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오후 4시, 로버트 블레어는 이제 그만 퇴근할까 생각 중이었다.
40줄에 접어든 독신 변호사 로버트 블레어는 어느 날 퇴근 직전에 사건 의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는 매리언 샤프였다. 의뢰 내용은 샤프 모녀가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유괴당했다고 주장하는 소녀 베티 케인의 디테일한 증언 때문이었는데...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인 18세기 엘리자베스 캐닝 유괴 사건을 현대물로 재창조한 독특한 픽션입니다(현대물이라고 해도 작품이 쓰여진 1948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요.). 이런 저런 리스트에서 고전 걸작으로 선정되었던 유명한 작품으로, 장르와 성격은 다르지만 실제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진리는 시간의 딸"과 비슷합니다.
이런 저런 리스트에 선정될만큼의 재미는 확실히 갖추고 있습니다. 추리물, 법정물로서의 가치는 낮을지라도, 중요한 증언(첫 진술의 허점, 베티의 유혹에 대한 증언, 파트타임 도우미의 위증)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과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은 충분한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 보기 드문 짜증나는(!) 영국인 심리 묘사와 캐릭터 설정, 재치 있으면서도 지적인 영국식 대사, 자존심 강한 영국 신사 스타일의 해피엔딩 등, 고전 영국 본격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길 거리가 한가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눈 색깔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독특한 (짙은 청색 눈: 성적으로 문란 (매리언 샤프), 연푸른색 눈: 말주변 좋은 거짓말쟁이 (핼럼 경위)) 설정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아, 이 얼마나 영국적인가요!
그러나 비록 억지스러운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팩션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진리는 시간의 딸"에 비하면, 이 작품의 추리적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이유는 유괴 사건의 핵심인 베티 케인의 주장이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관만 슬쩍 본 저택 내부의 배치나 가방에 대한 증언이 너무 상세하고 정확해서, 단순히 때려맞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원래 사건에서도 증언이 핵심 요소였고, 작중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베티 케인의 카메라 같은 기억력, 당시 영국 저택들의 유사한 구조, 가구, 장비 등)으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자를 설득하기에는 많이 부족해요. 사건이 뉴스화된 이후에는 채드윅이나 그의 부인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물론 불륜이기에 드러낼 수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작중 설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그녀의 증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고, 초반 몇 발자국만 운이 좋았을 뿐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게 과연 사건성이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인인 코펜하겐의 호텔 주인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극적이기는 하나, 결국 운과 우연이 겹친 결과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웠습니다. 이런 전개 때문에 추리적인 서사는 보잘것없고, 법정 드라마적인 요소만 살아 있는 묘한 구성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영국식 관용어구의 사용이 지나쳐 "버터를 입에 물어도 녹지 않는다"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다소 과한 느낌이었습니다. 찾아보니 "순진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풀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번역자가 영국적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 한 의도였겠죠.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단점이 명확하지만, 실제 있었던 미해결 사건을 토대로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하여 창작한 픽션이라는 점과,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만큼은 뛰어납니다.
저와 같은 고전 영국 본격 미스터리 팬들이나, 조셉린 테이, 프랜시스 아일즈,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