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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3

세인트 세이야: 더 비기닝 (Knights of the Zodiac) (2023) - 토마스 바진스키 : 별점 1점

"세인트 세이야"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 원작의 오랜 팬으로, 옛 추억을 되살리고자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장점이라면 주인공 세이야 역을 맡은 아라마 맛켄유의 비쥬얼, 그리고 일부 액션 장면입니다. '성투사'의 싸움답게 맨몸 액션이 펼쳐지는데, 세이야가 각성한 뒤 카시오스를 포함한 구라드의 부하들을 인형처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라던가, 성투사 피닉스의 성의 액션, 마이록을 연기한 마크 다카스코스가 선보인 권총과 곤봉을 활용한 액션 등이 그러합니다. 원작 팬이라면 비교적 원작에 가깝게, 하지만 촌스럽지 않게 구현된 마린의 등장은 만족할 만 하고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장점을 제외하면 영화의 완성도는 전반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이야는 마린에게 훈련을 받다가 알먼이 누나 패트리샤를 납치한 일당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훈련을 중단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갑자기 아테나를 데리러 온 구라드를 막기 위해 카시오스 일당과 싸웁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개연성이 없어서, 전개가 엉성하고 난잡합니다. 아테나가 각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구라드는 아테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던 도스카라스가 구라드의 부하에게 한 방에 쓰러져 포로가 되는 장면도 황당했어요. 배우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각본이 별로라면 적어도 볼거리라도 화려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CG 티가 강하게 나는 화면도 조악하고, 앞서 언급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액션 연출도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라마 맛켄유의 액션 연기가 어색해서 많이 거슬렸습니다. 그나마 볼만했던 액션 장면들은 성의를 입은 후에야 등장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주요 액션 장면에서는 대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어야 할 성투사들의 싸움은 맛보기 수준이며 심지어 페가수스 유성권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작 팬들이 가장 기대했을 대표적인 기술이 빠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페가수스와 피닉스 성투사의 클라이맥스 대결 장면은 80년대풍 특촬 영화보다 못한 빔 공격 연출이 반복되면서,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마무리되고 맙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매우 낮습니다. 스케일을 줄이고 원작 초반부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성투사 변신 장면과 성투사들 간의 격투를 좀 더 멋지게 연출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별점은 1점인데, 솔직히 1점을 주기도 아깝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 낭비 하지 마시고, 이 작품은 쳐다도 보시지 말기 바랍니다.

2025/02/22

모즈가 울부짖는 밤 - 오사카 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모즈가 울부짖는 밤 - 6점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 '모즈'는 타겟 가케히를 죽이려다 가케히가 들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에 휘말려 죽은 피해 여성은 경시청 공안부 형사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였다. 담당자였지만 가족이라 사건에서 배제된 구라키는 얻어낸 열흘간의 휴가를 이용해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신가이 가즈히코는 호메이 흥업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 흥업이 계속 그의 목숨을 노리는 와중에, 신가이는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여 결국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가즈히코가 아니라 동생 히로미이자 킬러 '모즈'였다. 

구라키, 모즈, 그리고 형사 오스기 등의 수사와 추적으로 폭탄 테러는 공안부장 무로이 때문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무로이와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는 불륜 관계였고, 방일하는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테러하기 위해 가케히는 무로이를 협박해서 정보와 폭탄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무로이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이 협박에 흥했지만,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해 가케히를 죽이려다 폭발에 말려든게 진상이었다...

오사카 고의 '모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1986년에 출간된 작품이지요.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가가와 데루유키 주연으로 드라마도 제작된 인기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0여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 선정되어 있어서 이전부터 관심이 가던 차에, 늦었지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킬러 신가이 가즈히코와 아내를 잃은 공안 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절벽에서 추락해 기억을 상실한 채 발견된 신가이는 아주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폭탄 테러로 아내를 잃은 구라키 형사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며 사건의 실체를 쫓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굉장히 빠른 전개로 강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지루함 없이 여러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와중에 폭력과 액션도 넘쳐나서 오락적인 요소도 풍부하거든요. 사람도 여럿 죽어나가고요.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히지만, 모두 '복수'가 중심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구라키 형사는 폭탄 테러로 죽은 아내 다마에의 복수를 위해, 신가이(히로미)는 형 가즈히코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흑막이자 원흉인 공안부장 무로이조차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이렇게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건 신선했습니다. 

반전들도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기억을 잃은 신가이 가즈히코가 사실은 쌍둥이 동생 히로미였다는 것입니다. 히로미는 남성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여장을 하고 킬러로 살아왔다는데,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그가 신가이로 오인되는 과정도 합리적인 편이고요.

두 번째 반전은 구라키 형사의 아내 다마에가 사실 폭탄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마에는 공안부장 무로이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였고, 이를 가케히에게 들켜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로이가 폭탄을 가케히에게 주기로 했었습니다. 무로이는 사르도니아 대통령 에체베리아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러나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하여 협박자였던 가케히를 죽이려다 결국 자신까지 말려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구로키와 다마에 사이에 태어났던 딸이 사실은 무로이의 자식이었고,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가 호메이 흥업과 손을 잡은 악당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도 꽤 놀라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전들 모두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구라키 형사의 수사와 신가이(히로미)의 추적, 그리고 흑막인 무로이 부장의 존재까지는 납득할 만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 경시가 독단적으로 극우 폭력단 호메이 흥업을 조종했다던가, 감찰부의 쓰키 경시정이 부하 미키를 이용해 내부 감찰을 벌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과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비중있는 등장은 오히려 서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미키는 정말 불필요해서,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구로키에게 갖게되는 연심도 불필요한 요소였던건 마찬가지고요. 

또한, 이야기 전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호메이 흥업이 애초에 신가이를 살해하려 한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로이 부장 측이 불륜과 테러의 증거 사진이 신가이에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도 불합리하고요. 피해자인 가케히가 설령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가이에게 넘겼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가이(히로미)를 두 번이나 생포하여 사진의 위치를 추궁한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불륜 사진 확보 없이 가케히에게 사진과 폭탄을 전해준 것도 말이 안되지요. 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라는 거대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진을 회수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건 당연하니까요. 

구로키와 신가이 이야기가 교차될 때, 신가이 시점은 신가이가 살아난 다음부터 시작되지만 구로키 시점은 폭탄 테러 직후라서 시계열이 일치하지 않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결말도 아쉬운 점 중 하나입니다. 대단한 증거없이 무로이 부장의 자백으로 마무리되는건 허무하며, 길고 늘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대단원에 이르는건 비현실적이었어요. 하긴, 형이 살해당한 그 장소에서 쌍둥이 동생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발견된다는 기본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강렬한 반전, 그리고 복수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이야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많아요. 무엇보다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킬링 타임용 작품을 찾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격 미스터리 100에 선정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2025/02/21

게임북 전용 e-Ink 게임기

자주 찾는 블로그인 자그니님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기기를 소개하고 있더군요. 게임북을 즐길 수 있는 휴대용 e-Ink 게임기입니다. 
게임북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인기를 끌었던 책입니다. 페이지마다 선택지가 있고, 선택에 따라 페이지를 이동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었지요. 이러한 게임북만을 위한 전용 e-Ink 게임기로 전자책 리더기와 비슷한 형태네요. 화면 크기는 7.5인치에 800*400해상도이고 게임은 SD카드로 별도 판매할 계획인 듯 합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아들에게 책을 읽힐 목적으로 만든걸 사업 모델로 확장한 것이더군요. 아직 양산된건 아니고, 시제품이 준비된 정도고요. 곧(3월 1일)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현 시점까지 게임북이 20개 밖에 준비되지 않은건 문제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플랫폼이 정착되어 누구나 게임북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보다는 일반 모바일 플랫폼 용으로 아이들을 위한 게임북 앱을 만드는게 더 시장성이 있을겁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응원하고 싶습니다. 게임북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 탓도 있지만, 과거 게임북의 단점이었던 한정된 분량(책 한권)을 극복하고, IT 기기에 맞는 재미(인터랙티브한 동작과 사운드 효과 등)으로 재미를 선사해 준다면 어느 정도 반응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거든요. 아이들 영어 교육용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최근 깡통 전자 사전이 다시 뜨는 것처럼 말이지요. 

과연 시장 반응이 어떨지,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되면 눈여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2025/02/19

드디어 밝혀진 잭 더 리퍼의 정체!

‘잭 더 리퍼’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외신 보도(기사는 여기)에 따르면,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숄의 DNA 분석을 통해, 폴란드 출신 이발사 애론 코스민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코스민스키는 1888년 런던에서 발생한 ‘잭 더 리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으나, 증거 부족으로 체포되지 않았고 이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영국의 역사가 러셀 에드워즈가 주도했습니다. 그는 2007년 경매에서 피해자 캐서린 에도우스의 피 묻은 숄을 구매한 뒤, 희생자 및 용의자의 후손들로부터 DNA 샘플을 받아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숄에서 검출된 혈흔과 정액의 DNA가 각각 피해자와 코스민스키의 후손과 일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용된 미토콘드리아 DNA의 신뢰도가 낮고, 조사 역시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아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는군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유력한 용의자였던 만큼, 잭 더 리퍼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인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좋겠네요.

그런데 도무지 이런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다는게 상상이 되지 않는 외모라 놀랐습니다. 하긴, 강호순도 미남이었지요....

2025/02/16

아틀라스 마이오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도책 - 강민지 : 별점 2.5점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아틀라스 마이오르"는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도책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의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결과물로, 단순한 지도책을 넘어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틀라스 마이오르"가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지도책을 단순한 지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인문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깊이 있게 분석한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예술, 인문학 서적이자 문화사, 미시사 서적 이라는 성격도 갖추고 있습니다. 지도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좋은 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무역국이었으며, 높은 문해율과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적과 인쇄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도책은 단순한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식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 도서 지관을 꾸려 장서를 자랑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크기가 크고 값비싼 지도책이 인기를 끌었고, 이는 곧 출판 시장에서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성장했습니다.'는 것이지요.

지도책 본연의 모습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를 중심으로 지도 제작의 발전 과정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텔리우스(상업 지도책의 선구자), 메르카토르(현재도 사용되는 평면 도법의 창시자), 블라외 가문(아틀라스 마이오르 제작 명문 가문), 혼디우스 가문(블라외 가문의 라이벌) 등 지도 제작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과 이들의 대표작을 통해 지도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를 넘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지도 제작과 출판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한 권의 지도책을 탐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지도 제작에 사용된 도판과 인쇄 기술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에 대한 방대한 양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을 묘사한 지도가 포함된건 반가왔고요. 또한, 인쇄 방식과 채색 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데, 컬러 인쇄 기술이 없던 시절 '채색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이 단순한 흑백 인쇄물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기여했으니,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울러 지도책을 단순한 과학적 산물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도 연구 분석하는데, 그 깊이가 대단합니다. 지도 제작에 사용된 물감을 단순히 색채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의 유행과 연결해 설명하며, 지도 속 도상(알레고리) 분석을 통해 지도책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는 식이거든요. 특히 지도에 등장하는 문양과 장식 요소를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시대적 사고와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요소로 분석하는 과정은 지도책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틀라스 마이오르" 외의 불필요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구성은 아쉽습니다. 지도책의 유행 이유나 지도 제작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필수적인 정보지만, 당대 경쟁 지도 제작자의 지도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문화까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건 과했습니다. 특히 60페이지에 걸친 '도상(알레고리)' 설명은 지나쳤습니다. 지도책에 문양이 들어갔다고 해서, 문양의 구성 요소와 의미, 디자인 규칙까지 세세하게 독자가 이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도판도 풍성하지만,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다소 작은 도판이 많은건 단점입니다. 주요한 도판은 접어 넣는 방식으로라도 보다 크게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자의 가벼운 문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최신 트렌드를 인용한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책의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느 정도는 교열 과정에서 조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도책을 다룬 미시사,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결과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허나 지도책을 벗어난 이야기도 많기에 감점합니다. 

2025/02/15

A하라 죽이기 - 도미나가 미도 / 김진환 : 별점 2점

A하라 죽이기 - 4점
도미나가 미도 지음, 김진환 옮김/라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능한 웨딩플래너 미노 탓에 결혼식이 엉망이 되어 버린 슈헤이, 시에리 부부는 하르모니아 호텔 예식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예식부는 사건을 수습하려고 미노의 잘못을 다른 플래너 아이하라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나 이는 인플루언서 시에리와 그녀의 친구 키미에의 SNS를 통한 비난을 불러왔고, 아이하라에 대한 악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아이하라는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지만 회사는 아이하라를 전혀 지켜주지 않았고, 아이하라는 친구와 지인, 그리고 변호사 쿠인의 도움으로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일본 최대 라이트노벨상 ‘인터넷소설대상(제9회)’수상작이라고 해서 읽게 된 작품. 온라인 범죄 관련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정물 성격이 약간 있지만 평범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SNS, 온라인에서 '#A하라를용서할수없다'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아이하라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고립되는 과정 묘사는 볼 만 합니다. 회사는 결혼식을 망친 원흉인 미노를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보호하면서, 오히려 아이하라를 공범으로 몰아가며 비난의 화살을 그에게 돌리거든요. SNS에서 아이하라를 향한 비난이 거세지자, 회사는 그를 방패막이로 삼아 책임을 떠넘기고 전혀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경찰의 지시와 아이하라의 도움 요청도 무시하고요. 결국 아이하라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며 아이하라는 아무 죄도 없다는게 잘 설명되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이하라가 쿠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진행하는 법적 조치도 볼 만 했습니다. 회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서 필요한 자료, 고용 문제 및 진단서 등에 대한 설정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고, 300만엔이라는 청구 금액도 이치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디지털 마녀사냥의 폐해를 다룬 다른 기존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시각이나 새로운 접근이 없는 탓입니다. 아이하라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에게 사과를 받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무난했고요.

무엇보다도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법정 다툼이 시작되기 직전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인 미노와 회사로부터는 어떠한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욱 철저한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최소한 발암 물질 미노는 철저하게 응징받았어야 했습니다.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 역시 단순 사과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SNS 마녀사냥과 회사의 부조리한 대응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은 인상적이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이 크지 않고,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워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추리'와 관련된 장르 문학이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기도 했고요. 특별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2/14

단다단 시즌 1 (2024) - 야마시로 후가 : 별점 3점

최근 가장 핫한 작품 중 하나지요.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원작의 매력을 충실하게 살리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원작의 화려한 작화를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맞게 안정적으로 구현했으며, 원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화끈한 액션이 아주 훌륭합니다. 오카룬이 터보 할매에 빙의한 후 펼치는 질주 액션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플래시'같은 기존의 스피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과 차별화된 연출을 보여주거든요. 단순하게 직선적인 속도감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과장되면서도 왜곡된 구도와 함께 과감한 색채를 활용해 강렬한 비주얼로 실감나는 고속 질주를 선사합니다.

또한 원작의 감동을 더욱 끌어올린 연출도 돋보입니다. ‘아크로바틱 찰랑찰랑’과 아이라의 관계를 그린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원작의 감정을 더욱 깊이 전달하며,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강점을 활용해 감동을 극대화했습니다. 움직임과 색감, 조명을 활용한 세심한 연출이 캐릭터들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외에도 오카룬이 모모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슬램덩크' 1기 엔딩인 'あなただけ見つめてる'를 부르는 장면도 애니메이션이라서 즐길 수 있었던 연출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지루해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액션이 거의 없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의 흐름이 처지는 느낌이에요. 초반부의 빠른 전개와 강렬한 액션과 비교했을 때,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루즈합니다.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 설정에 연이은 라이벌 등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 뻔했고요.

무엇보다도, 1기의 결말이 하나의 주요 사건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간에서 끝나는 느낌을 준건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연재물의 '다음 편에 계속' 방식을 이렇게 써먹는건 과하다 싶네요. 연재물은 최소한 한 달 뒤에는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1기 완결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어서 리뷰도 늦어졌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화려한 작화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돋보이며, 원작 팬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보여주니까요. 단순한 이야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작품도 사실 아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으셨다면, 한 번 챙겨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2/09

중증외상센터 (2025) - 이도윤 : 별점 2.5점

최근 가장 핫한 드라마지요. 지인 추천을 받아 주말에 감상했습니다. 평이 좋은 이유는 알겠더군요. 장점이 확실히 많더라고요.

우선, 8회라는 짧은 분량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늘어지는 부분 없이 속도감 있는 전개로 지루함 없이 몰입할 수 있습니다. 한국 의학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신파도 없고, 심지어 러브 라인도 없을 정도입니다. 한 과장, 기조 실장, 원장 등 차례로 등장하는 빌런과의 대립과 해결도 완벽합니다.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백강혁 교수의 과거를 원장의 개심을 위한 복선으로 써 먹는 등 전개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백강혁 교수의 뛰어난 실력을 단순히 수술을 잘하는 것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수 딸 심장 수술 중 수술 장갑을 이용해 심장의 구멍을 덮는 방식, 남수단에서 총상 환자의 팔을 절단하지 않고 괴사한 뼈만 절제하는 방식처럼 창의적인 해결 방법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 점도 인상적입니다. 

캐릭터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노력형 주인공이 천재에게 감화를 받아 성장한다는 전형적인  일본 소년 만화 구성이기는 한데, 이를 의학 드라마에 효과적으로 접목했어요. 캐스팅도 찰떡이었고요.

그러나 내용도 일본 소년 만화스럽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백강혁 교수가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인 탓에 슈퍼 히어로물에 가깝거든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갈등도 긴박하게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백강혁 교수가 결국은 수술을 성공하는게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분량은 캐릭터들의 서사, 관계를 깊이 있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백강혁 교수가 의사가 된 이유 정도만 등장할 뿐이지요. 

그래도 재미있다는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

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

2025/02/02

방어구의 역사 - 다카하라 나루미 / 남지연 : 별점 2.5점

방어구의 역사 - 6점
다카히라 나루미 지음, 남지연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Trivia Book 58번째 책. 제목처럼 '방어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어구의 시작부터 통사적으로 정리하여 모두 105개 항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페이지는 설명, 한 페이지는 도해로 이루어진 구성은 다른 시리즈들과 마찬가지고요.

통사적으로 방패와 갑옷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고, 왜 이렇게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초창기에는 방패와 갑옷이 고르게 발달했지만, 크로스보우와 장궁 같은 무기가 도입되면서 전신 판금 갑옷이 도입되었고, 이 탓에 방패는 사라지고 양손으로 힘을 주어 타격하는 무기가 나타나는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거든요. 일본과 중국, 인도와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갑주까지 보여주는 등 다루고 있는 범위도 넓고요.

각종 방패와 갑옷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도 좋았습니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핵심 용어는 '스케일 아머'와 '라멜라'입니다. 스케일 아머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수의 물고기 비늘 모양 조각을 천이나 가죽 등 안감에 꿰매 붙여 형성한 방어구입니다. 라멜라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고대부터 존재했던 갑옷으로 스케일과 동일하게 비늘 조각이나 가죽, 금속 재질의 사각형 소찰로 이루어져 있으나, 안감은 없습니다. 조각과 소찰들을 엮어서 만든 갑옷이지요. 스케일이 보다 더 원시적이고 옷처럼 유연성이 있는 반면, 라멜라의 몸통 부분은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단단합니다. 라멜라가 스케일보다 제작에 손이 많이 가는 고급품이고요.

플레이트 아머의 가격에 대한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잔 다르크(1412~1431년)를 위해 급조된 이탈리아제 갑옷은 100리브르로서, 금화 백 닢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의 금화 한 닢은 120만 원으로 환산할 수 있으므로, 잔 다르크의 갑옷은 1억 2,000만 원인 셈이지요. 다만 영웅을 위한 특제품, 게다가 특별히 서둘러서 만들었기 때문에 예외적이고, 그보다 50년 전의 기록에 나오는 판금 갑옷은 25리브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는 약 3,000만 원입니다. 자동차 한 대 값 정도인데, 기사 전용 장비로 상위 계급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네요.

당대 세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갑옷 설명도 흥미로웠습니다. '보인갑'은 중국의 보병용 중장 갑옷의 총칭으로 10세기 송나라의 보인갑은 철제 갑엽을 엮은 라멜라였습니다. 금나라의 중장기병에 맞서는 송나라 중장 보병대를 위한 장비로, 최전선용 보인갑은 갑찰 1825장으로 전신을 감싸서 무게가 35kg이나 나갔습니다. 양산 체제도 갖춰져서, 직인 한 사람이 만들면 보인갑 한 벌을 완성하는 데 70~140일이 걸렸지만, 실제로는 분업화되어 이틀에 한 벌씩 생산이 가능했다네요. 당대 최고 장비 중 하나를 이 정도 속도로 생산했다는건 송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외에도 무기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바이저를 올려 상대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동작이 기사의 인사 = 군대의 경례의 기원이 되었다는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일본 갑주의 비중이 높다는 건 아쉬웠습니다. 일본 갑주에 대한 통사적 설명까지는 볼 만 했고, 아래처럼 "세인트 세이야"의 성궤 상자는 일본 갑주를 담는 상자의 형태와 비슷했다는 등의 정보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갑주 제작 공정 중에는 갑옷의 강도를 확인하는 시험도 흔히 이루어졌고, 오요로이가 주류이던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를 '다메시요로이'라 부르며, 후세다케노유미라는 강력한 복합궁을 쏘아 시험했는데 16~17세기에는 화승총으로 도세이구소쿠를 쏘는 '다메시구소쿠'로 변화했다는 등의 정보는 과하다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설명할 내용은 아니었다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도판도 나쁘지 않으나, 한 페이지로는 내용에 소개되는 모든 도판을 담지 못한다는 단점이 큽니다. 아래 난반도구소쿠는 뭔지 보여주지도 않더군요. 

도판 크기도 작습니다. 오래전에 구입했던 DK 무기 백과사전을 일부 참조하며 읽었는데, 이 정도 사이즈는 되어야 명확하게 세부까지 확인이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제목이 주는 기대에는 충분히 값하고, 재미도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런 류의 서적과 정보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2/01

스토브리그 (2019~2020) - 정동윤 : 별점 2점

SBS에서 2019 ~ 2020년 총 16화로 방영했던 드라마. 호평은 익히 들어왔었지만 본방 때 놓쳤었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길래 설 연휴 기간 동안 감상하였습니다.

야구를 좋아해서 그간 많은 스포츠 소재 영상물을 보아 왔었지만, '단장'을 주인공으로, 실제 리그 개막 후가 아닌 개막 전 '스토브 리그' 기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은 "머니 볼" 이후 처음입니다. 이런 작품이 국내 제작 방영되었다는게, 그리고 심지어 시청률도 좋았다는게 놀라왔어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 인기를 끌 만 하더군요. 드라마적인 재미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특히 초반부 임동규, 중반부 고세혁이라는 중간 보스를 거쳐 후반부 권경민으로 이루어지는 빌런들과의 대결이 흥미롭습니다. 세 명의 캐릭터가 잘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아는 슈퍼스타 임동규, 스카우트 과정에서 비리를 저질렀으며 이 때문에 해고된 고세혁이 백승수에게 앙심을 품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가져다 줍니다. 무엇보다도 구단주 대행이자 사장이 되는 권경민이 정말 최고입니다. 재벌 조카지만 본인 가족은 무능하다는 컴플렉스, 이 탓에 재송 그룹 안에서 기를 제대로 펴지 못하지만 백승수한테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안 좋은 쪽으로 열의를 불태우는 복잡한 인물을 정말 잘 그려낸 덕분이에요. 이는 찰진 대사들, 그리고 배우 오정세의 찰떡같은 연기도 한 몫 단단히 해 주고 있고요.

또 전개 과정에서 주축 선수의 병역 기피, 약물, 승부 조작, 이면 계약에 원정 도박까지, 음주 운전을 제외하고는 실제 프로 야구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요소요소에 삽입하여 재미를 더해줍니다.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트레이드를 비롯하여 외국인 선수 영입, 연봉 협상, 신인 지명, 2차 드래프트, 자율 훈련 관련 이슈 등 야구 팬으로서도 즐길거리가 많았고요. 한국 드라마의 병폐라 할 수 있는 러브 라인, 신파도 없어서 마음에 드네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후반부의 비현실적이고 억지스러운 전개가 많아지는게 대표적입니다. 각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드라마적인 재미와 극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둔 무리수도 눈에 거슬립니다. 30대로 보이는 여성 운영팀장과 재벌 가문 3세 직원이라는 설정처럼요. 외국인 선수를 찾으러 간 출장에서 고용했던 현지 코디네이터가 알고보니 메이저리그에서도 뛰었던 유명 선수였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칭 스태프를 비롯하여 구단 내 직원들도 대부분 꼴찌 의식에 젖어 설렁설렁 일하는데, 이 역시 과장이 심했습니다. 팀 성적은 코칭 스태프, 조금 넓게 보면 운영팀과 전력 분석팀까지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홍보와 마케팅 팀은 자기 일을 해야죠. 

야구적으로 바라보아도 허술합니다. 특히 감독 및 코치진의 유임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비용 문제라는 언급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4연속 꼴찌를 한 데다가 신인 육성 및 팀 장악에도 실패한 감독을 3년이나 재계약을 준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덕아웃에서 서로 싸우는 추태를 부린 수석 코치와 투수 코치들도 마찬가지에요. 바로 경질을 못했더라도, 2군으로 내리는게 당연했습니다. 사람이 좋아서였다면 그런 캐릭터를 확고히 했어야 하는데, 후반에 감독이 백승수 단장의 뒷통수를 치는 말도 안되는 트레이드에 동의하면서 캐릭터를 망치고 맙니다.

4년 연속 꼴찌팀이 20승 투수 한 명 영입했다고 우승 경쟁을 한다던가(심지어 주축 타자가 반 시즌을 날렸는데도 불구하고), 과도한 스카우터의 현장 개입, 에이전트를 배제한 선수 계약, 트레이닝 파트와 배팅볼 투수, 심지어 불펜 포수가 성적 향상에 핵심 요소로 묘사(중요하다는걸 부인하지는 않지만, 과했습니다)되는 등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래도 인기를 끌만한 재미는 있었기에 만족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