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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1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1.5점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4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조울증 환자인 판화가 헨은 남편 로이드와 함께 교외 전원 주택으로 이사했다. 친해진 이웃 부부의 저녁 초대를 받은 날, 헨은 이웃집 서재에서 더스틴 밀러 살인 사건 현장에서 사라졌던 펜싱 트로피를 발견했다. 이를 통해 범인이 이웃집 남편 매슈라는걸 눈치채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헨이 정신병 때문에 저질렀던 과거 이력 탓에 경찰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매슈는 진범이 맞았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잔인하게 학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여성을 비참하게 만드는 남자들을 응징해 왔었다. 그는 헨이 경찰에 신고한 뒤에도 밴드 보컬 스콧을 살해했고, 그 현장을 헨에게 들키고 마는데...

이전에 읽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저자 피터 스완슨의 신작 범죄 스릴러입니다. 

"나는 범인을 알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상황을 이용한 작품은 많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 재미요소는, 주인공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져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과정, 그리고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자신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는 범인과의 고독한 싸움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사뭇 다릅니다. 주인공이 범인을 알게 된 뒤, 범인과 주인공이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된다는 획기적인 전개로 나아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새로운 발상이 성공적인 건 아닙니다. 헨이 매슈에게 죽을리 없다는게 밝혀진 순간, 스릴이나 서스펜스를 잦을 수 없게 되니까요. 서로간의 비밀을 공유하는, 정신병자 남녀의 기묘한 우정 드라마로 변해 버립니다. 게다가 이를 피하기 위해 작가가 매슈의 동생 리처드를 살인마로 등장시킨 건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원래 A는 B와의 관계로 위협을 받는게 정상인데, A와 B가 사이가 좋아져버리니 C가 등장하는 꼴이지요. 긴 머리 소녀와 단발 머리 소녀 두 명을 동시에 사귀는 일로 괴로워하다가(명백하게 "오렌지로드"의 카스가 쿄우스케!), 새로운 사랑인 안경 소녀를 찾는다는 오래전 "호에로 펜!" 이야기와 똑같지요. 문제는 이건 개그만화였다는거.... 

여자를 괴롭히는 악당 남자만 죽이는 매슈와는 다르게, 리처드는 남자들을 유혹하곤 하는 여자들을 죽이는 살인마라는 설정도 유치하기 짝이 없고 리처드는 사실 매슈의 이중인격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비슷한 작품을 워낙에 많이 접해보아서 진작에 눈치챌 수 있었어요. 이중인격은 이제 옛날 기억상실처럼 마구 가져다 쓰는 설정인 탓입니다. 

그나마 반전이 설득력있게 제공되지도 못합니다 애초부터 이중인격이었다면, 왜 매슈가 이전에 범행을 저질렀을 때에는 남자를 죽이지 않았던 걸까요? 이전에는 남자를 죽인 뒤 매슈에게 꼬리쳤던 여자가 없었다? 말이 안됩니다. 매슈는 데이트 폭력을 휘두르던 미라의 전 남자친구를 죽인 뒤, 미라와 교제해서 결혼까지 했으니, 꼬리치는 여자를 죽인다면 이 때 미라를 죽였어야 했어요.

매슈가 이중인격 연쇄 살인마가 된 이유가 형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혹하게 학대했었기 때문이라는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뻔할 뿐더러 가정 폭력이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정신병자 살인범이 된다는 시각을 강요하는 느낌이라서요. 

헨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설정도 식상하기 그지 없습니다. 왜 이런 류의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걸까요? 헨이 친구를 의심했던 탓에 사고를 일으켜 전과가 생겼다는 과거 역시 그녀의 정신병을 드러내서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걸 당연하게 만드려는 장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범죄 스릴러치고는 정교함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매슈가 스콧을 살해한 범행이 대표적이에요. 매슈는 헨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심지어 경찰의 방문 조사를 받은 직후 스콧을 살해합니다. 당장 죽였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범행 역시도 이런저런 도구와 준비를 갖추기는 하나, 결국 우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딱히 정교한 완전범죄로 볼 여지가 없어요. 실제로 헨이 범행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요.
리처드의 범행은 더 엉망입니다. 미셸을 죽이고 헨을 죽이러 왔을 때 모두 범죄를 숨기려는 노력이 전무하거든요. 이중인격이 된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건 아닐텐데 말이지요. 여러모로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나마 재미있었던건, 헨의 남편 로이드가 바람을 피웠다는 매슈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는 부분 정도였습니다. 헨이 로이드 옷의 냄새를 확인한 뒤, 친구에게 교묘하게 정보를 빼내어 바람 피운걸 증명하는 과정은 괜찮은 일상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매슈의 말은 그냥 넘겨짚었던 것에 불과했고, 그 이유도 '모든 남자는 다른 여자랑 자지 못해 안달난 짐승들이다'는 매슈의 개인적인 지론 하나 뿐이라는건, 결국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인 성범죄자나 바람둥이, 아니면 살인자로 바라보는 사고 방식이라 영 별로지만요. 하긴, 이 작품이 마음에 안 드는건 이런 작가의 개인적인 사고 방식을 강요하는 탓도 큽니다. 남자는 대체로 악하고, 여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병들어 있고, 가정 폭력이 있는 집 아이는 마음이 병든다는 그런 뻔한 논리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이 주인공인 양산형 여성 시점 스릴러물로 재미도 없고, 새로운 맛도 없으며 범행도 전혀 중요하지 못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차별화할 만한 독특한 요소가 없지는 않으나, 그런 요소들 모두 부정적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두 번 다시 이 작가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19/08/02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2점

죽여 마땅한 사람들 - 6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테드 스버슨은 아내 미란다가 건축업자 브래드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실의에 빠졌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은 죽어 마땅하다며 테드가 직접 행동에 나설걸 촉구했다. 릴리에게 빠져든 테드는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브래드가 선수를 쳐서 테드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릴리는 그 둘을 직접 응징하려 하는데...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상당히 좋았던 미국 스릴러입니다. 오쟁이를 진 남편이 살의를 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의 설득 때문이라는 시작은 독특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낯선 승객"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책 뒤 해설을 보니 영향을 받은 듯, 안 받은 듯 모호하게 쓰여져 있기는 한데 최소한 작가도 존재를 알고 있었던건 분명하네요. 첫 만남 당시 릴리가 읽고 있던 작품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 이니까요.

평이 좋은 이유는 일단 잘 알 수 있습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거든요. 흡입력있는 신선한 전개도 아주 좋고요. 중반부까지 테드와 릴리의 시점을 각각 오가는데 테드의 시점은 릴리를 만난 다음부터의 현재이며, 릴리의 시점은 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두 시점이 합쳐지는 순간, 테드는 살해당하고 이는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줍니다. 그 뒤에도 릴리와 미란다 시점, 미란다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 킴볼 시점과의 교차 전개가 계속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드에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릴리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인상적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싸이코패스"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스타일인데,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보다는 제목 그대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만 죽인다는 차이점이 명확합니다.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추진력, 결단력 역시 매력적이고요. 그녀를 실존하듯 그려낸 묘사도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을 - '낸시 드류' 시리즈를 포함해서 - 좋아했던 소녀로 그려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인 미란다와 브래드 설정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불륜 관계가 아니라 테드를 살해한다는 전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킴볼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를 쓰는게 취미일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연히 쓴 음란한 시가 발목을 잡게 된다는 복선도 치밀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릴리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에릭을 살해한 범행만큼은 돋보입니다. 에릭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견과류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먹인 뒤, 치료제를 숨겨 질식해 사망하게 만드는데 사고사로 보이게끔 다양한 조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견과류는 미리 갈아서 요리에 섞어두었고, 범행 전 에릭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펍에서 열리는 술 먹기 대회에 참여하게 만드는 등의 작전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에릭이 실수로 요리를 먹고, 치료제도 찾지 못해 죽었다고 경찰은 생각하게 되지요.
경찰 킴볼이 의외로 유능해서 릴리와 테드의 관계, 릴리의 거짓말과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도 볼거리입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경찰력에 상당한 신뢰를 갖게 만들 정도에요.

그러나 다른 범행은 그닥입니다. 릴리가 미란다와 브래드를 살해하는 핵심 범행부터가 그러합니다. 특히 브래드를 설득해서 미란다를 죽이게 만든다는 계획이 최악이죠. 브래드가 미란다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릴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란다, 브래드를 살해한 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의 묘사도 나쁘지는 않지만 도로의 CCTV에 촬영되거나 도로 요금소에서 목격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 도로 CCTV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추적이 불가능했을지?에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릴리가 저질렀던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유아 성애자 챗을 숨겨진 우물에 떨어트려 죽인 뒤 챗의 모든 짐도 같은 장소에 버린 첫 범행부터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자체의 설득력부터 부족한 탓입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는 했지만 챗이 우물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지나치게 잘 풀린 느낌이에요. 차라리 뚜껑을 덮고 굶어죽도록 놔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당장은 살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문제에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릴리가 충동적으로 킴볼을 칼로 찔러 체포되는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주대낮에 현역 경찰에게 직접 흉기를 휘두르는건 빠져나가기 힘든 범죄니까요. 킴볼을 없애려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범행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치밀해 보였던 릴리 캐릭터가 막판에 급작스럽게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래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범죄 천재로 보였지만 그냥 어설픈 정신병자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범행들도 어설픕니다.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미란다의 계획? 당연히 실패했을겁니다. 범행 당시 브래드의 인상착의가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릴리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면 킴볼 등 경찰의 수사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거에요. 작 중에 등장하는 것 처럼 가짜 증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테드가 충동적으로 릴리가 근무하는 대학 도시 윈슬로를 방문한 것, 릴리가 테드 사망 후 케네윅을 방문해서 숙박한 것 등의 자잘한 실수도 눈에 뜨입니다. 테드의 실수는 릴리를 곧바로 수사 선상에 올리게 만드니까요. 테드가 미란다보다 선수쳐서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래서야 완전 범죄가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테드와 릴리가 서로 끌렸다는 설정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응징하겠다는 테드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니 등장하니만 못했고요.

작위적인 설정도 많습니다. 테드의 아내 미란다가 에릭과 바람이 났던 대학 시절 친구 페이스이며, 우연히 만난 줄 알았던 릴리와 테드의 만남도 어느정도 계획된 것이라는게 밝혀지는 것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정말로 범행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마지막에, 릴리가 시체를 유기했던 초원 지대가 재개발된다는 마무리도 작위적입니다. 이런 류의 개발 계획을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몰랐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물 설정 및 묘사, 그리고 전개는 뛰어나지만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라 감점합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천재 여성 범죄자가 별볼일 없는 정신병자라는 결말도 실망스럽고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6/2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8) 카레가 건너 온 추리 소설

카레는 친숙한 요리입니다. 한국군 전투식량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요. 우리와 교류가 적었던 인도의 전통 요리가 이렇게 친숙해진 건, 영국의 인도 식민지 지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식민지에 진출했던 영국인들이 현지에서 고용했던 요리사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여러 인도 요리가 영국에 들어왔지요. 이후 이 음식들은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밀가루를 넣은 스튜 형태로 변형되었고, 때마침 영국 회사 C&B에서 인도 향신료를 배합한 가정용 분말을 출시하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고기와 채소를 썰어 넣은 걸쭉한 스튜처럼 조리하되, 시판 향신료 분말로 이국적인 맛과 향을 더한 음식. 영국인들은 이를 인도 타밀어로 ‘소스’라는 뜻의 ‘카리(Kari)’에서 따와 ‘커리’라고 불렀습니다. 정작 인도에는 없는, 영국에서 탄생한 인도 요리인 셈입니다. 참고로 커리라는 명칭은 카릴, 혹은 카리라고 불리던 매콤한 남부 인도 요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삶 속에 커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주마 은점박이" 사건에서 마방 조교사 집의 저녁 식사로 양고기 카레가 등장하니까요. 범인은 마굿간 청년들에게 맛이 강한 아편 분말을 섞어 먹이기 위해 이 요리를 택했습니다. 커리의 강렬한 맛이라면 웬만한 약을 숨기기에 적절했을 테니, 범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지요.

"해군 조약"에서는 의뢰인 펠프스와 함께하는 식사 메뉴 중 하나로 닭고기 커리가 나옵니다. 허드슨 부인의 특기처럼 소개되는데, 이렇게 평범한 저녁 메뉴로 등장할 정도라면 당시 영국에서 커리는 우리나라의 김치찌개 정도 위치의 음식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영국에서 커리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 영국 외무부 장관 로빈 쿡은 인도 카레라이스의 일종인 치킨 티카 마살라를 ‘진정한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 2015년에 발표된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도 정통 인도 커리인 치킨 코르마가 자주 먹는 요리로 소개됩니다. 코르마는 주 향신료인 마살라에 버터와 크림, 요거트 등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내는 커리인데 여주인공 릴리는 단골집에서 테이크아웃해 온 치킨 코르마에 견과류를 갈아 넣습니다. 심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연인 에릭을 살해하기 위해서요. 에릭은 예상대로 치킨 코르마를 먹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릴리가 치료제를 숨긴 탓에 결국 질식사합니다. 약을 섞지도 않은, 그야말로 완전범죄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렇게 영국인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커리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카레는 단순한 서양식 요리를 넘어, 밥과 함께 먹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일본에는 1870년대 국비유학생 야마가와 겐지로가 최초로 영국식 커리를 전래했습니다. 이때 일본식 발음으로 ‘카레’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당시 일본에 여러 서양 요리가 전파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카레는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영국군을 따라 카레를 장병들에게 보급했던 덕이 컸습니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 주요했지요. 고기도 작게 썰어 넣어, 육고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일본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에 돼지고기와 감자, 당근이 들어가는 현대적인 레시피가 정착합니다. 영국 C&B 카레 가루를 국산화한 카레 가루 제조사도 등장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카레라이스’가 가정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3분 카레’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즉석 카레 역시 1968년 일본 오츠카식품이 레토르트 파우치에 카레를 넣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일본은 카레에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카레의 인기는 밥과 함께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 여러 음식으로 확장된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카레빵이 대표적입니다. 이름 그대로 속에 카레를 넣은 빵이지요. 도쿄 명화당이 1927년 특허 등록한 양식 빵이 원조라고 합니다. 라쿠고가 엔시 씨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소설 "가을꽃"에서 맛있게 빵을 먹는 삼원칙 이야기가 나올 때도 언급되었지요.

카레 우동은 1909년 와세다대학 옆의 오래된 소바집 ‘산초안’에서 개발한, 메밀국수 위에 카레와 파를 얹은 카레 남만이 발전한 음식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도입부에서 낯선 여학우가 무슨 메뉴를 주문할지를 두고 아케치와 하무라가 추리 대결을 펼칠 때, 아케치가 선택한 메뉴이기도 합니다. 일본 전통 요리와 카레가 결합된 음식이라는 점에서, 좀비물과 본격 추리물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런 나라니 당연히 카레 전문점도 많습니다. ‘아비꼬’나 ‘코코이찌방야’ 같은 일본 카레 전문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영업 중이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에는 ‘파라다이 로스트’라는 카레 가게가 등장합니다. 이 가게는 미나코가 중학생 때 교회 부설 고아원인 ‘성모의 정원’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뒤 시작한 곳입니다. 그녀의 아들 분지는 정신지체아로, 성장한 뒤 가게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미나코는 성모의 정원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지만, 수녀들은 더럽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녀가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근처에서 실종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카레를 제공했을 때뿐이었지요.
그 뒤 죽어서도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거절당한 미나코를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분지는 먼저 어린아이를 유괴합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미나코의 사체로 만든 카레를 제공합니다. 고기의 특성을 지울 수 있는 카레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영국에서 태어나 일본의 생활 음식으로 자리 잡은 카레는, 카레는 우리나라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곧바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컸을 것입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도 경성지방법원에 호송된 뒤 법원 구내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김치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는 후쿠신즈케가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카레라이스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김치도 한 번 권해 주고 싶네요.

하지만 카레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슴 따뜻한 드라마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알려주듯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영양 균형이 좋은 음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향신료 요리는 영국에서 스튜가 되었고, 일본에서 밥과 만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치와 함께 먹는 일상식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한 끼를 든든하게 채우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같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카레가 어떠신가요? 기왕 먹을 것이라면, ‘컨트리 캡틴 치킨’을 한 번 시도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요리는 1849년 출간된 책에 실린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레시피로 널리 알려졌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허드슨 부인이 홈즈를 위해 만들었던 닭고기 커리도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로버트 플라워 리델, "인도 가정과 요리책", 1849

  1. 닭고기를 잘게 썬다. 
  2. 양파는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 
  3. 닭고기에 소금과 커리 가루를 뿌리고 노릇해질 때까지 볶는다. 
  4. 스튜 냄비에 수프 1파인트와 재료를 함께 넣는다. 
  5. 국물이 반으로 줄 때까지 뭉근히 끓인 다음 밥과 함께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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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2016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15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매년 이맘때쯤 발표되는 2016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 소설결과입니다. 후보작은 작년보다 49권 늘어난 290권입니다. 그러나 투표 인원은 5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투표하신 분들이 대부분 추리 애호가라는 점에서 꽤 믿을만한 투표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작품은 공동 3위 포함 총 5권 중 딱 1권 뿐입니다. 이래서야 추리 애호가라고 하기도 어렵겠네요. 제가 뽑은 1~3위는 아예 순위에도 없고요. 독서 취향이 오래전 고전 취향인 탓도 크겠지만 그래도 올해는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2016년의 1~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위 15표 :
"파인더스 키퍼스" 스티븐 킹, 황금가지

2위 13표 :
"여왕국의 성" 아리스가와 아리스, 검은숲

공동 3위 9표
"라이프 오어 데스" 마이클 로보텀, 북로드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어니스트 브래머, 손안의 책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푸른숲

마지막으로, 제 선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위. 천사들의 탐정 - 시간이 흘러도 건재한 사와자키의 매력 

2위.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 고전부 전에 소시민이 있었다! 일상계의 매력

3위.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완성도를 떠나 고전의 소개는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