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6/09/19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 존 피셔 / 이승민 : 별점 1.5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 4점 존 피셔 지음, 이승민 옮김, 존 테니얼 그림/정은문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음식, 요리 관련 항목을 발췌한 후, 해당 요리 레시피를 함께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한 컬럼을 준비하고 있어서 혹 참고가 될까 싶어 읽어보았습니다.

허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구성부터 별로예요. 요리가 등장하는 항목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요리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발췌된 내용은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정말 소설 속 해당 단락을 그대로 실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레시피가 더해졌을 뿐이에요.

레시피나 요리 관련 항목도 별 재미가 없습니다. 제법 그럴싸한 것도 있지만, 소설 속 내용을 멋대로 해석하여 레시피를 억지로 연결시킨게 많은 탓입니다. 먹으면 몸이 작아지는 '나를 마셔요 수프'의 경우, 소설 속 내용에는 조리법을 짐작케 하는 단서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렌지와 레몬 등 각종 과일을 끓인 과일 수프 레시피를 곁들이는 식으로요. 심지어는 요리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에 레시피를 결합시키기까지 합니다. 앨리스가 체셔 고양이를 처음 만난 장면 뒤에 '체셔 고양이 수염'이라는 요리 레시피를 덧붙인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요리가 대중적이고 유명하다면 아예 관련이 없지 않겠지만, 검색해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네요.

물론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놀이라는 '스냅드래곤'의 실체 - 그릇에 브랜디를 채우고 건포도를 넣은 다음 술에 불을 붙이고 불꽃 속에서 건포도를 낚아채 불이 꺼지기 전 입안에 넣는 것 - 등 처음 알게 된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부록으로 수록된 "정신의 식생활"이라는 컬럼도 아주 인상적이고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롭듯,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책을 읽거나 너무 책을 많이 읽으면 마음에 좋지 않다는 시각이 독특했던 덕분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발표 당시 그려진 존 테니얼의 삽화도 고풍스러운 매력이 넘쳐 마음에 들며, 책의 디자인도 예쁜 편이에요.

허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으며, 170페이지 정도 분량에 13,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이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16/09/16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1 - 니토리 고이치 / 이소담 : 별점 2.5점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1 - 6점 니토리 고이치 지음, 이소담 옮김/은행나무

제목 그대로 아사쿠사 변두리의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화과자점 구리마루당의 주인 구리타 진과 수수께끼의 미녀 아오이가 소소한 수수께끼와 갈등을 해결해 나간다는 내용의 일상계 중단편집입니다. 모두 3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일하게 화과자점을 주제로 한 일상계 작품인 "화과자의 안"을 이전에 읽어보았는데 두 작품을 비교해보자면, 이 작품이 추리적 요소는 덜하고 로맨스, 인간 드라마가 더욱 강조되어 있습니다. 특정 영역의 전문가가 등장하는 로맨틱 일상계라는 점에서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히트에 편승한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선입견 탓에 그동안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류인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가 명백한 지뢰였던 탓도 컸고요. 하지만 추석 맞이로 가볍게 집어들고 읽어 본 결과, 의외로 만족했습니다.

물론 "추억의 시간을..."과 마찬가지로 추리적 요소가 많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명확합니다. 과연 이 작품을 일상계 추리물로 부를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러나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었던건 제가 "요리"와 "음식"이라는 분야에도 큰 관심이 있는 덕분입니다. 수록작 세 편 모두 "음식의 맛"이 가장 중요한 소재거든요. 첫 번째 이야기에서 '과거의 맛이 현재에 재현되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이며, 다른 이야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화과자를 싫어하는 친구에게 화과자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 와산본이 무엇인지 등 "화과자"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가서 음식, 요리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면 즐길거리가 제법 많습니다.

또 첫번째 이야기 "마메다이후쿠" 만큼은 부족하더라도 분명한 일상계 추리물이기도 합니다. 브라질로 출국한 후 20년만에 구리마루당을 찾은 다나베의 말 실수를 토대로 숨겨진 진상을 알아낸다는 전개는 그야말로 일상계의 왕도죠. 이에 더해 "곶감 맛 자체는 담백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표현에서 수상함을 느낀 이유가 "주인공이 화과자 전문가"였다는 점에서 작품의 특징과 잘 어울리고요. 하기사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맛의 비결이나 레시피를 찾는 이야기 역시 넓게 보면 추리의 영역이지요.

아울러 만화적이기는 해도 캐릭터의 매력도 상당합니다. 특히 주인공인 구리마루당 3대인 구리타 진이 괜찮았어요. 화과자 가게를 잇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쌓았지만, 반항기에 한창 엇나가다가 부모님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음을 다잡고 가게를 이었다는 설정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이력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에 위화감 없이 녹아듭니다. 어린 시절의 수련과 재능으로 실력은 나름 확실하나 그에 걸맞는 연륜과 경험은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맛의 달인" 지로와 약간 비슷하네요.

컴비로 등장하는 화과자에 정통한 정체불명의 미녀 아오이 역시 설정만큼은 완전 스테레오 타입이지만 지독할 정도로 순진하고 착한 면에 관심 분야에 대한 초인적인 호기심이 부각되어 나름의 매력을 전해줍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 풍경 속 잔잔한 드라마라는 측면에서는 볼만합니다. 단,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록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메다이후쿠"

화과자점 구리마루당에 20년 전 신세를 졌다는 다나베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20년 전 먹었던 마메다이후쿠를 주문했지만, 맛이 다르다고 말했다. 구리마루당 주인 구리타 진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인인 카페 마스터가 소개해 준 아오이라는 수수께끼의 미녀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요리만화에 흔히 나옴직한 "추억의 맛을 찾아드립니다." 스타일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에피소드답게 구리타 진과 그 주변 인물 관계도 상세하게 설명되고요.

수록작 중 거의 유일한 추리물로 "왜 마메다이후쿠의 맛이 다른지?"에 대한 설명(시부키리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다나베의 "곶감"에 대한 말실수를 "곶감"의 정의를 통해 밝혀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괜찮습니다. 망해가는 구리마루당을 살리려는 소꼽친구 유카의 작전이라는 동기도 그럴듯했고요.

다나베가 20년 전 먹었던 마메다이후쿠의 맛과 지금의 맛이 다르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할 정도로 절대 미각의 소유자라는 것은 영 설득력이 없으며, 구리타 진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는 무능한 장인인지 의심스럽다는 약점은 있지만 시리즈의 첫 작품치고는 괜찮았던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라야키"

"이러쿵저러쿵해도 이미지는 실체가 없는 거니까요. 실제 체험에는 절대 못 이겨요.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지고...... 그렇게 실제로 경험하면 이미지는 간단히 바뀌죠. 말하자면 이미지란 불완전한 정보, 즉 선입견이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구리타의 라이벌인 아사바가 대학 축제에 구리타를 초대했다. 구리타는 아사바가 만든 "베이비 카스텔라"의 맛을 인정했지만, 아사바는 화과자를 싫어한다는 말로 구리타를 자극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오이는 아사바에게 화과자 혐오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하는데...

드라마는 별게 없지만 카스테라, 다이나곤 팥과 같은 기본 재료 설명은 물론, 1등 상품인 팥을 구하기 위해 "화과자 퀴즈 대회"에 나가 각종 화과자 관련 상식을 화려하게 펼쳐내는게 특징인 작품입니다.

또 카스테라는 좋아하는 아사바의 화과자 혐오를 고쳐주기 위해, 카스테라 반죽에 팥소를 더하여 도라야키를 만들어 준다는 결말은 깔끔하며 설득력 높습니다. 다툼과 갈등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해결!" 된다는 "맛의 달인" 류의 작품에서는 억지스러운 전개가 가끔 보이기도 하는데, 이 작품 정도면 잘 마무리된 것 같아요. 이게 맛이 없을리가 없을 뿐더러, 맛이라는 것은 작중 아오이의 말 그대로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화과자 관련 이야기로는 최고라 할 수 있겠습니다.

"히가시"

"화과자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고안할 방법은 딱 한 가지. 입으로 말해서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먹여서 알게 해주자고요!"

어린 시절 공부를 가르쳐주곤 했던 동네 누나 고하루를 오랫만에 만난 구리타는 고하루의 집을 누군가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닥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와 엿보기를 당한 날짜를 토대로, 범인은 고하루와 거의 의절상태인 친아버지 기라라는게 드러났다. 구리타는 기라를 찾아가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는데....

수록작 중 가장 처지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부터가 별게 없는 탓입니다. 엿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그가 남긴 과자 부스러기를 조사하는 것보다 잠복해서 잡는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게다가 맛있는 과자를 먹었다고 모든 갈등이 눈녹듯 사라지는 마무리는 솔직히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전개였습니다. "도라야키"에서처럼 설득력 있게 넘어가면 모를까, 갈등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과자를 맛보고 갈등이 해결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북경오리나 프랑스 요리를 먹어도 되는 게 아니었을까요?

구리타 진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넘쳐나는 마무리는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09/15

술친구 밥친구 - 아베 야로 / 장지연 : 별점 2점

술친구 밥친구 - 4점 아베 야로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심야식당" 작가 아베 야로가 쓴 여러 가지 요리와 안주들, 그리고 그가 만났던 좋은 여인들에 대한 에세이집입니다. 

저자 스스로 대단한 미식가도 아니고, 요리 솜씨가 뛰어나지도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리 대단한 음식들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일상적이고 서민적이라서 더 마음에 들더군요. 고향인 토사 - 시만토 강의 별미 요리를 주로 소개해 주는 것도 독특했고요.

대표적인 것이 가다랑어 타타키입니다. 이런저런 요리만화를 통해 제법 알려져 있는 요리죠. "맛의 달인"에서는 완벽한 타타키가 뭔지 정의까지 내린 상태고요. 허나 저자는 가다랑어가 안 보일 정도로 쪽파와 양파, 마늘을 듬뿍 올리고 계절에 따라선 차조기잎이나 양하, 산초잎까지 뿌려주는 게 토사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고명이 너무 많으면 가다랑어 본연의 맛이..." 하는 미식가 티 내는 불평 따위는 무시하라고 합니다. 토사 술꾼은 가다랑어는 다 먹어버리고 양념 배인 고명을 찔끔찔끔 집어먹으며 주구장창 마시고 떠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니까요. 부어라 마셔라 하는 자리에 미식은 사치! 아, 토사의 대범한 풍모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요리 솜씨는 별로 없다지만, 간혹 등장하는 먹거리 레시피들도 인상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먹어보고 싶었던건 저자 스타일의 "하나가츠오"입니다. 하나가츠오는 국물용으로 깎아놓은 가다랑어포인데, 그릇에 하나가츠오를 담고 간장을 부은 뒤, 그 위에 팔팔 끓은 물이나 녹차를 스윽 뿌려줍니다. 그 뒤 숨이 죽은 하나가츠오를 밥 위에 얹고 그릇에 고여 있는 국물을 말아서 먹는다고 하네요. 하나가츠오는 구하기 힘드니, 다시마로라도 한번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심야식당"에서도 등장했던 어묵탕도 소개됩니다. 쇠힘줄과 무와 삶은 달걀만 들어가는 바로 그 어묵탕이요. 우선 쇠힘줄을 500~600g 정도 큼직하게 나눠 썰고 펄펄 끓는 물에 5분 정도 삶은 후, 물로 헹궈 거품과 찌꺼기를 제거합니다. 그리고 큰 냄비에 물을 담고 중간 크기 무 한 개, 삶은 달걀, 쇠힘줄을 넣은 후 끓어오르면 시중에서 파는 어묵탕 가루를 넣어주고 3시간 정도 더 끓이는 게 전부입니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동네 정육점에서 "스지"를 조금 구입해서 바로 도전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 외 이러한 음식과 함께 떠올린 그의 가족과 친구들, 나고 자란 동네의 이야기들도 따뜻하고 정감 넘칩니다. 그야말로 "심야식당" 그대로예요. 그만큼 부드럽고 편안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글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끔 등장하는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술친구 밥친구" 류의 글 이후 이어지는 절반 분량의 "~여인" 시리즈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딱히 관심이 가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 책을 음식 관련 에세이집으로 생각했던 터라 제 기대와 많이 다른 탓도 크고요. "심야식당" 만화에 어울릴 법한, 곁들인 그림도 좋고 나름 드라마가 펼쳐지는 이야기도 많고 재미가 없지도 않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도 애매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왠지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 앞부분의 "술친구 밥친구" 이야기만 조금 더 신경 쓴 그림과 함께 출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심야식당" 관련 에세이집도 이로써 3권째인데, 가면 갈수록 재미가 떨어지는군요. 아쉽지만 이제 그만 읽을 때가 된 듯 합니다.

바이바이, 엔젤 - 가사이 기요시 / 송태욱 : 별점 2.5점

바이바이, 엔젤 - 6점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정의 딸 나디아는 대학 친구인 앙투안의 이모에게 전달된 협박장에 대해 들었다. 협박장을 보낸 이는 앙투안 이모들의 아버지 조제프와 관련이 있는 전 혁명가 이봉 뒤 라브낭이었다. 다음 해 1월, 둘째 이모 오데트가 머리 없는 사체로 발견되었고 경찰은 주요 용의자로 여동생 조제트를 지목했다. 유산과 치정이 이유였다.

주요 참고인 앙드레는 호텔에서 폭사, 조제트와 뒤 루아도 연이어 시체로 발견되며 사건은 오데트의 돈을 노리고 조제트와 뒤 루아가 벌인 범행(앙드레는 꼬투리를 잡고 협박하다가 살해당함)으로 잠정 결론 내려지는데...

가사이 기요시의 데뷔작입니다.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하지요. 'Mystery Best'에서 선정한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도 20위로 올라와 있을 만큼, 이전부터 명성은 많이 들어왔었습니다.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에서도 같은 제목의 이야기를 선보이기도 했었지요. "엔젤"이 환상의 엔젤 피쉬와 한 여성이라는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명성에 비하면 국내 소개는 좀 늦은 편인데 읽어보니 확실히 명성에 값합니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추리적으로 빼어나다는 겁니다. 처음 발견된 사체의 머리가 없는 이유, 호텔 방에서 앙드레가 살해된 사건의 겹겹이 짜여져 있는 교묘하고 거대한 트릭 등 사건에 관련된 추리적 장치들이 모두 상당한 수준입니다.

이를 추리해내는 야부키 가케루의 '현상학 탐정'이라는 별명 역시 허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현상학을 활용한 추리가 돋보입니다.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 '목 절단은 범죄의 은닉을 위한 의지이다. 그러면 범인은 목을 절단해서 누구한테 무엇을 숨기려고 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식으로 사건의 핵심에 맞는 정확한 추리와 단서를 독자에게 연이어 제공하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질직관' - 모든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메커니즘 - 을 강조하는 것도 굉장히 새로왔고요. 독특함은 물론 추리적으로도 완성도 높고 독자에게 공정하기까지 하니 과연 명탐정은 명탐정이구나 싶었어요.

마찬가지로 첫 사체의 머리가 없는 이유에 대한 야부키의 대사를 통해, 추리 매니아들과 추리 소설 속 탐정을 공격하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잠깐 소개해 드리면

"이야기 속에서 상상 속의 명탐정은 머리 없는 시체에서 인간 교체 트릭을 인식할 수 없는, 개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경찰관들을 비웃지만, 사실상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그들 명탐정입니다. 절단된 인간의 머리에는 무한한 의미가 숨어 있고 무한한 기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 이렇게 얼굴이 개인의 판별 수단으로 너무 많이 이용된 결과 기묘한 착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간의 두부에 새겨진 무한하게 다양한 의미 속에서 단지 얼굴의 개인성, 인칭성만이 특권화되어 두부라고 하면 얼굴, 얼굴이라고 하면 개인을 특정하기 위한 기호라는 직접적인 의미 침전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발상을 고집하는 것만큼 무자각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태도도 없습니다. 상상 속의 명탐정들과 나디아의 추리가 공유하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이지 한번 새겨들음직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 역시 정체를 숨기기 위함으로 생각했는데, 정작 진상은 알리바이 공작을 위해 전화를 하기 위해 화장을 하지 않은걸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으로 충분히 독자의 의표를 찌르기 때문입니다.

관계자 앞에서 추리쇼를 펼친 나디아보다 우직하게 수사해 간 모가르 경정의 추리가 더 현실에 부합했다는 점도 의외성 높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앙드레 살해 사건에 쓰인 복잡한 트릭도 볼거리입니다. 정체불명의 사라진 투숙객이 앙드레였으며, 다른 모든 장치는 앙드레가 726호에 투숙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진상은 신선했습니다. 여러 명이 시간과 공간을 조작해 가며 치밀하게 펼친 공작이라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아요. 모가르 경정의 가설 - 626호 남자가 공범으로 726호 열쇠를 바꿔치기 해서 밀실을 만들었다 - 도 그럴듯한 등 즐길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여러모로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도 눈에 띈 점입니다.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범행 동기가 "혁명"과 "조직"이며 무대 역시 프랑스라는 점이 그러하지요. 현상학에 바탕을 둔 야부키 가케루의 추리법 역시 철학 이론을 망라하고 있기에 작가의 전공과 무관하지는 않은 듯 싶네요. 열성적인 좌익 학생 운동가였지만 1972년 "연합적군 사건" 이후 전향하여 프랑스로 건너간 후 혁명과 학살에 대한 평론을 준비했던 작가의 작품다웠습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읽기가 쉽지 않아요. 친숙하지 못한 '현상학'을 들고 나온 탓에 현상학적 분석을 하는 부분들은 대체로 지루합니다. 가케루의 말투도 굉장히 장황한 편이고요. 다른 묘사들도 사실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디아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고요.

그리고 발표 당시에는 먹혔을지 모르나 지금 읽기에는 동기와 진범은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혁명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이 모든 범죄의 배후에는 비밀결사 '붉은 죽음'과 리더 마틸드가 있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러워요. 마틸드의 정체가 뜬금없이 드러나는 것도 당황스러웠고요. 이 정도 조직의 리더라면 경찰 수사에서 뭔가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게다가 질베르, 앙투완에 앙드레까지 주요 인물들 모두 '붉은 죽음' 조직원이라는 것은 확실히 무리수였습니다. 차라리 마틸드가 몸으로 유혹해서 이용한 것이라는 게 더 설득력 높았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은 아닌데, 왜 프랑스가 무대인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지방 유지인 뒤 라브낭가와 라루스가 인물들의 비틀릴 대로 비틀린 가족 관계는 고전 일본 변격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을 뿐더러 딱히 프랑스만의 특징적인 무언가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으니까요. 혁명을 핵심 동기로 다루고 있기는 한데, 앞서 말씀드렸듯 당시 일본에도 적군파라는 강경한 조직이 있었으니 그냥 일본을 무대로 해서 썼다 하더라도 별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약간 작가의 잘난 척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 단점 모두 명확한데 추리적으로는 확실히 괜찮았습니다. 몇몇 단점은 데뷔작이라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추리 소설 애호가분들께서는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빨리 작가 최고 걸작이라는 "썸머 아포칼립스"를 읽어 봐야겠습니다.

명품 가구의 비밀 - 조 스즈키 / 전선영 : 별점 3점

명품 가구의 비밀 - 6점 조 스즈키 지음, 전선영 옮김/디자인하우스

가구 역사상 길이 남을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 조명을 엄선하여 그에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목차는 "전설적 명작의 비밀", "현대 디자인의 비밀", "디자인 신세대의 비밀", "경영자의 비밀"이라는 4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요. 이 중 디자인 회사 경영자 중심인 마지막 챕터를 제외하고, 총 3개 챕터에서 26개의 작품이 연대 순으로 소개됩니다.

20세기 초반부터의 가구 중에서 미적, 역사적 가치를 통틀어 엄선했기 때문에 그냥 보기만 해도 멋질 뿐더러, 작품별로 관련된 일화도 흥미로와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일린 그레이와 르 코르뷔지에에 얽힌 일화입니다. 아일린 그레이는 귀족 출신 여성으로, 독학으로 익힌 건축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와의 친분도 생겼고요.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가 그녀의 집인 E1027의 새하얀 벽에 원색적인 벽화를 그린 후 관계는 틀어지고, 그 뒤부터 르 코르뷔지에는 그녀를 매장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참 어이가 없네요. 아일린 사후에 명예가 회복된건 다행이지만, 르 코르뷔지에를 다시 보게 되었네요. 거장이 전에 인간부터 되어야지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라는 윌리엄 모리스의 말인 "쓸모없는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은 집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좋은 예입니다. 그동안은 부르주아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속물 마인드에서 태어난 말이라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본가에 의해 조악한 품질의 대량 생산품이 보급되는 상황에서 이를 막고자 "미술 공예 운동"을 제창했던, 행동하는 디자이너의 명언이었더라고요.

1925년에 발표된 PH 램프가 로그 나선과 황금비를 활용한 제품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딱히 별다를 게 없는 디자인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이론적인 바탕이 뒷받침되었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니 시대를 초월해서 아직도 사랑받겠지요. 여담이지만 아내가 이사를 위해 식탁 등으로 비슷한 램프를 샀는데, 원작을 보고 나니 확실히 뭔가 품격이 달라 보이네요.

조명 "글로볼"도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디자이너 모리슨의 기본 자세인 "평범함은 특별함을 능가한다"는 것이 잘 표현된 멋진 작품으로, '보통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줍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경영자의 비밀"은 디자인 회사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 중심이라 다른 챕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역시 꼭 한 번 볼 만합니다. 특히 독일 가구 회사 발터 크놀이 유명 디자이너가 아닌 무명 디자이너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며,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최우선으로 꼽았다는게 가장 와닿았습니다. 확실히 잘 나가는 회사는 다르구나 싶어요. 커뮤니케이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저 역시 이 바닥 생활 20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책의 특성상 반드시 뛰어나야 할 도판 역시 기대에 값하기에, 참 좋은 독서였습니다. 16,000원이라는 가격과 디자인 전문 서적다운 "여백의 미"가 과하기에 조금 감점합니다만, 디자인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책이야말로 가까운 미래에 3D 이미지가 포함된 디지털 콘텐츠로 진화하기 용이하리라 생각됩니다. 다양한 각도, 환경에서 가구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3D로도 출력해서 소장하고... 와, 멋질 것 같아요!

2016/09/03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점

크리피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외딴 주택가에 거주하며 가끔 TV에 출연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제자 린코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인 고교 동창생 노가미가 연락해서 8년 전 일어났던 미제 사건인 혼다 일가 실종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노가미는 다카쿠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실종된 후 다카쿠라 옆집 노모녀 화재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다카쿠라의 옆집 니시노 일가의 수상쩍은 가족 관계가 점차 불거졌고, 결국 니시노의 폭주가 일어나는데...

격조했습니다. 인륜지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대사인 "이사"를 하느라 지난 한 주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네요.

어딘가의 멋드러진 소개글을 보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출세작이지요. "검은 집"처럼 평범함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싸이코패스의 가공할 범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초~중반부는 인상적입니다. 다카쿠라가 거주하는 주택 단지 구성이 8년 전 히노 시에서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 현장과 유사하다는게 드러나고, 옆집 남자 니시노와 가족이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그 집 딸이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그 뒤 급작스럽게 옆집 남자가 돌변하여 폭주하는 과정까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니시노가 식칼을 집어들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알고 봤더니 옆집 남자 니시노가 모든 연쇄 살인의 범인인 "위장 살인마"이며, 그의 정체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실종된 후 결국 사체로 발견된 형사 노가미의 형 야지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좋았던 중반부를 지나 노가미가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통해 야지마의 범행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후부터는 힘이 빠져버립니다. 370페이지라는 분량에서 240~50페이지 정도가 되면 진상이 밝혀지는데, 이후는 완전히 사족입니다. 너무 일찍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버리니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이렇게 쉽게 밝혀질 것을 뭐 이리 질질 끌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사도 어설펐고요.

게다가 마지막 반전 — 야지마가 죽인 줄 알았던 노가미는 사실 전처 소노코가 죽였다, 야지마는 뒷처리를 도와준 것일 뿐이다, 편지 역시 소노코가 쓴 것이다 — 는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정의감을 불태운 줄 알았던 노가미가 형 야지마 못지않은 쓰레기일 뿐이었다는건 독자를 우롱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상을 밝히는 다카쿠라의 추리도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소노코의 양녀 유가 사실은 실종된 여고생 미오였고, 야지마는 이미 소노코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리기 위한 억지 전개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야지마가 구태여 오와다 옆집에 살면서 정보를 캐내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뭔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 다카쿠라와 여대생 린코의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는 야지마와의 최종 대결에서 오와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 것 이외의 가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린코는 비중에 비하면 하는 것이 너무 없거든요. 비중을 볼 때 다카쿠라의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최소한 범죄 심리학 전문가로서 뭔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장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악의 천재 야지마의 능력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점입니다. 작품의 설득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야지마가 어떻게 가족들을 지배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작중 묘사된 정도로는 설득력이 너무 약해요. 다카쿠라가 잠깐 설명한 대로 공포와 협박, 좁은 공간의 3가지가 갖춰져 마인드 콘트롤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외부 활동을 했음이 분명한 아들과 딸이 잠자코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따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는 탓입니다. 비슷하게 싸이코패스의 치밀한 범죄가 그려지는 작품들 — 앞서 말씀드린 "검은 집"을 비롯해서 — 은 동기는 물론 범행 과정에 있어서도 범행의 현실성을 높게 그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확연히 비교되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역대급 초반부를 지녔지만 중반부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님의 리뷰에 100%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금 조사해보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요소 (린코, 반전 등)를 다 쳐내고 범죄 심리학자 다카쿠라와 형사 노가미 (그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다니모토)가 악의 천재 야지마와 대결하는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낸다면, 즉 선–악 구도를 명확하게 각색한다면 소설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