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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렸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지병인 고혈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분입니다.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요.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또 미스 마플의 은밀한 탐정 활동도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입니다.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든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세 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은 설득력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는 컸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 모양새입니다.

2025/07/13

기암관의 살인 - 다카노 유시 / 송현정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매니아 프리터인 사토는 아르바이트로 카리브 해의 외딴 섬 저택 '기암관'으로 향했다. 정해진 설정에 따라 연기를 하며 3일간 지내면 100만엔을 준다는 아르바이트였다. 사토에게는 반 년 전 사라진 일용직 친구 도쿠나가를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기암관은 부호 미에이도 하루사다의 저택으로, 사토는 하루사다의 친구로 방문했다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여러 명이 방문한 기암관에서의 첫 날 밤, 쾌활했던 손님 텐가와가 밀실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이 모든 건 부자들의 유희를 위해 벌이는 진짜 살인 게임이었고, 사토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고전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 집어든 작품입니다. 

특징이라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물의 설정을 작품의 핵심 소재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실제 살인을 포함한 추리 게임을 유료 서비스로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는 설정입니다. 추리를 즐기고 싶어 하는 부유한 클라이언트가 거액을 지불하고 사건을 의뢰하면, 회사는 추리 소설가가 만든 각본을 준비하고 배우를 모집해 실제 살인을 연출합니다. 이 회사는 전 세계에 지사가 있고요.

이야기는 영문도 모른 채 이러한 추리 게임에 참여한 뒤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사토와, 회사측 운영 담당으로 도서 추리소설처럼 모든 범행을 지휘하며 예기치 못한 사고를 수습하는 고엔마의 시선이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사토는 평범한 프리터로, 3일에 100만엔이라는 고액 아르바이트로 고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설정된 조연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사람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부터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다행히 '추리 매니아'인 덕분에 여러 위기를 추리를 통해 해결하면서요. 여기서 생기는 딜레마도 재미있습니다. 직접 사건을 해결하면 고액을 지불한 클라이언트 탐정의 등장이 무의미해지는 탓에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지요. 때문에 조수 역할에 머무르며 단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마지막 날 밤에는 모두 함께 밤을 보내자는 현실적인 대응도 시도합니다.
반면 고엔마는 이 게임을 기획한 회사 직원이자 운영 총괄로, 작가가 쓴 각본에 따라 전체 사건을 총괄하며 참가자들의 돌발 행동과 예기치 못한 사고를 수습해 나갑니다.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며, 기획된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변수는 가능한 한 배제하고요. 그래서 사토가 무대의 흐름을 바꾸려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이를 조용히 차단하려 합니다.
이러한 두 인물의 시점을 오가며 둘의 입장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대립도 선명하게 만드는 전개는 인상적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일종의 암호를 통해 예고되는 살인과 선보이는 트릭들은 만화적이지만 재미있기는 하거든요. 텐가와가 사망한 밀실 트릭은 '인간 의자'를 응용한 방식이며, 시즈쿠 사건에서는 목각상 머리를 활용해 밀실을 구성하는데 다소 과장되어 있지만, '사체의 목을 잘라낸' 분위기와는 잘 어울립니다. 여러 고전 추리를 패러디하면서 어떻게든 범행을 대본에 어울리게끔 저지르는 악전고투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재미를 더해주고요.
사토가 기암관에서 벌어진 사건의 구조적 문제를 간파하고, 회사 관계자들 앞에서 그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결말도 볼거리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납득할 만한 주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작품 안에서 가장 논리적인 추리가 펼쳐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기획된 시나리오가 실제 사건의 변수에 따라 계속 수정되며 혼선이 생기는 부분은 블랙 코미디같습니다. 원래 탐정 역할이었던 텐가와가 또 다른 클라이언트의 의뢰로 살해당하고, 범인 역할로 설정된 시라이가 예기치 않게 죽자 급하게 고사카를 새로운 범인으로 설정하는 식인데, 특히 고사카가 법의학자 출신이었다는 설정이 갑작스레 등장하는 장면은 제법 웃깁니다.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만화적인 설정에 더해 인물들이 전형적이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묘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토가 마지막에 갑자기 천재 추리 작가로 변신하는 결말은 뜬금없고 어색합니다. 살인극이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되고 있었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요. 이렇게 후반부에 억지스러운 장치들이 겹치는 탓에 몰입도가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시라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선장이 언급만 되고 등장하지 않는 점 역시 이야기의 완성도를 저해합니다.

사토라는 인물도 영 별로입니다. 그는 이전 일용직 동료인 사토나가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이 아르바이트에 참여했고, 히로인 시즈쿠에 대해서도 동경의 감정을 품는걸로 표시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을 알고난 이후에 특별한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습니다. 복수심이나 애도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오히려 회사의 전속 작가가 되기 위한 포부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했어요. 사토보다는 차라리 고엔마가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 시점 구성과 일부 트릭은 인상적이지만, 인물의 설득력 부족과 과도한 작위적 설정은 큰 감점 요소입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1/09/17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설혜심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6점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지적인 흥분과 읽는 재미를 동시에 전해주는 여러 미시사 저작물을 발표했던 설혜심 교수의 신작입니다.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하는 서두를 보니, 코로나로 인해 여러모로 쌓였던 스트레스 해소 차 썼다고 합니다. 본업과 별개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만한 책을 쓸 수 있다니, 그 내공이 정말 놀랍네요.

하여튼,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로 요약할 수 있다는데 독자가 보기에는 'B급 문학을 역사 연구의 소재로 활용'해보는 모험적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통해 당시 '영국의 세계관'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니까요. 그만큼 여사님 작품이 당시의 실재를 잘 반영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사님 작품에 온갖 저택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여사님 본인이 집 보러 다는게 취미일 정도로 열성적인 부동산 투자자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영국인들이 대체로 집에 대한 집착이 어머어마했다는걸 설명해 주거든요. 이 집착이 '대영제국'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그럴 듯 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인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거창하고 복잡한 소유권 선언 의식부터 했는데, 영국인들은 사는 집부터 짓고 자기 영역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랍니다. 점유를 통해 해당 땅을 지배한다는 현대적인 부동산 논리인 거지요. "아무리 낡아 빠진 집이라도 그것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푸아로가 말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제야 그 좀 납득이 되네요.

1차, 2차 세계 대전 중 '병역 면제'에 대한 사실과 사회적 인식도 여사님 작품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머랭 살인 사건"의 주인공 보비 존스가 입대 직후 시력 문제로 제대했던 이유부터 볼까요? 1차 대전 때 입대 전 신체 검사를 민간 의사들이 시행했는데, 이들의 수당을 적합 판정을 내린 신병 수만큼 지급했던 탓이랍니다. 그래서 '적합' 판정이 남발되어서 군대에 가면 안되면 보비 존스조차 입대하게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건 1차 대전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2차 대전 때는 징집 대상이 여성까지 확대되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직업군은 오히려 병역이 배제되었으며, 여기 농부가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 농과 대학 입학 경쟁이 치열했다는 등의 사실을 "파도를 타고"의 롤리와 린을 통해 알려줍니다. 전쟁 당시 롤리는 일하던 농장에 묶였지만, 약혼녀 린은 징집되어 참전했었다는 설정이거든요. 더불어 롤리가 지옥같다고 묘사한 이 상황으로 당시의 사회적 인식도 쉽게 알 수 있고요. 

또 "쥐덫" 등 여사님 작품들은 대체로 군대에서 복무했던 여성들은 똑똑하고 유능했던 반면, 남성들에게는 군대가 지능이 별로 필요없는 집단이라는걸 드러내는 묘사가 많았다는 걸로 당시 군인에 대한 여사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실패했던 첫 결혼의 상대방이 장교 출신인 탓도 어느정도 있었겠지요? 당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대접받고 경쟁할만한 곳은 전시 군대가 유일했다는 점도 한 몫 했겠지요.

이른바 '영국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다양한 작품에서의 등장인물들 대사로 제국주의, 인종 및 타 국가에 대한 편견과 같은 당시 영국 국민들 의식을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여사님 스스로가 이를 '섬나라 근성'이라며 비꼬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요. 이유보다 현상만 채집하여 선보이고 있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런게 실재하는 역사이자 진정한 사람들 관점의 미시사라는 생각도 듭니다.

"돈" 항목은 이런 관점의 미시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펜스가 "비밀 결사"에서 이야기했던, 오직 세 가지 뿐인 돈 버는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물려받거나, 결혼하거나, 직접 벌거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사님 작품에 많이 나오는 몰락한 귀족과 미국 부자의 결혼이라는 상황과 실제로 20세기 초반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미국 대부호 딸과 결혼했던 사례를 연이어 소개해 줍니다. 대표적인 "달러 프린세스"로 소개된건 처칠의 어머니 레이디 랜돌프 처칠이었고요. 실제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야기가 없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여사님 작품 속 이야기를 실재 역사적 상황과 맞추어 설명한 아주 좋은 사례라 생각되네요.

하녀, 하인들 이야기가 주로 소개된 "계급"도 미시사적인 측면에서 볼 만 합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하녀에 대한 당시 시각과 인식을 여사님 작품은 물론, 여러가지 실제 자료를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식과는 다르게 20세기 초만 해도,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하녀 일을 추천했었다는게 기억에 남네요. 도시의 악덕으로부터 젊은 처녀를 보호하고, 상층 계급의 사회적 규범을 익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나요? 운만 좋으면 좋은 혼처를 찾을 수도 있었고, 여사님 작품에서처럼 거액의 돈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상류층들도 하인에게 예의를 갖추는게 제 1원칙이었다니 지금보다도 고용살이하기는 더 나은 시대였을걸로 생각도 되고요. 물론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주머니 속의 호밀" 등 하녀가 불쌍한 희생자가 되는 작품도 제법 많습니다만....

그 외에도 심령 현상, 강신술과 관상 등으로 대표되는 '미신'에 대한 당시 인식, 미스 마플 이야기와 미시사라는 학문의 핵심이 일치한다는 주장 등도 모두 미시사적으로 볼만 했었습니다. 미시사에 대한 이론은 특히 와 닿았습니다. 저는 그냥 쉽게 특정한 분야, 특정 시기만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게 미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미스 마플이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처럼, 일반적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일반 사람들과 개인의 삶을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지요. 앞으로 이런 부분을 좀 더 유념해서 책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순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팬으로서 즐길 요소도 많았습니다. 탐정 에르큘 푸아로 캐릭터 유래처럼요. 그가 벨기에인이었던건 여사님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쓸 무렵, 근처에 살고 있었던 벨기에 난민을 떠올렸던게 계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국인들 도움에도 별로 고마와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 놓았는데, 거기서 푸아로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빚어졌다고 하네요. 푸아로는 벨기에라는 나라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무시해도 좋을' 나라라서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데, 프랑스 인이었다면 지금의 푸아로와 같은 인기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탈 것'을 통해 여사님 작품 속 자동차, 기차, 비행기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이 대표적이에요. 밀실처럼 폐쇄된 공간이고, 승객들은 모두 우연히 모엿으며, 갇혔지만 창 밖을 볼 수 있고 중간중간 정차해서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기차는 추리 소설 무대로 적합하다는 이론도 기억에 남습니다. "부산행"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와 일치했던 덕분입니다.
그런데 탈 것에 '배'가 등장하지 않는건 좀 의외네요. "나일강의 죽음"의 주 무대가 유람선이었는데 말이지요. 외국 여행을 위해 유람선에 모인 영국인들은 미시사 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적합한 소재인데 왜 빠졌을까요?

하지만 모든 주제가 여사님 작품으로 당시 영국 세계관,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예컨데 "독약"은 당시 영국 상황보다는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에 관련된 주제였습니다. "교육"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상황들도 마찬가지에요. 여사님이 사립학교 출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건, 해로 출신이자 난봉꾼이었던 오빠 몬티 탓, 그리고 여사님이 제대로 된 학교 생활 경험이 없다는 탓이 컸으니까요. 

그리고 "섹슈얼리티", "신분 도용"은 여사님 작품 속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잘 분석되어 있는 결과물로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사님 작품 속 동성애,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관계 분석은 팬으로서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이를 당시 시대상과 잘 엮어서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호텔"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보이 호텔과 리츠 호텔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버트램 호텔에서"의 버트램 호텔 모델이 어디인지에 대한 해석이 거의 전부로, 일종의 미시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호텔에 국한된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배급제"는 전쟁 때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이어진 배급제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만, 정작 여사님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여사님 관련 이야기도 작품보다는 자서전 내용이 중심이고요. 또 앞서 말씀드렸던 미시사적인 부분들도 재미는 있지만, 뒷받침하는 사료와 근거가 많지 않고, 분량도 적어서 깊이있는 내용으로 보기 어려웠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유명 작품, 여사님이 직접 뽑은 베스트 10 과 같은 작품보다 "파도를 타고"와 같은, 특정 작품에 등장했던 상황과 대사 소개가 많은 것도 아쉬웠어요. 여사님의 전작을 둘러본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으니까요. 저자가 소개한 소재도 미시사적으로 좀 더 의미있게 선보였다면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탈 것"에서 다양한 차들을 열거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차들의 연대 순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아울러 저자의 책 치고는 도판도 딱히 볼만한게 없었습니다. 여사님 소싯적(?) 사진들 정도가 눈에 뜨이는 정도입니다. "탈 것"에서 열거된 차들 사진과 같은 도판은 수록해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역사적인 깊이 측면, 그리고 여사님 작품의 깊이 있는 분석 양쪽 모두에서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주제인데다가, 여사님 작품을 미시사적으로 접근한다는 아이디어 만큼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글도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고요. 추리 소설, 역사 관련 저서를 모두 좋아하는 저에게는 불만없는 독서였어요.

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며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너무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