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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0

보기왕이 온다 - 사와무라 이치 / 이선희 : 별점 2.5점

보기왕이 온다 - 6점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
다하라는 어린 시절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집을 볼 때 정체불명의 회색 덩어리 그림자를 응대했다. '치가쓰리'라는 기묘한 말을 하며 집에 들어오려는 '그것'을 할아버지가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소리쳐 퇴치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할머니로부터 사람을 끌고가는 요괴 '보기왕'을 집에 들이거나 대꾸를 하면 안된다고 들었다.
세월이 흘러 직장을 얻고 결혼한 다하라에게 수수께끼의 전화가 걸려왔고, 수상쩍은 인물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회사 후배 다카니시가 큰 상처를 입고 아내와 딸 치사마저 위험에 처하자 다하라는 고교 동창인 민속학 교수 가라쿠사를 통해 오컬트 작가 노자키와 퇴마사 마코토를 만났다. 그러나 퇴마사 마코토가 알려준 대책이라고는 "부인과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라'는게 전부였다. 다행히 노자키와 마코토는 다하라의 집에 정기적으로 찾아와 아내 가나와 아이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다하라도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만 '보기왕'이 집에 찾아와 부적을 찢고 난동을 부렸다. 겨우 침입을 저지한 마코토는 자신의 힘이 미력하다며 언니를 불러냈다. 언니는 당장은 시간이 없다며 지인들을 부르나 고명한 스님을 비롯한 지인들 모두 겁을 먹고 거절했고 딱 한 명, 부탁을 수락한 영매사 세쓰코마저 한 팔을 잃는 큰 부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다하라는 마코토의 언니 도움으로 결계를 치려 하지만 그것 역시 언니를 위장한 '그것'의 음모였다. 결국 '그것'에게 다하라는 죽었다.

2부
아내 가나는 다하라의 죽음이 기뻤다. 다하라는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라 아내와 딸을 심리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었다. 노자키와 마코토의 도움으로 가나와 치사 모녀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나 다시 '그것'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마코토가 목숨을 걸고 저지하지만 실패했고, 도망치던 모녀를 덥친 '그것'은 치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 뒤 미쳐버린 가나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3부
가나와 치사를 습격한 '그것'으로부터 치사를 지키다가 중상을 입은 마코토를 병원으로 옮긴 노자키는 드디어 마코토의 언니 고토코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치사를 구하겠다며 중상을 입은 마코토에게 휴식을, 노자키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다하라의 본가에 찾아간 둘은 다하라 가족의 숨겨진 끔찍한 과거를 알아냈다. 오래전 할아버지 긴지의 가혹한 폭행으로 다하라의 외삼촌, 외숙모가 죽었고, '그것'은 할머니가 복수와 원망으로 할아버지를 저주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치사를 구하고 보기왕을 퇴치하기 위해 최후의 결전에 나선다...

제22회 일본 호러소설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보기왕' 이라 불리우는 크리쳐와 맞서 싸운다는 정통파 크리처 호러물이죠. 그렇지만 이유없이 괴물이 튀어나와 사람을 도륙하는 흔해빠진 고어 크리처물과는 다릅니다. '보기왕' 이라는 크리처의 정체와 그것이 나타난 이유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고 있다는 차이점 덕분입니다.

'보기왕'이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그러합니다. 일찍이 일본에 진출했던 유럽인들에게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거든요. "부기맨"이 변형된 말이라는데 그럴듯하죠? 또 노자키가 "기이잡설" 등의 이런저런 자료와 고문헌을 뒤지다가 밝혀낸 정체도 꽤 괜찮습니다. 오래전, 먹고 살기 위해서 K시에서는 산에 사는 요괴에게 노인과 아이를 일부러 바쳤다는게 그 유래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요괴가 있건 없건 간에 사람을 납치하는 요괴와 입을 줄이기 위한 마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이야기로 굉장히 설득력이 높아요. '고려장' 이야기와 별 다를 것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크리쳐물인데도 일본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요괴헌터"가 떠오릅니다. 대단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건 아니지만 몇몇 디테일 들이 괜찮다는 점도 비슷하네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저주하여 마도부를 통해 불러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섬찟합니다. 할아버지 긴지의 가혹함과 외삼촌의 죽음 등 앞부분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복선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데뷰작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솜씨입니다.
이러한 전개는 1, 2, 3부로 나뉜 구성에서도 돋보입니다. 1부는 다하라, 2부는 가나, 3부는 노자키가 주인공인데 각각의 이야기의 구멍을 메워나가며 새 주인공의 시각에서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1부에서 다하라가 굉장히 가족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아빠로 '괴물, 혼령은 대부분 빈틈으로 들어온다. 이는 가족 간에 생기는 마음의 빈틈인 '골'을 의미한다.'는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2부의 가나 시점 묘사를 통해 다하라가 사실은 나쁜 아빠였다는게 밝혀지는 과정이 좋은 예입니다.
'알고보니 나쁜 놈' 인 다하라와 소극적으로 상황에 끌려만 다니는 가나가 아닌 진 주인공 노자키와 마코토, 고토코가 전면으로 부상하여 힘을 합쳐 괴물을 퇴치하는 왕도적인 결말도 나쁘지 않아요. 정의롭고 착한 주인공이 악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는 너무 전형적일 수 있지만 이 작품에는 정말 딱 어울립니다. J호러 특유의 찝찝한 결말이었다면 더 마음에 들지 않았을거에요.

크리처물 다운 섬찟한 묘사도 볼거입니다. 일종의 영적 덩어리로 입과 이빨만 강조되는 보기왕에 대한 묘사는 별 거 없지만 '그것'이 고토코를 가장하여 다하라를 농락하는 장면이라던가 '그것'은 뒷문으로부터 들어오는게 진짜 공포라는 앞 부분의 복선이 이어져서, 가나가 화장실 입구에 결계를 치지만 뒷문이 있다며 변기로부터 '그것'이 기어나오는 장면이 특히 압권입니다. 얼마전 일본에서 영화화되어 개봉되기도 했는데 예고편을 보니 화장실 장면은 제대로 등장하는 듯 해서 기대가 됩니다. 소설에서도 아주아주 무서웠으니 영화로 보면 효과는 그 이상일거라 확신이 드네요.

이렇게 대상을 받을만한 좋은 점도 많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앞서 칭찬한 전개에서 딱 한 가지, 가라쿠사가 다하라를 저주했고, 다하라의 남은 가족까지 저주했다는 설정은 과합니다. 술 자리에서 쓸데없는 이야기 좀 들었다고 돈과 노력을 더해 '마도부' 까지 선물한다? 그것도 정작 원망의 대상은 죽은 다음인데? 이래서야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서 등장하지 않는 것만 못해요. 또 마코토는 그럭저럭이지만 그녀의 언니 고토코 캐릭터는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뛰어난 능력으로 괴물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높고, 경찰 최고위층도 움직일 수 있는 어둠의 실력자라는 설정인데, 식신만 나오지 않을 뿐 "마법사의 딸" 에 나오는 일본 최고의 음양사 스노즈키 무잔과 판박이니까요. 만화였다면 모를까 소설에 등장하기에는 비현실적입니다. '보기왕' 처럼 설득력있게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해 주었더라면 조금 나았겠지만 그런 설명도 전무하고요. 이런 점에서 보면 "요괴 헌터"의 한 에피소드로 그려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설 보다는 영화나 만화 쪽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아서 조금 감점합니다만, 재미도 있고 흡입력도 괜찮아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당한 작품입니다. 호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6/12

시시리바의 집 - 사와무라 이치 / 이선희 : 별점 2.5점

시시리바의 집 - 6점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편 유다이의 전근으로 도쿄로 이사왔지만, 도시에 적응하지 못해 외로워하던 가호는 고향친구 도시아키를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 초대 받았다. 그런데 집에서 만난 도시아키의 아내 아즈사는 공포에 질려있였다. 집에 원령이 출몰하기 때문이었다. 도시아키 불륜 상대의 저주 탓이라는 걸 알고 난 후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두 부부가 집 안 가득한 모래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건 문제였다. 

가호는 도시아키 집이 이상하다고 확신했지만 잃어버린 결혼 반지를 찾으려 그 집에 방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도시아키가 모시고 사는 할머니가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놀라 달아나던 중, 도시아키 부부의 공격으로 남편 유다이는 살해당했다. 가호는 도주와 격투 끝에 아즈사를 죽이는데 성공하나, 집 안에 있는 '무언가'가 모래로 변해 가호를 덮쳐 버리고 말았다. 

과거 버려졌던 도시아키 집을 탐험하다가 머리에 이상이 생겨버린 데쓰야는, 같이 탐험했다가 퇴마사로 각성해버린 히가와 함께 도시아키 집에 있는 '무언가'인 '시시리바'를 제령하기 위해 찾아오는데....

"보기왕이 온다"로 데뷰했던 작가 사와무라 이치의 최신작 호러 장편 소설입니다. 

집에 깃든 지박령(?) 탓에 벌어지는 공포와 그에 맞서 싸우는 퇴마사의 활약을 그린 전형적인 일본식 퇴마물입니다. 퇴마사 히가 자매가 주인공인 일련의 시리즈 중 한 권으로 보이는데 다른 작품은 읽지 않아서 모르겠군요. 이 작품만 읽어도 내용 이해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작품에서 핵심은 평범한 가정주부 가호 시점에서 그려지는 도시아키 가(家)의 괴이 현상입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깜짝쇼를 통해 섬찟함을 가중시키는 솜씨가 돋보이는데, 맨 첫 번째 에피소드의 깜짝쇼는 바로 '모래'입니다. 에피소드 내내 괴현상은 도시아키의 불륜 상대가 저주한 탓에 벌어졌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가장 눈에 보이는 괴현상인 '모래'는 없어지지 않았고 도시아키와 그 아내 아즈사 모두 모래를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상당히 섬찟했어요.
그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도시아키가 모시고 살던 할머니가 알고보니 친할머니가 아니었다는 반전으로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도시아키의 “필요 없어? 그럼 죽일 거야? 이제 마리는 필요 없다고? 그렇구나..."라는 대사도 인상적이고요. 

또다른 화자인 '나', 이가라시 데쓰야 시점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지금 도시아키가 살고 있기 전, 하시구치 가족이 살고 있을 때 놀라갔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프롤로그는 짧지만 꽤 놀라왔거든요. 마지막에 엉망인 글로 채워버리는 센스 덕분입니다.
하시구치가 이사간 뒤 폐가 탐험을 하다가 '시시리바'라는 무언가를 만나 모두가 망가져버리고 만다는, 전형적인 '귀신들린 집' 탐험 에피소드도 뻔하지만 흥미롭습니다. 스멀스멀하게 불쾌한 느낌이 차오르게 만드는데 확실히 재주가 있는 작가에요.

원래는 영적(靈的)인 가정 보안시스템, 즉 수호신으로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안전한 집안, 원만한 가정, 번창하는 가족을 지키는 존재가 2차 대전 때 폭탄을 맞고 이상이 생겨 폭주하고 말았다는 '시시리바'에 대한 설정도 그럴 듯 했습니다. 폭주한 나머지 죽은 할머니 대신 도시아키가 동네 다른 할머니를 모시며 살게 만들었고, 임신했던 아즈사가 죽자 가호를 임신시켜 도시아키 집에 살게 만드는 식으로 지킬 집을 설정대로 만드는데 집착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결국 제령에 성공해서 가호와 도시아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가호가 아이를 죽게 만든다는 에필로그는 가장 섬찟했던 부분 중 하나였고요. 그동안 다른 괴담물에서 보지 못했던, '모래'를 주요 도구로 삼는 능력에 대해서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상화하면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누가 봐도 이상하고 괴기한 집에, 심지어 남편이 증거를 찾아서 알려주며 가지 말라고 하는데 구태여 방문해서 화를 자초하는 가호의 몰상식적인 행동은 답답함을 자아냅니다.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진 뒤, 도시아키 집에서 시시리바를 제령하는 데쓰야와 히가의 활약이 펼쳐지는 결말 부분도 진부했고요. 시시리바가 모래를 조종하여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집에 있는 사람들을 조종하여 공격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앞 에피소드에서 써먹었기 때문입니다. 

히가의 능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작 담배 연기를 내 뿜는 정도로 수백년 이어온 지박령을 이길 수 있을거라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시시리바가 '개'를 무서워 한다는걸 알아낸 뒤 데쓰야의 애견 긴의 활약으로 제령에 성공하는 마무리도 너무 쉽게 간 느낌이에요.

마지막으로, 히가와 데쓰야가 도시아키 집을 찾은 건 가호가 도시아키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집에 살게된 몇 개월 후로 묘사됩니다. 가호의 배가 제법 나왔다고 설명되니까요. 그렇다면 왜 이전에 경찰이 이 집을 찾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살해당한 가호의 남편 유다이는 주말에도 출근할 정도로 바쁜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 유다이가 무단으로 출근하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유다이는 도시아키 집에 대해 근처에 사는 동료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경찰에 신고했다면 분명 바로 조사가 들어왔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류의 퇴마물이 경찰력을 지나치게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건 좀 아니지 않나 싶네요.

그래도 전체적인 설정과 구성이 꽤 잘 갖추어진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섬찟함 만큼은 충분히 제공하고 있어서 호러, 공포물 본연의 가치에 충실하다는게 마음에 드네요. 킬링 타임용으로는 제격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4/11/20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 에릭 두르슈미트 : 별점 4점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에릭 두르슈미트 지음, 강미경 옮김/세종서적

종군기자 출신의 에릭 두르슈미트가 저술한 전쟁 관련 역사서. 목차는

  1.  「하틴의 뿔」전투, 1187년7월4일 - 원칙에 대한 무관심
  2. 아쟁쿠르 전투, 1415년10월25일 - 승리에 대한 집착
  3. 카란세베스 전투, 1788년9월20일 - 콤플렉스와 자신감 부재
  4. 워털루 전투, 1815년6월18일 - 열정과 책임감의 상실
  5. 발라클라바 전투, 1854년10월25일 -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부재
  6. 쾨니히그래츠 전투, 1866년7월3일 - 실패에 대한 감정적 대응
  7. 스피온 콥 전투, 1900년1월24일 - 기술 발전에 대한 무지
  8. 타넨베르크 전투, 1914년8월28일 - 사적 감정에 대한 집착
  9. 탕가 전투, 1914년11월5일 - 정보에 대한 긴장감의 결여
  10. 아라스 전투, 1940년5월21일 - 시대 흐름에 대한 무관심 

입니다. 이 10개의 전투를 서술하고 그 내용 및 승, 패에 대한 요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승전보다는 패전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거의 예외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리더"의 아집과 무책임 때문에 패했음을 지적하고 있죠.
각 단락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각종 정보를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저널리스트다운 능력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글로 드라마도 잘 살아 있어서 보는 동안 흥미진진하게, 쉬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독일은 예상대로 이긴 내용이 많고 러시아는 1승 1패지만 영국군은 1승 3패 (연합군을 구성했던 전투를 뺀다면), 그나마 근대에 들어와서는 전패군요. 역사에 남는 강대국이라고 보기에는 뜻밖의 전과네요. 어쨌건 개인적으로 가장 웃기는 실패담은 역시 영국군의 "발라클라바 전투" 였습니다.^^ 

여튼, 전쟁 역사라는 쟝르를 좋아하고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실패한, 그것도 희대의 실패담만 모아놓은 전투 역사서는 처음 접해보네요. 실패에서 교훈을 얻자는 취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인것 같아요. 일단 "재미" 하나는 확실히 보장해주니까요. 서양 중심의 시각이라는 점으로 약간 감점하지만 재미는 물론이요 자료적인 가치도 충분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각 전투별 간략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번째의 십자군 전쟁에서 살라딘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하틴의 뿔" 전투는 그나마 유능했던 트리폴리의 레몽 백작의 조언을 정적들의 비판으로 채택하지 않은 "무늬만 왕"이었던 기 왕의 무능력과 무책임, 특히 식수가 없음에도 과감하게(!) 사막을 가로지르는 그 무모함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의 "아쟁쿠르" 전투는 100년 전쟁 초기에 헨리왕이 엄청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만명의 프랑스 군사를 무찌른 유명한 전투죠. 역시 병력 우위만을 믿고 상대편에게 유리한 진형을 내준 프랑스 지휘관들, 그리고 비 때문에 진흙탕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무모한 돌격작전을 펼친 프랑스 기사들에게 전투 패배의 거의 모든 책임이 있다고 기술합니다. 물론 헨리에게는 기사를 제압하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던 영국의 "장궁" 이 있었고 기사도에 위반하는 과감한 작전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패배 요인은 먼저 기술했던 요인에 있다고 보고 있네요.

세번째의 "카란세베스 전투"는 투르크와 오스트리아가 대치중이던 당시, 술 한 통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군 병사끼리 말다툼 도중 한 보병이 "적군이 온다"고 외친 것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이 실제 전투도 없이 1만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거나 다쳐 패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우연이 겹쳐져 일어난 어떻게 보면 불우한 사태이지만 근본적으로 지휘 역량이 없던 황제 요셉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번째의 "워털루 전투"는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걸출한 천재의 패전의 이야기라 조금 아쉬웠습니다.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나폴레옹이 그다지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즉각적 판단이 늦었다는 점, 그리고 휘하의 지휘관들이 무능했다는 점 정도가 나폴레옹의 실책이랄까요....

다섯번째의 "발라클라바 전투"는 위에 언급한 오스트리아 못지 않게 무능했던 러시아군을 상대로 더욱 무능했던 영국 지휘관 이야기입니다. 전설로만 남겨진 기병으로 포병을 향해 정면 돌격한 용감한(!) 영국 기병의 신화를 보여줍니다. 무능할 뿐만 하니라 근본적으로 멍청한 지휘관들때문에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전형적인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너무 황당하고 기막혀서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여섯번째의 "쾨니히그래츠 전투"는 오스트리아가 패권을 잃게되는 기점이 되는 프러시아와의 전투를 다룹니다. 오스트리아의 장군 베네테크는 비록 용감하고 현실적인, 이 이야기에서 다루어진 지휘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능력이 있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대 병력을 통솔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야전 지휘관이었고 전방 부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못해 결국 숫적으로 열세였던 프러시아 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일곱번째의 "스피온콥 전투"는 전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전투는 아니지만 남아프리카 보어인들과 영국인의 보어 전쟁때의 이야기입니다. 역시나 용감한 영국군은 무모하고도 멍청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만 무식하고도 멍청한 지휘관이 거의 모은 승기를 스스로 포기하며 전투에서 결국 패하고 마는 역시나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주네요.

여덟번째의 "타넨베르크 전투"는 1차대전때의 러시아 주력군이 무너지는 전투를 보여줍니다. 이 전투의 패인은 러시아 1, 2군의 지휘관이 서로 앙숙이라는 것, 그래서 1군이 무너질때 2군이 응원을 오지 않았다는 이유이고 지휘관들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하여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결과는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결국 이 전투는 1차대전에서의 참호전으로 인한 독일의 패배 (러시아 군을 막기 위해 프랑스에 진출한 병력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단기전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투가 장기화 되며 결국 패배로 이어진 결과)를 불러왔고 러시아에는 혁명을 불러오게 된 세계사의 전환점이 된 전투라 할 수 있겠네요.

아홉번째의 "탕가 전투"는 동아프리카 탕가에서 1차대전 당시에 영국-인도 병사 8천명이 탁월한 독일 지휘관 파울 폰 레토브-포르베크 대령이 조련한 원주민 부대 250명(!) 에게 농락당하며 패배한 전투입니다. 총검으로 하는 전투는 끝났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투이기도 하고 결정적 순간에 벌떼가 영국군에게 달려들어서 전황이 뒤바뀌는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희극적인 상황까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지막 "아라스 전투"는 2차대전때의 독일과 프랑스의 전투입니다. 프랑스가 무너지는 와중에 소수의 탱크로 반격하여 독일군 기갑부대에게 피해를 입힌 아라스 전투가 결국 총통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영국군이 덩케르크에서 무사히 잔존병력을 이끌고 탈출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 바로 그 전투죠. 일선 지휘관이었던 롬멜 등이 만약 명령에 계속 불복종하고 진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역시 프랑스 지휘부의 무능함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나름의 반격은 높이 평가하며 오히려 히틀러와 괴링 등의 무능함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2023/10/28

후회하는 소녀와 축제의 밤 - 아키타케 사라다 / 김은모 : 별점 2점

후회하는 소녀와 축제의 밤 - 4점
아키타케 사라다 지음, 김은모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 '나'는 구관 빈 교실에서 마루판을 뒤집는 기묘한 무언가를 만났다. 마쓰리비 사야로부터 이미 뒤집어진 마루판 위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던걸 떠올리고, 유일하게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마루판 위로 재빠르게 몸을 옮겼다...
고등학교 1학년 아사이 로쿠로는 밤마다 거대한 지네와 마주치는 꿈을 꾼다. '신사에 가면 안된다'는 말을 사촌 누나로부터 들었지만, 마쓰리비 사야의 권유로 신사를 지나친 뒤 지네는 아사이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이토카와 아오이는 어린 시절 '시게토라'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원피스 한 벌을 빚졌다. 시게토라는 10년 뒤 빚을 몸으로 받으러 오겠다며 때마다 나타나 이토카와를 괴롭혔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연인을 사고로 잃고, 구관에서 괴이를 접했던 '나'에게 사야가 도움을 요청했다. 마물로부터 오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오빠의 대역이 될 뼛가루를 품고, 축제의 밤 동안 자동차로 도망다니는 작전이었다. 사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아사이와 이토카와도 함께였다. 축제의 밤, 도망다니던 '나'는 신문 기사 등을 통해 알게된 정보, 그리고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달의 모양이 틀린 등의 현상을 통해 4년 전 사야의 오빠가 죽은 밤으로 시간을 이동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겸한 세 편의 단편,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힘을 합쳐 마물로부터 도망치는 모험을 펼치는 중편으로 이어지는 중, 단편집.
 
세 편의 단편은 짤막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마루판을 뒤집는 이야기에서 흠집 투성이 마루판은 알고보니 바닥 밑에서 '그것'이 딱딱한 뭔가로 흠집을 낸 것, '시게토라'는 자기가 준 것의 댓가를 '무게'로 계산하기 때문에 원피스는 머리카락으로 충분했다는 등의 진상, 반전은 아주 괜찮았어요.
본편도 전체적으로 읽기 쉽고, 마물로부터 도주하는 과정은 박진감이 넘쳐서 페이지가 쭉쭉 넘어갑니다. 자동차로 도망치지만 마물이 지능을 갖추고 있어서 자동차 도로를 나무로 틀어막고, 주행 경로를 예상하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덮치는 등으로 압박을 가하며 흥미롭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후회하는 소녀' 마쓰라비 사야는 오빠 겐이치로가 죽은 뒤 내내 후회해왔었지만, 모험을 끝낸 뒤 오빠는 사야 대신에 죽음을 택했었으며, 살아남은 뒤에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죽어서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는 결말도 깔끔합니다.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인과율의 법칙도 따르면서요.

하지만 큰 문제가 있는데.... 전혀 무섭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 25회 일본 호러 대상'을 수상했다는 이력과는 다르게요. 다른 수상작 - 예를 들어 <<보기왕이 온다>> - 들은 꽤나 무서웠었는데, 이 작품은 호러 소설이라기보다는 모험 소설에 가깝습니다.
설정과 소재도 어디서 많이 봤던거라 신선함도 부족합니다. 특히 마물을 잘 아는 미소녀 마쓰라비 사야 캐릭터는 진부함 그 자체였어요. 마물을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로 유인한 뒤 다리를 붕괴시켜 퇴치한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로 뻔했고요. 알고보니 4년전으로 타임 슬립해왔다는 전개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반전 매력이 떨어집니다. 잘 활용했더라면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였는데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나'의 연인이 붕괴 사고로 죽은 다리를 4년 전 시점에서 무너트려서, '나'의 새로운 현재에는 아내가 생겨 있다는 결말은 이상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사야의 오빠도 결국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런 설정 오류 때문에라도 과거를 바꿔서 미래가 변하는건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지양해야 합니다. 즉, '나'의 연인도 어쨌건 죽고 없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머리를 비우고 가볍게 시간을 보내는데 적당한, 스낵같은 작품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