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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A 장조의 살인 - 몰리 토고브 / 이순영 : 별점 2점

A장조의 살인 - 4점
몰리 토고브 지음, 이순영 옮김/살림

어느 날 뒤셀도르프 경찰청의 헤르만 프라이스 경위에게 위대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이 'A음이 계속 들려 견딜 수 없다'며 사건을 의뢰한다. 프라이스 경위의 고독한 수사의 와중에 슈만의 귀중한 악보가 도난당하며, 범인으로 의심되던 슈만의 일대기를 쓰던 음악평론가 게오르크 아델만이 살해된채 발견되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위대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팩션입니다. 슈만의 일생에서의 역사속 사실인 1854년 2월 라인강 투신 사건과 그 후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실존하는 일화를 토대로 왜 위대한 작곡가 슈만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만 했는가? 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단 읽는 재미는 쏠쏠했습니다. 자세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디테일한 묘사는 팩션이라는 쟝르명에 충분히 값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 유명 음악인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고요. 또한 나름의 복잡한 과거사와 자신만의 철학을 지닌 음악 애호가 탐정인 주인공 프라이스 경위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교하자면 "애덤 댈그리쉬" 경부 같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더군요. 예술적인 감수성이나 젠틀맨적인 이미지, 그리고 공직자로서의 자세 같은 부분에서 유사함을 느꼈습니다. 독신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프라이스 경위는 여자친구? 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추리적으로 크게 특기할 부분은 없습니다. 책의 홍보도 "미스터리 팩션"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만큼 추리적인 부분은 많이많이 부족하거든요. 이 작품속에서 트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슈만에게만 들리는 A음" 밖에는 없는데 그나마도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릭대로라면 당대 유명 음악인들이 거쳐가던 슈만의 집에서 과연 그러한 장치적 트릭을 남모르게 지속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거든요. 게다가 현실적으로 이 트릭을 "지속가능한"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부족했고요. 작가는 이 트릭을 슈만의 "절대음감" 에 딱 맞는 트릭이라고 주장하고는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음악평론가 아델만 살인사건의 경우는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단서와 정보의 제공이 공정하지 않기에 더더욱 실망스러웠고요. 동기와 수법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 편이지만 그 외에는 트릭도, 단서도 없습니다... 공연히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만 있을 뿐이죠. 덕분에 우리의 프라이스 경위만 좌충우돌 고생하고 애꿎은 독자만 지루하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듭니다.

게다가 결말도 사실 썩 개운치 않은 편입니다. 진범이 누구인가? 에 대한 모호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정한 악당은 그대로 남겨진채 결국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결말이 참으로! 정말로! 시시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예정대로 슈만은 정신병원으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제 갈길을 가는 것으로 끝나버리니 이거 참... 어차피 애시당초 이야기의 소재 자체가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역사속 인물들에 대한 가공의 결말을 만들 수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끝낼 것이었다면 역사를 소설로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역사속 인물들은 들러리로 등장하는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던가, 아니면 보다 대담한 결말 - 프라이스 경위와 클라라 슈만의 작당으로 병원으로 끌려간 슈만은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조율사라던가,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라던가 뭐 그런 식으로요) 라는 전개 - 로 마무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결론내리자면, 제목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 작품 초-중반의 분위기 덕분에 정통 팩션으로서의 기대를 한껏 갖게 만들지만 결국 제가 기대했던대로의 작품이 아니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별점은 2점으로, 천재 음악가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즐기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선택이겠지만 저같은 추리 애호가에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하우미스터리와 도서출판 살림의 공동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된 책이라 좀 죄송스럽긴 한데 뭐 리뷰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독서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하우미스터리와 도서출판 살림 관계자 여러분께는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8/11/05

명탐정 코난 극장판 Vol.12 - 전율의 악보 (Full Score of Fear) : 별점 3점

유명 피아니스트 도모토 카즈키의 도모토 홀 개관 공연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앞두고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소노코 덕분에 연주회를 참관하게 된 코난 일행은 연주회에 참여하는 소프라노 가수 아키바 레이코와 친분이 생기지만, 아키바 레이코를 노리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후 살인사건이 연쇄살인사건으로 발생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 그 상태에서 연주회의 막이 오르는데....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명탐정 코난 극장판의 12번째 작품을 어제 감상하였습니다. 클래식 연주회가 주 소재인데 "노다메 칸타빌레"의 영향일까요? 어쨌건 이전 작품인 "감벽의 관"이 상상을 초월하는 쓰레기였던지라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이 작품은 그런대로 평범한 수준의 완성도는 보여주더군요. 하긴 "감벽의 관"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겠지만...

이유는 안정된 작화, 그리고 근래 코난 극장판에서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올스타 캐스팅" 이 자제된 덕분이기도 하겠죠. 이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코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인 모리탐정 - 란 - 소노코 - 아가사박사 - 소년 탐정단 정도만 등장하고, 실질적 활약의 90%를 코난이 담당하고 있어서 이야기가 분산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란과 소노코, 아가사 박사와 소년 탐정단은 평상시의 역할대로 불쌍한 피해자와 개그 캐릭터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막판 하이바라의 잠깐 활약은 제가 하이바라의 팬인지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고요. "아동 모험 활극"으로 전락한 다른 극장판들에 비한다면, "추리"라는 요소를 살리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만족스러운건 아닙니다. 너무 평범해서 극장판에는 걸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범인도 조금만 생각하면 추리가 가능할 정도니까요. 제목과 내용에 걸맞게 약간의 음악적 장치가 양념처럼 쓰이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무리 음악을 이용한 트릭을 위한 설정이라지만 전설의 음치 코난-신이치가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 발상은 당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범행 동기도 설득력이 낮았고, 마지막 살짝의 반전은 괜찮았지만 오해 치고는 너무 스케일이 큰 것 아닌가 생각되네요.

또한 극적인 상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몇가지의 설정들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폭탄이 수십발 터지고 있는데 아무리 완전 방음된 콘서트 홀이라도 내부의 관객들이 전혀 모른다는 상황, 목소리로 주파수를 맞춰 멀리 떨어져있는 전화를 건다는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무리입니다. 괜히 이야기만 길어졌어요. 이야기가 길어진 것에는 "연주" 장면이 삽입된 탓도 있지만 더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극장판"이라는 수준은 겨우 충족시켜 주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작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의 완성도라 다행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아주 좋았던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기는 무리지만 별로였던 작품들보다는 나은, 최근작들 중에서는 손꼽을만한 나름의 이야기 완성도는 갖추고 있거든요. 다음 작품은 좀 더 좋아지길 바라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분발하세요~!

2019/06/22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 별점 3점

책만 보는 바보 - 6점
안소영 지음/보림

정조 때 관리 이덕무와 그의 벗들에 대해 이덕무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역사, 전기 소설입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꽤 재미있더군요.
장점이라면 우선 이덕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서자' 출신으로 여러가지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덕무가 괴로움을 버티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갔는지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와 노력, 그리고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뻔한 해피 엔딩도 마음에 들어요. 이런 해피 엔딩이 거의 불가능했을 조선 후기였다는 점에서요.

두번째로는 이덕무 본인보다도 유명한 이덕무의 벗,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덕분입니다. 이덕무의 스승 격인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학의"의 박제가, "발해고"의 유득공, 이덕무의 처남으로 최근 이런저런 드라마 때문에 널리 알려진 "조선무예보통지"의 저자이기도 한 무인 백동수, 신분은 다르지만 순전히 책 사랑 때문에 친해진 이서구, 심지어는 정조까지 등장하는데, 이를 이덕무의 시점으로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예를 들자면 담헌 홍대용이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건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덕무 시점에서 홍대용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러가지 장면을 그려내니 훨씬 생생합니다. 게다가 단순한 연주 묘사에 그치지 않아요. 홍대용이 천문, 수학,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걸 '자연의 이치는 곧 조화'라며 뛰어난 음악 실력과 연결하고 있거든요. 이런 장면들 덕분에 인물들이 더 입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웠집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이덕무와 친구들에게 명확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에 미친 책벌레로 책만 있으면 근심걱정 따위는 모두 잊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박제가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뜻을 굽히지 않고 올-인하는 혁명가로 그려지고요. 유득공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의 명랑한 메모광입니다. 백동수는 지위, 나이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 사교성 발군의 낙천적인 무예가죠.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 심지어 아끼던 책을 팔아 양식을 삼곤 했지만, 이런 벗들과 책들로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니, 뭔가 "성균관 스캔들" 스럽네요. 그리고 이들의 언행 모두가 굉장히 현대적이라서 읽기도 편합니다. 잘 된 고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종의 드라마같은 느낌을 주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세번째는 이덕무의 무지막지한 책 사랑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독서인인 탓에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그가 직접 정리한 4가지 책 읽기의 이로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야말로 독서 하나면 만사형통인 셈이에요. 배고픔, 추위, 근심걱정, 병을 독서로 잊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독서가 좋았으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덕무가 추천하는 우리나라의 좋은 책 세 가지는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입니다. "성학집요"는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당대, 즉 정조 시대 시대의 분위기 묘사도 마음에 듭습니다. 실학의 대두, 청나라와의 관계, 정조의 개혁 정치 등이 이덕무에게 닥쳤던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드라마가 함께 해서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이덕무가 출세하게 되는게 정조의 개혁 정치와 그대로 겹치기도 하고요.
물론 이 부분은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너무 이덕무와 백탑파를 좋게만 그리고 있어서 그렇지, 정조가 서자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을 발탁한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보겠다는 취지도 있었겠지만 당파에 좌지우지되던 당시 정국에서 자신만의 세를 키우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 더 컸으니까요. 결국 서자 출신들을 비롯한 이른바 '백탑파' 세력을 끌어올린건, 또다른 붕당을 만든 것과 다름 없는 셈이고요. 결국 서자 출신들은 고작해야 시골 군수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평양 감사까지 출세한건 신분이 높았던 이서구 뿐이었다는건 결국 현실의 벽이 높았다는 이야기라 여러모로 씁쓸합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역사, 조선 사람 시각으로 본 세상 등 '조선' 운운하는 발언이 많은 것도 너무 오버스러웠어요. 솔직히 진위여부도 의심스럽고 말이죠. 애초에 이덕무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위인전이라는 것 부터가 이덕무의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일종의 용비어천가스러운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백탑파에 편향된 시선, 고증과 진위여부가 모호하다는건 단점이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 한 선비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점 때문에 완벽한 역사서라 하기는 어렵고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 위인전에 가깝기에 성인분들보다는 어린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제 딸에게도 언젠가 권해줄 생각입니다.

2015/04/20

야수 1,2 - 우에하시 나호코 / 이규원 : 별점 3점

야수 특별 세트- 전2권 - 6점
우에하시 나호코 지음, 이규원 옮김/노블마인

에린은 "야료"라 불리우며 터부시되는 종족 출신이자 투사지기인 어머니 소욘과 함께 살아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형을 당한 뒤에는 마을을 떠나 꿀벌지기 조운의 양녀가 되었다. 이후 조운의 도움으로 카자룸의 수의사 학교에 입학한 에린은 학교에서 키우던 어린 왕수 리란을 돌보면서, 왕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수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상전의 최강자 "투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유일하게 압도할 수 있는 왕수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왕국이 커다란 혼란에 빠질 수 있어서 고민에 빠지는데...

2015년 서점 대상 목록을 보다가 급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작품. 원제는 "야수조율사"입니다. (獣の奏者).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질 정도이니 당시 꽤 인기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네요. 읽어보니 역시나, 확실히 인기를 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첫 번째 이유로는 일본 판타지 특유의 흔해빠진 설정에서 탈피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거대 세력의 싸움이나 왕위를 둘러싼 암투 등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주인공 에린이 '동물 애호가'로서 역경을 딛고 성장하며 왕수 리란과 교감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덕분입니다. 거대 위험 동물과의 교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나우시카"와 비슷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고 있고요. 주인공 에린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특유의 호기심, 그리고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어서 왕수와 교감을 이루게 되는 과정 묘사가 아주 설득력 넘칩니다. 이렇게 자신과는 다른 종족과의 커뮤니케이션 묘사의 설득력은 작가 우에하시 나오코의 독보적인 강점 -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가진 현직 교수 - 이 최대한 발휘된 결과로 보입니다. 

두 번째로는 전반적인 이야기가 소소한 일상계 스타일로, 에린의 생활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간 '소녀풍 판타지'라서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던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지만도 않습니다. 신권을 지닌 왕 요제와 병권을 총괄하는 대공 아루한 세력의 암투가 함께 펼쳐지고 있으며, 요제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복잡하면서도 흥미롭게 전개되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에 대공령의 투사 부대가 몰려오는 장면은 기존 판타지 애호가도 만족할 만큼 멋진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마지막으로 요제가 어떻게 이 땅에 내려왔는지, 왕수 규범이 생긴 이유와 아료(아오로우)족의 과거가 밝혀지는 장면도 높은 설득력을 지닌 명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곳곳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점은 옥의 티입니다. 특히 이야기의 핵심인, 누간과 손잡고 하르미야를 죽인 뒤 세미야와 결혼하려는 다미야의 음모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르미야가 살아 있으면 결혼하기 힘들었으리라는 묘사도 없고, 누간 역시 반란을 일으켜서 얻을 게 별로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아루한의 지위 정도? 왕이 되려는 야심도 없이 이 정도만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또한 다미야가 에린을 뜻대로 조종해 왕수를 다룰 수 없다면, 투사 부대를 이끄는 아루한이야말로 큰 위협이 되었을 텐데, 장기적으로는 세력이 약화될 게 뻔하다는 점에서 참 바보 같은 계획이 아니었나 싶네요. 신성을 강화해도 병권은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중세 시대에 교황이 이미 증명한 사실이니까요. 이건 물론 다미야야 알 수 없는 역사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고, 위기에 처한 에린을 왕수가 구해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는게 가장 아쉽습니다. 분명 멋진 장면이고, 왕수와 에린이 진짜 교감을 나누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기는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탓입니다. 결국 요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미야를 비롯한 반역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하기까지 했습니다. 첫 발표 당시에는 1, 2권으로 완결되는 작품이었는데, 몇 년 뒤 3, 4권이 후속으로 나왔다는건 아무래도 저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아울러 요제의 경호원을 뜻하는 "세잔" 번개 이알은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 가구 목공의 자식이었다는 등 상당한 분량으로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스테레오 타입으로 별다른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일본풍 판타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독특함, 작가 특유의 묘사는 마음에 들었으며,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흡입력도 좋았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덧1 : 참고로 이 작품은 절판 상태라 중고도서로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중고 물량은 많은 편이니 구하시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덧2 : 애니메이션 화면도 찾아봤는데, 왕수는 날개 달린 늑대개, 투사는 뿔, 다리 달린 용 비스무레한 뱀 정도로만 묘사되어 실망스럽더군요. 좀 더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구석이 많았는데 너무 뻔했달까요... 그래도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영상으로 보고 싶긴 합니다.

2005/07/05

미스테리 환상여행 1 - 아이작 아시모프 선 / 정성호 옮김 : 별점 3점

아이작 아시모프가 직접 선정했다는 100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앤솔로지입니다. 2,000단어 내외의 짤막한 작품들만 모아 놓았다는 것이 특징으로 아시모프 표현대로라면 "스낵"같은 작품들입니다. 아시모프의 말대로 항상 좋은 요리나 정식만 먹고 살 수는 없고 가끔은 스낵이 더 맛있는 법이죠. 저 역시 스낵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아시모프 역시 책머리에서 엘러리 퀸의 "미니 미스테리"와 유사한 방식의 단편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바닥은 엘러리가 꽉 잡고 있군요.

여튼간에 당대의 거장 아시모프가 직접 선정한 재미난, 짤막한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것들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는 무척 궁금했습니다. 다행히 작품들도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아서 무척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아시모프의 취향을 대변하듯, 정통 추리라기 보다는 유머와 반전이 있는 작품들이 대다수인데 그야말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워낙에 부담없는 분량이라 읽기 편한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되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문제라면 100편을 한권에 담을 수도 있었을텐데 책의 활자를 키우고 행간도 넓히는 출판사의 작전(?)으로 1,2권으로 간행되어 아쉽게도 2편은 구하지 못한 점입니다. 제가 읽은 1편에는 47편만 수록되어 있는데 이 앤솔로지의 2권 역시 언젠가 구해서 100편 완독을 마치고 제 책장에 나란히 꽂아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무 편수가 많고 짤막한 이야기들이라 다 소개하긴 어렵지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만 몇개 소개하겠습니다.

"손 안대고 코풀기" - 알 누스바움
한 할머니가 은행에서 나오다가 두 명의 날치기에게 가방을 빼앗기나, 기지를 발휘해서 범인들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
아이디어가 좋을 뿐더러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라는게 마음에 듭니다.

"사랑은 꽃과 함께" - 헨리 슬레사
돈 프레머 경위가 이웃집 주부 살인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잡아내는 계기가 되는 것은 푸른 수국이었다는 이야기.
다른 앤솔로지에도 실려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단편의 교과서적인 작품 중 하나인 것 같네요. 헨리 슬레사 느낌이 별로 강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턱 내요" - 쥬디스 가너
이웃집에 이사온 건방진 미국 꼬마의 할로윈 이야기.
"애들이 더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굉장히 서늘합니다.

"우울한 세상" - 헨리 슬레사
뉴스에 우울한 뉴스만 나오는 것에 대해 아내와 내기하게 된 아놀드의 이야기.
헨리 슬레사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단 두명의 등장인물만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가의 창의력은 정말 놀랍네요.

"살인 그리고 음악" - 헬렌 맥클로이
법정신의학자 월링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 단편.
절대음감의 소유자인 용의자에게 피아노 코드로 정보를 보내는 트릭이 등장하는데 꽤 재미있는 발상이라 생각됩니다.

2018/04/07

명탐정 설홍주, 어둠 속 목소리를 찾아라 - 정은숙 : 별점 2점

명탐정 설홍주, 어둠 속 목소리를 찾아라 - 4점
정은숙 지음/푸른책들

다행동 지구대 설 경사의 딸인 홍주는 자칭 ‘봉봉 탐정단’의 수석 탐정으로 셜록 홈즈와 같은 명탐정이 되는 것이 소원인 씩씩한 소녀다. 여기에 홍주를 짝사랑하는 단짝 최완식과 그런 완식을 짝사랑하는 은정까지, 셋은 시험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엉터리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량산을 찾았다가 유리 가게 할아버지의 집까지 들르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할아버지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만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다행동의 모든 주민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하고 홍주와 완식은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남긴 별 그림, 방 안을 찍은 사진들, 홍주가 발견한 조그만 신문 조각을 단서로 범인을 잡기 위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다. 그리고 곧 유리 가게 할아버지와 다툰 적이 있는 중국집 배달원 수만을 용의자로 주목한다.
하지만 외상값을 받기 위해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던 완식의 엄마가 새로운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홍주와 완식의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완식의 형, 완규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던 또 다른 인물, AS 기사 조영범의 존재가 밝혀지고 둘은 화해하게 된다.
조영범 기사가 범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과감히 그의 집으로 잠입하는 홍주와 완식. 하지만 조영범 기사에게 발각되어 살인 용의자의 인질이 되고 마는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10여 년 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과 누명, 그리고 안타까운 복수의 사연이 밝혀진다. (웹사이트 줄거리 인용)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관심이 동해서 읽게 된 책. 제가 잘 아는 다른 명탐정이 떠올라 도저히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1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2008년에 나왔던 전작의 후속작이네요.

초등학생 정도를 대상으로 한 아동 소설로 아동 소설답게 캐릭터들이 확실합니다. 시리즈로 소설이 나옴직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탐정, 개그 캐릭터, 조용한 정보 수집 담당자라는 탐정단 구성부터 괜찮습니다. 개그 캐릭터로만 보였던 완식이 절대 음감의 소유자이며, 저시력자 은정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발달했다는 부가 설정은 이야기를 보다 탄탄하게 만들어 주고 있고요. 또 머리 좋은 수재 형과 기동력과 행동력을 갖춘 중국집 배달원이라는 조력자들도 핵심 역할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탐정 역인 설홍주가 가장 매력이 떨어질 정도이니 말 다했죠. 그래도 "소녀" 라는 의외성을 가져다주니 역시 기본 이상은 해 준달까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추리적인 재미도 상당합니다. 홍주 일행이 유리 가게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간 직후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 연기력으로 문제가 많다는 아이돌 멤버가 주연인 드라마가 크게 틀어져 있다! 같은 시간대에 사극이 방영하는데! 라는 사소한 상황으로 홍주가 이변을 눈치채는 장면으로 설득력이 넘칠 뿐 아니라 지극히 한국적이고 '다행동' 이라는 동네에도 잘 어울리는 소박한 추리라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이야기가 흘러가면서는 재미가 많이 떨어집니다. 흔해빠진 복수극을 아동용으로 무리하게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이야기의 분위기, 그리고 배경 설정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본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추리라는게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할아버지가 죽어가면서 그린 4개 이상의 파란 별이라는 다잉 메시지는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사건의 동기가 된 "오성호" 라는 배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는데 별을 4개나 그릴 정도라면 이름을 쓰는게 더 빨랐겠죠. 어차피 사건 해결에는 우연히 홍주가 주워온 신문 쪼가리가 큰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구태여 등장할 필요도 없었던, 수수께끼를 위한 억지일 뿐이었습니다.

또 아이들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범인으로 의심되는 AS 기사 목소리를 녹음한다는 작전도 클라이막스를 담당하는 것 치고는 그다지 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범행 후 길을 가던 은정을 도와주는 등 여러모로 괜찮은 사람으로 묘사된 AS 기사 조영범이 급작스럽게 아이들까지 죽이려는 살인마로 돌변하는 과정의 설득력도 너무 부족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좋은 캐릭터들을 활용하여 다행동에서 일어난 소박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일상계 물로 이야기를 꾸몄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봉봉 탐정단이 다음에는 좀 더 가볍고 친근한 사건들로 찾아와 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