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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0

헤라클레스의 모험 - 애거서 크리스티 / 황해선 : 별점 2점

헤라클레스의 모험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알라딘 할인행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동안 구입을 미루어 두었던 해문의 빨간책 아가사 시리즈 중 읽지 않았던 단편집을 전부 구입했습니다. 제일 먼저 읽은 것은 에르큘 포와로의 "헤라클레스의 모험" 입니다. 에르큘이라는 이름과 헤라클레스를 연결시켜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12가지 모험을 재구성하여 이루어진 작품집이죠.
  1. 네메아의 사자
  2. 레르네의 히드라
  3. 아르카디아의 사슴
  4.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5.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6. 스팀팔로스의 새
  7. 크레타섬의 황소
  8. 디오메데스의 말
  9. 히폴리테의 띠
  10. 게리온의 무리들
  11. 헤스페리스의 사과
  12. 케르베루스를 잡아라

라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모험의 제목을 그대로 딴 12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포와로가 12가지의 사건 (모험?)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이 중 비교적 괜찮았던 작품은 탈옥한 흉악한 죄수가 숨어든 고립된 호텔에서의 범죄를 다룬 4편 "에리만토스의 멧돼지"와 유전되는 광인의 피를 괴로워하는 젊은 청년과 그의 아버지의 비극을 다룬 7편 "크레타섬의 황소", 도난당한 루벤스의 그림과 실종된 여학생의 연관성을 다룬 9편 "히폴리테의 띠" 입니다. 트릭이나 설정, 전개가 무난한 편이고 추리적인 재미, 이야기의 전개도 깔끔하거든요.
강아지 도난 사건을 다룬 1편 "네메아의 사자"와 소문의 무서움을 다룬 2편 "레르네의 히드라", 한눈에 반한 금발머리 하녀를 찾아달라는 정비공의 의뢰를 다룬 3편 "아르카디아의 사슴", 저질 신문의 스캔들 폭로때문에 두려워 하는 정치가의 이야기인 5편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한 부자가 잃어버린 골동품 황금잔을 찾는 11편 "헤스페리스의 사과"는 소품 느낌이 강한 범작들이었어요. 비교하자면 다른 가벼운 소품 단편집이었던 "리스터데일 미스테리"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사기극을 보여주는 6편 "스팀팔로스의 새"와 8편 "디오메데스의 말"은 설정 자체가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며, 사이비 교주와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10편 "게리온의 무리들"과 포와로의 예전의 사랑! 백작부인이 깜짝 출연하는 마약범죄물 12편 "케르베루스를 잡아라"는 그야말로 최악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10편 "게리온의 무리들"은 신화와 최대한 비스무레하게 설정하려는 캐릭터들은 좋았지만 사이비 종교 교주의 살인 트릭이 여사님답지 않은 대충대충 느낌이 강해서 12편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제가 읽은 여사님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여사님의 욕심이 과했던 걸까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신화에 끼워 맞추려는 억지성이 짙고 기대만큼의 재미와 트릭, 추리적 흥분을 가져다 주는 작품은 부족한 기대이하의 단편집입니다.

2004/08/28

쥐덫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3점

쥐덫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최근 불붙은 여사님 단편집 구입 러쉬의 마지막 작품. 진작에 읽어보았던 작품이라 구입계획은 없었는데 신촌 숨어있는 책에서 1000원에 발견해서 그냥저냥 소장 겸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전부 9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사님의 시리즈 캐릭터인 미스 마플과 포와로는 물론 할리 퀸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흡사 종합 선물 세트같은 느낌을 전해주네요.
제일 먼저 실려있는 표제작이자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쥐덫"은 추리소설의 전형적 소재인 눈으로 폐쇄된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신혼부부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저택을 하숙집으로 개조하여 영업하던 중 런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 하숙집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첩보와 함께 형사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 눈으로 고립되고 전화마저 끊긴 하숙집에서 투숙객 중 한명인 보일 부인이 살해당하며 이 사건은 과거에 있었던 아동 학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세마리의 눈먼 쥐" 라는 동요를 소재로 세명이 살해 당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누가 범인인줄 모르는 긴장감과 더불어 폐쇄적인 상황을 잘 이용하는 작품입니다. 영국에서는 연극으로 50년이 넘게 공연되고 있는데 연극에 정말 잘 어울리는 소재라 생각되네요.
이전에 이미 읽어서 범인이 누구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재미는 덜 했습니다만 폐쇄된 곳에서 벌어지는, 동요와 연관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상황의 원본이자 모범 답안으로서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두번째 작품 "이상한 사건"은 미스 마플양이 나오는 일종의 암호 추리물인데 "거액을 투자하여 종이 한장분량으로 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명제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명제와 트릭은 당대에는 기발하고 신선했을 것 같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 문제가 큽니다. 후대 작가들의 수없는 인용으로 신선함이 떨어지니까요. 그래도 마플양의 캐릭터는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세번째 작품 "줄자 살인사건"은 마플양의 범인을 잡기 위한 실제적인 활약이 펼쳐지는 특이한 이야기로, 트릭이나 동기 등이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제목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던,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인 어처구니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제목만 빼면 별점은 2.5점. 원제가 조금 궁금합니다.

네번째 작품 "모범 하녀"는 살인 사건이 아닌 도난 사건을 소재로 하여 두 자매의 집에 새롭게 들어온 모범 하녀의 이야기인데, 트릭 자체는 "사람바꾸기"라는 평범한 것으로 추리적으로 그닥 신선하지는 않지만 워낙 설정이 기발하고 이야기도 척척 들어 맞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다섯번째 작품 "관리인 노파"는 마플양을 찾아온 헤이독 의사가 마플양의 원기 회복을 위해 과거에 있었던 루이즈 랙스턴 부인의 사고를 수수께끼로 전해 주고 그것을 마플양이 전형적인 안락의자형 방식으로 (즉 생각만으로)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그냥 저냥 평범한 수준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여섯번째 작품 "4층 아파트"는 포와로가 등장합니다. 아랫층에 사는 젊은이들이 우연히 발견한 살인사건을 해결해 주는 이야기로 "어두운 방 안에서라도 항상 같은곳에 있는 것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로 진상을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건의 해결방법은 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추리적인 재미 부분에서 점수를 주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일곱번째 작품 "조니 웨이벌리의 모험"은 웨이벌리 가문에 발생한 유괴사건을 의뢰받은 포와로가 의외의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회색 뇌세포"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작품으로 탄탄한 구성과 더불어 추리적으로도 색다른 재미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 방법이 너무 미흡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 건 조금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여덟번째 작품 "24마리의 검은 티티새"는 우연히 찾아간 식당에서 매주 같은 요일에 항상 같은 음식만 주문하는 괴짜 손님을 포와로가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괴짜 손님이 시체로 발견되자 포와로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죽음의 진상과 범인을 밝혀내는데 성공한다는 내용으로 우연히 주목한 사소한 사실에서 진상을 밝혀내는 구조가 완벽하고 동기 및 시간의 흐름도 깔끔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아홉번째 작품 "연애 탐정"은 마지막 작품답게 이색적으로 세터드웨이트 씨와 할리퀸이 등장하네요. 이야기는 할리 퀸 스럽지 않게 할리 퀸이 너무 정보를 많이 뿌려주는 감이 있고 내용도 조금 빈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는 두명의 공범자라는 소재는 너무 뻔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다양하고도 멋진 작품들이 실려 있고 탐정 캐릭터들도 여럿 등장하며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좋은 단편집입니다. 개인적 베스트는 "모범하녀" 와 "24마리의 검은 티티새" 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거의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이거든요. 추리 소설의 팬이시라면, 거기에 크리스티 여사의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아울러 여기 실린 포와로 단편은 전부 케이블 TV의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극장"에서 극화되어 방영되었기 때문에 드라마 까지 구해 본다면 금상첨화일것 같습니다.

이로써 제가 소장한 총 13편의 크리스티 여사 단편집은 "화요일 클럽의 살인", "검찰측의 증인", "명탐정 파커 파인", "쥐덫", "포와로 수사집", "부부탐정", "수수께끼의 할리 퀸",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패배한 개", "리가타 미스터리", "헤라클레스의 모험" 입니다. 혹 다른 단편집이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PS :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베스트라면 역시 "화요일 클럽의 살인" 이 아닐까 싶네요^^

2006/08/21

내이름은 콘래드 (This Immortal) - 로저 젤라즈니 / 곽영미, 최지원 : 별점 4점

내 이름은 콘래드 - 10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곽영미.최지원 옮김/시공사

지구가 핵전쟁으로 거의 멸망하고 타이탄과 화성 등지에 이주해 있던 이주인들이 외계인 베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연명하여 지구도 베가인들과 테일러에 있는 부재자 정부를 통해 타격받지 않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지배되는 시기.
지구 정부의 예술 유적 문서 보존국의 국장 콘래드 노미코스는 코르트 미슈티고라는 중요한 지위의 베가인의 지구 관광을 가이드할 것을 명령받고 래드폴이라는 저항 단체의 수장 도스 산토스와 경호원 하산 등 수상쩍은 인물들과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경유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콘래드 노미코스는 수백년을 살아온 인물로 일찌기 래드폴을 결성하여 지구정부와 베가인들에 대항했었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전설을 남긴 인물. 그는 이 여행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슈티고의 경호를 강화하지만 수많은 위험이 그들을 기다리게 되는데...


젤라즈니 선생의 첫 장편입니다. 좋아하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몇번 한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읽었다고 하니까 좀 늦은 감도 있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어쨌건 완독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다른 장편이었던 "신들의 사회"는 동양권, 그 중에서도 주로 인도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 신화 중심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인 콘래드의 설정 -불노불사의 인물인것 같다는 것과 타고난 괴력과 체력, 그리고 독특한 외모- 은 그리스 신화의 한 영웅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고, 콘래드가 외계인 관광 가이드(?)를 하며 펼치는 괴물, 식인종들과 벌이는 모험 역시 헤라클레스의 모험과 굉장히 유사하죠. 심지어 식인종 우두머리의 이름은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죽였던 신화속 악당) 이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신들의 사회는 신들 그 자체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비해 이 작품은 "인간" 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파워, 그리고 불노불사의 존재라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개인이 범 우주적인 거대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 자체를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자기 자신이 시도한 노력이 지금 와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전개는 달리 생각해 본다면 "초인 로크"와 가장 비슷할 것 같네요. 히지리 유키가 이 작품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개인적으로는 콘래드가 자신의 신성이나 영웅성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 남은 이후에 장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스케일 자체는 작아졌지만 오히려 더 현실감있게 와 닿는 설득력있는 전개가 된 것 같거든요. 외계인에 대항해 싸우는 슈퍼 히어로물보다는 전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더군요. 뭐 중간중간에 불필요한 액션 장면이 너무 길고 특히 "흑수"라는 존재와의 마지막 사투는 너무 우연에 의지하는, 뜬금없는 감이 있지만 읽는 재미는 확실한, 젤라즈니 선생의 필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뒷부분에 같이 수록된 "프로스트와 베타" 역시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SF적으로 풀어낸 걸작이죠. 물론 저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수록된 버젼으로 이미 읽긴 했지만 이 책에는 번역가가 관련된 정보를 잘 제공해 주고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 같네요. 하여간 아직 젤라즈니 선생의 글을 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8/02/04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시모쓰키 아오이 / 김은모 : 별점 4.5점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10점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겨레출판

오랜 경력의 평론가가 "왜 크리스티의 작품이 인기가 있고 재미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작품이 발표된 순서대로 전부 읽어본 후 평을 기록한 평론집이자 리뷰집입니다.

리뷰의 수준은 최상급입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작품의 핵심을 콕 집어 지적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추리 소설 리뷰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정도예요.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은 '불순물 하나 없는 본격 추리 소설의 원형'이고, "엔드하우스의 비극"'고명에 의존하지 않고 면발과 국물의 감칠맛으로만 승부하는 우동같은 작품'이라는 식입니다.
좋은 작품은 정말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전문가답게 유사하거나 참고해야 할 다른 작품들도 함께 언급, 소개하는 부분들도 눈여겨볼 만 합니다. 트릭면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비뚤어진 집", "구름 속의 죽음" 정도는 저도 알고 있던 것이지만, "골프장 살인 사건" 이 10년 뒤 발표된 역사적 명작과 같은 장치를 사용했다, "블랙커피" 속 장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 2" 속 장치와 일맥상통한다, "맥긴티 부인의 죽음" 은 하드보일드 성향이라 우수하다는 등의 정보들은 정말 그 깊이와 수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쓰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리뷰가 작품이 발표된 연대별로 이어지는 덕분에 여사님의 발전, 작법의 진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연대기적 구성을 갖추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여사님 특유의 섬세한 인간관계 묘사가 정교하게 쌓아 올려지고, 트릭보다 인간관계와 동기 등 다양한 요소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늘어나는 과정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여사님이 얼마나 많은 작품 스타일에 도전했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정통 추리에서 시작해서 모험물, 신본격 스타일 서술 트릭, 스릴러, 법정극, 하드보일드, 오컬트 심령 괴기물, 심지어 코즈믹 호러(!) 까지 장르 문학의 거의 전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니까요. 왜 거장인지를 리뷰를 읽으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매우 낡아빠진 오래전 고전 작가 같지만 그렇지 않다며 "세번째 여인" 의 경우 1966년 발표된 작품으로 곧 '레드 제펠린' 이 결성될 시점이라고 지적하는 장면에서는 시대가 확 와 닿아서 놀랐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읽은 여사님 작품에서 '스푸트니크' 호가 언급되는 장면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지요. 참고로 이 작품은 당시 미국 최첨단 추리 소설에 도전한 작품이라고 저자는 소개하는데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무모한 도전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낸 증거라나요?

이렇게 리뷰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리뷰를 통해 작가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게 책의 핵심일 뿐 아니라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당연히 '걸작'이기 때문인데, 걸작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지적하지요. 여사님의 걸작들은 요약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서 제대로 소개되지 못 한게 원인이고요.
즉 작품 전체가 트릭이자, 복선이자, 단서이자, 미스디렉션으로 소설 전체가 속이기 위해 짜여진 플랫폼일 뿐 아니라, 여사님은 트릭에 능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는 본격물에 비하면 그 장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다는 게 최종 결론인데, 여사님 작품에 대한 저자의 리뷰들을 읽어보면 이 의견에 동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리뷰를 통해 여사님의 특징적인 작법을 눈치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특유의 스타일은 그녀가 일종의 "연극"처럼 상황을 다룬 것이 비결로, 여사님 작품은 그림이나 동영상, 연극처럼 독자나 관객이 어디를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다의적" 이야기를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해 내는지가 중심이라는 건데 아주 타당해 보였습니다. 제가 읽었던 여사님 작품을 몇 편 떠올려 봐도 저자의 말대로 "여사님 머릿속에 상영되는 연극을 종이 위에 옮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라는 것, 즉 보이는 것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겉보기를 만든 후, 겉보기와는 다른 진실에 그 이상의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방법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가장 좋은 예는 여행지라는 무대와 신원을 위장한다는 설정인데 정말 그럴싸 하지요? 연극과 같은 상황을 접목하기 좋은건 당연히 일상과 분리된 장소일테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장하는게 보다 손 쉬운 건 당연하니까요. 아울러 여사님은 독자가 어떤 때 어떤 인물을 의심하고 어떤 때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는지를 완벽하게 꿰고 있었던 덕분에 독자를 속이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흉내내기 어려운 솜씨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저자 스스로 모든 작품의 별점을 매기고 평가한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물론 평론, 리뷰 및 평가는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결과물이기에 모든 사람이 만족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별점이 높게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걸작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이 많이 부여되고 있어서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제법 많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 별로였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다섯 마리 아기 돼지" 나 "끝없는 밤" 을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은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 권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로맨스 소설'로 알고 있는 매리 웨스트매콧 명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의아했던 점이에요. 제가 보았을 때에는 정교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의 다의성' 이라는 항목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슬픈 사이프러스" 등 몇몇 작품은 국내 번역명과 동떨어진 일본식 제목으로 소개되거나, 포와로와 마플 및 기타 장편 외 몇몇 작품들에 대한 국내 출간 여부가 체크되지 않은 점은 옥의 티입니다. 출판사의 배려가 아쉽네요.

그래도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잘 쓰인 추리소설 리뷰 집으로 완벽에 가까운 책입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에요.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뛰어가서 사 오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사님같은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야, 이런 리뷰라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전체 베스트 10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 많은데 서둘러, 시간 나는 대로 읽어봐야겠네요.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그 외 개인적으로 "장례식을 마치고", "할로 저택의 비극", "맥긴티 부인의 죽음", "카리브해의 미스터리", "서재의 시체" 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이것만 해도 올해 여름까지는 충분하겠지요?

2018/09/23

죽이는 화학 - 캐스린 하쿠프 / 이은영 : 별점 3점

죽이는 화학 - 6점
캐스린 하쿠프 지음, 이은영 옮김/생각의힘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열네 종의 독약 - 비소, 벨라도나, 청산가리, 디기탈리스, 에세린, 독미나리, 바꽃, 니코틴, 아편, 인, 리신, 스트리크닌, 탈륨, 베로날 - 에 대해 각각 약 30여 페이지의 분량으로 역사와 효과, 실제 사례 및 검사 방법과 같은 정보를 여사님 작품 중 해당 독약이 등장한 대표작의 줄거리와 함께 설명해주는 병리학, 약학 서적이자 추리 소설 안내서입니다.

책은 여사님이 1차 세계 대전 중 지역 병원에서 조제사로 일하기 위해 자격 시험까지 치뤘던 나름 독약 전문가라는 설명에서 시작합니다. 덕분에 등장하는 독약의 작용 사례에 대한 묘사는 약학 학술지에서 칭찬 받았을 정도로 정확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 덕분에 이런 책까지 나올 수 있었겠지요.

소개되는 독약의 역사, 효과, 사례 모두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례 부분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유명 사건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폴레옹 비소 독살설입니다. 당시 유행했던 비소 염색 벽지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줍니다. 비소 벽지의 독소는 실제로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지 못한 건강 상태에 기여했고, 의사들이 이를 치료하기 위해 더 많은 중독성 화합물을 주입한게 죽음의 원인이라는 추리도 꽤나 그럴싸 했어요.
라스푸틴이 시안화물 중독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가설 검증 부분도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라스푸틴이 알코올성 위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위산이 적어서 시안화칼륨이 치명적인 시안화수소로 변환되는 양이 적었으리라는 추리는 신기했어요. 

이러한 유명인 사례 외에도 수록된 사례는 많습니다. 디기탈리스 설명에서는 1863년 처음으로 피해자에게서 디기탈리스가 검출된 사건 사례부터 설명해 줄 정도로 충실하기도 하고요. 이 사례에서 피해자의 토사물이 묻었을 침실 바닥을 대패질 해 올 정도로 끈질겼던 경찰의 수사 의지도 인상적입니다.
실제 여사님 작품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사례도 등장합니다.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대표적입니다. 1935년 일어났던 워딩엄 간호사가 저지른 모르핀 독살 사건이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는데, 설정을 보면 꽤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그 외에도 에세린이 함유된 콩이 자생되던 서아프리카 칼라바르(그래서 칼라바르 콩이라 불리움)에서 용의자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이 콩이 혼합된 음료를 마시게 한 다음 결정했다는 옛날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콩을 씹어 삼키려 했고, 죄가 없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확신 하에 재빨리 삼켰을텐데 천천히 먹을 수록 독약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신체가 독약을 흡수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일종의 심리적 근거가 있는 재판 방식이라는게 굉장히 새로왔어요. 

해독제에 대한 소개도 충실한데 그 중 비소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숯"을 삼킨다는 내용은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독약을 흡수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니 사무실 숯도 치우지 말고 그냥 두어야 할듯요.

또 이미 읽었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죽음과의 약속", "비뚤어진 집",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삼나무 관 (슬픈 사이프러스)", "부부 탐정" 등) 여사님 작품과 병행되어 설명되는 구성도 흥미를 자극합니다. 대표작과 독약을 결부시키기 위해 여사님 전 작품을 분석하여, 해당 독약이 쓰인 작품이 무엇인 선정한 것도 책을 참 정성들여 썼구나 싶었고요. 제일 처음 소개되는 비소 항목 첫 문단에서 "실제로는 네 편의 소설과 두 편의 단편에서 오직 일곱 명의 등장인물만이 이 악명높은 독약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알려줄 정도입니다. 참고로 비소만큼이나 유명한 청산가리는 "10편의 장편과 4편의 단편에 등장하여 17명을 해치웠다" 고 합니다. 
도로시 세이어스 여사님의 맹독은 비소였는데,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여사님 작품 속 최고 킬러는 청산가리라는 사실도 재미있네요. 

이렇게 독약과 내용을 결부시켜 설명하면서도 작품 속 주요 스포일러에 대해 잘 감추는 솜씨도 빼어납니다. '탈륨' 에 대해 설명하는 "창백한 말" 에 대한 설명 외에는 흥미만 자극할 뿐 핵심 내용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정말로 책을 읽고 싶게 만들거든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가 가득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만 놓고 보면 4점도 아깝지 않지만 독약의 성분과 체내 작용 과정 설명을 위한 복잡한 화학적, 생리학적 반응에 대한 설명이 조금 지루하고 따분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을 비롯한 추리 소설 애호가, 추리 소설 작가 등 이 쪽 바닥 사람들께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