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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8

상점가의 전진 - panpanya / 유유리 : 별점 3점

국내에 출간된 전권을 구입해 읽을 정도로 사랑하는 작가 panpanya의 신작입니다. 출간 사실을 뒤늦게 알아 구입이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단편 열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언제나처럼 일상 속에서 기발한 발상을 끌어내 독특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건물’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의 집"은 집 가족이 자라고 성장해 하나의 큰 집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연"은 멀리 보이던 집들이 사실은 건설업체의 간판이었다는 설정입니다.
"슈퍼 하우스"는 집이 일종의 로봇이 되어 외부의 공격을 격퇴합니다.
"즐거운 부동산"에서는 복권으로 택지에 당첨된 뒤 집 프라모델을 구입해 집을 건설합니다.
"윤번지"는 상속받았지만 사라진 땅을 탐정인 주인공과 레오나르도가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과거 투영법 제작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평면 지도로 인해 발생한 사기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입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어긋남을 다시 분석해, 이 ‘윤번지’가 지하에 위치했다는걸 밝혀냅니다.
"빌딩"은 빌딩이 원래 싹이며, 그것을 잘 키워 만들어낸다는 내용입니다.
"상점가의 전진"에서는 확장하고 이동하는 상점가를 따라 주인공이 집을 상점가에 포함시켜 가게를 열고 이사까지 하지만, 다른 현으로의 이동까지는 동참하지 못해 결국 상점가를 떠납니다.

이 가운데에서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적 설명이 잘 결합된 "윤번지"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구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오류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주인공과 파트너인 충견 레오나르도가 어딘가에 도착한 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내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확보할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모은 뒤, 과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추론으로 정답에 접근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추리물 같은 재미를 줍니다. 단순한 귀납적 추리가 아니라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직사각형 모서리 방의 양쪽 끝에서 도쿄 스카이트리와 후지산이 각각 보이면 ‘원주각 정리’가 성립하고, 거리를 감안하면 현재 위치는 미우라 아니면 이타미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시리즈 8편이 대표적입니다.


"올바른 주먹밥 개봉 방법"은 주먹밥 스티커를 훼손하지 않고 뜯어내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뒤의 해설을 보니 작가가 실제로 주먹밥 스티커를 수집하며 연구한 듯한데,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알기 어려운 디테일이야말로 panpanya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구야바노 홀리데이",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 처럼 말이지요.

다만 "집의 집"이나 "빌딩"처럼 설정이 다소 단순한 작품과, "슈퍼 하우스"에서 보이는 panpanya답지 않은 액션물 분위기의 전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공격을 내선번호로 시도한다는 디테일은 재미있었지만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 역시 몇 편은 다소 식상하게 느껴졌고, 이야기로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성립하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npanya 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작품도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

2026/02/27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 이연승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실하고 성실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없애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범죄자로 두 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유기했다. 뛰어난 머리로 검도 호구 가방을 쓰는 등의 작전으로 알리바이도 만들었지만, 경찰도 무능하지 않은 탓에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한편, 어린 딸 가오루 때문에 연쇄 아동 살해범을 강하게 의식하던 호나미는 근처에 사는 다테시나가 수상하다는걸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게 된 장편 범죄물로 이야기는 크게 범인인 마코토의 시점, 어린 딸 가오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 호나미의 시점,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사카쿠치-다니자키 형사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마코토는 검도부 소속이자 방과 후 검도 선생님으로, 호구와 장비를 넣는 큰 가방을 범행에 이용해서 아이를 가방에 넣어 옮긴 뒤 살해했습니다. 형사들은 가방에 아이들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마코토에게 혐의를 두기 시작하고요.
한편 호나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다테나시를 의심해 신고했지만 다테나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풀려나자, 다테나시의 열쇠를 몰래 복제해 그의 집에 잠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오루의 사진과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발견하자 그를 범인이라 확신한 뒤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뒤이어 결말이자 반전이 등장하는데 마코토는 여자였고, 가오루는 마코토의 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호나미는 마코토의 엄마였고요. 즉, 호나미가 ‘딸’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은 가오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코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나미는 마코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테나시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를 죽인거지요.
마코토가 여자였다는 점, 가오루의 친엄마라는 점, 그리고 마코토의 엄마가 호나미라는 설정은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어 반전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서술 트릭과 반전은 그럴듯한 편인데,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코토가 과거 다테나시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해 가오루를 낳으며 남성 공포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탓이 큽니다. 아이들이 가오루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정도를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범행 수법 또한 지나치게 잔혹해 읽는 내내 불쾌감을 줍니다. 사카구치 형사가 사체의 상태를 보고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부분 역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범행 묘사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을 추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나마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 자체를 굉장히 잘 쓴,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의미라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술 트릭은 독자를 속이겠다는 의도에만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해 별로입니다. 독자가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마코토의 초반부 묘사처럼요.

또한 경찰 수사가 다테나시를 범인으로 단정한 채 종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테나시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호나미가 반복적으로 그를 의심하며 신고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마코토 역시 수상한 정황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에 마코토가 호나미의 진심을 알고 죄책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지는 묘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경찰이 이 두 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수사한다면 진상을 밝혀낼 지도 모르는데요. 성모랍시고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통곡"같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코토는 단죄받는다는 결말이 더 깔끔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보다는 서술 트릭을 활용한 다른 유명 작품들을 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2026/02/22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 시즌 1 (2025) - 후지이 미치히토 외 : 별점 2점

전쟁 후 PTSD에 걸려 낙향한 무사 사가 슈지로는 극심한 생활고로 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지만 약 한 첩 쓰지 못했다. 아내마저 병환이 깊어지자, 사가는 무려 10만엔을 준다는 무사 모집 공고에 응해 교토 텐류지로 향했다. 다량의 총으로 무장한 주최측은, 그 곳에 모인 수백명의 전 무사들에게 상대를 죽이며 도쿄까지 오면 10만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한 시대극 액션 드라마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를 배경으로 무사 계급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살육 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인기있을 만한 설정은 다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설정 ‘고독(고도쿠)’가 대표적이에요. 수백 명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을 벌이게 하고, 최후의 생존자만을 뽑는다는 건데, 이건 "오징어 게임"과 다를게 없지요. 고도쿠 배후에 재벌 세력과 경시국이 손을 잡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특기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건 "닌자인법첩"같은 일본 시대극 액션물 설정을 그대로 따 왔고요. 그 외에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많아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만화같은 설정을 보신 전쟁이라던가 폐도령 이후 무사 계급의 몰락과 같은 실제 역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와지 대경시, 4대 재벌 등 실존 인물들을 결합시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고도쿠를 통해 무사 계급을 말살하려 한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목적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검술 액션입니다. 실사 시대극으로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촬영과 합이 좋은 덕분입니다. 특히 슈지로가 PTSD를 극복하고 총을 든 경비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각성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어요. 이 순간을 위해 주인공 사가 슈지로에 대한 서사도 초반부터 잘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살인귀 칸지야 부코츠야 일종의 중간 보스쯤 되는 악역이니 그렇다 쳐도, 키구오미 우쿄같은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까지 개별 서사를 풀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비서 신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짐짝에 가까운 후타바의 동행이나 이로하의 등장과 과거 사부와의 악연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기보다는 분산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가 슈지로가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하고 도쿄에 도착할게 뻔한만큼, 이런 이야기는 시간과 분량 낭비에 불과했어요. 이보다는 닌자 쓰게 쿄진의 목적을 좀 더 집중적으로 풀어냈어야 합니다.

검술 액션도 중반 이후에는 힘을 잃습니다. 파워 밸런스가 이상한 탓입니다. 사가 슈지로는 각성 전에도 칸지야 부코츠를 압도했었는데,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는 슈지로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고전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시원하거나 통쾌한 맛도 없고요.

또한 무사 계급을 이 기회에 몰살시키겠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계획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입니다. 모든 무사들이 고도쿠에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칸지야 부코츠의 살인 행각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민중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무언가는 부족하지만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합니다. 

2026/02/21

잔혹한 여로 - 야마무라 미사 : 별점 2점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는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일본 여성 추리작가 야마무라 미사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설 연휴 때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의외였던건, 수록작 중 세 편은 트릭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통파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특히 "공포의 연하장"이 아주 괜찮습니다.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겨진 유류품을 통해 피해자는 당첨된 연하장을 상품인 우표와 오전 9시 이후에 교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인 거래 증권회사 직원 가사하라는 오전 8시 40분에 출근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보냈지만, 사전에 당첨 유무를 아는건 불가능해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 수도 없고요.
다카기 경부는 연하장에 소인이 없는 점(연하장은 12월 22일까지 접수분은 1월 1일 도착 보장이라 소인이 찍히지 않음)에 주목해서, 빌견된 당첨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사건 당시에 가지고 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당첨 연하장을 가사하라가 미리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증권회사가 직원에게 연속 번호의 연하장 500장을 주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연하장 추첨에서 최하등 우표는 100장당 반드시 3장 당첨되므로, 가사하라는 보내지 않고 남겨 둔 100장의 연속 번호 연하장만 있어도 반드시 당첨 엽서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즉 가사하라는 당첨 번호 발표 후 보관 중이던 연하장 중 당첨된 것을 고른 뒤, 사건 당일 피해자 집에 들고 가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집에 있던 자기가 보낸 진짜 연하장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상품은 따로 교환해서 시체를 발견하러 갔을 때 몰래 피해자 주머니에 넣었고요.

이렇게 일본의 연하장 풍습과 증권 회사의 전통 등을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트릭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지만, 가사하라가 원래 피해자에게 보냈던 연하장이 드러나면서 범행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피해자와 가사하라의 육체 관계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진짜 연하장이 발견되는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도 충분한 수준입니다.

"검은 테두리의 사진"은 오사카로 출장간 범인이 전날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방송이 오사카에서는 그날 방송된다는걸 알고난 뒤, 전날 찍었던 사진을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사실 트릭이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우연과 운이 지나치게 많이 좌우되는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같은 방송이라도 방송하는 채널이 다른데,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체포한다는 결말도 설득력이 약했고요. 앞서 범인 오사와는 '화면만 사진에 담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채널 다이얼이 어떻게 보였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호텔 종업원이 오사와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다고 증언했다니, 사진 따위는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줄 수도 있으니, 애초에 그리 탄탄한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TV를 찍은 사진을 알리바이에 사용한다는 설정만큼은 독특해서 눈길이 갑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 방식인 덕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을 잘 반영한건 분명합니다.

"죽은 자의 손바닥"에서는 셀로판지를 이용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손바닥 도장을 찍는 트릭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두 편 보다는 별로에요.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의 모든 측면에서 기대 이하거든요. 경찰의 추리는 근거없는 첫인상에 기반하고 있고, 범행 방법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위의 세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내용도 그냥저냥합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잔혹한 여로"는 일종의 범죄 반전물입니다. 진범이 드러난 뒤 진범마저 개미지옥에 빠진다는 마지막 부분은 꽤 그럴 듯 합니다. "50퍼센트의 행복"은 오래 전 친자 감정 방식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볼만했던 치정 드라마이고요.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너무 뻔합니다. 결말도 안이하고요.

"고독한 증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떠오르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가사이 나오미의 증언을 회사측, 유족측이 제각각 제멋대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지요.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나오미의 고뇌를 심도깊게 다루지도 못했고, 밝혀진 진상 - 폭탄 테러 - 도 설득력이 약하며, 가사이 나오미가 결국 자고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결말도 영 아닌 탓에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살의의 축제"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돈으로 진범을 날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가 되는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가족마저도 영원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당시 범인과 유족 측 인물들이 당시 상황을 복잡하게 밝히는 결말은 꽤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걸 읽은 바람에 다소 김이 빠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만, 잘 모르는 작가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공포의 연하장"만큼은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2026/02/20

꽃다발은 독 - 오리가미 교야 / 이현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세는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이었던 마카베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기타미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소장 대리인 기타미는 기세의 중학교 선배였다. 마카베가 의뢰를 망설여서 기세는 직접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를 통해 협박은 마카베가 저질렀다는 4년 전 강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났다. 마카베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마카베는 모든 걸 잃고 학교마저 그만둔 채 지금에 이르렀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분량이 비교적 간결한 편이라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마카베에게 익명의 협박장이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협박은 4년 전 그가 저질렀다는 강간 사건과 관련되었고, 협박범은 당시 피해자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마카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도 그가 누명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기타미의 조사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마카베는 억울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이렇게 '원죄(엔자이)'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사회파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뒤이은 전개는 마카베가 정말 결백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을 싹트게 하여 흥미롭습니다. 마카베의 모친도 그의 무죄를 믿지 않고, 마카베 가족이 왜 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 - DNA 검출 -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기세를 통해 소개된 마카베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서, 독자로서는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뒤집어 버리는 덕분입니다. 우선, 4년 전 사건은 피해자였던 나가노 가나미의 자작극이었습니다. 마카베에게 푹 빠진 나머지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성공해서 마카베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박장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의 아버지 나가노가 마카베를 돕기 위해서 보냈던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자연스럽게 믿어온 전제가 뒤집히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 반전이 결혼식 직전의 마카베에게 진상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로 이어지는 결말도 충분히 흥미롭고요. 

그리고 반전은 협박장이 두 종류 - 강경한 경고와 정중한 문체 - 였다는 단서로 뒷받침되는데 이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기타미와 기세는 강경한 경고는 마카베에게 보냈고, 가나미가 받아볼 수 있는 협박장은 정중한 문체로 보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나가노는 처음에 가나미에게 강경한 경고가 전달되도록 협박장을 보냈습니다. 부부의 이름으로 동거 중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내가 우편함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는 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경고가 효과를 보지 못해서, 마카베에게 정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은 물론 독자까지 공정하게 제공한 단서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했다는게 아주 좋았어요.
가나미가 마카베를 옭아매기 위해 벌였던 몇 가지 장치 - 당시 마카베가 연인과 시간을 보냈던 러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DNA를 손에 넣었다는 등 - 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요.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기타미가 벌이는 조사의 상세함도 최고 수준입니다. 주로 탐문과 관계자 면담이 중심이지만, 기타미는 피해자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카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보를 캐 내기까지 하는데 이는 법대생 기세의 입을 빌어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이라고 설명되거든요. 그야말로 일반 '탐정'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를 그려낸 느낌이에요.
개인이 받은 '협박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재를 다룬 점도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 역시 일개 탐정이 해결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죄일테니까요.

그러나 마카베가 받는 협박의 원인이 4년 전 사건일 수밖에 없는 탓에 협박범이 그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가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길어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합니다.  
아울러 중학생 시절부터 탐정으로 활약해 왔다는 기타미의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저해합니다. 굳이 필요했던 설정은 아니었어요. 기세와 기타미의 1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불필요해 보였고요. 

그래도 반전을 중심에 둔 일상계 범죄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26/02/14

진짜 도쿄 맛집을 알려줄게요 - 네모 : 별점 2.5점

일본 현지에 거주하는 저자 네모가 도쿄의 로컬 맛집을 직접 소개하는 가이드북입니다. 조만간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유명 체인이나 후기 위주의 맛집이 아니라, 실제 현지인이 일상 속에서 방문하는 식당과 요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더군요. 

책은 음식 종류를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돈부리, 라멘, 소바와 우동 등 면 요리, 고기와 생선 요리는 물론, 일본식 가정 요리와 양식, 카레, 베이커리, 디저트, 편의점 음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음식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일본 현지인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메뉴들 소개도 인상적입니다. 닭고기 사시미 스테이크나 멸치 육수 츠케멘, 낫토 소바, 토로로, 각종 후라이 요리처럼요.
또 소개된 식당들 대부분이 관광객들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대라는 점도 좋았어요. 각 식당의 대표 메뉴, 가격, 위치, 영업 시간, 휴일 등 기본 정보 역시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요리를 맛있게 먹는 팁은 정말 꼭 참고할만 합니다. 

츠케멘은 히가시이케부쿠로 다이쇼켄에서 개발한 메뉴로 원래는 가게 영업이 끝난 후 직원 식사용으로 남은 면에 라멘 국물을 찍어 먹던게 시작이다, 2000년대 중반에 대유행을 한게 진한 국물에 우동만큼 굵은 면을 찍어 먹는 스타일 츠케멘이다, 가마타마 우동은 가마아게 우동의 일종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동에 날달걀을 얹은 메뉴이다, 이나니와 우동은 1600년대 아키타현 영주 가문에서 먹었던 음식이며 냉우동으로 츠유에 찍어먹는 스타일이다와 같이 각 요리들에 대해서 짤막하게라도 소개를 덧붙여 주어서 일본 음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정보와 함께 요리를 워낙에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어서 꼭 방문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래 가게들은 구글 맵에 저장해 두었지요. 한두 군데라도 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웨이팅이 꽤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네요.

  • 텐동 덴후쿠
  • 카츠동 엔라쿠
  • 토지나이 카츠동 즈이초
  • 소유라멘 키라쿠
  • 멸치 육수 츠케멘 미야모토
  • 이타소바 카오리야
  • 낫토 소바 바쿠잔보
  • 붓카케우동 오니얀마
  • 가마타마 우동 마루카
  • 야키니쿠 잠보
  • 야키니쿠와 곱창 호르몬 마사루
  • 우설 규탄 아라
  • 모츠니코미 아부쿠마테이
  • 아지후라이 아오키 쇼쿠도
  • 카키후라이 타라라
  • 크로캉 쇼콜라 365日
  • 철판 프렌치 토스트 빵토 에스프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우선 양식이나 카레는, 굳이 일본에서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물론 일본에서의 맛은 다를 수 있고, 이런 요리들 애호가도 있겠지만 보통의 여행자 입장에서는 굳이 시간과 동선을 들여 방문할 정도의 메뉴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도판의 품질도 그리 뛰어나지 않으며, 특히 지도가 아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도 큰 단점입니다. 특정 지역별로 맛집을 묶어 ‘아침–점심–저녁’ 코스를 추천해주는 구성이 있었다면 활용도가 훨씬 높았을 텐데 말이지요. 가격 때문이겠지만 지나치게 런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점도 아쉽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참고해 볼 만한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합니다.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2/08

십각관의 살인 1~2 - 키요하라 히로 (아야츠지 유키토 원작) : 별점 2.5점

이번 주는 "십각관의 살인"으로 꽉 찬 한 주네요. 결국 만화 버전까지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마침 리디 북스에서 제공하고 있더라고요.
원작과 거의 똑같은 전개인데, 만화만의 각색 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 가와미나미(카와미나미)가 여자로 바뀐 점
  • 치오리가 술을 먹다가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과 크루즈 여행 중 사고사 했다는 점
  • 마지막 장면에서 엘러리가 밴(반)에게 속는게 아니라 진범을 밝히고 죽는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치오리를 사고사로 만든건 괜찮은 각색이었어요. 치오리만 구명 조끼가 없는걸 알게된 반이 치오리는 사고로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에게 구명 조끼를 빼앗겨 죽었다!고 여기고 복수를 펼친다는건 원작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있는 동기였으니까요. "소년 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 사건"과 똑같은 동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른 건 없습니다. 핵심 트릭인 반의 정체는 모리스였다!는 똑같은 탓입니다. 사실 궁금했던건 모리스가 반이라는걸 어떻게 숨기면서 전개할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냥 헤어스타일만 다르게 - 모리스는 단정하게 묶고, 반은 대충 풀어헤치는 스타일 - 묘사할 뿐입니다. 보다 정교한 만화적인 장치가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작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순정 만화체라는건 작풍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작품의 주인공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십각관에 대한 묘사가 그닥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그래도 긴 장편을 무리없이 만화화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캐릭터들도 대체로 원작과 부합하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하게 읽을 만 합니다.

2026/02/07

Chat GPT가 그린 시마다 기요시 (십각관의 살인)

"탐정 사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고 혹평을 남겼었지만, 탐정들에 대한 일러스트만큼은 좋았습니다. 붓 하나로 그려낸, 음영을 극대화한 스타일인데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아래와 같이 말이지요.

하지만 소개된 모든 탐정들의 일러스트가 제공되지 않아서 다소 아쉬웠었는데, 이번에 "십각관의 살인"을 다시 읽어본걸 계기로, 탐정 사전에는 실려있지만 일러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던 탐정 시마다 기요시의 일러스트를 탐정 사전 스타일로 그려 보았습니다. Chat GPT에게 스타일을 학습시켜서요.

어떤가요? 다소 허당에 가벼운 듯한 느낌을 전해 주었던 작품 속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정도면 대체로의 인상과 원했던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작 중 첫 인상 묘사가 "음울하고 성격이 까다로워 보인다"이기도 하니까요. 아래는 만화 버젼의 시마디 기요시인데, 만화 버젼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물로 보이네요.

다른 탐정들도 시간나면 한 번 시도해 봐야 겠습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