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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4

리미트리스 (2011) - 닐 버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디 모라는 한물간 작가이자 삶이 완전히 무너진 남자로 소설 계약은 사실상 진전이 없고, 연인 린디와의 관계도 파탄 직전이며, 생활은 무기력과 자기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에디에게 우연히 만난 전처의 남동생 버논이 NZT라는 정체불명의 약을 건네 주었다. 약을 복용한 에디는 마치 잠들어 있던 뇌의 모든 영역이 깨어난 것처럼 엄청난 집중력과 기억력, 사고력, 판단력을 발휘하여 책 한 권을 몇 시간 만에 흡수하고, 과거에 스쳐 지나가듯 듣거나 본 정보들까지 완벽하게 재구성하며, 사람의 표정과 말투, 공간의 분위기까지 계산해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에디는 이 능력을 이용해 며칠 만에 원고를 완성하고, 외모와 말투까지 완전히 달라진 채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했다. 약효는 떨어졌지만, 살해당한 버논의 집에서 찾아낸 대량의 약을 계속 복용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그는, 결국 재계의 거물 칼 밴 룬의 눈에 들어 거대한 합병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 누군가 약을 빼돌렸고, 이전에 약을 건네주었던 사채업자 겐나디의 습격으로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2011년, 무려 15년이나 전에 발표되었던 스릴러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물이 우연한 계기로 특별한 힘을 얻고, 그 힘을 발판으로 성공의 정점까지 치솟는 구조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에디 모라가 약물의 힘으로 얻은 정보 습득력과 판단력, 자기 연출 능력, 대화 기술, 순발력 같은 요소들을 성공 과정에서 적절하게 묘사하여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브래들리 쿠퍼의 캐스팅도 정말 적절합니다. 초반의 방구석 폐인 같은 초라함에서, 중반 이후 모든 상황을 장악하는 매혹적인 성공가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고도 강렬합니다. 영화 대부분을 사실상 혼자 끌고 가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여기에 로버트 드 니로가 칼 밴 룬 역으로 등장해 영화의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데, 묵직함 덕분에 영화 전체의 신뢰도가 높아지고요.

NZT가 만능이 아니라는게 드러나면서 시작되는 위기에 대한 설정도 아주 좋습니다. 약효가 떨어질 때마다 극심한 공백과 금단 현상이 찾아오고, 같은 약을 복용한 사람들 상당수가 심각한 후유증을 겪거나 죽음에 이르렀다는 설정인데, 이 설정이 없었다면 이세계 전생물과 다름없는 뻔한 치트 능력물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면들 - 에디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 후 기억 단절이 발생하는 장면, 약 없이는 무능했던 자신으로 돌아가는 공포를 그려낸 장면 - 도 좋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위한 촬영과 편집도 빼어납니다. 에디가 NZT를 복용했을 때 세상이 전혀 다른 질감으로 보이는 효과, 화면이 급격히 확장되거나 도시의 거리가 빨려 들어가듯 이어지는 연출, 빛과 색감이 강조되며 감각이 극대화되는 장면들이 대표적입니다.
액션 장면도 많지 않지만 속도감이 있고 긴장감도 충분합니다. 여기에 점프컷과 리듬감 있는 편집이 더해져, 많은 정보를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 안에 효율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식 역시 제법 교묘해서, 전형적이지만 경쾌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교훈극으로 끝나지 않는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보통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약물의 힘으로 성공한 주인공이 결국 대가를 치르고 모든 것을 잃거나,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면서 겸손한 교훈을 얻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전혀 달라요. 에디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거든요. 그는 사업가로 성공하고, 정치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이며, 마지막에는 칼 밴 룬조차 자신보다 아래에 놓인 인물처럼 다룹니다. 심지어 NZT의 능력을 약 없이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세계 전생물과 다름없는 결말인 셈인데, 이런 류의 장르물에서는 정말이지 처음 봤네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특히 약까지 복용했던 겐나디가 궁지에 몰린 에디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은 실망스러워요. 긴장감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위협에 비해 마무리가 너무 쉽게 풀려 버린 탓입니다. 약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우연이나 기묘한 행운을 이용해 간신히 살아남았더라면 더 강렬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애초에 에디가 겐나디와 얽히는 과정은 작위적이며, 그 뒤 겐나디 일당을 모두 처리하고도 별다른 뒷문제 없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NZT를 복용한 사람이 에디만이 아닌데, 왜 유독 그만 후유증을 통제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러닝타임이 길지 않은 탓에, 이런 구멍들은 그 외에도 제법 눈에 띕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영화 전체의 속도감도 좋고, 전개와 시각적 완성도가 높은 덕분입니다. 발표 당시 호평이 충분히 이해가 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웰 메이드 스릴러 영화를 찾는다면 추천드립니다.

2026/04/03

하에다마처럼 모시는 것 - 미쓰다 신조 / 신정명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는 편집자 시노, 오가키와 함께 고라 지방 도쿠유 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전해지는 네 가지 괴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행이 '하에다마 님' 숭배 신앙이 남아있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불가해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네 가지 괴담의 상황과 장소가 일치하는 네 건의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도조 겐야가 나서는데...

미쓰다 신조도조 겐야 시리즈 최신 장편입니다(국내 기준).  
괴담과 본격 미스터리를 결합하는 시리즈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라 지방에 전해지는 네 개의 괴담이 단순한 배경 설명이나 분위기 조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벌어지는 네 개의 사건과 정확하게 대응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네 개의 사건은 모두 일종의 밀실 살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본격물적인 가치도 높고요. 특히 노조키 렌야 사건과 신관 사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노조키 렌야 사건은 멀쩡히 입구가 열려 있는 대숲 신사에서, 어디에도 결박된 흔적이 없는 노조키 렌야가 어째서 굶어 죽었는가라는 기묘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언뜻 보면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였지요.
그러나 범인은 낡은 법의를 노조키 렌야에게 입힌 뒤 그 법의에 긴 대나무 장대를 꿰고, 천으로 양손을 결박해 양팔이 벌어진 상태로 몸을 고정해 두었던 겁니다. 그 결과 노조키 렌야는 빽빽한 대숲 사이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눈 앞의 출구도 어떻게 해도 걸려서 나갈 수 없었고요. 이는 현장에 남아 있던 대나무 장대와 사당을 부수려 했던 약한 타격 흔적, 대숲 입구에 남은 내려친 자국들로 증명됩니다.
닫힌 방이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는 밀실처럼 만든 점, 현장의 자연물 자체를 트릭의 일부로 끌어들였다는 점, 그리고 괴담과 동일한 '아사'라는 살해 방법을 택한 점 모두가 대단합니다. 별점 5점도 충분할 정도로요.

망루 오두막 전망널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던 신관이 추락사했는데, 호리이 씨가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고 사바오도 곧바로 망루를 찾은 탓에 범인이 도망칠 수 있었을 리 없었다는 신관 사건의 트릭도 돋보입니다.
범인은 먼저 신관을 살해한 뒤 망루 안의 옷장 위치를 바꾼 뒤, 벽과 옷장 사이에 시체가 가부좌 상태로 고정되게 끼워 놓았습니다. 이후 사후 경직이 진행된 다음날 아침, 범인은 신관의 옷을 입고 신관인 척 망루로 올라가서 굳어 있는 시체에 다시 옷을 입혀 전망널로 밀어 놓고 사라집니다. 범인이 사라진 뒤 시간이 지나자 시체는 사후 경직이 풀려서 아래로 떨어졌던 겁니다.
전망널이라는 망루의 독특한 구조와 망루 내부의 기물들, 그리고 항상 명상하는 신관을 바라보는 목격자 호리이의 존재를 알리바이 조작에 활용한 멋진 시한장치 트릭입니다. 이 역시 별점 5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에요.

도조 겐야와 소후에 시노의 티격태격, 도조 겐야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 등의 요소도 팬으로서는 즐길거리였고 괴담도 미쓰다 신조라는 작가의 이름값에 걸맞게 충분히 섬뜩합니다. "하에다마 님"으로 짐작되는 존재를 노골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은근하게 공포를 끌어내는 솜씨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괴담을 활용하여 현실의 사람들이 음모를 꾸몄다는 네 번째 괴담의 진상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다른 도조 겐야 시리즈와 비교하면 괴담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500여 페이지 분량 중 무려 120여 페이지가 괴담에만 할애되어 있습니다. 그 탓에 도조 겐야가 마을 안에서 직접 움직이며 활약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주요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인 가키누마 도루와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또한 몇몇 사건의 동기는 썩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신관이 오래전 마을의 범죄와 인신공양이라는 과거가 밝혀질까봐 노조키 렌야를 살해했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범죄자의 가족까지 오랫동안 낙인찍는 일본 특유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있는 동기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무리라 생각되네요. 이보다는 사랑하는 손녀 스즈카제를 탐내고 있었다던가, 보다 직접적인 협박을 받는다는 설정이 나았을 겁니다.
고라 지방 마을의 우두머리(?)인 5인방이 합병을 막기 위해 유리아게 촌에서 생활하는 닛쇼방적 사원을 위협했다는 이야기 역시, 목적과 동기가 다소 모호합니다. 사원 몇 명이 마을에 발길을 끊어봤자, 마을 합병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 같으니까요. 이 역시 보다 직접적인 위협이 필요했을거에요.

스즈카제 양이 다루마 동굴에서 기지를 살해한 사건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스즈카제가 동굴 내부를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는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동굴 내 도구를 이용해 원거리 살인을 성공했다는건 여러모로 무리라고 생각되거든요. 기지가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무방비하게 있어야 성립한다는 점에서도 말이 안되고요. 작품의 완성도를 해칠 정도는 아니지만, 앞선 두 사건이 워낙 뛰어나서 오히려 이 약점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오래전 마을이 상선을 침몰시켜 약탈했고, 어린 여자아이를 인신공양했다는 등의 고라 마을에 얽힌 괴담의 진상도 이전에 읽었던 미쓰다 신조 작품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어요. 게다가 정말로 '하에다마 님' 같은 괴이가 실존한다는 결말은 영 아니었습니다. 괴담이 실존한다는 분위기가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징이기도 한데, 한 개 마을이 깡그리 사라진다는건 억지였어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워낙 분명해서 충분히 읽어볼 만 합니다. 괴담은 섬찟하고, 추리는 현실적이면서도 참신하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는 본격 미스터리의 쾌감을 놓치지 않으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독자분들, 특히 도조 겐야 시리즈 팬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2026/03/29

캐시 아웃 (2024) - 렌들 에멧 : 별점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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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 에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설적 도둑 메이슨은 FBI 잠입 수사관 아멜리아에게 푹 빠졌다가 체포될 뻔한 다음 은퇴를 택했다. 그러나 자신을 뺀 일당이 동생 숀의 주도로 벌이던 암호화폐 강탈 작전에 문제가 있다는걸 알고 현장으로 향했지만, 곧바로 경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메이슨은 협상 전문가로 나타난 아멜리아와 밀땅을 벌이면서도,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한 플랜B를 고민하여 결국 회심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는데...

넷플릭스에 떴길래 별 생각없이 감상한 영화입니다. 오랜만에 본 존 트라볼타는 반갑더군요. 잔혹하거나 무겁게 끌고 가지 않아서 가볍게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존 트라볼타와 크리스틴 데이비스의 중년 로맨스도 귀여워요.

그러나 그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습니다. 은행을 노리는 케이퍼 무비 장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범죄 계획이 케이퍼 무비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형편없는 탓이 큽니다. 숀의 계획이라고는 은행장을 데리고 개인 금고를 여는 것 뿐이었으니까요.

그 이후의 전개 역시 치밀한 준비나 단계별 장애물 돌파가 아니라, 우연과 억지로 상황을 이어 붙이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메이슨 일당은 개인 금고 안에서 특정 숫자가 찍힌 사진을 확보하고, 그것이 살리자르라는 거물 독재자의 비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개인 금고 속 사진에 표시된 숫자로 거대한 국제적 비밀에 접근한다는 설정부터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고, 애초에 그런 민감한 자료가 왜 그런 방식으로 보관되어 있었는지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침 은행장이 개인 서버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는 설정도 뜬금없고, 그가 메이슨 일당을 그 장소까지 안내하는 상황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냥 모른다고 우겼으면 됐을텐데 말이지요.

결말은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음의 결정체입니다. 메이슨 일당은 결국 경찰 특공대에 포위되고, 정상적인 범죄 영화라면 이 지점에서 가장 치밀한 탈출 설계나 마지막 반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플라워스라는 살리자르의 부하를 불러낸 뒤, 그와 협상하는 방식으로 이 상황을 정리해 버립니다. 그것도 메이슨의 요구가 꽤 무리한데도 불구하고 플라워스가 이를 선뜻 들어주는 식이라서, 관객 입장에서는 긴장감보다 허탈함이 먼저 듭니다. 수많은 경찰과 특공대가 현장에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입을 막았는지, 어떤 식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는지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또한 경찰에게 포위된 상황임에도 느릿느릿한 전개는 분통터질 정도이며, 액션도 뭐 하나 눈에 띄는게 없습니다. 공간도 작은 은행 내부가 거의 전부라 돈을 들인 티도 나지 않아요. 한마디로 별점 1점도 아까운 완벽한 망작입니다. 케이퍼 무비의 외형은 빌려 왔지만, 장르를 이루는 핵심인 계획의 정교함, 실행 과정의 묘미, 반전의 설득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시하고, 진행 과정도 엉망진창이며, 중요한 설정과 결말까지 납득하기 어려워 장르 영화로서의 재미는 전무합니다.

2026/03/28

미명의 집 : 건축탐정 사쿠라이 교스케의 사건부 - 시노다 마유미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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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대학원생 사쿠라이 교스케와 아오, 미하루 일행은 할아버지 아스마 와타루가 지은 이즈의 별장 “여명장”에 대한 아스마 리오의 조사 의뢰로 여명장을 찾았다. 여명장은 스페인풍 별장이지만 집 중심의 파티오가 주변 방과 바로 이어지지 않고, 심지어 창문조차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건물이었다.
알고보니 와타루는 1년 전 그 집에서 머리를 다쳐 죽었는데 경찰은 사고사로 처리했으며, 얼마 뒤 아들(리오의 부친) 아스마 나다오도 같은 집에서 칼에 찔렸지만 자살 미수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교스케 일행은 와타루가 여명장 어딘가에 거대한 블루 사파이어를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던 중 부동산업자 사메가이 하루오가 여명장 파티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고, 사건 해결을 위해 아스마 가 사람들을 여명장에 불러모았지만 교스케마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다치고 말았다.

아오는 자신의 절대 기억을 통해 여명장에서 고야의 판화에 남겨진 흔적을 보고, 와타루가 죽기 직전 와인으로 “NADA”에 원 하나를 더해 “NADA-O”, 즉 “나다오”라는 이름을 남겼음을 알아냈다. 즉, 와타루를 죽인 범인은 나다오였다. 레키가 나다오에게 스페인어 “NADA”, 곧 “허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을 준 게 동기였다. 나다오는 평생 아버지에게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해 왔었다.
나다오는 자신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자살하려 했지만, 사메가이는 리오의 여동생 산고가 죽였다는게 진상이었고 
교스케는 뒤이은 추리쇼를 통해 아스마 와타루의 인생을 재구성하고, 사파이어의 위치를 밝혔다. 특이한 파티오의 구조와 레키가 남긴 글이 열쇠였다. 마지막으로 레키가 남긴 “NADA-O”는 단순히 아들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허무, 혹은 그 반대”라는 뜻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허무만은 아니었음을 전하려 한 흔적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시노다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건축 탐정 사쿠라이 교스케' 시리즈 1작으로 원서로 감상하였습니다. 분량도 길고, 전문 용어도 많아서 완독까지 오래 걸렸네요. 

철거 위기에 놓인 이즈의 별장 "여명장"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오래된 별장의 보존 문제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스마 와타루의 죽음, 아스마 나다오의 자살 미수, 사메가이 하루오의 죽음,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블루 사파이어까지 여러 갈래의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얽혀 있습니다. 분량은 적지 않지만 이렇게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덕분에 읽는 내내 호기심을 유지시켜 줍니다.

무대가 되는 "여명장"이 사건의 핵심이라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건축 탐정' 시리즈답게요. 스페인풍으로 만들어진 이 별장은 중앙의 파티오가 방과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고, 동선도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묘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교스케는 여명장의 배치와 채광, 파티오의 위치, 벽의 막힌 구조 같은 기묘한 요소들을 건축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하여 아스마 와타루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추리에 활용합니다.
영국에 유학을 갔던 와타루가 굳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술馬術을 배웠다는 점, 스페인풍 별장에 유난할 정도의 애착을 보였다는 점, 새벽과 바다를 피하면서도 그 공간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집 안에 남겨진 미술적·건축적 흔적들을 합치고 미학 및 역사적인 지식까지 동원한 교스케의 추리는, 와타루는 안달루시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귀족 여성 루나와의 기억을 평생 함께 했으며 여명장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그 기억을 일본 땅에 재현한 장소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건축학에 미학, 역사까지 결합되어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당연히 여명장에 대한 묘사도 치밀하고요.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69번(아래 그림)이 사건의 핵심 단서로 사용되는 미술적인 장치도 좋습니다.

그림 속 'NADA'라는 말이 단순한 문구나 다이잉 메시지가 아니라, 동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다오는 자신의 이름이 스페인어로 "허무"를 뜻하는 "NADA"에서 왔다고 여기며, 아버지가 평생 자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해서 와타루에 대해 증오와 살의를 품게 되었다는데 현학적이면서도 작품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에 'NADA'에 'O'가 더해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로입니다. 여러모로 작가가 건축 뿐 아니라 미술, 그리고 언어의 상징성을 세심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전해주거든요. 마무리로도 최고였다 생각되고요.

다만 추리소설로서 보면 아쉬움도 큽니다.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은 인물 설정입니다. 주인공 사쿠라이 교스케는 물론이고, 동반자 아오와 친구 미하루까지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만화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교스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으면서 유난히 아침잠이 많고, 아오는 순간 기억력에 가까운 특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 식인데, 깊이있는 전문가적 분석이 중요한 작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 정도 수준이 적당했어요. 

추리도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고야 화집의 다이잉 메시지로 나다오의 동기가 드러나면, 아스마 와타루 사건의 범인은 사실상 나다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그를 누가 도왔느냐로 좁혀지는데, 리오가 아니라면 당시 슈젠지에 나다오와 함께 있던 산고 뿐입니다. 나다오 자살 미수 사건에 이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나다오의 공범(?)으로 비밀을 함께 했던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요. 운전을 할 수 있고, 리오로 오인될 만한 외모를 가진 인물 역시 산고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수수께끼에 비해 추리는 다소 빈약합니다.
또한 나다오가 범인이라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남겨진 다이잉 메시지와 나다오의 자백(?)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적인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이잉 메시지가 쓰여진 화집을 폐기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산고가 블루 사파이어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동기도 가족 안에서의 소외감 등으로 잘 설명하고 있기는 한데, 사메가이가 죽게 되는 과정은 우연과 억지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큽니다. 와타루가 리오에게 남긴 말 조각상 가운데 유서 같은 쪽지가 들어 있던 걸 산고가 훔쳤던 것, 그것을 깨트려 내용물을 발견했던 것, 쪽지를 가지고 여명장에 갔다가 사메가이를 만난 것 모두 우연이라는건 너무 작위적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블루 사파이어가 숨겨진 곳이 파티오 안의 샹들리에였다는 마지막 장면도 극적이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한줄기 빛이 들어와 사파이어를 비추는 장면은 만화같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리고 여기 숨겼다면 산고의 상세한 조사 때 발견되지 않았을 까닭이 없고, 발견하지 못했어도 원래 계획대로 여명장을 철거했다면 발견할 수 있었을테니 대단한 추리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건축과 미술을 사건 해결의 핵심에 놓은 발상, "NADA"와 "O"를 둘러싼 상징, 그리고 아스마 와타루의 삶을 복원하는 마지막 추리는 볼 만했지만, 기대보다는 못했어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는 보람 외에는 특별히 건질게 없습니다. 문고본 기준 47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면서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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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3/22

관상 (2012) - 한재림 : 별점 2점

계유정난에 관상이라는 소재를 결합한 2012년 영화입니다. 당시에는 미처 보지 못했었는데,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유명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답게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눈에 띕니다. 특히 김종서 역의 백윤식과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두 배우 모두 캐릭터에 완벽하게 어울리며, 등장하는 장면마다 집중도를 끌어올리는 호연을 보여줍니다. 그 외 배우들도 전반적으로 연기와 외모 모두 역할에 잘 맞는 캐스팅이라 어색함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전개도 중반까지는 꽤 괜찮습니다. 관상가의 활약을 그린 전반부는 적절한 유머가 더해져 유쾌하고, 김종서 측과 수양대군 측의 지략 대결로 넘어가는 중반부 이후는 잘 만들어진 정치 드라마로 몰입해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수양대군의 얼굴을 숨기고 관상을 보게 만든 장면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또 10년도 더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완성도도 흠잡을 데 없습니다. 촬영이나 미술, 의상, 음악, 소품 등 전반적인 퀄리티가 높아 화면 자체가 안정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관상가 김내경의 아들 진형이 수양대군 측의 계략에 당하고, 이를 계기로 팽헌이 김종서의 계획을 넘겨버리는 시점 이후부터 전개가 급격히 지루해진다는 점입니다. 슬로우모션이 과하게 사용되고, 여러 인물들의 최후를 계속 이어서 보여주는 탓에 극적인 효과가 점점 떨어집니다.
게다가 계유정난의 성공과 김종서의 최후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를 새롭게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애초에 쉽지 않았을 텐데, 결과적으로는 길게 늘어지면서 지루함만 남는 느낌입니다. 차라리 이 부분을 짧고 강하게 정리하고, 김내경 중심으로 마무리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후반부는 길고 힘이 빠집니다.
영화 설정도 다소 아쉽습니다. 김내경은 자신의 상을 보지 않았던 걸까요? 높은 관직과 부귀영화를 노리다가 아들까지 잃는 운명을 조선 최고의 관상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김내경의 아들 진형 역의 이종석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미스캐스팅이라고 느껴집니다. 설정상으로는 연민을 자아내는 어린 소년 같은 이미지가 필요했는데, 배우의 외형이나 분위기가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믹한 장면에서만 소비된 연홍의 캐릭터도 다소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적인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후반부 전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2026/03/21

발레리나 (2025) - 렌 와이즈먼 : 별점 1.5점

"존 윅" 시리즈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핀 오프 액션 영화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을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컨티넨탈 호텔이나 루스카 로마 같은 익숙한 설정들이 등장하지만, 이미 알려진 장치를 배경처럼 끌어다 쓰는 데 그칠 뿐입니다. 시리즈의 개성을 만들어 주던 설정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여성이 복수에 나선다는 흔한 설정을 포장하는 장식에 불과해요. 사실 "존 윅" 세계관도 서양 관객들에게는 새로왔을지 모르지만, 일본 만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설정들일 뿐이기도 하고요.

이야기도 뻔합니다. 강한 조직의 후계자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운명의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도망치지만 결국 아버지를 잃은 뒤, 다른 조직에 들어가서 실력을 키운 뒤 복수한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인 탓입니다.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 할아버지라는 설정조차도요.
이에 대한 이야기 전개도 엉망입니다. 어린 시절 헤어졌던 언니가 갑자기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세력 간 협상을 위해 등장한 존 윅이 어느 순간 그녀의 편에서 싸운다는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장치였으니까요.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원래 "존 윅" 시리즈 역시 액션이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 작품마다 적어도 하나쯤은 관객에게 강하게 남는 시퀀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레리나"는 그런 인상적인 장면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은 여성의 액션이라서 타격감도 부족하고, 대체로 밀리는 액션이 많아서 시원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발레리나"에 걸맞게, 발레 동작을 액션에 녹여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화염 방사기를 이용한 대결은 눈꼴 사나운 수준입니다. 화면은 요란하지만, 열린 공간에서 총도 충분히 있는 상황에 굳이 화염 방사기를 사용해야 할 이유는 설명이 안되지요. 현실감이나 개연성 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선사하기 위한 욕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이렇게 "존 윅"의 명성에 기댄 졸작이지만 장점이 아주 없지만은 않습니다.무엇보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이 역할에 잘 어울립니다. 다소 가련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소녀 역할을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팬이라면 '존 윅'의 등장과 활약은 이야기의 개연성과는 별개로 즐길만한 부분이었고요.
전직 킬러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 '할슈타트'의 설정 만큼은 아주 괜찮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장점은 너무 사소합니다. 평균 이하의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불과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3/20

지뢰 글리코 - 아오사키 유고 / 김은모 : 별점 3점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작가인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의 단편 연작집입니다. 2024~25년에 걸쳐 일본의 4대 미스터리 랭킹 1위를 휩쓸었던 작품이지요. 저 역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습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유쾌함과 만화적인 설정, 그리고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본격 미스터리를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게임’의 영역으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모두 다섯 가지 게임이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게임이지만, 여기에 약간의 변주를 더했다는 점에서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게임은 ‘정확하게 정해진 조건’ 아래에서 진행되며, 그 조건의 허점을 파악하고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는 플레이어가 승리하게 되고요. 이러한 점 덕분에 단순한 놀이를 넘어 두뇌 게임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계단 오르기나 가위바위보에 더해진 약간의 변주만으로 순수한 두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여러 랭킹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축제 때 좋은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카페 주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등 비교적 일상적인 이유인 게임의 목적들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인 이모리야 마토도 꽤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놀라울 정도의 분석력을 지닌 천재이기는 하지만, 게임 이외의 부분에서는 그렇게 기이한 면모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연이나 기묘한 습관도 없는, 다소 가벼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여학생입니다. 구누기 선배에게 거는 장난스러운 모습이 본래 모습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아래 만화판 이미지처럼요.
친구이자 주요 화자인 고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며, 다른 등장인물들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사립 세이에쓰 고교와 화폐처럼 유통되는 S칩을 걸고 게임을 벌이는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1억 엔에 가까운 돈이 걸린 게임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도박 실력이 학교 내 서열을 결정한다는 "카케구루이" 수준의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세이에쓰 고교와 얽히면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어 학생회장 사부리나 이모리야와 비슷한 수준의 게임 천재인 우키타 에소라 등도 앞서 등장했던 평범한 학생들과는 상당히 다른, 다소 비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토가 세이에쓰의 용벙(?)처럼 활약한다는 여지를 남기는 에필로그도 영 별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게임을 고도의 두뇌 게임 영역으로 끌어들인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등장하는 이야기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뢰 글리코 :

학원제 때 옥상의 사용권을 놓고 마토와 학생회의 구누기 선배가 ‘지뢰 글리코’라는 게임으로 대결합니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플레이어가 3의 배수만큼 계단을 올라가는 게임인데, 서로 계단에 ‘지뢰’를 장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마토가 장치한 지뢰에 걸린 구누기 선배가 3연타로 30계단을 미끄러져 패배하고 맙니다.

3의 배수로 올라가는 상황을 이용하는 초반부 전개, 그리고 설치한 지뢰 위치에 선배가 서도록 유도한 마지막 승부는 볼 만합니다. 그러나 구누기 선배가 마토의 지뢰를 모두 밟아 열다섯 계단 차이가 벌어진 뒤 바로 패배 선언이 이어지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위나 보로 이기면 여섯 계단씩, 바위로 이기면 세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니 3연승만 하면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두뇌 게임이라면 모를까, 순수한 가위바위보 승부라면 3연승 정도는 그리 낮은 확률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님 쇠약 :

카루타 카페에 출입 금지당한 카루타부를 위해, 카페 사장과 마토가 백인일수 카루타와 ‘신경 쇠약’을 결합한 ‘스님 쇠약’ 게임으로 승부를 벌입니다.

그런데 ‘두뇌 게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카페 사장은 카루타 카드에 몰래 표시를 하여 사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를 간파한 마토가 카드를 바꿔치기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카드 마킹을 새로 한 뒤 바꿔치기한다는 방법 자체도 비현실적이고, 마지막 카드 조합 역시 운의 비중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사기를 고발해 망신을 주는 편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 :

마토를 마음에 들어 한 학생회장 사부리 선배가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합니다. 선배가 이기면 마토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마토가 이기면 선배가 마토의 중학교 동급생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만들어 준다는 조건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는 일반적인 가위바위보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각각 ‘독자손’을 추가해 7전 4선승제로 겨루는 게임입니다. 독자손은 형태와 이름을 정하고 그 효과를 설정할 수 있는데, 최소한 한 종류의 손에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설정들이 꽤 복잡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토는 ‘형태가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교묘하게 활용해 마지막 대역전승을 이끌어냅니다. 핵심은 중반 이후 고다에게 부탁한 핫초콜릿을 마시기 위해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던 장면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손이므로 사실상 무효가 되어 그 판에서는 패배한 셈이었는데, 사부리 선배는 이를 독자손 설정의 효과로 오해해 마지막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처럼 평범한 게임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두뇌 게임으로 만든 점이 인상적인 이야기이며, 주어진 조건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길 수 있다는 전제도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물론 사부리 선배가 이 게임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안했던 ‘스네일’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 :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사립 세이에쓰 고교 학생회와 게임을 벌입니다. 그들의 ‘S칩’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승부 게임은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로, 방법은 한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표적(술래)은 몇 개의 단어로 외칠지를 먼저 정하고, 암살자(공격자) 역시 몇 걸음을 움직일지를 미리 선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사실 게임을 만든 스도는 그동안 잔꾀를 부려 ‘0’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 왔고, 그 덕분에 항상 승리해 왔습니다. 암살자는 최소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마련이니,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모리야는 이 트릭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표적에게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을 걸어 둡니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 정면만 보고 움직여야 한다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표적이 보지 못하는 공원 밖으로 돌아 나간 뒤, 떡갈나무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 표적을 붙잡는 데 성공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승리한다는 두뇌 게임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만, 세이에쓰의 오케가와가 엄청난 청력으로 숫자를 추측한다는 설정은 다소 과합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거액이 게임에 걸리는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게다가 스도의 필승법도 소문이 나면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4 Rooms Poker :

마토가 호적수 에소라와 S칩 전액을 걸고 세 장의 카드로만 패를 만들어 겨루는 포커 게임으로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처음 받은 카드는 버리고 한 번 다시 받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포커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가 제한된 시간 안에 카드를 가지러 네 개의 무늬 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방에 놓여 있는 카드 중 원하는 카드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이지요.

등장하는 게임 중 조건이 가장 많고 복잡하며 여러 장치들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건들 가운데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에 불까지 지른다는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생각되네요.

마지막 승부 역시 아쉽습니다. 아무리 카드의 뒷면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에소라가 최후의 승부 순간까지 뒷면의 색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입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뒷면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가 원래의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에 모든걸 걸기에는 너무 확률이 낮지 않나 싶어요.

무려 1억이라는 판돈을 쿨하게 포기하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토의 성격이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본인은 몸을 팔 생각까지 했는데 그걸 이대로 퉁친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3/15

Nobody - DARLIN' DARLIN' (1984)

제 인생 곡이라 할 수 있는 노래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 "きまぐれオレンジロード"의 두 번째 오프닝 곡이었던 "Orange Mystery"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자주, 많이 듣는 곡이지요. 이런 글을 올렸을 정도로요.


하지만 이 노래를 만들었던 'Nobody'라는 밴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리콘 차트에 올랐던 적도 없어서 별로 인기 없던, 그냥 운 좋게 노래 한 곡이 애니메이션과 엮였을 뿐인 밴드라고 생각해 왔었지요.

그런데 얼마전, Spotify를 통해 음악을 검색하던 와중에 Nobody의 앨범을 접했는데, 시대를 앞서갈 정도로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조금 찾아보니, Nobody는 아이자와 토시오, 키하라 토시오 두 명이 결성한 록 밴드입니다. 원래는 유명가수 야자와 에이키치의 백 밴드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인데, 야자와 에이키치가 미국으로 활동 거점을 옮긴 뒤, 먹고 살기 위해서 밴드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실력파 뮤지션답게 다른 가수들에게 제공한 곡들도 많습니다. 그 중의 한 곡이 역시나 "きまぐれオレンジロード"의 명곡인 "NIGHT OF SUMMER SIDE"고요.

제가 들은 이들의 곡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 곡인 DARLIN' DARLIN'을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유튜브 댓글을 보니, 80~90년대 청춘을 보냈던 아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명곡인 듯 한데, 저의 향수도 마찬가지로 자극하는군요. 


아~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집니다.

2026/03/14

추리 소설 속 자동차 :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

그동안 추리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음식은 인물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지요.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꿔,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자동차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자동차는 추리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하고, 완벽해 보이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니까요. 때로는 밀실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차종과 색상, 구입 시기 같은 정보만으로도 인물의 성향과 처지를 드러노기도 합니다. 굴러가기만 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고물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는 탐정 사와자키처럼요. 낡고 오래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BMW’라는 별명답게 튼튼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과 차가 절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를 떠올릴 수 있겠네요.

이처럼 현대 추리소설에서 자동차는 사건과 등장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입니다. 수많은 작품 속에 다양한 차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는 자동차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자동차는 알파로메오 스파이더 3세대입니다.

알파로메오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한 브랜드로, 레이싱을 통해 다져진 기술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운전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자주 언급되며, 스포츠성을 중시하는 제조사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파이더는 1966년 처음 등장한 2인승 오픈 스포츠카입니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맡았고, 유려한 곡선의 차체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화 "졸업"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1993년까지 약 27년간 생산되며 12만 대 이상 판매된 장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중 3세대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후기형으로,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범퍼와 외관을 현대적으로 다듬어 1980년대 감각에 맞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모델이지요.

이 차가 등장하는 작품은 일본의 콤비 추리소설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1987년 작품 "그리고 문이 닫혔다"입니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두 명(이노우에 유메히토, 도쿠야마 준이치)의 합동 필명으로, 이름의 유래는 ‘재미있는 두 사람’(오카시나 후타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도입한 본격 추리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는 피해자의 모친이 사건 용의자 네 명을 핵 셸터에 가둔 뒤 진상을 밝혀내려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피해자 사키코의 애차가 바로 알파로메오스파이더고요. 세대가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발표 시점이 1987년이고 사키코가 부유한 집안의 딸로 최신 유행과 명품을 선호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판매 중이던 3세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려한 빨간색 오픈 스포츠카는 제멋대로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사키코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유이치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일부러 차를 세우고, 루프를 연 채 키스를 나눈다는 묘사를 통해 관심받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이는 2인승 오픈카라서 가능했을 행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자동차는 단순히 이러한 사키코의 성격을 상징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을 당시 타고 있던 차가 바로 이 알파로메오였고, 사건의 실마리 역시 차량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실린 흑백 사진 속 인양된 알파로메오와, 사키코가 생전에 찍힌 컬러 사진 속 차량을 번갈아 보던 유이치 일행은 운전석 시트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두 사진 모두 차량의 왼쪽에서 촬영되었고, 좌핸들 차량이므로 운전석은 카메라 쪽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끌어올린 차량의 시트는 컬러 사진보다 훨씬 뒤로 밀려 있습니다. 사키코가 직접 운전했다면 시트 위치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사건 당시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은 인물이 사키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동차는 단순한 배경, 소품이 아니라 소설의 추리적 핵심 장치로 사용됩니다. 시트 위치라는 사소한 차이가 사고사라는 견해를 뒤집고,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드니까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시각 현장에 있던 네 명 중 타다시는 사키코를 살해한 뒤 차량에 태워 절벽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다시와 치즈루, 아유미는 이후 함께 절벽에서 차량을 발견했지만, 차 안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 사람은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타다시가 차량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그 시간대에 유일하게 자리를 비운 인물은 유이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치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사건 초반에 별장을 떠났기 때문에 살해를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요.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요. 누가 언제 운전대를 잡았고, 사키코의 죽음은 어떻게 연출된 것일까요. 그 진상과 트릭은 "그리고 문이 닫혔다"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으실 때 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한 번쯤 눈길을 주시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26/03/08

왕과 사는 남자 (2026) - 장항준 : 별점 4점

장항준 감독의 천만 관객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를 다루는 사극은 왕위 찬탈 과정이나 권력 다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폐위되어 귀양을 간 단종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시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단종의 삶을 중심에 두며 세조는 나오지도 않고, 한명회가 빌런 우두머리인 사극은 처음 봤는데 굉장히 신선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크게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사료를 토대로 실제로 있었을 법하게 자연스럽게 구성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습니다. 폐위된 뒤 나약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죽을 기회만 찾던 단종이 점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덕분이에요. 동시에 단종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려는 한명회의 계략, 금성대군의 역모가 함께 펼쳐지며 발생하는 긴장감도 제법입니다. 여기에 단종과 민초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엄홍도의 인연과 에피소드들도 큰 재미를 전해 줍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합니다.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과 한명회 역의 유지태의 경우 외모, 발성 등 모든 면에서 두 인물의 대비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이에요. 특히 거대한 체구부터 위압감을 전해주는 한명회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유배지 영월과 음식들 연출도 발군이에요. 이런 디테일이 이 영화의 큰 힘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크게 느껴진건 유해진의 연기입니다. 엄홍도라는 인물이 아니라, 익히 알고 있던 '유해진'이라는 인물 모습 그대로였던 탓입니다. 엄홍도라는 인물에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이게 좋은 연기였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등장도 조금 아쉬웠어요. 단종이 왕으로 각성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삽입된 장면이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CG가 어색하게 느껴졌고 현실성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신파적인 연출도 약간 과한 느낌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가셔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누이가 됩시다”, “차가우셨지요?”로 이어지는 3연타는, '이래도 안 울꺼야?'라는 감독의 의도가 너무 강했어요. 차라리 여운을 좀 더 길게 남겨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고 완성도도 안정적인 작품입니다. 천만 관객을 기록할 정도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크게 빠지는 부분 없이 잘 만들어진 사극 영화라는 점은 분명해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옆 자리에 앉은 딸아이가 거의 오열하면서 보던데 과연 엄홍도가 죽었어도 저렇게 울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는 했습니다.

2026/03/07

워 머신 : 전쟁 기계 (2026) - 패트릭 휴즈 : 별점 2점

미육군 최강 부대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 위한 8주간 훈련에 도전한 81번 훈련병은 우여곡절 끝에 최후의 시험인 '죽음의 행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훈련병들은 예정된 훈련 대신 외계에서 온 전투 기계를 만나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데...

넷플릭스 최신 영화입니다. 주말 맞이로 감상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초반부의 지루했던 배경 설명이 끝난 뒤, 핵심 이야기인 레인저 훈련생들이 벌이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상대 생존기는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미약한 희생자들이 도주하면서 생존하려 노력하는, 거대 크리처 호러물 장르물로의 가장 중요한 재미 요소인 '긴장감'을 잘 살린 덕입니다. 나침반 등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등으로 로봇 등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요. 망가진 무전기,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 고장난 장갑차 등의 여러 제약 사항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고요.

크리처 호러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크리처의 강력함 역시 훈련병들을 압도하며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들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 편이 다 죽는 영화는 정말 오랫만에 봅니다. 최소한 여군은 살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레인저 훈련병'이라는 미 육군 최강 군인들이 희생양 역으로 설정된 점도 좋습니다. 절벽에서의 레펠 기동을 비롯한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인간 이상의 활약이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약의 핵심인 주인공이 '잭 리처' 앨런 리치슨이라는 캐스팅도 딱 맞아 떨어지는 점입니다. 캐스팅이라면, 추억의 배우 데니스 퀘이드의 노병 연기도 반가왔어요.
아울러 주인공이 공병 출신이라서 로봇의 약점을 눈치채고 해치운다는 마지막 장면의 설득력도 꽤 높은 편입니다. 맨 앞의 차량 정비 장면과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군인들이 강력한 외계 크리쳐와 싸워 극히 일부만 겨우 살아남는다는건 "에일리언(2)"과 비슷하고, 이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엇비슷한 재미를 주지만 마지막 10여분이 영화를 완전히 망쳐버려서 아쉽습니다. 외계 로봇의 습격이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이 닥쳤는데 레인저가 되는 결승 라인에 도달하는게 지상 목표라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황당했는데(최소한 부상자는 의무병에게 바로 인계했어야지요),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게다가 막 복귀해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다시 전우들과 출동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비유하자면 "에일리언"의 리플리가 살아서 귀환한 뒤, 군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하고 선봉에 서서 에일리언을 박살낸다는 에필로그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 마지막 10여분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거만 없었어도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한데 아깝네요.
그래도 앨런 리치슨이라는 배우의 액션은 믿을만하다는 확신이 생기기는 합니다. 다른 작품도 찾아보고 싶군요.

2026/03/06

소녀 A의 살인 - 이마무라 아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DJ 신타니 카나는 심야방송에서 ‘F여학원 1학년 소녀 A’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양어머니가 죽은 뒤 양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고, 밤마다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으며 더는 버티지 못하면 자살하거나 양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방송 후, 신타니 카나는 고교 동창 와키사카에게 연락했다. 후요 여학원 교사인 와키사카에게 편지 속 내용이 진짜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와키사카의 조사 결과, 조건에 맞는 학생은 세 명 - 물리 교사 다카스기의 양녀 다카스기 이즈미, 의사의 딸 마쓰노 아이, 경찰의 양녀 스와 준코 - 이었다. 

카나는 세 명을 직접 접촉해 ‘소녀 A’를 찾으려고 연락처도 받았지만, 곧바로 다카스기 히사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강도 사건, 혹은 소녀 A가 이즈미이며 그녀의 복수가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다카스기가 마쓰노 의사를 협박하고 있었다는게 드러나 마쓰노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사를 받던 마쓰노가 “집에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고, 같은 전화를 받았던 스와 경부는 수사를 통해 모든게 신타니 카나와 연결된다는걸 알아내는데...

국내에는 소개된 적 없는 이마무라 아야의 장편 추리소설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은 다카스기 히사오 살인 사건을 쫓는 본편의 이야기와, 한 ‘소녀’의 독백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독백하는 소녀가 본편 등장인물 중 의외의 인물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서술 트릭에 의한 반전이 재미의 핵심이고요.
지금 시점에서 이런 교차 서술을 통한 화자를 오해하게 만드는 서술 트릭은 제법 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995년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했을 겁니다. 지금 읽어도 웬만한 재미는 선사해 줄 정도니까요.

단지 서술 트릭 뿐 아니라, 카나가 협박범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소녀 A’의 편지를 날조한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소녀의 성폭행 피해에 대한 고백을 방송에서 소개한 뒤, 동창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와키사카에로부터 소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계획으로 DJ라는 직업이 갖는 파급력,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양부의 성범죄라는 소재가 결합되면서 ‘개인정보 확인’이라는 위험한 행위가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덕분입니다.

얼핏 사소해 보였던 마쓰노의 주장, 즉 집에 있을 때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사건 해결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등, 앞 뒤가 잘 맞아 떨어지며 막힘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쉽게 읽히며,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니까요.

다만 후반부는 지나치게 뻔합니다. 이즈미의 “알토 목소리”였다는 증언으로 신타니 카나가 전화를 걸었다는게 특정되고 나면, 그녀가 범인이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다카스기는 이전에도 협박범이었으니 카나를 협박한게 범행 동기가 되었을테고, 협박의 원인은 과거 카나가 ‘소녀’일 때 저질렀던 양부 살해일 것, 즉 카나가 '소녀'였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고요. 양부 사체를 고향집에 숨겨두었을 거라는 정황도 뻔하디 뻔합니다.
초반에 소녀가 “혹시 이즈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 끌고 갔더라면 그나마 이런 뻔한 추정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즈미 방의 자물쇠나 전날의 수면제 복용은 경찰 조사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이즈미가 소녀일 가능성’은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소녀들’은 그녀들이 다카스기를 죽일 이유가 희박하니 애초에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즉, 반전의 폭을 초반부터 줄여놓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범죄에 대한 여러 설정들도 설득력이 부족하고 거슬립니다. 대표적인게 신타니 카나에게 ‘운이 너무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 후요 학원에 모친 없이 양부와만 사는 1학년 여학생이 무려 3명이나 있었다
  • 아내가 유키에인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대상자인 다카스기에게 맨 마지막에 걸었다
  • 전화들을 사건의 핵심 용의자 마쓰노와 수사 담당자 스와, 그리고 피해자의 딸 이즈미가 각각 받았다

는 건데, 대상자가 딱 한 명이었거나, 이즈미가 처음 전화를 받았거나 했다면 사건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거에요. 이렇게 악운이 겹치는건, 불운으로 사건을 억지로 진행시킨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습니다.
카나의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 금액이 얼마였든, 2년만 버티면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협박이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는 계산을 생각하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했어야 했나 싶거든요.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듯한 다카스기가 협박에 맛을 들여 계속 협박했다는 설정도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스와 경부가 공무집행 중 사망하게 만든 범인의 딸을 양녀로 키운다는 설정은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독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이야기 안에 꽤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그 사건을 둘러싼 여성의 심리 묘사가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는 점은 좋습니다. 서술 트릭을 잘 활용했다는 분명한 장점도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감점합니다만, 번역 출간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은 합니다.

2026/03/01

그리고 문이 닫혔다(そして扉が閉ざされた) - 오카지마 후타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키코의 죽음 이후, 사키코의 어머니 미타 마사요가 사건 당시 함께 있었던 일행 4명(유이치·아유미·타다시·치즈루)을 집으로 불러 수면제가 든 주스를 먹인 뒤 지하 셸터에 감금했다. 셸터 안 화장실에는 “너희가 죽였다”라는 문구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이들은 사키코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를 두고 서로를 의심하며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사고’로 보였던 사건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사키코가 셸터 안에서 아이스픽에 찔려 죽었고, 그 뒤 누군가가 사고로 위장했다는 진상이 드러난다...

"클라인의 항아리"로 유명한 일본의 본격 추리 작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약 20년 동안의 일본 미스터리 베스트 100에 포함될 정도로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정 사건의 유력 용의자 네 명을 폐쇄 공간인 핵 셸터에 가둔 뒤, 그들끼리 생존 게임을 이어 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1987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류의(예를 들어 이런 작품) 원조인 듯 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본격 추리 작가의 작품답게 논리적으로, 발견되는 단서와 증언들에 의해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됩니다. 이 과정을 밟아 나가기 위한 단서의 제시도 공정하고요. 작품 속 추리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처음에는 사키코의 죽음을 모두 사고사라고 믿습니다.
  2. 사진 속 자동차 운전석 시트 위치를 근거로, 사키코가 혼자 운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운전석 시트가 ‘추락 충격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어려운 방향’이라서, 사키코보다 체격이 큰 누군가가 운전했을 가능성이 떠오르지요.
  3. 셸터 화장실 바닥에서 수건에 싸인 아이스픽이 발견됩니다. “왜 셸터 화장실 바닥에 있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사키코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됩니다. 이후 네 사람은 서로의 알리바이를 교차하며 검증합니다.
  4. 곧이어 셸터에서 사키코의 귀걸이가 발견되면서, 셸터 자체가 살인 현장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5. 사키코의 알파로메오가 나갈 당시 치즈루와 아유미는 별장 2층에 있었고, 차가 나가기 30분 전 유이치는 디지에서 별장으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성립합니다. 따라서 알파로메오를 운전할 수 있는 인물은 타다시뿐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타다시는 절벽에서 돌아올 때 탈 오토바이도 알파로메오에 싣고 갔던 겁니다.
  6. 그러나 이후 치즈루와 아유미가 절벽에서 알파로메오를 발견했을 때, 차 안에 사키코의 사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절벽에서 떨어진 시점은 그들이 차를 본 이후의 새벽이며, 당시 세 사람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차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인물은 유이치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7. 그러나 타다시가 사키코의 사체만 먼저 절벽 아래로 던진 뒤, 얼음을 쐐기처럼 가공해 장치하여 차가 새벽에 자동으로 떨어지도록 만든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스박스 뚜껑이 열려 얼음이 물로 변해 있던 점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됩니다.

타다시의 사체 은닉 이후 밝혀지는 진상 또한 나름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쟁에서 유이치가 밀친 탓에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고, 유이치를 사랑하는 아유미가 이를 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묘사된 유이치와 아유미의 통화를 통해 미리 암시되기에, 치밀하며 공정하다는 느낌도 전해줍니다.

아울러 네 명만 등장하는 폐쇄 공간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셸터의 묘사(아래의 ChatGPT 이미지 참고하세요)와 그곳을 탈출하려는 여러 시도들도 긴박감 넘칩니다. 소규모 무대극으로 각색해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아직 영상화가 되지 않은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던 화자 유이치의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다는 진상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타다시의 사체 은닉 방식 역시 허술합니다. 사체를 단순히 바다에 던졌다면 언제든 발견될 수 있고, 그 경우 사고사가 아니라는 점이 곧바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사체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왜 사체에 돌을 묶는 등의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사키코의 모친이 사고사를 의심해 당시 별장에 있던 네 명을 셸터에 가둔 이유, 그리고 유이치와 그리 오래 함께 하지 않았던(별장에서의 3일 정도 뿐) 아유미가 유이치를 위해서 사키코의 죽음을 은폐할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는건 설명이 부족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멍이 있습니다. 유이치가 화자인 상황에서는, 유이치가 별장을 떠난 뒤 남아 있던 세 명이 사키코를 살해하고 차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뜨렸다는게 가장 논리적인 추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키코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아이스픽을 챙겼다면, 그 대상은 연인을 빼앗아 간 아유미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유미가 반격해 사키코가 사망했고, 아유미의 약혼자 타다시가 사체 은닉을 도왔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애초에 타다시는 동기도 가장 부족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가능성이 아예 제시되지 않는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폐쇄 공간 미스터리의 원조격이라는 의미 외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며 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추천드릴 만한 작품은 아니네요.

2026/02/28

상점가의 전진 - panpanya / 유유리 : 별점 3점

국내에 출간된 전권을 구입해 읽을 정도로 사랑하는 작가 panpanya의 신작입니다. 출간 사실을 뒤늦게 알아 구입이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단편 열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언제나처럼 일상 속에서 기발한 발상을 끌어내 독특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건물’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의 집"은 집 가족이 자라고 성장해 하나의 큰 집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연"은 멀리 보이던 집들이 사실은 건설업체의 간판이었다는 설정입니다.
"슈퍼 하우스"는 집이 일종의 로봇이 되어 외부의 공격을 격퇴합니다.
"즐거운 부동산"에서는 복권으로 택지에 당첨된 뒤 집 프라모델을 구입해 집을 건설합니다.
"윤번지"는 상속받았지만 사라진 땅을 탐정인 주인공과 레오나르도가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과거 투영법 제작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평면 지도로 인해 발생한 사기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입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어긋남을 다시 분석해, 이 ‘윤번지’가 지하에 위치했다는걸 밝혀냅니다.
"빌딩"은 빌딩이 원래 싹이며, 그것을 잘 키워 만들어낸다는 내용입니다.
"상점가의 전진"에서는 확장하고 이동하는 상점가를 따라 주인공이 집을 상점가에 포함시켜 가게를 열고 이사까지 하지만, 다른 현으로의 이동까지는 동참하지 못해 결국 상점가를 떠납니다.

이 가운데에서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적 설명이 잘 결합된 "윤번지"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구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오류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주인공과 파트너인 충견 레오나르도가 어딘가에 도착한 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내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확보할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모은 뒤, 과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추론으로 정답에 접근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추리물 같은 재미를 줍니다. 단순한 귀납적 추리가 아니라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직사각형 모서리 방의 양쪽 끝에서 도쿄 스카이트리와 후지산이 각각 보이면 ‘원주각 정리’가 성립하고, 거리를 감안하면 현재 위치는 미우라 아니면 이타미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시리즈 8편이 대표적입니다.


"올바른 주먹밥 개봉 방법"은 주먹밥 스티커를 훼손하지 않고 뜯어내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뒤의 해설을 보니 작가가 실제로 주먹밥 스티커를 수집하며 연구한 듯한데,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알기 어려운 디테일이야말로 panpanya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구야바노 홀리데이",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 처럼 말이지요.

다만 "집의 집"이나 "빌딩"처럼 설정이 다소 단순한 작품과, "슈퍼 하우스"에서 보이는 panpanya답지 않은 액션물 분위기의 전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공격을 내선번호로 시도한다는 디테일은 재미있었지만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 역시 몇 편은 다소 식상하게 느껴졌고, 이야기로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성립하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npanya 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작품도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

2026/02/27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 이연승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실하고 성실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없애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범죄자로 두 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유기했다. 뛰어난 머리로 검도 호구 가방을 쓰는 등의 작전으로 알리바이도 만들었지만, 경찰도 무능하지 않은 탓에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한편, 어린 딸 가오루 때문에 연쇄 아동 살해범을 강하게 의식하던 호나미는 근처에 사는 다테시나가 수상하다는걸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게 된 장편 범죄물로 이야기는 크게 범인인 마코토의 시점, 어린 딸 가오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 호나미의 시점,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사카쿠치-다니자키 형사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마코토는 검도부 소속이자 방과 후 검도 선생님으로, 호구와 장비를 넣는 큰 가방을 범행에 이용해서 아이를 가방에 넣어 옮긴 뒤 살해했습니다. 형사들은 가방에 아이들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마코토에게 혐의를 두기 시작하고요.
한편 호나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다테나시를 의심해 신고했지만 다테나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풀려나자, 다테나시의 열쇠를 몰래 복제해 그의 집에 잠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오루의 사진과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발견하자 그를 범인이라 확신한 뒤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뒤이어 결말이자 반전이 등장하는데 마코토는 여자였고, 가오루는 마코토의 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호나미는 마코토의 엄마였고요. 즉, 호나미가 ‘딸’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은 가오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코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나미는 마코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테나시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를 죽인거지요.
마코토가 여자였다는 점, 가오루의 친엄마라는 점, 그리고 마코토의 엄마가 호나미라는 설정은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어 반전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서술 트릭과 반전은 그럴듯한 편인데,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코토가 과거 다테나시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해 가오루를 낳으며 남성 공포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탓이 큽니다. 아이들이 가오루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정도를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범행 수법 또한 지나치게 잔혹해 읽는 내내 불쾌감을 줍니다. 사카구치 형사가 사체의 상태를 보고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부분 역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범행 묘사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을 추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나마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 자체를 굉장히 잘 쓴,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의미라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술 트릭은 독자를 속이겠다는 의도에만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해 별로입니다. 독자가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마코토의 초반부 묘사처럼요.

또한 경찰 수사가 다테나시를 범인으로 단정한 채 종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테나시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호나미가 반복적으로 그를 의심하며 신고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마코토 역시 수상한 정황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에 마코토가 호나미의 진심을 알고 죄책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지는 묘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경찰이 이 두 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수사한다면 진상을 밝혀낼 지도 모르는데요. 성모랍시고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통곡"같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코토는 단죄받는다는 결말이 더 깔끔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보다는 서술 트릭을 활용한 다른 유명 작품들을 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2026/02/22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 시즌 1 (2025) - 후지이 미치히토 외 : 별점 2점

전쟁 후 PTSD에 걸려 낙향한 무사 사가 슈지로는 극심한 생활고로 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지만 약 한 첩 쓰지 못했다. 아내마저 병환이 깊어지자, 사가는 무려 10만엔을 준다는 무사 모집 공고에 응해 교토 텐류지로 향했다. 다량의 총으로 무장한 주최측은, 그 곳에 모인 수백명의 전 무사들에게 상대를 죽이며 도쿄까지 오면 10만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한 시대극 액션 드라마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를 배경으로 무사 계급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살육 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인기있을 만한 설정은 다 가지고 왔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설정 ‘고독(고도쿠)’가 대표적이에요. 수백 명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을 벌이게 하고, 최후의 생존자만을 뽑는다는 건데, 이건 "오징어 게임"과 다를게 없지요. 고도쿠 배후에 재벌 세력과 경시국이 손을 잡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특기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건 "닌자인법첩"같은 일본 시대극 액션물 설정을 그대로 따 왔고요. 그 외에도 어디서 본 듯한 설정이 많아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만화같은 설정을 보신 전쟁이라던가 폐도령 이후 무사 계급의 몰락과 같은 실제 역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와지 대경시, 4대 재벌 등 실존 인물들을 결합시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고도쿠를 통해 무사 계급을 말살하려 한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목적도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정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검술 액션입니다. 실사 시대극으로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촬영과 합이 좋은 덕분입니다. 특히 슈지로가 PTSD를 극복하고 총을 든 경비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각성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어요. 이 순간을 위해 주인공 사가 슈지로에 대한 서사도 초반부터 잘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살인귀 칸지야 부코츠야 일종의 중간 보스쯤 되는 악역이니 그렇다 쳐도, 키구오미 우쿄같은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까지 개별 서사를 풀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비서 신페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짐짝에 가까운 후타바의 동행이나 이로하의 등장과 과거 사부와의 악연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기보다는 분산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가 슈지로가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하고 도쿄에 도착할게 뻔한만큼, 이런 이야기는 시간과 분량 낭비에 불과했어요. 이보다는 닌자 쓰게 쿄진의 목적을 좀 더 집중적으로 풀어냈어야 합니다.

검술 액션도 중반 이후에는 힘을 잃습니다. 파워 밸런스가 이상한 탓입니다. 사가 슈지로는 각성 전에도 칸지야 부코츠를 압도했었는데,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는 슈지로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고전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시원하거나 통쾌한 맛도 없고요.

또한 무사 계급을 이 기회에 몰살시키겠다는 카와지 대경시의 계획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입니다. 모든 무사들이 고도쿠에 참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칸지야 부코츠의 살인 행각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민중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무언가는 부족하지만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합니다. 

2026/02/21

잔혹한 여로 - 야마무라 미사 : 별점 2점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는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일본 여성 추리작가 야마무라 미사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설 연휴 때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의외였던건, 수록작 중 세 편은 트릭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통파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특히 "공포의 연하장"이 아주 괜찮습니다.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겨진 유류품을 통해 피해자는 당첨된 연하장을 상품인 우표와 오전 9시 이후에 교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인 거래 증권회사 직원 가사하라는 오전 8시 40분에 출근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보냈지만, 사전에 당첨 유무를 아는건 불가능해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 수도 없고요.
다카기 경부는 연하장에 소인이 없는 점(연하장은 12월 22일까지 접수분은 1월 1일 도착 보장이라 소인이 찍히지 않음)에 주목해서, 빌견된 당첨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사건 당시에 가지고 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당첨 연하장을 가사하라가 미리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증권회사가 직원에게 연속 번호의 연하장 500장을 주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연하장 추첨에서 최하등 우표는 100장당 반드시 3장 당첨되므로, 가사하라는 보내지 않고 남겨 둔 100장의 연속 번호 연하장만 있어도 반드시 당첨 엽서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즉 가사하라는 당첨 번호 발표 후 보관 중이던 연하장 중 당첨된 것을 고른 뒤, 사건 당일 피해자 집에 들고 가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집에 있던 자기가 보낸 진짜 연하장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상품은 따로 교환해서 시체를 발견하러 갔을 때 몰래 피해자 주머니에 넣었고요.

이렇게 일본의 연하장 풍습과 증권 회사의 전통 등을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트릭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지만, 가사하라가 원래 피해자에게 보냈던 연하장이 드러나면서 범행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피해자와 가사하라의 육체 관계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진짜 연하장이 발견되는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도 충분한 수준입니다.

"검은 테두리의 사진"은 오사카로 출장간 범인이 전날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방송이 오사카에서는 그날 방송된다는걸 알고난 뒤, 전날 찍었던 사진을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사실 트릭이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우연과 운이 지나치게 많이 좌우되는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같은 방송이라도 방송하는 채널이 다른데,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체포한다는 결말도 설득력이 약했고요. 앞서 범인 오사와는 '화면만 사진에 담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채널 다이얼이 어떻게 보였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호텔 종업원이 오사와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다고 증언했다니, 사진 따위는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줄 수도 있으니, 애초에 그리 탄탄한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TV를 찍은 사진을 알리바이에 사용한다는 설정만큼은 독특해서 눈길이 갑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 방식인 덕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을 잘 반영한건 분명합니다.

"죽은 자의 손바닥"에서는 셀로판지를 이용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손바닥 도장을 찍는 트릭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두 편 보다는 별로에요.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의 모든 측면에서 기대 이하거든요. 경찰의 추리는 근거없는 첫인상에 기반하고 있고, 범행 방법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위의 세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내용도 그냥저냥합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잔혹한 여로"는 일종의 범죄 반전물입니다. 진범이 드러난 뒤 진범마저 개미지옥에 빠진다는 마지막 부분은 꽤 그럴 듯 합니다. "50퍼센트의 행복"은 오래 전 친자 감정 방식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볼만했던 치정 드라마이고요.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너무 뻔합니다. 결말도 안이하고요.

"고독한 증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떠오르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가사이 나오미의 증언을 회사측, 유족측이 제각각 제멋대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지요.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나오미의 고뇌를 심도깊게 다루지도 못했고, 밝혀진 진상 - 폭탄 테러 - 도 설득력이 약하며, 가사이 나오미가 결국 자고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결말도 영 아닌 탓에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살의의 축제"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돈으로 진범을 날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가 되는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가족마저도 영원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당시 범인과 유족 측 인물들이 당시 상황을 복잡하게 밝히는 결말은 꽤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걸 읽은 바람에 다소 김이 빠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만, 잘 모르는 작가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공포의 연하장"만큼은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2026/02/20

꽃다발은 독 - 오리가미 교야 / 이현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세는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이었던 마카베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기타미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소장 대리인 기타미는 기세의 중학교 선배였다. 마카베가 의뢰를 망설여서 기세는 직접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를 통해 협박은 마카베가 저질렀다는 4년 전 강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났다. 마카베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마카베는 모든 걸 잃고 학교마저 그만둔 채 지금에 이르렀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분량이 비교적 간결한 편이라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마카베에게 익명의 협박장이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협박은 4년 전 그가 저질렀다는 강간 사건과 관련되었고, 협박범은 당시 피해자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마카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도 그가 누명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기타미의 조사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마카베는 억울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이렇게 '원죄(엔자이)'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사회파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뒤이은 전개는 마카베가 정말 결백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을 싹트게 하여 흥미롭습니다. 마카베의 모친도 그의 무죄를 믿지 않고, 마카베 가족이 왜 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 - DNA 검출 -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기세를 통해 소개된 마카베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서, 독자로서는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뒤집어 버리는 덕분입니다. 우선, 4년 전 사건은 피해자였던 나가노 가나미의 자작극이었습니다. 마카베에게 푹 빠진 나머지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성공해서 마카베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박장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의 아버지 나가노가 마카베를 돕기 위해서 보냈던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자연스럽게 믿어온 전제가 뒤집히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 반전이 결혼식 직전의 마카베에게 진상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로 이어지는 결말도 충분히 흥미롭고요. 

그리고 반전은 협박장이 두 종류 - 강경한 경고와 정중한 문체 - 였다는 단서로 뒷받침되는데 이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기타미와 기세는 강경한 경고는 마카베에게 보냈고, 가나미가 받아볼 수 있는 협박장은 정중한 문체로 보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나가노는 처음에 가나미에게 강경한 경고가 전달되도록 협박장을 보냈습니다. 부부의 이름으로 동거 중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내가 우편함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는 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경고가 효과를 보지 못해서, 마카베에게 정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은 물론 독자까지 공정하게 제공한 단서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했다는게 아주 좋았어요.
가나미가 마카베를 옭아매기 위해 벌였던 몇 가지 장치 - 당시 마카베가 연인과 시간을 보냈던 러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DNA를 손에 넣었다는 등 - 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요.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기타미가 벌이는 조사의 상세함도 최고 수준입니다. 주로 탐문과 관계자 면담이 중심이지만, 기타미는 피해자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카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보를 캐 내기까지 하는데 이는 법대생 기세의 입을 빌어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이라고 설명되거든요. 그야말로 일반 '탐정'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를 그려낸 느낌이에요.
개인이 받은 '협박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재를 다룬 점도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 역시 일개 탐정이 해결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죄일테니까요.

그러나 마카베가 받는 협박의 원인이 4년 전 사건일 수밖에 없는 탓에 협박범이 그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가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길어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합니다.  
아울러 중학생 시절부터 탐정으로 활약해 왔다는 기타미의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저해합니다. 굳이 필요했던 설정은 아니었어요. 기세와 기타미의 1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불필요해 보였고요. 

그래도 반전을 중심에 둔 일상계 범죄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26/02/14

진짜 도쿄 맛집을 알려줄게요 - 네모 : 별점 2.5점

일본 현지에 거주하는 저자 네모가 도쿄의 로컬 맛집을 직접 소개하는 가이드북입니다. 조만간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유명 체인이나 후기 위주의 맛집이 아니라, 실제 현지인이 일상 속에서 방문하는 식당과 요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더군요. 

책은 음식 종류를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돈부리, 라멘, 소바와 우동 등 면 요리, 고기와 생선 요리는 물론, 일본식 가정 요리와 양식, 카레, 베이커리, 디저트, 편의점 음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음식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일본 현지인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메뉴들 소개도 인상적입니다. 닭고기 사시미 스테이크나 멸치 육수 츠케멘, 낫토 소바, 토로로, 각종 후라이 요리처럼요.
또 소개된 식당들 대부분이 관광객들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대라는 점도 좋았어요. 각 식당의 대표 메뉴, 가격, 위치, 영업 시간, 휴일 등 기본 정보 역시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요리를 맛있게 먹는 팁은 정말 꼭 참고할만 합니다. 

츠케멘은 히가시이케부쿠로 다이쇼켄에서 개발한 메뉴로 원래는 가게 영업이 끝난 후 직원 식사용으로 남은 면에 라멘 국물을 찍어 먹던게 시작이다, 2000년대 중반에 대유행을 한게 진한 국물에 우동만큼 굵은 면을 찍어 먹는 스타일 츠케멘이다, 가마타마 우동은 가마아게 우동의 일종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동에 날달걀을 얹은 메뉴이다, 이나니와 우동은 1600년대 아키타현 영주 가문에서 먹었던 음식이며 냉우동으로 츠유에 찍어먹는 스타일이다와 같이 각 요리들에 대해서 짤막하게라도 소개를 덧붙여 주어서 일본 음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정보와 함께 요리를 워낙에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어서 꼭 방문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래 가게들은 구글 맵에 저장해 두었지요. 한두 군데라도 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웨이팅이 꽤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네요.

  • 텐동 덴후쿠
  • 카츠동 엔라쿠
  • 토지나이 카츠동 즈이초
  • 소유라멘 키라쿠
  • 멸치 육수 츠케멘 미야모토
  • 이타소바 카오리야
  • 낫토 소바 바쿠잔보
  • 붓카케우동 오니얀마
  • 가마타마 우동 마루카
  • 야키니쿠 잠보
  • 야키니쿠와 곱창 호르몬 마사루
  • 우설 규탄 아라
  • 모츠니코미 아부쿠마테이
  • 아지후라이 아오키 쇼쿠도
  • 카키후라이 타라라
  • 크로캉 쇼콜라 365日
  • 철판 프렌치 토스트 빵토 에스프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우선 양식이나 카레는, 굳이 일본에서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물론 일본에서의 맛은 다를 수 있고, 이런 요리들 애호가도 있겠지만 보통의 여행자 입장에서는 굳이 시간과 동선을 들여 방문할 정도의 메뉴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도판의 품질도 그리 뛰어나지 않으며, 특히 지도가 아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도 큰 단점입니다. 특정 지역별로 맛집을 묶어 ‘아침–점심–저녁’ 코스를 추천해주는 구성이 있었다면 활용도가 훨씬 높았을 텐데 말이지요. 가격 때문이겠지만 지나치게 런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점도 아쉽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참고해 볼 만한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합니다.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2/08

십각관의 살인 1~2 - 키요하라 히로 (아야츠지 유키토 원작) : 별점 2.5점

이번 주는 "십각관의 살인"으로 꽉 찬 한 주네요. 결국 만화 버전까지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마침 리디 북스에서 제공하고 있더라고요.
원작과 거의 똑같은 전개인데, 만화만의 각색 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 가와미나미(카와미나미)가 여자로 바뀐 점
  • 치오리가 술을 먹다가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과 크루즈 여행 중 사고사 했다는 점
  • 마지막 장면에서 엘러리가 밴(반)에게 속는게 아니라 진범을 밝히고 죽는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치오리를 사고사로 만든건 괜찮은 각색이었어요. 치오리만 구명 조끼가 없는걸 알게된 반이 치오리는 사고로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에게 구명 조끼를 빼앗겨 죽었다!고 여기고 복수를 펼친다는건 원작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있는 동기였으니까요. "소년 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 사건"과 똑같은 동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른 건 없습니다. 핵심 트릭인 반의 정체는 모리스였다!는 똑같은 탓입니다. 사실 궁금했던건 모리스가 반이라는걸 어떻게 숨기면서 전개할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냥 헤어스타일만 다르게 - 모리스는 단정하게 묶고, 반은 대충 풀어헤치는 스타일 - 묘사할 뿐입니다. 보다 정교한 만화적인 장치가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작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순정 만화체라는건 작풍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작품의 주인공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십각관에 대한 묘사가 그닥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그래도 긴 장편을 무리없이 만화화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캐릭터들도 대체로 원작과 부합하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하게 읽을 만 합니다.

2026/02/07

Chat GPT가 그린 시마다 기요시 (십각관의 살인)

"탐정 사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고 혹평을 남겼었지만, 탐정들에 대한 일러스트만큼은 좋았습니다. 붓 하나로 그려낸, 음영을 극대화한 스타일인데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아래와 같이 말이지요.

하지만 소개된 모든 탐정들의 일러스트가 제공되지 않아서 다소 아쉬웠었는데, 이번에 "십각관의 살인"을 다시 읽어본걸 계기로, 탐정 사전에는 실려있지만 일러스트는 포함되지 않았던 탐정 시마다 기요시의 일러스트를 탐정 사전 스타일로 그려 보았습니다. Chat GPT에게 스타일을 학습시켜서요.

어떤가요? 다소 허당에 가벼운 듯한 느낌을 전해 주었던 작품 속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정도면 대체로의 인상과 원했던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작 중 첫 인상 묘사가 "음울하고 성격이 까다로워 보인다"이기도 하니까요. 아래는 만화 버젼의 시마디 기요시인데, 만화 버젼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물로 보이네요.

다른 탐정들도 시간나면 한 번 시도해 봐야 겠습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