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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3

요괴 헌터 1 : 지편 - 모로호시 다이지로 / 서현아 : 별점 2.5점

요괴 헌터 1 : 지(地)편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서현아 옮김/시공사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작가 생활 초기인 1974년부터 꾸준히 발표해 왔던, 고고학자 히에다 레이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 호러 단편 연작입니다. 요새 좀 복잡한 스토리, 설정을 갖춘 고전 만화에 꽂혀서 호시노 유키노부를 비롯한 몇몇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쭉 찾아보다가 이러한 저만의 유행에 편승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명성이야 전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이런게 취향이 되는게 신기하네요.

읽어보니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무려 40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독특하다 느껴질 정도거든요. 발표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네요.
러브크래프트 느낌의 코즈믹 호러 분위기를 한껏 풍겨주는 묘사들은 왜 이 작가가 우메즈 카즈오와 호러 만화계에서 같은 급으로 인정받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이런 저런 설정들의 적절한 이종 교배를 통해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체로 앞서 말씀드린 코즈믹 호러, 크리처를 일본 전통 문화와 교배시키는 식인데 예를 들자면, 코스믹 호러와 크리처 세계관에 일본 고전 설화를 끼얹은 "검은 탐구자", 가쿠레 키리시탄 설정을 이용하여 역시나 코즈믹 호러 느낌의 새로운 성경과 종교적 기적을 그려낸 "생명의 나무", 코즈믹 호러 크리처와 일본 고사기에 기반한 역사를 섞어 '해룡을 맞이하는 해룡제' 라는 행사로 그려낸 "해룡제의 밤" 이 대표적입니다.
이 중에서도 "생명의 나무" 는 이렇게 짧게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성서에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을 잘 짜깁기한 대단한 작품이었거든요. 가쿠레 키리시탄이 성경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자신들만의 성경을 만들어 전승시켰다는 역사 속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아담 외에 쥬스헤루라는 인류의 선조가 있으며, 쥬스헤루는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했다는 작품 속 창세기 설정부터 참신합니다.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쥬스헤루의 후손들 중에서 그들만의 "예수"가 태어나 모두를 구원한다는 결말도 무척 대담했고요. 이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건 정말이지 놀라운 재능입니다.

하지만 단점과 한계 역시 명확합니다. 우선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설명의 부족은 여전한 편입니다. 설정은 좋지만 펼쳐놓은 설정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이야기들이 제법 되거든요. 게다가 괜찮은 설정을 갖춘 작품들도 전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선 "붉은 입술"은 단순한 크리처 호러물에 불과하고, 지극히 평범한 좀비물 클리셰 투성이인 "죽은 자가 돌아왔다"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남편을 아이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인데, 오히려 이 설정을 강조하는게 더 독특하고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내를 살해하고 묻은 자리에서 아내와 똑같은 풀이 돋아났다는 "사인초"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내용이었고요. "우주해적 코브라" 에서 다이아몬드 이빨을 가진 인면초가 시체에서 피어난다는 "만드라고라" 에피소드가 떠오르더군요.
"개미지옥"은 여러개의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고, 특정 구멍은 죽음과 영원한 고통을, 특정 구멍은 바라는 걸 이루어 준다는 설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원숭이 손" 이라는 유명 단편과 흡사한 결말이 뻔해서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한건 주인공 히에다 레이지로의 무존재감입니다. 이 작자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만 볼 뿐입니다. 그리고 복잡한 설정을 독자에게 설명, 전달해 주는게 전부에요. 한마디로 나레이터에 불과합니다. "죠죠" 시리즈의 스피드 웨곤보다도 활약이 못해서 존재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스트레이트 롱 헤어에 어딜가나 정장을 갖춰입는 독특한 비쥬얼만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과 졸작, 장점과 단점이 혼재되어 있는 탓에 앞으로 계속 구입해야 할 지는 조금 망설여지는데, 혹 후속권을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읽어봐도 좋을지 고견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2018/02/04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시모쓰키 아오이 / 김은모 : 별점 4.5점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10점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겨레출판

오랜 경력의 평론가가 "왜 크리스티의 작품이 인기가 있고 재미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작품이 발표된 순서대로 전부 읽어본 후 평을 기록한 평론집이자 리뷰집입니다.

리뷰의 수준은 최상급입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작품의 핵심을 콕 집어 지적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추리 소설 리뷰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정도예요.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은 '불순물 하나 없는 본격 추리 소설의 원형'이고, "엔드하우스의 비극"'고명에 의존하지 않고 면발과 국물의 감칠맛으로만 승부하는 우동같은 작품'이라는 식입니다.
좋은 작품은 정말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전문가답게 유사하거나 참고해야 할 다른 작품들도 함께 언급, 소개하는 부분들도 눈여겨볼 만 합니다. 트릭면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비뚤어진 집", "구름 속의 죽음" 정도는 저도 알고 있던 것이지만, "골프장 살인 사건" 이 10년 뒤 발표된 역사적 명작과 같은 장치를 사용했다, "블랙커피" 속 장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 2" 속 장치와 일맥상통한다, "맥긴티 부인의 죽음" 은 하드보일드 성향이라 우수하다는 등의 정보들은 정말 그 깊이와 수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쓰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리뷰가 작품이 발표된 연대별로 이어지는 덕분에 여사님의 발전, 작법의 진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연대기적 구성을 갖추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여사님 특유의 섬세한 인간관계 묘사가 정교하게 쌓아 올려지고, 트릭보다 인간관계와 동기 등 다양한 요소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늘어나는 과정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여사님이 얼마나 많은 작품 스타일에 도전했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정통 추리에서 시작해서 모험물, 신본격 스타일 서술 트릭, 스릴러, 법정극, 하드보일드, 오컬트 심령 괴기물, 심지어 코즈믹 호러(!) 까지 장르 문학의 거의 전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니까요. 왜 거장인지를 리뷰를 읽으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매우 낡아빠진 오래전 고전 작가 같지만 그렇지 않다며 "세번째 여인" 의 경우 1966년 발표된 작품으로 곧 '레드 제펠린' 이 결성될 시점이라고 지적하는 장면에서는 시대가 확 와 닿아서 놀랐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읽은 여사님 작품에서 '스푸트니크' 호가 언급되는 장면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지요. 참고로 이 작품은 당시 미국 최첨단 추리 소설에 도전한 작품이라고 저자는 소개하는데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무모한 도전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낸 증거라나요?

이렇게 리뷰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리뷰를 통해 작가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게 책의 핵심일 뿐 아니라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당연히 '걸작'이기 때문인데, 걸작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지적하지요. 여사님의 걸작들은 요약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서 제대로 소개되지 못 한게 원인이고요.
즉 작품 전체가 트릭이자, 복선이자, 단서이자, 미스디렉션으로 소설 전체가 속이기 위해 짜여진 플랫폼일 뿐 아니라, 여사님은 트릭에 능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는 본격물에 비하면 그 장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다는 게 최종 결론인데, 여사님 작품에 대한 저자의 리뷰들을 읽어보면 이 의견에 동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리뷰를 통해 여사님의 특징적인 작법을 눈치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특유의 스타일은 그녀가 일종의 "연극"처럼 상황을 다룬 것이 비결로, 여사님 작품은 그림이나 동영상, 연극처럼 독자나 관객이 어디를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다의적" 이야기를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해 내는지가 중심이라는 건데 아주 타당해 보였습니다. 제가 읽었던 여사님 작품을 몇 편 떠올려 봐도 저자의 말대로 "여사님 머릿속에 상영되는 연극을 종이 위에 옮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라는 것, 즉 보이는 것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겉보기를 만든 후, 겉보기와는 다른 진실에 그 이상의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방법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가장 좋은 예는 여행지라는 무대와 신원을 위장한다는 설정인데 정말 그럴싸 하지요? 연극과 같은 상황을 접목하기 좋은건 당연히 일상과 분리된 장소일테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장하는게 보다 손 쉬운 건 당연하니까요. 아울러 여사님은 독자가 어떤 때 어떤 인물을 의심하고 어떤 때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는지를 완벽하게 꿰고 있었던 덕분에 독자를 속이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흉내내기 어려운 솜씨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저자 스스로 모든 작품의 별점을 매기고 평가한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물론 평론, 리뷰 및 평가는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결과물이기에 모든 사람이 만족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별점이 높게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걸작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이 많이 부여되고 있어서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제법 많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 별로였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다섯 마리 아기 돼지" 나 "끝없는 밤" 을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은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 권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로맨스 소설'로 알고 있는 매리 웨스트매콧 명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의아했던 점이에요. 제가 보았을 때에는 정교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의 다의성' 이라는 항목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슬픈 사이프러스" 등 몇몇 작품은 국내 번역명과 동떨어진 일본식 제목으로 소개되거나, 포와로와 마플 및 기타 장편 외 몇몇 작품들에 대한 국내 출간 여부가 체크되지 않은 점은 옥의 티입니다. 출판사의 배려가 아쉽네요.

그래도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잘 쓰인 추리소설 리뷰 집으로 완벽에 가까운 책입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에요.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뛰어가서 사 오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사님같은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야, 이런 리뷰라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전체 베스트 10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 많은데 서둘러, 시간 나는 대로 읽어봐야겠네요.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그 외 개인적으로 "장례식을 마치고", "할로 저택의 비극", "맥긴티 부인의 죽음", "카리브해의 미스터리", "서재의 시체" 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이것만 해도 올해 여름까지는 충분하겠지요?

2018/02/24

검찰측 증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강영길 : 별점 2.5점

이 바닥에서 전설급 명성을 자랑하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의 별점은 무려 5점입니다! 이 정도면 달려가서 구입해야 하는 걸작이지요. 이미 소장하고 있고, 읽어보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전에 읽은 탓에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리뷰도 올리지 않았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제가 소장한 책은 '동서 추리 문고' 출간본으로 "공략" 에 소개된 수록작은 일치하는데, 뒷부분에 "카리브 해의 수수께끼"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권 값으로 두 권을 읽는 셈이니 이득이죠? "카리브 해의 수수께끼" 은 별도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편집의 특징이라면 '정통 추리물' 이 아닌 심령 소재 오컬트 호러물이 많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심령 현상을 '영혼' 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주요 인물로 '정신 의학자' 가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했고요. 그런데 정신 의학자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영 와 닿지 않더군요. 종교인이 등장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여튼, 호러물인데 "공략"에서 언급되는 '지극히 연극적인 전개' 가 가득하다는 여사님 작풍도 한껏 느껴집니다. 표제작부터 그러해요. 레너드 볼이 결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게 되는 이유는 아내 로메인이 벌인 연극이 결정적 역할을 하니까요. 그 외에도 "라디오" 에서는 핵심 트릭이, "푸른 항아리의 비밀" 에서는 이야기 전체에 연극이 활용되며 "붉은 신호등" 이나 "네 번째 남자", "마지막 강령술""SOS"는 설정과 내용이 한 편의 연극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기에는 별로 무섭지 않으며, 낡았다 여겨지기까지 한다는 호러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부분은 분명 있지만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거죠. 솔직히 읽고나서 "공략" 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은데,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검찰측 증인" 

부유한 노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레너드 볼은 재판에 넘겨졌다. 범행 시각에 아내와 함께 있었다는 유일한 알리바이는 아내 로메인에 의해 부정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변호사 메이헌은 로메인의 증언을 뒤집을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데...

유명한 작품이기는 한데 "공략" 에서 몇몇 작품에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레너드 볼을 무죄로 만들기 위한 로메인의 노력이 너무 어설픈 탓입니다. 당시 시대에서는 위증죄는 큰 죄가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로메인의 위증은 엄밀하게 말하면 살인 미수에 가까운 중죄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텐데, 왜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중요한 재판에 편지만 증거로 제시될 뿐, 정작 법정에 로메인을 옭아매었다는 노파를 증인으로 부르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도 '일사부재리' 원칙과 배심원 제도의 맹점 등 현대 재판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주제 의식과 아이디어 만큼은 현 시점에도 건재합니다. 무엇보다도 레너드 볼이 진범이라는 마지막 로메인의 외침 하나만으로도 읽어볼 만 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붉은 신호등" 

절친 잭 트렌트의 부인 클레어를 연모하는 더못 웨스트는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인 백부 앨링턴 경에게 그 사실을 들킨 후 언쟁을 벌였다. 그러나 직후 앨링턴 경이 살해되자 웨스트는 범인으로 체포될 위기에 빠지는데...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위기에 빠진다는 서스펜스 단편입니다. 약간 윌리엄 아이리쉬 느낌도 나는데 서스펜스에 집중하기 보다는 웨스트의 짝사랑, 그리고 제목의 '붉은 신호등' 이라는 웨스트가 지닌 일종의 예지 능력이 더 중요하게 묘사되는게 차이점입니다. 이 능력을 활용하여 최대의 위기를 벗어나는 (경찰이 덥쳤을 때 하인인 척 연기) 장면이 클라이막스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궁지에 몰리는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를 잘 살리지는 못했으며, 클레어가 아니라 잭 트렌트가 광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이 부분에서 앨링턴 경이 웨스트를 압박하는 이유도 잘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뒤에 영국의 이혼법 등 몇가지 이유가 등장하는데 이국의 독자가 지금 읽기에는 설명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웨스트의 예지 능력 역시 설명이 부족한건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설정으로 윌리엄 아이리쉬가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네번째 남자" 

유명한 변호사, 의사, 종교인이 우연히 밤 기차에 동승했다. 그들 중 의사 캠벨 클라크 박사가 한 집에 사는 여러 사람들처럼 몸 하나에도 여러 개의 영혼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과거 '펠리시 볼' 이라 불렸던 처녀의 다중인격 사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번째 승객 라울 르타르도는 자신이 알았던 펠리스 볼과 아네트 라블이라는 소녀에 대해 말해주는데...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일종의 심령 호러물. 다른 수록작들은 모두 잊어버린지 오래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던 작품입니다. 다중인격에 대한 진상도 흥미로울 뿐더러, 펠리시가 자신의 몸에 침입한 타인을 격퇴한 결말이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딱 한가지, 이러한 펠리시의 격퇴를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점은 좀 아쉽습니다. 이미 그녀가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자살했다는게 밝혀진 후 과거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라울의 회상이 끝난 다음에 나오는게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울러 다중인격을 여러 '영혼' 이 한 몸에 깃든 탓이라는 설명은 구시대적인 발상이죠.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요.

하지만 지금 읽어도 서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멋진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단편집의 베스트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SOS"

정신 의학의 권위자 모티머 클리블랜드는 우연한 사고로 외딴 집에 살고 있는 딘스머스 씨 가족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딘스머스 가족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이를 눈치챈 클리블랜드는 자신의 침실에서 SOS 신호를 발견했다.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딘스머스를 비롯한 가족들의 묘사, 주변 인가에서 수 km 이상 떨어진 외딴 집이라는 설정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내용은 꽤 깔끔한 추리물입니다. 무엇이 이상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추리하는 일종의 와이더닛 물이죠. 그런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으며 진상도 납득할 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사님의 비소 사랑도 눈에 뜨이네요.

딱 한가지, 탐정역을 정신과 의사에게 시켜가며 딘스머스 가족의 별장에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고 분위기를 끌고가는 묘사가 잘 살아나지 못한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부분만 공포스럽게 묘사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아무래도 여사님과 고딕 호러는 잘 맞지 않는 듯 합니다.

그래도 그 외에는 단점을 찾을 수 없는 깔끔하고 완성도 높은 수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죽을 뻔한 의붓딸 샬럿과 가족들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더 궁금합니다. 유산 상속만 되면 영원히 연을 끊고 살겠지만 그 전에 진짜 지옥이 열리지 않을까 싶은데요. 비소가 아니라 도끼가 등장할지도?

"유언장의 행방 (라디오)" 

리지웨이 부인의 돈을 노리는 조카 찰스가 라디오로 쇼크사를 일으키는 계획을 실행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신 패트릭 고모부를 가장한게 찰스라는게 너무나 뻔해서 부인이 죽을 때 까지 긴장감은 전무합니다. 솔직히 이대로 끝나는 시시한 이야기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유언장이 사라졌다는 반전이 기가 막힙니다! 덕분에 흔해빠진 범죄물에서 약간 오 헨리 느낌의 블랙 코미디로 작품이 확 살아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청자의 비밀"

회사원 잭 하팅턴 (24)의 인생 유일한 목적은 골프의 핸디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골프장 근처에 방을 얻어 살면서 매일 출근 전 1시간 연습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는 매일 아침 7시 25분에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는데...

등장인물들이 유령과 감응한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유명 정신과 전문의가 등장하는데, 정신과 의사 배빙턴이 영혼의 치료자로 자칭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뭔가 쎄~한 느낌이 들더군요. 심지어 영매의 존재를 믿기까지 하니까요. 이래서야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안 들기 어렵지요. 그런데 결국 이 모든게 잘 짜여진 사기극이라는 진상으로 넘어가서 잘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이걸 의도한건 아니겠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오히려 작품과 더 잘 어울리는 모양새가 된 셈이지요.

물론 단편인 탓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합니다. 래빙턴 박사가 실제로 유명한 의사라며 등장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잭이 백부의 컬렉션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옥의 티 수준일 뿐, 유쾌하고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집시"

집시 여인을 만나 경고를 받은 후 사망한 친구 사건에 대해 파헤치고자 집시 여인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로 일종의 예지 능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붉은 신호등"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핏줄로 전해지는 신비한 능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는게 차이점입니다. 합리성을 떠나 최소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탓이 큽니다. 집시 여인을 공포스럽게 조성하는 식으로 캐릭터 공포물처럼 시작하여 공포 분위기를 한껏 잡아나가지만, 불안에 떨던 주인공이 약혼녀 레이첼을 만나자마자 행복함에 휩싸인다는 결말이 뜬금없기 그지 없거든요. '두번 다시 보기 힘들겠다' 는 말 뜻이 주인공이 아니라 집시 여인의 죽음을 뜻했다는 일종의 반전은 신선했으나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램프"

오래 전 굶어죽은 아이의 유령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집으로 이사 온 3대 가족의 손자 조프리가 병으로 죽고, 소년의 유령과 함께 떠난다는 이야기로 이 단편집에 많이 수록된 영혼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 듯한 내용이에요. 아이의 눈에만 유령의 실체가 보인다는 설정도 그러하고요.
그런데 별로 무섭지도 않고, 결말도 시시합니다. 전개에 기복이 없고 묘하게 담백한 탓으로 하나 뿐인 손자가 죽었는데도 불쌍한 소년 유령과 함께 떠난 것에 만족하는 할아버지 윈버 씨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그냥저냥 잔잔한 평균 이하 소품이랄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서 카마이클 경의 이상한 사건"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의학박사인 에드워드 카스테아스는 친구 세틀 박사의 부탁으로 아서 카마이클 경의 저택을 방문했다. 준남작 아서 카마이클이 갑자기 백치가 되어버린 증상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회색 고양이와 관련된 기묘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데...

진상은 카마이클 부인이 의붓 아들과 키우던 고양이와 몸을 맞바꾸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시키기 위해서요. 그녀는 동양의 피가 흐르는 마녀로 흑마술이나 최면술, 혹은 또 다른 기묘한 재주를 지녔다는 설정이고요. 

만화 등에서는 흔히 보아온 것이지만, 이를 상당히 이른 시기에 작품화하여 발표했다는 선구자적인 부분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선구자적 부분 외에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이 단편집 수록작 대부분이 지닌 '설명이 부족하다' 는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탓이 가장 큽니다. 어떻게 정신을 바꾸었는지? 에 대한 설명도 없고, 청산가리로 살해된 고양이의 몸 속에 들어간 아서 카마이클의 정신이 어떻게 다시 본인의 몸으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에드워드 카스테아스 1인칭이며, 그가 실제 목격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는 설정으로 부족한 설명을 메꾸고 있지만, 독자는 카스테아스의 비망록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설명은 해 주었어야 합니다. 이래서야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도를 논하기도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날개의 부름" 

부호 사이러스 헤이머가 장애가 있는 거리의 악사의 연주를 듣고 높은 곳으로 향하는 꿈을 꾸지만, 속박으로 인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한다는 이야기.

장애인 악사가 신의 사자인 "목양신" 이라는 등 판타지 설정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내용은 "부" 가 현실적인 속박으로, 모든걸 내려 놓아야 "승천" 할 수 있다는 약간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 흘러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크로스오버인데... 다른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공포나 서스펜스는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무엇보다도 "공략" 에서 코즈믹 호러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굉장히 호기심이 생겼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실망이 컸습니다. 덕분에 "공략" 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감소해 버렸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지막 강령술" 

라울은 결혼을 앞둔 영매 시몬의 마지막 강령술 의식에 참석했다. 그것은 이미 죽은 딸 아메리를 구체화한 영혼을 불러내기 위해 거액을 지불한 마담 엑스를 위한 강령술이었다. 

영매가 불러낸 구체화한 영혼(엑토플라즘?)에 손대면 영매가 죽는다는 설정이 전부입니다. 구체화한 영혼이 진짜가 되었을 때 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이야기가 너무 알맹이가 없지요. "공략"은 논리를 철저히 관철함으로써 발생한 현상이라 무서운 작품이라고 설명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논리' 자체가 딱히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이 논리를 관철하는 이유는 작품 내내 강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의외성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반전, 혹은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공략" 신뢰도 감소 2연타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의 사냥개"

1차 대전 중 벨기에의 한 수도원에서 벽에 검은 사냥개 모양의 화약 흔적만 남긴 채 독일군 부대가 날아가 버렸다. "나" 는 이 사건에 관련된 수녀 마리 앤젤리크를 찾아냈는데, 그녀는 한 과학자의 연구 대상이었다... 

고대 문명 및 그 문명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초능력을 다룬 이색작입니다. 수녀가 제 2 그리스도, 수정궁의 지도자 운운하는 신성 모독을 서슴치 않는 등 뭔가 있음직한 분위기는 물씬 풍기지만... 다른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내용에서 제대로 설명되는게 거의 없어서 무척 답답했습니다. 수녀가 가진 능력은 무엇인지, 로즈 의사가 어디까지 알아내어 음모를 꾸몄는지 등 뭐 하나 드러나지 않거든요.
"공략"에서는 논리가 부족해서 불안하고 두려운 작품이라고 설명되는데, 논리가 부족한게 아니라 미완성으로 보일 뿐입니다. "공략" 신뢰도 하락 3 콤보 되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