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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라멘이 과학이라면 - 가와구치 도모카즈 / 하진수 : 별점 3점

라멘이 과학이라면 - 6점
가와구치 도모카즈 지음, 하진수 옮김/부키

라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밝혀나가는 책입니다. 음식 관련 과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죠. 이 책이 풀어낸 라멘에 관련된 내용은 크게 아래의 아홉 가지 항목입니다.

  • 1장_무엇이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가?
  • 2장_해장 라멘이 더 맛있는 이유
  • 3장_쫄깃쫄깃 면발의 과학
  • 4장_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라멘의 맛
  • 5장_화학조미료는 라멘의 친구인가, 적인가
  • 6장_기름과 건조 기술의 결정체, 인스턴트 라멘
  • 7장_라멘 명가의 맛을 과학으로 재현하다
  • 8장_라멘은 먹는 소리도 맛있다
  • 9장_사람들이 그 가게 앞에만 줄을 서는 이유

항목별로 간단히 살펴보자면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감칠맛'을 꼽고 있으며, 이 감칠맛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 줍니다. 일본의 맛국물은 보통 다시마와 가쓰오부시를 함께 사용하는데, 그래야 더욱 맛있어진다는군요. 이는 글루탐산의 단독 사용보다 이노신산과 조합할 경우 감칠맛이 7~8배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가쓰오부시나 다시마의 향 성분은 물에 녹아나서 라멘의 경우, 국물맛이 농후해진다고 하네요.

두 번째 장에서는 음주 후 숙취 해소를 위해 라멘이 땡기는 이유를 탐구합니다. 이 역시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술을 마시면 당을 만드는 원료가 부족해져서 혈당이 떨어지는 탓에 당이 필요해져서 단 것이나 탄수화물을 먹고 싶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알코올이 뇌 신경에 작용하여 공복감을 증가시키기 때문이고요. 과음 후 단 것을 먹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행복한 기분이 되는데, 술 먹고 라면을 먹으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군요.
당연히 술을 먹고 라멘을 먹으면 몸에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전문가가 추천하는 술 마시고 좋은 음식은 스포츠 음료에요. 이유는 당과 소금, 염분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즙 100% 오렌지 쥬스도 좋다는군요. 수분 섭취에 칼륨도 많아서 과하게 섭취한 나트륨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며, 지방과 당 분해를 촉진하는 비타민 B1, B2도 풍부하니까요. 앞으로 저도 음주 후에는 과즙 쥬스를 먹어봐야겠습니다.

세 번째 장은 제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라멘은 자가 제면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소바의 경우 풍미가 바로 날아가므로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만들며, 공장에서 만들 경우 배송 중 향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가게에서 직접 면을 만들어야 하지만 라면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게 이유입니다. 면의 꼬불꼬불한 정도가 국물 맛이 배는걸 좌우한다는 것도 결국은 호불호에 불과해 보이고요. 게다가 물과 밀가루가 완전하게 섞이는 수화 작용에 시간이 걸려서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가 제면의 약점이에요. 공장에서 제대로 만든 면을 사용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 '간수'라는 말로 소개되었던 '간스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에 따르면 간스이는 라멘의 맛에 큰 영향을 주지만 단지 취향일 뿐이니, 가게와 손님들이 알아서 고르면 된다고 하네요.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건 면발 특성에 따른 팁입니다. 라멘을 밥과 함께 먹으려면 면은 부드럽게 삶아달라고 해야 한다네요. 그래야 간스이가 국물에 섞여 들지 않고 면도 퍼지지 않거든요. 면의 삶은 정도가 꼬들꼬들하면 면이 국물을 빨아들이고 국물에는 간스이 맛이 섞이게 됩니다.

네 번째 장은 라멘의 맛에 온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5미(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중 짠맛과 신맛은 온도에 따른 변화가 없지만 단맛, 쓴맛, 감칠맛은 온도에 따라 변화하므로 5미가 조합된 요리는 온도에 따라 맛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짠맛과 감칠맛의 밸런스가 온도에 따라 달라져서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적절한 온도로 먹어야 한답니다.

다섯 번째 장은 화학 조미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론은 화학 조미료를 적당히 써야 맛있는 라멘이 된다는 겁니다. 화학조미료 사용 여부보다 식재료를 듬뿍 사용한 국물인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팁도 좋았고요. 이유는 효모 추출물이나 단백가수분해물과 같은 첨가물은 '식품'으로 인정되어 화학조미료로 치지 않는데, 이런걸 많이 사용하는 가게들이 많기 때문이라네요.
또 라멘은 부족한 영양소가 있으니 제대로 만든 라멘에 무언가를 조금 더하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쇼유 라멘을 먹은 후에 채소주스를, 그리고 돈코츠 라멘의 영양가는 볶은 깨 간 것을 더하는 것만으로 훨씬 높아지고 쇼유 라멘에는 구운 김을 올리면 좋다, 미네랄을 보충하고 싶다면 미네랄이 풍부한 미소 된장으로 만든 미소 라멘이나 탄탄멘을 주문하라는 식입니다.

여섯 번째 장은 인스턴트 라멘이 정말 몸에 좋지 않은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지금의 인스턴트 라멘은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염분이 많다고는 하나 국물을 남기면 되고, 기름 열화로 식중독을 일으켰던건 다 옛날 이야기이며 용기의 환경 호르몬 역시 위험성은 오해에 불과했다는 내용이거든요. 이 정도면 앞으로 컵라면을 먹을 때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너무 자주 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초인 로크"로 유명한 만화가 히지리 유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구루구루박X"의 외계인들이 컵라면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로 "사람이 먹는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일곱 번째 장은 유명 가게, 노포의 라멘을 인스턴트로 만들어 제공하는 회사들의 비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탐방 취재 스타일의 리포트입니다. 사실 이런저런 엑기스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최대한 비슷한 맛을 찾아내는게 전부라 딱히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라면의 염분 측정 결과가 더 재미있었어요. 돈코츠 라멘의 염분은 1.48퍼센트, 미소 라멘의 염분은 1.35퍼센트인데 소유 라멘의 염분은 1.58퍼센트로 소유 라멘이 가장 높았거든요. 세가지 라멘 중 가장 감칠맛이 적은게 소유 라멘이라는 점에서 맛을 증폭시키는 감칠맛의 효과로 염도를 낮출 수 있다는건 사실이라는 뜻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도쿄의 새까만 소바 국물과 간사이의 투명한 소바 국물을 비교할 때, 간사이 소바 국물의 염분이 더 높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먹을 때 주로 표현되는 의성어 "즈루즈루"에 대해 탐구합니다. 뭘 이런것까지 조사하나 싶었는데, AI까지 동원해서 의성어의 느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데에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후루룩"과의 비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에요. 이 AI를 가지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비슷한 툴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 장은 사람들이 라멘 가게에 줄을 서는 이유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약과 동일하게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뇌에서 베타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모르핀이나 헤로인의 수용체이자 신경 전달 물질인 오피오이드에 작용하게 되거든요. 그러나 실제 마약과는 다르게 보상 회로 자극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리고 실험 결과, 먹기 전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하네요. 즉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동안' 음식을 곧 먹을거라는 생각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포방터 돈가스집에 줄을 서서 먹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이슈들이 있는데, 실제 줄을 서는 과정에서 이런 뇌내 보상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장기간 줄을 서는 것도 한 번쯤은 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라멘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재미나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라멘 그 자체보다는 주변 정보, 지식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난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재미와 교양 양쪽 측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이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본 라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01/30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3)

애정하는 작품인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작가 라즈웰 호소키가 온갖 초밥을 연구하며, 심지어 직접 초밥을 쥐기까지 하는 과정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음식, 특히 초밥 및 각종 관련 정보를 재미와 함께 잘 제공해 주는게 좋습니다. 나무젓가락이 무려 네 등급이 존재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또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직접 실험하고 경험한 내용이 많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편의점 초밥을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을 여러가지 실험해보거나, 초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차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차와 함께 먹거나, 초밥의 간을 여러가지로 만들어 먹어 본다던가, 맥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스시를 만들어 본다던가(심지어 그 중 하나는 소시지 스시!) 하는 식으로요. 이 과정에서 터득한 레시피 제공도 아주 좋습니다. 스키야바시 지로의 메인 셰프인 지로 씨의 스시를 먹은 경험담 등도 값지고요.

그러나 단점도 큽니다. 가장 큰 단점은 1권과 2권은 1/3 가량이, 3권은 2/3 이상이 전혀 다른 만화로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1권은 작가가 여행하면서 이런 저런 음식을 먹었던 일상계 여행 에세이 만화가, 2권은 약간 소심한 식도락가 샐러리맨 에비코지 아지마로가 등장하는 "내 멋대로 1성 식당"과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스핀오프 같은 "소라의 술", 3권은 목욕이 취미인 공무원 센타로의 목욕 생활을 다룬 "속세 목욕"이 각각 수록되어 있거든요. 이 만화들이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량을 차지해가면서 수록한건 반칙같이 느껴져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라스시"만으로는 두 권 분량으로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이 단점에 비하면 모든 음식들에 대해서 작가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되었으며, 한글화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는 사소할 뿐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화질] 미식탐정 란포 2권 (완결) - 6점
Kusumoto Tetsu/미디어팜

'식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가진 탐정 우타가와 란포가 의뢰받은 조사 대상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의뢰를 해결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브리아 샤바랭탐정화한 아이디어지요.

억지도 있지만, 정말로 먹는 걸로 의뢰를 해결하거나, 상황을 예측하는게 나름 설득력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같이 소금구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진심이 알고싶다는 의뢰를 받고, 미행을 통해 사실은 그녀가 양념 구이도 좋아하는 사실을 밝혀내어 그녀의 마음을 알게된다는 식으로요. 또 주인공 란포의 식도락 철학과 각종 요리 관련 설명 및 묘사도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패턴이 단순하며, 조사 대상이 란포가 있는 음식점에 찾아올 정도로 너무 일(미행, 탐문 조사 등)이 쉽게 풀리는 전개 탓에 드라마가 별 볼일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아울러 요새 트렌드와 맞지 않는 작화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혼술 땡기는 날 - 4점
다케노우치 히토미 지음, 김진희 옮김/애니북스

집순이 히토미가 이런저런 술을 즐기는 이야기. 기본적으로 집에서 먹더라도 룸메이트가 있을 뿐더러, 여럿이서 같이 마시는 경우도 많아서 '혼술' 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애매합니다. '집술'이라고 하는게 훨씬 맞는 표현일텐데 말이죠. 혼술 유행에 편승하려 한 느낌이에요.

그래도 내용은 나쁘지 않습니다. 맛있는 술과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먹는게 전부인데 종류도 여러가지이고, 다 맛있어 보여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레시피들도 대충대충이지만 실려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그러나 너무 대충 그린 작화는 문제입니다. 술과 요리까지도 성의없어 보이는 스타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건 음식, 요리만화로서는 굉장히 치명적인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화만 받쳐주었더라도 평균 이상은 되었을텐데 아쉽습니다.

2020/01/27

지구빙해사기 상 / 하 - 다니구치 지로 : 별점 1.5점

지구빙해사기 - 상 - 4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지구빙해사기 - 하 - 4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빙하기가 찾아온 지구, 인류는 컴퓨터 라 벨 메르의 도움으로 어비스 메가로폴리스를 구축한 뒤 극지 자원을 채취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는 대격변을 맞이했다. 자원 개발 공사 석탄 채굴 기지 털파에서 일하는 타케루와 동료들은 상황을 파악한 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기지를 빠져나와 어비스로 향했다. 이 여정의 와중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며 타케루는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힘'을 자각하게 되는데.... 

1987~1990년 까지 연재된 다니구치 지로SF 만화로 상, 하권 구성입니다.
일단, 상권 초반에서 묘사되는 자원 개발 공사 석탄 채굴 기지 털파를 무대로 한 일상 속 모험담은 꽤 재미있습니다. 가혹한 환경 하의 고립된 기지에 갇혀 근무하는 사람들의 디테일이 볼 만하기 때문입니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 접대부가 바뀌지 않는 술집, 극한의 폐쇄 공간인 탓에 사소한 일로 벌어지는 싸움들, 지하와 지상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다양한 사고와 수리 작업 등이 다니구치 지로의 정교한 그림으로 손에 잡힐 듯한 느낌으로 그려진 덕분이지요. 당연히 엄청난 현실감을 보장하고요.

그러나 이러한 기지의 일상 이야기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도저히 모르겠거든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호해요. 처음에는 급작스러운 태풍으로 고립된 털파 기지에서의 탈출을 보여주나 했더니, 그 다음에는 빙하기가 끝났다며 살아 움직이는 숲이 나오는 등 나우시카스러운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마지막에는 어비스에 도착한 타케루가 컴퓨터 라 벨 메르가 만든 신인류와 맞서 싸운다는 급작스러운 결말로 끝이 납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요. 

더 큰 문제는 뿌려놓은 떡밥조차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타케루가 어떻게 거인신과 교신하는지, 거인신의 정체와 의도는 무엇인지, 살아 움직이는 숲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 모든 상황이 묘사만 있고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더 가관이에요. 타케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털파 기지의 생존자들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 하나 없이 마무리되거든요. 이 정도면 소드전사 야마토급 엔딩이라고 봐도 무방할겁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합니다.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으니까요. 

또 디테일한 작화에 비해 캐릭터들은 영 별로입니다. 주인공 타케루가 가장 심각한데, 사장의 사생아로 사고만 치는 문제아였다가 급작스럽게 모두의 리더로 거듭나는 과정의 설득력이 너무 약합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모두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일 뿐이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당대를 풍미했던 오토모 가즈히로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 설정, 작화와 분위기를 적당히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 혼종이나 결과물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절대로 권해드릴 수 없는 졸작입니다. 편집자 잘못인지, 아니면 다니구치 지로는 제대로 된 원작이 없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건지 판단은 잘 되지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아닐까 싶네요.

2020/01/26

레이디 조커 2, 3 - 다카무라 가오루 / 이규원 : 별점 2.5점

레이디 조커 2 - 6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레이디 조커 3 - 6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던1권에 이어, 거의 2년여 만에 읽게 된 후속권입니다.

1권이 주요 등장인물 소개 및 히노데 맥주 사장인 시로야마 납치 사건이라는 본 사건의 전초전이 벌어지는 도입부라면, 2권은 히노데 맥주를 협박하는 범죄집단 '레이디 조커'의 범죄 행각과 요구했던 거액의 돈을 손에 넣는 과정, 그리고 경찰에서 시로야마 사장의 안전과 사건 수사를 위해 파견한 고다 형사가 이런 저런 단서들을 통해 범인의 정체를 차츰 눈치채 가는 과정이 주로 그려집니다. 중간에 대화가 단절된 것에 대한 분풀이로 레이디 조커가 경고했던 맥주 내 이물질 투입이 벌어지고, 이후 히노데 맥주의 임원이자 시로야마 사장의 처남이기도 한 스기하라의 자살이 대미를 장식하고요. 여기에 기자 네고로가 사건 이면에 주식 매매를 둘러싼 네트워크 존재를 알아내고 관계자들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3권에서는 레이디 조커 사건의 비중은 미미합니다. 레이디 조커 멤버들과는 거의 무관한 2차 범행 및 경찰의 끊임없는 수사 과정과 네고로 기자의 실종으로 촉발된 오카다 경우회 검거 및 관련자들의 재판을 주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범행에 성공한 레이디 조커 멤버들은 등장은 거의 후일담 수준이며, 히노데의 시로야마 사장과 오카다 경우회 관계자들 비중이 훨씬 큽니다.

즉 레이디 조커 사건은 2권까지가 핵심인데, 2권에서 레이디 조커 일당의 범죄 계획, 그리고 그에 따른 범행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다카무라 가오루 작품답게 심리 묘사도 발군이고요. 특별한 근거 없이 심리 묘사 만으로도 범행의 동기가 설명될 정도니 말 다했죠. 다카무라 가오루는 제 머그컵이 저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머그컵 시점에서 설득력있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니까요.
경찰 수사와 네고로와 구보 등 기자들의 취재 활동, 시로야마 등 히노데 맥주 관계자들의 업무 및 회의, 레이디 조커 일당의 경마장 묘사 등 등장하는 모든 장소, 상황 및 행동에 대한 디테일도 아주 빼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게 끌고 가면서 도대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묘사 과잉의 애매모호한 전개와 결말을 갖춘 그런 작품이에요. 무려 3권, 페이지로는 1,000여 페이지에 가까운 대장편의 결말이 30여 페이지도 안될 정도입니다.

우선 레이디 조커 사건부터 제대로 끝맺지 못합니다. 고다의 말대로 한다가 본인 스스로 범인이라고 주장했음에도 왜 체포하여 심문하지 않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정신 이상으로 퉁쳐서 넘어가기에는 어려워보이는 대형 사건이잖아요? 물론 경찰이 내부에 범인이 있다는 희대의 스캔들을 감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한다를 추궁하던 고다라도 그 사실을 독자에게 독백 식으로나마 설명해주는게 필요했습니다.

그 외에도 설명되지 않는건 많습니다. 레이디 조커 일당인 누노카와가 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레이디를 둔 채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역시나 일당인 고가 벌인 마이니치 맥주를 노린 2차 테러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인지 등이 그러합니다.
3권의 핵심 이슈인 시로야마 사장의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오카다 경우회와의 악연 역시 마찬가지에요. 정작 오카다 경우회를 중심으로 한 악의 세력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되었는지 등도 모두 심리 묘사나 정황 묘사가 전부입니다. 시로야마 사장이 저격당해 사망하는 등 제대로 마무리 되지 못할거라는 인상만 강하게 심어줄 뿐이죠. 무언가 진행된 것 처럼 보이는 검찰 수사 결과도 등장하지 않으며, 네고로 기자의 실종 역시 진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물론 모든 사건들이 깔끔하게 해결되는게 오히려 현실적이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범죄를 테마로 한 순문학을 추구하는 다카무라 가오루다운 작품이기도 하고요. 읽다보면 누노카와는 삶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고는 단지 주가 조작이 목표였으며, 오카다 경우회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큰 흑막이 있다는 정도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든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버린다는건, 관심있게 수백여 페이지를 읽어온 독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 않나 싶네요.

심리 묘사도 좋다고는 하지만, 고다 형사를 비롯하여 네고로 기자, 시로아먀 사장 등 주요 등장 인물 중심으로 시점이 자주 바뀌며, 묘사도 지루하고 장황한 편이라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등장 인물들 모두가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에요. 특히 주인공 격인 고다 형사와 범인들의 리더격인 한다가 심합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 외에도 개인적인 생각과 호기심도 많고, 심리도 복잡한 인물인 탓입니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에요. 그리고 욕정을 품었다 운운하는 묘사는 등장하지 않느니만 못했고요.
또 고다는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데 다른 작품들보다는 더 멋을 들인 티가 납니다. 바이올린 연주를 즐기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티보가의 사람들" 등을 읽는다는 등의 설정을 마구 덧붙인 덕분이죠. 그러나 멋있기는 한데,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는 않더라고요. 모든 형사가 술, 담배를 즐기고 폭력적이라는게 오히려 편견이겠지만 그래도 더무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캐릭터를 설정해 버리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카무라 가오루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여기서 심리 묘사를 덜어내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끝맺었다면 보다 대중적이며, 보다 제 취향의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2020/01/25

시월의 저택 - 레이 브래드버리 / 조호근 : 별점 2.5점

시월의 저택 - 6점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특별한 존재들이 머무르는 고향, 시월의 저택을 중심으로 그곳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연작 단편집입니다.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고, 고양이 아누바를 비롯한 주민들이 모이고, 버려진 인간 아이 티모시가 가족이 되고, 전 세계 친척들이 저택에 모이는 귀향 파티가 열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성난 군중들에 의해 저택이 불타버리고, 네프 할아버지는 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총 23장에 이르는 이야기들로 이어집니다.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이름에서 떠올릴 법 한, 반전 매력 넘치는 호러 혹은 비슷한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약간 호러풍일 뿐 기본적으로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고,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랑'과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이 나쁜건 아닙니다. 그러나 초창기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아담스 패밀리"와 같은 유사 컨텐츠가 넘쳐나는 지금 상황에서는 새롭다는 느낌을 전해주기는 힘들지요.

또 이렇게 긴 흐름의 이야기는 연작으로 묶어 개작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것으로, 원래 존재했던 단편은 발표 시간 순서대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 "여행하는 이"
  • "귀향 파티"
  • "에이나르 아저씨"
  • "바람 속의 마녀"
  • "시월의 서쪽"
  • "오리엔트 북행 특급"

문제는 그래서인지, 좀 억지스럽게 엮인 작품들도 눈에 뜨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여행하는 이"입니다. 후일 추가된 단편인 "삶을 서두르라"도 딱히 연작 이야기에 포함될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요. 이렇게 후대에 하나의 시리즈로 모아 엮은게 과연 좋은 방법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름다운 문장들, 묘사들이 넘쳐나며 매력적인 설정도 많지만 여러모로 생각과는 다르기에 감점합니다. 작가의 팬이시라거나,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지만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주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바람 속의 마녀"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조종할 수 있는, 저택 다락방에 사는 세시가 사랑을 하고 싶다며 앤이라는 소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 뒤 실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약하자면 한 여름 밤 변덕스러운 첫 사랑을 호러 터치로 그려낸 감성 호러 틴에이저 로맨스 소설이에요. 마지막 장면, 찌르레기의 마음 속에 들어간 세시가 자신의 주소를 적은 종이를 꼭 쥔 톰을 보고 사라져 버리는 결말도 애틋하고요. 레이 브래드버리가 이런 작품도 쓸 수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귀향 파티"

핼러윈 이브에 시월에 저택에 온갖 이능력자 친척들이 귀향하는 파티가 열렸다. 시월의 저택에 버려졌던 인간 아이 티모시는 흥미 반, 두려움 반으로 이 파티에 참석하여 파티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는데...

얼마전 개봉했었던 "아담스 패밀리" 애니메이션 영화와 아주 흡사한 분위기와 내용입니다. 모두 친척인 이능력자들이 특정 저택에 모여 파티를 연다는 기본 설정이 똑같으니까요. 이를 바라보는 화자이자 기록자 역할을 수행하는 '인간' 가족이 있다는 점만 다르고요.

그런데 이능력자들의 기묘함과 능력에 대한 화려한 묘사 외에는 특별히 대단한 내용은 없습니다. 티모시 시각에서 이야기가 많이 전개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티모시는 유한한 삶과 무한한 삶을 비교하며 자신이 다르다는걸 자각한다는 정도에 그칠 뿐입니다. 지금 보다는 성장기 느낌을 좀 더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월의 서쪽"

귀향 파티 후 저택에 머무르던 피터, 윌리엄, 필립, 잭은 세시의 도움으로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 상태로 놀다가 육신이 머물던 외양간이 불타버려 머물 곳을 잃고 만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네 명은 4천살 먹은 나일강 고조할아버지 머리 속에 머물게 된다.

세시의 능력이 잘 드러난 단편으로 성인용 코믹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4명의 사촌들이 모두 여자를 밝히고, 할아버지의 과거 속에 수많은 여성이 있었다는 설정 등에서 말이죠. 세시가 사실은 할머니였으며, 할아버지가 세시를 노리고 다락방을 가끔 찾아간다는 결말도 그러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리엔트 북행 특급"

유령을 믿는 노처녀 간호사 미네르바 할러데이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우연히 유령 '창백한 승객'을 만난 뒤, 일 평생 박제처럼 지냈던 자신의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영국에 있는 시월의 저택으로 향하는 것을 발벗고 돕는데...

유령인 '창백한 승객'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는건, 사람들이 유령을 믿지 않게 되어서라는 설정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미네르바 할러데이가 유령을 살려내기(?) 위해 온갖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들 - "햄릿", "크리스마스 캐럴", "폭풍의 언덕", "나사의 회전", "레베카", "원숭이 손" - 을 읽어주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이며, 유령과 인간, 즉 이종족간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물이라는 점도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미네르바마저 유령이 된다는 결말은 조금 뻔해서 아쉽더군요. 1988년 발표된 비교적 후기작인데, 전성기만큼의 반전 매력은 전해주지 못했어요.

"에이나르 아저씨"

시월의 저택의 친척인 날개달린 이종족 에이나르 아저씨는 사고로 밤에 비행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대낮에 고향 유럽으로 날아가다가는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몰라 귀향을 포기한 그는, 사고 후 그를 도와주었던 젊은 브루닐라 웩슬리와 결혼하여 마을에 정착하는데... 

시월의 저택 다른 주민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에이나르 아저씨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스핀오프 단편. 사고 후 결혼하여 정착하는 과정과 대낮에도 비행할 수 있도록 '연'으로 변장한다는 결말까지 유쾌했던 소품입니다.

"삶을 서두르라"

마드모아젤 안젤리나 마르게리타는 뒤집힌 삶을 사는 존재. 그녀는 무덤에서 환생하여 점점 어려지다가 누군가의 뱃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시월의 저택 버젼입니다. 벤지만 버튼과 데이지처럼 안젤라니와 티모시의 관계가 동일하고, 전해주는 주제도 유사합니다. 무덤에서 삶을 끝내지 않고 어린 신부의 석류같은 미궁 속에서 잠들다니 운이 좋다고 말하는 안젤리나의 초긍정 대사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이죠. 티모시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시월의 저택 연작에 포함될 이야기로 생각되지도 않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행하는 이"

시월의 저택 주민들을 해하려 했던 '부정한 존'은 마을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고통받다가, 경찰서를 찾아가 저택 주민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는데... 

잔혹한 '부정한 존'을 해치우는 이야기입니다. 부정한 존을 고통스럽게 만든 종소리는 알고보니 세시가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능력을 활용한 비교적 정통적인 호러물입니다. 덕분에 다른 단편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개작하여 연작 단편집으로 묶이기 이전에는 시리즈에 속한 작품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자만 등장한다면 써 먹을 수 있는 반전이니까요.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표된 (1945년) 작품이라는 점, 발표 당시 유행했던 단편 호러물들과도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2020/01/24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 카노우 리에 / 허윤 : 별점 2점

슬로모션을 다시 한번 1 - 4점
카노우 리에 지음, 허윤 옮김/대원씨아이(만화)

80년대를 좋아하는 고교 1년생 오오타키와 야쿠시마루가 서로의 공통점을 알고난 뒤, 알콩달콩한 첫사랑을 키워나간다는 청춘 멜로물입니다.

달달하면서도 순수한, 그야말로 플라토닉한 고등학생들의 첫사랑을 80년대 풍으로 그려낸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부터 그러해요. 전 7권 분량 동안 둘이 교제를 결심하는 것도 막바지인 6권부터이며, 교제를 시작해도 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순진한 아이들이거든요. 지나치게 소심하고 착한 야쿠시마루야 그렇다쳐도, 남자 주인공인 오오타키마저도 큰 가슴에 혹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성욕이나 망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80년대스러워요. 작화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야쿠시마루는 80년대 대표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판박이입니다. 흔치않은 이름부터가 80년대 최고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던 야쿠시마루 히로코에서 따왔으니 말 다했지요. 중간 중간 등장하는 컷 일러스트들도 추억을 돋게 만들고요.

또 이야기의 주요 흐름이 80년대의 아이돌과 그들의 노래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제목의 "슬로 모션"은 물론, 소제목 모두가 당대 인기곡들 제목이며, 그 외 수많은 80년대 아이돌과 노래가 직, 간접적으로 전개에 영향을 주거든요.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소녀 야쿠시마루를 만난 오오타키의 모습 뒤에 두근거리는 감정 표현과 함께 "슬로 모션"의 클라이막스인 '만남은 슬로우 모션' 이 흐르는게 좋은 예입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전 가사가 '갑자기 등줄기를 따라, 사랑의 예감이 달콤하게 달렸어'라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외에도 어떤 순간, 8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던가, 다케우치 마리야의 시티팝은 어른 노래라고 하는 등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장치가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게 끌고나가지 못한 이유도 명백합니다. 뻔한 이야기를 무리하게 길게 끌고 나가서 생긴 온갖 문제가 전부 들어 있는 탓입니다. 우선, 둘의 교제가 시작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너무 깁니다. 아무리 80년대 복고풍 청춘 멜로물이라 하더라도, 21세기에 발표된 작품이 별다른 애정표현도 없이 6권에서야 사랑 고백을 하다니 이건 좀 지나치죠. 나카이도나 고이즈미와 같은 쓸데없는 라이벌의 등장과 이를 통해 삼각 관계나 사각 관계를 끌고가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고요. 별다른 고민없이 그냥 인기있던 작품들의 설정들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하긴, 좀 더 매끄럽게 삼각 관계, 사각 관계를 그려냈더라면 지금보다야 연재가 길게 이어지긴 했을겁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작가의 실력이 부족했던거지요.
여러가지 전개 상의 시행착오 끝에 둘이 사귀기 시작한 뒤도 급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아쉽습니다. 정작 사랑 이야기보다는 야쿠시마루의 성장기 중심으로 이야기도 완벽하게 궤도가 바뀌거든요. 그나마도 좀 극적이었다면 모를까, 클라이막스인 패션쇼가 전혀 와 닿지 않아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야쿠시마루 아버지 실종의 진상도 뭐 그런가보다, 싶은 정도로 넘어가버리고요. 이럴거라면 중간부분을 모두 들어내고 분량을 대폭 줄여서 둘이 교제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나도록 3˜4권 정도로 발표하는게 훨씬 완성도가 높았을 듯 싶네요. 그랬다면 걸작이 되고, 영상화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80년대를 사랑하는 아이들' 이라는 컨셉을 너무 과하게 우려먹는 것도 문제에요. 초반부는 옛날 노래가 등장하는 상황이라던가, 다른 등장 소품들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좋았는데 가면 갈 수록 소재 고갈 탓인지 억지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오타키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밤에 부르는 노래가 "쥴리아의 상심"이라는건 누가 봐도 좀 오버스럽지요.

마지막으로 단점은 아니지만, 80년대 아이돌과 노래들 중 밴드는 고작해야 첵커스, RC석세션 정도만 등장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습니다. 저에게 80년대는 안전지대, 튜브, 사잔, 오메가 트라이브의 시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않고,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전개와 마무리는 영 좋지 못했습니다. 작가와 편집자 모두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요. 권해드리기는 조금 애매한데 80년대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1,2권 정도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 수록 별로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0/01/23

카레라이스의 모험 - 모리에다 다카시 / 박성민 : 별점 3점

카레라이스의 모험 - 6점
모리에다 다카시 지음, 박성민 옮김/눌와

카레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저자가 카레의 정체를 탐구하고, 뒤이어 일본식 카레와 카레라이스의 형성 과정에 대해 고찰한 음식사, 문화사, 미시사 사적입니다.

읽으면서 "맛의 달인" 24권의 '카레 승부' 편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카레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인도까지 가서 카레가 무엇인지를 조사하고, 영국으로 찾아가 카레 가루의 원형을 찾는다는 이야기 전개 구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뒤 일본 카레의 형성 과정을 깊숙히 파고든다는 점은 차이점이지만 스리랑카는 카레에 몰디브 피쉬라는 가다랑어 종류 건어물을 사용한다, 카레의 맛이 부족하면 한방약을 털어서 섞어 먹으면 좋다는 등 "맛의 달인"에도 등장했던 이야기가 뒤에도 계속 등장합니다. "맛의 달인" 24권이 출간된건 1990년이며, 이 책이 언제 출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카레 서적을 발표하며 '카레왕' 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저자이니, 이 책에 등장했던 전개와 이야기들이 원조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당연히 책이기 때문에 "맛의 달인" 보다 카레에 대한 정보 제공은 훨씬 자세하며 정보의 폭도 넓고 깊습니다. 여러가지 아이디어들도 돋보이고요. 일본에서 시판되는 카레를 조리해서 인도인에게 먹여본다는 도입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실제로 인도인들도 꽤 맛있어 했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인도의 여러 향신료를 조합하여 만든 요리를 '카레'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맛의 달인"에 이미 나왔던 내용이지만, '카레'의 어원은 타밀어에서 무언가 끼얹어 먹는 소스를 의미하는 '카리'에서 왔거나, 힌디어로 향이 강하고 맛있는걸 뜻하는 '터카리'라는 말에서 왔거나, 아니면 옛 인도 북부의 요리 이름인 카디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재미있었습니다. '캥거루' 어원에 대한 전설처럼, 영국 지배 시기에 영국 관리가 인도인들에게 먹는 요리를 물어보았는데 그들이 맛있다고 한 '쿠리'라는 말에서 유래했던 설은 거짓말이라는 디테일까지 완벽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한 시기의 이야기라면 18세기 이후 이야기인데, 커리가 처음 영어 문헌에 등장한건 1598년이기 때문이라네요.
그 외에도 인도인들도 카레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던가 - 등장하는 요리사인 쟈인 씨는 국물이 있는 요리라고 하지만 마살라, 즉 향신료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요리는 모두 카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 매운 맛의 기본은 특별한 향신료가 아니라 고추와 후추가 중심이며 인도에서 카레를 만들 때 양파를 카라멜라이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등 새롭게 알게 된 정보가 가득합니다.

이러한 카레의 정체에 대한 탐구 뒤 펼쳐지는 일본식 카레의 형성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문화권에 완전히 이질적인 요리가 도입되어 국민 요리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제대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맛의 달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우선 소개되는건 일본 카레의 기원입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카레 조리법인 "서양요리지남" 속 카레는 개구리! 카레였으며, 야채로 파를 사용했다는군요. 이 책이 나온 19세기 후반에는 일본식 카레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양파, 감자, 당근이 생소한 채소였기 때문입니다. 1879년 간행된 "서양과채조리법" 속 파는 “오니언”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고, 다른 책에는 “아니언”이라는 표기도 있었으며 “뿌리를 식용으로 하며, 겉의 껍질을 벗기고 잘 씻는다”라고 주석이 달린걸 보면 파 역시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던 재료가 아니었을테고요. 이러한 개구리 카레 스타일의 카레 요리법이 1900년대 초반까지 퍼지게 되는데, 지금과 다른 점은 카레 가루를 넣은 소스로 고기를 익힌 요리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인도식과는 다르게 카레 가루를 쓰고, 밀가루로 걸쭉하게 만들었다는게 특징이지요.
지금과 유사한 카레 요리법인 걸쭉한 카레 루에 고기와 함께 양파, 감자, 당근을 함께 넣어 볶고 끓여 만드는 방식은 다이쇼 시대 이후 확립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이러한 레시피로 카레를 조리하여 배식한게 결정적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러한 조리법의 역사와 함께 저자는 카레가 일본의 국민 요리가 된 이유를 추적합니다. 우선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시스템을 받아들여 국가를 개조하던 와중에 육식이 유행하게 됩니다. 대표 요리인 규나베가 널리 퍼진 뒤, 카레가 일본인에게 서양 요리의 입문격 요리로 알려지고요. 이유는 이미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고, 고기도 규나베처럼 작게 썰어 넣어 부담스럽지 않았던 덕분입니다.
그 뒤 '1. 레스토랑, 식당 등의 메뉴에 등장한다. -> 2. 잡지, 서적(현재라면 TV)과 같은 미디어에서 요리법 또는 '요즘 이런 요리가 유행'이라는 말 등이 소개된다. -> 3. 일반 가정의 식탁에도 등장하게 된다.' 라는 외부 요리 수용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도입 초기의 소스형에서 스튜형으로 조리법도 바뀌고요. 소스형 카레는 주재료가 고기지만, 가정 요리로는 요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도록 고기는 적게, 그리고 밥에 국물을 끼얹어 먹는 식의 음식으로 발상을 전환한게 그 이유입니다.
그 결과가 본래의 서양 요리와는 다른 일본풍의 양식 '카레라이스'인 것입니다. 그 뒤, 일본 카레 가루 제조와 카레 루의 판매, 인스턴트화 등을 거친게 현재의 일본 국민 요리 카레라이스입니다.

이렇게 일본 카레라이스에 대해서만 연구한 결과물이라는건 아쉽지만, 카레가 아니라 그 어떤 요리라도 다른 문화권에 흡수될 때에는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책의 장정과 디자인,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카레왕께서 추천한 참고 도서인 "카레의 지구사"도 빨리 읽어봐야겠군요.

2020/01/19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2)

유럽 맛 여행 - 4점
나가라 료코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제목 그대로, 독일에 남편과 함께 유학 생활 중인 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유럽을 여행하며 맛 본 음식들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냥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먹었다가 내용의 전부에요. 일상계 수준을 벗어난, 거의 식단 일기에 가까운 그런 내용이에요. 때문에 그 어떤 드라마적인 재미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맛본 요리, 음식들에 대한 맛 이외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고요.

손으로 꼼꼼하게 그린 따뜻한 그림은 마음에 들지만, '만화' 보다는 인스타그램 요리 일기에 가깝습니다. 이야기가 없기에 만화로는 낙제점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의 식사"

'지비에'라고 불리우는 사냥한 동물들의 고기를 요리해 먹는 만화로 이전에 읽었던 "산적 다이어리"와 유사합니다. 다만 "산적 다이어리"는 '사냥'이 주였던 반면, 이 만화는 '요리'가 주라는 차이가 있지요. 주인공 아키노는 대부분의 경우 직접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사냥을 도와주는 등으로 야생 동물 고기를 얻거나, 함정을 만든거에 걸려든걸 나누거나 하는 식으로 재료를 얻거든요. 이렇게 얻은 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과정이 내용의 핵심입니다.

사슴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먹기 힘든 오소리 등이 재료라 상당히 흥미롭게 보았는데, "산적 다이어리"와 마찬가지로 맛은 대부분 호평이라 좋은 참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소리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의심스럽고요. 그래도 냄새가 심하고 엄청 고생해서 손질해야 하는 등 (사슴 내장의 경우는 여덟번도 넘게 데치는 등), 어려움도 비교적 공정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산적 다이어리"보다는 낫네요.

깔끔한 작화, 악역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냥꾼이자 야생 동물 손질, 요리의 달인 이쿠지노 캐릭터도 상당히 인상적이며, 아키노가 덫 사냥, 사냥감 해체, 몰이꾼 등을 거쳐 사냥꾼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도 나쁘지 않고요.

사냥이라는 주제 자체가 우리의 실생활과는 분리되어 있어서 현실감은 없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과 식욕과 나 1 - 6점
시나노가와 히데오 지음, 김동수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27세 여사원 히비노 아유미가 주말마다 산행을 떠나 산에서 온갖 요리를 해 먹는다는 내용입니다. 최근 유행인 캠핑에 요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만화인 셈이지요. 등산과 요리 중 한 가지만 좋아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머리를 잘 썼네요.

등산 쪽 정보도 충실히 제공하고 있지만 저는 아무래도 요리 쪽에 관심이 갔는데, 처음에는 주먹밥과 라면에서 시작해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오버스러운 온갖 요리가 등장하는게 포인트입니다. 심지어 일종의 수비드 조리법을 활용한 "로스트 비프"까지 등장하니까요.
산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도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뎃셍력이 부족해보이는 작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좀 더 꼼꼼한 그림체였다면 내용이 훨씬 잘 살아났을텐데 아쉽습니다. 등산 상황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집에서 따라 해 먹음직한 요리가 별로 없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열차 - 아카가와 지로 / 한성례 : 별점 2.5점

유령 열차 - 6점 아카가와 지로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펄프 픽션의 제왕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집입니다.

아카가와 지로의 작품은 제법 많이 접해 왔습니다. 리뷰를 올린 작품은 "마리오네트의 덫",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 시리즈인 "공포서클", 그리고 단편집 "네이비 블루 스토리"와 몇몇 앤솔러지 뿐이지만,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는 서울 문화사를 통해 국내에 출간된 작품들은 다 읽었으며, 그 외에도 SF라고 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딸" 등을 읽었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수준 이하였습니다. 도저히 유명 작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오네트의 덫"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 리뷰에도 썼듯이 3류 소설의 교과서같은 책이었지요. 그래서 작가의 그 어떤 다른 작품도 읽지 않으리라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약 8년여, 설 연휴 때 읽을만한 가벼운 작품을 찾다가 이 작품이 얻어걸렸네요.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읽은지도 오래 되어 나쁜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했지만, 그나마 단편들은 읽을만 했던 기억 때문이지요. 예전에 읽었던 "일본 서스펜스 걸작선"이라는 괜찮은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곳에 따라 비"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있기도 했고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우노 경부와 대학생 유키코 컴비가 꽤나 유쾌해서 다른 시리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었는데, 바로 이 단편집이 이 컴비가 활약하는 데뷰작이자 작가의 데뷰 단편집이기도 했거든요.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터리 100선에도 당당히 실려 있기도 하고요. "마리오네트의 덫"의 순위가 더 높은걸 보면 영 신뢰가 안 가는 리스트이기는 하지만요.

하여튼, 기대 반 우려 반이었는데 다행히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수록작 대부분이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상황들이 기발한 덕이 큽니다. 범행 동기 등 세세한 부분의 설득력도 높은 편이며, 트릭도 반전도 제법이에요.
무엇보다도 두 커플의 캐릭터가 아주 좋습니다. 부인과 사별한 중년 경감 우노와 젊은 여대생 유코 커플을 조합했다는 점도 이색적인데,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게 톡톡튀고 발랄한 유코의 묘사가 괜찮습니다. 상당히 개방된 연애관과 성의식은 시대를 앞서간 감이 있네요.

그러나 수준 이하의 졸작도 수록되어 있는 등 작품의 편차가 크다는건 아쉽습니다. 여러모로 단점도 많이 띄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령 열차"

8명의 승객이 운행하는 기차에서 사라진 깜쪽같이 사라졌다는 불가능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아내와 사별한 독신 경감 우노 교이치와 여대생 유키코 컴비의 기념할만한, 그리고 아카가와 지로에게도 기념할만한 데뷰작이죠.

그러나 사건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위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도 그리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에요. 달랑 세 명의 마을 주민(이와유다니 역 역장, 기차 기관사, 차장)이 승객들이 분명히 탔다고 증언했을 뿐이라서 이 세 명이 입을 맞춘다면 탑승, 혹은 운행 과정에서의 승객 소실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도 8명의 사람들이 승객으로 위장하여 탑승한 뒤, 기차 뒤에 매달아 놓았던 대차를 타고 탈출한게 진상이고요.

8명의 승객이 여관에서 독버섯을 먹고 죽었으며, 쇠락해가는 마을 관광이 치명상을 입을까 두려워 한 마을 유지들이 합심하여 시체를 숨긴 뒤 공작을 벌였다는 동기는 나름 그럴듯합니다. 식사 문제를 우노와 유코의 입으로 드러내는 등 약간의 복선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여덟 명이나 되는 손님이 사고사로 죽은걸, 기차를 탔다가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진걸로 무마한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차라리 시체를 태운 뒤 기차 사고같은걸 일으키는게 현실적이잖아요.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입을 맞춘 뒤, 등산을 갔다는 등으로 둘러대던가요.
또 승객 소실은 번거로운 연극 없이, 그냥 세 명(아니, 여관 주인인 고지마까지 네 명)만 함께 증언해도 성립했을텐데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을 대역으로 동원한 것도 이상합니다. 아울러 수수께끼의 영역에서 이와무라 미와를 살해하고, 유코마저 납치하는 실제 범죄가 우노 경감앞에서 벌어진 뒤에는 범인들이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결말은 많이 아쉽습니다.

기념할만한 데뷰작이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유괴범의 배신"

닛타가 '봉투에 들어 있지도 않고, 접혀 있지도 않은' 협박장을 들고 있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괜찮습니다. 배달온걸 본게 아니라, 자기가 만든 협박장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있었다는 추리인데 상당히 그럴듯해요. 유괴 사건은 조작이며, 닛타가 자신의 과거를 협박하던 니시오를 죽이려는게 목적이었다는 진상은 바로 이 추리에서 출발하는데, 추리와 동기와 진상이 잘 어우러집니다.

또 협박장이 들어있던 우편함 속 신문 투입 날짜를 통해 협박장이 집 안에서 넣어진걸 알아챈다던가, 이 협박장의 '딸'이 마사코가 아니라 니시오의 딸 마치코였고, 니시오가 닛타로부터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자주 빌려가는 이유는 책 속에 넣어둔 현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는 세세한 추리들도 괜찮았어요.

그러나 닛타가 과거 살인을 저질렀던 과거로부터 면죄부를 얻기 위해 마사코마저 살해했다는 전개는 너무 극단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훗날 막장 3류 드라마의 제왕이 된 아카가와 지로의 편린이 여기서도 엿보이네요.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낮은 편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얼어붙은 태양"

한 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휴양지에서 얼어죽은 이로누마의 시체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트릭이랄건 없습니다. 범인의 의외성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요. 이로누마를 냉동고로 유인해 가두어 죽게 만든건 다케나카 부인의 어린 세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냉동고를 대충 관리하여 책임을 지는게 두려웠던 관리인 노인이 사체 유기를 도운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과 범인의 의외성 외에는 건질만한 내용이 없다는 겁니다. 협박의 대상이 다케나카 부인이 아니라 오다 여사였다는 의외의 진상은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해요. 또 관계자들과 며칠간 휴양지에서 만났을 뿐인 우노 경감과 유코가 어째서 그들을 도와 이로누마 죽음의 진상을 감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다케나카 부인이 선의의 피해자이고, 오다 여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도 경감이 할 일은 아니잖아요?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게 될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유코와 우노 경감 컴비의 알콩달콩 시츄에이션은 즐거웠습니다. 거사(?)를 치루려 할 때마다 방해받는 상황 묘사도 아주 코믹해서 즐거웠고요. 추리적으로는 별로라도 두 컴비의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없지는 않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역시, 이 시리즈는 유쾌하고 해피 엔딩이어야 제 맛인거 같아요. 별점은 2점입니다.

"비옷을 입은 시체"

앞서 총평에서 언급했었던, 다른 앤솔러지에서 재미있게 읽었다는 단편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런데 "비옷을 입은 시체"라는 제목은 영 별로네요. 이전에 읽었던 "곳에 따라 비"라는 제목이 더 근사했어요.

여튼,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피해자들이 비가 오지 않는데도 비옷 등을 차려입었기 때문에 동일범에 의한 연쇄 살인이라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모두 개별적인 범행이었다는 기본 아이디어가 좋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이 비옷을 입은 이유도 설득력있고요.

젊고 싱그러운, 그리고 현재와 하나도 다를게 없는 대학 축제가 배경인데, 휴대전화가 없어서 집으로 전화를 할 수 밖에 없는 고전적인 설정이 등장하는 것도 이채로왔던 점입니다. 공공장소에서의 키스를 경범죄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옛 시절의 모습이고요. 이런게 고전의 맛이 아닌가 싶어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좋은 단편입니다.

"선인촌 마을 축제"

유코의 졸업 축하 여행을 떠난 둘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나오키 형사의 초대로 그의 고향이라는 선인촌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너무나 착한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지만, 촌장의 부인이 우노를 유혹하고 수상한 남자가 자기 형이 이 마을에서 수상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한 뒤 이리에 물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추리 소설은 아니고, 모험 소설에 가까운 작품인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지와 같은 시골 마을, 그곳을 우연히 연락도 없이 방문한 손님들, 너무나 착해서 손님들이 원하는걸 다 들어주는 주민들, 손님들과 함께 보낸다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마을 축제.... 이 정도 단서가 주어지면, 손님들을 제물로 1년에 한 번 마을 주민들이 미쳐 날뛰는 광란의 축제가 벌어진다는건 보나마나지요. 공포 영화의 서브 장르인 포크 호러(Folk Horror)와 똑같으니까요. 집단적인 종교의식이나 미신때문에 외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영화들이요.

둘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과정도 운과 우연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를 꿈꾸던 처녀가 도와줘서 탈출하는거야 떡밥이 있었다 쳐도, 마지막 순간에 방송국 헬기 사다리를 잡고 도주에 성공한다는건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경찰인 나오키 형사도 마을 출신으로 공범이었다는 점은 독특했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는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차라리 수록되지 않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2020/01/18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2 - 카리야 테츠 / 김숙이 : 별점 1.5점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2 - 4점
카리야 테츠 지음, 김숙이 옮김/창해

1권을 오래전 읽었었고, 바로 얼마전에도 읽었었습니다. 별점은 2점이고, 딱히 구입해서 읽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게 감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2권 목차가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구입해서 읽어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이미 절판되었지만 많이 팔렸는지 중고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저를 낚았던 목차부터 소개해드립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 시드니에 살면서
제2장 | 세계 맛기행
제3장 | 맛의 나라 일본
제4장 | 유명가게를 찾아서
제5장 | 특별요리 강좌
제6장 | 못 다한 이야기
1장이야 그렇다쳐도, 2장은 카리야 테츠가 전 세계를 다니며 맛 본 맛있는 요리를 소개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3장에서는 일본의 맛있는 요리를 소개해주고요. 4장은 유명 가게들에서 맛본 경험담이, 5장은 자신만의 레시피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하게 기대를 벗어났습니다. 2장 "세계 맛기행"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맛 본 요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깊이있는 요리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고 개인적인 경험담이 펼쳐질 뿐입니다. 미국 요리의 대표로 스테이크의 예를 들면서 하는 이야기라곤 미국에서는 레어로 제대로 굽지 않더라, 웰던으로 구워져 나왔을 때 항의하면 제대로 갖다 주라, 일본에서는 항의해봤자 미안하다고만 하지 다시 주지 않더라는게 전부에요. 프랑스 3대 진미 이야기도 푸아그라와 캐비아는 그냥저냥이고 트뤼프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설명 밖에는 없고요. 다른 모든 이야기가 다 이런 식입니다.
심지어 "유명 가게를 찾아서"는 제목과는 전혀 다릅니다. 진짜 유명 가게가 아니라 자기가 갔을 때 최고였던 가게를 소개하고 있거든요. 니기리즈시라면 '스키야바시 지로' 정도는 나와줄 줄 알았는데, 1975년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도 모르는 초밥 가게가 나오는 식으로 말이죠.
"특별요리 강좌"는 기대대로 레시피가 소개되기는 하나 로스트 비프는 오븐이 없으니 도전하기 어렵고, 채 선 양배추에 마요네즈를 듬뿍 바르고 간장을 조금 친 뒤 잘 휘젓고 먹으라는 요리, 무를 국물 맛이 배도록 푹 끓인 뒤 튀겨 먹는 요리 등은 별로 따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게다가 에세이 전체적으로 1권에서도 눈꼴 사나왔던 꼰대 마인드가 지배하고 있는 것도 단점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심한 말을 한 뒤 '너무 극단적인 말이 아니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남에게 실례가 되든 다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뭐든지 말해버리는 정의의 악한이란 말이다'고 본인을 정당화하는데 참 꼴보기 싫습니다. 정의의 악한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요. 나는 저렇게 늙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만 듭니다.

물론 꼰대 마인드라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 없는건 아닙니다. 명품을 이해하지 못하며, 유명세에 좌지우지된다는건 그만큼 자신감이 없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에요. 영국의 전통있는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 2층에는 여성 손님 입장이 아직 금지되었다는 말을 듣고 음식이 맛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관습을 전통이라 자랑하는 듯한 인종에게 섬세한 감정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동의할 수 밖에는 없지요.
음식 전문가로서의 식견이나 경험을 살짝 보여주는 부분들도 간혹 등장합니다. 소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도쿄 토박이들이 소바 끝만 살짝 담구어 먹는 이유는 소바의 향과 맛에 소바 국물의 깊은 맛을 살짝 더해서 먹기 위함이라면서, 이 국물에 대해 "맛의 달인"에서도 등장했던 명점 '나미키 야부'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내용인데 여러모로 볼 만 했습니다.

그래도 장점은 극히 드물고, 자의식 강한 꼰대의 자기 주장, 경험만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01/1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1)

식사는 하셨어요? Buonappetito! - 6점
야마자키 마리 지음/애니북스

"테르마에 로마에"로 히트를 친 작가 야마자키 마리의 이탈리안 식도락 일상계 만화입니다. 크게 이탈리아 유학 당시, 결혼 후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일본에서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식도락' 측면에서는 결혼 후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유학 시절은 너무 가난해서 변변한 음식을 먹은게 별로 없고, 일본에서의 이야기야 특별한 음식이 나오지 않는 반면 이탈리아인 남편과 시부모가 등장하는 정통 이탈리아의 생활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재료라던가, 새로운 맛이 많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비싸고 귀한 특급 올리브 오일, 이탈리아의 연말연시 요리 등 여러가지 새로운 소재들에 작가 특유의 유머가 더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 등장한 흰 빵과 수프와 같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좋았고요.

또 몇몇 요리는 간단한 레시피까지 소개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재미, 신선함에 실용적 가치까지 있다면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계속 나오면 좋겠네요.

하나씨의 간단요리 3 - 4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미즈사와 에츠코 그림/미우(대원씨아이)

출간된 지 2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군요. 사실 TV 드라마까지 나온 인기작이기는 해도 1, 2권은 제게는 그닥이었습니다. 작화도 마음에 들지 않고, 주인공 하나 씨의 대책없는 성격도 취향이 아니었거든요. 간단 요리라는 제목에 어울릴만큼 둥장하는 레시피도 간단하지만, 특별히 따라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요.

3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하나 씨의 대책없는 귀차니즘은 더욱 업그레이드 되기까지 했습니다! 요리들도 전골, 볶음 국수, 샤브 샤브 등은 손도 많이 가고 재료도 제법 많이 필요한 음식들인데, 이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컨셉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래서야 '간단 요리'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요. 

그나마 취지에 부합하는 건 고등어 통조림 밥과 생고추냉이 아보카도 덮밥 정도인데 문제는 역시나 전혀 따라서 해 먹어 보고 싶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어 차밥 김가루는 제법 땡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재료를 쓰는 탓에 따라하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제 편견을 깨기는 커녕 더 굳게 만들었습니다. 가볍게 읽을 만은 한데, 더 이상은 구입할 생각 없습니다.

우연한 산보 - 6점
다니구치 지로 만화,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미우(대원씨아이)

이 만화는 제목처럼 요리가 중심은 아니고 산보가 중심이기는 합니다. 1~3화 까지는 특별한 요리가 등장하지 않고요. 그러나 4화 이후부터는 산보 도중에 먹는 음식도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4화 히피 축제에서는 오신코, 5화 한밤중의 고야에서는 고야 참플, 제 6화 개와 연식 야구공에서는 스콘, 제 7화 하모니카 요코쵸에서는 카레와 맥주, 제 8화 메지로의 카키모치에서는 쇼유 라멘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고독한 미식가" 처럼 음식 구성과 맛을 상세히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요리들의 묘사는 마음에 들었지만 이 정도로는 역시나 요리 만화라고 부르기는 무리였을까요? 산보와 함께 음식의 비중을 좀 더 높여주었더라면 주인공이 술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 "고독한 미식가"와 다른 일상계 요리, 식도락 만화로 그려질 수 있었을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또 원작인 쿠스미 마사유키의 후기와 뒷 이야기가 너무 길게 수록된 것 역시 감점 요소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래저래 조금 애매한 결과물이네요.

2020/01/12

중국요리 백과사전 - 신디킴, 임선영 : 별점 2.5점

중국요리 백과사전 - 6점
신디킴.임선영 지음/상상출판

부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진짜 중국 음식'으로, 중국요리의 정석이라고 하는 8대 요리 - 루차이 (산둥요리), 촨차이 (쓰촨요리), 웨차이 (광둥요리), 쑤차이 (장쑤요리), 저차이 (저장요리), 민차이 (푸젠요리), 샹차이 (후난요리), 후이차이 (후이저우요리) -와 기타 지역별으로 대 분류를 나눈 뒤, 각 분류별 주요 요리를 3~4페이지씩 할애하여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90개가 넘는 요리에 여러가지 기타 정보가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각 요리별 소개는 말씀드린대로 3~4 페이지 분량에 불과해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로 그 맛과 유래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어서 불필요한 설명도 별로 없고요.
또 8대 요리에 대한 설명이 요리별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루차이, 즉 산둥 요리의 핵심은 육수로 "군인의 창, 요리사의 탕"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쓰촨의 매운 맛은 화자오와 고추가 조화된 '마라'의 맛이며, 광둥 요리는 제철 음식과 식재료의 궁합을 중하게 생각한다. 장쑤 화이양 요리에서는 칼을 절묘하게 쓰는 요리가 많다. 저장 요리는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식입니다.

'딤섬'을 소개하며 그 종류 - 빠오, 자오, 까오, 펀, 퇀, 쑤 등 - 를 알려주는 것처럼 음식의 종류는 물론, 중국 4대 민물고기는 '황하의 잉어, 송강의 농어, 흥개호의 대백어, 송화강의 쏘가리'이며 저장 요리의 3대 보물은 '룽징차, 사오싱 황주, 진화햄'이라는 등 재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샤오롱빠오는 워낙에 존엄하기에 초간장에 적신 생강채를 만두에 가져가는게 원칙이라는 식문화 관련 내용 등 관련되어 소개되는 정보가 실로 깊고 범위 또한 넓으며, 처음 알게 된 내용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배추의 탄생이 천여년 전 중국 장강 이남에서 즐겨 먹던 채소 숭차이가 북방에 전해졌는데, 추운 날씨에서 잘 자라지 않자 북방에서도 잘 자라는 순무 우징과 교배시킨게 유래라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전세계에 퍼진 화교의 요리가 주로 푸젠과 광둥 요리인 이유도 그럴듯 했어요. 중원지역 한족들이 청나라의 침략 때문에 푸젠 지방으로 피난을 간 뒤,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개방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간게 계기라고 하네요. 나가사키 짬뽕을 만들어 낸 천핑순도 푸젠 사람이었죠.

오래된 문헌과 자료에만 의지하는게 아니라 최신 정보에 기반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쓰촨요리 푸치페이펜이 '2017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올해의 애피타이저 상을 수상하였는데, 영문이름은 Mr and Mrs Smith였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푸치는 부부, 페이펜은 허파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허파가 아니라 여러가지 소 내장을 재료로 쓴다는군요. 데친 뒤 썰어낸 소 내장을 고추기름, 화자오, 깨, 참기름, 간장 등으로 양념하는 요리라는데 차가운 곱창볶음 비슷해 보입니다.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상세하지는 않지만 대략의 맛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준의 레시피가 수록된 것도 마음에 듭니다. 불과 웍을 자유자재로 다루어야 하는 요리들이 많아서 집에서 해 먹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건 아쉽지만요. 이 중에서는 국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레시피들이 인상적입니다. 대표적인게 궈바오러우에요. 우리나라에 알려진 '찹쌀 탕수육'이라는 명칭과는 다르게 찹쌀은 중요하지 않고, Double Cooked Pork Slices라는 영어 이름처럼 두 번 나누어 튀기는게 핵심이라는군요. 1차로 고기를 약불에 오래 튀겨 익히고, 2차로 센 불에 빠르게 퀴겨 색을 입히는게 비결이라나요.

이렇게 많은 요리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먹고 싶었던걸 한 가지 꼽으라면 당나귀 고기 화덕 빵 샌드위치인 뤼러우훠사오를 꼽겠습니다. '천상에는 용 고기, 지상에는 당나귀 고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는 당나귀 고기를 육식 중 최고로 꼽는다니 그 맛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죠. 고기를 12시간 정도 끓여내는 동안 맛을 살리기 위해 제가 질색하는 중국 향신료도 거의 쓰지 않는다니 왠지 제 입맛에 딱 맞을 것 같고요. 당 현종이 제위 전 허베이성 허지엔에 들어 이 음식을 먹고 갔다는 등 유서까지 깊으니 호기심이 무척 동합니다.

또 이미 접했었던 요리가 소개되는 것도 반가왔습니다. 유명하기 그지없는 동파육, 궁바오지딩, 마파두부, 샤오롱빠오, 훠궈, 탄탄멘 등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일테고, 그 외에도 국내에서 체인점으로 접했던 '꺼우부리빠오주 (구불리 만두)', 남경 출장 때 접했었던 차가운 오리 요리 '옌수이야', 옛날 구로동 중국인 거리에서 처음 먹어보았던 맵디 매웠던 닭볶음 '라즈지' 등은 나름대로 추억도 떠오르고, 그 맛도 떠올라서 읽는 내내 무척이나 흐뭇했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여럿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지역별 요리를 대표하는 요리로 선정되어 소개되는 요리들이 무슨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겁니다. 단지 저자가 알고 있는 요리라서 소개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해당 지역 요리를 대표하는 요리인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북경 오리는 물론 거지닭, 불도장, 빠바오판, 딤섬, 동파육, 띠산센, 마라롱샤, 마라탕, 마파두부 등 몇몇 요리들은 그 유명세가 익히 국내에도 알려져 소개가 납득이 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요리들은 왜 그게 대표 요리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연길 냉면이 여기 수록될 정도의 중국요리라는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연길 냉면이 중국 10대 면 요리에 선정되었다는게 이유라면, 다른 10대 면 요리는 왜 다 소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도 불명확하고요. 심지어 마카오 에그타르트가 소개되다니,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된다고 생각되네요.

또 중국 발음과 중국어 한자를 그대로 쓴 표기 방식은 정말이지 최악입니다. 발음이야 그렇다쳐도 원래 이름을 간체가 아닌 일반 한자체로 표시해주었다면 그래도 그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으로서는 초보자 수준의 짐작에 그칠 뿐이라 답답했거든요. 레시피도 가지된장볶음 장체즈 항목에서처럼 '집에서 따라할 수 있다', '오늘 당장 해 먹어 볼 수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정확한 분량과 그 방법을 소개하지 않은 건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실제로 소개 자체가 간단해 보여서 양념 분량만 정확하게 알려주었더라면 도전해 보았을텐데 말이죠. 그 밖에도, 대분류별로 분량이 일정치 않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도판도 좋고 내용도 재미있지만 자료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조금 부족해 보여서 감점합니다. 재판이 나온다면 분류와 요리 선정에 있어서 학술적인 근거가 좀 더 뒷받침된다면 좋겠습니다.

2020/01/10

Q.E.D iff 5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iff도 5권 째에 접어들었네요.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에피소드 두 편 모두 잔혹한 살인 사건(한 건은 미수입니다만)을 다루고 있으며, Q.E.D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추리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그런데 왠걸, 아주 좋았습니다! 직전 4권에는 간만에 괜찮은 에피소드가 수록되었었다고 소개했었는데 4권의 첫번째 이야기가 장타였면, 이번 5권은 이야기 두 편 모두 장타 이상, 심지어 두 번째 이야기는 홈런 수준입니다. 타점은 2점! 별점은 3점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이븐 Even"

대학생 아시카가 렌은 산에서 조난당한 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테시마에게 차였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병원에서 렌의 산소마스크를 벗기려던 누군가가 도주하다가 막다른 복도에서 사라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 뒤 가나의 탐문 조사를 통해, 렌을 찼다는 테시마가 렌에게 십여만엔의 돈을 빌렸다는걸 알아낸다. 이 사실을 가나에게 알려준 센도는 테시마가 그 빚을 갚지 않기 위해 렌을 죽이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렌의 병문안을 왔던 또 다른 한 명인 코시모토는 테시마의 연인이었고, 테시마는 성인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렌의 독일어 노트가 독일어 시험을 볼 때 아주 유용했는데 독일어 시험지가 도난당했다는 사건 등이 연달아 밝혀졌고, 이를 토대로 토마는 진상을 추리해낸다.

등장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는 Q.E.D에서 흔하게 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 한 번의 증언이 전부가 아니라 가나의 탐문이 이어지면서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결국 세 명의 유력 용의자들이 모두 수상하게 만들어서 보다 정교한 느낌을 전해 줍니다. 테시마는 자신의 성인 클럽 아르바이트를 숨기기 위해, 코시모토는 연인에게 집적되는 남자를 죽이기 위해, 센도는 테시마를 살인범으로 몰기 위해서라는 동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코시모토가 독일어 시험 문제를 훔치다가 렌에게 들켜서 그를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게다가 가장 놀라왔던건 사건에 대해서는 세 명 모두, 즉 범인까지도 진실만을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렌이 테시마의 손수건 향을 맡고 있었다"는 코시모토의 증언은, 시험 문제를 훔치는 상황에서만 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정도입니다. 코시모토가 운동선수를 그만두고 MBA를 목표로 해외로 가려고 하는 상황도 마찬가지고요. 도주 목적이었던 것이지요.

등장하는 트릭은 변변치 않지만, 범인이 병원 막다른 목도에서 사라진 방법은 나름 그럴듯 했습니다. 옷을 집어 던진게 사람이 그 쪽 방향으로 뛰어간 것 처럼 보였다는 이유인데, 우연이라도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쓴 작위적인 트릭보다는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였거든요. 코시모토가 마라톤 선수라는 설정을 활용한 트릭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그런데 세세한 문제가 몇 가지 눈에 띕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병원에서의 살인 미수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코시모토는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렌이 식물 인간이 된 게 아니라면, 언젠가 의식을 회복해서 코시모토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걸 증언할게 뻔하잖아요? 서둘러 해외로 도주하지 않은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이야기 결말을 보면, 토마의 추리 이후 머지않아 렌이 깨어나 사정청취를 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렌의 노트가 있으면 독일어 시험에 큰 도움이 되는건 모든 학생이 알고 있으며, 연인 테시마가 그 노트를 빌렸는데 왜 독일어 시험 문제지를 훔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토마의 주장도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렌의 실족이 살인 미수라는 주장에, 코시모토는 왜 렌의 자살 미수가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토마는 병실에 누군가 침입해서 렌을 죽이려 했다는게 증거라고 이야기하죠. 자살 미수였다면, 누군가 침입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 죽으려 했을거라고 단정하면서요. 그러나 바로 직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에 따르면, 자살을 실행했던 사람은 대부분 자살 시도 자체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통계적인 수준이지만, 토마의 단정은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는 셈이지요.

그래도 나름 합리적인 전개는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동안 졸작이 많았기에 이 정도면 평균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불완전한 밀실"

타카마츠씨가 밀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밀실 안에는 쓰러져있던 간호사 이타미 사요코가 곧바로 체포되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풀려났다. 미즈하라 경감이 진짜 범행 장소를 알아낸 덕분이었다. 또 다른 범행 장소가 일찍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는 1년 반 전 발생했던 클럽 화장실에서 하치오라는 여성이 살해된 사건 탓이었다.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었던 이타미 다케오는 가혹한 취조를 받은 뒤 자살했는데, 당시 검사가 타카마츠씨였고 이타미 사요코는 다케오의 모친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확한 동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초, 중반부까지는 '불완전한' 밀실 살인의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결국은 복수극이었다는 전개가 독특한 작품입니다. 복수극이었기 때문에 범인인 이타미 사요코는 불완전한 밀실을 만든겁니다. 본인이 용의자로 체포되기 위해서였지요. 이 과정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또 도화선이 된, 1년 반 전의 하치오 살인 사건은 시체가 아직 살아있는 것 처럼 위장한 뒤, 문 뒤에 숨었다가 구경꾼인 체 한다는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아주 현실적이에요. 복잡하지도 않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높으니까요.

물론 CCTV도 있었을 테고, 현장에 있던 구경꾼들의 명단을 경찰이 입수하지 않았을 이유도 없다는 것, 그리고 클럽에 중년 이상의 여성이 숨어들어간게 들통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이타미 다케오였는데,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가족이나 청부 살인을 의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악덕 커리어 경찰 미야코가 이타미 다케오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증거까지 조작해가며 그를 몰아붙였다는 이유로 상쇄됩니다. 또 복수귀로 변한 이타미 사요코가 미야코 살해로 복수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면도 아주 좋았고, 이 모든걸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는 미즈하라 경감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아울러 본편과는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토마가 경찰청의 타나바타 경위를 처음 만났을 때 '경찰청 형사 분이시죠?'라고 알아채고 묻는 장면도 기억에 남네요. 가나와 타나바타는 토마가 말투, 신발에 묻은 흙같은걸로 대단한 추리를 벌였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즈하라 경감이 토마에게 연락했던 것입니다. 추리라는게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라는 반증으로 보여 흥미로왔어요.

신 캐릭터 타나바타 경위의 등장은 불필요했다는 점, 미야코의 증거 조작 등의 행각은 아무리 만화지만 지나치다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명확한 동기에 트릭도 안정적이며, 전개까지 발군인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2020/01/09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유성호 : 별점 2.5점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6점
유성호 지음/21세기북스

법의학자 유성호가 오랜 경험과 연구를 통해 '죽음'에 대해 서술한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저자가 "미스테리아"에서 연재하고 있는, 실제 사건 속 법의학 이야기를 펼쳐내는 컬럼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미스테리아" 연재 컬럼과 비슷한 내용의 책일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책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제 실수지요. 

그래도 다행히 총 3부 구성 중 1부인 "죽어야 만날 수 있는 남자"는 비교적 기대에 값합니다. 여러가지 실제 사건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법의학 소견과 검시 결과 등이 소개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완전범죄를 꿈꿨던 범행들이 눈에 뜨입니다. '윤 일병 폭행 사망 사건' 이라던가, '의사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처럼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왔던 사건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를 더하고요.

그러나 2부인 "우리는 왜 죽는가"와 3부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부터는 이런 실제적인 법의학 관련된 글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 과학적 개념을 다루고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도 2부는 '죽음'을 인위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뇌사와 연명 의료 지속 여부, 그리고 안락사 이슈에 대해 심도깊게 접근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평상시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주제라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고요. 특히 환자 자신이 연명 의료를 받을거라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연명 의료로 생을 유지해야 한다면, 그 결정을 정작 당사자인 환자는 하지 못한다는 이슈는 남 이야기 같지도 않더라고요. 법의학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이러한 이슈에 대해 국내에서 법제화되거나, 법원 판결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생기게 된 1997년의 '보라매병원 사건' 과 2008년 '세브란스 병원 연명의료 판결' 과 같이 실제 사례가 소개된 것도 이해를 돕습니다.
자살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는 부분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근거를 가지고 접근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잡지 《뉴요커 The New Yorker》가 금문교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했다가 다행히 구출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을 인터뷰했을 때, 그리고 우리나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안용민 교수가 실제 자살 시도자를 진료하면서 들었다는 이야기 및 이를 연구한 내용들에서 자살자들 모두가 막상 죽으려는 순간에는 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던가, 자살의 원인으로 자살 유전자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자살 유전자는 세로토닌이라는 뇌 신경화학물질과 관련되어 있다는군요. 물론 아직 명확하게 그 근거를 밝힐 수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자살의 원인 중 70퍼센트는 환경적 요인이고 나머지 30퍼센트는 유전적 요인일 것이라는 정도라고는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자살자가 있는 가족은 보다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 그 외에도 여러가지 데이터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설명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3부만큼은 영 관심이 가지 않더군요.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에 대한 설명들인데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죽음에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고, 저 역시 불필요한 연명 치료는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니까요. 하지만 저자의 약력이라던가, 다른 글들에서 기대했었던 실제적인 사건과의 연계라던가, 법의학자로서의 전문성이 묻어나는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마지막의 영생 등에 관련된 내용은 지금 시점에서는 많이 앞서간 측면이 없지 않아 보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제 기대와는 다른 결과물이었습니다. 차라리 "미스테리아" 연재 컬럼이 단행본화되면 좋겠습니다.

2020/01/05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니시카와 다카아키, 사카구치 와카코 / 박유미 : 별점 2.5점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6점
니시카와 다카아키 지음, 사카구치 와카코 그림, 박유미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역사 속 대표적인 의자 350가지를 선정한 뒤, 큰 판형을 잘 활용한 상세한 일러스트와 디자이너 정보와 함께 시대순, 지역별로 구분하여 소개하는 디자인 역사서입니다.

의자 디자인에 대한 책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의자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제품 디자인'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의자 디자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지를 잘 알려주는데, 책에 따르면 의자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의자의 형태가 이 때 거의 완성되었거든요.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황금 안락 의자, 그리고 좌석, 등판, 팔걸이, 4개의 다리, 하인방의 부재 (4개의 다리를 엮어 지탱하는 구조물)로 구성되어 오늘날의 의자 기본 구조와 거의 동일한 투탕카멘의 옥좌 등의 발굴로 증명되고요. 개인용 목제의자는 현대의 스툴 개념과 동일합니다.

그 다음은 현재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그림으로 확인 가능한 고대 그리스의 의자 클리스모스, 고대 로마의 카데드라를 거쳐 중세 유럽으로 넘어가는데, 중세 유럽은 문화와 건축 양식에 따라 구분됩니다.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의 세가지 양식으로요.
이러한 문화와 양식 측면의 구분은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으로 이어지며 해당 시기마다 그 양식을 대표하는 의자들이 소개됩니다. 로코코부터는 나라별로 신고전주의 (루이 16세 양식), 퀸 앤 양식 (영국 앤 여왕 제위 시대 양식) 등으로 더 상세하게 구분한게 특징입니다. 이 때부터 특정 문화와 양식에 종속되어 유행을 따라가지 않은 디자이너 -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토마스 치펀데일 - 가 등장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뒤는 특이하게 특정 '의자'의 소개로 넘어갑니다. 영국의 윈저 체어, 미국의 셰이커 체어, 토넷의 곡목 의자입니다. 한 시대를 거의 평정하다시피하며, 지금도 사랑받는, 일종의 '양식'과 '형태'를 만든 명작 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부터는 다시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 아르누보와 20세기 전반 모던 양식 등으로 이어지고, 20세기부터는 현대 의자라고 해도 무방한 의자들과 유명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친숙한 이름이 많아서 반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매킨토시와 힐 하우스 래더백 체어, 해릿 토마스 릿펠트의 레드&블루 체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야콥센의 스완 체어와 더 에그 체어, 베르너 팬톤의 팬톤 체어, 핀란드의 영웅 알바르 알토와 그의 의자들, 미국의 천재 찰스 임스와 그의 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아론 체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20세기부터의 소개는 조금 아쉽습니다. 19세기까지의 소개는 크게 특정 시기를 묶어서 의자의 발전사를 시대순으로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었는데, 그냥 유명한 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책의 소개만으로 특정 양식이나 흐름 등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어요. 이렇게 나열식으로 의자와 디자이너를 소개하면, 이전에 읽었던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와 같은 책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아니, 흑백 일러스트로 소개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못합니다. 큰 판형을 살리지도 못하고 대부분 작은 사이즈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뒤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형태, 계통도로 정리해 놓기는 했는데 실제 본문과 연결해 보기는 어려운 만큼, 차라리 이 형태와 계통도를 맨 앞에 목차처럼 수록하고, 의자들의 소개도 계통도대로 명확하게 소개해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목 그대로 '유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아울러, 일본이 제품 디자인 강국이기는 하나 '명작 의자 유래 사전'이라는 책에 한 꼭지를 할애하여 역사를 소개하고, 주요 디자이너와 의자를 소개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어쩔 수 없기는 하겠지만, 뭔가 공평한 시선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19세기까지는 별점 5점을 주어도 괜찮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감점합니다. 의자 디자인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뒤의 부록과 같은 형태, 계통도만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 카리야 테츠 / 김숙이 : 별점 2점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 4점
카리야 테츠 지음, 김숙이 옮김/창해

제목만 보면 "맛의 달인"의 엑기스만 모아놓은 책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화의 원작자 카리야 테츠가 저술한 음식 관련 에세이집입니다. "맛의 달인"에 수도 없이 등장했던, 여러가지 요리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풀어놓는 식의 이야기들입니다. 지금의 꽁치는 모두 냉동이고 너무 일찍 잡아서 예전의 맛이 나지 않는다, 지금의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그냥 인공적으로 만든 단백질에 불과하다.. 같은 식으로요. 때문에 일부 글들은 뻔하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사고방식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독특해서 재미있는 부분도 제법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돈은 꽤나 번 것 같은데 다 먹어버려서 남은게 없다, 호주에서 살고 있는데 그곳의 진짜 맛있는 두부는 한국인 할머니가 만든다는 등입니다. 도쿄대 출신인 것도 처음 알았고요. 

아울러 "맛의 달인" 원작자 다운 음식 관련한 프로페셔널한 에세이도 괜찮았어요.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것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35만엔 짜리 "최고의 라면" 이야기를 꼽겠습니다. 값비싼 중국산 화퇴와 자연산 닭의 칭탕에다가 최고의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로 국물을 내고 조미료는 당연히 천연 간장에 구슈의 다네가시마 흑돼지 최상급 로스를 숯불 화로에 구워 올린 라면이라고 합니다. 재료비, 교통비를 모두 감안한 가격이 35만엔이라고 하는데 한번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다음으로는 5밀리 정도로 얇게 썬 가지를 넉넉히 참기름을 두룬 팬에 센불로 볶은 뒤 간장으로 마무리하는 가지 참기름 볶음입니다. "맛의 달인" 31권에 나오는, 제 기억으로는 가지 공포증이 있는 나카마츠 반장과 후쿠이 차장 아들에게 먹이던 요리였는데 만화로 볼 때보다도 더 집에서 해먹고 싶은 생각이 이 들게 만든게 의외였습니다. 아무래도 글이 그림보다 분위기, 식감, 느낌을 전달하는데 있어 상상력을 자극할 여지가 더욱 많기 때문인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글을 읽으니 만두만들기도 도전해보고 싶어지더군요. 작가의 가족처럼 피까지 만드는 것은 무리겠지만요. 또 "맛의 달인" 12권에 등장한 중국식 파이 "로빙"이 원래 있거나 유명한 요리가 아니라 순전히 작가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맛의 달인"에서는 뭔가 대단한 중국 전통 가정요리처럼 묘사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에세이와 연관된 "맛의 달인"에 등장한 그림들이 충실히 실려있을 뿐 아니라 본문에 나온 음식이 맛의 달인 어느 권에 나오는지 부록이 실려있는 등 "맛의 달인" 팬에게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은 책이었습니다. 때문에 내용은 딱히 새로운 것은 없으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에세이집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1.05 추가 ----이전에 읽었었던 걸 모르고, 다시 리뷰를 작성했었습니다. 별점과 내용에 대한 인상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개인 아카이브 차원에서 추가합니다.

"맛의 달인"의 원작자 카리야 테츠의 미식 관련 에세이집. 본문 내용은 "맛의 달인"과는 크게 관련은 없습니다. 하지만 "맛의 달인"에 소개되었던 요리들이 많이 등장하고, 삽화는 모두 "맛의 달인" 속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어서 아예 떨어트려 놓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자 카리야 테츠의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우미하라'로 대표되는 "맛의 달인" 이라는 작품에서 특정 음식과 맛을 고집하는 '맛꼰대' 그대로라서 더욱 그런 느낌이 짙어요. 예를 들어 요새 꽁치, 돼지고기나 닭고기 등등등 (등장하는 거의 모든 식재료)는 먹을게 못된다, 옛날 친환경으로 길렀던 재료들에 비하면 음식도 아니다라는 주장이 책 전체에 가득하거든요. 좀 더 전문적인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나 때는 말이야~"와 다를바 없는 꼰대스러운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실망이 컸습니다. 게다가 이 주장에 등장하는 브로일러 닭, 응고제 글루코노델타락톤을 사용한 두부가 맛이 없다는건 "맛의 달인"에서도 여러 번 써 먹은 주제라서 딱히 흥미로운 내용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그냥 "맛의 달인"을 보는게 낫죠.

물론 전문가스러운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버블 시대 방송국 지원으로 완벽한 라멘을 만든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함수 (칸스이 / 감수)를 넣지 않고 밀가루와 달걀만으로 반죽한 뒤 홍콩 전문가를 통해 면을 뽑고, 중국햄 화퇴와 닭으로 상탕을 낸 뒤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로 일본식 맛을 더하고, 숙성 간장으로 간을 한 뒤 고명으로는 흑돼지를 구워 만든 차슈를 얹어 만들었다네요. 재료는 모두 자연산, 최고급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 그릇 만드는 비용은 35만엔!이라고 하고요. 35만엔으로 왜 라면을 먹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두부의 부자가 왜 "썩다"라는 의미의 한자를 썼는지에 대한 고찰도 재미있었습니다. 치즈 만드는 과정과 연결하여 '유부'라는 말에서 유자 대신 콩 자를 붙여 만든 말일 수도 있다는 설인데 꽤 그럴듯했습니다. 관련 자료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어질 정도였어요. 사시미의 어원도 충실한 자료 조사를 통해 잘 설명해 주고 있고요. 레시피도 틈틈이 실려있는데 가지 참기름 볶음도 간단해서 해 먹어봄직 하고, 집에서 만두를 만드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하는 '로빙' 레시피도 볼 만 합니다. "맛의 달인" 12권에서도 등장했던 바로 그 요리인데,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언젠가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만드는 김에 "맛의 달인" 60권에 등장했던 중화식 파호떡도 함께 만들어 보면 좋겠죠.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극소수일 뿐더러, "맛의 달인"에 등장했었던 이야기가 많다는 약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구태여 이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맛의 달인" 팬을 위한 책이긴 한데, "맛의 달인" 팬이라면 딱히 읽어볼 필요가 없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지닌 책입니다. 2권까지 나왔던데 구입해 볼지 말지가 고민이네요. 어차피 절판되기는 했지만요.

2020/01/04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 한국고문서학회 : 별점 4점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 8점
한국고문서학회 엮음/역사비평사

고문서에 관심을 가진 구성원들이 연구한 결과물을 엮은 시리즈의 세 번째 책입니다. 조선에 대한 생활사이자 풍속사, 미시사 서적으로, 제목 그대로 조선 시대의 복식 문화 (의), 음식 문화 (식), 주택 문화 (주)의 3가지에 대해 다룹니다.

개인적으로 식문화에 관심이 많기에 구입하였는데, 기대에 충분히 값합니다. 평소에 궁금했지만 따로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여러가지 항목에 대한 정보가 잔뜩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선, 쌀과 그 이외 곡식의 경작과 가격 등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1910년 자료에 따르면. 전체 곡류 중 쌀이 차지하는 비율이 43%이며 보리는 16%였습니다. 생산비는 3:1인 것이죠. 그러나 16세기 중후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쌀과 보리의 가격차는 최소 2~3배에서 최대 6배까지 났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쌀 농사에 집중해야 했을텐데, 18세기 중반 이후 이모작을 통해 농민들은 보리 확보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땅의 힘이 떨어지고 제때 모내기를 못하는 등의 이유로 벼의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요. 답은, 이모작을 통해 수확한 보리는 온전히 소작농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산비, 가격 차이에 대한 정보로 이런 결론을 끌어내고, 이를 다른 사료를 통해 증명하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유머 게시판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조선인은 대식가였다는 이야기도 여러가지 사료를 통해 증명해 줍니다. 오희문의 "쇄미록"은 그가 임진왜란 때 피난 생활을 일기로 기록한 책입니다. "쇄미록"에 따르면 곤궁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규경도 남자는 한 끼에 7홉, 여자는 5홉을 먹는다고 기록했었고요. 7홉은 오늘날 성인 남자 1인분의 세 배의 양이니 대식가라는 말은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먹는다는 3홉조차도 오늘날 성인 남자 1인분보다 많으니까요. 이러한 대식 습관은 선교사 들의 기록을 통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지금 세계를 휩쓰는 한국말인 '먹방'의 뿌리는 이러한 대식 유전자에서 비롯된게 아닌가 싶군요.

주식 외에도 부식, 기호 식품과 구황 작물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습니다. 부식 재료에는 여러가지 재료들과 김치, 장, 젓갈 등 다양한 식품들이 등장합니다. 기호 식품으로는 술과 담배가 주로 소개되고 있고요.
술이 약주라고 불리우게 된 유래, 조선 시대 주로 마셨던 술이 무엇인지 - 탁주와 막걸리, 소주 등 -, 주막과 술집 풍경 등 조선 시대 음주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술을 잘 마시는게 자랑거리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왜 담배가 널리 유행하였는지에 대한 설명 등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구황 작물 소개를 아주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소나무, 느릅나무, 검은 콩, 콩, 메밀 등 다양한 재료의 소개에 그치는게 아니라 실제로 당대에 먹었던 레시피를(!) 당대의 문헌을 통해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잎의 경우, 빻아서 곱게 가루내어 찐 다음 햇빛에 말려 사용하면 된다는군요. 솔잎 3홉과 쌀가루 1홉, 느릅나무즙 1되를 잘 섞어서 죽을 만들어도 되고요. 솔방울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한명회가 가루내어 먹는 방법을 임금께 올렸다고 하며, 그 외 다양한 구황 작물과 먹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음식 문화 외에 복식 문화, 주택 문화에 대한 내용도 풍성하기는 마찬가지에요. 복식 문화는 주로 당대 그림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는데, ''유행과 사치'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난하건 말건 유행을 따르는 세태 묘사를 보면, 유행이라는게 단지 세대나 돈 문제는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주택 문화에서는 온돌방의 보급에 대한 설명이 기억에 남네요. 조선 시대 온돌방이 일반적이었을거라 생각했는데 보급이 제한적이었다는 내용이라 아주 의외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궁궐에서도 16세기 후반까지 온돌방보다 마루방이 많았다니 놀랍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주된 난방 방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네요. 이러한 온돌방의 보급으로 실내 장식과 생활 방식마저 변했다는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이전 마루방에서는 중국이나 서양처럼 입식 생활을 하였지만, 온돌방을 통해 좌식 문화가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이미 온돌을 활용한 온실이 보급되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만점이 아닌 이유는 제가 흥미를 가지지 못한 주제가 다소간 포함되어 있을 뿐, 책의 내용과 완성도 모두 빼어난 좋은 책입니다. 풀 컬러에 인쇄도 깔금한 도판도 완벽하고요. 내용도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쓰여진 만큼, 다른 시리즈들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2020/01/02

Q.E.D. iff 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4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 iff 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1.5점 

전에 읽었던 2, 3권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이번 권은 다행히 괜찮았습니다. 수록작 중 "아이디"는 망작이지만 "바다의 무녀"가 꽤 괜찮은 덕입니다. 간만에 힘을 내 주었기에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수록된 에피소드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바다의 무녀"

이즈 제도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아이가시마에서 리조트 찬성파와 반대파가 첨예한 대립을 벌이는 와중에 도쿄에서 온 측량사가 살해당했다. 무녀 유나 아오이가 측량사 시체가 묻힌 섬을 예언한 뒤, 경찰은 그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유나 가문은 섬의 수리권을 가지고 있고, 리조트에 물을 나누기 힘들어 건설을 반대하고 있던 터라 더욱 의심을 샀다.
유나가 섬을 나간 적이 없다고 확신하는 동생 시오미는 가나와 토마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 토마와 가나가 섬을 방문한 뒤, 유나 가문의 수리권 고용한 변호사, 리조트 회사 직원마저 차례로 시체로 발견되는데...

이야기에 대단한 트릭은 없습니다. 시체가 있는 장소를 무녀가 알아낼 수 있던건 범인이 그녀에게 워드 프로세서로 만든 편지(뒤에 밝혀지지만 이것도 조작)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인 하마치 변호사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동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동굴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여 공정한 트릭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발자국없는 모래밭 한 가운데에서 시체로 발견된 호시즈나 씨 사건은 나름 트릭으로 값어치가 있습니다. 땅에 묻힌 장대를 진동시켜 발자국을 없앴다는 방법이 꽤 현실적이었거든요. 나뭇가지가 부러진걸 트릭과 연결시킨 과정도 좋았고요. 무녀의 전설에 나오는 초능력 - 하늘을 날고 천리안으로 모든 걸 본다 - 을 범행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돋보였어요. 세 건의 사건 모두 사람이 날지 않으면 범행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로트카, 볼테르 방정식이라는 수학 이론을 녹여낸 솜씨도 오랫만에 과거 Q.E.D의 향수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야기와 이론이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계에 있어 포식자와 피식자의 증감 속도 관계를 표현하여 '조화'를 나타낸 식인데, 조화는 '진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대화가 없어지면 싸움이 일어나고, 그게 싫어지면 대화로 돌아온다는 이 수학 이론은 무녀 유나 아오이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녀는 싸움을 끝내는게 아니라 질릴 때 까지 끌고가는게 목적이었거든요. 물의 양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이 더 이상 수리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상황을 노렸던 겁니다. 심지어 그녀의 동생마저도 섬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다했다는 마지막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조금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간만에 본 역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이디"

맷은 카지노 홈페이지를 해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후, 토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스케일은 거대합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두바이, 벨기에를 오가니까요. 그러나 해커의 두목 크래시의 정체는 물론,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가나의 변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게 영 와 닿지 않네요. 그리고 이전 작품에서 영어도 그리 잘 하지 못하는 걸로 묘사되지 않았었나요? 또 토마의 대학 동창 하산이 토마를 돕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말이죠.

그렇다면 Q.E.D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라도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해킹을 소재로 한 것 치고는 디도스 공격이 메인이라 너무 흔해빠진 정보만 나오거든요. 해커들이 비트 코인도 아니고 현금을 가지고 거래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맷이 사랑하는 아슈라의 딸 클로에가 전설의 해커 위저드라는 것도 억지스럽고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는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