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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8

이글루스 서비스 종료

공지. 이글루스 서비스 종료 안내

서비스 종료에 대한 소식은 알고는 있었지만 포스팅이 늦었네요.

2003년 12월 7일에 개설하였던 이 블로그의 수명도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군요. 그나마 다행인건 어느정도 이사가 완료된 상태라는 점입니다. 이미 2010년에 관리자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되는 권한 오류 사고 때 의구심을 가졌었고, 2013년 SK에서 서비스가 독립한 이후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토로할 때 고민하면서 블로그 글을 조금씩 옮겨왔거든요. 현재 약 90% 넘게 글을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새 거처는 구글의 블로그스팟이며,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글 내부 deep link를 수정하지 못하는 점, 기존 댓글과 트랙백 등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점 등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원본 글이나마 살려 놓았습니다. 앞으로 제 글은 이글루스 폭파 시점까지 이곳과 블로그스팟 두 군데 모두 올릴 예정이에요. 100% 이사가 완료될 때까지는 정리 등으로 새로 글을 올리기는 힘들겠지만요.

사실 이글루스의 서비스 종료도 그리 놀랍지는 않습니다. 위의 글들은 물론이고, 작년에 이런 글을 썼었지만, 아무런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걸 보고 거의 확신했어요. 오래가지 못할거라는걸요. 오히려 제 생각보다는 서비스가 오래 버틴 편입니다.

물론 끝을 예감하고는 있었다고 해도, 섭섭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7천일이 넘는 기간 동안 3천 7백개가 넘는 글을 올린 이 블로그는 그야말로 제 인생의 한 축이나 다음이 없었으니까요. 

블로그를 운영하는 동안, 4개의 회사를 차례로 옮겼고, 결혼도 했고, 소중한 딸 아이도 만났으며, 형과 합작했던 추리소설 "경성탐정록"의 발표와 출간이 있었고, 제 이름으로 된 첫 책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을 펴냈으며, 추리 소설 리뷰도 1,000편을 달성하는 등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글루스의 빅 웨이브였던 이글루땅 열풍 참여처럼 온라인 상으로 나눈 수많은 분들과의 이야기와 함께했던 경험도 소중한 추억입니다. 이전에 썼던 글처럼, 서비스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해준다면 유료화에도 참여할 생각이 컸는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이미 서비스 종료는 결정된 사항이니 어쩔 수 없지만요(솔직히 일부 지저분한 정치 글을 밸리에서 더 안봐도 된다는 건 좋네요).

이글루스에 둥지를 트셨던 모든 분들께서 모쪼록 이사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EST님이 보내주셨던, 제 이글루스를 대표하는 이글루땅 홈즈 버젼을 올리며 글을 마칩니다.

2013/10/21

귀동냥 - 나가오카 히로키 / 추지나 : 별점 2.5점

귀동냥 - 6점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추지나 옮김/레드박스

일본작가 나가오카 히로키의 단편집. 표제작 포함 전부 4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운좋게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 전에 자리를 빌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단 이력이 화려한데 2008년 표제작 "귀동냥"이 제 61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발표된 이 단편집이 2012년 "추천 문고 왕국 2012" (이건 무슨 상일까요?)에서 국내 미스터리 부분 1위에 오르며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판매도 꽤 괜찮았다고 하고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상을 수상할 정도의 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점이 없는건 아닙니다. 우선, 최근의 추세라 할 수 있는 연작이나 시리즈물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각 단편이 전부 다른 주인공과 설정, 배경으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작품으로 과거 오 헨리 시대에서나 봤었던 정통 단편물입니다. 뭐 연작, 시리즈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 입장에서, 또 판매나 마케팅 측면에서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는 이런 스타일로 창작했다는 것에서 작가의 신조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 모든 단편이 제가 좋아하는 잔잔한 일상계물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이야기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수록된 모든 단편이 사건 발생과 마지막 극적 해결이라는 오 헨리 스타일의 정석적인 단편 구성으로 전개되는데, 사건의 발생과 전개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예를 들자면 충분히 구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아 오해를 키운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억지스러운 설정이 눈에 뜨이는것도 불만이고요. (이러한 점들은 아래의 각 단편별 상세 소개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같은 일상계라 하더라도 추리쪽에 좀 더 많이 치우친 작품들 - 가노 도모코의 작품들이나 요네자와 호노부의 일상계 추리물,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의 일상계 작품들 등- 과는 다르게 추리보다는 심리 묘사와 전개에 더 주력하는 작품 -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들과 같은 - 인데,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을 싫어하는건 아닌데,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정보를 먼저 접해서 정통 추리쪽으로 기대가 너무 컸네요. 충분히 추리쪽으로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아 아쉽기도 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충분히 읽는 재미는 있으며 일상계를 좋아하시고 단편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작품집이나 추리적으로 약간 미묘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는 다시금 깊은 감사 드립니다.

아래 수록작별 상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경로이탈"

구급대원 하스카와는 대장 무로후시의 딸 가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가나는 6개월 전 외과의 마스바라의 차에 치어 휠체어에 의존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긴급한 상해사건으로 출동한 하스카와와 일행은 피해자가 가나 사건의 검사였던 구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고를 일으킨 의사 마스바라를 기소하지 않고 풀어주었었다.

칼에 찔린 구즈이를 병원으로 호송하는 와중에 무로후시는 바로 병원으로 이동하지 않고 사이렌을 켠채 병원 주변을 맴돌며, 하스카와에게 전화기를 주며 귀에서 떼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는데....

무로후시가 복수때문에 구즈이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인가?가 사건의 핵심인 작품. 결국 결말은 나름 훈훈한 일상계스러운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떨어진 핸드폰 + 사이렌 소리를 이용하여 위치를 알아낸다는 트릭 하나로 이만큼 이야기를 뽑아낸 것은 감탄스럽네요. 마스바라의 지병을 복선으로 배치한 것도 절묘하고요.

그러나 무로후시가 아무리 과묵하더라도 상황만 설명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지는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혹 사고라도 생긴다면 대장이 아무리 책임을 지더라도 다른 대원들한테 아무런 데미지가 없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것이 구즈이에게 원한을 품은 탓도 있다면, 마지막의 감동도 희석되는 느낌입니다. 구즈이가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자백하는 대사도 사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귀동냥"

경찰 하즈미 게이코는 딸 나츠키와 둘이서만 살아가는 모자 가정의 가장이자 경찰로 이웃에게 발생한 집털이 사건을 맡은 뒤, 유력한 용의자인 네코자키 (요코자키)가 이미 체포되어 구류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코자키는 하즈미에게 접근하여 면회를 요청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는데...

제목의 "귀동냥"을 상대방이 꼭 듣고 싶은 정보를 우연히 알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라고 정의내린 후, 이러한 귀동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입니다.

네코자키가 귀동냥을 이용하여 진범을 유도하는 것, 그리고 나츠키의 엽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귀동냥의 형식을 빌어 후사노 할머니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얽히는데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하즈미가 네코자키의 보복을 우려하는 부분에서부터 긴장을 쌓아나가다가 폭발시키는 과정도 일품이고요.
앞서 말했듯 "귀동냥" 설정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과 일상계 왕도스러운 훈훈한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도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설득력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단 네코자키가 구태여 귀동냥 형식을 빌려 진범에게 내사가 진행중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릴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냥 형사에게 이야기하는게 더 쉽지 않았을까요? 또 이렇게 정보를 들었다고 해서 사이토가 바로 자수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나츠키가 왜 엽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그냥 어머니한테 할머니를 안심시켜달라고 이야기하는게 더 나았을것 같은데 말이죠.

이런저런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899"

소방대원 모로가미는 이웃에서 홀로 갓난아기 아이리를 키우며 살아가는 하쓰미에게 반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사는 주택에 화재가 발생하고 상황이 899 (긴급구조자) 마루아카 (1세 미만의 영아)라는 암호로 전달되는데...

아이를 잃은 아픈 경험을 가진 소방대원 가사마가 아이리가 학대를 받은 것을 파악하고 잠깐 동안 아이를 숨겨 엄마에게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는 것이 핵심 내용인데....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이가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아이가 학대받은 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목적을 위해 아이를 비닐봉지에 넣어 잠깐 숨긴다는 발상은 애시당초 이해불가였어요. 구한 다음 바로 경찰을 부르거나 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이가 다치려면 어쩔려고 했던건지...

아이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던가, 가사마가 장을 본 뒤 큰 비닐봉투를 재활용을 위해 따로 챙긴다던가 하는 식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고, 모로가미의 애타는 심리묘사도 괜찮은 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이야기의 설득력이 제로에 가깝기에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고민 상자"

갱생보호시설의 원장 유코는 퇴소를 앞둔 우스이의 앞길에 왠지 모를 신경이 쓰였다. 그는 만취한채 자전거로 여자아이를 치여 죽인 죄로 구속된 뒤 출소한 인물이었다. 우시이는 입사한 이즈카 제작소 기숙사에 입주하는데 1주일에 걸쳐 가전제품을 보러 다니거나 선술집을 돌아다니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투신 자살을 시도하는데...

설정은 굉장히 묵직하지만 실제 내용은 아주 담담한 일상계의 왕도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핵심 단서(?)인 유코의 NHK 대담 방송이 중요한 소재로 계속 언급되기 때문에 진상에 대해 독자가 눈치채기 쉽다는 단점은 있지만 유코의 심리묘사 등 디테일한 묘사가 아주 뛰어나며, 우스이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도 충분합니다. 아울러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내용의 설득력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네요. 물건을 버리기 위한 "고민 상자"라는 모티브를 잘 엮은 것도 좋았고요.

이 작품집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4/29

금빛 눈의 고양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5점

금빛 눈의 고양이 - 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미시마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중간중간에 놓친 권이 있어서 제가 읽은 걸로는 세 권 째네요. 언제나처럼 네 편이 아니라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열리지 않는 방"은 굉장했습니다.. "벙어리 아씨"도 성내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사건에 대한 진상은 꽤 볼 만 했고요.

그러나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덧붙여진 설정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미지로가 이야기를 몰래 듣는 역할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오치카와 함께 듣고 난 뒤, 관련된 그림까지 그린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애초에 오치카가 괴담을 듣게된 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미지로는 부잣집 도련님이자 한량으로 괴담은 재미삼아 들을 뿐이에요. 이래서야 시리즈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심지어 이번 권 결말에서 오치카가 시집을 가게 되어 도미지로가 공식적으로 괴담을 듣는 역할을 물려받게 되는데, 더 이상 시리즈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전 권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들, 소품들이 많아서 별로 무섭거나 섬찟하지도 않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이전부터 반복되어왔던 문제인데, 뻔한 설정이 많고 의외성 부족하다는 단점도 여전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열어서는 안 되는 방"은 아주 좋으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열어서는 안 되는 방"

인기밥집 돈부리야의 주인 헤이키치가 흑백의 방을 찾아와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철물상인 미요시아의 막내 아들로 부모님과 3남 3녀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키치가 10살 때 소박맞고 집에 돌아왔던 누님 오유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소금을 끊고 애매하게, 하지만 절실하게 기원한 틈에 요물이 파고 들고 말았다. '행봉신'이라 자칭한 요물은 집 골방에 자리잡은 뒤, 소원을 이루려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가족 일부의 일탈이 시작되고, 행복했던 대가족은 헤이키치를 제외하고 모두 목숨을 잃고 마는데...

악마나 요물이 사람의 욕망을 가지고 논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바로 전편의 "오쿠라 님"도 비슷한 설정이었지요. 하지만 "오쿠라 님"은 비젠야를 도와준건 맞는 반면, 이 작품의 행봉신은 소원을 빈 사람에게 비참한 말로를 가져다 준다는, 전통적인 재앙신 전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뻔하지만은 않습니다.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행봉신을 통한 소원 성취가 비참한 말로를 맞는 두 가지 이유처럼요. 첫 번째는 '등가교환' 이에요.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하는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간과합니다. 두 번째는 '소원이 애매하다'는걸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장녀 오유가 이혼당한 뒤, 시댁에 빼앗긴 아이를 보고싶다는 소원입니다. 어떻게 보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하나도 없이 그냥 아이를 돌려달라고 빌었고, 행봉신을 집 안에 끌어들인 죄책감에 자살하자 아이가 돌아오게 되었다는 결말이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비열하게 이용해서 무조건 최악의 결과를 만드는 술수에 걸려든 셈이죠. 다른 가족들의 소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니 로또 당첨된 사람들 말로가 좋지 않다는 뉴스가 떠오릅니다. 비슷한 이치인것 같아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게 맞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네요. 하지만 이왕 살 거라면, 막연히 1등을 바라지 말고 1등이 된 뒤 어떻게 할 지 계획을 잘 세워두는게 바람직해 보이고요.

여튼 오랫만에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했던 작품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행봉신에 의한 행복했던 대가족의 파멸 과정은 충분히 섬찟했어요. 에도라는 시대 상황과 소원들을 맞물려 묘사한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설정이 뻔하고 결말이 좀 시시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다 용서가 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벙어리 아씨"

데릴 사위인 종이 도매상 미노야의 후사노스케가 친모 오세이를 모시고 흑백의 방을 찾았다. 오세이는 귀신을 부르는 '몬모 목소리'의 소유자로, 자신이 젊었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몬모 목소리 때문에 고향인 아사히 마을을 떠난 뒤, 이런저런 경험 끝에 영주 측실 딸 가요히메의 요강 담당 하녀가 될 수 있었다. 오세이는 성에서 선대 영주의 장자 잇코쿠의 망자와 친해졌고, 잇코쿠가 때문에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잃었다는걸 알게되었다. 그래서 잇코쿠를 둘러 싼 죽음의 진상을 알아낸 뒤, 잇코쿠가 성을 떠나 성불하고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데....

귀신이 잘 꼬이는 "백귀야행"의 리쓰를 비롯 (몇 권까지 읽었더라....), '귀신을 부르는 체질'이라는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목소리'가 귀신을 부른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소리는 단순한 설정 수준에 그칩니다. 잇코쿠가 죽은 이유를 알아내고, 성불시키는 과정에서 몬모 목소리의 역할은 별로 없거든요. 오히려 몬모 목소리로 귀신이나 망자, 요괴를 불러내도, 오세이를 도와주는 쪽이라 딱히 저주나 괴로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수호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 이래서야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그래도 잇코쿠의 죽음을 둘러 싼 진상만큼은 재미있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잇코쿠는 선대 영주의 장자이자, 측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실이 아들 구니카즈를 낳자, 성은 잇코쿠파와 구니카즈파로 쪼개져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정실은 에도에 거주하고, 측실은 현지 성에 거주하던 탓이었지요. 그런데 다툼 중 잇코쿠가 갑작스럽게 죽어서 이런저런 의혹을 낳았는데, 알고보니 측실의 아버지이자 잇코쿠의 할아버지 센자에몽이 잇코쿠를 독살했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가문의 충신이자 영주의 오른팔로 성주 대리까지 맡았던 할아버지가 가문의 단결을 위해 손자를 죽인겁니다. 그 뒤 사실을 알게 된 딸도 죽고, 스스로도 할복해 버리고 말았고요. 현재 영주는 이렇게 잇코쿠 죽음과 관계가 있는 구니카즈이기 때문에, 잇코쿠가 성을 떠나야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되찾을 거라는 설정도 꽤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잇코쿠가 성을 벗어나기 위해 '그릇'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오세이가 백방으로 노력해서 초대 영주의 영웅담을 그린 인형극 인형을 써먹는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런데 잇코쿠 사건 이야기는 재미는 있었지만,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어요. 모시는 가문이 중요하다고 해도, 가족보다 소중한건 없을텐데 말이죠. 측실이더라도 손자는 엄연히 영주의 피를 이었으니, 손자 편을 들어 주도권을 갖는게 당연하지 않나요? 주군의 가문이 자기 피붙이보다 중요하다는건 지극히 일본적인 발상이었다 생각됩니다. 또 잇코쿠 사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개도 지루했습니다. 특히 체질 탓에 어린 시절을 외지에서 보낸 오세이의 파란만장한 청춘은, 성에서 일하게 된 상황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한 빌드업에 불과해서 이렇게까지 길게 묘사할 필요는 없었어요. '요괴를 불러오는 목소리를 타고 났기에 고향에서 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귀가 먼 노부부의 하녀로 일하게 되면서 그 분들의 수화를 익혔다. 노부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수화 기술 덕분에 벙어리 공주님이 계신 성의 하녀로 뽑혔다.'가 전부니까요.

아울러 도미지로가 그림을 그린 뒤 인상을 그림에 남긴다는 설정도 이 작품에서 첫 등장하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설정이 덧붙여지는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도미지로가 추가된 것 부터가 별로에요. 첫 등장했을 때는 비젠야를 찾는데 남다른 행동력을 보여주면서 나름 활약했지만, 그 뒤는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면의 방"

어느날, 소녀 오타네가 괴담 이야기를 하겠다며 미시마야를 찾아왔다가 무례를 범한 끝에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소녀는 공동주택 관리인에게 끌려와서 오치카와 도미지로에게 '가면의 집'에서 겪었던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악의 결정체인 가면을 봉인하여 지키는 저택으로 오타네는 하녀로 고용되었었다. 악인만이 가면의 행동을 보고 들을 수가 있어서 좀도둑 오타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작 석달여만에 오타네는 가면의 꾀임에 넘어가 가면이 도망가는걸 돕고 마는데...

세상에 재앙을 불러 온다는 가면이 쌓여 있는 저택이라는 설정이 신화전설을 연상케했던 작품. 그래도 가면을 악당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덕분에 화재가 일어났던 가게 아들과 주변 사람들이 '사람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는 결말도 그럴싸 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재미를 느낄만한 극적 요소는 별로 없었습니다. 가면이 오타네를 유혹해서 도주한 뒤, 화재를 일으켰다는 전개는 예상 가능했거든요. 오히려 가면이 무엇이고 가면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등에 대한 정보는 쏙 빼 놓고 있으며, 가면이 달아날 수 없게 방에 파수꾼을 세워 놓으면 되지 않나? 와 같은, 설정상 헛점이 눈에 더 많이 뜨여서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고, 딱히 에도물일 이유도 없어 보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이한 이야기책"

다른 무사의 약혼녀와 사랑의 도피를 한 탓에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던 도망 무사 쥬베에는 일류 세책방 잇센도로부터 책 필사를 부탁받았다. 수상했지만 100냥이라는 거금에 홀려 고민 끝에 수락했다. 빚을 갚고 홀로 남은 딸과의 삶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쥬베에는 책 필사를 하면서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게 된 뒤, 자주 왕래하던 세책집 효탄고도의 주인에게 딸의 안녕을 부탁하는데....

세책집 효탄고도의 작은 주인 간이치가 흑백의 방에서 들려준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가면의 방"과 비슷합니다. 구멍투성이라는 점에서요. 잇센도가 필사를 맡긴 책의 정체도 알 수 없고, 책 내용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거든요. 간이치가 잇센도 책 필사를 했었고, 덕분에 스스로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다는걸 암시해 주기는 하지만 이 역시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는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 이야기를 들은 오치카가 간이치와 결혼할 결심을 한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전에 연심을 품고 있다던가 하는 묘사도 없이, 간이치가 남은 수명을 알고 있고, 그래서 뭔가 세상만사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게 드러난 이유의 전부라서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노안'이나, 조금 원숙해 보이는 사람이 오치카 취향이었나....

하여튼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금빛 눈의 고양이" 

오치카 결혼식으로 미시마야는 분주해졌다. 도미지로의 형 이이치로도 파견나갔던 가게에서 겸사겸사 잠깐 돌아왔고, 그는 도미지로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둘이 어렸을 때 겪었던 기묘한 고양이 마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미시마야에서 일할 뻔 했지만, 손을 다쳐서 포기하고 말았던 여성 삯바느질꾼 오킨의 생령이 고양이 마유가 되었었다는 이야기. 도미지로와 미시마야 가족들의 젊은 시절이 그려지는 소품입니다. 그냥 귀여운 고양이로만 남았다면 나름 훈훈한 추억담이었을텐데, 오사토가 낳았던 갓난 아이를 죽일 뻔 했다는 전개로 이야기가 무거워진건 아쉽습니다. 자기 대신 삯바느질 일꾼 자리를 차지했던 오사토에 대한 원망이 쌓였다면 오사토를 직접 노렸어야죠. 갓난아기를 죽이려고 한 건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잖아요.

이 작품의 존재 의미는 도미지로가 흑백의 방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는걸 확정하는 것 뿐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