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해미시 순경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해미시 순경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6/0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6) 맥주가 맛있는 순간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닿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보리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젖은 빵이 발효된 것을 먹어 본 것이 맥주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문학으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음식을 대표하는 상형문자가 ‘맥주’와 ‘빵’이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를 맥주와 마늘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마늘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이집트에 냉장고가 있었을 리는 없지만, 더위 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하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합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드니까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 중 한 편인 "맥주 별장의 모험"에서 주인공 닷쿠 일행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무더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별장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대량의 맥주를 발견하지요. 당연히 일행은 유혹을 참지 못합니다. 긴급 피난이라는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체내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알코올의 이뇨 작용까지 더해지면 탈수 증상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젊은 닷쿠 일행에게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텅 빈 별장 1층에 싱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저마다 추리를 꺼내 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작가의 단편 "맥주집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닷쿠 일행이 빈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시며 그 이유를 추리하는 이야기거든요. 만화 단행본 표지에서도 닷쿠 일행은 맥주를 들고 있는데, 이쯤 되면 참 맥주를 좋아하는 일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작품 속 닷쿠 일행이 마신 것은 냉장고 속 캔맥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캔맥주보다 병맥주 쪽이 조금 더 시원한 인상을 줍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 병뚜껑이 열릴 때 나는 소리, 잔에 따를 때 올라오는 거품이 캔맥주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즐겼던 맥주도 Remmers 병맥주였습니다. "독사"에서 그 상표명이 직접 언급되지요.

병맥주 하면 역시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병을 꺼내, “퐁”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고, 살짝 얼음이 낀 잔에 거품이 올라오도록 따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데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에는 바로 이 습관을 이용한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노 쿄코는 냉장고 속 맥주를 냉동실에 얼려 둔 잔에 따라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남편을 원격으로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리 잔에 청산가리를 발라 두었던 겁니다.

다만 이 방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여도, 과학적으로는 맥주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주에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적정 온도가 있는데, 얼린 잔은 그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버리는 탓입니다. 또 잔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 때문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장 시원해 보이는 방식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방식은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고 더위 속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만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에 등장하는 사코미즈처럼, 2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맥주를 마신다면 어떨까요. 그 맥주가 맛없을 리 없습니다. 그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두고 “마치 목에도 미각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느끼며, 맥주를 “액체 모양을 띤 황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잘 와닿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지붕 공사 장면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는 간수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요구합니다. 그 덕분에 죄수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위에 앉아, 차갑게 식힌 Stroh’s Bohemian 맥주를 한 병씩 나누어 마시지요. 특별히 고급 맥주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교도소 안에서 잠시 자유를 맛봅니다. 죄수가 아니라 하루 일을 마친 평범한 노동자처럼요.

물론 차갑지 않아도 특별한 분위기가 함께한다면 맥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미시 순경은 일부러 맥주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시곤 합니다. 미국 영화 속 탐정들이 책상 서랍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장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 자신도 옛 하드보일드 탐정과 닮아진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맛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스티븐 킹의 "여름 천둥"은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든 것이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은 버려진 개 간달프와 함께 살아가고, 근처 고급 주택가에 홀로 남은 팀린과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결국 방사능 후유증이 심해져 죽음을 앞두게 된 팀린은 자살할 준비를 마친 뒤 로빈슨을 부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지근한 Budweiser를 나누어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맥주의 제왕”이라면서요. 차갑지도 않고, 세상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마시는 맥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의 Budweiser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맛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 그리고 맥주라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이 만들어 내는 쓸쓸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달프가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의 파트너 조처럼 Budweiser를 좋아하는 개였다면, 그 자리가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실 이 자리는 Budweiser보다 벨기에 맥주 Duvel이 더 어울렸을겁니다. 시원해야 제맛인 라거 계열의 Budweiser와 달리, 에일 계열 맥주는 어느 정도 온도가 올라왔을 때 본연의 맛이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도 Duvel이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향과 맛을 즐기기 좋은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udweiser도 겨우 구했던 로빈슨과 팀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요.

이처럼 맥주의 맛은 온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위, 갈증, 자유, 고독, 동경, 마지막 순간의 체념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맥주는 차가워서 맛있고, 어떤 맥주는 오래 기다린 끝에 마셔서 맛있습니다. 또 어떤 맥주는 맛 자체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시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날의 갈증이든, 하루 끝의 여유든, 이야기 속 인물이 느낀 자유든, 맥주는 그런 장면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방법인 ‘세 번 따르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네로 울프도 좋아하는 Remmers 병맥주를 전용 금도금 병따개로 딴 뒤, 정확하게 거품을 맞춰 따라 마시곤 했다고 하니, 미식가에게 검증된 방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맥주에 잘 어울리는 잔까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 번 따르기

1.
맥주병을 높이 들고 처음에는 천천히, 이어서 조금 세게 따라 거품을 만든다.

2.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 정도가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로 가져가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1cm 정도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맥주를 조심스럽게 붓는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17/08/27

무뢰한의 죽음 - M.C. 비턴 / 전행선 : 별점 2점

무뢰한의 죽음 - 4점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실라가 약혼자인 극작가 헨리 위더링을 로흐두로 데려와 약혼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초대 손님 중 피터 바틀릿 대위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던 유명한 사교계의 무뢰한이었다. 약혼 파티에서도 여지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아침 총에 맞아 죽은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사고사로 생각되었지만, 해미시 순경이 몇 가지 단서로 살해되었다는걸 밝혀낸 뒤 동기가 명확한 파티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은행가 프레디 포브스그랜트가 체포된 다음 날, 프레디의 아내 비라마저도 독살당했고 사건은 결국 미궁에 빠지는데...

M.C. 비턴의 해미시 순경 시리즈 2작입니다. 1작이 마음에 들었기에 곧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시리즈답게 전작에서 이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은건 즐겁습니다. 특히 해미시 순경 설정이 더 풍성해 졌어요. 사냥은 그를 미워하는 할버턴스마이스 대령까지 인정할 정도로의 전문가이며, 달리기, 사격, 낚시, 심지어 체스 대회까지 나가면 우승하는 다양한 능력에다가 전작에서도 등장했던, 미스 마플스러운 "시골 마을 인간 관계를 사건에 대입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해 명료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통한 심리 분석, 게다가 '속기'까지 가능한 슈퍼맨으로 묘사되거든요. "홍반장"의 추리 소설 버젼이라고해도 무방합니다. 다른 전작에서 이어지는 캐릭터들도 반갑습니다. 이름만 등장했던(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밀렵꾼 앵거스 맥그리거가 직접 등장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고루하면서 부패하고, 그리고 난잡한 부르조아들에 대한 고전적인 묘사도 여전합니다. 작가가 부르조아에 대한 묘사를 너무나 하고 싶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질만큼 애정도 묻어나고요. 부르조아인 '무뢰한' 바틀렛이 알고보니 나름 능력자이며, 그를 죽인 평민 헨리 위더링은 '속물'에 불과했다는 진상만 보아도 작가가 부르조아들을 동경하고 있다는게 뻔히 보입니다.

단, 이러한 점들이 장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전작에서 이어지는 인물 중 블레어 경감은 전형적인 악덕 경찰 상사라서 너무 뻔합니다. 분명 전작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 마음을 터 놓았다 싶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블레어가 성공을 독차지하는 결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고전스러운 묘사도 정도가 지나칩니다. 특히 밀땅 중에도 스스로의 주제를 파악하고 프리실라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해미시의 행동, 부모님이 좋아하는 약혼자가 있지만 해미시를 향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프리실라 두 명 모두 현대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답답합니다. 한국 근대를 연상케 하는, "장남"의 가족 부양 의무가 중요하다고 소개되는 등의 기본 설정부터가 고전적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전작에서의 현대적인 캐릭터들의 모습이 약해진 듯 하여 아쉽네요.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죄다 별로인 추리적인 부분에 비하면 사소합니다. 물론 범인의 의외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동기만큼은 괜찮습니다. 범인이 정말로 뜬금없기는 해도 동기만큼은 파티에서 비롯되었으며,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동기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거든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도 전작보다는 나아진 점이고요.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추리의 과정은 엉망입니다. 우선, 보다 공정한 전개를 위해서 파티에서 푸루니(푸루넬러)의 말로 헨리의 히트작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바틀릿 대위가 알았다는 부분은 좀 더 보강했어야 합니다. '파티 후반부에 바틀렛이 푸루니를 유혹하여 끌고간 후, 연극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는, 뒷 부분에 프리실라와 푸루니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덧붙였더라면 아주 좋았을거에요. 아니면 최소한 해미시가 "공작 부인의 연인"을 관람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정도로라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대령의 과거 사생활을 이전에 여러 채널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스캔들 중 하나가 연극의 핵심 내용이더라는 정도로요. 

해미시 스스로 이 사건의 범인은 익숙한 사냥꾼일 것이다, 이유는 총알을 바꿔넣을 정도로 충분한 여분의 탄환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라고 추리했던걸 스스로 뒤엎는 결말도 아쉽습니다. 독자의 헛다리를 유도해 놓고 그냥 발을 빼버린 셈이니까요. 별다른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울러 비라를 살해한 범행의 동기, 방식과 과정 모두 운과 우연에 의지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동기부터 이야기하면, 바틀렛이 함께 밤을 보낸 3명의 여성 중 비라에게만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행 도구인 쥐약도 우연히 입수했으며, 비라가 단 것에 사족을 못 쓴다는 약간의 복선 정도로는 그녀가 독이 든 케이크를 먹어치운다는걸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저녁을 못 먹는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는 정도의 묘사는 필요했어요.
여튼, 이 시리즈는 두 편 밖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살인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 단점 모두 전작과 비슷합니다. 추리적으로 조금만 괜찮았어도 계속 읽어볼텐데 애매하네요. 다음 권을 읽어봐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2017/08/25

험담꾼의 죽음 - M.C.비턴 / 지여울 : 별점 2.5점

험담꾼의 죽음 - 6점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어와 송어 낚시 전문 로흐두 낚시 교실'에 낚시를 배우기 위해 8명의 수강생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 중 '레이디 제인'은 엄청난 재앙 덩어리로, 그녀의 특기는 낚시 교실 참가자들을 뒷조사해서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물론 낚시 교실 운영자 존과 헤더 부부마저 그녀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4일 째 되는날 레이디 제인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의 순경 해미시 맥베시 시리즈 제 1작입니다. 눈에 띄는건 정통 영국 미스터리, 그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스타일을 쏙 빼닮았다는 겁니다. 시골 촌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부르조아들과 계급 문화 등 바탕이 되는 설정이 굉장히 영국적이라는 점, 시골 촌 마을의 인간 관계가 여러 사건 관계자들의 경우와 맞아 떨어져 추리의 바탕이 된다는 점,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이고 싶어한 험담꾼 레이디 제인의 설정과 그녀의 협박 재료들 모두 그야말로 여사님의 재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지금 읽기에는 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입니다. 묘사부터가 빅토리아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1985년 작품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부유한 상류층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속셈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 소집단이라는 설정부터가 별로 현대적이지 않잖아요?
게다가 로맨스 관련 이야기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진부합니다.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인 앨리스는 20세기 아가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순진해 빠졌고, 해미시 순경과 지역 유지의 딸 프리실라의 로맨스 역시 고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부자집 망나니 제레미도 켸켸묵은 설정인 것은 마찬가지고요.

물론 현대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캐릭터들이 나름 적극적이고 입체적이기는 합니다. 레이디 제인이 좋은 예입니다. 은근하게 사람들을 상처주던 여사님 작품 속 할머니나 부르조아 귀부인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짜증 유발자로 잘 묘사되고 있거든요. 작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독자마저도 분노케 만들 정도로요. 최근 작품들 중에서 이렇게 누구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등장인물은 오랫만에 봅니다.
앨리스가 제레미에게 넘어가 밤을 같이 보내는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여사님 작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나름 현대적인 부분입니다.

해미시 순경 역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할 말 다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레이디 제인이나 찰리 백스터의 어머니에게 일갈하는 장면은 개중 백미입니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조리있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만큼 할 말 다 하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를 굉장히 잘 그려냈습니다.
탐정 역할로도 괜찮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스 마플 스타일의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추리력에 더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다면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지론도 인상적입니다. 

로흐두라는 마을과 주변 묘사의 디테일도 상당한 수준이며, 이야기의 큰 축인 낚시 교실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져서 여정 미스터리의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해미시 순경 등 멋드러진 캐릭터만으로는 역부족이네요. 여러모로 원조 여사님 작품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적으로는 실망스러운 탓이 큽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소소한 시골 마을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사건에 접목하는 추리 방식이라던가 마지막에 해미시 순경이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추리쇼를 벌이는 등의 추리 과정만큼은 고전 스타일인데, 실제 '추리'는 전혀 고전 본격물스럽지 않아요.
일단 공정하지가 않습니다. 핵심 단서인 "BUY BRIT...", 그리고 스트리퍼 에이미에 대해 순경이 알아낸 정보를 독자에게 공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에이미 로스가 "레드훅"이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순경이 인맥을 통해 전화를 걸어 알아낸 정보를 독자가 끌어낸다는건 불가능하니까요.
게다가 이 핵심 단서도 헛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트리퍼가 성공해서도 과거 예명을 계속 사용한 이유, 술잔이 비었을 때 호텔이라면 마땅히 종업원이 있어야 하지만 에이미가 모두에게 술을 따라준 이유 등이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나마의 사진도 '증거'라고 밀어붙이기는 영 부족하고요.
무엇보다도 밀렵꾼에게 목격되었다는 말로 자백을 유도한 것은 최악이었습니다. 정통 본격물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탐정의 야바위 짓이잖아요. 살해 동기도 영 시원치 않고요. 이럴거라면 차라리 소거법으로 근거를 보강했어야 합니다.

  • 어린아이인 찰리 백스터는 거구의 레이디 제인을 살해해 옮기기 어려우니 제외.
  • 앨리스는 과거의 치부를 이미 제러미에게 밝혔기에 드러난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니 제외.
  • 제러미와 프레임 소령의 비밀은 아는 사람은 다 알 뿐더러 알려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게다가 알려진다고 해도 본인이 창피할 뿐 해가 될 일은 당장 없기에 제외.
  • 대프니의 과거 정신병 이력이야말로 드러난다고 해도 무엇 하나 해로울 게 없기에 제외.
  • 존과 헤더 부부가 살해했다면 최소한 존의 낚시에 시체가 걸려 끌려 나오도록 처리하지는 않았을터이니 제외.

그러면 결국 정계 진출을 노리고 있지만 과거가 드러나면 위태로울 수 있는 마빈 로스와 에이미 로스 부부만이 남게 되지요.
여기서부터 해미시의 조사 결과와 추리를 이어가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적당한 내용, 묘사, 분량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하며 현대적인 캐릭터들도 볼거리이기는 합니다. 비록 추리적으로는 꽝이더라도 현대물에 여사님의 작풍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해미시 순경이 마음에 들었기에, 후속권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코지 미스터리'라고 분류하고 연애질이나 해 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인 부분도 적절하고, 책도 예쁘게 잘 나온 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