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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8

오이시이 빵 - 판토타마네기 / 황세정 : 별점 2.5점

오이시이 빵 - 6점
판토타마네기 지음, 황세정 옮김, 오기야마 가즈야 감수/시그마북스

을 사랑하는 저자가 직접 그리고 쓴 개인적인 빵 사전입니다. 직접 먹어보고, 찾아보고, 조사해 본 범위 내에서의 여러가지 빵과 빵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가나다순서대로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러스트와 짤막한 글이 전부라 깊이는 없고, 빵에 대해 전문적인 정보를 얻기도 부족합니다. 저자가 빵을 사랑하는 일반인일 뿐이며, 관련 정보를 접한 참고 서적이나 출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이게 정말 맞는 내용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도넛 이름의 유래가 반죽 (Dough)에 견과류 (Nuts)가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영 미심쩍습니다. 빵과 별 관계가 없는 내용도 적지는 않은 편이고요. 그리고 중간중간 페이지를 오가는 부분이 많이 있는건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좀 불편했었습니다. 일본어 원서도 이렇게 페이지를 오가는 부분이 많을지 조금 궁금해지네요.

그래도 이런저런 빵의 이름을 확실히 알게된건 수확입니다. '바타르'는 바게트보다 길이가 짧은, '중간'이라는 뜻의 이름이라던가, 치아바타는 슬리퍼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던가('치아바타'는 이탈리아어로 슬리퍼라는 뜻), 파운드 케이크는 밀가루와 설탕, 버터, 달걀이 각각 1 파운드 씩 들어가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등의 이야기들 덕분이지요.
또 일본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특산물' 빵에 대한 소개도 이 책만의 강점입니다. 직접 전국을 찾아다니며 조사한 결과로 보이는데, 이런저런 재미난 빵들이 많이 등장하거든요. 후쿠오카의 '긴초코', 초콜릿 빵 '맨해튼'. '멘타이 프랑스'. '소문의 빵'(후쿠오카 출신이라 그런지 후쿠오카 빵과 빵집 소개가 많습니다), 삿포로의 '지쿠와 빵', 도야마 현의 '비취 빵', 시가 현의 샐러드 빵, 기타큐슈 어묵집의 '카나페', 키타큐슈의 '킹 빵" 등은 소개만 보아도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어 보이고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비취 빵, 야키소바 빵과 메론 빵, 카레 빵, 크림 빵의 유래, 크로크 마담과 크로크 무슈의 차이 등 토막 상식같은 정보들도 값집니다. 

중간에 등장한, 세라믹이 붙어 있는 그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척 탐나네요. 숯불 위에서 빵을 굽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데, 왜 저는 몰랐을까요? 조금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카모메 그릴'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더라고요. "카모메 식당"에서 연어 구을 때 썼다나 뭐라나. 지금 집은 인덕션 구조라 당장 구입할 생각은 없지만, 이사가게 되면 구입을 고려해봐야 겠습니다. 

아울러 이런 글들과 함께하는 그림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그냥 일러스트만 보아도 높은 수준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아사오 하루밍 느낌도 살짝 나는, 간단하면서도 선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그림입니다. 이 정도면 그림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작업은 별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약간 의아합니다.

무엇보다도 읽는 내내 책 곳곳에서 빵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흐뭇했습니다. 빵을 너무 좋아해서 후쿠오카에 살다가 빵 소비량이 일본 수위를 다투는 교토로 이사가서 수년 동안 살고, 빵에 대해 궁금한게 많아서 교토에서 빵에 대한 무가지를 직접 만들어 24호까지 배포하고, 생계 유지는 빵집 아르바이트, 여행은 빵집 위주로 다닌다는 덕력이 책 전체에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덕후덕력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보 측면보다는 일상계 에세이 만화에 가까운 느낌으로 읽는다면 더 좋을, 그런 책입니다.

2016/04/18

클로저 이상용 - 최훈 : 별점 3점

클로저 이상용 9 - 6점 최훈 지음/알에이치코리아(RHK)

최훈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하대리"부터 팬이 되었었지요. 독특한 개그 센스에 더해 하루하루 완결되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장편을 만들어 낸 아이디어가 정말 참신했기 때문입니다. 4컷 만화들이 이어져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되는 작품은 일본에서는 이전부터 있었지만("아즈망가 대왕"), 국내에서는 처음 보는 형식이었고 완성도도 높았습니다. 이어진 "MLB 카툰"에서부터는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덕력과 패러디 센스가 제대로 폭발했고요.

하지만 이후 연재작들로 팬심은 많이 떠났습니다. 완결짓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탓이 큽니다. 한 편, 한 편으로 완결되는 프로야구 카툰 같은 작품은 언제 연재가 중단되어도 괜찮지만, 장편 연재물이었던 "하대리" 3부(였나요?), 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록커두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전직 여자 농구 선수들이 나오는 농구 만화 등은 아무런 언급 없이 연재가 중단되었지요.

그나마 완결된 작품도 흐지부지 끝나서 더 욕을 먹었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GM"입니다. 국내 최초로 스카우터, 단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작중에 흩뿌린 떡밥을 회수하지 못한 채 갑자기 끝나 버렸습니다. 스토브리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시즌 개막도 맞지 못하고 끝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삼국전투기"의 경우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큰 비난을 사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런저런 작품들을 모두 끝내 버린 덕분인지, 최근의 행보는 다행스럽습니다. "삼국전투기"는 공명 사후 이야기를 유사 콘텐츠를 압도할 정도의 디테일로 다루며 박수를 받으며 마무리되었고, 이 작품 "클로저 이상용" 역시 정상적으로 완결에 이르렀으니까요.

"클로저 이상용"은 야구 만화인데, 2군에서 올라온 이상용과 진승남 배터리가 패배주의, 개인주의, 세력 다툼으로 엉망이 된 게이터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며 여러 상대팀을 제압해 결국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내용입니다. 전작 "GM"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게 특징이기도 합니다. 전작의 캐릭터(하민우 등)가 감초 역할로 등장해 팬으로서 무척 반가웠어요.

단지 스핀오프에 그치지 않고, 독립적인 작품으로의 재미 요소도 확실합니다. 가장 큰 재미 요소는 이상용이 라이벌들과 펼치는 두뇌 게임심리전이고요. 두 가지 요소 모두 이 분야의 본좌 "원 아웃"과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펼쳐집니다. 토쿠치 토야와 이상용 모두 구위가 아닌 심리전을 통해 타자를 제압하는 기교파 투수이기 때문이지요.

주인공이 적당한 구위를 가지고 현실적인 야구를 한다는 점에서는 "그라제니"의 본타와도 살짝 겹치는데, 단순한 설정 차용은 아닙니다. 이상용은 철저한 분석과 데이터 기반의 야구를 하고, 확실한 주무기 (체인지업)을 갖춘 데다 안 되는 타자는 철저히 거르는 식으로 비겁하게 이겨 나간다는 차이가 있거든요. 마지막 장면에서 어깨가 망가진 상태로 승부하면서도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모습은 클라이맥스로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최훈 작가 본인이 상당한 수준의 야구 팬이기에 가능한 디테일들도 큰 장점입니다. "GM"에서도 선보였던 데이터 위주의 선수 설정들, 옷주름으로 구질을 파악한다는(쿠세) 이야기, 이상용의 독특한 작전으로 만든 병살 플레이, 외국인 투수와 통역의 대화 같은 깨알 개그, 작가 특유의 패러디들까지 풍성했습니다. KBO 팀을 연상케 하는 구단들의 설정은 물론, 실존 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 역시 야구팬이라면 놓치기 어려운 재미 요소고요. 게이터스가 LG 트윈스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라 LG 팬에게는 더더욱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다만 성적 때문에 불편했을지도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 역시 던진 떡밥을 모두 회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상용을 둘러싼 삼각관계, 라이벌 선수들과의 관계가 대표적입니다. 선데빌스의 김성욱에게 함정을 심어두었다는 설정, 이헌과 여자를 두고 얽힐 것 같던 전개 모두 마무리되지 않고 끝나 버렸습니다. 일본 연재물처럼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갖추고 이어졌다면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신문 연재 특성상 그게 어려웠던 것 같네요.

또한 이상용이 만년 2군을 전전하다가 체인지업을 완성해 최고의 마무리가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했는데, 마지막에 커브까지 갖춘 완전체 투수로 업그레이드되는 전개는 원래의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속 시원한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고교 야구 만화로 치면 지구 예선을 통과해 갑자원에 진출하면서 ‘1부 완결’로 끝나는 느낌이랄까요.
아울러 정인권과의 최후의 승부는 명장면이었지만 설득력 면에서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미 직구와 체인지업의 구위가 떨어진 상태에서 그립 변화만으로 삼진을 잡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웠으니까요. 오히려 직구 승부인데 어깨가 망가져 체인지업의 속도로 들어온다는 설정이 더 그럴듯했을 것 같습니다.

후일담 역시 너무 간략합니다. 게이터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실패했고, 부상당한 이상용은 수술과 재활 끝에 1년 만에 방출되었다가 램스에 입단해 선발 투수로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서사를 단 한 편으로 마무리한건 여러모로 부족했어요.

이렇듯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야구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속작이 시작된다면 부족했던 부분을 잘 보완해 주었으면 합니다.

2023/02/04

대포와 스탬프 1~9 - 하야미 라센진 : 별점 2.5점

[고화질세트] 대포와 스탬프 (총9권/완결) - 6점 하야미 라센진/미우(대원씨아이)

밀덕 만화가 하야미 라센진의 (현재까지는) 최장 장편. 2017년에 1권이 국내 첫 소개되고, 6년만에 완결을 보았네요.
다음권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개별 단편 하나 하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단팥죽을 좋아하고 엄청난 업무 능력을 발휘하는 마르티나 중위, 저명한 SF 작가 키릴 대위, 엄청난 전투력의 소유자인 불사신 보이코 상사, 형무소 출신으로 밤 생활에 능통한 아네티카, 이재에 밝아 보이지만 항상 실패하는 만치코프 등 개성있는 중대원들 묘사도 좋고요.
2차대전 시기를 모티브로 하는 각종 등장 장비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묘사는 작가의 덕력의 깊고 넓음을 짐작케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감상을 말하자면, 장편으로는 함량 미달이었습니다. 제국군과 공화국군, 공국군이 서로 싸우는 치열한 전쟁과 병참 부대 인물들 에피소드가 잘 어우러지지도 못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긴 이야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서너편 되는데, 전개에 있어서 무리수를 두거나 설명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여기에 더해 빌런 카라이브라힘이 벌이는 여러 악행들은 최악이었습니다. 전쟁과 딱히 관련도 없을 뿐더러, 뭔가 있어보이지만 실상 뭔가 일을 벌일 때 마다 실패하고 정체가 드러나서 도저히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끌어가는 악당으로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카라이브라힘의 오른팔인 암살자 소년 유스프는 이야기의 비현실성을 더해주는데 그치고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초, 중반까지는 전투 장면도 한없이 유쾌하게 개그 분위기로 끌고가다가 마지막에 전쟁은 비극이라는 결말을 맞는데, 이를 잘 그려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작가의 작화부터가 비극에 어울리지 않는데다가, 부족한 전개 능력이 발목을 잡았어요. 비극을 그리기 위한 묘사가 죽음밖에 없는 탓이 큽니다. 마지막 권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습니다. 불사신 보이코, 도둑고양이 아네티카 등 중대 핵심 멤버들, 라드반스카 중장, 토이치로브스키, 수도사 등 중간중간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거든요. 이 죽음들도 전우 (마르티나)와 함께 했던 보이코 상사 말고는 모두 허무한 개죽음에 가깝다는건 - 대표적인게 보드카 아케조코 스페셜 공장 때문에 죽어버린 아네티카 - 수년을 함께했던 독자들이 반길만한 요소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런 개죽음이야말로 비참한 전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요소일 수는 있습니다만... 최소한의 드라마는 그려주었어야 했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꼭 살아남아 주었으면 했던 아네티카 대신, 얌체 캐릭터 만치코프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게 정말 별로였습니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키릴 대위는 시력을 잃고, 마르티나는 팔을 잃고 맺어졌던 둘이 헤어지는 듯한 묘사도 별로였어요. 어렵게 맺어진 연인이 헤어지는 것도 전쟁이 불러온 비극인데 이를 왜 자세히 그려내지 않았는지도 의문입니다.
어떤 궁지에 몰려도 상대를 죽이고 탈주했던 핵심 빌런 카라이브라힘이 도주하다 맞은 총으로 죽어버리는 것도 허무했습니다. 출하 요청을 받아 급하게 마무리한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2차대전과 밀리터리물을 좋아한다면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데, 전체적으로는 다소 미묘했습니다. 이 작가는 짧은 호흡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그려낸 작품이 훨씬 잘 어울린다 생각됩니다. 이 작품 역시 초중반부까지의 유쾌한 전쟁물로 끌고갔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2012/05/29

완전연애 - 마키 사쓰지 / 김선영 : 별점 2.5점

완전연애 - 6점
마키 사쓰지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 마키 사쓰지의 작품으로 (굉장히 낯선 작가인데 꽤나 평이 좋아서 읽게 되었네요. 프로필을 보니 오랜 경력을 지닌 작가라서 좀 놀랐습니다) 일본 서양화의 거장 나기라 다다스 화백, 본명 혼조 기와무를 주인공으로 하여 2차대전 직후, 쇼와 43년(1968), 쇼와 61년(1986) 세 건의 사건을 펼쳐 그리는 대하 장편 추리 연애 드라마입니다. 크게 연애물과 추리물,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죠.

먼저 연애물 속성부터 살펴보지요. 사랑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사건을 저지르고, 복수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러나 혼조의 사랑은 약 칠십여 년에 걸친 그의 일생과 함께 다루어질 정도로 장대하기 때문에 스케일 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득력 부분에서 별로 와닿지 않아서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어도, 최소한 유사 작품들과 차별화는 됩니다. 그리고 제가 연애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딱 한 번의 관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또 다른 주변인의 존재 등은 "노르웨이의 숲" 느낌도 전해주는 등 연애물로서는 제법 괜찮은 수준이 아닌가 싶었어요.
마지막의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마스코가 등장할 것은 예상했지만 KIWAMU => MIWAKU라는 애너그램을 이용한 이름이라는 장치가 꽤 그럴싸했고, 혼조 임종 시의 마지막 말과 그에 얽힌 마스코의 상념은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결국 진상이 혼조 혼자만의 착각으로 한 여자만 바라본 것이라는 허무한 결말입니다. 이거 참... 무려 세 건의 범죄가 얽힌 한 대화백의 일대기가 고작 장대한 짝사랑 이야기라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도모네의 밀당에 넘어간 희생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여자가 제일 무서운 것 같습니다.

또 낡아 보이는 여러 장치들이 좀 거슬리더군요. 평생 단 한 번 가진 하룻밤 관계로 아이가 덜컥 생겼다는 설정이 대표적이겠죠. 무슨 정자왕도 아니고.... 그 외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 관계 설정도 진부했고요.

추리적 속성도 첫 번째 사건은 혼조 기와무의 시선이라서 사건과 동시에 진상이 밝혀지지만, 이후 두 건은 혼조의 제자 미와쿠의 시선이라 마지막 부분에서 진상이 밝혀지는 독특한 전개 방식은 매력적입니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식칼로 첫 번째 상처를 위장한다는 트릭과 대나무 조릿대 등의 디테일한 소품 및 미 군정 당시 시대 상황, 피해자의 도착증적인 성벽에 대한 증언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잘 맞물리는게 굉장히 좋았고요. 이 사건 하나만큼은 별 네 개가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극한의 밀실이라는 두 번째 사건,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된 세 번째 사건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진상을 너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제가 추리 애호가로 쌓아온 나름의 덕력도 있겠지만, 트릭이 너무 쉽고 의외성이 별로 없어요. 시공을 초월한 단도에 의한 살인과 발자국 하나 없는 밀실이라는 만화 같은 상황 자체가 자살을 반증하는 요소잖아요? 솔직히 경찰 수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게 더 의외입니다. 별명에 대한 진상 등 디테일한 부분의 장치가 몇 개 눈에 뜨이기는 하나 딱히 특출난 수준도 아니고요.

세 번째 사건은 범인의 오랜 고민과 노력이 투입된 나름 거대한 장치가 사용되었고, 해결에는 여러 관계자 - 미와쿠, 오세키에다가 탐정 마키 사쓰지까지 - 머리를 맞대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가장 공을 들인 트릭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기부터 문제입니다. 외도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사실을 진짜 남편이 깨달았다고 살의를 품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게다가 트릭을 만들기 위한 억지도 지나쳤습니다. 용의가 갈 수 없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내어 피해자를 유인한다는 발상, 알리바이 트릭을 위해 샴쌍둥이까지 등장시킨 설정은 어이를 상실케 했거든요. "쌍둥이를 등장시키면 안 된다"라는 녹스의 규칙을 딱히 예로 들지 않더라도, 집 가정부에게 증언을 시키기 위한 트릭에 들인 공치고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공정성도 떨어져서, 어렸을 적 자는 모습에 대한 술회라든가 가슴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가 정보를 얻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장치였어요. 게다가 3억 엔 사건까지 녹여내려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습니다.

그래도 혼조라는 인물의 일편단심, 변치 않는 애정을 그리는 장대한 드라마가 당시 일본의 사회상과 얽혀 현실적으로,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그려져 사백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대장편임에도 쉽게 읽히는건 분명합니다. 여러 호평에는 수긍이 가네요. "회귀천 정사"처럼 첫 번째 사건까지만 잘 정리된 중편이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도 드라마와 추리 모두 평작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딘가 긴 여행을 떠나실 때 적절한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