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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2)

유럽 맛 여행 - 4점
나가라 료코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제목 그대로, 독일에 남편과 함께 유학 생활 중인 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유럽을 여행하며 맛 본 음식들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냥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먹었다가 내용의 전부에요. 일상계 수준을 벗어난, 거의 식단 일기에 가까운 그런 내용이에요. 때문에 그 어떤 드라마적인 재미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맛본 요리, 음식들에 대한 맛 이외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고요.

손으로 꼼꼼하게 그린 따뜻한 그림은 마음에 들지만, '만화' 보다는 인스타그램 요리 일기에 가깝습니다. 이야기가 없기에 만화로는 낙제점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의 식사"

'지비에'라고 불리우는 사냥한 동물들의 고기를 요리해 먹는 만화로 이전에 읽었던 "산적 다이어리"와 유사합니다. 다만 "산적 다이어리"는 '사냥'이 주였던 반면, 이 만화는 '요리'가 주라는 차이가 있지요. 주인공 아키노는 대부분의 경우 직접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사냥을 도와주는 등으로 야생 동물 고기를 얻거나, 함정을 만든거에 걸려든걸 나누거나 하는 식으로 재료를 얻거든요. 이렇게 얻은 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과정이 내용의 핵심입니다.

사슴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먹기 힘든 오소리 등이 재료라 상당히 흥미롭게 보았는데, "산적 다이어리"와 마찬가지로 맛은 대부분 호평이라 좋은 참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소리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의심스럽고요. 그래도 냄새가 심하고 엄청 고생해서 손질해야 하는 등 (사슴 내장의 경우는 여덟번도 넘게 데치는 등), 어려움도 비교적 공정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산적 다이어리"보다는 낫네요.

깔끔한 작화, 악역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냥꾼이자 야생 동물 손질, 요리의 달인 이쿠지노 캐릭터도 상당히 인상적이며, 아키노가 덫 사냥, 사냥감 해체, 몰이꾼 등을 거쳐 사냥꾼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도 나쁘지 않고요.

사냥이라는 주제 자체가 우리의 실생활과는 분리되어 있어서 현실감은 없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과 식욕과 나 1 - 6점
시나노가와 히데오 지음, 김동수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27세 여사원 히비노 아유미가 주말마다 산행을 떠나 산에서 온갖 요리를 해 먹는다는 내용입니다. 최근 유행인 캠핑에 요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만화인 셈이지요. 등산과 요리 중 한 가지만 좋아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머리를 잘 썼네요.

등산 쪽 정보도 충실히 제공하고 있지만 저는 아무래도 요리 쪽에 관심이 갔는데, 처음에는 주먹밥과 라면에서 시작해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오버스러운 온갖 요리가 등장하는게 포인트입니다. 심지어 일종의 수비드 조리법을 활용한 "로스트 비프"까지 등장하니까요.
산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도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뎃셍력이 부족해보이는 작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좀 더 꼼꼼한 그림체였다면 내용이 훨씬 잘 살아났을텐데 아쉽습니다. 등산 상황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집에서 따라 해 먹음직한 요리가 별로 없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1/18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2 - 카리야 테츠 / 김숙이 : 별점 1.5점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2 - 4점
카리야 테츠 지음, 김숙이 옮김/창해

1권을 오래전 읽었었고, 바로 얼마전에도 읽었었습니다. 별점은 2점이고, 딱히 구입해서 읽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게 감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2권 목차가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구입해서 읽어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이미 절판되었지만 많이 팔렸는지 중고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저를 낚았던 목차부터 소개해드립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 시드니에 살면서
제2장 | 세계 맛기행
제3장 | 맛의 나라 일본
제4장 | 유명가게를 찾아서
제5장 | 특별요리 강좌
제6장 | 못 다한 이야기
1장이야 그렇다쳐도, 2장은 카리야 테츠가 전 세계를 다니며 맛 본 맛있는 요리를 소개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3장에서는 일본의 맛있는 요리를 소개해주고요. 4장은 유명 가게들에서 맛본 경험담이, 5장은 자신만의 레시피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하게 기대를 벗어났습니다. 2장 "세계 맛기행"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맛 본 요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깊이있는 요리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고 개인적인 경험담이 펼쳐질 뿐입니다. 미국 요리의 대표로 스테이크의 예를 들면서 하는 이야기라곤 미국에서는 레어로 제대로 굽지 않더라, 웰던으로 구워져 나왔을 때 항의하면 제대로 갖다 주라, 일본에서는 항의해봤자 미안하다고만 하지 다시 주지 않더라는게 전부에요. 프랑스 3대 진미 이야기도 푸아그라와 캐비아는 그냥저냥이고 트뤼프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설명 밖에는 없고요. 다른 모든 이야기가 다 이런 식입니다.
심지어 "유명 가게를 찾아서"는 제목과는 전혀 다릅니다. 진짜 유명 가게가 아니라 자기가 갔을 때 최고였던 가게를 소개하고 있거든요. 니기리즈시라면 '스키야바시 지로' 정도는 나와줄 줄 알았는데, 1975년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도 모르는 초밥 가게가 나오는 식으로 말이죠.
"특별요리 강좌"는 기대대로 레시피가 소개되기는 하나 로스트 비프는 오븐이 없으니 도전하기 어렵고, 채 선 양배추에 마요네즈를 듬뿍 바르고 간장을 조금 친 뒤 잘 휘젓고 먹으라는 요리, 무를 국물 맛이 배도록 푹 끓인 뒤 튀겨 먹는 요리 등은 별로 따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게다가 에세이 전체적으로 1권에서도 눈꼴 사나왔던 꼰대 마인드가 지배하고 있는 것도 단점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심한 말을 한 뒤 '너무 극단적인 말이 아니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남에게 실례가 되든 다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뭐든지 말해버리는 정의의 악한이란 말이다'고 본인을 정당화하는데 참 꼴보기 싫습니다. 정의의 악한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요. 나는 저렇게 늙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만 듭니다.

물론 꼰대 마인드라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 없는건 아닙니다. 명품을 이해하지 못하며, 유명세에 좌지우지된다는건 그만큼 자신감이 없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에요. 영국의 전통있는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 2층에는 여성 손님 입장이 아직 금지되었다는 말을 듣고 음식이 맛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관습을 전통이라 자랑하는 듯한 인종에게 섬세한 감정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동의할 수 밖에는 없지요.
음식 전문가로서의 식견이나 경험을 살짝 보여주는 부분들도 간혹 등장합니다. 소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도쿄 토박이들이 소바 끝만 살짝 담구어 먹는 이유는 소바의 향과 맛에 소바 국물의 깊은 맛을 살짝 더해서 먹기 위함이라면서, 이 국물에 대해 "맛의 달인"에서도 등장했던 명점 '나미키 야부'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내용인데 여러모로 볼 만 했습니다.

그래도 장점은 극히 드물고, 자의식 강한 꼰대의 자기 주장, 경험만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5/06/23

다섯 마리 아기 돼지 - 애거스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2.5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포와로를 찾아온 미모의 여성 칼라. 그녀는 16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의뢰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여사님 장편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10"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에디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디언지 선정 베스트에도 포함되어 있고, 판매량에서도 10위 안에 드는 작품이더군요. 여태 읽어보지 않은 미숙함을 탓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섯 마리 아기 돼지라는 마더 구즈 동요를 작품에 깊이 개입시켜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주요 증인 다섯 명을 동요 속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캐릭터를 일체화시켜서요. 시장에 간 돼지는 돈을 밝히는 속물 필립 블레이크, 집에 머무른 돼지는 소심하고 영향력없는 메러디스 블레이크, 로스트비프를 먹은 돼지는 천박하고 화려한 레이디 디티셤(엘사 그리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돼지는 검소하지만 날카로운 세실리아 윌리엄스, "꿀꿀꿀" 운 돼지는 말괄량이 안젤라 워런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 솜씨가 일품이며, 덕분에 작품이 적절한 분량으로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장편이 흔하디 흔한데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작품을 단 350페이지 내로 마무리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긴 장편들 대부분이 상세한 배경 설명과 묘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데 반해, 마더 구즈 동요를 활용하여 짧고 효과적으로 캐릭터를 구체화시킨건 역시나 거장다와요. 트릭이 중심인 고전 황금기 걸작은 아무래도 트릭을 제외하고는 조금 얄팍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요.

추리적으로도 고전 황금기 작품답습니다. 16년 전 벌어졌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설정 탓에 포와로가 변호사와 경찰 등 사건 관계자는 물론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섯 명을 찾아다니면서 증언을 듣는 등 발로 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락의자 탐정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독자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받는 덕분에 포와로와 공정한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지요. 당연히 저는 포와로에게 또 패배했습니다만... 고전 황금기 작품의 최대 매력인 두뇌 싸움은 항상 즐거운 법입니다. 진상과 동기 모두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요.

또 각자의 증언이 미묘하게 다르고, 여기서 진상을 찾아낸다는 설정과 전개를 가진 많은 유사 작품들  - 대표적으로 "라쇼몽" - 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일관된 방향으로 증인들이 증언하고 있고 딱 한 명만 거짓을 말한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이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열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진상을 모두 설명하고 마무리 짓는 결말은 좀 당황스럽더군요. 너무 급작스러웠어요. 진상은 알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캐롤라인이 안젤라가 범인이라고 오해했다 하더라도, 엘사 그리어가 그림만 완성되면 내쫓길 것이라는걸 왜 변호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요? 증인이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전략입니다. 짐을 싸서 내쫓을 것이라는 말은 블레이크 형제가 듣기도 했고요. 어차피 손해볼 건 없었는데 말이죠. 경찰 수사를 통해서도 엘사 그리어가 진범임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아끼는 동생은 물론 다섯 살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가 고아가 될 수도 있는데 쓸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써 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납득이 잘 되지 않네요.

또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마더 구즈 동요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좋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친숙하지가 않다보니 잘 와 닿지 않기는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사실 이 책이 700번째 추리소설 리뷰 글입니다. 그래도 나름 기념할만한 리뷰 도서인데 여사님 작품 정도는 읽어 줘야 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고르기도 했습니다. 별 네개 이상의 걸작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요. 허나 제가 납득되지 않는 모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023/11/19

식민지의 식탁- 박현수 : 별점 4점

식민지의 식탁 - 8점
박현수 지음/이숲

일제 강점기 시대 발표되었던 문학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먹거리, 식문화 및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고찰하도록 해 주는 미시사, 식문화, 인문학 서적.

일제 강점기 시대는 관심이 많아서 예전부터 이런저런 미시사 서적을 읽어왔었는데, '문학 작품'을 가지고 식문화를 조망하는 책은 처음 봤습니다. 크게 10개의 작품으로 목차는 구분되어 있는데, 실제로 등장하는 작품은 훨씬 더 많습니다. 이광수의 "무정", 이상의 "날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동백꽃", 심훈의 "상록수" 등 누구나 아는 유명 작품들에서 이름 모를 작품까지 그 폭도 굉장히 넓고요. 
샌드위치, 우동, 설렁탕 등의 요리와 관부 연락선 내 식당, 선술집, 카페와 바, 시골 주막, 백화점과 호텔, 명치제과 등의 장소, 그리고 요리의 가격과 그 유래, 당시 레시피까지 심도깊게 알려줘서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여러 작품들에서의 해당 요리와 장소에 대한 묘사를 뽑아내어 생생하게 알려줌은 물론이고, 관련된 다른 자료들도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선술집이 술 한 잔을 시키면 안주 하나가 공짜였다, 서울 시내에서 약수를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지짐이'는 찌개와 국 사이에 위치한 국물 요리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위스키 중 하나는 '화이트 호스'였다는 등 새롭게 알게된 지식도 많습니다. 김남천의 "사랑의 수족관" 속 묘사를 통해 당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는게 일반적이었다는 것도 그러하고요. 하긴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다방' 이란 곳에 가면 항상 설탕 단지가 놓여있었지요.
또 조선 최고의 고급 식당이었다는 조선호텔의 1936년 정통 코스 순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가짓수가 다소 부족하지만, 지금 보아도 손색없는 구성이더라고요. 1936년에 조선에서 자몽 소르베라니!
  1. 애피타이저 : 콘소메와 레터스 샐러드
  2. 메인요리 : 오리간 구이와 로스트 비프
  3. 디저트 : 자몽 소르베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아침, 점심, 저녁 각각 1원 50전, 2원, 3원 50전으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45,000원에서 105,000원 정도라는 가격도 꽤 상식적이고요.
그 외에도 송이 산적 레시피는 새송이 버섯으로 대체해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등, 제 흥미를 끈 내용은 굉장히 많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작품 속 인용하는 부분으로 분석하여 알려주기도 하는데, 심훈의 "상록수"에서 동혁과 영신을 초대한 백 선생이 입만 살아있는 속물이었다는건 그녀가 대접한 카레라이스, 하이라이스 등으로 알 수 있다는 식입니다. 농촌 계몽을 부르짖지만, 본인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그걸 과시까지 한다는걸 잘 드러내기 때문이거든요. 어린 시절 "상록수"를 읽었을 때에는 카레라이스가 '새로운 화양절충'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걸 몰랐었기에 저런 은유나 비유를 잘 알 수 없었는데, 확실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느냐가 작품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영신이 일본에 갔다 온 뒤, 선물로 가지고 온 바나나를 잘게 썰어 아이들에게 먹여주었던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귀했다는건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면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거지요. 조금 부끄럽네요. 앞으로 좀 더 책을 생각하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다른 일제 강점기를 소개하는 책들과 겹치는 내용이 많은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바와 카페는 이미 많은 책을 통해 접했었습니다. 이 책처럼 문학 작품을 이용하여 소개해 준건 아니지만요. 낙랑파라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시골 주막의 풍경 등은 주제와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였으며, 가끔 저자의 주장이 뭔가 촛점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는건 단점입니다. 샌드위치와 된장찌게의 비유에서 갑자기 레비스트로스의 요리의 삼각형으로 튀는 부분처럼요. 그냥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이 훨씬 더 많은 책인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식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3/01

포크를 생각하다 -비 윌슨 / 김명남 : 별점 3.5점

포크를 생각하다 - 8점
비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까치

포크를 비롯한 여러가지 주방 기구, 조리 도구들을 통해 식탁조리역사를 돌아보는 미시사, 문화사, 요리사 서적입니다. 

냄비와 팬, 칼, 불, 계량, 갈기, 먹기, 얼음, 부엌의 8개 주제로 나뉘며, 주제별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큰 맥락은 같습니다. 주제 모두 지금의 부엌은 급격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고작해야 반세기 남짓한 상황의 결과물일 뿐이다, 세상에 완벽한 기술은 없다, 그렇지만 기술의 발전이 꼭 요리의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명제를 이런저런 기구와 도구들을 통해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기술의 혁신을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고대 로마의 '모르타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모르타리아는 다양한 허브와 양념을 절구로 섞어 만든 혼합물로 노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요리인데, 지금은 이 요리는 몇 초 안에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맛은 대단하지 않아요. 고된 노동이라는 양념이 맛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노동과 노력을 없앤 혁신에 대해서는 저자도 높이 평가합니다. 이러한 기술 혁신 과정에 있었던 온갖 시행 착오도 재미있습니다.
주물팬, 알루미늄팬 등 수많은 팬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팬이 무엇인지를 여러가지 측정을 통해 밝혀낸다던가, 계량을 위한 가장 완벽한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는 등 기술 발전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여러가지 호기심에 대한 답들, 그리고 중세에는 조리 시간 측정을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우는 동안'처럼 기도 시간으로 명시했으며, 온도는 오븐 안에 손을 넣어 느껴지는 아픔으로 측정했다는 등의 도구 발전의 역사 속에 있었던 이런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여러가지 도구의 역사를 알게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샐러드 채소를 나이프로 자르지 않는 이유는, 오래전 나이프는 강철제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비네그레트 소스와 강철날이 만나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요.
우리에게 친숙한 형태의 자동 토스터는 찰스 스트라이트의 발명품으로, 1921년 수직으로 튀어오르는 용수철과 조절 가능한 타이머에 대한 특허를 냈다고 하고요. 직장 카페테리아에서 번번이 탄 토스트를 내놓는데 질려서 내 놓은 발명이라는데 "오므라이스 잼잼"에 써 먹음직한 이야기네요.

개인적으로는 냉장고 이야기에서 건네는 화두가 의미심장했습니다. 베이컨이나 훈제 요리 등은 냉장 기법이 등장했더라면 등장하지 않았을 요리들인데, 왜 이런 요리를 우리는 지금도 먹고 있는 걸까요? 건강을 생각한다며 '저염 베이컨'이 등장한지도 오래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저염' 이라는건 보존에는 걸맞지 않으니 애초에 베이컨에 적절치 않은 방식이지요. 이러느니 그냥 고기를 사다가 조리해 먹는게 더 낫고요. 이는 익숙한 요리법, 요리가 한번 실생활에 침투하면 변하기가 정말로 쉽지 않다는걸 잘 증명할 뿐 아니라, 기술이 발전한다고 요리가 따라서 발전하지도 않는다는 좋은 예인 셈입니다. 배달 문화가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지만, 배달에 최적화된 음식이 등장하고 있지는 못한 최근 트렌드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요구르트"는 또 이와는 정확하게 반대입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영국인들이 먹던 유제품 디저트는 우유에 쌀, 타피오카 등을 넣어 미지근하게 먹는 우유 푸딩이었는데, 1950년대 이후 우유 푸딩은 거의 사라지고 요구르트가 수십억 달러의 시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요구르트가 냉장고 문 선반에 놓아두면 보기가 좋다는 이유 때문에요. 기술의 발전이 전통 요리를 없애고, 새로운 요리의 유행을 만든 예인 셈이지요. 좋은 방향은 아닌 듯 하지만요.

그 외에도 생각할 거리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사이 부드러운 음식을 많이 먹는 탓에 어린 아이들의 턱 뼈와 근육 발달이 더뎌진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나이프와 포크로 음식을 작게 잘라 먹기 시작한 250여년 전 부터 피개교합(위 앞니가 아래 앞니보다 살짝 튀어나온 상태)이 등장하였으며, 지금은 대세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농업 도입 시기가 아니라 서유럽에서는 18세기 말에 들어서야 지위가 높은 사람들부터 피개교합으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이는 식탁에 나이프와 포크가 도입된 시기와 일치하고요. 즉, 이전에는 입에 음식을 넣고 입으로 끊어내었지만, 나이프를 이용하여 이런 방식이 종말을 고했으며, 나이프가 무뎌지면서 음식은 더 부드러워졌기 때문에 더더욱 씹을 필요가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큰 칼로 모든 음식을 잘게 잘라 만드는 중국에서는 피개교합이 800~1,000년 일찍 나타났다는 점에서도 이 이론은 설득력이 높습니다.
또 불을 이용한 조리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리처드 랭엄의 "요리 본능"을 통해서도 접했던 내용이지만 이 책은 불이 어떻게 부엌 안으로 들어와 가두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라마다의 조리 환경 차이가 생긴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영국이 '로스팅' 강국이 된 이유는 땔나무가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로스팅 기술이 워낙 빼어나 영국의 로스트 비프는 최고였지만, 로스팅 기술이 한물 간 뒤 영국 요리사들은 뒤쳐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의 영국 요리가 나쁜 이미지가 생긴 원인이 아닌가 싶군요. 불, 즉 열원에 대한 이야기의 끝 마무리가 '전자 레인지'라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불에 대한 통제가 핵심이었던 역사가, 결국 불 없는 요리로 귀결되었다는 뜻인데, 내연 기관이 결국 전기 모터로 바뀐다는 이야기와도 같은 이야기겠지요?

이렇게 흥미로우면서도, 깊이있는 글들이 많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우선 저자의 개인 의견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조금은 더 객관적인 시각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약간 에세이 느낌도 들거든요. 또 도판이 거의 없는데 이건 분명한 약점이에요. 도구의 변천사를 그림으로 설명해주는 페이지가 있었더라면 아주 완벽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재미와 교양 양쪽을 만족시키는 좋은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식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12/10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 이시모치 아사미 / 김진아 : 별점 2점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 4점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진아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와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등으로 접했던 이시모치 아사미의 최신작. 제가 읽었던 전작들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전형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 친한 부부 - 화자인 나 (후유키 나쓰미)와 겐타 부부, 나가에와 나기사 부부 - 가 가족들끼리 술과 맛있는 요리를 먹는 모임을 가질 때 안주와 연관되는 약간의 수수께끼가 있는 이야기와 여러가지 추리를 나누는데, 모두가 생각도 못했던 숨겨진 진상을 나가에가 추리해낸다는 내용으로, 마지막 작품인 <<일석이조>>만 후유키 부부의 아들 다이가 탐정역으로 나올 뿐 구성은 똑같습니다.

수록작 중 두 작품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루씩 차이난다>>입니다. 아는 쌍둥이 초등학생이 있는데, 부모는 쌍둥이를 같은 학원에, 서로 다른 요일에 보냈습니다. 학원이 꽤 멀어서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는데도 말이지요.
아이들이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번갈아 실컷 하도록 그랬다는 등의 이런 저런 추리가 이어지지만, 나가에가 쌍둥이가 야무졌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함께 살던 조부모가 아픈 탓에 둘 중 한 명은 항상 집에 남아 비상 상황에 대비했어야 했던 거라면서요. 추리에도 대한 든거, 단서로 다는건 옛스러운 쌍둥이 자매 이름과 엄마가 너무 바빴다는 것, 그리고 쌍둥이 자매가 초등학생치고는 야무졌다는 것으로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일단 헤어졌다 다시 합친다>>에서는, 회사에서 미혼모가 되었던 미호 씨가 출산하고 2년 뒤 같은 회사의 노모토 씨와 결혼한 이야기의 진상이 그려집니다. 미호 씨의 아이는 노모토 씨와 똑 닮았고, 그녀도 아이 아빠가 '노모토 씨'라는걸 부정하지 않았는데 왜 출산 후 2년이나 지나서 결혼했을까요? 나가에가 추리한 진상은 노모토 씨는 아이 아빠의 동생이었다는 겁니다. 아이 아빠였던 형이 결혼 직전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그런 형수와 조카를 가까이하며 돕다가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미호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기 전 사흘 정도 회사를 쉬고 초췌한 얼굴로 출근했었다 - 연인이 사망했기 때문 - 는 등의 단서를 깨알같이 배치하여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원서를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노모토 지로의 이름이 한자로 등장하는지 좀 궁금하네요. 나름 결정적인 단서라서요.
마지막 작품인 <<일석이조>>는 본편 추리보다는, 책을 읽기 싫어하고 공작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이 방학 숙제용 독서 감상문으로 공작 키트 조립 설명서 감상문을 제출했다는 기상천외한 발상과 결말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더 볼만 했습니다. 두 가족의 아들 딸인 다이와 사키가 알고보니 어른이 된 시점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이 결혼을 약속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작품의 마무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생각되네요.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추리가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산 넘어 산>>에서는 상사로부터 필요 없다는 안마의자를 받았지만, 기껏 운반한 뒤 현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걸 알게되어 우여곡절 끝에 결국 돈을 내고 재활용 폐기물로 버렸다는 다노이 씨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가에는 이건 모두 다노이 씨 부인의 계획이었다고 추리하지요. 근거는 미니밴을 불러서 옮길 정도면 당연히 치수를 쟀을테고, 현관문 크기도 새로 이사를 갔으면 알고 있었을텐데 그걸 알고도 무리해서 옮겼다는 것, 그리고 집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어서 구식 안마의자는 위험했는데 구태여 받아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상사가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지만, 부하직원 입장에서 그걸 거절못해 생긴 해프닝이라면서요. 하지만 이럴거면 미니밴으로 집으로 옮기는 시늉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면 되지요. 분해를 해 가면서까지 집 안에 들이려는 시도는 억지스러웠어요. 상사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해도, 동네 주민들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느새 다 되어 있다>>는 입시에 열을 올렸던 엄마의 아이 마사키는 3지망 학교에 합격했고, 아이를 방치했던 엄마 아이 노아는 1지망 학교에 합격했던 이야기의 진상인데 이건 추리라고 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아이를 집에서 가르칠 자신이 없어 입시 학원에 보냈다'는게 어떻게 '아이를 방치했다'라고 주위에 알려졌는지를 잘 모르겠네요. 입시 학원에 주말에도 열심히 다닌 아이가 1지망 학교에 합격한건 전혀 이상한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야기를 전한 후유키 나쓰미는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인데도 불구하고, 노아와 마사키가 입학한 학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걸로 묘사되는데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그 뒤 이어지는 나머지 세 편의 이야기는 추리적으로는 아예 볼게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로 추리를 쏟아내는 모임도 비현실적이며, 나가에가 한 마디하면 정적에 빠진다는 묘사도 촌스러웠습니다.주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풀어내는거라, 어차피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는 단점도 크고요.

하지만 추리적인 부분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건 기대했던 요리, 음식과의 조화가 영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요리나 음식이 추리의 핵심 요소로 사용되는걸 기대했었는데, 사건 이야기를 끌고 오기 위한 소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사건 이야기와 엮는 것도 몇몇 사건은 억지스러웠습니아. <<산 넘어 산>>이 대표적입니다. 로스트비프를 잘 썰지 못한건 다소 아쉬움이 있는 정도일 뿐, '산 넘어 산'이라고 표현하는건 잘못된 경우지요. 무슨 일을 도모하는데 예상못한 어려움이 닥친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어 안 든 다코야키>>를 '엘리트인데 속에 든게 없다'는 신지 아빠에게 빗대는건 잘못된 것이었고요. 엘리트라는 것 자체가 문어가 든 다코야키잖아요?
음식, 요리 묘사도 상식적인 수준이며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서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소소한 일상계로 가볍게 즐길만은 하지만, 추리적으로나 요리 측면으로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일단 헤어졌다 다시 합친다>>에서 아이 얼굴이 아빠와 닮았다는 표현을 "빼쐈다" 라고 번역했는데, "빼쏘다"가 사전에 있는 말이기는 해도 "빼닮았다"가 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2009/05/20

인체 모형의 밤 - 나카지마 라모 / 한희선 : 별점 3점

인체 모형의 밤 - 6점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일본 작가 나카지마 라모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단편들은 제목처럼 인체모형에 관련된 기괴한 묘사에서 시작되어, 눈-피-코-귀-다리-무릎-배꼽-팔-뼈-위-유방-날개와 성기 라는 인체의 부분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보고 구입하게 되었네요.

각 단편별로 분위기가 굉징하 다른 것이 특징인데, 유령이 등장하는 정통(?) 심령 호러물에서 부터 시작해서, 일종의 괴물이 등장하는 스플래터 호러, 심리 스릴러에 더불어 진지한 드라마와 1인칭 시점의 블랙 코미디까지 실려 있어서 굉장히 풍성합니다. 그야말로 색다른 인생을 살아온 작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품별 수준의 편차가 크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예상 가능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좀 아쉽네요. 뭔가 한번 정도 더 비틀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하게 마무리한게 아닌가 싶거든요. 또한 앞서 말했듯 쟝르가 다양해서 호러 소설이 취향이 아니더라도 즐길 작품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외려 정통 호러로 보이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인 "사안"과 "코" 처럼 오싹하면서도 의외성이 있는 작품들이 더욱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충동구매에 가까운 구매였는데 다행히 평균 이상은 해 주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해서 점수가 더 높을지도 모르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프롤로그 : 인체모형의 밤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작품을 한데 묶는 이야기로 별 특기할 점은 없습니다.

사안(邪眼) : 싱가포르를 무대로 한 심리 스릴러물로 스멀스멀 계열의 작품입니다. 일본인 싱가포르 주재원의 아내가 임신하였는데, 현지 고용인인 가정부가 임신한 아이가 "사안"을 지녔다.. 라고 믿는다는 내용으로, 사안이라는 전설과 푸른눈이라는 설정을 잘 결합한 좋은 단편입니다. 진실이 괴담보다 무섭다는 마지막 반전도 톡 쏘는 맛이 아주 좋았고요. 이런 류의 단편으로는 모범답안이 아닐까 싶네요.

세르피네의 피 : 세르피네라는 섬을 그야말로 "낙원" 이라고 믿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사실 "낙원"의 실체는 달랐다.. 라는 반전이 있는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반전에 이르기까지 교묘하게 장치한 복선을 풀어나가는 맛은 괜찮지만 반전 자체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아서 약간은 심심했습니다. 또 "피"를 연관시키기에는 좀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 조향사인 주인공은 옛 남자친구의 소개로 싼 맨션을 얻어 이사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수없는 물소리와 냄새 때문에 곤란해 하던 차에, 전 세입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입니다. 뻔하게 흘러가서 뻔하게 끝맺긴 하지만 유령 이야기의 무서운 점, 즉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를 조향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냈으며 특히나 "돼지뼈 라면 국물 끓이는 냄새"의 정체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전 정말이지 일본 욕탕이 물을 그렇게 데우는 시스템이라는걸 몰라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네요.

굶주린 귀 :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통해 접한 것이 이 단편의 소개였죠.
옆방을 엿듣는것이 취미인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새로 이사온 집 옆집을 엿듣던 중 분명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인데 여자만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옆집에 인사를 가는 척 하며 여러가지를 물어보던 중에 옆집 여자 남편이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조금은 허무한 마음에 술을 사러가던 주인공은 여자 집을 우연히 올려다 보는데.... "남자 빨래가 하나도 없어!"
이 줄거리만 놓고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아쉽게도 결말이 너무 예상 가능한 범위내에 있었습니다. 좀 더 반전다운 반전이 등장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것 같아요. 예를 들면 레즈비언 부부였다던가, 남편이 게이바 사장이나 트랜스젠더였다던가....

건각(健脚)-국도 43호선의 수수께끼 : 전직 드라이버 지망생이었던 주인공과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된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괴담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 단편집 안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뭔가를 전해준다는 것 하나가 독특할 뿐 별로 남는건 없는 그냥 홈드라마같은 느낌의 소품이었습니다.

무릎 : "인면창" 이 실제로 그 주인을 먹어버린다! 는 내용의 이종괴물 스플래터 호러 단편입니다. 전개는 한마디로 일직선이라 별로 평할게 없는 평작인데, 주인공의 설정이 독특하고 전개가 어울리지 않게 유머스러워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나저나, 인면창이라니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인면창이 있는 피해자(?) 가 "블랙잭"을 만났더라면 완치되고 생명을 건지지 않았을까요?^^

피라미드의 배꼽 : 대 부호의 데릴사위인 가난뱅이 학자가 도심 한복판에 피라미드를 건축한다! 는 SF 단편입니다. 피라밋과 피라밋 파워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이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색작으로, 작가가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 박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역시나 좀 뻔해서 별로 특기할건 없더군요.

EIGHT ARMS TO HOLD YOU : 비틀즈의 존 레논의 미발표 곡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의 방대한 지식세계를 다시한번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비틀즈 4명이 안아준다는" 노래의 제목과, 마지막의 반전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좋았고요. 반전이 너무 끼워다 맞추는 것이 지나쳐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평작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뼈 먹는 가락 : 1인칭 시점의 공원묘지 판매원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었는데, 이유는 주인공이 왜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너무 다양한 내용을 펼쳐만 놓았지 이야기의 맥락이 전무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도 어설퍼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수준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장의사" 정도로는 이야기를 끌고가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다카코의 위주머니 : 거식증에 걸린 채식주의자 소녀가 최후의 순간에는 부모에게 살의를 품는다는 이야기로 "채식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내용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문제는 별다른 공포도, 반전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겠죠. 그냥저냥 홈드라마 소품입니다. 이게 호러가 되려면 다카코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가르는 정도는 되어야겠죠. 어쨌건 저는 읽고나니 로스트비프가 먹고싶어질 뿐이었습니다.^^;

유방 : 영매사가 불러온 유령을 거짓이라 치부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짤막한 블랙코미디 꽁트로 약간의 반전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별로 특이하지는 않더군요.

날개와 성기 : 무슨 이야기인지? 성기를 없애고 스스로 "무성", 천사와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인공이 명상을 통해 접한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묘사는 현실적이고 와 닿지만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라 평가 자체가 어렵네요....

에필로그 목저택 :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역시나 별로 특기할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