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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야간열차 살인 사건 - 케리 그린우드 / 정미현 : 별점 1.5점

야간열차 살인 사건 - 4점
케리 그린우드 지음, 정미현 옮김/딜라일라북스

귀족 영애인 프라이니는 하녀 도트와 함께 밸러랫 행 열차로 여행 중, 일등실 객차에 클로로포름이 뿌려지는 상황에 마주쳤다. 프라이니의 기지로 승객들은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승객 중 한명인 헨더슨 부인이 기차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헨더슨 부인의 딸 유니스는 명탐정으로 이름난 프라이니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프라이니는 기차 승객으로 기억을 잃은 제니까지 떠 맡은 채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데..

귀족영애 탐정 프라이니 시리즈입니다. 어쩌다 보니 세 번째 부터 읽게 되었네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무리 보아도 그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없는 졸작입니다. 일단 주인공 프라이니부터 한심합니다. 매력적인 외모와 두뇌, 행동력에 재산까지 갖춘 자유로운 신여성이라는 설정인데 도가 지나쳐서 짜증이 납니다. 비현실적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요.
그나마 앞선 설정들이야 만화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뻔하디 뻔한 설정이라 쳐도, 남자가 마음에 들면 두 번째 만남만에 정사를 갖는 모습을 자유로운 신여성(?)이라고 포장하는건 무리입니다. 여성 모두를 유혹하는 싸구려 펄프 픽션마초를 빗대어 만든 설정으로 보이는데, 일단 정통파 계보에 드는 탐정들 중에 그런 싸구려는 없으며, 있어도 대체로 그러한 유혹은 사건 해결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용됩니다. 아니면 상대 여성이 여성의 매력을 이용해서 벌이는 음모이지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정사는 사건 해결과는 무관한, 순전히 프라이니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심지어 상대방 린지가 숫총각이라는 점에서 '숫총각 사냥하는 선배 누나 혹은 유부녀'가 등장하는 싸구려 성인물에 가깝습니다. 아니,  싸구려 성인물은 성욕 자극이라는 대 명제에 충실한 반면 이 작품은 그렇지도 못하니 더 별로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대단한 분장도 하지 않았는데 앨러스테어가 기차에서 보았던 젊고 핸섬한 승무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아무리 클로르포름에 취했어도, 사건 직후 키라던가 얼굴 인상을 그대로 기억하고 하고 증언하는걸 보면 설득력이 낮습니다. 하지만 이건 실종된 헨더슨 부인 살인사건의 진상에 비하면 솔직히 약과입니다.

  1. 기차에서 헨더슨 부인의 목을 밧줄로 묶고
  2. 그 줄을 급수탑으로 던진 뒤
  3. 급수탑을 기어 올라가 밧줄을 잡아당겨 노인을 끌어낸 후
  4. 시체 위로 뛰어내렸다.

라는데, 비록 급수 때문에 3분간 정차했다 하더라도 2~3의 과정을 그 짧은 시간 어떻게 했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헨더슨 부인을 창문에 기대어 놓은 후, 객실 지붕에 올라가서 헨더슨 부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것을 선로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급수탑에 던진 뒤 10미터를 전력 질주하고 급수탑을 올라간 뒤 밧줄을 잡아당겼다? 이게 3분 안에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앨러스테어가 클로르포름을 이용하여 객실 승객들을 마취시킨 다음이라면 이러한 복잡한 행동으로 노부인을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주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어 수사에 혼선을 주지도 못하니까요. 마지막까지 이유가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그냥 창 밖으로 내던지는게 훨씬 쉬웠을 겁니다.

또 승무원을 가장한 핸섬한 젊은이가 유력한 용의자이며, 동기와 외모 등을 종합해보면 앨러스테어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그의 유일한 알리바이가 친구 린지에 의해 뒤집혀 버린다는 전개도 시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없어서 프라이니가 사건 해결을 위해서 하는 것 역시 전무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동거인의 조사조차 게을리한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이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기억을 잃은 소녀 제인 사건은 프라이니와 그의 친구들(버트와 세스)의 활약으로 해결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헨더슨 부인 살인사건보다야 낫긴 합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버튼이 최면술로 불쌍한 고아 소녀들이나 납치한 소녀들을 사창가에 팔아 넘긴다는 범행 자체가 문제에요. 최면술을 기억을 완벽하게 없앤다던가,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식으로 무슨 마법처럼 묘사하고 있는 탓입니다. 최면술이 설령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더라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 처럼 30여명 이상에게 모두 성공적으로 최면을 걸거나, 특정한 자극이나 신호 없이 눈빛과 대사만으로 순식간에 최면을 걸고 푸는건 무리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고양이에게 눈을 공격당한 최면술사 헨리 버턴이 그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결말도 후련하지만, 역시 과학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고요. 하여간 최면술이 등장한 작품치고 제대로 된 걸 못 봤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책 만듬새도 괜찮고 여성 작가다운 꼼꼼한 묘사에 약간의 점수를 더하나 추리물로서는 그 어떤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망작입니다. 앨리스테어가 행하는 여자에 대한 막되먹은 행동과 "자고로 여자란 출산 이후엔 전부 쓸모없어지지" 등의 대사를 보면 작가의 의도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 유능하고 강력한 여성이 멍청한 남자들을 가지고 놀고 사악한 마초를 응징하는 페미니즘 영웅물을 노골적으로 그리려 한 것이겠지요. 뭐 그 생각이 잘못된건 아니에요. 문제는 그게 뭐든간에 최소한의 완성도는 있어야 했습니다. 2017년 들어 처음 읽은 추리 소설이 이따위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덧붙이자면 TV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역시나 그닥 기대가 안되는군요. 추리보다는 작중 묘사되는 온갖 화려한 의상들이나 세세한 디테일들, 그리고 사창가에서의 격투라던가 마지막 프라이니 집 앞에서 앨러스테어와 벌이는 격투 등 액션의 비중이 높은 추리 속성이 조금 들어간 시대극 액션물이라 생각되거든요. "각시탈" 처럼요! 잠깐 찾아보았는데 프라이니 캐릭터도 딱히 매력적이지도 않고요. 여튼 이 작품에 대해서는 책이든 영상물이든 더 찾아볼 일은 없을 겁니다.

2016/06/18

매듭과 십자가 - 이언 랜킨 / 최필원 : 별점 1.5점

매듭과 십자가 - 4점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딘버러에서 소녀들을 유괴하여 살해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혼한 전 SAS 특수부대 출신 경사 존 리버스에게 기묘한 협박장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존 리버스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싸우며 사건 수사에 나섰고, 여러가지 단서들을 통해 범인이 정말로 노리는 것이 자신이었다는게 밝혀진다...

"'타탄 느와르의 제왕'이라는 작가 이언 랜킨이 창조한 존 리버스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홍보 문구에 더해 적절한 분량과 괜찮은 책 디자인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기있는 소재들 몇 개를 나열한 펄프 픽션에 불과한 탓입니다. 우선 주인공 존 리버스부터 살펴보죠.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못나가는 경찰, 전직 SAS 출신, 골초, 이혼남, 고독한 늑대, 트라우마..." 이 키워드 몇 가지를 섞어 만든 캐릭터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겁니다. 그냥 현대 하드보일드범죄물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스테레오 타입이니까요. SAS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으로 관련된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이 바닥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는 것 역시 뻔하디 뻔한 설정이고요. SAS에서의 훈련과 경험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차라리 트라우마 없고 군대 경력을 활용하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마스터 키튼"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그다지 잘생기거나 몸이 좋지도 않고, 다른 매력도 없는데 여자들과의 원나잇이 쉽게 그려지는 것 역시 불만입니다. 이게 영국적인 문화라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조직 내 동료들끼리 스스럼없이 원나잇을 즐긴다는건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버스의 전처가 리버스와 티격태격하는 상관 앤더슨의 새파랗게 어린 아들과 사귄다는 막장 설정은 도무지 왜 나왔는지 모르겠고요. 딱 한가지 마음에 드는 설정은 딸바보라는 점 뿐입니다. 특히 딸에게 추파를 던지는 거리의 건방진 수컷들을 하이에나 떼 보듯이 하는 장면만큼은 딸 아이 아빠로서 공감이 가더군요. 그러나 이는 사건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범죄 스릴러로서의 가치도 형편없습니다. 범인이 지속적으로 존 리버스에 메시지를 보내지만 리버스는 살인마가 SAS 당시의 전우 고든 리브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게 핵심인데, 이유는 트라우마로 과거의 기억을 봉인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막장 드라마기억 상실증에 버금가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편의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면 매듭을 통해 고든 리브를 쉽게 떠올렸을 거라는건 자명합니다. 당연히 체포도 손쉬웠을테고요. 최소한 사만다가 유괴되기 전에는 잡을 수 있었겠지요.

게다가 기억을 되찾는 것도 최면술사인 동생 덕분이라니 이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나마 첫 만남에서 동생 마이클이 최면으로 전생도 끄집어낼 수 있다 운운하는 복선을 깔아놓기는 했지만, 절대로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지독히 편의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또 작중 리브스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처의 애인이 죽고, 전처는 중상을 입고 딸까지 유괴당한 후에도 하는건 집에서 술이나 먹는 것에 불과합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자책하는 것은 덤이고요. 범인을 알아낸 것은 앞서 말했듯 동생 마이클의 최면술 덕분이며, 범인의 흔적도 경찰에서 피해 아동들이 같은 도서관(중앙도서관)에 다녔다는 단서를 포착한 것을 토대로 잡아냅니다. 그나마 마지막 추격전에서 아주 약간의 활약을 하기는 하지만 대단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더해 급작스러운 결말과 두페이지 분량도 채 되지 않는 에필로그 역시 실망스럽습니다.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브스의 트라우마는 극복되었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이클은 어떻게 되었는지, 앤더슨은 어떻게 되었는지, 질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건지 등등등....

물론 몇가지 건질만한 재미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피해 아동들 이름의 머릿글자를 연결하면 리버스의 딸 사만다의 이름이 표시된다던가, "죄와 벌"에 대한 과거 대화를 언급하며 책 속에서 총을 꺼낸다던가 하는 요소는 제법 괜찮았어요. 기자 짐 스티븐스가 마이클 리버스의 마약 거래를 뒤쫓는 이야기가 병행해서 펼쳐지는 것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무대가 되는 에딘버러에 대한 묘사는 특히 좋아요. 유괴 사건에 대한 지루하고 기나긴 탐문, 자료 조사에 대한 끔찍함에 대한 묘사는 놀라운 수준이고요. 모든 내용이 250페이지 안쪽의 짤막한 분량이라는 것도 4~500페이지 짜리 장편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기 힘든 미덕이지요. 아울러 출판사 오픈하우스가 새롭게 런칭한 장르문학 전문 브랜드 Vertigo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성격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정과 디자인도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장점에 비해 단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관심이 가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후속권을 읽을 생각이 없고요. 이런 싸구려 펄프픽션을 뭔가 있어보이게 "느와르"라는 표현을 써가며 홍보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습니다.

2015/11/11

마술은 속삭인다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1.5점

마술은 속삭인다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마모루는 공무원이었지만 거금을 횡령하고 사라진 아버지 때문에 고향에서 갖은 수모를 당하고 살아왔다. 어머니 사후 이모댁에 얹혀 살며 잠시 평화로운 시기롤 보냈지만, 택시 운전을 하던 이모부가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하고 말았다. 이모 가족을 돕기 위해 특기인 열쇠 따기 기술로 피해자 요코의 방에 잠입한 마모루는 그녀의 죽음에 수상한 흑막이 있음을 눈치채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1989년작 장편소설. 도입부부터 중반 전개까지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연쇄적인 자살 사건이 벌어지고, 그녀들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파헤쳐 나가는 과정이 재미나거든요. 특히나 책 뒤 해설에서도 잠깐 언급되듯, 마모루가 이 사건에 얽히게 되는 계기가 마모루가 얹혀 사는 이모부의 택시에 요코가 추돌한 사고사라는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자연스럽게 두 사건이 만나 마모루가 사건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될 뿐더러, 이 추돌사고로 마모루의 뒤를 봐 주는 요시타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중반부까지의 흡입력 있던 전개는 뒤로 가면 갈수록 힘을 잃고 맙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트릭이 하라사와 노인이 구사하는 최면술인 탓입니다. 간단한 암시만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 몇 마디 걸어서 최면을 걸게 만들다니! 누가 봐도 수상합니다. 더군다나 쫓기는 입장이거나 뒤가 켕긴다면 더더욱 말려들지 않으려 할 텐데 당치도 않지요. 어떻게 죽은 여자들에게 최면을 걸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아울러 작중 꽤나 중요하게 언급되는 암시에 의한 서브리미널 효과도 최근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고 밝혀졌습니다. 아니, 뭐 효과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작품 속 내용처럼 뒤가 켕기는 사람들이 삽입된 영상을 보고 폭주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한마디로 - 본 작품의 영상물을 감상하셨다는 각시수련님 말을 빌어 - 요약하자면 "트릭을 양념으로 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안이하기 짝이 없는 작품"입니다. 이 정도 최면술이면 이미 추리가 아니라 SF라 생각됩니다.

전개 역시도 마모루 시점이라 약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코의 죽음 이후, 왜 그녀의 가족은 응답 메시지 테이프를 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한 번 듣고 평범한 중학생이 사건의 진상을 꿰뚫어 보았으니, 가족들 역시 간단하게 그녀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요?
게다가 이렇게까지 치밀하고 간단하게 원격 조종 살인을 범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구태여 남긴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최면술사일 뿐인 하라사와가 다카기 가즈코가 숨은 곳을 알아낸 방법도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대충 쓴 느낌이에요.

또 진짜 사건의 원흉인 다카기 가즈코가 살아남은 뒤 구원을 얻는다는 결말도 석연치 않으며, 마모루의 열쇠 따기 능력이 몇몇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합니다만 필살기가 아닌 잔재주 정도에 그치는 것도 아쉽습니다. 마술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큰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개인기 정도에 그치니까요.

아울러 마모루의 아버지가 공금을 횡령하고 바람을 피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자수를 했느냐, 도망을 쳤느냐가 가정에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다 주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기다림이 헛되었다는 것 때문에 마모루가 분노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매장당해도 싼 인물이이라서 딱히 인생이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게다가 어떻게든 마모루를 돌봐주려는 요시타케와 비교하면, 요시타케를 매도하는 하라사와 노인이야말로 사악한 연쇄 살인마인데 뭐 잘났다고 훈계를 늘어놓는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복수해야 할 대상인 다카기 가즈코가 아니라 다른 여성들과 취재를 한 것에 불과한 하시모토까지 죽인, 용서의 여지가 없는 악당이잖아요? 그가 말하는 정의나 마모루에 대한 충고 모두가 와닿을 리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모루와 미야시타 요이치의 왕따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고 전형적이라 할 말이 없습니다. 성장기 스타일의 일본 소설들은 왕따 이야기를 빼면 쓸 수가 없는걸까요? 이 정도 시련을 겪지 못하면 어른이 못 된다는 뜻인가? 여튼, 성장기로 보기에도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중반부 전개는 나쁘지 않고 흡입력도 제법입니다. 그러나 엉성한 설정 탓에 잘 짜여진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최면 이론을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작품을 쓴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에테르 세계관 시절에 쓰여진 SF가 떠오르고요.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대단한 팬이 아니라면 피하시길 바랍니다.
1989년 일본 추리 서스펜스 대상 수상작인데, 최면술에 대해서 무지했던 시대였나봅니다.

2012/12/06

진혼가 - 하세 세이슈 / 이기웅 : 별점 1.5점

진혼가 - 4점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신주쿠를 베이징 패거리와 상하이 패거리가 반씩 나누어 균형을 유지하던 중, 베이징 패거리의 자금줄인 장다오밍이 살해당했다. 베이징파의 두목 추이후는 전직 경찰 타키자와에게 배반자 색출을 지시했다. 한편, 장다오밍을 살해한 킬러 추성은 상하이 패거리 주훙의 정부 지아리의 보디가드로 일하게 되는데...

"불야성" 후속편. 류젠이가 양웨이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타키자와, 추성과 지아리를 조종하여 베이징파와 상하이파의 균형을 깨트린다는 이야기 전개는 전작과 거의 판박이입니다. 하지만 전직 경찰인 변태 타키자와와 킬러 추성 두 명의 시각으로 전개되며, 전작의 주인공 류젠이는 철저히 주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에 스핀오프 같은 느낌도 납니다. 경찰(전직이지만)과 중국인 킬러가 중국 폭력단과 대결한다는 구도는 왠지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전작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처집니다. 판에 박은 전개도 지루하고, 너무 운과 우연에 의지한 상황이 많아서 치밀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사건의 원인인 지아리가 쉐위안을 살해한 것, 타키자와의 폭주, 추성이 류젠이를 찾아오고 지아리에게 반하게 된 것 모두가 필연적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류젠이가 초능력 최면술사라도 되면 모를까, 이 모든 게 류젠이의 생각대로라는 것도 황당했고요. 상하이파와 일본 야쿠자의 격돌에서 운 좋게 추성과 타키자와가 빠져나온다는 전개도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또 타키자와의 조사도 순전히 소문과 발품에 의지한 것으로, 베이징파의 보스라면 하루 만에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인데, 추이후가 애초부터 타키자와에게 조사를 맡긴 이유조차 석연치 않은 등 대충대충 넘어가는 게 너무 많아요.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사랑의 전사로 거듭나는 타키자와의 모습은 대관절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이야기의 허술함을 넘치는 폭력 묘사로 때우려 한 티가 역력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거의 모든 남자들은 살해당하는 식인데 이 소설의 배경이 현대 일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주역급 인물들 모두가 트라우마에 더해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현실성 제로의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편에 버금가는 디테일한 신주쿠 뒷세계의 묘사는 나쁘지 않고 번역도 아주 좋은 편이기는 하나, 건질 건 그 뿐입니다. 강도 높은 폭력 묘사와 인간 쓰레기 타키자와의 폭주를 보는 맛은 나쁘지 않아서 쉽게 읽히기는 하나, 단순한 화장실용, 킬링타임용 펄프픽션에 불과하기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뒷세계 이야기에 폭력이 난무한다고 해서 하드보일드 느와르라니,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전편의 팬이 아니라면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2012/04/02

다이몬즈 1~13 - 요네하라 히데유키 : 별점 2점

다이몬즈 13 - 4점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요네하라 히데유키 그null림/서울문화사(만화)

데즈카 오사무의 "철의 선율"을 리메이크한 작품. 친구에게 배신당해 양 손을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정신력으로 조종하는 철의 의수를 얻는다는 기본 설정 이외의 모든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하여 13권에 이르는 장편으로 탄생시켰습니다.

가장 손을 많이 댄 부분은 배경 설정과 등장인물들입니다. 배경 설정은 "북두의 권"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근미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캐릭터, 특히 최종 보스인 프로그레스는 "베르제르크"에서의 아름다운 절대악 그리피스의 이미지를 끌어왔고요. 친구에게 배신당한 좌절감과 복수심 역시 원작보다는 "베르제르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원작과 대 히트작의 설정만 베껴온다고 걸작이 되는 것은 아니죠. 공은 좀 들였지만, 흔해빠진 이능력 배틀물 이상의 무언가는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복수의 이유만큼은 확실한 주인공 헤이토 이외의 인물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나노머신을 자신의 몸에 부여했다는 적들은 설정부터가 건맨, 최면술사, 검사, 근육맨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의 식상한 존재들이었고, "자연을 생각한다"는 최종보스 프로그레스 역시나 한 권 정도의 분량을 할애해가며 배경 설정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역부족인 평면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또 다른 제스모스 능력자 스왈로우가 원천적인 복수심을 가지고 상상 이상의 자해(?)를 통해 헤이토와 대적하며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친구도 마지막이 너무 별로여서 당쵀 왜 등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황당했던건 원작에서 끝까지 복수심을 잃지 않는 헤이토를 이 작품에서는 마지막에 "차갑지만 내 여자와 친구에게는 따뜻한 남자" 로 포장, 각색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원작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한 어처구니없는 각색의 결과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그나마 주인공 친구들도 대부분 죽고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는다는 다크엔딩과 함께 제스모스를 이용한 복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액션, 특히 제스모스만의 독특한 능력 (연결 부위에는 어떠한 것도 연결하여 팔로 사용할 수 있다)을 이용한 몇 번의 반전과 마지막 프로그레스와의 승부에서 보여지는 결말은 괜찮은 편이긴 합니다만.... 원작을 재미있게 본 입장에서는 점수를 주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거창하게 이야기를 벌이지 말고 원작을 보다 충실히 리메이크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2/18

최면 - 마쓰오카 게스케 : 별점 2점

최면 2 - 4점 마쓰오카 게스케 지음/룩스북

최면술사로 자칭하며 TV쇼 등에서 사기행각을 일삼는 가짜 최면술사 지츠소지 앞에 엄청난 미인 이리에 유카가 나타나 자신에게 걸려있는 최면술을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거절한 지츠소지 앞에서 갑자기 그녀는 "우주인"으로 탈바꿈하며 독심술과 예지력을 보여준다. 지츠소지는 자신이 근무하던 하라쥬쿠의 "운명의 성"이라는 가게에 그녀를 소개하여 그녀를 "채널러"로 근무하게 하며 엄청난 손님을 끌어모으게 된다.

하지만 TV에 소개된 그녀를 우연히 보게된 도쿄 카운슬링 심리센터의 최면요법과 과장 사가는 그녀가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다중인격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녀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지만 오히려 그녀가 받고 있는 이전 직장에서 2억엔이라는 거액의 횡령용의때문에 경찰과 대립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천만부가 넘게 팔렸다는 작품. 개인적으로 일본産 미스테리 스릴러 물을 좋아해서 구입해 보았습니다.

마음에 든 부분은 저자가 실제로 국가자격을 보유한 최면요법 카운슬러인 덕분에 최면요법에 대해서 굉장히 디테일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나간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런 전문가적인 내용을 아주 좋아하기도 하고요. 특히 일반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최면術' 이 아닌 '최면요법'으로 과학적이고 임상병리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을 소설의 에피소드들과 결합시켜 재미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예를 들면 뇌수술 후 갑작스럽게 안면 마비가 온 환자의 치료를 위한 최면 요법, 외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최면 요법 등이 그러합니다, 또한 가위바위보 이론이나 동전 맞추기 트릭, 독심술 등을 실제 응용 가능할 정도로 자세하게 써 놓은 것도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가위바위보 이론은 한번 써먹어 볼 만 한 것 같더군요.
하지만 이러한 최면요법이나 독심술 등의 설명을 제외한 실제 소설 내용은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로 재미가 없습니다.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정말 간단해요. "주인공 사가과장이 이리에 유카의 정신분열증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 전부거든요. 미스테리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두가지 요소, 유카의 횡령사건과 다중인격이라는 요소도 횡령사건은 순전히 심증으로 이루어지는 추론으로 해결되고, 다중인격의 치료 역시 앞부분의 장황했던 설정에 비한다면 상당히 간단하게 끝날 뿐이라 실망스러워요.
그 외의 이야기들은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최면술이라는 것의 나쁜점만 모아서 가지고 있는 지츠소지라던가 사가의 애인 아사히나의 이야기, 사가의 상관 구라이시의 이야기 등이 있는데 모두 부수적으로 최면요법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할 뿐이라 실제 주 스토리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사족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면요법을 과학적으로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한 티는 무척 많이 나지만 외발자전거를 못타는 소녀에게 실시하는 최면요법처럼 최면요법의 효용을 강조해서 오히려 일반인에게 만병통치약과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도 다분히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흡사 최면요법협회에서 홍보용으로 만든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들 자체도 위의 이유로 실제 스토리에 잘 섞이지 못한 것 같아요. 이럴바에야 "여의사 레이카"나 "사이코 닥터" 같은 정신과의사나 카운셀러가 등장하는 옴니버스 단편 만화보다도 격과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마디로,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네요. 초반의 이리에 유카의 다중인격이 발동하는 장면에서의 충격은 약간 있지만 그 이외에는 별달리 언급할 내용도 없습니다. 뭐 그래도 소설 자체로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다양하게 등장해서 그런대로 읽히는 편이기는 하니 절반의 성공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3/12/15

내겐 너무 가벼운 당신

오로지 외모로만 여성을 판단하던 주인공 할(잭 블랙)은 늘 미녀만 쫓아다니다가 퇴짜맞는다. 어느날 우연히 심리상담가를 만난 이후 이상하게도 할이 만나는 절세의 미녀들은 모두 그에게 호감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심리상담가의 최면에 걸린 할의 눈에 겉모습 대신 내면의 아름다움만 비치게 된 탓일 뿐 실제로 할이 미녀라고 보는 여성들은 모두 착하긴 해도 한결같이 얼굴이 못 생겼거나 비만증 환자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채 할은 마침내 평화봉사단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마음씨 착하고 ‘쭉쭉 빵빵’한 금발 미녀 로즈마리(기네스 팰트로)를 만나 연인이 된다.
물론 로즈마리는 실제로는 더블 피자 버거에 치즈를 듬뿍 얹은 감자를 단숨에 먹어치우는 엄청난 ‘뚱보’ 할은 로즈마리와 사랑에 빠지며 로즈마리의 아버지인 회사 보스의 후광마저 등에 업고 일에서도 승승장구 하게 된다. 그러나 친구 마리오가 할을 정신차리게 해 주겠다며 심리상담가를 찾아가 최면술을 푸는 키워드를 듣고 할에게 말해주게 되는데....

원제 'Shallow Hal’ (천박한 할) 은 영화를 잘 함축하고 있을 뿐더러 최면술사의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내용은 보다시피 현대 남성들의 풍속도를 적나라하게 풍자하고 있는 코미디 물입니다.

영화는 주로 할의 상상과 현실과의 거리감을 통해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할이 기네스 팰트로의 모습으로 보는 로즈마리가 화면이 바뀌면 엄청난 뚱보로 나오는 식의 개그들이 많죠.

전체적으로 그냥저냥 아무 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라 생각되었는데 후반부에서는 나름대로 감동도 줍니다. 특히나 화상병동 장면이나 마지막 고백장면 같은것은 좋았습니다. 일반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보단 좀 과한 웃음이긴 하지만 꽤 즐겁고 따뜻하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