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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개의 힘 1,2 - 돈 윈슬로 / 김경숙 : 별점 2.5점

개의 힘 1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개의 힘 2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 윈슬로의 대장편 범죄 소설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 해외편 무려 2위로 선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두던 책입니다. 하지만 1, 2권 합쳐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기가 죽어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추석 연휴 집콕 동안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읽히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약 단속 국장 아트 켈러,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파트론 아단 바레라의 20여년에 걸친 악연과 대결을 그리는데, 실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각색했습니다. 여러 카르텔, 여러 보스가 얽힌 이야기를 바레라 가족 중심으로 풀어내었을 뿐입니다.

우선 작품 내에서 콘도르 작전 당시 마리화나 재배지가 초토화되고, 당시 보스였던 돈 페드로의 사망, 뒤이어 티오 미겔 앙헬 바레라가 사업을 코카인 운송으로 바꾸며 조직 보스인 파트론이 되면서 조직을 3개로 나누는 건, 실제로 시날로아 카르텔이 아마도를 보스로 하는 후아레스 카르텔, 아레나요가 보스인 티후아나 카르텔, 그리고 엘차포가 보스인 시날로아 카르텔로 분리된 역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여기에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이 생산한 코카인 유통을 도맡게 된 걸프 카르텔이 급성장하여 4대 조직이 되는데, 작품에서는 티오의 조카 아단 바레라가 지능적인 코카인 유통 혁신을 통해 카르텔 실권을 손에 쥐는 모습으로 그려지고요. 1985년 미국 요원 키키 카마레나 고문 살해 사건도 작품 안에서 어니 요원이 납치되어 고문받다가 살해되는 이야기로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아단, 라울 바레라 형제와 게로 멘데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항쟁은 시날로아 카르텔 보스 엘차포와 티후아나 카르텔 보스 아레나요 형제 간에 실제로 벌어졌던 전쟁을 거의 그대로 따 왔습니다. 대표적인게 아레나요 형제가 잘생긴 킬러 클라벨을 시켜서 시날로아 카르텔 2인자 엘구에로의 아내 레이하를 유혹하게 만든 겁니다. 레이하는 유혹에 넘어가 클라벨, 어린 아들, 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클라벨에게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그 뒤 엘구에로는 레이하의 목과 아들, 딸이 다리에서 내던져지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받게 되지요.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만 바뀐 채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아단 바레라가 사주한 킬러 파비안이 게로 멘데스의 아내 필라르를 유혹한 뒤 그녀와 아이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로요.

작품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후안 신부 살해 사건 - 공항에서 바레라에게 살해당하지만, 바레라와 게로 멘데스간 전쟁에 휘말려 죽은걸로 처리되는 - 도 아레나요 형제와 엘차포 간 총격전에서 티후아나 대교구장 포사다스 오캄포 추기경이 휘말려 사살된 사건과 똑같습니다. 작품에서는 후안 신부가 멕시코 정부와 여러 관계자가 마약 조직과 관계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살해된 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실제로 오캄포 추기경 역시 티후아나 카르텔과 살리나스 대통령간 결탁에 대해 폭로하려다 살해된 걸로 알려졌지요. 게로 멘데스가 성형 수술을 받고 모습을 바꾸어 재기하려다가 아단 바레라 측 킬러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도, 후아레스 카르텔 보스 아마도가 1997년 성형수슬을 받다가 사망한 역사를 따 온 듯 하고요.

NAFTA 이후 멕시코 경제가 파탄나고, 마약 사범들이 나라를 거덜내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실제 카르텔간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엘차포는 체포된 뒤 멕시코 감옥에서 7년여간 편안하게 수감생활을 하다가 탈옥했다는 정도입니다. 작품에서 아단 바레라는 미국 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연방 감옥에서 복역하는 결말이거든요.
그 외의 모든 디테일들, 예를 들어 은이냐 납이냐, 코카 콜라냐 펩시 콜라냐와 같은 협박 문구라던가, 마약 수송용 지하 땅굴, 대형 여객기 수송 등도 모두 실제 조직 이야기에서 따 왔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렇게 실제 마약 카르텔 이야기를 극화했기 때문에 설득력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럴거면 아트 켈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구태여 소설로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마약 전쟁 이야기 외의 이야기는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바레라를 뒤쫓는 아트 켈러 이야기만 해도 간단한 도청, 정보원에 의지할 뿐이고 기껏 티오와 아단을 체포해봤자 모두들 기가 막히게 빠져나가는 탓에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니까요.
또 소설로 만들면서 추가된 요소들도 거의 대부분 지루하고 뻔합니다. 이런 마약 전쟁의 뒷 배경에 중남미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걸 경계한 미국의 자금 투입과 원조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그랬으리라 짐작되는 설득력있는 설정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식상하지요. '케르베로스'. '레드 미스트' 운운하며 뭔가 있어보이게끔 노력은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 흔히 보아왔던, 미국이 돈을 주고 키워낸 용병단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CIA 국장 존 홉스가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은폐하려고 난리를 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미국은 이미 그 이상의 추문을 수도 없이 들켰잖아요.
또 이 설정이 사실이라면, 아단 바레라가 콜롬비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댓가로 마약을 손에 넣으려는건, 파멸의 지름길에 발을 담근 셈입니다. 구태여 들쑤셔서 체포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울러 어차피 미국이 돈을 대지 않아도, 바레라 가문이 멸족해 버려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누군가 권력을 잡고 마약을 여전히 유통할 겁니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요. 흑막이니, 음모니 하는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후안 신부와 유일하게 정의로운 멕시코 폭력 경찰 라모스 정도만 독특함과 생생함이 느껴질 뿐,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며 단순한 탓입니다. 특히 실제 인물을 따오지 않은 창작 캐릭터들 문제가 심각해요. 고급 매춘부 노라를 한 번 볼까요? 그녀는 멕시코 대 지진 때 '우연히' 알게 된 후안 신부와 친분을 맺습니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아단의 정부가 되는데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된 뒤, 여러가지 정보를 아트에게 제공한다는 설정입니다. 아단이 노라에게서 푹 빠져서 온갖 사업상 기밀을 전해주고, 심지어 사업 이야기에 동참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노라 설정에만도 우연이 여러개 겹쳐있지만, 티오와 게로 멘데스, 아단 바레라 모두 여자에게 푹 빠져서 파멸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일랜드 낭만 킬러 칼란도 한 번 볼까요? 그는 우연히 킬러가 된 뒤, 멕시코에서 아단의 목숨을 '우연히' 구해주고, 아단과 게로 멘데스 전쟁에 끼어들어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되는걸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 뒤 '우연히' 받은 청부로 정보원이 된 노라를 보호하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에요. 마지막에는 아트를 죽이는 킬러로 고용되었다가 노라의 진심을 알고 고용주들을 쓸어버리고요. 이렇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거라면 솔직히 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게다가 칼란도 그렇고, 엘 티부론 파비안도 그렇고, 청소년 때 이미 타고난 킬러라는게 증명되었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수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애송이들인데 말이지요.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어야 할 아트 켈러도 이런 류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마약 전쟁에 대한 사명감으로 가족을 저버리고 일에 몰두한다는 설정인데, 별다른 매력이나 특이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노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정도만이 의외였어요. CIA 국장 존 홉스와 그의 오른팔인 인간 백정 군인 살 스카키 이런 작품에 나오는 악덕 CIA 국장과 그 부하와 전혀 다를 바 없어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지만 실화에 끼얹은 부분이 대부분 기대 이하, 함량 미달이라는 감점합니다. 흔하디 흔한 미국 음모론과 헐리우드식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각에 존재하는 높은 평가를 이해하기는 힘드네요. 이 작품보다 실화 논픽션이 훨씬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일종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엘차요와 '라 파밀라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돈을 위해 살인하지 않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지만, 죽어 마땅한 놈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만들지만 절대로 마을과 멕시코 내부에는 판매하지 않고 미국에만 판다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기묘한 세력이거든요.

2020/10/10

루팡의 딸 - 요코제키 다이 / 최재호 : 별점 1점

루팡의 딸 - 2점 요코제키 다이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으로 불리우는 수사 1과 형사인 카즈마의 가족은 모두 경찰이며, 심지어 키우는 개 까지 은퇴한 경찰견인 경찰 집안. 그와 교제하는 하나코는 도서관 사서로 위장했지만 가족 모두가 도둑인 도둑 가문의 딸이었다.

카즈마가 결혼을 전제로 하나코를 가족들에게 소개시킨 얼마 뒤, 카즈마와 수사 1과는 한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피해자는 처참하게 구타당해 죽은 고령의 노인으로 얼굴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여러가지 단서로 경찰은 피해자의 신원이 '다테시마 마사오'라는걸 알아냈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하나코 가족은 피해자가 신분을 감춘 할아버지 미쿠모 이와오라는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피해자가 '다테시마 마사오'로 위장한 이와오라는걸 알아내지 못해 사건은 미궁에 빠졌지만, 카즈마는 시체에 남겨져 있었다는 손수건을 단서로 진상을 알아냈다. 이 사건은 50년 전 성폭행 미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성폭행 미수범은 카즈마의 동료 마키 형사의 할아버지 에이스케였다. 이와오에게 쫓기던 에이스케는 손자 마키를 시켜 그를 죽이려 했는데, 마키의 착오로 진짜 다테시마 마사오가 살해되었다. 그래서 이와오와 와이치는 마사오의 죽음을 이용하여 범인을 잡을 계획을 세웠다...

일본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만화적인 설정이 극대화된 작품입니다. 그냥 봐도 "세인트테일"이 바로 떠오르지요. 그래도 카즈마가 하나코를 소개한 날, 그녀가 며느리로 적합한지 아닌지에 대해 가족회의 하는 등 나름 설정을 살린 요소들은 재미있었습니다. 형사인 아버지는 감으로 그녀가 착해서 마음에 든다고 하지만, 과학 수사대 요원인 어머니는 '착하다는 증거'를 요구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설정에 따른 재미는 소소할 뿐, 전개와 내용 모두 지나치게 만화적이고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추리적으로도 건질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와오를 죽인건 누구인가?' 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가기는 하는데, 동기가 말도 안되고 제공되는 단서도 공정하지 못하며, 범인도 급작스럽게 드러나는 탓입니다. 동기는 이와오가 50년 전 성폭행 미수범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성폭행 미수범이 자신의 손자를 시켜 이와오를 살해한 거랍니다. 증거는 이와오가 '범인의 눈을 보면 안다'라는 말 밖에 없는데 무려 50년 전 성폭행 미수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것도 손자를 시켜서? 심지어 손자 마키도 능력있는 형사로 전통있는 경찰 집안 출신이라 나름대로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데 할아버지가 시킨다고 살인을 저지른다? 뭐 하나라도 말이 되는게 있어야지, 이래서야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키가 범인임을 알아채는 과정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마사오를 살해한 마키 형사를 이와오가 쫓다가, 그의 손수건을 훔쳐 마사오의 시체에 남겨 놓은게 가장 큰 증거가 되는데, 손수건을 훔쳐낼 정도로 쫓았다면 지갑을 훔쳐내는 등으로 신원을 밝혀낼 수도 있던거 아닐까요? 왜 손수건을 훔쳐내는 정도로 만족했을까요?
그리고 성폭행 미수범이 마키 에이스케라는걸 안 이상, 이렇게 복잡하게 범인을 밝혀낼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마키 에이스케를 협박(?)하면 될 일이었어요. 

또 손수건에 'M'이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는게 단서라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카즈마는 신원을 감춘 미쿠모 이와오가 자신의 이니셜을 새길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테시마 마사오의 이름도 M으로 시작되니 별로 이상한건 아닙니다. 아울러 손수건에 지문이 남아있다면 모를까 손수건이 마키 형사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도 없고요.

범행을 밝혀내는 카즈마 결혼식에서의 몰래 카메라 생중계 역시 지극히 만화적입니다. 촬영이 가능했다면, 구태여 생중계를 할 이유는 없지요. 이건 하나코와 헤어진 뒤, 충동적으로 선택한 에미리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파토내려는 카즈마의 수작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카즈마는 솔직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으로 이래서야 주인공으로는 실격이지요. 속편에서 에미리에게 처절하게 보복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그 외에도 카즈마가 하나코가 도둑 집안의 딸이라는걸 알게 되는 과정, 카즈마가 단 며칠 사이에 수십년 전 부터 활약해 왔던 천재 강도단 L을 사로잡을 증거를 모은다는 전개 등 모두가 작위적이며 어설프고, 만화적입니다.
 또 아무리 나쁜 사람들 물건만 훔치고 라며 포장하고 있지만, 도둑은 분명한 악당인데도 우리 편인양 포장이 가능한지도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반에 중국 강도단이 보석상을 턴 뒤, 그 강도단을 미쿠모 가족이 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간 과정이 하나 끼어 있을 뿐 보석상을 턴건 마찬가지잖아요? 할아버지 이와오가 죽은 걸로 알고 있는 가족이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와 희희낙락하는 묘사도 이해가 잘 안되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입니다. 세세한 묘사는 전부 들어내고 캐릭터에 집중한 빠른 호흡과 전개 덕분에 읽기는 편했지만, 그 외에 건질건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읽어 볼 가치는 전무합니다. 작가가 쓴 다른 작품들도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군요.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