중지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흥미롭게도 북을 덮고 있는 재료는 북아메리카산 사슴 가죽으로 원주민, 즉 인디언과의 거래를 통해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18세기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흑인과 원주민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증명한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결혼을 비롯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고 하거든요. 흑인 노예가 영국 땅에서 인디언과 결혼했다니까 뭔가 대하 서사극 배경 설명 같습니다. 그냥 드라마가 한 편 그려질 정도에요.
쿡 선장이 선물로 받았다는 하와이의 깃털 투구도 기억에 남습니다. 하와이에서는 깃털이 가장 귀한 원료였고 새 한 마리당 네 개만 구할 수 있는 깃털이 1만 개 가까이 필요하다니, 대체 이게 돈으로는 얼마나 할지 감도 안 잡히네요.
호쿠사이의 작품인 "거대한 파도"가 독일에서 개발된 합성안료로 제작되었다는 것, 즉 일본인들이 외세의 위험을 인식하지만 작품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외세의 기술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이 제국으로 변모한 과정에 대한 어떤 시사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영국에서 발견된 황금 망토는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착용한 인물이 나이가 어리거나 여성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을 크기, 그리고 청동기 시대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25살도 안 되었을 것이기에 그것을 착용할 만한 리더도 어렸던 것이 확실하다!고 해석하는 부분에서 추리적인 발상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계열의 유물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 반대로 "세계"라는 시각에서 볼 때에 딱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없을 영국 출토 유물은 되려 눈에 띄인다는건 아쉽습니다. 대영 박물관 기준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점이겠지만요.
또 고대에서 중세, 근대, 현대로 올수록 책의 재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뒤로 갈수록 별 관심도 없고 의미도 없고 재미도 크게 느껴지지 않은 탓입니다. 제가 고대를 더 좋아하는 취향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책의 컨셉과 지적인 흥분을 안겨다주는 내용 및 만든 완성도 모두 뛰어난 책입니다. 도판도 최고 수준이고요. 원작이라 할 수 있는 BBC의 다큐멘터리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