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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3

다섯 마리 아기 돼지 - 애거스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2.5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포와로를 찾아온 미모의 여성 칼라. 그녀는 16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의뢰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여사님 장편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10"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에디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디언지 선정 베스트에도 포함되어 있고, 판매량에서도 10위 안에 드는 작품이더군요. 여태 읽어보지 않은 미숙함을 탓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섯 마리 아기 돼지라는 마더 구즈 동요를 작품에 깊이 개입시켜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주요 증인 다섯 명을 동요 속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캐릭터를 일체화시켜서요. 시장에 간 돼지는 돈을 밝히는 속물 필립 블레이크, 집에 머무른 돼지는 소심하고 영향력없는 메러디스 블레이크, 로스트비프를 먹은 돼지는 천박하고 화려한 레이디 디티셤(엘사 그리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돼지는 검소하지만 날카로운 세실리아 윌리엄스, "꿀꿀꿀" 운 돼지는 말괄량이 안젤라 워런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 솜씨가 일품이며, 덕분에 작품이 적절한 분량으로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장편이 흔하디 흔한데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작품을 단 350페이지 내로 마무리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긴 장편들 대부분이 상세한 배경 설명과 묘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데 반해, 마더 구즈 동요를 활용하여 짧고 효과적으로 캐릭터를 구체화시킨건 역시나 거장다와요. 트릭이 중심인 고전 황금기 걸작은 아무래도 트릭을 제외하고는 조금 얄팍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요.

추리적으로도 고전 황금기 작품답습니다. 16년 전 벌어졌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설정 탓에 포와로가 변호사와 경찰 등 사건 관계자는 물론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섯 명을 찾아다니면서 증언을 듣는 등 발로 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락의자 탐정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독자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받는 덕분에 포와로와 공정한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지요. 당연히 저는 포와로에게 또 패배했습니다만... 고전 황금기 작품의 최대 매력인 두뇌 싸움은 항상 즐거운 법입니다. 진상과 동기 모두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요.

또 각자의 증언이 미묘하게 다르고, 여기서 진상을 찾아낸다는 설정과 전개를 가진 많은 유사 작품들  - 대표적으로 "라쇼몽" - 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일관된 방향으로 증인들이 증언하고 있고 딱 한 명만 거짓을 말한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이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열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진상을 모두 설명하고 마무리 짓는 결말은 좀 당황스럽더군요. 너무 급작스러웠어요. 진상은 알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캐롤라인이 안젤라가 범인이라고 오해했다 하더라도, 엘사 그리어가 그림만 완성되면 내쫓길 것이라는걸 왜 변호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요? 증인이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전략입니다. 짐을 싸서 내쫓을 것이라는 말은 블레이크 형제가 듣기도 했고요. 어차피 손해볼 건 없었는데 말이죠. 경찰 수사를 통해서도 엘사 그리어가 진범임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아끼는 동생은 물론 다섯 살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가 고아가 될 수도 있는데 쓸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써 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납득이 잘 되지 않네요.

또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마더 구즈 동요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좋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친숙하지가 않다보니 잘 와 닿지 않기는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사실 이 책이 700번째 추리소설 리뷰 글입니다. 그래도 나름 기념할만한 리뷰 도서인데 여사님 작품 정도는 읽어 줘야 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고르기도 했습니다. 별 네개 이상의 걸작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요. 허나 제가 납득되지 않는 모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018/02/04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시모쓰키 아오이 / 김은모 : 별점 4.5점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10점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겨레출판

오랜 경력의 평론가가 "왜 크리스티의 작품이 인기가 있고 재미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작품이 발표된 순서대로 전부 읽어본 후 평을 기록한 평론집이자 리뷰집입니다.

리뷰의 수준은 최상급입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작품의 핵심을 콕 집어 지적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추리 소설 리뷰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정도예요.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은 '불순물 하나 없는 본격 추리 소설의 원형'이고, "엔드하우스의 비극"'고명에 의존하지 않고 면발과 국물의 감칠맛으로만 승부하는 우동같은 작품'이라는 식입니다.
좋은 작품은 정말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전문가답게 유사하거나 참고해야 할 다른 작품들도 함께 언급, 소개하는 부분들도 눈여겨볼 만 합니다. 트릭면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비뚤어진 집", "구름 속의 죽음" 정도는 저도 알고 있던 것이지만, "골프장 살인 사건" 이 10년 뒤 발표된 역사적 명작과 같은 장치를 사용했다, "블랙커피" 속 장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 2" 속 장치와 일맥상통한다, "맥긴티 부인의 죽음" 은 하드보일드 성향이라 우수하다는 등의 정보들은 정말 그 깊이와 수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쓰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리뷰가 작품이 발표된 연대별로 이어지는 덕분에 여사님의 발전, 작법의 진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연대기적 구성을 갖추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여사님 특유의 섬세한 인간관계 묘사가 정교하게 쌓아 올려지고, 트릭보다 인간관계와 동기 등 다양한 요소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늘어나는 과정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여사님이 얼마나 많은 작품 스타일에 도전했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정통 추리에서 시작해서 모험물, 신본격 스타일 서술 트릭, 스릴러, 법정극, 하드보일드, 오컬트 심령 괴기물, 심지어 코즈믹 호러(!) 까지 장르 문학의 거의 전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니까요. 왜 거장인지를 리뷰를 읽으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매우 낡아빠진 오래전 고전 작가 같지만 그렇지 않다며 "세번째 여인" 의 경우 1966년 발표된 작품으로 곧 '레드 제펠린' 이 결성될 시점이라고 지적하는 장면에서는 시대가 확 와 닿아서 놀랐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읽은 여사님 작품에서 '스푸트니크' 호가 언급되는 장면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지요. 참고로 이 작품은 당시 미국 최첨단 추리 소설에 도전한 작품이라고 저자는 소개하는데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무모한 도전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낸 증거라나요?

이렇게 리뷰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리뷰를 통해 작가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게 책의 핵심일 뿐 아니라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당연히 '걸작'이기 때문인데, 걸작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지적하지요. 여사님의 걸작들은 요약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서 제대로 소개되지 못 한게 원인이고요.
즉 작품 전체가 트릭이자, 복선이자, 단서이자, 미스디렉션으로 소설 전체가 속이기 위해 짜여진 플랫폼일 뿐 아니라, 여사님은 트릭에 능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는 본격물에 비하면 그 장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다는 게 최종 결론인데, 여사님 작품에 대한 저자의 리뷰들을 읽어보면 이 의견에 동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리뷰를 통해 여사님의 특징적인 작법을 눈치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특유의 스타일은 그녀가 일종의 "연극"처럼 상황을 다룬 것이 비결로, 여사님 작품은 그림이나 동영상, 연극처럼 독자나 관객이 어디를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다의적" 이야기를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해 내는지가 중심이라는 건데 아주 타당해 보였습니다. 제가 읽었던 여사님 작품을 몇 편 떠올려 봐도 저자의 말대로 "여사님 머릿속에 상영되는 연극을 종이 위에 옮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라는 것, 즉 보이는 것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겉보기를 만든 후, 겉보기와는 다른 진실에 그 이상의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방법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가장 좋은 예는 여행지라는 무대와 신원을 위장한다는 설정인데 정말 그럴싸 하지요? 연극과 같은 상황을 접목하기 좋은건 당연히 일상과 분리된 장소일테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장하는게 보다 손 쉬운 건 당연하니까요. 아울러 여사님은 독자가 어떤 때 어떤 인물을 의심하고 어떤 때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는지를 완벽하게 꿰고 있었던 덕분에 독자를 속이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흉내내기 어려운 솜씨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저자 스스로 모든 작품의 별점을 매기고 평가한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물론 평론, 리뷰 및 평가는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결과물이기에 모든 사람이 만족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별점이 높게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걸작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이 많이 부여되고 있어서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제법 많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 별로였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다섯 마리 아기 돼지" 나 "끝없는 밤" 을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은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 권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로맨스 소설'로 알고 있는 매리 웨스트매콧 명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의아했던 점이에요. 제가 보았을 때에는 정교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의 다의성' 이라는 항목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슬픈 사이프러스" 등 몇몇 작품은 국내 번역명과 동떨어진 일본식 제목으로 소개되거나, 포와로와 마플 및 기타 장편 외 몇몇 작품들에 대한 국내 출간 여부가 체크되지 않은 점은 옥의 티입니다. 출판사의 배려가 아쉽네요.

그래도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잘 쓰인 추리소설 리뷰 집으로 완벽에 가까운 책입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에요.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뛰어가서 사 오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사님같은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야, 이런 리뷰라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전체 베스트 10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 많은데 서둘러, 시간 나는 대로 읽어봐야겠네요.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그 외 개인적으로 "장례식을 마치고", "할로 저택의 비극", "맥긴티 부인의 죽음", "카리브해의 미스터리", "서재의 시체" 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이것만 해도 올해 여름까지는 충분하겠지요?

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렸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지병인 고혈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분입니다.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요.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또 미스 마플의 은밀한 탐정 활동도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입니다.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든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세 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은 설득력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는 컸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 모양새입니다.

2015/06/23

추리소설 700번째 리뷰 등록!

추리소설 600번째 리뷰 등록!

2003년 첫 리뷰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서부터 시작한 추리소설 리뷰가 2015년 6월 23일 오늘 "다섯 마리 아기 돼지"로 700번째가 되었습니다. 600번째 리뷰였던 2013년 7월 13일 "점과 선"으로부터는 약 23개월 (10일), 한달에 4~5권 정도 읽는 페이스라는 것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블로그 제목대로 1,000권 읽기까지는 70개월, 6년 정도 남았군요.

어쨌거나 700권째 리뷰를 쓰는 동안 누추하고 마이너한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시길.

아울러 그림은 예전 EST님이 보내주셨던 "블로그 6주년 축전"을 이용한 것인데 EST님께 특히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17/05/28

추리소설 800번째 리뷰 등록

추리소설 700번째 리뷰 등록!

2003년 첫 리뷰 "구석의 노인 사건집" 에서부터 시작한 추리소설 리뷰가 2017년 5월 28일 오늘 "허즈번드 시크릿"으로 800번째가 되었습니다. 700번째 리뷰였던 2015년 6월 23일의 "다섯 마리 아기 돼지"로부터 23개월째네요. 한 달에 4~5권 정도 읽는 페이스라는건 이전과 같습니다. 이 정도로 규칙적이라면 거의 칸트 선생님 급인듯? 하여튼, 이 페이스대로 1,000권 읽으려면 46개월, 앞으로 4년 정도 걸리겠네요.

800권째 추리소설 리뷰를 쓰는 동안 누추하고 마이너한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그림은 예전 EST님이 보내주셨던 "블로그 6주년 축전"을 이용한 것인데 EST님께 특히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18/09/23

죽이는 화학 - 캐스린 하쿠프 / 이은영 : 별점 3점

죽이는 화학 - 6점
캐스린 하쿠프 지음, 이은영 옮김/생각의힘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열네 종의 독약 - 비소, 벨라도나, 청산가리, 디기탈리스, 에세린, 독미나리, 바꽃, 니코틴, 아편, 인, 리신, 스트리크닌, 탈륨, 베로날 - 에 대해 각각 약 30여 페이지의 분량으로 역사와 효과, 실제 사례 및 검사 방법과 같은 정보를 여사님 작품 중 해당 독약이 등장한 대표작의 줄거리와 함께 설명해주는 병리학, 약학 서적이자 추리 소설 안내서입니다.

책은 여사님이 1차 세계 대전 중 지역 병원에서 조제사로 일하기 위해 자격 시험까지 치뤘던 나름 독약 전문가라는 설명에서 시작합니다. 덕분에 등장하는 독약의 작용 사례에 대한 묘사는 약학 학술지에서 칭찬 받았을 정도로 정확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 덕분에 이런 책까지 나올 수 있었겠지요.

소개되는 독약의 역사, 효과, 사례 모두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례 부분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유명 사건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폴레옹 비소 독살설입니다. 당시 유행했던 비소 염색 벽지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줍니다. 비소 벽지의 독소는 실제로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지 못한 건강 상태에 기여했고, 의사들이 이를 치료하기 위해 더 많은 중독성 화합물을 주입한게 죽음의 원인이라는 추리도 꽤나 그럴싸 했어요.
라스푸틴이 시안화물 중독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가설 검증 부분도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라스푸틴이 알코올성 위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위산이 적어서 시안화칼륨이 치명적인 시안화수소로 변환되는 양이 적었으리라는 추리는 신기했어요. 

이러한 유명인 사례 외에도 수록된 사례는 많습니다. 디기탈리스 설명에서는 1863년 처음으로 피해자에게서 디기탈리스가 검출된 사건 사례부터 설명해 줄 정도로 충실하기도 하고요. 이 사례에서 피해자의 토사물이 묻었을 침실 바닥을 대패질 해 올 정도로 끈질겼던 경찰의 수사 의지도 인상적입니다.
실제 여사님 작품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사례도 등장합니다.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대표적입니다. 1935년 일어났던 워딩엄 간호사가 저지른 모르핀 독살 사건이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는데, 설정을 보면 꽤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그 외에도 에세린이 함유된 콩이 자생되던 서아프리카 칼라바르(그래서 칼라바르 콩이라 불리움)에서 용의자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이 콩이 혼합된 음료를 마시게 한 다음 결정했다는 옛날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콩을 씹어 삼키려 했고, 죄가 없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확신 하에 재빨리 삼켰을텐데 천천히 먹을 수록 독약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신체가 독약을 흡수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일종의 심리적 근거가 있는 재판 방식이라는게 굉장히 새로왔어요. 

해독제에 대한 소개도 충실한데 그 중 비소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숯"을 삼킨다는 내용은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독약을 흡수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니 사무실 숯도 치우지 말고 그냥 두어야 할듯요.

또 이미 읽었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죽음과의 약속", "비뚤어진 집",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삼나무 관 (슬픈 사이프러스)", "부부 탐정" 등) 여사님 작품과 병행되어 설명되는 구성도 흥미를 자극합니다. 대표작과 독약을 결부시키기 위해 여사님 전 작품을 분석하여, 해당 독약이 쓰인 작품이 무엇인 선정한 것도 책을 참 정성들여 썼구나 싶었고요. 제일 처음 소개되는 비소 항목 첫 문단에서 "실제로는 네 편의 소설과 두 편의 단편에서 오직 일곱 명의 등장인물만이 이 악명높은 독약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알려줄 정도입니다. 참고로 비소만큼이나 유명한 청산가리는 "10편의 장편과 4편의 단편에 등장하여 17명을 해치웠다" 고 합니다. 
도로시 세이어스 여사님의 맹독은 비소였는데,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여사님 작품 속 최고 킬러는 청산가리라는 사실도 재미있네요. 

이렇게 독약과 내용을 결부시켜 설명하면서도 작품 속 주요 스포일러에 대해 잘 감추는 솜씨도 빼어납니다. '탈륨' 에 대해 설명하는 "창백한 말" 에 대한 설명 외에는 흥미만 자극할 뿐 핵심 내용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정말로 책을 읽고 싶게 만들거든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가 가득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만 놓고 보면 4점도 아깝지 않지만 독약의 성분과 체내 작용 과정 설명을 위한 복잡한 화학적, 생리학적 반응에 대한 설명이 조금 지루하고 따분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을 비롯한 추리 소설 애호가, 추리 소설 작가 등 이 쪽 바닥 사람들께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